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가부터 우리는 실제가 아닌 상징적인 가치를 만들고 소비한다. 가령, 페이스북에 올린 윤기 흐르는 맛집 음식들과, 멋진 여행사진이 어디 삶의 현실이던가. 하지만 이미지는 현실을 압도하여 우리는 맛깔나게 업로드 된 사진을 보며 뿌듯해하고, 혹은 부러워하며 살아가는 것이다. 점점 비어가는 우리의 삶을 허상이 대체하는 풍경. 영화, ‘매트릭스’에서 모피어스가 네오에게 말 했듯 우리는 ‘땅(현실)이 아닌 지도 위(가상)를 실제로 알고 살아가’는 것은 아닐까? 철학자 보드리야르는 이런 현상을 ‘시뮬라시옹’으로 정의했다. 그는 우리 삶에 실제가 사라지고 그 자리를 가상의 이미지가 대체하고 있다고 말한다.

 

주인공 던과 에이미 부부의 삶이 꼭 그렇다. 남편 던은 칼럼리스트이자 평범한 대학 강사이지만, 아내 에이미의 커리어는 범상치 않다. 그녀는 그녀의 어린 시절을 기반으로 한 동화 ‘어메이징 에이미’를 통해 널리 알려진 유명인이자 하버드 출신의 알파걸이다. 두 사람의 결혼생활이 실제로 어떠했는가에 대해서 영화는 단 한 조각의 시퀀스도 할애하지 않는다. 관객은 다만 드러나는 단서들을 통해 ‘심히 막장이었다.’는 사실을 유추할 수 있을 뿐.

 

어느 날 에이미가 사라졌다. 실종 포스터 속 섬뜩하게 상큼한 미소만 남긴 채로. 빈집의 곳곳에는 혈흔과 수상쩍은 단서들 뿐. 사태는 오직 실종된 에이미의 다이어리를 통해서만 재구성된다. 하지만 모든 정황은 남편 닉을 유력한 용의자로 지목한다. 닉은 사라진 아내를 찾기 위해 동분서주하며 결백을 주장하지만, 애인의 팬티가 사무실에서 발견되는 등 그에게도 미심쩍은 구석이 한 두 가지는 아니다.  관객들은 에이미의 다이어리와 닉 사이에서 심정적으로나 논리적으로 팽팽하게 당겨진 동아줄이 된다. 동아줄이 두 부부 중 어느 한 쪽으로 기울어지면 다시 반대편이 힘껏 줄을 잡아당기는 상황. 이 치정극의 종국에서 에이미는, 그녀의 모습을 한 진실은 어디로 기울어질까.

 

바야흐로 진실이 가문 시대다. 개인도, 기업도 이미지로 자신을 치장하기 바쁘고, 정치가들은 현실의 해법보다는 환상을 공약으로 내 건다. 던 부부의 생활은 잔혹한 성인 버젼으로 돌아온 ‘어메이징 에이미’. 이 시대에 구미에 맞게 미디어가 재창조한 동화에 대중들은 열광한다. 감독은 던 부부가 연출하는 연극 같은 삶의 모습을 통해 알맹이 없는 현대 사회와, 포장지 같은 미디어의 본질을 벗겨내는 것이다. 진실은 종잇장 같은 속살을 드러내고 펄럭거린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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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phistopheles 2014-11-11 10: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긴..요즘은 모모모방송이라고 먹는 방송과 게임방송이 인기이기도 하죠. 일종의 대리만족인가요?

(웃기는 이야기로 게임방송을 보는 친구를 질타하며 `게임은 직접해야지 남이 하는 걸 보면 무슨 재미?` 라고 타박했던 어떤 사람이 그 친구의 ˝그럼 넌 야동 왜 봐.?˝ 한마디에 기브업 했다고 하더군요)

뷰리풀말미잘 2014-11-10 20:38   좋아요 0 | URL
ㅋㅋ 혹자는 현실보다 야동이 좋다고 하더라고요. 현실과 가상의 위계가 뒤바뀌는 현상이겠죠. 최근엔 3D야동도 개발되었다고.. 이렇게 현실은 점차 설 자리를 잃어가겠죠.
 

 

 





#. 1

543명, 기록적인 히트수다. 

종종 이렇게 아무 글도 올리지 않는날 방문자수가 폭주하는 경우가 있는데 아마도 뭔가 서버의 오류같은 것이 아닐까 싶다. 

이 포스팅은 이러한 현상이 오류가 아닐지도 모른다는 아주 사소한 가능성을 전제로, 아무 생각 없이 링크를 눌러 내 서재를 찾아온 당신의 수고에 약간의 보상을 선사하기 위한 목적으로 쓰였다. 

다음의 동영상은(동영상 링크이지만 동영상은 아니다. 음성 뿐이다.) 3D ASMR(Autonomous sensory meridian response:자율 감각 쾌감)로, 단 하루만에 500히트 이상을 찍어준 당신들을 위한 답례다. 감상하는 방법은 쉽다. 이어폰을 꼽고, 볼륨을 올리고 (max 볼륨의 70%정도를 추천한다.) 편한 자세를 취하시라. 눈은 지그시 감는 것을 권장한다. 단, 이어폰이 없다면 다음 기회를 이용하시기 바란다. 필수적인 준비물이다. 영어 리스닝은 안 되도 상관없다. 끝까지 들어보시라.

자, 이제 준비가 됐으면 스타트 버튼을 누르고 4분 40초간 즐기시면 되겠다. 




#. 2

행동심리학의 대가 스키너는 쥐들이 특정행동을 할 때 적절한 보상(먹이)를 주면 그 특정행동을 강화(reinforcement)할 수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이 악마적으로 영악했던 늦깍이 심리학도는  곧 '고정 비율 계획'이라고 명명된 실험을 고안해 냈는데 이름의 포스에 비해 내용은 간단하다. 지렛대를 당기면 먹이를 주는 자동 기계 장치 속에 쥐를 넣어서 지렛대를 누를 때 마다 각각 3번, 5번, 20번에 한번 씩 먹이를 준 것이다. 결과는 놀라웠다. 모든 쥐들이 엄청난 속도로 지렛대를 누르는 방법을 학습한 것. 

그는 학습된 쥐들을 꺼내 같은 구조의 장치 속에 넣었다. 이번에는 다만 지렛대를 누를 때 마다 먹이가 무작위 패턴으로 나온다는 것이 다를 뿐이었다. 한 번을 눌러도 나올 수 있고 100번을 눌러도 나오지 않을 수 있는 이 장치 속에서 쥐들은 어떻게 행동했을까? 무료로 제공되는 먹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지렛대를 포기하지 않았다. 마치 우리가 매주 로또에 헛돈을 쓰듯, 새로운 정치인이 나올 때마다 투표장으로 달려가듯, 뭐 그렇게.  

내 얘기가 늘 그렇듯 별 의미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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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뇨리따 2014-10-24 23: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뷰말님 서재 무려 크롬 즐겨찾기6번째에 있어요. 그 위로는 네이버 페북 구글 p2p같은 생필적인 요소들이죠 :) 아아, 물론 뷰말님 서재까지 포함해서 6번째 즐겨찾기까지가 제 웹서핑 필수 항목들이예요.

그런데 뷰말님에게 나는 고작
500마리 쥐중에 한마리일 뿐 이겠죠.ㅠ

뷰리풀말미잘 2014-10-24 23:47   좋아요 0 | URL
크롬을 쓰시는군요. 역시 서핑은 크롬이 편하죠. 자동번역기능도 강력하고요.

세뇨리따님도 참! 1. 실제로는 한 50명도 안 들어왔을 거고요. 2. 즐겨찾기 할 수 있는 좌표만 찍어주시면 바탕화면에 아이콘으로 만들어 놓을 용의가 있어요. `내 컴퓨터` 바로 옆에.
 

 

 

#. 1

 

새로운 곡을 찾아도 늘 듣던 곡으로 돌아오게 된다. 이소라의 바람이 분다. 이 노래를 처음 내게 알려준 이는 길상규였다. ‘별 이름 규’를 쓴다.奎 노래를 반복해 들으며 그의 덧니를 기억한다. 나는 몇 년 전 부터 그에게 연락하지 않는다. 그는 내가 가장 싫어하는 내 모습을 닮았다.

 

 

#. 2

 

음악을 들을 때 가사를 듣지 않는다. 내가 처음으로 좋아한 대중음악은 new kids on the block의 step by step이었다. 그 곡을 좋아하는 나를 위해 그녀는 한글 발음으로 가사를 적어줬다. 나는 거의 처음부터 끝까지 그 노래를 다 부를 수 있었지만, 끝내 가사를 이해하지 못했다. 아직도, 음악의 가사를 의미 있게 듣지 않는다. 예외는 아주 드문 편이고 이 곡은 그 예외에 속한다.

 

가사의 한 결 한 결을 되새긴다. 아름답다. 아름다운 곡이다.

 

선율같은, 내 몸의 곡선처럼.

 

 

#. 3

 

열일곱 살 때였다. 부스스 눈을 떴을 때 거울에 얼비치는 허리가 보였다. 햇볕이 뽀얗게 내려앉는 아침이었고, 몸이 눈부시게 빛났다. 내 몸을 감상하느라 학교에 늦었다. 개 패듯 얻어맞았지만 아름다움을 감상한 대가에 비하면 별로 대단한 일도 아니었다. 단단하고 부드러운 내 몸을 사랑한다.

 

혐오한다.

 

사랑한다.

 

 

#. 4

 

그는 내가 글을 되새기며 고쳐쓰고 고쳐쓰는 줄 알지만, 사실 별로 그렇지도 않다. 지금 나는 한 곡당 한 문단이 넘는 분량의 글을 쓰는 중이다. 타자 소리가 박자와 맞물렸다 떨어졌다 다시 맞물린다. 무의식적으로 박자에 타자를 맞추고 있는 것 같다. 화면 가득히 생산되는 검은 글자, 하얀 바탕을 미끌어지는 글씨들. 껍질 바깥의 나는 오히려 생각하지 않으려 정신없이 의미를 생산하는 것 같다.

 

 

#. 5

 

의미는 내 머릿속에서 그치지 않는다, 그치지 않는 의미는 불면이 된다. 불면은 불안이 되고 불안은 우울이 된다. 멜랑콜리. 디프레션과 인섬니아. 내 신체의 현상을 수식하는 닥터들의 수사학는 지나치게 낭만적인 구석이 있다. 보이지 않는 방 저편을 헝클어진 머리를 하고 밤 새 노려봐야 하는 사람의 마음은 어둠이다. 그믐날 한 발 재겨 딛을 곳 찾을 수 없는 어둠이다. 사랑할 수 없는 나의 이면을 그녀는 하이드라고 불렀다.

 

떠나갔다.

 

 

#. 6

 

잡지 않을 생각이다. 햇볕은 뜨거웠고, 동료들은 기진맥진해 모두 널브러져 있었다. 수도꼭지가 있었지만 주변은 모두 축사라 그 물을 먹으면 끔찍한 꼴을 당한다는 사실을 우리는 경험적으로 알고 있었다. 하루 내내 보급은 오지 않았다. 참지 못한 한 녀석이 수도꼭지를 돌렸을 때 나는 내 수통을 던져 줬다. 먹어. 아직 반이나 남은 수통이었고, 우리가 구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수분이었다.

 

굶주렸을 때 탐하지 않았고, 재우기 위해 졸지 않았다.

 

나의 행복을 위해 기도하지 않았다.  

 

한 때는 그걸 영성이라고 믿었지만, 실상은 단순했다. 자기애의 결핍.

 

 

#. 7

 

걷는 사람들을 본다. 발자국엔 성격이 묻어난다. 나는 걷는 모습을 보고 그 사람의 성격을 맞춘다. 대범함과 소심함, 여유와 조급함, 사려 깊음과 배려 없음, 삶을 대하는 태도가 걸음걸이에 나타난다. 수천가지의 삶이 수천가지의 가닥으로. 아침과 저녁마다 잠실에서 내 주변을 스쳐가는 사람들의 풍경을 관찰한다.

 

내 걸음을 관찰해본 일이 없다. 문득 내 걸음이 궁금하다.

 

 

#. 8

 

추억을 가공하지 않을 작정이다. 다가올 것을 바라볼 생각이다. 내가 행복할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영 불행할 것이라고도 생각하지 않는다. 담담히, 관조하면서 주어진 삶을 살아낼 작정이다. 

 

나는 젊고, 아름답고, 조금 이상한 성격이지만

 

영화를 보고, 돈을 벌고, 책을 읽고, 사람을 만나고. 그랬듯 그렇게 살 생각이다.

 

아홉시를 불안하게 생각하지 않게 되기를, 약을 먹지 않아도 달콤하게 잘 수 있게 되기를. 미친 듯이 샌드백을 두드리지 않아도 분노하지 않게 되기를. 사람들이 예쁘다고 말 한 상냥한 미소를 내 스스로에게도 지을 수 있게 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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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14-10-14 22: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당신은 젊고, 아름답고, 조금 이상한 성격이지만,
잘 지내도록 합시다..

아퍼 ㅠㅠ

뷰리풀말미잘 2014-10-15 18:50   좋아요 0 | URL
: )

Forgettable. 2014-10-15 01: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늙지 말아요. Young and beautiful 해요 우리 모두!

저 12시간 후 출국. 행복하세요. 내년 여름에 스페인와요.

뷰리풀말미잘 2014-10-15 18:50   좋아요 0 | URL
조심히 다녀와요..

선물 사 와요..

무해한모리군 2014-10-15 09: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추억을 가공하지 않을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조금 늙고 여전히 성격이 이상해도 아름다울 당신,

고운 꿈 꿔요 ♡♡♡

뷰리풀말미잘 2014-10-15 18:52   좋아요 0 | URL
저는 늙지 않습니다.

비록 성격은 이상하지만. ㅠ_ㅠ

좋은 꿈 꾸세요.

곽진언으로 하나됩시다.
 

 

 

 

 

 

 

 

 

 

 

 

 

 

 

#. 1

 

돌벽 회랑을 지나 나무문을 열자 어둑한 방이다. 발자국 소리가 공간을 채우자 텅 빈 것 같았던 구석에서 희미한 어둠이 일렁인다. 사람의 기척이다. 남자가 등잔에 불을 붙이자 마법처럼 사슬에 양 손목이 묶인 여성의 하얀 나신이 드러난다. 천장으로부터 바닥까지 팽팽한 수직의 긴장감. 코르셋 라인 잘록한 허리 아래로 탐스러운 엉덩이와 매끈하게 뻗은 다리의 곡선은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못했다. 부끄러움을 감추기 위한 그녀의 본능적인 노력은 남자의 명령에 의해 허무하게 격절된다. 

 

-다리 벌려.

 

돌아서 있는 여자의 표정은 떨리는 어깨의 움직임으로 짐작할 수 있다. 망설이던 그녀는 체념한 듯 다리를 양 쪽으로 벌린다. 시선은 바쳐진 제물의 구석구석을 탐한다. 게걸스럽게 몸의 구석구석을 훑던 남자는 벽에 걸린 채찍을 들고 여자의 등 뒤로 다가간다. 파열음과 함께 엉덩이에 붉은 자국이 꽃처럼 피어날 때 마다, 자존심으로 꽉 악문 턱이 조금씩 열린다. 그리고 어느 순간 터진 둑처럼 붕괴된 내면의 흔적이 신음소리가 되어 둘만 있는 공간을 채운다. 고통이 열병처럼 온 몸을 뒤덮자 여자는 벗은 몸과, 벌린 다리가 부끄럽지 않다. 남자가 채찍을 휘둘러 고통과 부끄러움의 감각을 미묘하게 컨트롤 하며 그녀를 몰아갔다.

 

채찍질을 멈춘 남자는 땀과 매 자국으로 뒤덮인 그녀의 엉덩이 뒤로 가까이 다가간다. 헐떡거리는 숨소리가 느껴지고, 달아오른 상대의 몸이 셔츠의 두께 너머로 느껴지는 거리까지. 여자는 열이 올라 흥분과 아픔의 경계조차 모호하다.

 

남자는 여자의 귀에 입술을 가까이 가져다 대고 말 했다. 당신에게 밤새 더 잔혹한 수치를 강요할 생각이라고. 그녀의 겨드랑이에 송글송글 맺힌 땀이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흘러내렸다. 시간은 오로지 남자의 편이었고, 여자는 아무리 몸을 비틀어도 수직의 공간에서 벗어날 요량이 없다. 남자가 두툼한 손가락을 그녀의 긴장한 다리 사이로 가져가니, 그녀는 훅 하고 숨을 들이마실 밖에...

 


#. 2

 

헉, ‘O의 이야기’의 1장에 나오는 모종의 장면을 재구성하다가 본격 SM야설 블로거로 거듭날 뻔 했다. 그대로 옮겨볼까 했지만 영 재미가 없어서.

 

전설의 빨간책인 O의 이야기가 재미가 없다는 건 당혹스러운 발견이었다. 그리고 분명 나는 이 책을 재미있게 있었던 기억도 가지고 있는데 말이다. 기억을 돌이켜 보자. 내가 이 소설을 처음 만났을 때는 아직 완역판이 없던 시절. 당시 O의 이야기는 조악한 번역으로, 게다가 여러 조각으로 난도질 된 채, PC통신 게시판 틈바구니에서 묻혀질 날만 기다리는 신세였다. 하릴없는 변태들이나 물어물어 찾아오는 그런 곳에 있었다. 이 소설을 발견하고 나는 흥분했다. 파편화되어 완독할 수도 없었고 심리적 묘사가 이해하기도 어려웠지만, 터부를 들여다본다는 은밀한 기대감과 어둡고 침침한 분위기에 취해 읽기를 멈출 수 없었던 거다. 이 책 이후, 지배와 복종이라는 어둠의 어휘들은 오랜 시간 그림자처럼 나의 양지바른 이성과 감성의 언저리를 배회했다.

 

그런데, 이제와서 이 책이 재미없는 이유는 뭘까. 물론 그 동안 내가 발랑 까졌기 때문이겠지만, 그것 보다는 '기대감에서 연원한 아우라가 소멸되자 지루한 심리묘사와 완곡어법로 치장된 섹스장면, 기대만큼 섬세하지 않은 감정의 결이 거슬렸기 때문'이라고 해 두자. 그 편이 더 폼 날 것 같다.

 

예컨대, “그는 엄청난 크기와 강도를 자랑하는 성기로 O의 앞과 뒤를 미친 듯이 유린한 뒤, 바깥이 아주 캄캄해진 다음에야 놓아주었다.” (244p)같은 장면 묘사가 자주 등장하는데 전혀 섹시하지가 않다. 당혹스러울 지경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 책을 관두고 '그레이의 50가지 그림자'를 읽나보다. 평이한 어휘에, 안전한 전개, 달달한 묘사에, 트렌디한 감성 몇 스푼쯤 넣고 쉽게 쓰인 글. 편하고 재미있지 않은가. 동의하기는 어려우나, 이제 이 분야의 대표선수는 O가 아니라 크리스찬 그레이와 아나스타샤인가.


 

#. 3

 

내용을 훑어볼까. 주인공 O는 파리의 젊은 여성 포토그래퍼. 소설의 도입부는 상류계층의 성적 유희를 위한 SM던젼인 루아시 성으로 가는 O와 르네 두 사람의 모습을 묘사한다. 연인의 주문으로 성으로 가는 택시에서 속옷을 내리는 O의 모습에 안온하지만은 않을 그녀의 미래를 짐작해 볼 수 있겠다. 이후, 유별난 연인의 완전한 사랑을 얻기 위해 자신을 내던지는 O의 투쟁적이기까지 한 사랑이 소설의 초반부를 채운다.  한용운의 시 ‘복종’을 인용하지 않고서는 그런 종류의 사랑을 묘사할 도리가 없다.
 
남들은 자유를 사랑한다지마는 나는 복종을 좋아하여요
자유를 모르는 것은 아니지만 당신에게는 복종만 하고 싶어요
복종하고 싶은 데 복종하는 것은 아름다운 자유보다도 달금합니다 그것이 나의 행복입니다

 

그러나 당신이 나더러 다른 사람에게 복종하라면 그것은 복종할 수가 없습니다
다른 사람에게 복종하려면 당신에게 복종할 수가 없는 까닭입니다

 

두 문학작품의 의미가 (최소한 표면적인 층위에서는) 기가 막히게 일맥상통한다.

 

그 이후 대상을 바꿔가며 심화되는 O의 내면을 작가는 사드-마조흐적 소재를 자유자재로 활용하여 표현한다. 비록 오늘날 까진 우리들의 관점에서 볼 때 만족스러울 만큼 야하다고 보기는 어렵지만 스와핑, 난교, SM등 다소 파격적인 내용을 보건대 출판 당시 그 시대의 터부와 정면으로 부딪혔으리라고 짐작할 수 있겠다. 

 


#. 4

 

그래서 이 책이 출판되고 40년간 모두는 궁금했던 거다. ‘과연 누가 이 책을 썼는가’. 저자, ‘폴린 레아주’는 남성일 것이라는 의견이 지배적이었는데, 여성을 성적으로 착취하는 내용이 극단적인 남성주의적 시각을 대변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용의선상에는 주로 저명한 남성작가들이 올라 있었고, 특히 이 책의 서문인 ‘노예로서의 행복’을 쓴 장 폴랑은 유력한 용의자였다. <누벨 르뷔 프랑세즈>(La Nouvelle Revue Français=NRF: 앙드레 지드가 창간한 저명한 순수문학 잡지였다.)의 편집장이자 비평가로 충분한 필력을 인정받고 있었으며, 심지어 사드 마니아이기도 했으니까. 그러나 정작 폴랑은 묵묵부답으로 일관했고 결국 40년이 지난 1994년 그 비밀이 풀리게 된다.

 

장 폴랑의 연인이자 비서였으며 저널리스트 겸 소설가인 안느 데클로스(Anne Desclos, 1907~1998)(그녀는 잡지의 저널리스트이자 사장 비서였고, 장 폴랑은 편집장(사장)이었다. 또한 장 폴랑은 기혼이었고, 안느 데클로스는 미혼이었다. 훈훈한 ‘누벨 르뷔 프랑세즈’의 사내문화가 아닐 수 없다.) 가 소설의 저자가 본인임을 밝힌 것이다. 그녀의 나이는 여든 여섯이었고, 소설이 출간된지 44년이 지난 시점이었다. “(그를 누구보다 사랑했지만) 당시 나는 젊지도 않았고, 예쁘지도 않았답니다. 그래서 다른 무기를 찾아야 했어요. 육체가 전부는 아니었으니까요. 무기는 정신 속에도 존재하니까 말입니다.“-(291p역자후기중) 

 

이 소설은 연인끼리의 말다툼으로 탄생하게 됐단다. “여자는 그런 류의 소설을 쓸 수 없다.”는 폴랑의 말에 데클로스가 발끈했고, 실천적 반론이자, 문학적인 ‘연애편지’로 이 소설을 집필하게 된 것. 결과는 비평적으로나 상업적으로 엄청난 성공을 가져왔으나, 그녀는 그 영광을 누리지 못했다. 영광은 데클로스가 아닌 필명, ‘폴린 레아주’의 것이었으므로. 1954년 프랑스 문단의 분위기를 짐작해 볼 만 하다.

 

O의 이야기가 프랑스와 세계 문단, 그리고 문화에 미친 영향은 실로 오묘하다. 출간 당시 프랑스 현대문학은 충격에 휩싸였고 당연히 정부는 책의 출판을 규제하려 들었다. 그러나 사르트르 등 당대 지성인들은 적극적인 옹호로 이 책을 살렸다, 그 결과 이 책은 실제 저자가 공개되지도 않은 상태에서 ‘되 마고 상(Prix des Deux Magots)’을 수상했고, 프랑스 문단에 자유라는 유산을 남겼다.

 

실로 다양한 작가들이 이 책에서 영감을 받았음을 고백했는데 멀리는 '엠마누엘'을 쓴 에마뉘엘 아르상부터 가깝게는 마광수까지. 사실 이 분야를 표방하는 현대에 에로티시즘치고 이 소설의 영향권에서 자유롭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 있을까. 항간의 얘기로는 생텍쥐페리의 '어린 왕자' 이후 세계적으로 가장 널리 읽힌 프랑스 문학이라고 한다.

 

 

#. 5

 

O의 이야기가 우리에게 남긴 것도 영 재미없는 이야기 뿐은 아니다.

 

먼저 여성주의적 관점. 여성을 단순한 피억압계층으로 보고 여성-남성의 이분법적 도식 위에서 동등한 수준의 평등을 쟁취하자는 당시 페미니즘의 흐름에서 ‘자발적으로 복종하는 여성’이라는 명제는 그 자체로 엄청난 도전이었다. 이 소설은 여성의 행복이 당시 여성의 생각보다 입체적이고 복잡한 것이라는 사실을 일깨워주므로써 20세기 중반 페미니즘의 담론을 확장시키는데 기여했다. 

 

사회적 관점. 성경의 가르침과는 다르게 우리는 '생각으로 죄를 범할'수 없다. 사상을 전향하지 않는다고  신체를 구속하는 이 빌어먹을 사회의 신화적 폭력성은 안느 데클로스의 성적 판타지와 비교할 수 없는 규모다. 국가 보안법이 레드 콤플렉스의 핵심이라면 변태로 치부되는 BDSM은 핑크 콤플렉스의 핵심이었다. 여기, 프랑스 사춘기 소녀의 환상으로부터 시작된 소설은 지렛대처럼 세상의 관점을 뒤집어 환상을 현실로 이끌어왔다. 

 

개인적으로. 수양하는 마음으로 열심히 읽다보면, 자신의 성적, 인간적 자존을 포기하면서 적극적으로 타자에 귀속되려는 마조히스트 특유의 감성이 내 수퍼에고의 껍질을 깨고 부드러운 이드의 성감대를 자극하는 것이다.

 

그리고 결론. 성은 성이고, 섹스는 섹스다. 무슨 이즘이나, 사회적인 역학관계는 당사자들의 합의 앞에 무용한 것이다. 그것이 인류가 오늘날까지 사용하고 활용해 온 자연스러운 가치이며 삶의 모습이 아닐른지. 오, 꿈꾸어라, 꿈 꿀 수록 우리의 잠자리는 즐거워지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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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14-10-13 09: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본격 SM야설 블로거로 거듭나신다면, 제가 기꺼의 축하의 꽃다발을 드릴 수 있습니다만. 훗

뷰리풀말미잘 2014-10-13 13:57   좋아요 0 | URL
취향이 아니실텐데..? `sm`보다 `야설`쪽에 방점이 찍히는거겠죠? ㅎㅎ

Mephistopheles 2014-10-13 11: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양영순이라는 만화가가 있답니다.

갑자기 혜성처럼 등장했었죠.

주제는 ˝성˝이었죠.

누들누드 라는 제목으로.....

그 만화로 인지도를 올리고 꽤 유명해지셨습니다.

결혼을 하셨습니다. 그런데 그의 만화가 왠지 한 풀 꺽였습니다.

기자가 물었죠. 왜냐..?

˝결혼을 하니 성적 환상이 산산히 깨져서요.˝

SM야설 블로거로 거듭나기 위해 말미잘님은 결혼은 피하셔야 합니다. (뭔말이래..)

다락방 2014-10-13 11:57   좋아요 0 | URL
크- 누들누드. 제가 아주 재미있게 보던 만화인데 말입니다. ㅎㅎㅎㅎㅎ

뷰리풀말미잘 2014-10-13 13:58   좋아요 0 | URL
ㅋㅋㅋ 아, 양영순이 그랬군요. 역시 결혼은 하지 말아야겠어요.

뷰리풀말미잘 2014-10-13 13:59   좋아요 0 | URL
다락방님 ㅋㅋㅋ 아무튼 좋다는 건 다 보시지. ㅋㅋㅋ
 

 

 

 

달 없는 밤을

 

두려워하는 친구들을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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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phistopheles 2014-10-09 14: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늑대인간...?

뷰리풀말미잘 2014-10-09 21:49   좋아요 0 | URL
늑대는 메피님이고요! 저는.. 음.. 강아지 인간쯤 되려나.. 고양이 인간..?

Mephistopheles 2014-10-10 13:06   좋아요 0 | URL
늑대라뇨....곰이겠죠.

뷰리풀말미잘 2014-10-10 13:12   좋아요 0 | URL
헛! 싱크로율 400 빠센토!! 폭주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