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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올 김용옥의 금강경 강해 - 한글개정신판
김용옥 지음 / 통나무 / 2019년 9월
평점 :
동봉 스님의 금강경 강설은 흥미롭지만, 분명히 한계도 있다. 동봉 스님의 사고와 해석에 참신하고 독창적인 대목은 있더라도 불교 사제로서 불교의 틀을 벗어날 수는 없다. 나와 같은 비신도 관점에서 금강경 이해를 도모하는 사람이 반드시 불교적 이해에만 종속될 필요는 없다고 본다. 그런 의미에서 도올 선생의 책을 자연스럽게 집어 들게 되었다.
구판은 나온 지 오래되었고, 한자 표기가 많아서 읽기 불편하다고들 하는데, 개정 신판은 한글 표기를 대폭 늘려서 가독성이 매우 좋다. 도올은 자신의 금강경 강해를 자부하는데, 가장 완전한 고려대장경 판본을 최초로 사용한 역본이라는 점이다. 요즘은 대장경 판본을 사용한 책들이 몇 권 나왔지만, 초판이 나온 1999년을 염두에 두면 자부할 만하리라.
본문에 들어가기에 앞서, 도올은 거의 일백 면에 달하는 서론을 풀어놓는다. <들어가는 말>, <금강경에 대하여>, <금강경의 의미>, <“소승”은 뭐고 “대승”은 뭐냐?>가 그러하다. 금강경이라는 경전을 이해하기 위한 소개글에 해당하여, 금강경에 관한 배경지식이 전무한 독자에게 큰 도움을 준다. 본문을 마친 후에는 <경후설>이라는 후기, <감사의 말>과 <아름다운 우리말 금강경을 독송합시다>라고 하여 한글 번역문을 따로 싣고 있다.
도올판 금강경의 특징은 각 분, 즉 장 전체를 한꺼번에 싣지 않고, 절로 나누어 강해하고 있다는 점이다. 성경에서 몇 장 몇 절 하듯이. 각 절은 한문 원문을 소개하고 한글 독음을 달고 있어 원문을 읽는 데 편의를 제공한다. 이어서 원문 해석, 즉 한글 번역문이 나오고, 강해가 이어지는 구조이다.
육조가 “여시아문”의 아(我)를 추상화시켜 [......] 라고 해(解)한 것은 참으로 헛소리에 지나지 않는다. 일고의 가치도 없는 잡설에 불과하다. 아무리 그것이 일리가 있는 이야기라 하더라도 원의의 소박한 뜻에 위배하여 애써 현묘해지려고 노력하는 소치는 참으로 구역질나는 것이다. (P.105)
우리가 도올에게 기대하는 바는 무엇보다 시원시원함이다. 그는 기존 해석의 안일함에 양보하지 않는다. 그것이 제아무리 옛날의 권위 있는 고승이라고 할지라도 신랄한 비판에 주저함이 없다. 주희가 집주한 논어 등 고전에 내가 학을 떼는 이유와 무관하지 않다. 성리학과 멀찌감치 떨어져 있는 춘추전국시대의 고전에 성리학의 교조주의적 해석을 잔뜩 넣어 읽는 이를 질리게 만든 것과 같이.
도올의 해석은 거침없다. 금강경이 후대에 이렇게 높이 평가되는 까닭은 소승불교의 한계를 지적하고 대승불교의 문을 연 기념비적 저작이어서다. 대승의 보살은 소승의 아라한을 부정하는 개념이다. 아라한은 선택된 출가자만이 가능하지만, 보살은 출가 여부와 무관하다. 아라한과 부처는 다른 계층이지만, 보살은 깨달음을 통해 부처에 이를 수 있다. 사상(四相)에 집착하지 않고,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의 깨달음을 얻게 된다면 말이다. 그런데 이게 묘하다. 부처는 수보리에게 불법(佛法)은 불법이 아닐 때 진정한 불법이라고 말한다. 여래는 “모든 법이 있는 그대로의 모습”(P.338, 17-7)일 뿐이다. 그래서 도올은 이렇게 선언한다.
불교의 종지는 무아(無我)요, 대승의 종착은 무아(無我)요, 보살의 종국은 무아(無我)다. (P.344)
이런 인식으로 종교계를 바라볼 때 도올의 눈에 영 마뜩잖을 수밖에 없다. 강해 중간에 현재 불교와 기독교의 세태를 향한 적나라한 비판이 곳곳에 나타나게 되는 이유다.
현금 한국의 대부분의 스님은 소승이다. 따라서 한국불교는 소승불교다. 왜냐? 그들은 법당에 앉아 있는 스님이고 절깐에 들락이는 신도들은 스님 아닌 보살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스님이 스님이라고 하는 아상(我相)을 버리고 있지를 않기 때문이다. (P.94)
그렇게 색성향미촉법에 집착하는 것이 다 소승 기독교의 폐해다. 한국의 목사님들이시여! 그대들의 신도들을 참으로 대승인으로 만들 수 있는 그런 설교를 하사이다. 매일 매일 십일조내라구 쫄린 주머니 털어 공해뿐일 건물 짓는데 우리민족의 신앙 에너지를 낭비하지 마사이다. (P.252)
도올의 해석은 불교와 기독교라는 종교, 동양철학과 서양철학이라는 철학의 틀을 넘어서 자유자재로 넘나든다. 강해에서 부처와 예수를 나란히 비교하고, 한자와 영어, 산스크리트어 의미까지 대조하여 설명하는 폭 넓음은 도올에게서만 가능하다.
<금강경>은 어느 경우에도, 한 구절도 똑같이 반복되지 않는다. 세밀하게 들여다보면 조금씩 다 다르게 되어 있다. 그것은 반복이 아니라 변주다. 그리고 그러한 반복이 없으면 <금강경>은 <금강경>의 오묘한 맛을 낼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P.65)
금강경의 메시지는 시종일관 대동소이하다. 전체 32분에 이르기까지 핵심 문구는 몇 개로 압축할 수 있다. 후반부를 사족으로, 단순한 부연이자 반복으로 깎아내리는 이도 있다. 금강경은 애초부터 독해용 경전이 아니다. 암송용 경전이라면 단순과 반복이 매우 중요하다. 간단한 주제일수록 확실한 각인을 위해 반복하여 메시지를 전달하는 게 효과적이다. 여기서 변주가 발생한다. 이런 점을 고려하면 금강경의 구성을 향한 비판적 인식을 달리할 필요가 있다.
기대했던 것처럼 무척 흥미롭게 도올의 <금강경 강해>를 읽었다. 서론을 통해 금강경과 대승불교의 의의를 다시금 생각하게 되었고, 금강경이 우연히 조계종의 소의경전이 된 게 아님을 이해하게 되었다. 아뇩다라삼먁삼보리, 즉 무상정등각(無上正等覺)이란 게 특정한 하나의 깨달음이 아니라는 점, 지식의 습득으로 깨달음에 이를 수 있는 게 아니므로 정신적 수행이 중요하다는 점, 누구나 열반에 이를 수 있기에 부처가 될 가능성은 중생 누구에게나 열려 있다는 점 등. 향후 일 년에 한 편 정도는 다른 불교 경전도 읽어보고 싶다.
이 <금강경>이야말로 대승불교의 최초의 운동이면서 최후의 말미적 가능성을 포섭하는 포괄적인 내용의 위대한 경전인 것이다. <금강경>이야말로 대승불교 전사의 알파요 오메가다. (P.4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