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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장터극 선집
김찬자 지음 / 연극과인간 / 2013년 8월
평점 :
<수록 작품>
1. 사랑과 마법의 힘
2. 똑똑한 동물들 (퓌즐리에)
3. 사랑 때문에 죽은 아를르캥과 메제탱 (르사주)
4. 도돈의 숲 (르사주, 도르느발, 퓌즐리에)
5. 판도라의 상자 (르사주, 도르느발)
6. 장터극 유령 (르사주, 도르느발)
7. 아를르캥-데우칼리온 (피롱)
프랑스 중세의 파블리오 작품집을 읽으려다가 중세 소극(笑劇) 작품의 존재를 알게 되었고, 소극집을 읽다 보니 어느덧 장터극이라는 생소한 유형에까지 이르렀다. 장터극은 글자 그대로 18세기를 전후하여 중세 프랑스 장터에서 공연된 이런저런 유형의 무대 작품을 통칭해서 일컫는 용어다. 장터라는 공간적 배경을 제외하면 상연된 극 형식은 꽤나 다양하다. 짧은 소극, 마리오네트극, 현수막극, 무언극 등. 이렇게 형식이 다양한 까닭은 장터극이 주류 문화층에 편입되지 못하였기에 지속해서 억압을 받아서이다. 장터극이 인기를 끌수록 정규 상설극장은 경쟁의식을 가지게 되고 권력의 힘을 빌려 탄압하려고 하였다. 무대에서 배우가 연기 또는 대화를 사용하지 못하게 하거나 대사 자체를 아예 쓸 수 없게 하는 등의 방식으로. 장터극의 억압은 역설적으로 장터극의 역동적 발전으로 이어졌으므로 자생적 문화를 인위적으로 억누를 수 없는 사례를 여기서 다시 발견한다.
장터극은 위반의 연극, 순종적이지 못한 연극이다. 매끈하고 절제된 규범과 질서의 미학에서 벗어나 있는 장터극은 의도적으로 패러디적일 뿐 아니라 고상한 것을 비속한 것으로, 영웅적인 것을 광대짓으로, 미를 추로 바꿔놓음으로써 근본적으로 파괴적이다. (P.6, 머리말)
철저한 대중문화, 민중 문화적 속성을 지닌 장터극이기에 최우선적으로 관객을 끌어모을 수 있는 재미 요소가 중요하다. 구성과 대사 자체의 재미도 중요하지만, 무대에서 춤, 노래, 곡예 등 다양한 볼거리가 또한 두드러진다. 장터극은 그리스 신화를 차용하지만 완전히 당대화, 서민화하고 있는데, 관객의 친근감을 유도하기 위해 내용 자체도 평이하며, 등장인물의 행동, 대사도 욕설을 섞는 등 가식 없는 솔직함을 드러낸다.
수록작을 살펴보면 단독집필 작품도 있지만, 협업 작품도 많음을 볼 수 있다. 대표적인 작가인 르사주는 문학사적으로 <질 블라스 이야기>라는 피카레스크 소설로 더 유명하다. <사랑 때문에 죽은 아를르캥과 메제탱>은 현수막극이며, <장터극 유령>은 독백 프롤로그극, <아를르캥-데우칼리온>도 독백극이다. 아를르캥, 메제탱, 피에로처럼 전형화된 인물이 여러 작품에 등장인물로 나타남도 독특한 점이다.
<사랑과 마법의 힘>은 마법사 조로아스트르가 마법의 힘으로 양치기 처녀와 결혼하려다 신의 개입으로 실패하는 내용인데, 마법사가 자유자재로 부리는 악마들에게 하인 메를랭이 고통을 겪는 장면이 우습게 전개된다. 이 극은 대사 자체의 힘 외에 주변 인물들로 분장한 곡예사들의 여러 곡예 행동이 더 관객의 호응을 얻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마지막 장에서 메를랭이 사라반드 춤을 추며 끝나는 장면도 그러하다.
<똑똑한 동물들>은 <오뒷세이아>의 블랙 오마주라고 할 만하다. 마녀 키르케에 의해 동물이 된 부하들을 다시 인간으로 되돌리고자 하는 율리시즈. 그의 예상과 달리 늑대, 돼지, 암탉, 황소, 홍방울새는 모두 동물의 삶에 만족해하며 인간이 되기를 거부한다. 마지막으로 돌고래만이 인간으로 변신하여 아를르캥이 된다. 표제 그대로 동물의 삶을 선택한 그들이 더 똑똑하다는 조소와 풍자가 곁들인 재밌는 작품이다. 이 극은 중간마다 노래가 여러 수록되어 있어 실제 무대로 관람하면 흥미로울 것이다. 마지막 장에 악사와 댄서들의 노래와 음악, 춤이 어우러지는 무대를 보여준다.
장터극은 공식극장들의 요청에 따른 고등법원의 개입으로 무대에서 말하거나 노래할 권리를 잃게 되자 공연금지를 피할 수 있는 무언극, 현수막극 등의 여러 수단들을 강구한다. (P.47)
<사랑 때문에 죽은 아를르캥과 메제탱>은 현수막극이다. 배우가 직접 대사를 말하지 못하고, 현수막에 대사를 써서 관객에게 보여주는 방식이다. 콜롱빈이라는 아가씨를 아를르캥, 메제탱, 스카라무슈, 피에로 등의 젊은이가 모두 좋아하였다. 콜롱빈이 재산 많고 나이 든 박사를 남편감으로 선택하자, 실망한 아를르캥과 메제탱은 스스로 물에 빠져 죽는다. 콜롱빈은 피에로를 연인으로 삼는다. 내용으로만 보면 무겁고 슬픈 분위기여야 하지만, 실상은 전혀 그렇지 않다.
(콜롱빈) 자, 나리, 얼른 가서 미망인에게 / 넉넉한 재산을 남기도록 하세요. / 그리고 종, 종/리제트 라 리제트 / 그리고 종, 종/리제트, 라 리종. (P.51. 2장)
대사를 못하는 대신 많은 노래가 들어 있어 거의 뮤지컬같은 느낌이 든다. 경쾌한 후렴구를 사용하여 분위기를 유쾌하고 가볍게 만드는 효과를 주기도 한다. 그래도 대단원에서 두 사람의 유령이 나타나고, 동물들이 등장하여 박사와 콜롱빈을 괴롭히며 끝나기에 두 사람에 대해 아주 나 몰라라 하지는 않음을 알 수 있다.
<도돈의 숲>은 21장으로 구성된 장터극 치고는 긴 작품이며, 짜임새도 훨씬 정교하다. 배우자의 부정과 신부 납치라는 사건이 무시되었던 신탁의 떡갈나무의 개입으로 제자리를 찾아간다는 내용인데, 역시나 많은 노래가 극 중에 불리는 것은 공통된 특성이다. 신부 콜리네트의 보석을 탐내어 납치하는 도둑 역할이 아를르캥과 스카라무슈인 점도 색다르지 않다.
(아를르캥) (떡갈나무에게 다가가며) 거짓말 하시는 거죠!
(떡갈나무) (자기 가지들 중 하나로 뺨을 때리며) 자, 거짓말을 했으니 벌을 받아!
(아를르캥) 살려 주세요! 나무가 말을 하고 뺨을 때리다니! (P.84, 20장)
떡갈나무에게 호되게 당하는 아를르캥의 행동이 재미있게 그려진다. 마지막 장 이후에 민속 무용곡과 노래를 부르며 흥겹게 마무리하는 장면은 과연 장터극답다.
<판도라의 상자> 역시 그리스 신화를 기반으로 하는데, 다른 장터극과 달리 음악도, 노래도, 춤도 등장하지 않는 산문극이다. 공식 극장과의 대립으로 권리를 박탈당해서라고 한다.
(메르쿠리우스) 무대장치도 없는 곳에서 / 춤과 노래도 할 수 없게 된 불행한 배우들을 / 너그럽게 봐 주세요. / 금지된 것이 하나 둘이 아니랍니다. / 춤과 노래는 우리 이웃 배우들만 할 수 있다고 하네요. / 마음을 즐겁게 하는 것이 우리의 유일한 능력입니다. / 이렇게 큰 곤경으로부터 벗어나도록 / 여러분 지갑을 열어주시기 바랍니다. (P.114, 24장)
24장과 마지막 보드빌로 이루어진 역시 규모 있는 작품이다. 판도라의 상자는 누구나 알고 있는 유명한 이야기인데, 작가는 여기서 피에로와 올리베트의 결혼을 앞두고 상자 개봉 전후에 등장인물들의 언행이 어떻게 바뀌는지, 그로 인해 두 연인의 관계가 어떻게 변질되어 가는지를 극적으로 대조하여 보여준다. ‘순수’와 ‘믿음’으로 대변되는 마을은 에덴동산처럼 일체의 악덕을 모르는 곳이었건만 이후 예의, 질투, 교태, 질병, 분노, 사리사욕, 변절, 거짓말, 복수, 류마티즘, 인색함, 그리고 코리동을 통해 권력욕이 모습을 차례차례 드러낸다.
<장터극 유령>은 대화사용을 금지당하던 시절을 타개한 방식의 독백극이다. 제아무리 재미나고 흥미롭게 뛰어난 대사도 주고받지 못하고 혼자서 주절주절 말하는 건 한계가 있기 마련이다. 따라서 곡예, 몸짓 같은 시각적 볼거리의 중요성이 더욱 부각될 수밖에 없다. 장터 유령이 알려준 대로 낚시질로 건져낸 고등어, 돌고래, 넙치, 곤들매기, 이탈리아 물고기, 송어, 황어 같은 물고기들로 무언극단을 꾸리겠다는 발상의 전환! 예쁜 송어 올리베트가 노래를 부르자 큰일 난다며 황급하게 조용히 시키는 행동은 역시 풍자에 다름 아니다.
(아를르캥) 무대는 구구 섬, 여러 라찌, 소음, 마술, 기계장치 등등을 곁들인 독백극. 바로 우리가 필요로 하던 작품이야. (P.130, 11장)
<아를르캥-데우칼리온>도 그리스 신화를 배경으로 하는 3막의 규모가 큰 독백극이다. 대홍수 이후 데우칼리온이 돌을 던져 인간들을 만들어냈다는 이야기를 희극적으로 재조합한다. 익숙한 아를르캥이 데우칼리온 역할을 맡는다. 아내 피라가 죽은 줄 알고 좋아했다가 살아 있는 모습을 보자 한탄하는 대목, 천마 페가수스가 “당나귀 귀에 칠면조 날개”(P.150, 2막 4장)를 한 모양새 등 독백극의 단조로움을 회피하기 위한 희극적 노력이 가상하다. 풀치넬라의 도움으로 여러 인간을 만들어내는데 농부, 수공업자, 검을 든 남자까지는 괜찮지만 법관에게는 신랄한 비난을 퍼부어대어 당대 민중의 법관에 대한 감정을 알 수 있다.
장터극은 실제 무대에서 공연을 봐야 진면목을 알 수 있다는 한계 속에서도 권력과 지배층의 위선적 도덕률에 지배당하지 않는 중세 민중의 적나라할 정도로 솔직한 문화를 엿볼 수 있는 점에서 무척 유익하다. 참고로 악보집을 부록으로 수록하고 있어 음악을 잘 아는 독자라면 도움이 될 수 있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