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로선집 - 에드워드 2세 / 파리의 대학살 / 디도, 카르타고의 여왕 나남 한국연구재단 학술명저번역총서 서양편 306
크리스토퍼 말로 지음, 강석주 옮김 / 나남출판 / 201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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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록 작품>

1. 에드워드 2

2. 파리의 대학살

3. 디도, 카르타고의 여왕

 

예전에 크리스토퍼 말로의 작품에 관심을 가지고 <탬벌레인 대왕>, <몰타의 유대인>, <파우스투스 박사>을 강석주 번역으로, <디도, 카르타고의 여왕>을 임이연 번역으로 읽었다. 그의 나머지 작품은 번역이 이루어지지 않아 그냥 지나칠 수밖에 없었다. 근년 들어 셰익스피어를 포함한 영국 르네상스 시대 희곡 작품을 두루 섭렵하는 과정에서 다시금 말로와 마주쳤다. 시간이 꽤 경과하였기에 새로운 마음가짐으로 다른 번역본을 골라 이전 작품을 재독하고 강석주 번역의 이 책을 비로소 펼친다.

 

<디도, 카르타고의 여왕>

 

이 비극에서 유난히 잔상에 남는 장면은 아이네이아스가 디도와 카르타고를 떠난 후 등장인물들이 보여주는 일련의 대사와 행동이다. 디도는 자신이 연인에게 예고하였듯이 카르타고의 여왕으로서의 지위를 버리고 스스로 불 속에 뛰어든다. 디도의 죽음을 목격한 이아르바스, 이아르바스의 자살을 본 안나 모두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모두가 사랑하는 대상에게서 사랑을 얻지 못한 불행한 사람들이다.

 

(디도) 살아라, 못된 아이네이아스여! 진실된 디도는 죽는다. (P.327, 51)

 

과연 디도는 진실하다는 표현을 쓸 만하다. 그녀와 이아르바스는 곧 결혼할 사이였지만, 신들의 개입으로 그녀는 불가항력적으로 아이네이아스를 사랑하게 된다. 멸망한 트로이를 떠나 방랑하던 아이네이아스 처지에서도 아름다운 여왕, 재건의 토대가 될 카르타고는 매혹적인 정주처가 될 수 있었다. 그는 이를 맹세하기조차 한다. 아이네이아스는 주피터의 명령을 따라 카르타고를 떠날 수밖에 없다고 말하지만 디도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는다.

 

(디도) , 아니에요, 신들은 연인들의 사랑을 측정하지 않아요. / 아이네이아스를 불러내는 것은 아이네이아스 자신이에요. (P.319, 51)

 

제아무리 아이네이아스가 주피터를 핑계 삼지만 결국 이를 수용할 것인가 거부할 것인가의 주체적 판단은 그에게 있음을 그녀는 명백히 짚어내고 있다. 고대와 중세에 신의 권위가 절대적이라면 르네상스 시기에 신의 권능은 의심과 조롱의 대상이 된다. 사랑하는 여인과 확실한 토대가 있음에도 고대인 아이네이아스는 불확실한 신의 예언을 좇아 떠난다. 작가 말로는 이렇게 관객에게 되묻는다. 가니메데스와 희희낙락하는 주피터, 서로 유치하게 배척하는 비너스와 주노와 같은 신의 명령이 르네상스 당대의 독립적인 인간에게 과연 절대성을 지니는가를.

 

<파리의 대학살>

 

종교개혁에 따른 신교와 구교의 갈등은 종교를 떠나 역사적으로 많은 폐해를 끼쳤음을 우리는 익히 알고 있다. 헨리 8세의 수장령으로 일순간에 가톨릭을 배척하고 국교회 체제로 전환한 영국도 내부적으로 평화롭지 못하였다. 종교의 본질이 무엇인가를 되새겨볼 때 종교로 인해 다툼과 살육이 무자비하게 자행되고 그것이 신의 이름으로 정당화되었음은 참으로 아이러니다. 말로는 이웃 나라 프랑스의 역사적 사례에서 그것을 잔혹하게 보여준다.

 

(대비 카트린느) (방백) 잔인한 피로 이 결혼식을 끝장내 주리라. (P.165, 1)

 

종교 간 분쟁을 봉합하기 위해 추진된 나바르 왕과 마가레트 왕비의 결혼. 그것이 평화로운 결과로 이어지지 않음은 왕비의 어머니 카트린느 대비의 방백으로 초반부터 예고된다. 결혼식은 신교 세력을 일망타진하기 위해 구교인 카트린느 대비와 기즈 공작, 앙주 공작 일행이 꾸민 음모였음을.

 

카트린느 대비와 기즈 공작의 불륜, 두 사람의 엄청난 권력욕. 형 샤를 왕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앙리 왕이 된 앙주 공작과 기즈 공작의 불화. 기즈 공작의 살해, 구교 수사에 의한 앙리 왕의 독살 등. 희곡 한 편으로 담기에는 무리일 정도로 종교와 정치를 둘러싼 숨 가쁜 전개가 이어진다. 여기서 두드러진 대목은 시종일관 반복되는 죽이라는 대사다. 앙주, 뒤멘느, 공자고, 레트, 그리고 기즈는 불문곡직하고 신교도를 모두 죽이겠다고 신성한 십자가에 맹세한다. 죽음이 임박한 앙리 왕은 나바르에게 로마 교회를 파멸시킬 것을 맹세시키며, 부르봉 왕조를 개창하는 나바르 또한 엄숙하게 구교 섬멸을 선언한다.

 

(기즈) 난 정책적으로 종교를 만들어냈지. / 종교란 악마 같은 것이야! / , 부끄럽군, 아무리 그렇게 보이지 않더라도, / 그토록 단순한 소리를 지닌 단어가 / 그렇게 중요한 문제의 동기가 된다고 생각하다니. (P.170, 2)

 

이 작품에서 종교는 부수적이다. 권력을 장악하기 위한 도구와 무기로 종교를 방편 삼고 있음을 기즈는 인정한다. 기즈는 왕위로 올라서기 위한 갈망으로 가득 차 있다. 극 중에서 진정한 권력욕의 화신은 카트린느 대비다. 그녀의 맹렬한 욕망 앞에서 모성애조차 힘을 빼앗길 정도다. 두 사람이 불륜 관계임이 흥미롭다. 권력의 끝판에는 누가 남아 있을까.

 

(대비 카트린느) 만약 그가 내 말을 거절한다면, / 그의 형처럼 즉시 그를 제거하고 / 무슈가 왕관을 차지하게 할 것이오. / , 내 뜻대로 되지 않으면 모두 다 죽일 것이오. / 살아있는 한, 카트린느가 여왕이기 때문이오. (P.202, 14)

 

<에드워드 2>

 

셰익스피어의 영국 사극 독자라면 말로의 이 작품이 낯설지 않다. 말로의 에드워드 2세는 셰익스피어의 에드워드 3세의 부왕이다. 하지만 양자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극과 극으로 나뉘는데, 에드워드 2세는 치욕스러운 불명예를 안고 죽임을 당한다.

 

서양 사회에서 동성애는 범죄 행위로 처벌받는 죄악이었다. 기독교적 가치관은 이를 금기시하였다. 하물며 다른 사람도 아닌 왕이 동성애를 자행한다면 이는 당대 사회에 어마어마한 충격을 줄 수밖에 없다. 백번 양보하여 임금은 무치(無恥)라고 관용적 마음을 갖더라도 은밀한 사생활이라면 몰라도 버젓이 드러내놓고 표방한다면 용납받기 어려울 것이다.

 

말로는 에드워드 2세와 귀족계급 간 알력 원인을 단순화한다. 왕의 동성애, 그리고 개비스톤과 훗날 스펜서에 대한 왕의 무분별한 총애. 왕은 자기 총신인 개비스톤을 옆에 두는 것으로도 모자라 그에게 엄청난 직위를 하사한다.

 

(에드워드) 짐은 이 자리에서 그대를 최고 시종장, / 국가와 짐을 보좌할 비서관, / 콘월 백작, 맨의 영주이자 왕으로 삼노라. (P.24, 11)

 

개비스톤 본인은 물론, 왕의 동생인 켄트 백작조차도 과분하다고 지적하지만 왕은 굽힘이 없다. 이 정도의 지위야말로 사랑하는 연인에게 왕으로서 줄 수 있는 선물로 여기며, 귀족들이 그에게 머리를 조아리도록 강요한다.

 

(에드워드) 그가 비록 태생이 천하다 할지라도 나의 총신이니 / 너희 중에 가장 거만한 자도 그에게 몸을 굽혀야 할 것이다.

(랭카스터) 전하, 저희를 이렇게 경멸하시면 안 됩니다. (P.34, 14)

 

귀족들의 반발은 당연하다. 랭카스터 백작, 숙부와 조카 모티머 등은 왕의 처사에 극력 반대하여 위력으로 왕을 굴복시킨다. 왕과 귀족의 잇따른 대립, 두 세력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는 왕비 이사벨라. 말로는 에드워드 왕의 무분별한 언행과 정당하지 못한 정책을 통해 그가 왕으로서 자격 미달임을 독자에게 보여준다. 오죽하면 켄트 백작마저 형을 떠나 왕의 반대편으로 돌아서고 만다.

 

겉보기에 갈등의 원인은 왕의 동성애이고, 왕이 개비스톤과 스펜서에게 베푸는 과도한 특혜지만 조카 모티머의 대사에서도 알 수 있듯이 이는 권력의 키를 누가 쥐고 있는가에 대한 다툼이다. 에드워드 왕은 자신이 왕이기에 만사를 마음대로 할 수 있다고 믿으며, 랭카스터를 위시한 귀족들은 왕의 권력은 귀족들의 지지와 옹립을 기반으로 하고 있기에 여차하면 왕도 굴복시킬 수 있다고 믿는다. 그들의 갈등은 끝내 전면적인 무력 충돌로 이어지고 귀족들의 몰락과 에드워드 왕의 승리로 귀결된다. 승리의 기쁨도 잠시, 대륙에서 건너온 이사벨라 왕비와 조카 모티머의 개입으로 왕은 쫓겨나고 만다.

 

권력은 양립하지 못한다. 권력은 독선적이다. 권력을 빼앗긴 과거 권력자는 우선적 제거대상자가 되고, 그것을 요구한 게 이사벨라 왕비임이 아이러니하다. 왕에게 버림받은 왕비가 조카 모티머와 부정한 관계를 맺었다고 비난한들 부질없다. 왕비는 아들을 왕좌에 올리려는 목적으로, 조카 모티머는 실질적 권력자가 되려는 의도로 영합하였기에 그들의 사랑의 순수성은 알 길이 없으니. 최소한 이사벨라는 그를 사랑했음을 마지막 장에서 확인할 수 있다.

 

(조카 모티머) 이제 모든 게 분명해. 왕비와 모티머가 왕국을 / 다스릴 것이다. 왕도 그 누구도 우릴 지배하지 못한다. / 내 적들은 괴롭히고, 친구들은 승진시킬 것이다. / 내가 명령을 내린 것을 누가 감히 제어할 것인가? / 난 너무도 강력하여 운명도 날 해칠 수 없다. (P.146, 54)

 

권력은 무자비하며 맹목적이라고 말한다. 이 작품에서 권력을 쟁취한 이들은 모두 반대파를 서슴없이 제거한다. 에드워드 왕은 귀족들을, 이사벨라와 조카 모티머는 에드워드 왕을, 켄트 백작을. 그리고 권력은 항상 오만하다. 조카 모티머는 에드워드 왕의 전횡에 분노하였지만, 스스로 권력의 과실에 탐닉한다. 그의 득의양양한 대사를 보면 에드워드 왕과 차이가 없음에 놀라게 된다. 그것이 권력욕의 힘이다. 그의 몰락은 여기서 불가피하게 된다.

 

말로는 역사적 사건의 전개를 충실히 따르는 것처럼 보이지만 극적 흐름을 위해 부분적으로 연대를 뒤섞기도 하며 등장인물의 이름도 슬쩍 고친다. 개비스톤은 동일하지만, 극 중의 스펜서는 역사적으로 휴 데스펜서이다. 개비스톤은 단순한 총신이지만, 데스펜서는 간특한 총신으로 평가받는다. 에드워드 왕의 몰락은 사실 개비스톤이 아니라 데스펜서에서 비롯하였다.

 

옮긴이 해제에 따르면 <디도, 카르타고의 여왕>은 그의 초기작이며, <에드워드 2><파리의 대학살>은 말기작이다. 특히 후자는 말로의 죽음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고 한다. 그의 다른 작품들과 달리, 후자는 당대 정치 현실을 직접적으로 다루고 있다. <에드워드 2>는 왕의 자격, 총신, 왕과 귀족의 관계 등을 다루면서 왕의 권력이 절대적이고 무제한이 아니며 왕좌가 전복될 수 있음을 알려주며, <파리의 대학살>은 종교의 가면을 뒤집어쓴 권력욕이 얼마나 무시무시한가를 보여주면서 종교 간 갈등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폭로한다.

 

말로의 작품세계는 치열하다. 셰익스피어라면 민감하고 무거운 주제를 다루더라도 힘을 빼고 해학을 집어넣으며 말랑말랑하게 넘어갔을 텐데 말로는 오로지 정공법이다. 그의 작품을 평하면 으레 등장하는 극단적 상상력과 극한의 욕망을 추구하는 인간형은 이를 말해준다. 이 책에 수록된 작품에서 우리는 디도에게 더할 수 없는 연민을 품는 동시에 권력 헤게모니를 쟁취하려는 세력 간 분쟁의 파국이 어떻게 비인간적인 결과로 이어지는지를 동시에 깨닫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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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학자의 열대 인문여행 - 야만과 지상낙원이라는 편견에 갇힌 열대의 진짜 모습을 만나다
이영민 지음 / 아날로그(글담) / 202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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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여행 자유화 이후 매년 점점 더 많은 우리나라 사람들이 전 세계로 흩어져 나간다. 유명 관광지의 경우 한국 사람으로 가득하다는 말도 들리는 걸 볼 때 불과 몇십 년 전 김찬삼 홀로 세계여행을 다니던 시절에 비하면 격세지감이라고 할 만하다. 다만 우리나라 사람들의 해외여행은 대부분 여행보다는 관광에 가깝다. 명소를 구경하고, 맛집을 돌아다니며 쇼핑을 한 후 돌아와 이를 자랑하는 일련의 행위는 철저하게 자기중심적이다. 내가 돌아다니고 있는 타국 현지 사람과 문화에 대한 이해는 배제되어 있다.

 

저자는 지리학자의 관점에서 열대 지역을 여행하는 사람들이 관광이 아니라 제대로 된 여행을 하길 바라는 의도에서 이 책을 썼다고 밝힌다. 해당 열대 지역에 대한 이해가 없으면 더위, 습도, 폭우, 벌레 등의 존재는 오로지 짜증의 대상에 지나지 않는다. 겉보기에 남다른 외모의 사람들이 무지와 폭력, 가난에 찌들어서 사는 삶은 동정과 때로는 멸시의 대상으로 비치겠지만, 그네들의 기후, 역사와 정치, 문화와 사회구조 등을 들여다볼 줄 알면 그네들의 삶의 모습과 우리의 것이 별 차이가 없음을 깨닫게 된다.

 

1부에서 저자는 지리학의 개념으로 열대우림 기후, 열대몬순 기후, 열대사바나 기후로 크게 구분되는 열대기후와, 아시아, 아프리카, 아메리카와 아프리카의 열대 지역을 소개한다. 학교에서 배우는 지리 수업을 떠올리면 된다.

 

2부는 본격적으로 열대기후가 특징적으로 발현되는 열대 지역을 세부적으로 파헤친다. 열대우림의 보르네오섬과 아마존을, 사바나 지역인 빅토리아호와 세렝게티 초원을, 킬리만자로 등으로 대표되는 열대 고산지대와, 카리브해 같은 바다 휴양지를 지리학자이자 여행가의 시각에서 찾아간다.

 

열대우림의 생물 다양성과 기후 보전을 위해서 중요한 곳이지만 인간 삶의 터전으로는 부적합한 환경임을, 그리고 인구 증가와 경제개발을 위해 보르네오와 아마존 지역이 계속하여 훼손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브라질 정부의 아마존 개발에 전 세계적 환경 파괴의 비난이 있지만, 브라질인의 관점에서는 다르게 볼 수 있다. 다른 대안이 없다면 그들의 아마존 개발을 중단시킬 명분이 없다. 전 세계인의 쾌적한 삶을 위해 브라질인만 손해를 감수하라는 주장은 실효성이 없기 때문이다.

 

아마존 개발 논쟁도, 대다수의 열대 지역을 휘감는 인종적, 종교적, 정치적 혼란도 결국은 열대 지역 주민들에게 내재한 것이 아님을 이해할 때, 그것은 근현대 제국주의 시절 서구 열강의 강점이 남긴 깊은 상처의 결과임을 상기할 때 이분법적 시각으로 바라볼 수 없다. 그네들을 총괄적으로 표현하는 열대성의 개념을 저자도 이렇게 접근하기에 그네들에게 온화하고 동정적이며 열린 마음으로 다가갈 수 있었으리라.

 

이른바 열대성이라는 개념은 유럽과는 완전히 다른 진귀한 타자를 발견하여 객관적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그 이상으로 발명하여 정형화되었다. (P.33)

 

이 책은 기본적으로 여행가이드 책자의 성격을 지닌다. 아마존강 원류의 상이한 거대한 흐름이 합류하는 장엄함, 비교적 가까운 동남아시아의 보르네오섬에서 볼 수 있는 열대우림의 맹렬함을 활자가 아니라 양 눈으로 생생하게 체험하고 싶다는 욕구를 불러일으킨다. 동아프리카 지구대와 생명의 호수에서 죽음의 호수로 오염되고 있는 빅토리아호, 동물 다큐 프로그램으로 친숙하게 된 세렝게티와 응고롱고로 이야기 등은 시간상, 비용상 가기 어려운 사람에게 흥미와 대리만족을 줄 수 있는 테마이기도 하다.

 

여행지의 자연과 문화는 서구의, 혹은 한국 사회의 관점이 아닌 그곳에 사는 사람들의 관점에서 바라봐야 한다. 각각의 삶터에서 살아가는 그곳 사람들은 자신들의 자연과 문화의 체계 속에서 가장 바람직한 형태로 적응하며 행복한 삶을 향해 분투하고 있다. (P.237)

 

3부는 열대 지역에 대한 인문학적 안내다. 토인비와 카 같은 저명한 역사학자조차도 아프리카를 문명과 역사가 부재한 땅으로 평가하였다는 사실에서 뿌리 깊은 인종에 바탕을 둔 환경결정론을 알게 된다. 솔직히 말하면 우리나라 사람들의 내심도 마찬가지인 게 미국, 유럽 사람과 동남아시아, 흑인들을 대하는 태도는 확연한 차이가 있음을 부인하기 어렵다. 서구 근대문명을 이룩하고 식민지를 경영한 국가를 모든 면에서 우월시 하다 보면 각 지역마다의 독자적 고유성은 평가절하하고 무시하기 마련이다.

 

열대 지역의 식민지 경험은 좋건 나쁘건 현재까지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 저자는 그중에서도 문화 섞임 현상에 주목한다. 자의든 타의든 서로 다른 인종, 문화, 종교를 지닌 사람들이 섞이게 되면 갈등과 불화가 우선 떠오르지만, 믈라카 사람들, 그리고 싱가포르의 사례를 통해 그것이 결코 필연적인 귀결이 아님을 알려준다.

 

믈라카 사람들은 서로의 문화를 인정하고 각자의 삶이 서로 얽힌 일상생활 공동체를 형성하고 있었다. 종교의 차이가 항상 대립과 갈등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아니며, 로컬의 일상생활 공간에서 얼마든지 평화롭게 조화를 이룰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좋은 사례다. (P.287)

 

저자가 설명하는 싱가포르의 열대성은 보타닉 가든, 가든스 바이 더 베이를 보면 자연성보다 인공성에 가깝다. 하지만 말레이시아에서 반강제적으로 독립 당한 그들이 자연개발과 보전, 집단 간 평화 공존을 이룬 역사를 훑어보면 분명 인정할 수밖에 없다. 마지막으로 우리나라에서 열대 체험을 한 유일한 조선시대 인물인 문순득과 정약전의 인연을 보면 천초(天初)’라는 호가 뜻밖이 아님을 인정하게 된다. 문순득의 신분이 상인이었기에 그의 체험이 더욱더 객관적이고 생생할 수 있었음이 차라리 다행이다.

 

처음 이 책의 표제를 봤을 때는 열대 지역을 지리학의 관점을 분석하게 해설하는 책으로 생각하였기에 여행가이드에 가까움을 알게 되었을 때 솔직히 다소간 실망감도 품었다. 점차 읽어나갈수록 대다수 독자에게는 오히려 적절한 지리학적 지식이 여행을 더욱 풍성하게 할 수 있다는 점에서 더 유익할 수 있음을 인정한다. 무엇보다 저자가 반복해서 강조하듯이 관광객의 겉핥기 눈길로 열대 지역의 자연과 사람을 보는 태도를 벗을 수 있다면 우리네의 열대 여행은 더욱 뜻깊어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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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리스탄 대산세계문학총서 186
고트프리트 폰 슈트라스부르크 지음, 차윤석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2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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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트리스탄과 이졸데이야기를 다시 읽는다. 앞서 조제프 베디에의 정리본을 통해 이야기 개관을 알 수 있었고, 진일상의 발췌본을 통해서는 고트프리트 폰 슈트라스부르크의 원작의 단편을 짧게나마 맛볼 수 있었다. 이 책은 무엇보다 완역본이라고 하니 발췌본으로서는 파악하기 힘든 이 작품의 전모를 접할 수 있다는 기대감을 품는다. 다만 원본의 운문이 아니라 산문 형식으로 번역했다고 하니 다소간 아쉬움은 어쩔 수 없다.

 

13세기 초에 씌어진 이 운문소설은 중세인의 가치관과 행동양식을 알려줄 뿐만 아니라 기사문학과 영웅 문학이 결부되어 트리스탄이라는 비운의 영웅을 탄생시킨다. 이른바 금지된 사랑의 제재와 사랑의 묘약이라는 소재의 도입, 회피할 수 없는 숙명적인 사랑 등 세인의 가슴을 후벼팔 만한 내용이 그득 담겨 있다. 바그너가 이 이야기를 장대한 악극으로 구현한 것은 이 속에 그가 흥미롭게 여긴 모든 요소가 담겨 있어서일 것이다.

 

작품은 트리스탄의 부모인 리발린과 블란셰플루어의 행복하지만 슬픈 사랑 이야기로 시작한다. 두 사람이 서서히 사랑을 느끼고 이윽고 사랑에 빠지는 장면은 청춘 남녀의 감정 추이를 정확하게 반영하고 있다. 사랑 앞에서는 가족도, 나라도 가로막을 수 없음을 그들의 사랑이 잘 보여준다. 반면 사랑이 행복보다는 불행과 슬픔에 더 연관성이 큼을 또한 깨닫게 해준다. 트리스탄의 이름이 그것을 잘 나타내지 않는가.

 

사랑에서 고뇌가 생겨나지 않는 이에게는 사랑 같은 것도 생길 수 없습니다. 기쁨과 고뇌는 사랑 안에서 이미 불가분의 관계이거든요. 이 둘과 함께 영예와 명성을 얻든지, 그 둘 없이 망하든지 해야 할 겁니다. (P.16)

 

숙모와 조카의 근친상간이라는 외관상 비윤리적 관계를 바라보는 독자의 태도는 한결같을 수 없다. 그들이 사회적으로, 도덕적으로 용납받을 수 없는 죄를 범했음은 부인할 수 없다. 이 점에서 명예를 중시하는 중세의 궁정풍 사랑과 트리스탄의 사랑은 결을 달리한다. 모롤트를 쓰러뜨리고 용을 죽이고 독일의 전장을 종횡무진 휩쓸며 거인을 제압하는 영웅적 업적을 거두었음에도 트리스탄에게 전통적 영웅의 모습을 찾아볼 수 없는 것은 그에게나 우리에게나 오로지 이졸데의 그림자가 어른거려서이리라.

 

달리 생각하면, 두 사람의 사랑은 인력으로 모면할 수 없는 운명적인 사건이다. 실수로 묘약을 마시기 전에 그들의 연인의 감정을 품지 않았음을 독자는 부인할 수 없다. 트리스탄은 숙부인 마르케왕의 신부를 데려가기 위한 일념을 품고 있었고, 이졸데는 삼촌인 모롤트를 죽이고 자신을 타국으로 데려가는 트리스탄에게 속임을 당했다는 분노와 미움의 감정을 숨기지 않았다. 두 사랑의 사랑은 그들 자신의 의사와는 무관하게 진행되었으며, 의지로 억제와 극복이 불가능하다고 할 때 과연 누가 그들에게 쉽사리 돌을 던질 수 있겠는가. 그래서 더욱 안타깝기 그지없다.

 

트리스탄과 이졸데, 당신과 저 두 사람은 영원히 일심동체예요. 이 키스가 죽을 때까지 늘 제가 당신이고 당신이 저라는 걸, 하나의 트리스탄이고 하나의 이졸데라는 사실을 봉인해줄 거예요.” (P.438)

 

사랑의 물약은 일종의 마약이다. 현명한 이졸데 여왕이 어찌 나쁜 의도로 묘약을 주었겠는가. 부부 사이의 사랑과 금슬을 돈독하게 하기 위한 선한 목적이었음에도 묘약은 뜻대로 작용하지 않았다. 참다운 사랑의 생성은 오로지 두 사람의 마음에 달린 것이지 인공적인 수단의 개입은 한계가 있으며 바람직하지 못함을 보여주고자 함이 아니겠는가.

 

주인공 두 사람이 아닌 조연들에게도 관심을 기울여보자. 사실 최대의 피해자는 마르케왕이다. 그는 트리스탄의 아버지로 인해 누이인 블란셰플루어를 잃었다. 사랑하는 조카를 자신의 후계자로 삼으려고 하였지만 귀족들과 트리스탄의 의견에 따라 금발의 이졸데를 왕비로 맞아들였다. 작중에서 마르케왕은 군주의 모범이라고 할 만한 훌륭한 왕으로 평가받는데, 믿었던 조카에게 배신을 당한다. 트리스탄과 아내 이졸데에 대한 사랑과 믿음, 그들의 부정과 불륜에 대한 의심 사이에 갈팡질팡하는 마르케왕은 왕관을 떠나 평범한 사내의 자연스러운 반응을 보여준다. 트리스탄과 이졸데가 누차의 위기와 용서 끝에 애정 행각을 자제했더라면 아마도 세 사람의 관계는 파탄 나지 않고 그럭저럭 굴러갔을 테지만, 묘약의 힘으로 한껏 불붙은 젊은 연인의 사랑은 추락의 위험에도 개의치 않는 법. 미완성작이기에 더 이상의 비극적 장면이 전개되지 않았을 뿐 고귀한 마르케왕은 사랑하는 누이를 앞서 잃은 것 외에 이제는 조카와 아내마저 잃게 되었으니 하늘 아래 그에게 남은 것은 무엇이려나.

 

브랑게네를 간과해서는 안 된다. 이졸데 여왕이 그녀에게 사랑의 묘약을 맡겼다는 것 자체가 그녀에 대한 신뢰를 말한다. 비록 관리 실수로 사달이 났지만, 작중에서 그녀가 보여주는 지혜와 올바른 판단력은 눈부신 미모의 이졸데를 능가한다. 그녀는 자신의 잘못을 만회하기 위해 이졸데 대신 처녀성을 왕에게 바치며, 자신을 의심하는 이졸데에 의해 살해의 순간에까지 몰리게 되지만 변함없는 성심과 충심을 드러낸다. 고귀한 심성이라는 측면에서는 오히려 브랑게네가 작중에서 지고의 수준이라고 하겠다. 또한 주군의 아들 트리스탄을 자신의 아이처럼 키워내고 갖은 애정을 아끼지 않은 포이테난트 원수와 부인도 빼놓을 수 없는 사람들이다. 그들의 너무나 고매하고 훌륭한 처신은 차라리 비현실적이기조차 하다.

 

사랑이란 무엇인가. 사랑은 늘 즐겁고 행복하기만 한 것일까. 사랑은 무엇 때문에 가슴을 아프게 하고 눈물을 자아내는 걸까. 사랑하는 남녀 사이에 항상 불행이 개입하는 건 무슨 까닭일까. 돌이켜봐도 짧은 기쁨, 긴 슬픔이 사랑에 동반하는 건 우연이 아니다. 그 사랑이 강렬하고 뜨거울수록 슬픔의 골짜기는 더욱 깊어짐을 우리는 인생사에서 자주 목도한다. 그것이 작중 화자가 프롤로그에서 독자에게 던지는 질문이다.

 

작품의 큰 줄기와는 무관하게 독자적으로 흥미로운 장면이 몇몇 인상적이다. 소년 트리스탄이 수사슴 사체를 절묘하게 해체하는 대목이 이채롭다. 할육거피, 푸르키에, 쿠리에 등 전문용어를 구사하여 꽤 장황하고 세밀하게 묘사하는데 중세 시대 사람들이 중시하는 기술이 무엇인지 알게 하여 흥미롭다. 트리스탄의 장엄한 기사 서임식을 직접 묘사하기보다는 당대의 유명한 음유시인들을 쭉 나열하면서 그들의 특장점을 하나하나 분석하는 장면에서는 그들을 향한 상찬 못지않게 화자 자신에 대한 자부심이 배어 나옴을 느낄 수 있다.

 

하지만 의심과 불신을 확인하고자 하는 건 더 큰 실수입니다. 그전에 그저 의심만 했던 사실을 확인하게 되면, 알고자 노력했던 그것이 그에게는 다른 무엇보다 큰 불행의 원천이 되어버리기 때문이지요. 그전에 그를 괴롭히던 두 가지 걱정이 오히려 지금 그에게는 가벼울 겁니다. (P.337-338)

 

사랑학 이론도 빼놓을 수 없다. 아내든 연인이든 부정을 의심하더라도 결코 확인하려고 하지 말라는 조언은 의외로 현실적이다. 의심이 사실이 아니라면 계속 의심할 것이며, 사실이라면 더 큰 불행을 가져올 뿐이라니. 처용의 관용이 떠오른다. 또 하나 여성의 부정을 의심하면 감시 대신에 다정한 조언을 하라고 권고한다. 감시는 도리어 반발을 사게 된다나.

 

사랑은 눈과 이성을 마비시킵니다. 눈과 이성이 올바로 보는 것을 제대로 보려 하지 않지요. 마르케의 경우도 그랬답니다. 그는 아내 이졸데가 몸과 마음을 바쳐 트리스탄을 사랑한다는 것을 너무나도 잘 알았지요. 하지만 그 사실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던 겁니다. (P.426)

 

마르케왕은 이졸데의 잇따른 부정에도 그녀에 대한 사랑의 끈을 놓지 못한다. 많은 증거에도 불구하고 미약한 반증만 있다면 그걸 통해 오히려 이졸데를 불러들일 기회로 삼으려고 한다. 마르케왕이야말로 사랑의 물약 없이도 이졸데에 대한 맹목적 사랑에 빠진 인물이라고 하겠다. 그에 비하면 이졸데는 도리어 간교하고 영활 하기조차 하다. 자신의 순결을 맹세하기 전에 순례자로 위장한 트리스탄과 넘어지는 설정 등이 특히 그러하다. 이처럼 사랑은 사랑을 지키기 위해서는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어떤 남자도 제 몸을 안 적이 없으며, 폐하를 제외하고 이 세상 어떤 남자도 제 품에 안기거나, 제 옆에 누운 적이 없습니다. 이 맹세에 포함시킬 수 없거나 맹세를 부정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은 아까 그 불쌍한 순례자[트리스탄]입니다.’ (P.380)

 

이 작품의 후반부에서 추방당한 트리스탄은 흰손의 이졸데를 만나 혼란스러워한다. 동명이인, 금발의 이졸데는 멀리 볼 수 없는 곳에 있고 외로운 트리스탄 가까이에는 그를 연모하는 흰손의 이졸데가 있다. 그녀의 가족들도 두 사람의 결합을 은근히 바라고 있다. 트리스탄의 고민은 현실적이다. 미래를 기약할 수 없는 상태에서 누군들 마음이 약해지지 않겠는가. 스스로를 자책하지만 서서히 마음 한구석이 약해진다. 트리스탄의 불성실과 불충실을 비난하지 말라. 목석이 아닌 이상 사람은 대개 그러하기 마련인 법.

 

산문 형식으로 번역하였음에도 5백 면 가까운 분량이니 원본대로 운문체로 옮겼다면 훨씬 두꺼운 책이 나왔을 것이다. 일단은 <트리스탄>의 전체적 내용과 모습을 알게 되었다는 점에 의의를 두고 싶다. 제대로 걸을 줄도 모르는데 뛰라고 요구할 수 없다. 계속 걷다 보면 언젠가는 달리기도 가능할 것이다. 여하튼 트리스탄과 이졸데는 여전히 여러 생각을 품게 한다. 선과 악, 정의와 부정의를 명확하게 구분할 수 없다는 사실에서 독자는 마음이 편치 못하다. 분명히 트리스탄과 이졸데를 비난하는 게 마땅한데 거꾸로 그들의 사랑에 공감하고 불행에 애달파하고 있으니 말이다. 결국은 그게 사랑의 가치이자 힘을 보여주는 셈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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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반 정글 - 도시와 야생이 공존하는 균형과 변화의 역사
벤 윌슨 지음, 박선령 옮김 / 매일경제신문사 / 202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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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 발길이 뜸한 보도블록이나 깨진 콘크리트 틈에 잡초가 자라나면 관리 소홀 또는 퇴락한 느낌이 든다. 건물 사이 공터에 잡풀이 무성하면 보기 흉하게 여기고 위생에 우려를 표시하게 된다. 단독주택의 마당 및 도시공원은 항상 깔끔하게 정비되어 있어야 기분이 좋다. 지저분한 동네 하천은 눈에 안 띄게 복개해야 미관상 훌륭하다. 저자는 위와 같은 현대 도시인의 인식이 잘못되었으며 오히려 이러한 도시 자연의 모습이 삶의 질을 높이고 기후 위기를 극복할 수 있도록 함으로써 인간과 도시, 나아가 지구 생태계에 유익하며 필수 불가결하다고 이 책에서 주장한다. 상당히 생소하지만 차근차근 읽어나가다 보면 굉장히 흥미롭고 참신한 의견인 동시에 꽤나 설득력이 높다.

 

왜 도시를 이렇게 변화시켜야 하는 걸까? 도시의 야생성은 도시에 서식하는 생물 수를 늘리고 기후 변화의 영향을 완화하므로 솔직히 말해 인간이 생존하는 데 도움이 된다. (P.17)

 

저자의 관점은 철저히 인간 중심적이고 도시 중심적이다. 순수한 자연 자체는 도시에서 인간과 공존할 수 없다. 도시 속 자연은 인간의 관점에 따라 인간의 통제 아래 있어야 한다. 그렇다고 저자가 잔디밭처럼 더할 나위 없이 깔끔한 인공 자연을 조성하자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주택 마당의 잔디 관리에 소홀하면 민원과 신고로 처벌받게 되는 현실에 부정적이다. 생태학적 관점과, 종 다양성 측면에서 잔디밭은 사막과 동일하다고 본다. 표제가 의미심장하다. 어반 정글, 도시를 정글화 하자는 대담한 주장이다. 저자는 도시의 변두리, 공원, 콘크리트, 나무 식재, 도시하천, 농작물, 도시 동물로 각각 논의의 렌즈를 다양하게 들이대고 있다. 초점은 단 하나 도시의 야생성을 강화하자는 주장을 전개하기 위함이다.

 

도시의 변두리 땅은 생명 유지 시스템이다. , 초원, 습지, 조석 습지가 원활하게 기능하는 생태계는 기후 변화의 다양한 영향에 맞설 필수적인 완충 장치다. 하지만 우리의 개발 욕심에 가장 취약한 지역이기도 하다. (P.30-31)

 

도시의 확장으로 변두리는 계속 개발되고 자연은 점점 후퇴한다. 도시와 전원을 공존시키려는 다양한 시도는 실패하였고, 교외는 공원과 주택 정원으로 양분되었다. 저자는 정원에 주목한다. 정원을 예쁘게 가꾸고자 하는 노력으로 종 다양성은 오히려 시골보다 높다고 하면서. 건강한 생태계는 특정 종에 의존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랜드스케이프 어바니즘’(P.68)과 같이 도시와 자연환경을 조화시키는 도시 계획 개념을 소개한다.

 

현대 도시에서 공원의 크기와 중요성 인식은 점점 증가하고 있다. 도시민 누구나 푸른 녹지와 쾌적한 공기, 서늘한 녹음을 그리워하게 마련이다. 단정하게 정리된 잔디밭을 배경으로 교목과 관목, 화초류, 아기자기한 연못, 적절하게 배치된 의자, 그리고 여기를 거니는 사람들까지 한 폭의 그림이다. 비판적 시각으로 보면, 도시 속 공원은 자연 자체를 인정하고 허용한 게 아니라 오로지 인간의 편의를 위한 레크리에이션 장소라고 저자는 말한다. 이 책은 도시공원에 생물 다양성을 늘려 생태력을 높이기 위한 여러 시도와 사례를 소개하는데 하나하나가 흥미진진하다. 옴스테드의 뉴욕 센트럴파크, 루던의 가드네스크 스타일, 로버트슨의 버켄헤드 공원, 원스테드 플라츠에 소를 다시 풀어놓은 사례 등을 통해 우리는 도시 녹지에 야생성을 도입하여 자연생활에 대한 사람들의 욕구를 충족시킴과 동시에 생물 다양성을 확대하는 방향으로 도시공원의 조경이 변화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도시의 자연사는 낯설고 모순된 개념이다. 피터와 수코프가 그토록 알리고 싶었던 사상은 도시와 자연이 공존 불가능한 적대적 관계가 아니라는 점이다. 전쟁 폐허, 콘크리트 균열, 방치된 불모지에서 자라나는 잡초와 식물을 도시 생태계를 확인할 수 있다는 점이다. 그네들을 무시하지 말고 오히려 감사한 마음을 가지라고 조언한다. 혹자는 폐허와 불모지를 그대로 방치하자는 게 아니냐며 이견을 제기할 수 있지만, 저자는 공지 개발에 찬성의 입장이다. 이쪽의 빈 땅을 개발하더라도 다른 쪽은 빈 땅이 생기기 마련이다. 도시 전체의 항상 완벽한 개발은 불가능해서이다. 어쨌든 전반적으로 빈 땅의 야생성은 일정 수준을 계속 유지한다는 것이다.

 

결국 도시에서 사용되지 않는 모든 장소는 생물 다양성을 극대화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 변두리 땅과 불모지에 몰래 숨어들어서 멸시받는 터주식물은 사실 도시 환경을 위해 열심히 일하는 일꾼이다. (P.157)

 

<4장 캐노피>에서는 주요 요소인 나무의 도시 생태적 중요성과 식재 방식을 다룬다. 인류사에서 언제나 중요한 자원이었던 나무가 화석 연료의 시대가 도래하면서 소홀하고 외면되었다는 것 하며, 21세기 도시 생태계의 회복과 기후 변화에 대응하기 위해 나무와 숲을 지켜야 한다는 주장이 이어진다. 단시간 내 식재로 도시를 녹지화할 수 있는 미야와키 방식이 정말로 부작용 없이 효과적이라면 전 세계의 산림 녹화에 크게 기여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다.

 

나무는 21세기와 그 이후에 도시가 의존하게 될 녹색 인프라의 중요한 구성 요소인 습지, , 호수 등이 포함된 더 넓은 생태계의 핵심이다. 망가르 바니와 그곳을 지킨 이들의 이야기가 우리에게 영감을 줄 것이다. (P.212)

 

개인적으로 복개 하천을 좋아하지 않는다. 환경과 생태의 인식이 높아지면서 이 책에서도 소개된 청계천을 비롯해서 많은 도시에서 하천 복원이 이루어지고 있는데, 애석하게도 내가 사는 지역은 녹지가 부족한 동네임에도 불구하고 하천 복원은 요원해 보인다. 더럽고 지저분하다고 덮어씌우면 그것으로 근원적 문제 해결이 되는 게 아니다. 오염된 하천을 생태계의 일원으로 환원하는 것이 중요하다. 나아가 하천을 공원화하지는 말자. 요즘 지자체마다 공원 조성 사업으로 하천의 유로를 바꾸고 주변에 운동시설을 마련하고 산책로를 조성하는 등 하천 꾸미기에 바쁜데, 도를 넘어서 자연 하천이 아니라 인공 하천에 가까운 경우도 볼 수 있다. 이 책에서도 로스앤젤레스강을 이름뿐인 강이라고 탄식하고 있다. LA에 이런 강이 있다는 이야기를 처음 듣는다. 기후 변화로 게릴라성 폭우가 빈발하고 있는데, 아스팔트와 콘크리트로 뒤덮인 도시 표면은 물을 흡수하고 저장하지 못한다. , 호수, 습지 같은 수생 생태계의 중요성을 재발견할 수 있는 게 <5장 생명력>이다. 습지는 메꾸고, 갯벌은 간척하는 게 역사적 흐름이었는데 요즘은 오히려 습지와 갯벌을 보호하는 데 안달이다. 불과 수십 년 앞을 내다보지 못하는 인간의 단견과 무지가 새삼 드러나는 사례다.

 

역사 대부분을 달갑지 않은 늪이나 불편한 호수를 메우려고 노력했던 우한 같은 도시들이 이제는 습지를 되살아난 수경 도시 개념의 중심적인 특징으로 삼으려고 애쓰고 있다. 물과 억지로 싸우려다가 잇달아 패배하기보다는 도시에서 물과 더불어 살면서 물을 위한 공간을 마련하는 것이다. (P.248)

 

옥상 텃밭, 아파트 화단 가꾸기에 열심인 사람들을 제법 볼 수 있다. 여유로운 마당이 부족한 상황에서 궁여지책으로 뭔가를 심고 재배하는 그들을 볼 때면 놀라움과 함께 극성맞다는 양가의 감정이 든다. 벤 윌슨은 이런 우리네 사고가 잘못되었다고 지적한다. 오히려 도시와 교외에서 농작물 재배를 강화하고 확대해야 한다고 설파한다. 인간의 엄청난 배설물을 오염물질로 폐기하지 말고 유기적으로 재활용함으로써 환경오염을 줄이고 식량과 채소 자급자족에 이바지할 수 있고, 근거리 농업으로 원격지 운송에 따른 오염물질 배출 감소에도 도움이 된다는 주장이다. 의외로 좁은 땅에서도 높은 농업 생산성이 가능하며, 도시민들에게 신선한 농작물 공급이 가능하니 여러모로 좋다는 것이다. 단순히 녹화 사업이라면 나쁘지 않지만, 온통 아파트로 도배하고 지속적으로 반경을 확대해가고 있는, 부동산 경제 논리가 지배하는 아파트 왕국 서울이라면 한숨이 나온다. 그나마 있는 전답마저 불도저로 밀어버리고, 야산은 평탄화하는 상황에서 꿈같은 이야기라고 하겠다.

 

그런 면에서 <7장 주트로폴리스>는 더욱 비현실적 주장으로 다가온다. 식물과 달리 도시에 거주하는 동물에 대한 부정적 감정은 훨씬 크다. 반가운 심정보다는 두렵고 경계의 대상으로 다가오게 된다. 이 책에서도 언급하였던 쥐나 바퀴벌레는 물론, 요즘은 비둘기마저 혐오의 대상이다. 길고양이나 떠돌이개는 어떠한가. 저자의 주장처럼 원인은 그들이 아니라 도시 환경을 악화시킨 인간 자신에게 있음은 사실이다. 어쨌든 현실적으로 호수와 하천의 물고기, 학과 두루미 같은 인간과 접촉하지 않는 무해한 동물이 아니라면 받아들이기 쉽지 않다. 밤중에 길거리에서 여우, 오소리, 코요테를 마주친다면 기쁨의 감정이 생길지 의문이다. 이상과 현실의 차이는 크게 마련이다. 지리산에 반달가슴곰을 복원하는 사업은 분명 의의가 있지만, 반대 여론도 만만찮다. 반달가슴곰은 야생에서 살아야 하는데 등산객과 맞닥뜨리는 일은 바람직하지 않다. 게다가 그들 모두가 지내기에는 지리산 권역이 좁아서 이웃 산으로 활동 영역을 넓힌다고 하는데 개체 수가 늘어나면 어떻게 할 것인지 과연 궁금하다. 그래서 저자도 동물에 관한 내용을 가장 마지막에 싣지 않았을까.

 

이 책은 여태까지 도시 속 자연과 식물에 대한 무지와 편견에 경종을 울린다. 깔끔하게 관리되고 정비된 정원과 공원보다 그냥 방치된 무성한 잡초의 생태학적 중요성을 깨닫게 해주며, 도시의 자연을 복원하고 공존하는 게 생태 차원을 넘어 인간 생존 자체를 위해서도 중차대한 사안임을 이해하게 해준다. 저자의 이 모든 주장에 부분적으로 동의하지 않을 수도 있지만 적어도 커다란 방향성 측면에서 그릇되지 않음을 독자는 직관적으로 알아차리게 된다. 현대인의 대부분은 어차피 도시에서 살아가게 마련이다. 인제 와서 자연으로 돌아가라고 외친들 공허한 울림만을 남길 뿐이다. 솔직히 이따금 전원생활을 하면 즐겁고 행복하겠지만 일상을 자연 속에서 보내라고 하면 대부분 난감해 할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사는 도시를 자연 친화적이고 생태 친화적으로 바꿀 수 있다면 일석이조 아니겠는가. 마지막으로 유독 기억에 남는 문장을 기록에 남긴다.

 

잡초에게 기회를 주자. 그들은 미래의 도시 식물이다. (P.1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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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르자빈 시선 지만지(지식을만드는지식) 시선집
가브릴라 데르자빈 지음, 조주관 옮김 / 지식을만드는지식 / 201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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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데르자빈이 누구인가부터 언급할 필요가 있다. 푸쉬킨의 일화 중 아직 학생이었던 푸쉬킨의 시재(詩才)에 감탄하였다는 당대의 대시인이 바로 데르자빈이다. 이는 곧 당대 문단에서 데르자빈의 위상을 알려준다. 이 책은 데르자빈 시 총 110편 중 31편을 수록하고 있다.

 

작품해설도 그렇고 수록작을 살펴봐도 데르자빈의 시 작품은 크게 송시와 아나크레온풍 서정시로 양분된다. 수록작 중 송시는 <권력자들과 재판관들에게>, <메셰르스키 공의 죽음>, <>, <폭포>, <펠리사>이며, 아나크레온풍의 시는 <꿈속의 나이팅게일>, <포도주>, <저녁 초대>, <침묵>, <시골 생활>, <첫 이웃에게>, <철학자들: 술 취한 사람과 안 취한 사람>, <러시아 처녀들>, <황제 마을에서의 산책>이 해당한다. 송시와 아나크레온풍에 속하지 않는 기타 개별적인 작품들도 몇 편 포함되어 있다.

 

1804년 아나크레온 시집의 출판은 러시아 시사에서 대사건으로 간주됨. 19세기 러시아 시에 새로운 길을 개척해 줌. 19세기 비평가 벨린스키는 이 시집을 러시아 서정시의 진주라 칭송. (P.198, 지은이 연보)

 

데르자빈의 서정시를 굳이 아나크레온풍이라고 부르는 까닭은 그가 생의 후반부에 아나크레온풍 시집을 출간하여서다. 여기서 데르자빈은 고대 그리스 시인을 본받아 현세의 삶, 사랑, 쾌락에 대한 예찬을 거리낌 없이 솔직하게 표현한다. 구구절절한 설명보다는 몇 편의 예를 드는 것만으로 그의 시풍을 충분히 헤아릴 수 있다.

 

난 삶을 즐기고 / 애인에게 자주 자주 키스하며 / 나이팅게일의 노래를 들을 거다. (P.18, 꿈속의 나이팅게일)

 

심장에 달콤한 포도주는 / 사랑스런 입술의 키스처럼 우리에게 달콤하리라. / 너는 부드러운 여인, 사랑스런 여인 / 나에게 그렇게 키스해 다오, 내 사랑아! (P.20, 포도주)

 

내가 건강하고 / 먹고 마실 수 있다면 / 나는 부자요, 나의 힘이 지속되는 한 / 밀레나와 장난치며 사랑을 즐길 것이다. (P.43, 시골 생활)

 

지독한 슬픔이 오기 전에 / 마시고, 먹고, 즐겨라, 이웃이여! / 이 지상에서 우리는 시간을 서두르며 산다. / 절대로 후회하지 않는 / 쾌락은 오직 순결일 뿐이다. (P.50, 첫 이웃에게)

 

송시는 어떤 인물, 사건, 장소 등을 기리기 위한 성격이므로, 시인 자신의 주관적 감정을 읊은 서정시와는 완연히 구별된다. 데르자빈이 시인으로 명성을 얻기 시작한 게 26260행의 송시 <펠리사>를 발표하면서부터였고, 대표작인 <폭포>는 무려 74444행에 달한다. 이 두 작품만으로도 이 책 분량의 1/3에 해당할 정도로 시인이 송시에 쏟는 노력을 짐작게 한다.

 

그의 송시는 권력자들과 재판관들을 통렬히 비난하거나(<권력자들과 재판관들에게>), 당대 최고의 부자인 인물의 죽음으로 죽음의 본질을 직시하고 삶의 의미를 되새기거나(<메셰르스키 공의 죽음>), 신을 찬미하고 필멸의 존재인 인간의 운명을 대비(<>)한다. 그의 송시 중 <펠리사><폭포>는 따로 논할 가치가 있다.

 

<펠리사>는 예카테리나 여제를 키르기스-카자흐 무리들의 여왕인 펠리사에 비유하여 예찬한다. 시인은 예카테리나를 신에 육박하는 위대한 존재로 격상시킨다. 여제는 그야말로 모든 군주의 전범이기에 펠리사의 영광은 신의 영광”(P.143, 22)이라고 대놓고 칭송한다. 요즘 관점으로는 권력자에 대한 낯간지러운 아첨이라고 치부할 수 있겠지만 당대 러시아인들과 당대 조선인들의 인식 수준으로 보면 순수한 찬양이라고 해도 무방하다. 어쨌든 시인은 덕분에 여황제의 총애를 받았다고 한다.

 

어두움으로부터 빛을 가져오는 일은 / 오직 그대만이 할 수 있는 일입니다, 여왕이시여! (P.137, 13)

 

진실과 양심이 함께 있는 곳이 어딘가요? / 선행이 빛나는 곳이 어딘가요? / 바로 당신의 옥좌가 아닌가요! (P.144, 24)

 

<폭포>는 방대한 분량으로 단번에 전모를 파악하기 어려운 작품이다. 처음에는 폭포 자체를 노래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곧이어 이 시가 어떤 인물을 기리기 위함임을 알아차리게 된다. 인간의 삶을 묘사하기 위해 시인은 폭포를 끌어들인 것이다. 독자의 궁금증을 자아내는 인물의 정체는 후반부에 가서야 비로소 밝혀진다.

 

그대는 죽을 운명의 인간 중에 가장 용감한 자! / 지략으로 비상하는 이성이로다! / [......] / 그대는 기적의 지도자, 포툠킨! (P.116, 47)

 

이 송시는 포툠킨[포템킨] 장군의 죽음을 기리기 위한 작품이다. 그는 오스만과의 전쟁을 통해 크림반도 일대를 러시아의 영토로 편입시켜 그토록 소원이던 흑해 진출과 부동항 확보를 이룬 인물이다. 게다가 그는 예카테리나 여제의 유력한 애인으로 거의 황제와도 같은 권력을 누렸다고 전한다. 훗날 그의 이름을 기려 러시아 전함을 명명하였고, 근래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에서 러시아가 그의 유해를 반출한 행위 모두 그가 범상치 않았음을 입증한다.

 

이외의 작품 중에서는 시인의 자부심이 드러나는 <기념비>가 재밌다. <등불>은 데르자빈이 해고당했을 때의 우울한 심정을 보여준다. 여기서 자연과 인간의 순수함과 정당한 노력이 무참히 깨지는 묘사를 통해 자신이 당한 처지를 나타낸다. <희망>은 시인의 첫 번째 부인의 이름과 동음이의어를 활용하여 희망을 주창하는데, 별다른 설명은 없지만 혹시 첫 번째 부인의 죽음 또는 불행을 기리기 위한 게 아닐까 생각한다. <무상>은 최만년작으로 말년의 심경을 잘 나타낸다.

 

옮긴이 해설은 데르자빈의 시 세계를 상세하게 분석하고 설명하고 있어 다소 전문적이지만 도움이 되고 있다. 이 책을 통해서 개인적으로 푸쉬킨을 가능케 한 러시아 근대 시문학의 원류를 확인하였고, 주요 송시와 특히 아나크레온풍의 시에서 문학적으로도 큰 흥미를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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