헤르만 전쟁 지만지 희곡선집
하인리히 폰 클라이스트 지음, 김충남 옮김 / 지식을만드는지식 / 201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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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유럽을 휩쓰는 나폴레옹과 프랑스군의 위력 앞에 당대 독일 연방의 각국들은 추풍낙엽처럼 쓰러져갔다. 프로이센은 패퇴하였고, 합스부르크의 오스트리아 제국은 힘을 모아 대항하지만 역부족이다. 와중에 군소 제국은 눈치를 살피며 각자 살길을 모색하였다.

전란의 시국에는 거의 항상 애국주의가 득세하기 마련이다. 클라이스트도 여기에 가세하여 극단적 애국주의자로 변모한다.  

<헤르만 전쟁>은 로마 제국 초기의 역사적 사실을 기반으로 한다. 헤르만 즉, 아르미니우스는 서기를 전후하여 오늘의 독일 땅에 거주하던 종족의 족장이다. 아우구스투수 황제 시절, 로마는 영토 팽창을 위하여 경주하고 있었는데, 갈리아에서 라인 강을 건너 게르만의 땅으로 진출한다. 막강한 로마군단의 힘은 곧 게르만 종족을 휩쓸 듯 보였으나 케루스키 족장 아르미니우스(헤르만)은 교묘한 책략과 흩어진 게르만족의 단합으로 로마군단을 전멸시킨다. 그 후 몇 차례 로마군을 저지하여 마침내 로마제국은 독일 영토를 귀속시키는데 실패한다.

로마 제국의 압도적 군세를 격파한 헤르만처럼, 클라이스트는 나폴레옹 대군을 격파할 영웅이 등장하기를 갈구한다. 프로이센, 오스트리아, 기타 소국들로 분열된 독일을 응집하여 게르만의 위대성을 드높일 영웅을.

따라서 이 작품은 시대에 따라 평가가 극으로 달린다. 20세기 초 나치 독일에서 국수적 극우주의자들에게 클라이스트의 이 작품은 대단한 갈채를 받는다. 그리고 헤르만은 독일의 고대 영웅으로 칭송받는다. 그 후 이 작품은 역사극을 표방한 이데올로기 극으로 비판을 받고 만다.

확실히 클라이스트는 뚜렷한 목적의식을 갖고 집필하였다. 헤르만의 게르만과 오늘날의 게르만은 동일한 정체성을 가진 집단이 아니다. 포괄적 종족을 일컫는 게르만을 오늘날의 독일 및 독일인과 혼동하거나 의도적으로 연결 짓는 것은 실로 대단한 견강부회라 할 것이다. 그런 점에서 분명 비판의 소지는 충분하다.

다만 이 작품은 덧씌워진 선입관을 벗기고 순전한 문학의 시각으로 볼 때, 새로운 조망과 흥미로움을 독자에게 안겨 줄 수 있다고 생각한다.

헤르만의 초지일관한 종족적 주체의식과 탁월한 전술능력. 시종 강하게 나가서는 안 되며, 강유(剛柔)를 겸비한 인물로 표현해야 할 것이다.

투스넬다의 헛된 기대와 처절한 복수. 투스넬다는 벤티디우스의 접근을 경계하면서도 연정의 함정에서 헤어 나오지 못한다. 그녀는 정말로 헤르만을 버리고 벤티디우스를 따를 뜻이 있었을까?

마르보트의 우직함, 바루스의 단순함, 에긴하르트의 뛰어난 전략, 그리고 루이트가르의 충실한 직무수행 등은 로마군에 복속하였다가 헤르만의 포고에 표변하는 족장들의 태도와 어울려 다종다양한 인간 군상을 실감나게 표현한다. 사실 이러한 유의 작품은 무대에서 직접 연기와 어우러진 장면을 봐야 제대로 일터이다.

후기작답게 이데올로기 성향을 강하게 띠면서도 결코 여기에 함몰되지 않고 문학으로서의 본질을 놓치지 않는 클라이스트의 능력은 상찬할 만하다.   

*  원래 이 리뷰는 <헤르만의 전쟁 (하인리히 폰 클라이스트/배중환/부산외국어대학교 출판부)>에 대하여 썼으나, 이미 절판되어 시중에서 구할 수 없다. 여기 이 책에는 희곡 <헤르만의 전쟁 (또는 헤르만의 전투)>와 다음의 산문 소품들이 실려 있다.

독일인의 교리문답
잡지 "게르마니아"의 서문
이 전쟁에서 중요한 것은 무엇인가?
정원사의 조건
오스트리아의 구원에 대하여
조로아스터의 기도
최근의 프로이센 전쟁에서 얻은 일화
최근 전쟁에서 얻은 일화
말을 하면서 점차 생각을 완성함에 대하여
인형극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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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근대나무 2011-11-10 16: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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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은 답을 알고 있다 2
에모토 마사루 지음, 양억관 옮김 / 나무심는사람(이레) / 200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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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수년전의 일이다. 사무실로 전화 한 통이 오더니 무슨 세미나인지 학회인지에 대하여 문의하였다. 이런 일이 이따금 있는지라 별로 의아해 하지는 않았다. 그래서 제목을 묻는데 '물은 알고 있다'라고 하던가 왜 이리 귀에 낯선지 재차 묻곤 하였다. 제목도 모르는 마당에 장소와 시간 등을 내가 어찌 알겠는가. 그래서 모르겠으니 다른데 알아보라고 한 후 전화를 끊은 적이 있다.

그 후 동일한 제목의 책이 국내에 출판되어 나름대로 베스트셀러가 되었다고 들었지만 내게는 거리가 먼 이야기에 지나지 않았다. 그저 그런 많은 유형의 책들에 하나일뿐. 이제 우연한 기회에 그 속편 격이 <물은 알고 있다 2>를 보게 되었다.

200쪽 정도의 부담스럽지 않은 분량에 사진도 심심치 않게 포함되어 있고 문장도 평이하게 서술되어 있어 어렵지 않게 읽을 수 있었다. '물은 무슨 답을 알고 있을까?'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이미 전작에 상세히 나와 있을 것이다. 여기서는 그 다음에 대한 내용을 전개하고 있는 듯하다. 전작의 외연적 확장이라고 할까.

솔직히 순수한 내용은 간단하다. 물은 환경과 장소, 상황에 따라 결정구조가 달라진다. 또 좋은 말과 애정어린 말을 들으면 아름다운 결정구조로 바뀐다. 좋은 결정구조는 물을 깨끗하게 정화한다. 고로 깨끗한 물을 유지하기 위하여 아름다운 마음과 말을 사용하면 자연을 아름답게 유지하고 나아가 자연과 더불어 사는 인간세상도 평화롭고 아름답게 될 것이다라는둥...

갑자기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라는 책이 마음속에 떠오른다. 전혀 엉뚱하지만은 않다. 적용 분야는 다르더라도 그 근본원리는 동일하니까.

사실 물의 중요성에 대해서는 누구도 외면하지 못한다. 인간 몸의 70%가 물로 구성되어 있고, 한 달을 굶어도 살 수 있으나 물없이는 단 일주일도 못버틴다는 등의 내용은 이미 상식화되어 있다. 따라서 좋은 물, 깨끗한 물에 대한 갈망은 수돗물을 믿으라는 정부의 효력없는 설득을 외면한 채 무수한 생수업체가 난립하는 근본 동기가 되고 있는 것이다.

또한 철학적 의미에서 보더라도 물의 가치는 대단한 것이다. 바슐라르처럼 '촛불'의 미학에 주목한 사람도 있지만, 그 깊이와 폭에서 '물'의 철학의 진정한 전도사는 아마도 노자가 아닐까. 물은 고정된 형체를 지니고 있지 않으며 세상에 더할 수 없는 복을 베풀고 있으면서도 자신의 공덕을 자랑하지 않고 항상 낮은 곳에 임하여 있다. 그러기에 노자는 도에 가장 가까운 존재가 물이라고 하였다.

이 책의 내용 자체보다도 중간에 삽입된 물 결정구조의 사진이 보다 많은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상류와 하류의 결정구조 차이가 말해주는 것, 긍정적인 말과 부정적인 말이 물에 미치는 차이 등 물은 결코 죽은 존재가 아니라 살아 있으며, 인간이 자연에 무엇을 말하고 있으며 발생한 문제에 대한 해답을 알고 있다는 것을.

큰 기대를 갖고 볼 정도는 아니지만 가볍게 훑어본다면 조금이나마 의식에 신선한 자극이 될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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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근대나무 2011-11-09 16: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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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재 신채호 평전
김삼웅 지음 / 시대의창 / 200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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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고려중기 김부식이 묘청의 난을 진압한 것을 가리켜 '조선 일천년래의 일대사건'이라고 표현하고, 우리 고대사 연구를 통하여 기존의 식민사관을 통렬하고 공박하였던 사학자 단재 신채호 선생의 평전이다. 종전에 이러한 류의 책이 아주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본격적인 평전은 거의 최초라고 해야 할 것이다.

한때 역사학도를 꿈꾸었던 내게 단재는 하나의 우상이었다. <조선상고사>를 읽으며 그 혜안과 웅대한 시각, 사료의 한계 속에서도 탁월한 분석과 예리한 비평으로 통념을 갈파하고 올바른 역사를 구축하고자 노력한 그 정신에 깊이 감복하였었다. 하지만 그의 생애와 사상세계에 대해서는 아는바 드물었다. 이러한 연유로 평전을 펼쳐들게 되었다.

단재는 사학자이기에 앞서 뛰어난 유학자임을 알고 깜짝 놀랐다. 백암 박은식이 유학자라는 사실은 알고 있었지만 단재도 그럴줄은. 보수적인 성균관박사가 어떻게 신학문을 접하고 신사상의 보급에 노력하고 사상의 방향을 아나키즘까지 몰고 갔는지 사상의 편력이 흥미롭고도 놀랍기 그지없다. 또한 '황성신문'과 '대한매일신문'의 주필을 역임하여 항일 언론의 선봉장이었다는 사실도 간과해버렸던 사실이다.

상해 임시정부에 잠시 참여하였다가 위임통치를 주장했던 이승만이 대표가 되고, 외교론의 유약한 모습을 보고 격분하여 뛰쳐나오는 그 순혈한 열정. 왜놈에게 고개숙이기 싫어 뻣뻣하게 세수하여 옷을 적시는 일화는 다시 보아도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 수 밖에. 단재의 무장투쟁론이 보다 현실적인 방책임은 후에 임시정부가 백범 김구의 주도하여 이봉창, 윤봉길 등 의거에 나서며 체재를 일신하는데서도 엿볼 수 있다. 단재의 말마따나 외세의 처분에 민족의 운명을 언제까지 기다릴 것이며, 일제의 압제하에 어느 세월에 실력을 양성할 수 있을 것인가?

단재의 삶은 치열한 언론인, 사학자, 독립투사의 소임이 수레바퀴의 축을 구성하여 최후까지 끌고 있다. 본문 중에 소개되었던 <천고>라는 잡지의 서문은 감격스럽기 그지없다. 의열단을 위하여 집필한 '조선혁명선언'은 그의 아나키즘을 표출하는 투쟁서일 뿐만 아니라 '3.1독립선언문'을 능가하는 명문이자 가슴절절이 피를 끓게 만드는 혈서이다. 이제 독립투쟁은 '혁명'으로 승화되고 있는 것이다.

유일한 일가붙이였던 조카딸이 친일파와 결혼하려고 하자, 어려움을 무릅쓰고 일시 귀국하여 설득하다가 안되자 단호히 절연을 선언한 대쪽같음. 임종을 목전에 두고서도 친일파 친척에게 의지하기 싫다고 출감을 거부하고 차디찬 일제의 감옥에서 순국한 절개. 과연 우리시대에 단재와 같은 이가 다시 있을 것인가 의문스럽다.

저자의 말마따나 이렇듯 위대한 인물의 전집이 제대로 갖추어지지 않았다는 것은 민족의 수치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는 여전히 민족의 해방을 위해 목숨을 바친 분들에 빚을 갚지 못하고 있다. 독립투사의 후손은 대다수가 사회 하층에서 어렵사리 삶을 영위하고, 친일분자의 자손은 사회 지배층이 되어 떵떵거리고 위세를 부리며 사는 작금의 현실을 단재가 알며 얼마나 기가 막힐런지.

평전답게 단재의 삶의 궤적을 하나하나 좇기 보다는 그의 대외 투쟁사를 중심으로 저자는 글을 전개하고 있다. 어쩌면 개인사에 관한 자료가 너무 빈약한데서 연유하지는 않을까 싶다. 때로는 중언부언 반복하는 것도 저자의 안타까움의 토로로 받아들여진다. 본문에 소개된 단재의 작품과 저작 인용문을 뺀다며 부피가 대폭 줄어든다는 것이 이걸 짐작케 해준다.

저자의 뼈아픈 지적대로 '체 게바라'는 동경하여도 '단재'는 고리타분한 존재로 여기는 현세태, 그것은 우리가 아직 단재의 진면목을 모른다는 사실을 역설적으로 표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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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근대나무 2011-11-09 16: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2005.10.12 마이페이퍼에 쓴 글을 이동
 
가르강튀아.팡타그뤼엘 대산세계문학총서 35
프랑수아 라블레 지음, 유석호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0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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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르강튀아와 팡타그뤼엘>이라고 프랑스의 중세 우화내지 민담소설격이라고 해야 할까. 솔직히 미하일 바흐찐의 연구서를 읽기 위한 전초작업이라고 해야겠다. 내용은? 글쎄, 터무니없고 황당하고 적나라하다. 작품연도순은 팡타그뤼엘이 먼저지만 내용순으로는 가르강튀아가 선행한다. 아무래도 팡타그뤼엘의 아버지니까.

섣불리 펼치고 도전하는 무모한 인간은 대번에 미끄러져서 코가 깨지기 딱 쉽다. 이 작품을 온전히 이해하려면 중세시대에 빠삭한 전문가가 아니면 도저히... 수많은 각주를 읽다 보면 도대체 내가 문학작품을 읽는건지 아니면 중세의 풍속학술도서를 보는지 도저히 감이 오지 않는다. 작가의 탁월한 지식에 경이감을 감추지 못하면서 숨은 비경을 진작부터 알아차린 선구자에게도 존경의 념을 금할 수 없다.

대체적으로 난해한 편은 아니고 허황하면서도 우스꽝스럽지만 일면 교훈적인데 문제는 상징과 은유적 표현이 너무 많아서 각주를 빠뜨리면 수박 겉핥기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흠, 그렇다고 두 번 읽기는 싫은데.. 하여튼 읽고 나서 뒤돌아보니 흔히 번역되는 작품에 속하지 않는 이유가 다 있었다. 단순히 불어불문을 잘 안다고 해서 대뜸 뛰어들었다간 유희의 함정에서 영원히 헤어나지 못할테니.

등장인물의 이름부터 범상치 않다. '커다란 목구멍'이라는 의미의 가르강튀아, '완전히 목마른'이라는 뜻의 '팡타그뤼엘'은 오히려 점잖은 편. 거기에 크기와 수량의 뻥튀기는 점입가경이다. 툭하면 수만개는 예사이며, 물통도 작은게 수백리터들이니,원. 압권은 '팡타그뤼엘'의 진술자이자 시종이 그의 입속 세계를 탐험한 장면이다. 입안 이쪽과 저쪽 사이는 완전히 다른 세계이며, 목구멍 안쪽으로도 거대한 대도시가 우뚝우뚝 솟아났다나. 게다가 며칠전에 먹은 마늘냄새로 뱃속에서 전염병이 되어 수많은 인명이 쓰러지게 되었다니 이렇게 황당함은 처음이다.

중세를 배경으로 했다는 점과 허풍스러움의 측면에서 움베르토의 '바우돌리노'를 연상시키지만 좀더 시사비판적이고 해학적인 면에서 라블레가 한수 위라는 생각이다. 가톨릭교리의 굴레에 갇혀있던 중세인들에게 라블레의 이 작품들은 어떠한 충격과 파격을 선사했을까? 풍자와 해학은 직설적으로 비판을 하기엔 위험한 시기에 이를 극복하는 하나의 현명한 방편이다. 마녀사냥이 난무하고 종교의 폐해가 절정을 달하던 때, 세상사를 한낱 희화화하면서 진실로 세상을 진무하는 현실은 하찮은 것에 지나지 않으면 인간 본연의 자유분방과 감정표출의 소중함을 은연중 깨닫게 되지 않을까. 엄숙주의자에게 음란하고 지저분하고 품위없게 보이는 그것이 민중들의 솔직한 삶의 태도라는, 그래서 오늘날 더욱 그 의의가 높아지고 있는 이 작품을 번역하고 출판한 이들에게 고마움을 느낀다. (이러한 유형의 책이 얼마나 팔릴지는 우리 모두 대충은 예상하고 있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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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근대나무 2011-11-09 16: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2005.10.30 마이페이퍼에 쓴 글을 이동
 
만하몽유록 - 한국학연구소 학술총서 2
김광수 지음, 서신혜.박종훈 옮김 / 한양대학교출판부 / 200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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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업성 짙은 베스트셀러와 자기계발,어학 등 실용서 외에는 신문지면 상에서 책 광고는 본 지가 오래되었다. 그래서였는지 대학교출판부들이 연합하여 전면광고를 낸 것을 죽 훑어보니 제법 대중이 관심을 기울일 책들여 여럿 있었다.

그 중에서도 나의 눈을 먼저 끌어당겼던 것이 이 <만하몽유록>이다. '몽유록'이면 꿈에 의탁하여 작가의 소망을 거침없이 피력하는 소설계통인데. 그냥 한 번 읽고 싶다는 생각이 불끈 솟음쳐서 도서관으로 달려갔다, 마침 있다.

작가 김광수는 19세기말 20세기초를 살았던 인물이다. 삼십대 초반에 사망했으니 요절이라고 칭할만하다. 게다가 이 작품을 쓴게 불과 이십대 중반이라니 갑자기 나는 도대체 뭔가 하는 자괴감이 들기조차 한다.

그냥 조선시대의 고전소설이겠거니 하고 가볍게 집어든 게 사실은 1907년작이니, 이게 도대체 고소설인지 아니면 신소설에 포함되는지 난감하다. 아울러 옛 묵향을 느껴보려던 계획도 차질이 생긴 듯하다.

도대체 조선말 시골선비가 순한문으로 기록한 글에서 무엇을 기대할 수 있단 말인가. 하여튼 대출을 해왔으니 어떻게 끄적거렸는지 보기나 하자. 이런 심정으로 읽어나가기 시작했다.

'박람강기'니 '박학다식'을 들어봤어도 이러한 지독함은 처음 겪는다. 이런 젊은이가 언제 사서삼경과 제자백서, 시문 등을 두루 익혔는지 기가 막히다. 도처에 순수한 인용문과 패러디가 넘실거린다. 도대체 한문지식이 없는 사람은 제대로 음미도 하지 못하겠다. 본문보다 각주 읽기에 급급한 처지가 되버렸으니.

사실 고소설의 마지막 불꽃이 될 것인가 아니면 시대착오의 시골뜨기의 자기만족인지 우려했는데, 장이 넘어가면서 역시 시대상은 속일 수 없음을 발견한다. 여자가 대학에 가고 소위 개화되는 실정, 국제정세에 대한 지식, 패망해가는 조국에 대한 울분을 곳곳에서 피력한다. 그래서 옥황상제에게 상소를 올리나 이미 정해진 운세를 하늘이라고 어이하리오.

신선의 말과 배를 빌려타고 중국 각처의 사적과 명승지를 밟으며 감회에 젖어 시를 읊는 작가에게 능동적으로 접근하고 속여서 마침내 사랑을 얻는 옥낭에게서 진취적 여성상을 잠시 볼 수 있으나 곧 한계에 직면한다.

저자는 천성적 시인이었나 보다. 이리 다양한 형태의 시가 많이 들어간 소설류는 처음이다. 한시 한 구절 한 구절을 천천히 음미해야 참맛을 느끼겠지만, 천학한 나는 그저 한글 번역만을 스쳐지나갈 뿐이다.

몸이 약했다고 한다. 그래서 그 시기의 다른 지식인들이 선택한 길을 그는 걸어갈 수 없었을지도 모른다. 나약함에 몸을 떨었는지도. 그렇지만 이 책에서 문학의 향기가 배어나오지 않는다. 작가가 토해내고 싶은 시대적 격정은 몽유록이라는 형식과 순한문이라는 굴레를 벗어나지 못했다. 그래서 안타까움을 느낀다. 감동을 받지 못함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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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근대나무 2011-11-09 16: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2005.11.3 마이페이퍼에 쓴 글을 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