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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로선집 - 에드워드 2세 / 파리의 대학살 / 디도, 카르타고의 여왕 ㅣ 나남 한국연구재단 학술명저번역총서 서양편 306
크리스토퍼 말로 지음, 강석주 옮김 / 나남출판 / 2011년 1월
평점 :
<수록 작품>
1. 에드워드 2세
2. 파리의 대학살
3. 디도, 카르타고의 여왕
예전에 크리스토퍼 말로의 작품에 관심을 가지고 <탬벌레인 대왕>, <몰타의 유대인>, <파우스투스 박사>을 강석주 번역으로, <디도, 카르타고의 여왕>을 임이연 번역으로 읽었다. 그의 나머지 작품은 번역이 이루어지지 않아 그냥 지나칠 수밖에 없었다. 근년 들어 셰익스피어를 포함한 영국 르네상스 시대 희곡 작품을 두루 섭렵하는 과정에서 다시금 말로와 마주쳤다. 시간이 꽤 경과하였기에 새로운 마음가짐으로 다른 번역본을 골라 이전 작품을 재독하고 강석주 번역의 이 책을 비로소 펼친다.
<디도, 카르타고의 여왕>
이 비극에서 유난히 잔상에 남는 장면은 아이네이아스가 디도와 카르타고를 떠난 후 등장인물들이 보여주는 일련의 대사와 행동이다. 디도는 자신이 연인에게 예고하였듯이 카르타고의 여왕으로서의 지위를 버리고 스스로 불 속에 뛰어든다. 디도의 죽음을 목격한 이아르바스, 이아르바스의 자살을 본 안나 모두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모두가 사랑하는 대상에게서 사랑을 얻지 못한 불행한 사람들이다.
(디도) 살아라, 못된 아이네이아스여! 진실된 디도는 죽는다. (P.327, 5막 1장)
과연 디도는 진실하다는 표현을 쓸 만하다. 그녀와 이아르바스는 곧 결혼할 사이였지만, 신들의 개입으로 그녀는 불가항력적으로 아이네이아스를 사랑하게 된다. 멸망한 트로이를 떠나 방랑하던 아이네이아스 처지에서도 아름다운 여왕, 재건의 토대가 될 카르타고는 매혹적인 정주처가 될 수 있었다. 그는 이를 맹세하기조차 한다. 아이네이아스는 주피터의 명령을 따라 카르타고를 떠날 수밖에 없다고 말하지만 디도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는다.
(디도) 오, 아니에요, 신들은 연인들의 사랑을 측정하지 않아요. / 아이네이아스를 불러내는 것은 아이네이아스 자신이에요. (P.319, 5막 1장)
제아무리 아이네이아스가 주피터를 핑계 삼지만 결국 이를 수용할 것인가 거부할 것인가의 주체적 판단은 그에게 있음을 그녀는 명백히 짚어내고 있다. 고대와 중세에 신의 권위가 절대적이라면 르네상스 시기에 신의 권능은 의심과 조롱의 대상이 된다. 사랑하는 여인과 확실한 토대가 있음에도 고대인 아이네이아스는 불확실한 신의 예언을 좇아 떠난다. 작가 말로는 이렇게 관객에게 되묻는다. 가니메데스와 희희낙락하는 주피터, 서로 유치하게 배척하는 비너스와 주노와 같은 신의 명령이 르네상스 당대의 독립적인 인간에게 과연 절대성을 지니는가를.
<파리의 대학살>
종교개혁에 따른 신교와 구교의 갈등은 종교를 떠나 역사적으로 많은 폐해를 끼쳤음을 우리는 익히 알고 있다. 헨리 8세의 수장령으로 일순간에 가톨릭을 배척하고 국교회 체제로 전환한 영국도 내부적으로 평화롭지 못하였다. 종교의 본질이 무엇인가를 되새겨볼 때 종교로 인해 다툼과 살육이 무자비하게 자행되고 그것이 신의 이름으로 정당화되었음은 참으로 아이러니다. 말로는 이웃 나라 프랑스의 역사적 사례에서 그것을 잔혹하게 보여준다.
(대비 카트린느) (방백) 잔인한 피로 이 결혼식을 끝장내 주리라. (P.165, 1장)
종교 간 분쟁을 봉합하기 위해 추진된 나바르 왕과 마가레트 왕비의 결혼. 그것이 평화로운 결과로 이어지지 않음은 왕비의 어머니 카트린느 대비의 방백으로 초반부터 예고된다. 결혼식은 신교 세력을 일망타진하기 위해 구교인 카트린느 대비와 기즈 공작, 앙주 공작 일행이 꾸민 음모였음을.
카트린느 대비와 기즈 공작의 불륜, 두 사람의 엄청난 권력욕. 형 샤를 왕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앙리 왕이 된 앙주 공작과 기즈 공작의 불화. 기즈 공작의 살해, 구교 수사에 의한 앙리 왕의 독살 등. 희곡 한 편으로 담기에는 무리일 정도로 종교와 정치를 둘러싼 숨 가쁜 전개가 이어진다. 여기서 두드러진 대목은 시종일관 반복되는 죽이라는 대사다. 앙주, 뒤멘느, 공자고, 레트, 그리고 기즈는 불문곡직하고 신교도를 모두 죽이겠다고 신성한 십자가에 맹세한다. 죽음이 임박한 앙리 왕은 나바르에게 로마 교회를 파멸시킬 것을 맹세시키며, 부르봉 왕조를 개창하는 나바르 또한 엄숙하게 구교 섬멸을 선언한다.
(기즈) 난 정책적으로 종교를 만들어냈지. / 종교란 악마 같은 것이야! / 쳇, 부끄럽군, 아무리 그렇게 보이지 않더라도, / 그토록 단순한 소리를 지닌 단어가 / 그렇게 중요한 문제의 동기가 된다고 생각하다니. (P.170, 2장)
이 작품에서 종교는 부수적이다. 권력을 장악하기 위한 도구와 무기로 종교를 방편 삼고 있음을 기즈는 인정한다. 기즈는 왕위로 올라서기 위한 갈망으로 가득 차 있다. 극 중에서 진정한 권력욕의 화신은 카트린느 대비다. 그녀의 맹렬한 욕망 앞에서 모성애조차 힘을 빼앗길 정도다. 두 사람이 불륜 관계임이 흥미롭다. 권력의 끝판에는 누가 남아 있을까.
(대비 카트린느) 만약 그가 내 말을 거절한다면, / 그의 형처럼 즉시 그를 제거하고 / 무슈가 왕관을 차지하게 할 것이오. / 흥, 내 뜻대로 되지 않으면 모두 다 죽일 것이오. / 살아있는 한, 카트린느가 여왕이기 때문이오. (P.202, 14장)
<에드워드 2세>
셰익스피어의 영국 사극 독자라면 말로의 이 작품이 낯설지 않다. 말로의 에드워드 2세는 셰익스피어의 에드워드 3세의 부왕이다. 하지만 양자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극과 극으로 나뉘는데, 에드워드 2세는 치욕스러운 불명예를 안고 죽임을 당한다.
서양 사회에서 동성애는 범죄 행위로 처벌받는 죄악이었다. 기독교적 가치관은 이를 금기시하였다. 하물며 다른 사람도 아닌 왕이 동성애를 자행한다면 이는 당대 사회에 어마어마한 충격을 줄 수밖에 없다. 백번 양보하여 임금은 무치(無恥)라고 관용적 마음을 갖더라도 은밀한 사생활이라면 몰라도 버젓이 드러내놓고 표방한다면 용납받기 어려울 것이다.
말로는 에드워드 2세와 귀족계급 간 알력 원인을 단순화한다. 왕의 동성애, 그리고 개비스톤과 훗날 스펜서에 대한 왕의 무분별한 총애. 왕은 자기 총신인 개비스톤을 옆에 두는 것으로도 모자라 그에게 엄청난 직위를 하사한다.
(에드워드) 짐은 이 자리에서 그대를 최고 시종장, / 국가와 짐을 보좌할 비서관, / 콘월 백작, 맨의 영주이자 왕으로 삼노라. (P.24, 1막 1장)
개비스톤 본인은 물론, 왕의 동생인 켄트 백작조차도 과분하다고 지적하지만 왕은 굽힘이 없다. 이 정도의 지위야말로 사랑하는 연인에게 왕으로서 줄 수 있는 선물로 여기며, 귀족들이 그에게 머리를 조아리도록 강요한다.
(에드워드) 그가 비록 태생이 천하다 할지라도 나의 총신이니 / 너희 중에 가장 거만한 자도 그에게 몸을 굽혀야 할 것이다.
(랭카스터) 전하, 저희를 이렇게 경멸하시면 안 됩니다. (P.34, 1막 4장)
귀족들의 반발은 당연하다. 랭카스터 백작, 숙부와 조카 모티머 등은 왕의 처사에 극력 반대하여 위력으로 왕을 굴복시킨다. 왕과 귀족의 잇따른 대립, 두 세력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는 왕비 이사벨라. 말로는 에드워드 왕의 무분별한 언행과 정당하지 못한 정책을 통해 그가 왕으로서 자격 미달임을 독자에게 보여준다. 오죽하면 켄트 백작마저 형을 떠나 왕의 반대편으로 돌아서고 만다.
겉보기에 갈등의 원인은 왕의 동성애이고, 왕이 개비스톤과 스펜서에게 베푸는 과도한 특혜지만 조카 모티머의 대사에서도 알 수 있듯이 이는 권력의 키를 누가 쥐고 있는가에 대한 다툼이다. 에드워드 왕은 자신이 왕이기에 만사를 마음대로 할 수 있다고 믿으며, 랭카스터를 위시한 귀족들은 왕의 권력은 귀족들의 지지와 옹립을 기반으로 하고 있기에 여차하면 왕도 굴복시킬 수 있다고 믿는다. 그들의 갈등은 끝내 전면적인 무력 충돌로 이어지고 귀족들의 몰락과 에드워드 왕의 승리로 귀결된다. 승리의 기쁨도 잠시, 대륙에서 건너온 이사벨라 왕비와 조카 모티머의 개입으로 왕은 쫓겨나고 만다.
권력은 양립하지 못한다. 권력은 독선적이다. 권력을 빼앗긴 과거 권력자는 우선적 제거대상자가 되고, 그것을 요구한 게 이사벨라 왕비임이 아이러니하다. 왕에게 버림받은 왕비가 조카 모티머와 부정한 관계를 맺었다고 비난한들 부질없다. 왕비는 아들을 왕좌에 올리려는 목적으로, 조카 모티머는 실질적 권력자가 되려는 의도로 영합하였기에 그들의 사랑의 순수성은 알 길이 없으니. 최소한 이사벨라는 그를 사랑했음을 마지막 장에서 확인할 수 있다.
(조카 모티머) 이제 모든 게 분명해. 왕비와 모티머가 왕국을 / 다스릴 것이다. 왕도 그 누구도 우릴 지배하지 못한다. / 내 적들은 괴롭히고, 친구들은 승진시킬 것이다. / 내가 명령을 내린 것을 누가 감히 제어할 것인가? / 난 너무도 강력하여 운명도 날 해칠 수 없다. (P.146, 5막 4장)
권력은 무자비하며 맹목적이라고 말한다. 이 작품에서 권력을 쟁취한 이들은 모두 반대파를 서슴없이 제거한다. 에드워드 왕은 귀족들을, 이사벨라와 조카 모티머는 에드워드 왕을, 켄트 백작을. 그리고 권력은 항상 오만하다. 조카 모티머는 에드워드 왕의 전횡에 분노하였지만, 스스로 권력의 과실에 탐닉한다. 그의 득의양양한 대사를 보면 에드워드 왕과 차이가 없음에 놀라게 된다. 그것이 권력욕의 힘이다. 그의 몰락은 여기서 불가피하게 된다.
말로는 역사적 사건의 전개를 충실히 따르는 것처럼 보이지만 극적 흐름을 위해 부분적으로 연대를 뒤섞기도 하며 등장인물의 이름도 슬쩍 고친다. 개비스톤은 동일하지만, 극 중의 스펜서는 역사적으로 휴 데스펜서이다. 개비스톤은 단순한 총신이지만, 데스펜서는 간특한 총신으로 평가받는다. 에드워드 왕의 몰락은 사실 개비스톤이 아니라 데스펜서에서 비롯하였다.
옮긴이 해제에 따르면 <디도, 카르타고의 여왕>은 그의 초기작이며, <에드워드 2세>와 <파리의 대학살>은 말기작이다. 특히 후자는 말로의 죽음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고 한다. 그의 다른 작품들과 달리, 후자는 당대 정치 현실을 직접적으로 다루고 있다. <에드워드 2세>는 왕의 자격, 총신, 왕과 귀족의 관계 등을 다루면서 왕의 권력이 절대적이고 무제한이 아니며 왕좌가 전복될 수 있음을 알려주며, <파리의 대학살>은 종교의 가면을 뒤집어쓴 권력욕이 얼마나 무시무시한가를 보여주면서 종교 간 갈등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폭로한다.
말로의 작품세계는 치열하다. 셰익스피어라면 민감하고 무거운 주제를 다루더라도 힘을 빼고 해학을 집어넣으며 말랑말랑하게 넘어갔을 텐데 말로는 오로지 정공법이다. 그의 작품을 평하면 으레 등장하는 극단적 상상력과 극한의 욕망을 추구하는 인간형은 이를 말해준다. 이 책에 수록된 작품에서 우리는 디도에게 더할 수 없는 연민을 품는 동시에 권력 헤게모니를 쟁취하려는 세력 간 분쟁의 파국이 어떻게 비인간적인 결과로 이어지는지를 동시에 깨닫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