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중세 소극집
김찬자 지음 / 연극과인간 / 200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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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수록 작품>

빨래통

파테와 타르트

메트르 미멩 학생

누구의 아들도 아닌 쥬냉

피에르 파틀랭 선생

악마가 지옥으로 영혼을 가져간 방앗간 주인의 소극

 

내친 김에 또 다른 프랑스 중세 소극집을 읽는다. 수록작 6편 중 2편은 앞서 읽은 책과 중복이다. 앞선 책은 운문 형식을 살리려고 노력한 반면, 이 책의 옮긴이는 구어적이고 산문적인 번역”(P.8)을 택하였다. 가급적 원문을 존중하여 운문체가 낫겠지만 어설프면 오히려 못하니 순전히 내용 전달의 측면에서는 장단점이 있으니 선택의 사안이리라.

 

이 책에 실린 소극을 통해서 현대의 일반 독자가 기대하는 건 물론 예술적 감흥은 아닐 것이다. 현대에도 통용되는 통시대적 보편성도 당연히 아니다. 소극을 읽으면서 정제되지 않고 날것 그대로의 중세 서민들의 삶과 생각을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이것은 사서를 통해 활자화되고 박제화된 기술 방식으로서는 도저히 얻기 어려운 미덕이다.

 

중세 서민들의 일상생활을 유추해 보자면, 음탕함과 속임수가 노골적이며 의외로 매 맞는 남편이 자주 등장한다. 오쟁이 진 남자는 단골 소재이며, 신부와 변호사에 대한 부정적 인식이 강함도 알 수 있다. 악마조차도 두려움보다는 우스갯거리로 전락할 정도다. 어쩌면 이들은 모두 중세 민중에 국한할 것 없이 시대를 막론하고 인간 본연의 거짓 없는 민낯일 것이다.

 

중세 기독교적 가치가 지배하는 사회에서 매 맞는 남편의 장면은 오히려 신선하다. 이것이 실제의 반영인지 아니면 현실에 대한 보상 심리인지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적어도 소극 내에서는 흥미로운 설정이다. <빨래통>이 대표적이지만, <악마가 지옥으로 영혼을 가져간 방앗간 주인의 소극>에서도 병든 주인은 신부와 외도를 즐기려는 부인에게 애처롭게 두들겨 맞는다.

 

음탕, 음란과 외설은 사실 한 끗 차이다. 적당한 음담이 대화와 문학에서 분위기를 흥미롭게 끌어가는 효과는 무시할 수 없다. 서민들의 언행에서는 종교적 엄숙주의를 찾아보기 어렵다. 그만큼 성에 솔직하다는 평도 가능하다. <빨래통>에서 아내는 남편 자끼노에게 적어도 하룻밤에 대여섯 번”(P.17, 2)의 봉사를 요구한다.

 

(미멩) 아버지! 엉덩이가 몰랑몰랑한데요.

(라울 마쉬) 어쨌든 그 아이가 숫처녀라는 것은 내가 보증하지.

(교사) 조심해! 정신 나갔어? 젖가슴이 몰랑몰랑할 텐데. (P.55, 8)

 

<메트르 미멩 학생>은 이색적인 소재를 다루는데, 학생이 라틴어 공부에 너무 몰두하다가 그만 모국어를 까먹었다고 하는 설정이다. 그에게 다시 모국어를 되살려주려는 여러 노력이 유머러스하게 전개된다. 마지막 장에서 미멩이 약혼녀를 둘러메면서 이어지는 대목이 성적 골계미를 담고 있다. 현대의 도덕관이 아니라 당대의 시각으로 바라보는 너그러움이 요구된다.

 

<파테와 타르트>, <피에르 파틀랭 선생>, <악마가 지옥으로 영혼을 가져간 방앗간 주인의 소극>의 공통점은 바로 사기, 즉 속임수에 있다. 전자의 두 편은 사기를 친 당사자가 처음엔 멋지게 성공하지만 나중에는 오히려 자기가 된통 당한다. 특히 변호사 파틀랭 선생은 만만찮은 옷감 가게 주인을 힘겹게 속여넘기고 득의양양하고, 옷감 가게 주인과 양치기의 소송도 승소를 거둔다. 절정의 순간, 그는 만만하게 보았던 양치기에게 하릴없이 속임을 당하고 만다. 이 작품은 중세 소극 중에서 가장 유명하고 뛰어난 작품으로 평가받는다고 한다.

 

후자의 방앗간 주인 이야기는 가톨릭 신부의 위선적인 음란함을 드러냄과 동시에 소극의 소재로 각종 악마를 등장시킨다. 부인과 신부에게 수세에 몰리고 죽음도 멀지 않게 된 주인의 영혼을 가져오기 위한 어리숙한 악마 배리트의 행동을 어처구니없다. 영혼이 빠져나가는 출구가 하필이면 항문이기에 생기는 해학적인 장면은 시원하게 용변을 보는 주인과, 기뻐서 신나게 가방에 영혼을 담아가는 악마가 대조적이기에 비롯한다.

 

소극의 내용과 주제가 항상 대중적이고 서민적인 것만은 아니다. 소극의 작가 중에는 꽤나 높은 지성을 가진 인물도 있는데, <피에르 파틀랭 선생>은 이것에 대한 입증이다. 끈질긴 옷감 가게 주인을 따돌리기 위해 혼수상태에서 헛소리 연기를 하는 파틀랭 선생은 다양한 언어로 문장을 지껄인다. 옷감 가게 주인에게는 헛소리로 들리지만, 일부 지적인 독자에게 작가의 수준을 과시하는 의도도 있다고 하겠다. 5장에서 그가 구사하는 외국어와 사투리는 다음과 같다. 리모주 사투리, 피카르디 사투리, 플랑드르어, 앵글로 노르망어, 브르타뉴어, 로렌 사투리, 라틴어.

 

(쥬냉) 나는 아버지의 아들도 어머니의 아들도 아니라는 거지. 제기랄! 결국 쥬냉이 쥬냉이 아니라는 말인 셈이야. 그렇다면 도대체 나는 누구란 말이야? 어릿광대 자노? 아니지! 나는 아무의 아들도 아닌 쥬냉이야. 내가 존재하는 건지 아닌지도 알 수가 없군. (P.72, 9)

 

<누구의 아들도 아닌 쥬냉>은 웃음 속에 작가의 날카로운 질문이 숨어 있어 놀라게 된다. 자신의 아버지가 누구인지 알고 싶어 하는 쥬냉 앞에 가톨릭 신부는 자신이 아버지임을 선언한다. 반면 어머니는 신부는 절대 쥬냉의 아버지가 아니라고 단언한다. 혼란에 빠진 쥬냉에게 점쟁이는 한술 더 뜬다. “모든 사람이 찬성하려면, 저 아이는 아무의 아들도 아니겠네요.”(P.71, 8) 이렇게 쥬냉은 아무의 아들도 아니라는 결론에 도달한다. 쥬냉은 도대체 누구인가? 그는 존재인가 비존재인가? 굉장한 존재론적 질문을 던지는 소극이다.

 

중세는 분명 기독교가 지배하는 사회이다. 수준 높고 장엄한 종교극의 상연은 종교적으로도, 사회적으로도 커다란 이벤트이지만, 일반 서민에게 종교와는 무관한 소극이 더욱 친숙하고 일상적이라고 한다. 자기네들의 적나라한 삶의 희비, 애환을 담고 있기에 그러하리라. 이로 미루어 볼 때 중세 소극을 통해 우리는 중세인들의 실질적 삶의 모습을 깊숙이 들여다볼 수 있고 그것은 중세 소극을 읽는 이유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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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중세 소극선 지만지 희곡선집
작자미상, 정의진 옮김 / 지식을만드는지식 / 201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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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록 작품>

빨래통

땜장이

구두 수선공 칼뱅

파테와 타르트

 

굉장히 생소한 책이다. 도서관에서 우연히 집어 들게 되었는데 무척이나 흥미로울 것 같았다. 먼저 소극이란 희극의 한 유형인데, 작품해설을 인용하면 아래와 같다.

 

프랑스 소극의 원제목에는 소극(farce)’이라는 명칭이 항상 붙어 있다. 8음절 운문으로 쓰인 소극은 대부분 300~500행으로 구성된 짧은 단막극이다. (P.116)

 

소극은 군주, 귀족과 영웅 같은 상류 계급이 아니라 중세 서민들의 일상생활을 소재로 다룬다. 서민들의 적나라한 삶이 소극 속에서 여과 없이 노출된다는 점이 흥미와 당혹감을 동시에 안겨주는데, 거짓말로 상대방을 속이는 행동, 부부간에 욕설과 폭력을 직설적으로 주고받는 행동 등이 나타난다. 비천한 소재와 배경, 비속어의 대사, 비루한 인물 행동 등으로 인해 한때는 천대와 괄시를 받기도 하였다고 한다.

 

프랑스의 고전과 현대 희극의 큰 줄기를 이해하려면 그 근간이 되는 중세 소극에 대한 최소한의 지식이 필요하다. (P.111)

 

대중문학에 대한 인식이 높아진 현대의 독자들에게 소극은 현학적이거나 젠체하지 않고 솔직한 서민들의 삶을 들여다볼 수 있는 계기가 되기에 더 부담 없이 다가온다. 분량 면에서는 단편이나 콩트, 코미디로 보자면 슬랩스틱 유형이라고나 할까.

 

<빨래통><땜장이>는 부부간의 주도권 다툼이 팽팽하다. 옛날이라고 하면 무조건 남존여비를 떠올리지만, 이들 작품을 볼 때 최소한 서민사회에서 여성의 기세는 남자에 전혀 꿀리지 않는 것을 알 수 있다. 남편에게 욕설을 날리는 것은 예사고, 집안일을 마구 부려 먹는다거나 심지어 폭력도 행사한다.

 

(아내) 없어? 있어, 있다니까! / (남편의 따귀를 때리며) / 이게 어디서 까불어!

(자키노) 그만해! 하면 되잖아. / 그래, 당신 말이 맞아. / 다음부터 주의할게. (P.16, <빨래통> 3)

 

<빨래통>에서는 남편이 잔꾀를 부려서 아내의 순종을 끌어내 결국 우위를 차지하는데, 문득 <베니스의 상인>이나 <말괄량이 길들이기>가 연상된다. 반면 <땜장이><구두 수선공 칼뱅>은 아내의 승리로 끝난다. 아내에게 몽둥이찜질을 당하고, 꼼짝도 하지 않는 내기에서 진 땜장이 남편, 옷 한 벌 사달라는 아내의 간청에도 노래만 부르면 외면하다가 지갑을 탈탈 털린 칼뱅. 비록 과장이 심하지만 보다 현실적인 가정생활의 모습이 아니겠는가. <파테와 타르트>는 제과점 주인 부부를 속여서 파테를 얻어먹은 두 거지가 타르트마저 속여 먹으려다가 들통 나서 신나게 두들겨 맞는다는 내용이다. 거짓말과 속임수는 이 작품은 물론 <구두 수선공 칼뱅>에서처럼 목적 달성을 위해 일상에서 흔하게 일어나지만 거짓이 드러나면 곤욕을 치르게 된다. 칼뱅의 아내는 남편을 무사히 속였고 거지들은 실패하였다.

 

소극은 단독 공연보다는 종교극의 막간에 또는 축제나 장날에 사람들을 모으기 위한 방편으로 상연되었다고 한다. 길이의 제약, 소재의 서민성, 지나칠 정도의 희극성이 요구되었던 까닭이다. 셰익스피어의 희곡 작품 중에 극 전체의 내용과 성격에 무관한 짤막한 상황극이 삽입되는 사례가 있는데, 아마 이것도 비슷한 성격으로 보인다. 이 책의 <땜장이><파테와 타르트>의 끝 장면은 이러한 성격을 잘 보여 준다. 즉 이제부터 한바탕 신나게 놀아 보자는 대사로 공연을 끝맺는다.

 

(땜장이) (관객에게) / 여기 계신 여러분도 / 와서 같이 한잔하죠. / 여성의 승리를 위해 / 다 같이 축배를 들죠.

(아내) 그럽시다. 그거 좋죠.

(남편) 맘껏 먹고 마십시다. / 다들 어서 오십시오. / 남녀노소 직업 불문 / 위아래 가리지 말고 / 술통이 바닥날 때까지 / 신나게 놀아 봅시다. (P.43-44, <땜장이> 4)

 

(거지2) (관객에게) / , 우리가 말입니다, / 몽둥이로 맞았지요.

(거지1) 그래요, 어쨌든 이거 / 어디 가서 막 떠들고 / 다니면 곤란합니다. / 자 한판 놀아 봅시다! (P.108-109, <파테와 타르트> 19)

 

이러한 소극 작품을 문학의 예술성 기준에서 보자면 형편없는 것으로 치부할 수 있지만, 우리네 삶이 항상 우아하고 고상하지 못한 게 현실 아닌가. 차라리 B급 장르로 폄하되더라도 중세 프랑스 서민의 삶을 당대는 물론 현대 관객들이 거리낌 없이 낄낄거리며 즐길 수 있다면 자체로서 의의는 작지 않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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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기여 잘 있어라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79
어니스트 헤밍웨이 지음, 김욱동 옮김 / 민음사 / 201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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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 표제도 그렇고, 1차 세계대전을 배경으로 하고 있으며, 남자 주인공이 전투에서 부상을 당하였다든지 자발적으로 탈영하였다는 사실을 고려할 때 이 작품은 반전 소설이다. 전쟁을 반대하고 무의미성을 토로하는 문장이 작중 인물에 의해 반복적으로 표출되는 점도 마찬가지다. 그렇다고 반전 테마가 이 작품의 주제라고 보기도 모호하다.

 

소설 전체를 이끌어가는 서사적 힘은 누가 뭐래도 남녀 주인공 프레더릭과 캐서린의 사랑이다. 삶과 죽음이 교차하는 전장에서 가장 긴요하고 절박한 것은 차라리 사랑이 아니겠는가. 가벼운 장난삼아 시작했던 두 사람의 만남은 서서히 진지하게 변하고 불현듯 떨어질 수 없는 사랑으로 자리 잡는다.

 

미국인과 스코틀랜드인이 이탈리아에서 전쟁에 참여한다는 설정은 작가 자신의 체험에서 비롯된 것이니만치 소설 상의 설정이라고 치부하기 곤란하다. 프레더릭이 이탈리아군으로 참전한 까닭은 작중에서 밝혀지지 않지만, 그가 만사에 심드렁한 태도를 보이는 점은 확실히 알 수 있다. 그것은 사랑에 대한 태도에서도 마찬가지다.

 

군종신부와의 대화에서 단호하게 사랑에 무관심함을 드러냈던 프레더릭. 그의 생각은 캐서린과의 관계 진전에 따라 사랑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가치로 자리매김함을 볼 수 있다. 사랑은 생명과 상통한다. 죽음과 직결되는 전쟁과 상극이다. 사랑과 전쟁, 생명과 죽음이 작중에서 팽팽한 긴장감을 불러일으킨다고 볼 때 반전사상을 표면에 내세우지 않았기에 오히려 더욱 반전에 대한 독자의 공감대를 형성한다.

 

나는 이미 그 일에서 손을 뗐다. 나는 그들 모두에게 행운을 빌었다. (P.361)

 

전쟁에 대해서는 잊을 작정이었다. 나는 단독 강화조약을 맺은 것이다. (P.376)

 

프레더릭은 원래 이 전쟁에 무심하다. 3국 출신이니만치 그에게 있어 전쟁의 대의명분은 전혀 다가오지 않는다. 그게 본디 프레더릭의 성향인지 아니면 이 전쟁의 공허함을 일찌감치 깨달아서인지 알 수 없으나 그가 명분과 이상보다는 현실과 실질을 더 중시하는 것만은 분명함을 알 수 있다. 오죽하면 승전과 패전 전망보다 수면을 더 믿는다고 할 정도다.

 

신성이니 영광이니 희생이니 하는 공허한 표현을 들으면 언제나 당혹스러웠다. 이따금 우리는 고함 소리만 겨우 들릴 뿐 목소리도 잘 들리지 않는 빗속에서 그런 말을 들었다. 또 오랫동안 다른 포고문 위에 붙여 놓은 포고문에서도 그런 문구를 읽었다. 그러나 나는 신성한 것을 실제로 본 적이 한 번도 없으며, 영광스럽다고 부르는 것에서도 조금도 영광스러움을 느낄 수 없었다. (P.290)

 

프레더릭의 전선 이탈은 그런 공허함의 극치를 퇴각하는 장교를 총살하는 이탈리아 헌병과 맞닥뜨리면서 발생한다. 실제 전투를 치러보지도 않은 자들이 이탈리아군은 결코 후퇴하지 않는다면서 즉결 처단을 하는 참담하고 어처구니없는 상황. 그는 깨끗이 손을 떼버린다.

 

프레더릭은 몰라도 캐서린에게 그는 운명적인 사람이다. 첫 만남 이후 그녀는 프레더릭에게 급속도로 빠져든다. 장난삼듯 가벼운 태도의 그와 달리 그녀는 곧바로 그에게 사랑의 감정을 표현한다. 사실 소설 전체적으로 프레더릭을 향한 캐서린의 사랑은 순종적이고 헌신적인 동시에 지고지순하다. 그녀는 프레더릭과의 사랑에 행복을 느끼고 자신의 것은 요구하지 않는다. 두 사람의 사랑은 지극한 합일에 이른다. 더 무엇을 바랄 것인가.

 

호사다마라고 하지 않는가. 죽음을 무릅쓰고 국경을 넘어가 스위스에서 호젓하지만 단란한 생활을 즐기던 그들. 사랑의 축복이라고 할 출산은 삽시간에 오히려 사랑의 비극으로 이어진다. 이 대목에서 프레더릭은 삶의 의미와 죽음의 필연성을 절실하게 깨닫는다. 그것은 곧 그가 인생의 무게를 알게 되었다는 점이다. 과거에는 미처 알지 못하였고 실감하지 못하였던 그것. 작가는 작품의 서두부터 마지막 장면까지 반복해서 독자에게 이를 상기시킨다.

 

[군종신부]는 내가 모르는 것, 일단 배워도 늘 잊어버리는 것을 언제나 알고 있었다. 나는 나중에 그것을 깨달았지만 그때는 그것을 알지 못했다. (P.28)

 

인간이라면 언제나 생리적으로 덫에 걸려 있다는 느낌이 들지.” (P.221)

 

인간은 죽는다. 그것이 무엇인지 몰랐어. 그것에 대해 배울 시간이 없었던 거야. 경기장에 던져 놓은 뒤 몇 가지 규칙을 알려 주고는 베이스를 벗어나는 순간 공을 던져 잡아 버리거든. 아이모처럼 아무 까닭 없이 죽이거나, 또는 리날디처럼 매독에 걸리게 하지. 하지만 결국에는 모두 죽이고 말지. 그것만은 분명해. 결국 살아남는다 해도 종국에는 죽임을 당하는 거야. (P.496)

 

작가에게, 프레더릭에게 그동안 전쟁과 죽음은 추상적이고 비개인적이며 머나먼 현상에 불과하였다. 두 사람의 도망병을 향한 사격, 아이모의 허무한 죽음 목도. 그리고 캐서린과의 사랑, 미래에 대한 희망, 갑작스러운 사별 등 일련의 체험을 통해 프레더릭은 전쟁과 죽음에 대한 추상적 의미의 인식에서 벗어나 보다 직접적이고 구체적 의미를 발견한다. 이처럼 개인적 깨달음에서 사회적 의미 발견에 도달함으로써 이 작품은 가장 뛰어난 반전문학이 된 것이다.

 

간호사들을 내보내고 문을 닫고 전등을 꺼도 소용이 없었다. 마치 조상(彫像)에게 마지막 작별 인사를 하는 것 같았다. 잠시 뒤 나는 병실 밖으로 나와 병원을 뒤로 한 채 비를 맞으며 호텔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P.503)

 

소설의 마지막 단락은 쓸쓸한 동시에 차라리 덤덤하다. 사랑하는 이와 영원한 작별을 고하고 싶은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마는 현실로 다가오면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제아무리 소리높여 통곡할지언정 떠나간 이가 다시 돌아올 리 없다. 인간은 필멸의 존재가 아니던가. 땅바닥에 주저앉아 울부짖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프레더릭의 마음 깊숙이 캐서린과의 사랑이 커다랗게 차지하고 있음을 독자는 모르지 않는다. 슬픔을 곱씹을지언정 슬픔에 익사할 수 없고 바람직하지도 않다. 남은 사람은 어쨌든 현실을 살아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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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주론 / 만드라골라 / 카스트루초 카스트라카니의 생애
니콜로 마키아벨리 지음, 이종인 옮김 / 연암서가 / 201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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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드라골라>를 수록한 책을 찾다 보니 <군주론><카스트루초 카스트라카니의 생애>는 재독을 하게 되었다. 기존 읽은 책과 차이점은 이 책은 영역본을 저본으로 삼았다는 것이며, 세 편을 한 권에 담고 있어 소위 가성비가 높다. 본 목적인 <만드라골라>에 앞서 <군주론><카스트루초 카스트라카니의 생애>를 다시금 일별해 본다.

 

옮긴이는 포르투나와 비르투를 번역하지 않고 독음을 그대로 사용한다. 다른 번역본도 그런 경우가 있으니 새삼스럽지는 않은데, 마키아벨리가 포르투나와 비르투를 여러 가지 용례로 사용하고 있어서다. 특히 군주가 갖춰야 할 비르투의 조건이 도덕적 선악을 넘어설 것을 그가 요구하고 있기에 논란이 생긴다. 마키아벨리의 사고를 이해하려면 그의 인간관을 파악해야 한다. 성선설과 성악설, X 이론과 Y 이론 등의 관점에서 볼 때 마키아벨리는 철저히 성악설의 견해를 밝힌다. 그가 현실에서 파악한 인간의 속성은 대체로 부정적이고 선하지 않다. 현실 정치를 할 때 현실 인간에 기반하여 논의하는 것은 당연하다. 마키아벨리가 인간 본성에 대하여 성선설을 믿었다면 전혀 다른 주장을 펼쳤을 것임은 확실하다.

 

인간은 감사할 줄 모르고, 변덕스럽고, 거짓말하고 기만하려 하며, 위험은 피하고자 하고 이득엔 탐욕스럽다는 것이 타당한 일반 원칙이기 때문이다. (P.109, 17)

 

왜냐하면 인간은 선을 강요당하지 않는 한, 언제나 악한 쪽으로 기울어지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P.144, 23)

 

카스트루초 카스트라카니는 체사레 보르자보다 더욱 이상화된 군주 모델에 가깝다. 체사레는 아버지 교황의 힘을 빌려 세력을 키우고 군주로서 확고한 토대를 세우기 전에 거꾸러지고 말았다. 카스트루초는 다르다. 그는 맨땅에서 맨손으로 왕업을 일구었다. 그가 성취해 낸 업적과 명성은 체사레보다 훨씬 뛰어나고 높다. 피렌체와의 전쟁에서 유리한 고지를 선점하기 위해 우호적인 세라발레의 군주 만프레드를 살해하는 장면 등을 보면 확실히 마키아벨리가 감탄할 만하다. 물론 독자는 카스트루초의 생애에서 주요 사실을 마키아벨리가 조작하였음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자신의 목적에 부합하도록 그는 카스트루초의 삶을 이상화시켰다.

 

<나의 친구 마키아벨리>에서 마키아벨리가 희극을 썼고, 그것이 당대에 매우 인기작이었다는 내용에 의아하였다. 아무리 마키아벨리가 가볍게 쓴 글이라고 하더라도 무심하게 넘겨지지 않는다. <만드라골라>는 코미디 요소를 담뿍 담고 있다. 모든 희극은 자체로 풍자 정신을 지닌다. 이 작품은 무엇을 풍자하고 있는가? 물론 당대의 피렌체, 나아가 이탈리아 사회상이다.

 

실은 이 이야기는 정말 경박합니다. 그래서 이 이야기가 유익하지 못하다고 생각하시는 현명하고 위엄 높으신 분들께는 이렇게 변명을 드릴까 합니다. 작가는 이런 하찮은 생각들로 머리를 굴리며 자신의 비참한 삶은 좀 더 즐겁게 만들려는 것이라고요. 그렇지 않으면 작가는 어디로 고개를 돌려야 할지 모르니까요. 그는 이런 것이 아닌 다른 것으로써 또 다른 능력을 보여줄 기회를 차단당했습니다. 게다가 그의 노력에 대한 보수를 기대할 수가 없으니 이렇게 할 수밖에 없는 일이죠. (P.165, 프롤로그)

 

프롤로그를 보면 우리는 마키아벨리가 처한 딱하고 막막한 상황을 헤아려 볼 수 있다. 물속에 가라앉지 않으려 발버둥 치고 있는 백조와도 같은. 그럼에도 그의 날카로운 비판 정신은 약해지지 않는다. 칼리마코는 남성 주인공답게 군주의 비르투를 갖춘 인물이다. 그에게 있어 루크레치아가 유부녀라는 점은 전혀 고려의 대상이 아니다. 아름다운 여자를 빼앗아 자기 것으로 삼겠다는 목적이 더욱 중요하다. 영토를 정복하는 것과 같은 논리다.

 

(칼리마코) 난 이제 그 어떤 일도 두렵지 않아. 나는 어떤 일이라도 하겠어. 설사 그게 어리석고, 잔혹하고, 사악하더라도! (P.176, 13)

 

여성 주인공의 이름이 루크레치아인 점은 분명 의도적이다. 셰익스피어의 작품으로도 유명한 루크레치아는 고대 로마왕국에서 정절의 화신이다. 강제로 정조를 빼앗기자 복수를 당부하고 공개적으로 목숨을 끊은 루크레치아와, 남편에 의해 억지로 외간 남자를 맞아들여야 했지만 남편을 배신하고 그와의 관계를 지속하려는 루크레치아. 작품 전반부에서 도덕성에서 명성 높던 그녀의 변신은 반전의 묘미와 함께 더는 로마 시대를 기대할 수 없다는 냉소를 자아낸다. 하지만 독자는 그녀를 욕할 수 없다. 루크레치아에게 있어 이제부터는 칼리마코가 진짜 남편이며, 추후 아기 아빠가 될 것이므로. 니차의 다음 대사는 이중적 의미의 진실에 해당한다.

 

(니차) 루크레치아, 이분(칼리마코)이 바로 노년에 우리가 의지할 아이를 갖게 해주신 분이야. (P.251, 56)

 

어리석은 남편, 욕심 많은 사제, 아름다운 아내, 멋진 젊은이, 부정을 설계하는 악역. 만드라골라라는 사랑의 미약 차용. 이러한 전형적인 희극 요소 외에 극 시작 전과 막과 막 사이에 등장하는 칸초네가 독특하다. 고전 희곡에서 코러스의 유산으로 볼 수 있다. 실제로 기능도 유사하다.

 

이 두 작품은 <군주론>을 잘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줄 뿐만 아니라, 관직에서 물러나 유배 생활에 들어선 마키아벨리의 심경 변화를 파악할 수 있게 해준다. (P.19, 옮긴이의 말)

 

한 권의 책에 굳이 세 편을 집어넣은 까닭은 옮긴이의 말에 잘 나타나 있다. <군주론>을 중심으로 내용상으로 연결되어 있어 마키아벨리의 사고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는 것이다. 루크레치아처럼 아름다운 여인을 차지한 칼리마코는 결코 도덕적으로 훌륭한 인물이 아니다. 목적 달성을 위해서 간계를 쓸 수 있다는 점에서 체사레와 카스트라초와 마찬가지의 유형이다. 두 사람과 달리 칼리마코는 비르투와 포르투나가 절묘하게 맞아떨어져 끝내 목적을 이룬다. <만드라골라>는 후대 전문적인 극작가들의 작품에 비하면 성격유형이 단순하고 사건 전개도 느슨하다. 뛰어난 문학작품으로서라기보다는 마키아벨리의 사상을 엿볼 수 있는 다른 창구로 간주하고 싶다.

 

마지막으로 작품해설의 관점도 독특하지만, 부록의 용어·인명 풀이가 매우 유익하다. <군주론>을 처음 읽는 독자보다는 다른 번역본을 읽어본 적 있는 독자에게 권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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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륜선 타고 온 포크, 대동여지도 들고 조선을 기록하다 - tvN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 '유진 초이'의 실존 인물 '조지 포크'의 조선 탐사 일기
조지 클레이튼 포크 지음, 사무엘 홀리 엮음, 조법종 외 옮김 / 알파미디어 / 202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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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서는 18845월 조선에 부임한 최초 미국 외교무관 조지 클레이튼 포크가 미국 국무부 및 해군부에 보고하기 위해 진행한 현장 조사 기록이다. (P.13, 일러두기)

 

미국 외교관의 최초 조선 보고서라는 부제가 이 책의 성격을 말해준다. 저자 포크는 188411월과 12월에 걸쳐 40여 일간 조선 남부지역에 대한 조사 여행을 떠났고 날마다의 여정을 꼼꼼히 일기로 남겼다. 저자 사후에 방치되었던 기록을 사무엘 홀리가 발견하여 정리하고 편집하여 출판하였다. 이 책은 저자와 편자, 그리고 역자의 공동 노력이 한데 어우러진 산물이라고 평가할 만하다.

 

이쯤 해서 저자 포크가 어떤 인물인지 궁금하다. 작가 소개에 따르면 1883년 민영익을 정사로 파견한 보빙사의 미국 통역이었다고 하며, 그의 요청으로 조선 주재 미국 공사관 외교관으로 함께 귀국하였다고 한다. 그는 일본어에 능통하며 한국어도 구사할 줄 아는 당시로서는 드물게 보는 동양통이다.

 

그의 여정은 가마를 타고 한양을 떠나 안성, 공주, 전주, 나주, 광주, 남원을 거쳐 경상도 합천, 진주, 동래, 대구, 상주를 지나고 충주, 광주를 통해 한양으로 돌아온다. 그의 여행은 단순한 관광이 아니다. 미지의 국가에 파견한 외교관이니만큼 현지에 대한 정보와 자료 획득 목적이 매우 크다. 1차로 경기 북부지역을 돌아보고, 2차에는 좀 더 길게 경기 남부지역과 삼남지역을 조사한 것이다. 그는 일기에 매일의 기압, 온도를 표기한다. 몇 분 단위로 여정을 상세하게 기록하며, 방위도 꼼꼼하게 기재한다. 이 모든 것이 조사 여행임을 확실하게 해준다.

 

포크의 일기에서 학술적으로 주목할 점은 그가 무엇보다 <대동여지도>를 휴대하고 적극적으로 활용한 최초의 외국인이며, 지도의 우수성을 인정하고 있어서다. <여지도>에는 더구나 현지 지명을 모두 발음에 따라 영문으로 표기하고 있기도 하다. 거북선에 관련한 사실도 간과할 수 없다. 옮긴이의 해설에 따르면 거북선을 세계 최초의 철갑선으로 소개한 인물이 기존 알려진 것과는 달리 포크라고 한다. 매우 흥미로운 사실이 아닐 수 없다. 이 두 가지 점만 놓고 보더라도 이 책의 의의는 자못 크다.

 

전체 450면의 분량 중 작가와 작품 소개 및 해설에 100면 가까이 할애하고 있는데, 일반 독자에게는 생소한 이 책의 내용과 의의를 적극 소개하기 위한 옮긴이들의 노력을 높이 평가하고 싶다. 그럼에도 대중이 읽기에 내용 자체는 결코 재미있다고 말하기 어렵다. 해군 무관인 외교관이 업무 목적으로 조사 여행 기록을 일기로 남겼다고 하면 거기에 얼마만 한 개인적 상념과 문학적 표현이 깃들일 수 있을지 의심스러울 것이다. 구한말의 풍속과 사회상 등을 알 수 있어 흥미로운 대목도 부분적으로 있지만 그의 감정이 직설적으로 표현된 경우는 대체로 짜증 낼 때가 많다.

 

저자가 가장 애를 먹은 건 바로 화장실 문제였다. 그는 서양처럼 개인의 프라이버시를 존중하지 않는 조선의 전통적 용변 방식으로 신체적, 정신적 고통을 겪었고 이때마다 매우 예민해졌다. 자신을 신기한 동물 보듯이 무례하게 다가오거나 행동하는 군중들의 태도도 마찬가지다.

 

그가 조선인들을 바라보는 관점은 기본적으로 우리네가 소위 미개한 원시부족사회를 방문하고 바라볼 때와 비슷하다고 보면 된다. 제아무리 겸손하게 처신하더라도 자국과 자문화 우월주의가 근본적으로 자리 잡고 있다. 이 때문에 포크를 탓할 필요가 없는 게 당대 조선을 경험한 모든 서양인의 보편적 인식이다.

 

나는 평화를 지향하는 문명국 미국 정부의 하급 관리로서 나라를 대표해 아직은 미개하지만 화려한 옷을 걸친 위대한 족장(전라감사) 옆에 앉아 있었다. (P.198, 1111, 전주)

 

공정하게 하자면 포크는 같은 서양인조차도 무례하다면 마찬가지로 비판적이다. 부산 세관에서 만난 어떤 사람을 쓰레기라고 기록에 적어놓기도 하였다.

 

그는 충남 논산과 용안 근처 금강에서 과거 미국의 앨러트호가 좌초하였을 때 도움을 주었던 것으로 확인한 용안 현감에게 미국을 대표해서 감사를 전한다. 자신과 동행한 묵과 수일에게 불만을 토로할 때도 있지만 그들이 충심으로 자신의 임무를 수행한 데 대하여 찬사를 하며, 유사시에 미국 정부가 자신을 대신하여 그들에게 대가를 지불할 것을 요청하는 문장을 일기에 남기기도 하였다. 이처럼 그는 나름대로 공정하고 균형을 유지하려 애쓴 인물이다.

 

비록 이따금 문화적 차이와 이해 부족에 따른 편견이 드러나지만 그가 보고 기록한 19세기 말의 조선 지방의 모습과 삶의 양태가 생생하게 눈앞에서 재현된다. 과거에는 잘 관리하였던 도로가 지금은 형편없이 관리되고 있다는 지적, 사람들이 좋은 집을 짓지 않는 게 정부와 관리의 수탈을 모면하기 위해서라는 것, 공물 제도가 타락하여 정부가 거대한 강도나 마찬가지라는 비판, 과거의 암행어사와는 달리 오늘날의 어사는 부패하였다는 점 등을 알 수 있다.

 

그는 특히 인상적인 대목은 자세하게 기록하거나 일기 끝에 별기로 남긴다. 담양 석당간, 남원 만복사지 석불입상, 대구의 고인돌 등 생소한 문화유산에 깊은 관심을 보이고, ‘통영의 영웅이 스스로 죽음을 택한 이유와 비극적으로 죽은 임경업 장군의 일화를 듣고 기록한다. 민중들 사이에 이순신과 임경업에 관한 이야기가 널리 퍼졌음을 알게 해준다. 남원 광한루의 오작교 이야기와 밀양 영남루에 얽힌 슬픈 전설도 그의 펜을 붙잡는다.

 

사진 원판이 나주에서 물에 빠져 모조리 망가지고, 기대를 품었던 해인사에 실망한 채 지친 심신으로 그토록 가고자 했던 통영을 건너뛰는 등 희비가 교차하는 여정의 그에게 맞닥뜨린 것은 갑신정변의 소식이었다. 민영익의 도움으로 이 여행을 실행에 옮길 수 있었고, 갑신정변의 주역인 개화파와 가까운 관계를 유지했던 포크의 입장으로서는 정변의 결과가 미국의 행보는 물론 자신들의 안위와도 직결되는 중대한 사안이었으리라.

 

한 서양 외교관의 900마일 여정의 발자취를 이렇게 차근차근 뒤따르는 이유는 그것이 구한말 당대 상에 대한 새로운 발견과 함께 보다 보편적 인식을 얻기 위해서다. 자기 모습을 들여다보기 위해 거울이 필요하듯 우리 조상의 삶도 타자에 의한 판단이 더욱 정확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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