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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륜선 타고 온 포크, 대동여지도 들고 조선을 기록하다 - tvN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 '유진 초이'의 실존 인물 '조지 포크'의 조선 탐사 일기
조지 클레이튼 포크 지음, 사무엘 홀리 엮음, 조법종 외 옮김 / 알파미디어 / 2021년 2월
평점 :
본서는 1884년 5월 조선에 부임한 최초 미국 외교무관 조지 클레이튼 포크가 미국 국무부 및 해군부에 보고하기 위해 진행한 현장 조사 기록이다. (P.13, 일러두기)
‘미국 외교관의 최초 조선 보고서’라는 부제가 이 책의 성격을 말해준다. 저자 포크는 1884년 11월과 12월에 걸쳐 40여 일간 조선 남부지역에 대한 조사 여행을 떠났고 날마다의 여정을 꼼꼼히 일기로 남겼다. 저자 사후에 방치되었던 기록을 사무엘 홀리가 발견하여 정리하고 편집하여 출판하였다. 이 책은 저자와 편자, 그리고 역자의 공동 노력이 한데 어우러진 산물이라고 평가할 만하다.
이쯤 해서 저자 포크가 어떤 인물인지 궁금하다. 작가 소개에 따르면 1883년 민영익을 정사로 파견한 보빙사의 미국 통역이었다고 하며, 그의 요청으로 조선 주재 미국 공사관 외교관으로 함께 귀국하였다고 한다. 그는 일본어에 능통하며 한국어도 구사할 줄 아는 당시로서는 드물게 보는 동양통이다.
그의 여정은 가마를 타고 한양을 떠나 안성, 공주, 전주, 나주, 광주, 남원을 거쳐 경상도 합천, 진주, 동래, 대구, 상주를 지나고 충주, 광주를 통해 한양으로 돌아온다. 그의 여행은 단순한 관광이 아니다. 미지의 국가에 파견한 외교관이니만큼 현지에 대한 정보와 자료 획득 목적이 매우 크다. 1차로 경기 북부지역을 돌아보고, 2차에는 좀 더 길게 경기 남부지역과 삼남지역을 조사한 것이다. 그는 일기에 매일의 기압, 온도를 표기한다. 몇 분 단위로 여정을 상세하게 기록하며, 방위도 꼼꼼하게 기재한다. 이 모든 것이 조사 여행임을 확실하게 해준다.
포크의 일기에서 학술적으로 주목할 점은 그가 무엇보다 <대동여지도>를 휴대하고 적극적으로 활용한 최초의 외국인이며, 지도의 우수성을 인정하고 있어서다. <여지도>에는 더구나 현지 지명을 모두 발음에 따라 영문으로 표기하고 있기도 하다. 거북선에 관련한 사실도 간과할 수 없다. 옮긴이의 해설에 따르면 거북선을 세계 최초의 철갑선으로 소개한 인물이 기존 알려진 것과는 달리 포크라고 한다. 매우 흥미로운 사실이 아닐 수 없다. 이 두 가지 점만 놓고 보더라도 이 책의 의의는 자못 크다.
전체 450면의 분량 중 작가와 작품 소개 및 해설에 100면 가까이 할애하고 있는데, 일반 독자에게는 생소한 이 책의 내용과 의의를 적극 소개하기 위한 옮긴이들의 노력을 높이 평가하고 싶다. 그럼에도 대중이 읽기에 내용 자체는 결코 재미있다고 말하기 어렵다. 해군 무관인 외교관이 업무 목적으로 조사 여행 기록을 일기로 남겼다고 하면 거기에 얼마만 한 개인적 상념과 문학적 표현이 깃들일 수 있을지 의심스러울 것이다. 구한말의 풍속과 사회상 등을 알 수 있어 흥미로운 대목도 부분적으로 있지만 그의 감정이 직설적으로 표현된 경우는 대체로 짜증 낼 때가 많다.
저자가 가장 애를 먹은 건 바로 화장실 문제였다. 그는 서양처럼 개인의 프라이버시를 존중하지 않는 조선의 전통적 용변 방식으로 신체적, 정신적 고통을 겪었고 이때마다 매우 예민해졌다. 자신을 신기한 동물 보듯이 무례하게 다가오거나 행동하는 군중들의 태도도 마찬가지다.
그가 조선인들을 바라보는 관점은 기본적으로 우리네가 소위 미개한 원시부족사회를 방문하고 바라볼 때와 비슷하다고 보면 된다. 제아무리 겸손하게 처신하더라도 자국과 자문화 우월주의가 근본적으로 자리 잡고 있다. 이 때문에 포크를 탓할 필요가 없는 게 당대 조선을 경험한 모든 서양인의 보편적 인식이다.
나는 평화를 지향하는 문명국 미국 정부의 하급 관리로서 나라를 대표해 아직은 미개하지만 화려한 옷을 걸친 위대한 족장(전라감사) 옆에 앉아 있었다. (P.198, 11월 11일, 전주)
공정하게 하자면 포크는 같은 서양인조차도 무례하다면 마찬가지로 비판적이다. 부산 세관에서 만난 어떤 사람을 쓰레기라고 기록에 적어놓기도 하였다.
그는 충남 논산과 용안 근처 금강에서 과거 미국의 앨러트호가 좌초하였을 때 도움을 주었던 것으로 확인한 용안 현감에게 미국을 대표해서 감사를 전한다. 자신과 동행한 묵과 수일에게 불만을 토로할 때도 있지만 그들이 충심으로 자신의 임무를 수행한 데 대하여 찬사를 하며, 유사시에 미국 정부가 자신을 대신하여 그들에게 대가를 지불할 것을 요청하는 문장을 일기에 남기기도 하였다. 이처럼 그는 나름대로 공정하고 균형을 유지하려 애쓴 인물이다.
비록 이따금 문화적 차이와 이해 부족에 따른 편견이 드러나지만 그가 보고 기록한 19세기 말의 조선 지방의 모습과 삶의 양태가 생생하게 눈앞에서 재현된다. 과거에는 잘 관리하였던 도로가 지금은 형편없이 관리되고 있다는 지적, 사람들이 좋은 집을 짓지 않는 게 정부와 관리의 수탈을 모면하기 위해서라는 것, 공물 제도가 타락하여 정부가 거대한 강도나 마찬가지라는 비판, 과거의 암행어사와는 달리 오늘날의 어사는 부패하였다는 점 등을 알 수 있다.
그는 특히 인상적인 대목은 자세하게 기록하거나 일기 끝에 별기로 남긴다. 담양 석당간, 남원 만복사지 석불입상, 대구의 고인돌 등 생소한 문화유산에 깊은 관심을 보이고, ‘통영의 영웅’이 스스로 죽음을 택한 이유와 비극적으로 죽은 임경업 장군의 일화를 듣고 기록한다. 민중들 사이에 이순신과 임경업에 관한 이야기가 널리 퍼졌음을 알게 해준다. 남원 광한루의 오작교 이야기와 밀양 영남루에 얽힌 슬픈 전설도 그의 펜을 붙잡는다.
사진 원판이 나주에서 물에 빠져 모조리 망가지고, 기대를 품었던 해인사에 실망한 채 지친 심신으로 그토록 가고자 했던 통영을 건너뛰는 등 희비가 교차하는 여정의 그에게 맞닥뜨린 것은 갑신정변의 소식이었다. 민영익의 도움으로 이 여행을 실행에 옮길 수 있었고, 갑신정변의 주역인 개화파와 가까운 관계를 유지했던 포크의 입장으로서는 정변의 결과가 미국의 행보는 물론 자신들의 안위와도 직결되는 중대한 사안이었으리라.
한 서양 외교관의 900마일 여정의 발자취를 이렇게 차근차근 뒤따르는 이유는 그것이 구한말 당대 상에 대한 새로운 발견과 함께 보다 보편적 인식을 얻기 위해서다. 자기 모습을 들여다보기 위해 거울이 필요하듯 우리 조상의 삶도 타자에 의한 판단이 더욱 정확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