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중세 소극선 지만지 희곡선집
작자미상, 정의진 옮김 / 지식을만드는지식 / 201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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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록 작품>

빨래통

땜장이

구두 수선공 칼뱅

파테와 타르트

 

굉장히 생소한 책이다. 도서관에서 우연히 집어 들게 되었는데 무척이나 흥미로울 것 같았다. 먼저 소극이란 희극의 한 유형인데, 작품해설을 인용하면 아래와 같다.

 

프랑스 소극의 원제목에는 소극(farce)’이라는 명칭이 항상 붙어 있다. 8음절 운문으로 쓰인 소극은 대부분 300~500행으로 구성된 짧은 단막극이다. (P.116)

 

소극은 군주, 귀족과 영웅 같은 상류 계급이 아니라 중세 서민들의 일상생활을 소재로 다룬다. 서민들의 적나라한 삶이 소극 속에서 여과 없이 노출된다는 점이 흥미와 당혹감을 동시에 안겨주는데, 거짓말로 상대방을 속이는 행동, 부부간에 욕설과 폭력을 직설적으로 주고받는 행동 등이 나타난다. 비천한 소재와 배경, 비속어의 대사, 비루한 인물 행동 등으로 인해 한때는 천대와 괄시를 받기도 하였다고 한다.

 

프랑스의 고전과 현대 희극의 큰 줄기를 이해하려면 그 근간이 되는 중세 소극에 대한 최소한의 지식이 필요하다. (P.111)

 

대중문학에 대한 인식이 높아진 현대의 독자들에게 소극은 현학적이거나 젠체하지 않고 솔직한 서민들의 삶을 들여다볼 수 있는 계기가 되기에 더 부담 없이 다가온다. 분량 면에서는 단편이나 콩트, 코미디로 보자면 슬랩스틱 유형이라고나 할까.

 

<빨래통><땜장이>는 부부간의 주도권 다툼이 팽팽하다. 옛날이라고 하면 무조건 남존여비를 떠올리지만, 이들 작품을 볼 때 최소한 서민사회에서 여성의 기세는 남자에 전혀 꿀리지 않는 것을 알 수 있다. 남편에게 욕설을 날리는 것은 예사고, 집안일을 마구 부려 먹는다거나 심지어 폭력도 행사한다.

 

(아내) 없어? 있어, 있다니까! / (남편의 따귀를 때리며) / 이게 어디서 까불어!

(자키노) 그만해! 하면 되잖아. / 그래, 당신 말이 맞아. / 다음부터 주의할게. (P.16, <빨래통> 3)

 

<빨래통>에서는 남편이 잔꾀를 부려서 아내의 순종을 끌어내 결국 우위를 차지하는데, 문득 <베니스의 상인>이나 <말괄량이 길들이기>가 연상된다. 반면 <땜장이><구두 수선공 칼뱅>은 아내의 승리로 끝난다. 아내에게 몽둥이찜질을 당하고, 꼼짝도 하지 않는 내기에서 진 땜장이 남편, 옷 한 벌 사달라는 아내의 간청에도 노래만 부르면 외면하다가 지갑을 탈탈 털린 칼뱅. 비록 과장이 심하지만 보다 현실적인 가정생활의 모습이 아니겠는가. <파테와 타르트>는 제과점 주인 부부를 속여서 파테를 얻어먹은 두 거지가 타르트마저 속여 먹으려다가 들통 나서 신나게 두들겨 맞는다는 내용이다. 거짓말과 속임수는 이 작품은 물론 <구두 수선공 칼뱅>에서처럼 목적 달성을 위해 일상에서 흔하게 일어나지만 거짓이 드러나면 곤욕을 치르게 된다. 칼뱅의 아내는 남편을 무사히 속였고 거지들은 실패하였다.

 

소극은 단독 공연보다는 종교극의 막간에 또는 축제나 장날에 사람들을 모으기 위한 방편으로 상연되었다고 한다. 길이의 제약, 소재의 서민성, 지나칠 정도의 희극성이 요구되었던 까닭이다. 셰익스피어의 희곡 작품 중에 극 전체의 내용과 성격에 무관한 짤막한 상황극이 삽입되는 사례가 있는데, 아마 이것도 비슷한 성격으로 보인다. 이 책의 <땜장이><파테와 타르트>의 끝 장면은 이러한 성격을 잘 보여 준다. 즉 이제부터 한바탕 신나게 놀아 보자는 대사로 공연을 끝맺는다.

 

(땜장이) (관객에게) / 여기 계신 여러분도 / 와서 같이 한잔하죠. / 여성의 승리를 위해 / 다 같이 축배를 들죠.

(아내) 그럽시다. 그거 좋죠.

(남편) 맘껏 먹고 마십시다. / 다들 어서 오십시오. / 남녀노소 직업 불문 / 위아래 가리지 말고 / 술통이 바닥날 때까지 / 신나게 놀아 봅시다. (P.43-44, <땜장이> 4)

 

(거지2) (관객에게) / , 우리가 말입니다, / 몽둥이로 맞았지요.

(거지1) 그래요, 어쨌든 이거 / 어디 가서 막 떠들고 / 다니면 곤란합니다. / 자 한판 놀아 봅시다! (P.108-109, <파테와 타르트> 19)

 

이러한 소극 작품을 문학의 예술성 기준에서 보자면 형편없는 것으로 치부할 수 있지만, 우리네 삶이 항상 우아하고 고상하지 못한 게 현실 아닌가. 차라리 B급 장르로 폄하되더라도 중세 프랑스 서민의 삶을 당대는 물론 현대 관객들이 거리낌 없이 낄낄거리며 즐길 수 있다면 자체로서 의의는 작지 않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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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기여 잘 있어라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79
어니스트 헤밍웨이 지음, 김욱동 옮김 / 민음사 / 201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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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 표제도 그렇고, 1차 세계대전을 배경으로 하고 있으며, 남자 주인공이 전투에서 부상을 당하였다든지 자발적으로 탈영하였다는 사실을 고려할 때 이 작품은 반전 소설이다. 전쟁을 반대하고 무의미성을 토로하는 문장이 작중 인물에 의해 반복적으로 표출되는 점도 마찬가지다. 그렇다고 반전 테마가 이 작품의 주제라고 보기도 모호하다.

 

소설 전체를 이끌어가는 서사적 힘은 누가 뭐래도 남녀 주인공 프레더릭과 캐서린의 사랑이다. 삶과 죽음이 교차하는 전장에서 가장 긴요하고 절박한 것은 차라리 사랑이 아니겠는가. 가벼운 장난삼아 시작했던 두 사람의 만남은 서서히 진지하게 변하고 불현듯 떨어질 수 없는 사랑으로 자리 잡는다.

 

미국인과 스코틀랜드인이 이탈리아에서 전쟁에 참여한다는 설정은 작가 자신의 체험에서 비롯된 것이니만치 소설 상의 설정이라고 치부하기 곤란하다. 프레더릭이 이탈리아군으로 참전한 까닭은 작중에서 밝혀지지 않지만, 그가 만사에 심드렁한 태도를 보이는 점은 확실히 알 수 있다. 그것은 사랑에 대한 태도에서도 마찬가지다.

 

군종신부와의 대화에서 단호하게 사랑에 무관심함을 드러냈던 프레더릭. 그의 생각은 캐서린과의 관계 진전에 따라 사랑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가치로 자리매김함을 볼 수 있다. 사랑은 생명과 상통한다. 죽음과 직결되는 전쟁과 상극이다. 사랑과 전쟁, 생명과 죽음이 작중에서 팽팽한 긴장감을 불러일으킨다고 볼 때 반전사상을 표면에 내세우지 않았기에 오히려 더욱 반전에 대한 독자의 공감대를 형성한다.

 

나는 이미 그 일에서 손을 뗐다. 나는 그들 모두에게 행운을 빌었다. (P.361)

 

전쟁에 대해서는 잊을 작정이었다. 나는 단독 강화조약을 맺은 것이다. (P.376)

 

프레더릭은 원래 이 전쟁에 무심하다. 3국 출신이니만치 그에게 있어 전쟁의 대의명분은 전혀 다가오지 않는다. 그게 본디 프레더릭의 성향인지 아니면 이 전쟁의 공허함을 일찌감치 깨달아서인지 알 수 없으나 그가 명분과 이상보다는 현실과 실질을 더 중시하는 것만은 분명함을 알 수 있다. 오죽하면 승전과 패전 전망보다 수면을 더 믿는다고 할 정도다.

 

신성이니 영광이니 희생이니 하는 공허한 표현을 들으면 언제나 당혹스러웠다. 이따금 우리는 고함 소리만 겨우 들릴 뿐 목소리도 잘 들리지 않는 빗속에서 그런 말을 들었다. 또 오랫동안 다른 포고문 위에 붙여 놓은 포고문에서도 그런 문구를 읽었다. 그러나 나는 신성한 것을 실제로 본 적이 한 번도 없으며, 영광스럽다고 부르는 것에서도 조금도 영광스러움을 느낄 수 없었다. (P.290)

 

프레더릭의 전선 이탈은 그런 공허함의 극치를 퇴각하는 장교를 총살하는 이탈리아 헌병과 맞닥뜨리면서 발생한다. 실제 전투를 치러보지도 않은 자들이 이탈리아군은 결코 후퇴하지 않는다면서 즉결 처단을 하는 참담하고 어처구니없는 상황. 그는 깨끗이 손을 떼버린다.

 

프레더릭은 몰라도 캐서린에게 그는 운명적인 사람이다. 첫 만남 이후 그녀는 프레더릭에게 급속도로 빠져든다. 장난삼듯 가벼운 태도의 그와 달리 그녀는 곧바로 그에게 사랑의 감정을 표현한다. 사실 소설 전체적으로 프레더릭을 향한 캐서린의 사랑은 순종적이고 헌신적인 동시에 지고지순하다. 그녀는 프레더릭과의 사랑에 행복을 느끼고 자신의 것은 요구하지 않는다. 두 사람의 사랑은 지극한 합일에 이른다. 더 무엇을 바랄 것인가.

 

호사다마라고 하지 않는가. 죽음을 무릅쓰고 국경을 넘어가 스위스에서 호젓하지만 단란한 생활을 즐기던 그들. 사랑의 축복이라고 할 출산은 삽시간에 오히려 사랑의 비극으로 이어진다. 이 대목에서 프레더릭은 삶의 의미와 죽음의 필연성을 절실하게 깨닫는다. 그것은 곧 그가 인생의 무게를 알게 되었다는 점이다. 과거에는 미처 알지 못하였고 실감하지 못하였던 그것. 작가는 작품의 서두부터 마지막 장면까지 반복해서 독자에게 이를 상기시킨다.

 

[군종신부]는 내가 모르는 것, 일단 배워도 늘 잊어버리는 것을 언제나 알고 있었다. 나는 나중에 그것을 깨달았지만 그때는 그것을 알지 못했다. (P.28)

 

인간이라면 언제나 생리적으로 덫에 걸려 있다는 느낌이 들지.” (P.221)

 

인간은 죽는다. 그것이 무엇인지 몰랐어. 그것에 대해 배울 시간이 없었던 거야. 경기장에 던져 놓은 뒤 몇 가지 규칙을 알려 주고는 베이스를 벗어나는 순간 공을 던져 잡아 버리거든. 아이모처럼 아무 까닭 없이 죽이거나, 또는 리날디처럼 매독에 걸리게 하지. 하지만 결국에는 모두 죽이고 말지. 그것만은 분명해. 결국 살아남는다 해도 종국에는 죽임을 당하는 거야. (P.496)

 

작가에게, 프레더릭에게 그동안 전쟁과 죽음은 추상적이고 비개인적이며 머나먼 현상에 불과하였다. 두 사람의 도망병을 향한 사격, 아이모의 허무한 죽음 목도. 그리고 캐서린과의 사랑, 미래에 대한 희망, 갑작스러운 사별 등 일련의 체험을 통해 프레더릭은 전쟁과 죽음에 대한 추상적 의미의 인식에서 벗어나 보다 직접적이고 구체적 의미를 발견한다. 이처럼 개인적 깨달음에서 사회적 의미 발견에 도달함으로써 이 작품은 가장 뛰어난 반전문학이 된 것이다.

 

간호사들을 내보내고 문을 닫고 전등을 꺼도 소용이 없었다. 마치 조상(彫像)에게 마지막 작별 인사를 하는 것 같았다. 잠시 뒤 나는 병실 밖으로 나와 병원을 뒤로 한 채 비를 맞으며 호텔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P.503)

 

소설의 마지막 단락은 쓸쓸한 동시에 차라리 덤덤하다. 사랑하는 이와 영원한 작별을 고하고 싶은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마는 현실로 다가오면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제아무리 소리높여 통곡할지언정 떠나간 이가 다시 돌아올 리 없다. 인간은 필멸의 존재가 아니던가. 땅바닥에 주저앉아 울부짖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프레더릭의 마음 깊숙이 캐서린과의 사랑이 커다랗게 차지하고 있음을 독자는 모르지 않는다. 슬픔을 곱씹을지언정 슬픔에 익사할 수 없고 바람직하지도 않다. 남은 사람은 어쨌든 현실을 살아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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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주론 / 만드라골라 / 카스트루초 카스트라카니의 생애
니콜로 마키아벨리 지음, 이종인 옮김 / 연암서가 / 201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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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드라골라>를 수록한 책을 찾다 보니 <군주론><카스트루초 카스트라카니의 생애>는 재독을 하게 되었다. 기존 읽은 책과 차이점은 이 책은 영역본을 저본으로 삼았다는 것이며, 세 편을 한 권에 담고 있어 소위 가성비가 높다. 본 목적인 <만드라골라>에 앞서 <군주론><카스트루초 카스트라카니의 생애>를 다시금 일별해 본다.

 

옮긴이는 포르투나와 비르투를 번역하지 않고 독음을 그대로 사용한다. 다른 번역본도 그런 경우가 있으니 새삼스럽지는 않은데, 마키아벨리가 포르투나와 비르투를 여러 가지 용례로 사용하고 있어서다. 특히 군주가 갖춰야 할 비르투의 조건이 도덕적 선악을 넘어설 것을 그가 요구하고 있기에 논란이 생긴다. 마키아벨리의 사고를 이해하려면 그의 인간관을 파악해야 한다. 성선설과 성악설, X 이론과 Y 이론 등의 관점에서 볼 때 마키아벨리는 철저히 성악설의 견해를 밝힌다. 그가 현실에서 파악한 인간의 속성은 대체로 부정적이고 선하지 않다. 현실 정치를 할 때 현실 인간에 기반하여 논의하는 것은 당연하다. 마키아벨리가 인간 본성에 대하여 성선설을 믿었다면 전혀 다른 주장을 펼쳤을 것임은 확실하다.

 

인간은 감사할 줄 모르고, 변덕스럽고, 거짓말하고 기만하려 하며, 위험은 피하고자 하고 이득엔 탐욕스럽다는 것이 타당한 일반 원칙이기 때문이다. (P.109, 17)

 

왜냐하면 인간은 선을 강요당하지 않는 한, 언제나 악한 쪽으로 기울어지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P.144, 23)

 

카스트루초 카스트라카니는 체사레 보르자보다 더욱 이상화된 군주 모델에 가깝다. 체사레는 아버지 교황의 힘을 빌려 세력을 키우고 군주로서 확고한 토대를 세우기 전에 거꾸러지고 말았다. 카스트루초는 다르다. 그는 맨땅에서 맨손으로 왕업을 일구었다. 그가 성취해 낸 업적과 명성은 체사레보다 훨씬 뛰어나고 높다. 피렌체와의 전쟁에서 유리한 고지를 선점하기 위해 우호적인 세라발레의 군주 만프레드를 살해하는 장면 등을 보면 확실히 마키아벨리가 감탄할 만하다. 물론 독자는 카스트루초의 생애에서 주요 사실을 마키아벨리가 조작하였음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자신의 목적에 부합하도록 그는 카스트루초의 삶을 이상화시켰다.

 

<나의 친구 마키아벨리>에서 마키아벨리가 희극을 썼고, 그것이 당대에 매우 인기작이었다는 내용에 의아하였다. 아무리 마키아벨리가 가볍게 쓴 글이라고 하더라도 무심하게 넘겨지지 않는다. <만드라골라>는 코미디 요소를 담뿍 담고 있다. 모든 희극은 자체로 풍자 정신을 지닌다. 이 작품은 무엇을 풍자하고 있는가? 물론 당대의 피렌체, 나아가 이탈리아 사회상이다.

 

실은 이 이야기는 정말 경박합니다. 그래서 이 이야기가 유익하지 못하다고 생각하시는 현명하고 위엄 높으신 분들께는 이렇게 변명을 드릴까 합니다. 작가는 이런 하찮은 생각들로 머리를 굴리며 자신의 비참한 삶은 좀 더 즐겁게 만들려는 것이라고요. 그렇지 않으면 작가는 어디로 고개를 돌려야 할지 모르니까요. 그는 이런 것이 아닌 다른 것으로써 또 다른 능력을 보여줄 기회를 차단당했습니다. 게다가 그의 노력에 대한 보수를 기대할 수가 없으니 이렇게 할 수밖에 없는 일이죠. (P.165, 프롤로그)

 

프롤로그를 보면 우리는 마키아벨리가 처한 딱하고 막막한 상황을 헤아려 볼 수 있다. 물속에 가라앉지 않으려 발버둥 치고 있는 백조와도 같은. 그럼에도 그의 날카로운 비판 정신은 약해지지 않는다. 칼리마코는 남성 주인공답게 군주의 비르투를 갖춘 인물이다. 그에게 있어 루크레치아가 유부녀라는 점은 전혀 고려의 대상이 아니다. 아름다운 여자를 빼앗아 자기 것으로 삼겠다는 목적이 더욱 중요하다. 영토를 정복하는 것과 같은 논리다.

 

(칼리마코) 난 이제 그 어떤 일도 두렵지 않아. 나는 어떤 일이라도 하겠어. 설사 그게 어리석고, 잔혹하고, 사악하더라도! (P.176, 13)

 

여성 주인공의 이름이 루크레치아인 점은 분명 의도적이다. 셰익스피어의 작품으로도 유명한 루크레치아는 고대 로마왕국에서 정절의 화신이다. 강제로 정조를 빼앗기자 복수를 당부하고 공개적으로 목숨을 끊은 루크레치아와, 남편에 의해 억지로 외간 남자를 맞아들여야 했지만 남편을 배신하고 그와의 관계를 지속하려는 루크레치아. 작품 전반부에서 도덕성에서 명성 높던 그녀의 변신은 반전의 묘미와 함께 더는 로마 시대를 기대할 수 없다는 냉소를 자아낸다. 하지만 독자는 그녀를 욕할 수 없다. 루크레치아에게 있어 이제부터는 칼리마코가 진짜 남편이며, 추후 아기 아빠가 될 것이므로. 니차의 다음 대사는 이중적 의미의 진실에 해당한다.

 

(니차) 루크레치아, 이분(칼리마코)이 바로 노년에 우리가 의지할 아이를 갖게 해주신 분이야. (P.251, 56)

 

어리석은 남편, 욕심 많은 사제, 아름다운 아내, 멋진 젊은이, 부정을 설계하는 악역. 만드라골라라는 사랑의 미약 차용. 이러한 전형적인 희극 요소 외에 극 시작 전과 막과 막 사이에 등장하는 칸초네가 독특하다. 고전 희곡에서 코러스의 유산으로 볼 수 있다. 실제로 기능도 유사하다.

 

이 두 작품은 <군주론>을 잘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줄 뿐만 아니라, 관직에서 물러나 유배 생활에 들어선 마키아벨리의 심경 변화를 파악할 수 있게 해준다. (P.19, 옮긴이의 말)

 

한 권의 책에 굳이 세 편을 집어넣은 까닭은 옮긴이의 말에 잘 나타나 있다. <군주론>을 중심으로 내용상으로 연결되어 있어 마키아벨리의 사고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는 것이다. 루크레치아처럼 아름다운 여인을 차지한 칼리마코는 결코 도덕적으로 훌륭한 인물이 아니다. 목적 달성을 위해서 간계를 쓸 수 있다는 점에서 체사레와 카스트라초와 마찬가지의 유형이다. 두 사람과 달리 칼리마코는 비르투와 포르투나가 절묘하게 맞아떨어져 끝내 목적을 이룬다. <만드라골라>는 후대 전문적인 극작가들의 작품에 비하면 성격유형이 단순하고 사건 전개도 느슨하다. 뛰어난 문학작품으로서라기보다는 마키아벨리의 사상을 엿볼 수 있는 다른 창구로 간주하고 싶다.

 

마지막으로 작품해설의 관점도 독특하지만, 부록의 용어·인명 풀이가 매우 유익하다. <군주론>을 처음 읽는 독자보다는 다른 번역본을 읽어본 적 있는 독자에게 권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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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륜선 타고 온 포크, 대동여지도 들고 조선을 기록하다 - tvN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 '유진 초이'의 실존 인물 '조지 포크'의 조선 탐사 일기
조지 클레이튼 포크 지음, 사무엘 홀리 엮음, 조법종 외 옮김 / 알파미디어 / 202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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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서는 18845월 조선에 부임한 최초 미국 외교무관 조지 클레이튼 포크가 미국 국무부 및 해군부에 보고하기 위해 진행한 현장 조사 기록이다. (P.13, 일러두기)

 

미국 외교관의 최초 조선 보고서라는 부제가 이 책의 성격을 말해준다. 저자 포크는 188411월과 12월에 걸쳐 40여 일간 조선 남부지역에 대한 조사 여행을 떠났고 날마다의 여정을 꼼꼼히 일기로 남겼다. 저자 사후에 방치되었던 기록을 사무엘 홀리가 발견하여 정리하고 편집하여 출판하였다. 이 책은 저자와 편자, 그리고 역자의 공동 노력이 한데 어우러진 산물이라고 평가할 만하다.

 

이쯤 해서 저자 포크가 어떤 인물인지 궁금하다. 작가 소개에 따르면 1883년 민영익을 정사로 파견한 보빙사의 미국 통역이었다고 하며, 그의 요청으로 조선 주재 미국 공사관 외교관으로 함께 귀국하였다고 한다. 그는 일본어에 능통하며 한국어도 구사할 줄 아는 당시로서는 드물게 보는 동양통이다.

 

그의 여정은 가마를 타고 한양을 떠나 안성, 공주, 전주, 나주, 광주, 남원을 거쳐 경상도 합천, 진주, 동래, 대구, 상주를 지나고 충주, 광주를 통해 한양으로 돌아온다. 그의 여행은 단순한 관광이 아니다. 미지의 국가에 파견한 외교관이니만큼 현지에 대한 정보와 자료 획득 목적이 매우 크다. 1차로 경기 북부지역을 돌아보고, 2차에는 좀 더 길게 경기 남부지역과 삼남지역을 조사한 것이다. 그는 일기에 매일의 기압, 온도를 표기한다. 몇 분 단위로 여정을 상세하게 기록하며, 방위도 꼼꼼하게 기재한다. 이 모든 것이 조사 여행임을 확실하게 해준다.

 

포크의 일기에서 학술적으로 주목할 점은 그가 무엇보다 <대동여지도>를 휴대하고 적극적으로 활용한 최초의 외국인이며, 지도의 우수성을 인정하고 있어서다. <여지도>에는 더구나 현지 지명을 모두 발음에 따라 영문으로 표기하고 있기도 하다. 거북선에 관련한 사실도 간과할 수 없다. 옮긴이의 해설에 따르면 거북선을 세계 최초의 철갑선으로 소개한 인물이 기존 알려진 것과는 달리 포크라고 한다. 매우 흥미로운 사실이 아닐 수 없다. 이 두 가지 점만 놓고 보더라도 이 책의 의의는 자못 크다.

 

전체 450면의 분량 중 작가와 작품 소개 및 해설에 100면 가까이 할애하고 있는데, 일반 독자에게는 생소한 이 책의 내용과 의의를 적극 소개하기 위한 옮긴이들의 노력을 높이 평가하고 싶다. 그럼에도 대중이 읽기에 내용 자체는 결코 재미있다고 말하기 어렵다. 해군 무관인 외교관이 업무 목적으로 조사 여행 기록을 일기로 남겼다고 하면 거기에 얼마만 한 개인적 상념과 문학적 표현이 깃들일 수 있을지 의심스러울 것이다. 구한말의 풍속과 사회상 등을 알 수 있어 흥미로운 대목도 부분적으로 있지만 그의 감정이 직설적으로 표현된 경우는 대체로 짜증 낼 때가 많다.

 

저자가 가장 애를 먹은 건 바로 화장실 문제였다. 그는 서양처럼 개인의 프라이버시를 존중하지 않는 조선의 전통적 용변 방식으로 신체적, 정신적 고통을 겪었고 이때마다 매우 예민해졌다. 자신을 신기한 동물 보듯이 무례하게 다가오거나 행동하는 군중들의 태도도 마찬가지다.

 

그가 조선인들을 바라보는 관점은 기본적으로 우리네가 소위 미개한 원시부족사회를 방문하고 바라볼 때와 비슷하다고 보면 된다. 제아무리 겸손하게 처신하더라도 자국과 자문화 우월주의가 근본적으로 자리 잡고 있다. 이 때문에 포크를 탓할 필요가 없는 게 당대 조선을 경험한 모든 서양인의 보편적 인식이다.

 

나는 평화를 지향하는 문명국 미국 정부의 하급 관리로서 나라를 대표해 아직은 미개하지만 화려한 옷을 걸친 위대한 족장(전라감사) 옆에 앉아 있었다. (P.198, 1111, 전주)

 

공정하게 하자면 포크는 같은 서양인조차도 무례하다면 마찬가지로 비판적이다. 부산 세관에서 만난 어떤 사람을 쓰레기라고 기록에 적어놓기도 하였다.

 

그는 충남 논산과 용안 근처 금강에서 과거 미국의 앨러트호가 좌초하였을 때 도움을 주었던 것으로 확인한 용안 현감에게 미국을 대표해서 감사를 전한다. 자신과 동행한 묵과 수일에게 불만을 토로할 때도 있지만 그들이 충심으로 자신의 임무를 수행한 데 대하여 찬사를 하며, 유사시에 미국 정부가 자신을 대신하여 그들에게 대가를 지불할 것을 요청하는 문장을 일기에 남기기도 하였다. 이처럼 그는 나름대로 공정하고 균형을 유지하려 애쓴 인물이다.

 

비록 이따금 문화적 차이와 이해 부족에 따른 편견이 드러나지만 그가 보고 기록한 19세기 말의 조선 지방의 모습과 삶의 양태가 생생하게 눈앞에서 재현된다. 과거에는 잘 관리하였던 도로가 지금은 형편없이 관리되고 있다는 지적, 사람들이 좋은 집을 짓지 않는 게 정부와 관리의 수탈을 모면하기 위해서라는 것, 공물 제도가 타락하여 정부가 거대한 강도나 마찬가지라는 비판, 과거의 암행어사와는 달리 오늘날의 어사는 부패하였다는 점 등을 알 수 있다.

 

그는 특히 인상적인 대목은 자세하게 기록하거나 일기 끝에 별기로 남긴다. 담양 석당간, 남원 만복사지 석불입상, 대구의 고인돌 등 생소한 문화유산에 깊은 관심을 보이고, ‘통영의 영웅이 스스로 죽음을 택한 이유와 비극적으로 죽은 임경업 장군의 일화를 듣고 기록한다. 민중들 사이에 이순신과 임경업에 관한 이야기가 널리 퍼졌음을 알게 해준다. 남원 광한루의 오작교 이야기와 밀양 영남루에 얽힌 슬픈 전설도 그의 펜을 붙잡는다.

 

사진 원판이 나주에서 물에 빠져 모조리 망가지고, 기대를 품었던 해인사에 실망한 채 지친 심신으로 그토록 가고자 했던 통영을 건너뛰는 등 희비가 교차하는 여정의 그에게 맞닥뜨린 것은 갑신정변의 소식이었다. 민영익의 도움으로 이 여행을 실행에 옮길 수 있었고, 갑신정변의 주역인 개화파와 가까운 관계를 유지했던 포크의 입장으로서는 정변의 결과가 미국의 행보는 물론 자신들의 안위와도 직결되는 중대한 사안이었으리라.

 

한 서양 외교관의 900마일 여정의 발자취를 이렇게 차근차근 뒤따르는 이유는 그것이 구한말 당대 상에 대한 새로운 발견과 함께 보다 보편적 인식을 얻기 위해서다. 자기 모습을 들여다보기 위해 거울이 필요하듯 우리 조상의 삶도 타자에 의한 판단이 더욱 정확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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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나이스 닌의 <헨리와 준>을 읽은 후 다른 책을 읽어보려고 알아보았더니 도서관에서 이 책을 빌릴 수 있었다. 알라딘에서는 도서 정보를 찾아볼 수 없고, 다른 곳에서도 몇군데 이런 책이 출간되었다 정도만 확인 가능하다. 이 책은 아나이스 닌의 에로티카 작품집으로서 번역본은 1989년에 간행되었다. 그녀의 에로티카 소설은 1940년대에 쓰인 작품인데 이 책에는 모두 9편의 단편과 중편이 수록되어 있다.

: 기숙학교, 삐에르란 남자, 마리안느, 말로르카, 모래언덕의 여자, 두 자매, 항가리 모험, 마띨드(이상 단편), 엘레나(중편)

 

아나이스 닌의 에로티카 작품집은 1977<비너스의 델타>, 1979<작은 새>로 출판되었다. 이 책의 작품 중 모래언덕의 여자두 자매<작은 새>, 나머지 작품은 <비너스의 델타>에 수록되었으니 일종의 편집본임을 알 수 있다.

 

이 책과 관련하여 여러 국내 출판 기록이 있다. 옮긴이와 출판사를 통해 판단컨대, 모두 같은 내용을 담고 있을 것으로 추정한다. 모두 절판 상태다.

 

삐에르란 남자 김수경 옮김, 열음사 (1989)

에로티카 1 : 마틸드 김수경 옮김, 열음사 (1996)

에로티카 2 : 엘레나 - 김수경 옮김, 열음사 (1996)

작은 새 김수경 옮김, 열음사 (1997)

 

<델타 오브 비너스>(정승우/버팀목)라는 표제로 1995년에 출간한 번역본도 있는데, 옮긴이와 출판사가 상이하므로 이 책과는 다른 종류로 생각되는데, 수록 내용은 확인할 수 없다.

 

책 내용보다는 책 자체에 얽힌 이야기만 주절주절 늘어놓고 있지만, 사실은 이게 핵심이다. 이 책들은 출판 당시에 모두 외설 시비가 있었고, 모두 절판된 이후 발행 기록이 없다. 이 작품집에 실린 에로티카 소설들이 2000년대 이전에는 사회적으로 수용되기 어려웠다는 점이다. 만약 현시점에 제대로 된 번역과 장정으로 다시 나온다면 평가는 달라질 수 있겠지만.

 

나를 문학적 매춘가의 마담이라고 불러야 할 것 같다. 어떤 수집가에게 팔기 위하여 에로티카를 쓰게 된 배고픈 작가들의 마담이라고 말이다. (P.51, ‘마리안느’)

 

마리안느의 서두다. 소설 속 문장이지만, 이들 작품을 쓰게 된 까닭을 진솔하게 토로한 것이다. 가난과 굶주림을 모면하기 위해 싼값에 에로틱한 이야기들을 써 재꼈다는 것이다. 여기 이야기들이 다루는 성관계의 제재와 방식은 대단히 폭넓다. 남성 동성애, 여성 동성애, 시간(屍姦), 근친상간, 사디즘, 강간, 윤간(輪姦) 등 온갖 관계가 등장한다. 물속에서, 야외에서, 군중 속에서, 아편을 피우며, 자매의 남자를 가로채기도 하는 등 막장도 이런 막장이 없어서 때로는 역겨울 정도다.

 

이 소설들을 에로티카라고 부르는데, 포르노 소설 또는 우리말의 야설과는 유사하면서도 결이 다르다. 모두가 섹스를 중점적으로 다루지만 에로티카는 노골적이고 적나라하게 묘사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아마 당대의 기준에서는 똑같게 보일 수 있지만 지금 우리의 눈에는 그렇다는 것이다. 이름을 어찌 부르든 간에 충족될 수 없는 성적 환상과 몽상을 글을 통해 누리려는 행위라는 점에서 공통성을 지닌다. 현실 세계에서 소설 속 내용처럼 실행하려다가는 엄청난 파장을 일으킬 것이다.

 

이 살의 따뜻한 접촉은 그녀에게 인간의 구원을, 그리고 위안을 주는 것이었다. 그녀의 엉덩이 사이에서 전율하는 이 페니스야말로 죽음이 지나가는 이 순간에 부여잡아야 할 생명, 바로 그 생명이었으며 꽉 잡고 매달릴 훌륭한 삶이었던 것이다. (P.84, ‘모래 언덕의 여자’)

 

()은 인간 존재의 핵심적 요소다. 위 인용문에서도 언급하였듯이 섹스는 곧 생명이다. 생명체로서 인간은 다른 생물과 마찬가지로 본능이든 유전자의 힘이든 종족 번식을 하고자 한다. 양성생식을 하는 인간은 수컷과 암컷의 합체가 필수적이다. 성적 결합이 고통스러우면 아무래도 결합 자체를 꺼리기 마련이므로 섹스는 쾌락을 동반할 수밖에 없다. 다른 생물과는 달리 인간은 번식을 위한 발정기가 따로 없으니, 성을 탐닉하는 사람이라면 어찌 보면 연중 내내 발정기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전체 주제를 섹스에 둔다는 것은 마치 매춘부의 삶과도 같아서 그 매춘부가 오히려 섹스로부터 소외당하고 마는 이상한 행위로 끝나게 된다 작가들은 아마 이 사실을 알았나보다. (P.221, ‘작가의 말’)

 

여기 이야기들은 인간이 섹스 자체에 함몰되었을 경우 어떻게 되는지에 대한 극단적 사례이며, 자체로서 반면교사가 되기도 한다. 누구나 성적 환상에 젖어 들 수 있고 그걸 나쁘다고 평하기 어렵다. 인생에서 유일하게 가치 있는 것이 섹스라고 생각한다면 그 사람은 인생의 수많은 소중한 것들을 놓치는 우를 범하게 된다.

 

많은 페이지 속에서 나는 즉각적으로 여성의 언어를 사용하였고 여성의 관점으


로 성적 경험을 보고 있었다. 나는 결국 이 에로티카를 출판하기로 결심하였다. 왜냐하면 이것이 남성의식의 세계에서 한 여자가 최초로 기울인 노력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P.224, ‘작가의 말’)

 

오늘날 아나이스 닌의 작품이 재평가받는 가장 큰 이유는 성 담론의 개방성과 함께 페미니즘 관점의 부각이 크다. 남성에 의한 성관계와 기술이 아니라 여성의 주체적 성 인식을 보여준다는 측면에서다.

 

유일한 중편인 엘레나는 전체 작품 중 분량 면에서는 물론 내용 면에서도 특기할 만하다. 한 지적인 여성이 에로티시즘에 매혹되어 남성과의 관계든, 여성과의 관계든 전신으로 탐닉하는 모습을 아름다우면서도 관능적으로 다루고 있다. 날마다 섹스 자체만 생각하고 그것에 매진하는 인물의 삶의 모습은 분명 과장되었다. 높은 지성과 섹스의 탐닉은 별개의 차원이라는 것도 엘레나와 작가 자신의 글을 통해서 깨달을 수 있다. 어쨌거나 섹스 자체는 사랑과 결합하였을 때 진실로 아름다운 행위라는 점을 이 중편은 다시금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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