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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트하우스
욘 포세 지음, 홍재웅 옮김 / 새움 / 2020년 1월
평점 :
욘 포세의 초기 소설이다. 앞서 읽은 <저 사람은 알레스>보다 먼저 시기의 작품임에도 포세의 특징적 작품 요소는 여기서도 명확히 드러난다. 집요할 정도로 반복적 문장의 사용, 마침표 대신 쉼표의 선호, 화자의 계속적 변화. 반면 자주 보이는 마침표의 존재, 마침표 없는 문장의 부재, 화자 교체의 느슨함에서 아직 그의 글쓰기 스타일이 확립되지 않았음도 엿볼 수 있다.
나는 더 이상 밖에 나가지 않는다. 불안감이 엄습하여 나는 밖에 나가지 않는다. 이 불안감이 엄습해 온 것은 바로 지난 여름이었다. 나는 적어도 10년은 보지 못했던 크누텐과 다시 마주쳤다. 크누텐과 나, 우리는 늘 함께였다. 내게 불안감이 엄습해 왔다. 그게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그 불안 증세로 내 왼팔, 내 손가락이 쑤신다. 난 더 이상 밖에 나가지 않는다. (P.8)
2백 면 남짓한 작품에서 위와 동일하거나 유사한 문장의 반복이 몇 회나 이루어졌을까. 작품의 전반적 분위기는 불안감에 휩싸여 있다. 읽는 이를 시종일관 움츠리고 불안하게 만드는 소설은 함순의 <굶주림> 이후 처음이다. 독자는 화자를 불안하게 만드는 원인에 궁금증을 품게 되며, 작가는 쉽사리 독자에게 이야기를 풀어놓지 않는다. 마치 되풀이되는 문장들의 폭격을 감내하며 버틸 수 있는 독자에게만 찔끔 조금씩만 풀어놓겠다는 듯이.
언뜻 매우 재미없고 따분하며 지겨울 것 같지만 의외로 독서는 제법 속도감을 지니며 술술 진행된다. 그것은 독자가 곧 화자의 불안감에 전염되며 그와 자신을 동일화하기에 가능하다. 나는 10년 만에 고향 친구를 만나지만 반갑지 않다. 오히려 그로 인해 내게는 불안감이 엄습한다. 사회 부적응자인 화자의 오롯한 개인적 문제일까? 아니면 그와 나 사이에 독자는 모르는 무슨 일이 있었던 영향일까? 독자는 궁금하다. 이 궁금증의 일단을 아내의 언행을 향한 크누텐의 생각을 통해 드러낸다.
크누텐은 확실히 의처증이 심한 인물이다. 아내가 화자와 처음 인사하는 장면에서조차 그는 아내를 의심의 눈으로 바라본다. 아내가 배를 타고 나가서 협만에서 화자와 함께 낚시하는 걸 바라보는 크누텐은 초조하고 안절부절못한다. 이처럼 그는 아내의 일거수일투족을 화자와 부정한 만남을 가지려는 의도로 해석한다. 아내는 다른 남자에게 항상 그렇다고 그는 생각한다.
그렇다고 크누텐의 아내가 전적으로 정숙하다고 하기에도 찝찝하다. 그녀는 분명히 크누텐의 의심을 사기에 충분한 행동을 한다. 화자에게 접근하고 신체적 접근을 하는 건 그녀의 직접적이고 의도적인 행동이다. 남편이 그것을 의식하고 의심하며 불안한 심리에 빠지리라는 것을 알면서 말이다. 도대체 이 부부는 어떤 관계인 걸까.
나는 어찌할 바를 몰라 길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그러자 크누텐은 곧장 길을 따라 걸어가 버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크누텐은 지금은, 이러는 건 아니야, 그냥 가는 게 좋겠어, 모든 걸 아니까, 분명 우릴 봤을 거야, 이건, 지금은 반드시 자리를 떠야 해, 어디든 떠나 버리는 거야, 그냥 그럴 수는, 반드시 그럴 수 있어야 해, 그런 모든 것은, (P.136-137)
화자는 크누텐이 자신을 만나는 걸 두려워하였을 것이라고 말한다. 확실히 크누텐은 화자를 만나는 걸 탐탁지 않아 한다. 아니 고향에 방문하는 걸 꺼린다. 무도회의 밤에 크누텐의 아내는 집에 가길 내키지 않아 하고 화자와 함께 시간을 보내고 싶어 한다. 크누텐은 어둠 속에서 이것을 지켜보며 다음 날 아침 일찍 떠나 버린다. 화자를 보았지만 외면한 채. 화자와 크누텐, 그리고 독자는 혼란과 불안에 휩싸인 채 두 사람의 헤어짐을 지켜볼 뿐이다.
오늘 아내가 그 친구를 바라보던 눈빛, 내가 알았어야 했는데, 늘 이런 식이지, 크누텐은 길가에 서서 우리를 쳐다보고 있다, 그때, 그 무도회에서, 그 여자아이한테, 난 아무런 뜻도 없었어, 내가 무슨 잘못을 저질렀는지 몰랐다고, 그건 그냥 그렇게 됐던 거지, 아무것도 아니었어, 하고 그는 생각한다. (P.153)
1부에서 포세는 구체적인 이야기를 꺼내지 않는다. 더 깊숙하고 은밀한 이야기를 펼쳐 보이는 건 2부에서다. 2부는 주로 크누텐이 화자 역할을 담당하는데, 그와 ‘나’의 만남부터 무도회를 거쳐 떠남에 이르기까지를 크누텐의 시선과 생각으로 독자에게 들려준다. 비로소 독자는 보다 균형 잡힌 시각으로 ‘나’와 크누텐의 사이를 헤아려 볼 수 있는 기회를 얻는다. ‘나’와 서로 호감을 느끼고 있던 여자아이, 그 여자아이와 크누텐 사이에 모종의 사건이 벌어졌고 그것이 크누텐과 ‘나’ 사이를 멀어지게 하고, 크누텐이 고향을 떠나 돌아오길 꺼리는 까닭임을.
독자는 문득 의문을 품게 된다. 작중에서 ‘나’는 약간은 사회 부적응자지만, 크누텐을 만난 때부터는 아예 자폐아처럼 집 밖에 나가기를 거부하며 틀어박혀 지낸다. ‘나’가 하는 유일한 행위는 글쓰기며, 그것은 자신에게 엄습하는 불안감을 달래기 위한 급박한 조치다. 우리는 ‘나’를 동정하고 딱하게 여겨야 함은 당연하다. 하지만 이제 누가 더 불쌍하고 가련한 삶을 살고 있는가 반추해보면 크누텐이 더 낫다는 확신이 없다. 그는 외견상 정상적인 삶을 지탱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와 그의 아내의 관계, 아내를 향한 의심과 불신의 눈초리. 이를 못 견뎌 하고 오히려 엇나가는 아내의 행동을 종합해 볼 때 그가 ‘나’보다 더욱 심한 사회 부적응자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녀가 당신 그렇게 모든 일을 꺼려 하면 안 돼, 그러면 안 된다고, 당신이 오랜 세월 보지 못한 사람들을 마주친들 아무런 문제 될 게 없어, 어째서 그 사람들과 말을 섞게 되는 걸 걱정하는 거야, 어떤 사람도 그 일을 그렇게나 걱정스러워하진 않아, 라고 말한다, 크누텐은 대답을 하지 않는다, (P.179)
엄습하는 불안감에 대응하는 방법으로 ‘나’는 사회로 향한 문을 닫아걸고 글쓰기에 매진하지만, 크누텐은 평온과 평화를 찾아 떠나고 도망간다, 자신이 영원히 편안함을 누릴 수 있는 집으로. 그리고 크누텐의 아내는 죽음을 선택한다.
피오르가 뿜어내는 적막한 자연의 분위기, 외진 시골 마을의 토속적이며 폐쇄적인 마을의 분위기, 청소년 시절 우정과 사랑의 공간이었던 보트하우스는 훗날 관능과 불륜의 위험스러운 공간으로 변모한다. 포세의 메시지가 특별한 것이 아니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그가 들려주는 방식, 즉 독특한 문장 기법과 지속적 반복 기법은 독자에게 삶은 쉼 없이 계속되며 우리네 삶은 새롭기보다는 반복이 본질임을, 그 속에서 삶의 실체를 깨닫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