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

 

관광지도 아니다. 외진 곳이라 얼씬거리는 사람도 없다. 종종 부둣가에서 애먼 낚시줄을 던지는 노인들만 있었다. 바구니에는 대개 풀 죽은 잔챙이만 두어 마리씩 들어있었다. 하늘도, 바다도 탁했고, 이따금 그 사이를 작은 배들이 물결로 무늬를 그리며 오갔다. 돌아보자 광장은 바다처럼 넓어서 더 을씨년스러웠다. 나는 하늘과, 바다와, 텅 빈 광장의 틈에 풍경처럼 앉아있었다.

 

1995년 이전 고베항은 아시아 최대 규모의 항구였다. 개항 이후 기름진 번영만 가득하던 이 곳을 괴멸적인 재해가 덥쳤다. 1995년 1월 17일 새벽 5시 46분. 리히터 규모 진도 7.2의 대지진이었다. 고베시에서만 4,484명의 사망자와 14,679명의 부상자가 발생했고, 한신/아와지 지역 전체 사망자는 6,434명, 부상자는 43,792명에 달했다. 내전 수준의 피해였다.

 

보고체계는 원활히 작동하지 못했고, 부패한 일본의 관료들은 아침에 되어서야 뉴스로 사태를 접했다. 해외 봉사자들이 엿가락처럼 휘어진 철로와 땅 위로 누운 고가도로들을 헤치며 시민들을 구해내고 있었다. 세상은 아수라장이었고, 그 속에서 6,434명의 시민들은 영영 살아 돌아오지 못했다.


 

#. 2

 

내 옆에 한 청년이 앉았다. 세련된 셔츠를 입고, 멋드러진 수염을 길렀다. 하지만 나는 차마 그를 찍지 못했다. 바다에 누구를 묻은 걸까. 울고 있었다.

 

도덕경의 한 구절이 떠올랐다.

 

天地不仁 (천지불인) 천지는 어질지 않다.
以萬物爲蒭狗 (이만물위추구) 만물을 풀강아지처럼 다룰 뿐이다.

 

천지는 어질지 않다. 신은 선하지 않다. 자연은 인간의 편이 아니다.

 

야훼는 모세의 손을 빌려 수 없이 많은 이집트 백성을 도륙냈다. 여호수아는 가나안의 신민을 광야로 내 몰았고, 다윗은 숱한 블레셋 사람들을 쳐 죽였다. 이집트의 백성도, 가나안의 신민도, 블레셋 사람들도 모두 신의 피조물이었지만 그들은 다만 선택받지 못했다. 지금도 기니, 라이베리아, 시에라리온과 나이지리아인들은 에볼라 바이러스로 온 몸에서 피를 쏟으며 죽어가고 있다. 신, 이 씨발새끼야. 세월호와 함께 가라앉은 294명의 아이들이 도대체 무슨 죄가 있단 말이냐. 라고 말해봐야 돌아오는 건 메아리 뿐.

 

노인의 딸은 열 아홉에 폐병으로 죽었다. 노인은 사기를 당해 무일푼이나 마찬가지여서 딸을 병원에 보내지 못했다. 대신 기도원에 들어가 11일간 미음 한 숟갈 입에 올리지 않고 밤낮 기도를 드렸다. 손가락이 말라 뼈와 혈관이 앙상하게 드러났는데도 아이는 살아나지 않았다. 그 좌절과 절망은 리히터 규모로도 표현할 수 없으리라. 40년의 시간이 흘렀고, 노인은 여전히 새벽마다 기도를 드린다. 나로서는 알 수 없는 일이다.

 

나는 나와, 내 옆에 앉는 청년의 자리를 눈으로 더듬었다.

 

우리의 자리는 바다나 하늘에 마련된 것도 아니었고, 광장에 마련된 것도 아니었다. 광장에서 툭 튀어나와서 바다나 하늘을 푹 찌르는 애매한 위치였다. 안개가 덮으면 하늘 같고, 파도가 치면 바다 같고, 너그럽게 보면 광장에 붙어있는 것도 같은 모호한 지점이었다.

 

그게 ‘자리’라고 이름이라도 할 수 있는 것은 어쨌거나 우리가 엉덩이를 비비고 앉았기 때문이다. 하늘과, 바다와, 광장의 침묵에 기대서 말이다. 나는 잠시 노자의 통찰과, 나의 분노와, 노인의 평화에 대해서 생각했다. 모호한 우리의 자리처럼 어쩌면 그것들의 교점도 실상은 구분하기 어려운 것이 아닐까. 흘낏 본 청년의 어깨는 여전히 흔들리고 있었다.

 

#. 3

 

그 때, 툭, 툭 하고 빗방울이 머리칼에 떨어졌다. 바다에 작은 파문들이 피었다. 30일 저녁, 고베에는 비가 왔고, 그 바람에 물결이 일어 파도가 부두를 때렸다. 그는 끝내 다 흘리지 못한 눈물을 비벼 닦고 자리를 털어야 했다.

 

서럽다 청년아.

 

천지는 불인하구나.


댓글(11)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다락방 2014-10-05 19: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방금 영화 [노아]를 봤는데 이런 글이라니..

말미잘님의 30일은 그랬군요. 나의 9월30일도 특별했는데. 나는 미잘님과 전혀 다른 이유로요.

어쨌든 고베에 잘 다녀오셨나 봅니다. 주말 끝무렵이네요. 잘 보내요!

뷰리풀말미잘 2014-10-05 21:14   좋아요 0 | URL
간사이 지방에 갔었어요. 고베는 잠깐 들렸고요.

노아를 보셨군요. 성경을 재미있게 재해석한 영화죠. 러셀 크로우의 명연기가 기억에 남네요. 방주 위에서 아이를 노려보는 장면은 마치 `샤이닝`의 잭 니콜슨 같지 않습디까? ㅎㅎ 즐거운 주말 보내세요.

아무개 2014-10-06 08: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신, 이 씨발새끼야!에 공감 백만개 드리고 갑니다.^^

뷰리풀말미잘 2014-10-06 09:26   좋아요 0 | URL
:) 읽을만한 책은 찾으셨나요? 좋은 아침입니다.

무해한모리군 2014-10-06 09: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말미잘님의 사진은 늘좋아요.

목아지에 울음이 턱하고 걸린 것 같은 요즘이네요.

뷰리풀말미잘 2014-10-06 10:12   좋아요 0 | URL
ㅠㅠㅠㅠㅠㅠㅠㅠ 휘모리님 ㅠㅠㅠㅠ 토닥토닥.

세뇨리따 2014-10-06 11: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그 존재를 믿지도 부정하지도 않지만 신이 진정 존재하고, 인간이 경외하는 만큼 초월적인 존재라면 그에게 사람은, 인간은 과히 특별한 인식일까? 하는 생각을 종종해요. 저는 젊어서는 종교보단 패기에 의지해 살기로 했으므로, 뭇 종교인들에겐 이다지도 불경스러운 발언이 없겠지만,-물론 ˝씨발 신˝ 에게 비할바는 아니지요 ㅎ..ㅎㅎ..- 흔히 하는 표현중에 사람이 개미보듯 신이 사람 보는것이 특별히 다를까? 개미가 그들만의 세상에 문명을 세우고, 문화를 만들고, 또 스스로 자멸하려는 발악을 해도, 흥미는 있으되 그것이 심각한 인지가 되지는 않는것 처럼.. 인간도 강아지풀, 심지어 강아지풀도 강아지 풀인데요!

생명도 자연, 죽음도 자연, 인간은 종종 자연을 거스른다 말하지만, 사실 그 모든것도 자연의 순환의 일부일지도 모르죠. 문명도 문화도 전쟁도 핵이나 생물학병기의 존재도 자연의 입장에선 예정된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면.. 애초에 `거스를 수 있다` 는 생각 자체가 너무 오만한 생각일지도 모른다고, 우리는 어쩌면 단 한번도 자연에 거슬러 본적도 없고, 그럴 자격도 힘도 없던것이라면..
인간에게 지구의 자연이란 전부지만, 우주의 입장에선 아주 작은 자연의 일부이고 어디에서나 흔히 일어나는 현상의 일부라면.. 생각을 늘어놓다보니 어느새 생각이 말그대로 안드로메다까지 왔는데 결론은
나도 인간인 이상 살고죽는 일에 그저 초월자처럼, 방관자처럼 살수는 없는 일이고, 인륜에 관한한 자연이 아니라 확실히 인류의 소관이라, 신이야 관심이 있든지 없든지 제껴두고, 우리는 우리가 해야할 일을 해야겠죠. 그저 울고 웃는 부질없는 감정의 발악이라도, 그게 할수 있는 전부라면 어쩔수 있나요. 씐나게 웃고 세상이 꺼져라 우는수밖에,,

저도 한 일,이십년 지나서 마냥 패기에 가누기 힘들거든 종교는 하나 가져보려구요. 남들 다 기대는 종교에 제한몸 가눌 자리 없을라고요 :)
그나저나, 여행을 다녀도 꼭 음침하고 외진곳, 특별할것 없는 문화의 일상을 찾아다닌다는
비효율적인 발상은 저랑 똑같네요. 저는 고상하게 말해서 이정도지 제 지인의 일침으로는
˝멍청해!˝,˝변태같아!˝ 였죠.

휴.. 제 대신 변호해주세요, 적어도 저보다 두배는 멍청한 변태같은 말미잘님이..

뷰리풀말미잘 2014-10-06 15:10   좋아요 0 | URL
놀랍게도 저는 신을 믿습니다. 그것도 기독교의 신을 말입니다. 세뇌교육이라는 게 참 무서운 것이죠. 물론 교회를 나가지 않은 건 오래 된 일이지만 그 종교에 대한 이해도는 뭐 제법 되는 것 같습니다. 별 일이 다 있죠. 이미 종교를 가진 입장에서는 종교를 그다지 추천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세뇨리따님은 종교를 가지게 되겠죠.

자연이라는 말 자체를 이해하면 진짜 자연이 뭔지 자연히 알게 되지요. 自스스로 자에 然그럴 연. 스스로 그러한 것이 자연입니다. 초록의 숲이 자연이 아니고 졸졸 흐르는 시냇물이 자연이 아니죠. 이런 관점에 따르면 님이 생각하시는 많은 부분들을 자연의 범주에 자연스럽게 포함시키실 수 있지 않을까요.

제가 변태라는 점을 간파하셨네요. 오사카 신장서점(서점이.. 꼭 다 비슷하게 생긴 건 아닙니다. 극한에 다다른 오타쿠들의 막장이라고나 할까요..)의 마지막 층을 찍고 돌아왔습니다. 변호는 무슨. 변태는 어쩔 수 없어요. 그게 자연인 것을요. 벗어나려고 하지 마세요. 포기하세요. 이성의 끈을 놓아버려요. 포기하면 편합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을 해야’한다는 말이 와 닿습니다.

세뇨리따 2014-10-07 14:44   좋아요 0 | URL
결코 놀랄일은 아니지만, 아름다운 미잘께서 종교인 이라는 것은 확실히 의외예요. 그 기독교적 지식도 사실은 흥미본위에 오지랖 넓은 관심폭에 기인한 것이라 생각했는데,..

세뇌까지 인가요! 종교가 무서운 것은 언제나 신에 미친 사람들 때문이지, 신을 섬기는 사람들 때문은 아니예요. 오히려 그 종교적 신념에 기인한 도덕관념은 아주 존경스러운 사람도 많죠. 이를테면 현 교황처럼, 종교적 관점을 떠나서 분명히 위대한 사상을 가진 사람이예요.

누군가 은근한 비아냥으로, 그러나 경외를 꽉꽉 담아 말했죠.
성경은 가장 위대한 소설이라고.
인간의 솜씨를 벗어난 문학적 가치가 분명 있어요.
오죽 잘 썼으면 오히려 픽션이라는걸 증명하고 설득할 노력을 해야 할 판이죠.
만약 성경이 거짓이라고 전제한다면, 성경은 존재만으로 문학의 가치와 위대함의 증명이겠죠. 글로 완벽한 세상 하나를 창조해 낸 것이니까요.

저는 있는 현상이 아니면 믿으려 하지 않았고, 과학만이 진실이라 믿고 있지만,
근래 들어서는 오히려 그 믿음때문에 종교나 귀신같은 것 들에 대해 긍정의 가능성을 갖게 되더군요. 아는것보다 모르는 것이 더 많은 현주소에서, 인류의 얕은 지식으로는 어떤것도 부정할 수준이 아니라는 것. 십년 백년 후에는 신이나 귀신도, 우주도 지금 우리가 아는것 처럼 과학적 설명이 가능해질날도 있지 않을까 하는.. 지금으로선 아이러닉 이지만요.


간파까지 할 필요도 없었어요, 덕후 미잘님.
이래도 저래도 변태여야 한다면,
저는 아름다운 미잘님보다 멋있는 변태가 되겠어요.

뷰리풀말미잘 2014-10-08 23:15   좋아요 0 | URL
성경은 정말 대단한 책입니다. 역사, 논설, 소설, 시, 수필, 판타지 온갖 장르의 심히 창대한 쾌감을 동시다발적으로다가 느낄 수 있으니깐요. 저도 과학도, 종교도, 귀신도 다 좋아합니다. 그 친구들이 사이들이 좋은 편은 아닌데 제가 골이 비어서 그런지 머릿속에 자리가 많이 남아요. 다 들어와서 한판 벌여도 여유가 있는 편입니다.

맨날 댓글만 남기고 사라지고. 서재 좀 열어주세요.

세뇨리따 2014-10-09 02:01   좋아요 0 | URL
제 서재는 언제나 열려있습니다. 특히 아름다운 분들께는 더욱 활짝요. 다만 아무것도 없다 뿐이죱 :)

그러고보니 말한적 없던가요? 저는 인터넷으로 책 잘 안사요. 사람 손떼 탄 중고는 좋아하는데, 직접 그 질감을 느껴보고 한두페이지 직접 손으로 넘기고 난 후에야 사죠. 제가 알라딘에 가입한 이유는 전적으로 말미잘님 서재에 글남기기 위해서 였습니다. 이 서재에 처음들른날, 이 서재를 통해서 회원가입했었죠. 쑥스러워 하셔도 좋아요, 헤헤.
 

  













#. 1


루리가 책을 읽고 있었다. 뭔가 하고 들여다보니 일본어 원서였고 내 눈썰미로는 얼른 제목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루리가 나 모르는 책을 읽는 것이 매우 이례적인 일인 바, 도대체 무슨 책을 읽는 거냐고 물어봤다. 


한심하다는 표정으로 책 표지의 가타가나를 가르키는 루리. 


-휴, 이거 몰라? 도.스.토.예.프.스.키.


그러니까 제목이 뭔데?  


루리 낯빛에 약간의 당혹스러움이 번진다. 


-..죄또벌. (罪と罰)



#. 2


가끔 썼던 얘기지만 루리의 운동능력은 초인적인데가 있다. 호텔리어 대신 유도를 진로로 선택 했다면 국제적인 명성을 쌓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지만, 딸래미를 금지옥엽 키우신 모친께서는 루리가 개교 이래 최고의 체육성적을 받아 오건 말건 그저 적성에도 맞지 않는 공부만을 시켰더랬다. 사자한테 풀을 먹여 키운 격.


대신 루리는 격투스포츠를 즐기는 편이다. 가끔 운동 삼아 샌드백을 치기도 하고(‘김주임’.. 이라고 중얼거리면서 치는데 그걸 보고 있으면 김주임의 미래와 루리의 현재에 대해 여러 가지로 안타까운 생각이 들곤 한다.), K-1(망했지만) 같은 게 TV에 나오면 눈여겨 보기도 한다. 같이 채널을 돌리던 어느날, 밥샙이 우람한 근육을 뽐내며 최홍만에게 얻어터지는 장면이 나왔고, 루리는 울분에 차 허공으로 주먹을 휘둘렀다.  


-바보 녀석! 최홍만 따위한테 당하다니. 만나면 엉덩이를 걷어차 주겠어! 


그리고 몇 년의 시간이 지난 후, 


정말로 밥샙과 만난 루리의 주먹은 어쩐지 그 날의 분노를 잊은 듯, 


수줍기만 하다. 



 

접힌 부분 펼치기 ▼

 

 

 


 

펼친 부분 접기 ▲

 



댓글(5) 먼댓글(0) 좋아요(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노이에자이트 2014-09-13 22: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밥샙은 2주전 안토니오 이노키 의원이 평양에서 주최하는 프로레슬링 대회에 나갔더군요.

그런데 위 사진에서 밥샙이 나온 곳은 어디인가요?

뷰리풀말미잘 2014-09-13 22:45   좋아요 0 | URL
인천 워커힐이요. ㅎㅎ 인천에 모여서 전세기를 타고 평양으로 가는 코스였겠군요.

노이에자이트 2014-09-14 11:36   좋아요 0 | URL
아...그랬나요...저는 일본에서 바로 간 줄 알았어요.

세뇨리따 2014-09-16 17: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주먹은 수줍을때가 있어야 해요. 저도 제가 말뱉은 곧이 곧대로 주먹을 휘둘렀다면 아마 살아있지 못했겠죠. 유난히 낯을 많이 가리는 제 주먹덕에 아직 연명하는 중이라 그 수줍음에 항상 감사하고 살아요.

뷰리풀말미잘 2014-09-17 07:41   좋아요 0 | URL
ㅋㅋㅋㅋㅋㅋㅋㅋㅋ 세뇨리따님 주먹 덕분에 연명하시고 계셨군요. 내 참. 저는 게으른 주먹 덕을 톡톡히 보고 있어요. 게을러서 다행이야.
 
대항해 시대 - 해상 팽창과 근대 세계의 형성
주경철 지음 / 서울대학교출판부 / 2008년 3월
평점 :
품절


#. 1

 

고대인들은 바다를 동경했다. 푸른빛으로 넘실거리는 미지의 평원. 끝을 알 수 없다는 것은 얼마나 매혹적인가. 그들은 밤낮으로 노를 저어도 끊임없는 그 망망한 대해를 이야기로 채워서 딛고 건넜다. 빛도 닿지 않는 심해 깊숙한 곳에 플라톤은 아틀란티스라는 이데아를 지었고, 조선인들은 용궁이라는 무릉도원을 상상했다. 어느 갑판장은 꾸벅꾸벅 조는 부하들을 깨우기 위해 선원을 유혹하는 세이렌의 이야기를 지었고, 안데르센은 인어공주가 거품처럼 사라지는 로맨스를 꿈꿨다.

 

꿈을 꾸고 그 꿈을 이루기 위해 온갖 노력을 마다하지 않는 자들에게 마침내 꿈은 이루어진다고 하던가. 바다로 툭 튀어나온 호기심의 부두에서 세계로 닻을 올린 사람들이 있었으니, 15세기, 근대가 어스름하게 밝아오는 시절이었다.

 

1405년 명나라의 정화가 황제의 명을 받아 3500척 대 선단에 금은보화를 가득 싣고 아프리카에 이르는 여정을 시작한 이래, 유럽의 항해자들은 지중해를 거미줄 같은 상업 네트워크로 엮었고, 아프리카 남단의 희망봉을 돌아 마다가스카르와 홍해, 인도까지 항로를 개척했다. 영국의 은괴는 인도의 목면과 교환되었고, 일본의 비단이 네덜란드의 면직물과 거래되었다. 프랑스의 미식가들은 매콤한 아랍산 후추에 열광했고, 중국의 가난한 마을은 아메리카에서 들어온 고구마와 옥수수로 주린 배를 채울 수 있게 되었다. 생태계가 뒤섞이고, 문화가 교류되자 잠들었던 세계가 꿈틀거렸다. 바야흐로 대항해시대의 시작이다. 
 
물론 바다가 늘 낭만적인 것은 아니라, 항해마다 10~20%에 이르는 항해자들이 질병과 사고로 물고기 밥이 되었다. 노예무역선의 끔찍함은 아우슈비츠 이전까지 가장 어두운 역사의 그늘이었다. 노예들은 햇빛 한 점 얻을 수 없는 퀴퀴한 선창, 관처럼 답답한 공간에 묶여 절망적일만큼 처절한 뱃멀미와 충격적으로 비위생적인 환경에서 몇 달이 넘는 항해를 견뎠다. 항로가 뒤엉켜가는 동안 로망의 바다는 어느새 욕망으로 물들었고, 지구 반대편의 대자연과, 막대한 천연자원과, 원주민들의 생활은 서구인들이 지니고 온 총과 질병으로 파괴되었다. 어느 시대에나 야만은 있었을 것이나, 이제 그 야만은 지구적인 규모로 확장된 것이다.

 


#. 2

 

저자는 그간 역사학의 주류였던 대륙-농경 문화적 관점과 유럽 중심주의적 사관에서 벗어나 소외되었던 근대 해양세계의 발전에 주목한다. 바다를 통해 광대한 네트워크를 개척했던 사람들의 이야기, 바다에서 쓰여 바다로 돌아간 줄 알았던 해양의 역사를 451건의 참고문헌을 들춰 재구성한다. 오랜 시간 침묵하던 역사학 좌현의 노를 추슬러 ‘지구사’로 저어간다.

 

그 시대 유럽의 배들은 욕망이라는 이름의 돛을 꼿꼿이 세우고 끝없이 국경을 넓혀나갔다. 그 최전선에서 문명과 문명, 선단과 선단, 국가와 국가가 격돌했다. 그런 과정을 통해 유럽세력은 세계를 근대라는 이름의 새로운 질서로 편입시켰다. 세계인들은 서구의 과학기술이 가져다 준 다소의 편의를 얻었으나, 영영 소박한 삶을 잃었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의 결과로 우리는 에티오피아산 커피를 마시며, 아프리카에서 유래한 음악을 듣고, 유럽의 미술을 감상할 수 있게 됐다. 옳다, 그르다, 좋다, 나쁘다 라는 가치판단을 떠나 인류의 태동 이래 이제까지 없었던 차원의 삶을 우리는 직면하게 된 것이다.

 

여기는 어딘가. 또 우리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 저자는 이 책의 목표를 ‘지구사’의 서술이라고 적었지만, 궁극적인 관심은 ‘지금, 여기’에 잇닿아 있을 것이다. E.A 카가 말 하듯 역사란 ‘과거와 현재의 대화’가 아니던가.

 

나침반 이전의 항해자들은 배 뒤로 부표를 던지고 배가 멀어지는 속도와 방향을 가늠해 지도상에서 현재 위치를 짐작했다고 한다. ‘대항해시대’는 저자가 근대로 던져 놓은 부표. 이 책을 읽으면서 지금 우리는 어디에 있는지, 어디로 가고 있는지를 가늠해 볼 수 있으리라. 

 

 

#. 3

 

책을 읽는 동안 나는 구름 낀 하늘을 태양석으로 관측하며 목적지를 가늠하는 바이킹이었다. 가업으로 포르투칼어 사전을 편찬하는 17세기 일본의 청년이었다. 악명을 떨치는 카리브해의 해적이었다가, 리버풀의 노예상인과 사랑에 빠진 이국의 노예였다. 동인도 회사의 폭정에 맞서 칼을 쥔 필리핀의 농부였고 이를 앙다물어 이끼가 가득한 오크통의 물을 걸러먹는 포르투갈의 뱃사람이었다. 매일 밤, 책을 펼 때마다 파도 소리가 들렸다.

 

읽는 내내 행복했다.

 

이제, 돛 내리듯 책의 마지막 페이지를 덮는다.


댓글(10) 먼댓글(0) 좋아요(1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다락방 2014-08-21 10: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가업으로 포르투갈어 사전을 편찬하는 17세기 일본 청년이라니... 멋지다..노예상인과 사랑에 빠지는 이국의 노예라니...아 낭만적이야..♡

뷰리풀말미잘 2014-08-21 10:58   좋아요 0 | URL
이 글의 포인트는 제가 참고문헌을 일일이 세 봤다는 겁니다. ㅋㅋ 451개를.

다락방 2014-08-21 11:26   좋아요 0 | URL
저는 글쓴이의 의도를 파악하지 못한 채로 글을 읽었네요? 엉뚱한 데에 꽂히고 ㅎㅎ

뷰리풀말미잘 2014-08-21 11:33   좋아요 0 | URL
그렇죠. 그런것도 몰라요?

2014-08-31 23:1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4-09-01 18:30   URL
비밀 댓글입니다.

봄밤 2014-09-01 19: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글은 프랑스에서 시작되어...
봄밤이 어제부터 12번째 쓰고 베끼고 있는 글입니다.

"헤테로토피아"의 한구절을 적어요.

...당신은 배가 왜 우리 문명에서, 16세기 이래 지금까지 가장 거대한 경제적 수단(이는 오늘 이야기의 주제는 아니다)인 동시에 가장 거대한 상상력의 보고였는지를 이해하게 된다. 배, 그것은 전형적인 헤테로토피아이다. 배 없는 문명에서는 꿈이 고갈되고, 정탐질이 모험을 대신하며, 경찰이 해적을 대체하고 마는 것이다. p. 58

"헤테로토피아"를 보고 "원피스"가 생각났고, 이 구절로 "대항해 시대"를 만납니다.

더불어 망망대해에서 뷰말님을 만나고요! 얍


뷰리풀말미잘 2014-09-02 08:18   좋아요 0 | URL
헤테로토피아를 열 두번...? 헐.

제가 무식해서 배를 헤테로토피아라고 생각 할 수 있을지는 잘 모르겠지만. (전 솔직히 아무리 번역을 잘 해놔도 프랑스사람들이 하는 얘기는 못 알아듣겠어요.) 최근의 크루즈선이 바로 물질문명이 가진 유토피아적 이상을 구현한 배라는 생각은 드는군요. 그 자리를 떠나고 나면 물결밖에는 남는 것이 없으니 정말, 원어의 의미처럼 ou아무것도 없는+toppos장소.

전 원피스는 읽다 말았지만, 대항해시대는 정말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일독을 권합니다.

봄밤 2014-09-02 11: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단순히 배를 떠올린것에 지나지 않았어요. 뷰말님 글로 이해를 쌓아요. 이 책은 무척 얇고, 저는 글이 시 같아서 더듬거렸습니다. 리뷰만으로도 읽고 싶은 책이에요. 기억하고, 찾아볼게요.

뷰리풀말미잘 2014-09-02 14:58   좋아요 0 | URL
즐거운 시간이 되실겁니다.
 

아시잖아요 선생님.

 

당신이 떠나더라도 우리는 당신을 보내드릴 수 없다는 거.  

 

 

 

 

Good bye. Robin Williams.

 


댓글(4)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다락방 2014-08-12 09: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방금전 그의 트윗을 들어가봤어요. 여전히 얼굴엔 장난끼가 가득한데..

뷰리풀말미잘 2014-08-12 09:43   좋아요 0 | URL
ㅠ_ㅠ

세뇨리따 2014-08-22 14: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최고의 배우라는 찬사는 진부하겠죠. 그래도 내 삶에 가장 큰 파급을 미친 스승이 키팅이라는건 어쩔수 없어요. 로빈은 좋아하는 배우였지만, 키팅 선생은 가히 신앙이었죠. 아마 평생 이보다 위대하다고 생각되는 영화-라고 쓰고 삶의 교본이라 읽죠-는 찾을수 없을거예요.

뷰리풀말미잘 2014-08-22 18:34   좋아요 0 | URL
카르페-

들리세요 세뇨리따님?

카르페- 카르페 디엠!
 

 

 

 

 

 

 

 

 

 

 

 

 

 

 

#. 1

 

우리의 소식통이 ‘변’변치 않아 비록 그분의 소식을 잘 ‘듣’기도 어렵고 실제로 ‘보’기는 더더욱 어렵긴 하지만, 뭐 어쨌거나 입지전적의 한 남자가 있다. 그를 뭐라고 불러야 할까. 혹자는 그의 불꽃같은 삶을 음악의 거성 드보르작에 비유하여 ‘드보르잡’이라 높여 부르되, 어찌 충분하랴. 경의를 담아 스승이라 하자.

 

비록, 우리가 듣도 보도 못하긴 했으나 스승께서는 어려서부터 숱한 사회의 부조리와 맞서 싸우시고, 사회정의 실천을 위해 한 몸 불사르다 홀몸으로 곱게 늙어지셨으니 의인 중 의인이라.

 

신도 스승을 축복하여 창업의 은사를 주셨고, 스승께서는 그 은사를 적절히 활용하사 근 두 자리 수에 가까운 언론사를 창업하여 뭇 중생들에게 복된 소식을 전파하셨으나, 신은 경영의 은사까지는 주시지 않았다 카더라.

 

스승께서는 좌절하지 않으시고 몸 바쳐 애국에 투신하사, 사회의 늙고 병든 자들과, 소외된 넷 잉여들을 회개시키시고 그들을 규합하여 그 뭔가를, 우리가 감히 짐작키 어려운 그 뭔가를, 이루려 하셨으나 잘 되지는 않으신 모양이다, 그리고 이게 웬걸.

 

믿었던 수구꼴통들에게 고난을 당하사 방송에서 짤리시고, 로또도 아닌데 응모했던 MBC사장에서는 광탈을 하셨으나, 광탈한지 사흘만에 광탈한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시며 미디어 워치로 토끼사, 전능하신 사장자리에 올라 계시다가 괜히 눈을 세모낳게 뜨시고는 좌빨과 아닌자를 심판하러 오리라 하셨다.

 

뿐 만인가, 스승께서는 머무시는 곳 마다 기적을 행하셨는데, 멀쩡한 개그맨에게 엑소시즘을 행하사 종북으로 사상전향 시키셨으며, 평범한 논문을 표절 논문으로 바꾸시는 기적 같은 건 뭐, 무시로 베푸셨다.

 

하루는 제자들을 고깃집으로 모아 가라사대 “고기를 먹으라.” 하자 제자들이 이르되 “여기 우리에게 있는 것은 1,000만원 뿐이니이다.” 했다. 스승께서는 이르시되 “그것을 내게 가져오라” 하시고, 무리를 명하여 자리에 앉히신 후, 무려 1,300만원어치를 고기를 먹이시니 무리가 다 배불리 먹고도 남았다 카더라. 후안무치한 좌빨들이 가로되, 변리바바로다 하자 고소미를 먹이셨으니 그 주변의 모두는 고기도 먹고 고소미도 먹고 두루두루 배가 불렀다 카더라.    

 

 

#. 2

 

스승께서는 일찍이 깨우치신 바 있어 스타들을 비평(?)하시고 이 글(?)을 모아 두 권의 책(?)으로 출간하셨는데 알라딘의 눈 먼 중생들이 단 세 개의 리뷰를 썼다. 이에 스승께서는 가슴을 치고 통탄하신후 14년간 면벽수행 끝에 신간을 출간하셨고, 회개한 알라디너들의 가열찬 호응을 얻어 두 달 만에 무려 28개의 100자평이 쓰였다.

 

그런데 이게 어쩐 일인가. 한 잉여가 있어 분석을 해 보니 (8월 2일 기준) 놀랍게도 14개의 별 하나와 14개의 별 다섯으로 구분이 되었고 그 중간의 별점은 단 하나도, 단 하나도 존재치 않았다. 그런데 말입니다.  뭔가 심상찮은 낌새를 느낀 제자가 모니터를 곰곰이 들여다 보자, 별 다섯 개를 준 14인 중 9명이 그 허구 많은 날 가운데, 7월 21일에 집중적으로다가 100자평을 썼더라.

 

이 통계학적 기적 앞에 모골이 송연해진 제자는 삼가 옷매무새를 단정히 하고 각 서재에 들어가 확인을 해 보니 그 중 무려 7인이 그 전까지 별점 하나 쓴 적이 없는 자들이었다. 불경한 제자가 무릎을 치고 회개하며 가로되, 스승께서는 21일에 기적을 베푸사 앉은뱅이들을 일으켜 모니터 앞에 앉게 하시고, 소경으로 눈을 뜨게 하여 자판을 두드리게 하셨다 카더라.

 


#. 3

 

고소미를 믿사오며, 거룩한 미디어 워치와, 일베가 서로 교통하는 것과, 고기값을 사하여 주시는 것과, 니가 쓴 게 책이라는 것과, 수컷닷컴이 영원히 망하지 않을 것을 믿사옵나이다. 아멘.
 


댓글(11) 먼댓글(0) 좋아요(2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마노아 2014-08-03 21: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에이멘!!!

뷰리풀말미잘 2014-08-03 21:57   좋아요 0 | URL
에이멘. 자매님 오셨습니까.

??? 2014-08-04 07: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책을 읽은것도 아니고 뭔

뷰리풀말미잘 2014-08-04 10:36   좋아요 0 | URL
제가 아직 신심이 그리 깊지 못해서..

만화애니비평 2014-08-04 08: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청춘과 투쟁하신다고 바쁜 그분이십니다!!! 오오오

뷰리풀말미잘 2014-08-04 12:51   좋아요 0 | URL
믿쓥미꺄!?

만화애니비평 2014-08-04 22:50   좋아요 0 | URL
미숩까루입니다!

봄밤 2014-08-09 03: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분의 행보에 제 마음이 숯까루입니다아! 급기야 청춘투쟁이라니 털썩

뷰리풀말미잘 2014-08-10 00:20   좋아요 0 | URL
늘 상상을 초월하는 분이시죠. 십년이 넘는 세월동안 한결같은 반면교사의 역할을 해 주셨는데 요즘은 뿌린대로 거두시느라 바쁘신지 소식이 뜸하시네요. 김미화 1300, 이정희 1500, 이재명 2억.. 그 외에도 줄소송이 뒤따를 예정이라고 들었습니다. 얼마 전 새로 만든 뭔 사이트도 파리 날린다는 소문이고. 이러다 영영 이별은 아닐른지. ㅎㅎ

피아조 2014-08-12 16: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필력 쩌시네요

뷰리풀말미잘 2014-08-12 17:26   좋아요 0 | URL
재미있게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