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리구리

 

 

#. 1

 

그 분께서 나를 고소하셨다. 무려 ‘명예’훼손죄로.

 

미처 몰랐다. 그에게도 명예가 존재한다는 사실과, 또 내가 병아리 가슴털처럼 보송보송하니 소중한 당신의 그것을 그리도 무참하게 훼손하였다는 사실.

 

깊게 반성했다. 거의 없다고 해서 무가치한 것이 아님을 알지 못하였구나. 오히려 희소할수록 더욱 소중한 법이라는 것도 미처 생각하지 못하였구나. 그래, 한낱 반짝이는 돌덩어리인 다이아몬드는 무슨 효용이 있어 소중한가. 단지 희소할 뿐이다. 

 

하여, 이 사태에 대한 나의 공식적 입장은 다음과 같다.

 

‘ㅋ..’

 


#. 2

 

물론 법원까지 갈 일은 없다. 하지만 시절의 하수상함과 근래 대한민국 사법체계의 신뢰성을 의심케 한 몇 몇 사건들을 고려해 봤을 때, 혹시 모르겠다 싶은 생각도 든다. 세계경제포럼(WEF)의 ‘2014년 국가경쟁력 평가’에 따르면 대한민국 사법부의 독립성은 82위, 아산정책연구원의 ‘기관 신뢰도 조사’에서는 총 11개 기관 중 10위에 불과하다. 단순히 상식과 법리만을 따질 수 없는 것이 오늘날 법조계의 현실이 아닌가.

 

만약(물론, 정말 만약에) 내가 법정에 서서 그분과 법리를 다투게 된다면, 사회와 후손들에게 보다 정의에 가까운 판례를 남겨주는 것이 도리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약간의 준비를 하기로 했다.

 

돈 말이다.

 

사실 돈은 충분하다. 수입은 꾸준하고, 술도, 담배도 하지 않는 내 씀씀이야 뻔하다. 예상치 못한 지출이라면 가끔 마음에 드는 책을 사거나, 한 달에 한번 쯤 포카칩 파란색을 사먹는 정도. 하지만 님에게 드릴 돈은 없다. 차라리 강남 대로에 뿌리면 뿌렸지. 소송비용은커녕, 님과 관련해서 쓰는 전화비조차 아깝다. 따라서 소송비용을 지출하게 될 수 있다는 가정은 돈 개념이 박약한 편인 내게도 짜증이 나는 일이다.

 

그런 이유로, 불로소득을 조금 만들어 보기로 했다. 썩 내키지는 않지만.


 

#. 3

 

마침, 작년 여름 현자를 만났다. 그는 낮에는 의료설비 수리공이고, 밤에는 투자가다. 낮의 동료들은 밤의 그에 대해서 알지 못하였고, 밤의 동료들은 낮의 그에 대해서 알지 못하였다. 좀 이상한 대신 그는 해박했다. 그리고 몇 푼 수익을 얻기보다 시장에 맞서 자신을 증명하는 것을 즐기는 자였다. 공자왈, 명석한자는 즐기는 자를 따르지 못한다. 폭풍처럼 몰아치는 숫자의 흐름 속에서 유유자적하는 그의 모습은 파도를 즐기는 서퍼같았다. 나는 영 쓸 곳은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면서도 그의 얘기를 새겨들었다. 대가에 대한 예의였다. 

 

그가 알려준 코스톨라니 달걀 모델을 떠올리며, 금리의 변동상황을 스마트폰 창에 띄워놓고 오랜만에 주식 계좌를 열었다. 점심시간의 어느 커피숍이었다.


 

#. 4

 

사실, 돈은 땀 흘려 벌어야 제 맛이다. 노동의 신성성을 주장한 칼뱅의 견해를 지지한다. 뷔페에서 일하던 시절, 하얀 봉투에 주급으로 담아주는 빳빳한 만원짜리 지폐를 셀 때의 쾌감은 투자로 소득을 얻을 때와는 비교되지 않는다. 계좌에서 계좌로 전기 신호로 흘러가는 돈에는 촉감도 냄새도 없다. 그건 사실 돈도 아니다. 내 재테크가 엉망인 건 아마 생각이 고리타분하기 때문인가보다. 달랑 CMA계좌 하나에 유흥비 축적 목적 비자금 계좌 하나 뿐. 그 흔한 적금조차 없다.

 

똥 얘긴 충분히 했으니, 돈 얘기나 더 해볼까.

 

돈을 벌기 위해서는 돈 냄새부터 맡아야 한다. 최소한 내 지갑에서 나는 냄새는 아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세상의 돈들은 다 어디에 있는가. 채권인가, 부동산인가, 예금인가, 주식시장인가. 아파트 값은 지지부진하고, 금리는 떨어져서 예금은 줄고, 그러니 가계대출은 산더미처럼 늘어나고. 채권은 뭐 늘 거기서 거기인 것 같다. 그렇다면 그나마 주식시장이라고 생각했다. 시장은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가. 

 

자, 세계의 흐름을 보자. 미국 연방준비위원회는 돈을 풀어 호황을 급조했고, 다우지수는 신고가를 뚫고 치솟았다. 애플의 시가총액은 지구역사상 최고점을 갱신했다. 질세라 아베와 BOJ(Bank of Japan)는 돈을 풀어 엔화약세 흐름을 만들어냈고 수출 경쟁력을 확보해 장기불황을 타계할 계획이다. 이른바, '아베노믹스'. ECB(European Central Bank)도 마찬가지 방법으로 유로존의 위기를 타개할 방법을 모색하고 있다. 미국, 일본, 유럽, 각 국에서 소모되지 못한 눈먼 돈 들은 이제 더 높은 수익을 찾아 바다를 건넌다. 'emerging market'. 어디가 떠오르는 시장일까. 경상수지가 연속 흑자를 기록하고 있는 내실있는 무역국. 대한민국.

 

유럽보다 조금 먼저 고유가로 막대한 돈을 빨아들이던 사우디와 북유럽, 텍사스의 유전은 갑작스럽게 저유가 기조로 돌아섰다. 셰일가스 산업을 견제하려는 사우디의 맹공에 전체 유가가 동조하여 하락하는 현상이었다. 작년 7월 100달러를 상회하던 두바이유가 올해 초 45달러까지 떨어졌다. 유가가 반토막이 나자 향후 100년간 대체에너지원으로 끄떡없다던 미국 셰일가스 업계는 석유와 경쟁할만한 생산단가를 맞추는데 실패했다. 세계 에너지 자원의 헤게모니 싸움에서 사우디가 승기를 잡았다는 거다. 셰일가스 시추공 숫자는 석달만에 1930개에서 1670개까지 줄었고, 지금 이 순간에도 줄어가고 있다. 당연히 화석연료가격은 폭락했다.

 

그럼 이 시간 한국의 철강업계는? 업계는 지금까지 '졸라 싼 한국의 산업전기'로 고로를 돌려왔다. 화석연료로 고로를 돌리는 해외 업체들에 맞서 그게 그들의 가진 가격 경쟁력의 핵심이었다. 경쟁력이 저하된데다 철광석 가격 하락의 악재까지 겹친 포스코의 시총은 전성기와 비교해 1/3토막. 불과 3년 전 고유가를 등에 업고 한국경제성장을 주도하던 자동차, 화학, 정유산업은 바닥을 알 수 없는 동반 침체기에 접어들었다.

 

그렇다면, 고유가와 함께 호황을 이루던 산업군은 과연 영원히 끝장인가. 나는 1929년, 1987년 미국 증시의 폭락장에서 기술적 반등움직임에 주목했다. 그 어려웠던 시대에도 주가는 때로 50%이상 반등하기도 했다. 유가도 반년이상 하락해온 스트레스가 분명히 존재하리라. 사우디를 제외한 대부분의 원유생산국도 셰일가스처럼 마진을 제대로 맞출 수 없는 위기상황에 당면했다. 러시아와 베네수엘라등 몇몇 산유국은 모라토리움 위기에 몰렸다. 푸틴의 인상이 험악해지고, 정치적 압력이 생기기 시작하는데, 때마침 중국이 하루 1800만 배럴씩 전략비축유를 사들이기 시작했다.

 

나는 유가의 수급현황을 보다가 확신했다. 유가는 단기 반등한다. 나는 유가 하락분을 감안하고도 저평가 되어있던 철강업계의 관련주를 샀고, 역시나 유가의 60달러 가까이 반등했다. 쏠쏠한 수익이었다.

 

금융업을 볼까? 회사가치에 정확히 들어맞는 적정주가가 존재하며, 실제 주가라는 시계추가 적정주가의 왼편과 오른편을 왕복하며 차트가 성장한다고 가정한다면 몇몇 대형 금융주는 그 동안의 악재로 저평가 상황이었다. 대형 우량주의 가격 복원력과, 그 회사가 당면한 몇 가지 상황을 고려했을 때, 투자메리트는 충분했다. 역시 짭짤했다. 물론, 제약과 바이오 주도 괜찮은 수익을 올려줬다.  불과 며칠 전 얘기다. 

 

한은은 돈을 풀기 위해 금리를 내려대는 미국, 유럽, 일본과 통화전쟁을 벌이며 역시 몇 년간 지속적으로 금리를 내려왔다. 저금리를 이기지 못한 국내 자본은 돈 냄새를 맡고 은행에서 이탈하고 있다. 이머징마켓 중 경상수지가 건전한 국가를 찾아헤메던 미국발 돈들과, 은행에서 이탈한 한국의 돈들은 코스닥으로 모여들었고, 코스피는 오랫만에 600선을 깨고 솟아올랐다. 한 쪽을 누르면 다른 한 쪽이 부풀어 오르는 것처럼 금융과 차, 화, 정에 몰려 있던 돈이 기술, 제약, 바이오, 헬스케어로 이동하는 형국이다. PER값이 높은 성장주들이 각광을 받고 있다. 그러나 시장의 포텐셜은 그 이상이다. 박스권에서 숨죽이고 있던 주식시장에 르네상스가 찾아왔다. 기가 막히는 타이밍이었다.

 

세상이 좋아져서 손바닥만한 스마트 폰 터치 한 번에 수십개의 세계 경제지표가 뜬다. 개인투자자들이 더 이상 기관투자자들에게 정보력으로 밀릴 이유가 없다. 이 참에 전업할까.

 


#. 5

 

..라고는 했지만. 사실, 소경이 코끼리 만지는 격이었다. 2008년 리먼 브라더스 사태로부터 세계경기가 침체기에 접어드는 상황을 검색해 보며 알게 됐다. 나는 결국 시장을 이길 수 없겠구나. 내 성격으로는 그 수많은 변수에 언제까지나 관심을 갖고 살 수는 없을 것이다. 시장은 언제나 친절하지 않고, 위기는 언제나 '도둑처럼 온다.' 매일 잠들기 전에 경제학이나 투자관련 서적만 읽을 수도 없다. 세상에, 오로지 차트로 구성된 꿈을 꾸다니. 역시 나는 점심시간엔 투자보단 산책을 하는 편이 더 행복하다.


지금 경기를 어떤 파동으로 해석해야 할까. 지금의 코스피는 혹은 코스닥은 엘리어트 파동(의미 없지만 영감은 준다.)의 어떤 단계에 와 있을까, 추세는 어떻게 이어질까. 갠이라면 지금 상황을 어떻게 이해했을까. 볼린저 밴드를 'KB금융' 차트에 적용했을 때 이동평균선이 밴드를 이탈할 확률은? 이런 건 몇 퍼센트 운영마진으로 대신 고민해주는 펀드 매니저들이 쌔고 쌨다. 아무래도 경제학 근처에도 못 가본 나보단 낫겠지. 

나는 지난 몇 달간 데이 트레이더였고, 스윙 트레이더였고, 중기 투자자였고, 가치투자자였고, 모멘텀 투자자였고, 추세 추종자였고, 역발상 투자자였다. 바꿔 말하면 제대로 된 투자철학 하나 없이 낭인무사같은 드잡이질로 근근히 이겨온 셈이다. 다만 운이 좋았다.   

 

많이는 아니라도 충분히 벌었고, 윤리적으로 옳은 일인지에 대한 확신도 없다. 곧 관둘 생각이다.

 

아주 짧은 순간이라도 시장을 극복하도록 도와준 피터 린치와 벤자민 그레이엄, 박경철과 최준철, 최진기, 홍춘욱, 장하준, 김늘보에게 감사한다. 모두 경제와 투자 분야의 대가들이다. 또, 내가 며칠 밤을 새도 못 할 분석들 대신해 준 ‘광대한 네트’의 분석가들에도 감사한다. 명예로운 '그 분'에게도 돈은 못 드려도 감사한 마음만은 전한다. 저를 귀찮게 해 주신 만큼 조만간 뜨거운 격려의 채찍질로 화답해 드릴 생각이다. 엉덩이가 뜨거울 때, 무릎 걸음으로라도 '진보'하시길. 10년이 넘도록 그 모양 그 꼴인 당신 인생도 이제 좀 나아져야지.  


 

#. 6

 

얼마 전, 오래 미루던 유니세프 정기 기부를 하게 됐다. 사실 타 단체에 기부를 고려중이었는데마침 길에서 유니세프 청년을 만나고 만 것이다. 호주에서 궁핍하게 살던 시절 매몰차게 기부를 거부했던 심정적 빚을 청산해야 했기 때문에 그 자리에서 계좌번호를 적고 말았다.

 

마음이 어찌나 홀가분한지. 사인을 하고 나니까 아저씨가 그랬다.

 

“마음이 따뜻한 분의 손, 제가 한번 잡아 봐도 되겠습니까.”

 

어우 참, 아저씨 오글거려여. 라고 말하기도 전에 그는 어머나, 내 차가운 손을 덥썩 잡았다.

 

그 동안 미안했어요. 가난하고 어려운 사람들을 위해서 내 돈 펑펑 써 주세요.

 

주머니도 두둑해졌고, 기부금액을 늘릴 생각이다. 이것도 모두 당신 덕분이다. 히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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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15-02-20 18: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짐작했을지도 모르겠지만 4,5 번은 읽다가 포기했어요. 미잘님은 글을 잘쓰는데, 4,5번은 내가 무슨 말인지를 잘 모르겠어서요..여튼..돈 벌었다는 얘기죠? 그리고 돈을 더 벌게 된다면 더 기부를 할 것이고?

복받을겁니다, 미잘님.

그럼 해피 뉴 이어. 이만 총총.

뷰리풀말미잘 2015-02-20 19:08   좋아요 0 | URL
.. 아.. 뭐.. 네.. 음..

해피뉴이어!

blanca 2015-02-21 00: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너무 독서며 관심이 편향되어 있었다는 반성이 드는 글이네요. 감사합니다, 좋은 글.

뷰리풀말미잘 2015-02-21 11:18   좋아요 0 | URL
정말 블랑카님 리뷰 목록 중에는 경제분야의 책이 없네요. ㅎㅎ

저도 경제분야의 책들은 잘 읽지 않았습니다. 지루하기 때문이었는데요 알고보면 또 그렇지도 않더라고요. 제 책장에 꽂혀만 있던 책들을 저도 이번 기회에 처음 읽었고 읽는동안 생각보다 매우 즐거웠습니다.

학문은 세상을 해석하는 것인데요, 지금까지 학문의 역사를 짧게 약 3000년쯤으로 잡는다면 2000년이 넘는 긴 세월동안 학문의 패러다임은 대체로 철학과 신학에 있었던 것 같습니다. 과학은 아주 조금씩 성장해왔고, 산업혁명시기에는 잠시 사회학이 득세했던 적도 있었고, 그 이후의 헤게모니는 쭉 경제학이 쥐고 있는게 아닌가 싶습니다. 경영학인가 뭔가도 있긴 있는데 그건 사실 학문은 아닌 것 같애요. `장사방법(론)`정도지.

오늘날 돈의 흐름은 곧 세계의 흐름입니다.

즐겁게 읽어주셨다니 제가 고맙습니다. 히히.
 

 

 

 

 

 

 

 

 

 

 

 

 

 

#. 1

 

침대에 엎드려서 책을 읽고 있는데 루리가 들이닥쳐서는 침대 허리께를 엉덩이로 콱 누르고 걸터앉았다.

 

“뭐야.”

 

"머리카락 좀 움켜쥐어도 돼?"

 

이미 손이 내 머리께로 곰실거리면서 다가오고 있었고, 조금만 지체하면 물고문이라도 당하는 독립투사의 몰골이 될 참이었다.

 

"안 돼."

 

"도대체 되는 게 뭐야."

 

뭐지, 이 무법자는.

 


#. 2

 

또 루리가 쳐들어왔다. 체육센터에서 수영을 배우기로 했는데 등록을 해 달라고 했다. 본인 랩탑에 공인인증서가 없다는 이유다.

 

그렇다면 컴퓨터에 없다는 공인인증서는 과연 어디에 있는가. 카드를 사용하면 되는 것 아닌가. 각종 의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긴 했으나 마치 비둘기의 것 같이 반짝거리는 루리의 눈알은 이미 어떤 반문조차 거부하고 있었다. 체육센터 홈페이지에 강습료를 결제해주자 주머니에서 꼬깃꼬깃한 지폐를 꺼내 건넨다. 그래, 고쟁이에서 꺼내 준게 아니라 다행이다.

 

그러고 보니 루리가 수영하는 걸 본 적이 없다.

 

"그런데 너 수영 할 수 있어?"

 

"응."

 

"몇 미터나 갈 수 있는데?"

 

"끝없이."
 
.. 끝없이.. 누구냐.. 넌!

 


#. 3

 

초등학교 때 일이다. 미개한 시절이었다. 토요일 수업이 있었고, 대통령은 김영삼이었다. 나는 사학년 이었다.

 

토요일 수업이 끝나면 루리를 만나서 함께 집으로 걸어오곤 했다. 오는 길엔 큰 공원이 있었는데 잔디도 넓고 길이 좋았다. 

 

공원을 가로질러 집으로 가는 길이었다. 멀리 벤치에서 중년 남자가 우리를 불렀다. 낯설었으나 나는 천진해서 루리를 데리고 그리로 갔다. 발치까지 가서 수줍게 서자 그는 더 다가오라고 손짓을 했다. 고개를 빼꼼 내밀고 들여다보자 그의 무릎 사이에 뭔가 하얗고 굵직한 것이 있었고. 그는 그걸 손으로 쥐고 위로 아래로 움직이고 있었다. 나는 아무리 고개를 갸웃거려도 도대체 그게 뭔지, 어떤 의미인지 모르겠는 거다. 그래서 오래 그러고 서 있었다.

 

차츰 고여가는 침묵이 천진함의 밑바닥을 들출 때 까지. 한참이 지나고서야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어렴풋이 들었다. 이해보다 빠른 것은 공포였다. 나는 생각할 겨를도 없이 몸을 돌려 달음박질 쳤다.

 

얼마나 달렸을까.

 

비로소 생각났다. 아차, 루리가 아직도 거기에 서 있다는 것이 말이다.  


 

#. 4

 

천명관의 ‘고래’에 나오는 구절이다. ‘인생을 살아간다는 건 끊임없이 먼지를 닦는 일’이라고. 내 인생도 그리 순탄치만은 않아서 먼지가 잘 쌓이는 편이었다. 그래서, 위에 상술한 그 만큼. 혹은 그보다 더 지저분한 기억을 여럿 갖고 있다.

 

대체로 그 기억들은 그 모든 것과 맞서려고 했던 나의 지난 시간들과, 이 밤의 불면에 빨판상어처럼 달라붙어서 고개를 흔들어도 잘 떨어지지 않는 종류다. 척추가 부러져 우는 그 녀석의 눈물, 뭉개진 손가락을 들고 소리 조차 못 지르고 서 있던 그 녀석의 표정. 닦아내는 데 서투른 나는 그렇게 온갖 것을 머릿속에 넣고 사는데, 유독 기억이 나지 않는 게 있다.

 

그 때, 루리는 나에게 뭐라고 말을 했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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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1-06 00:5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5-01-06 13:22   URL
비밀 댓글입니다.
 

 

안녕 세뇨리따님.

 

 

두둥. 어제 12월 24일 4시 44분에 찍은 사진입니다. 세뇨리따님이라면 새벽, 4시 44분에 이런 수상쩍은 번호판을 가진 택시를 만난다면 타시겠습니까? 조건 1. 안 타면 삼족을 멸함.

 

 

#. 1 

 

샘숭에서 나온 300만화소 똑딱이 디카였어요. 당시만 해도 디카가 아직 대세가 아니었던 시절이라 성능도 변변치 않은 것들이 값은 오지게 비쌌죠. 30만원이나 40만원 쯤 하는 물건이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당시 물건들과 비교했을 때 가성비는 좋았습니다. 엔간한 수동기능은 다 지원했으니까요. 최신형 32mb SD카드를 꽂아 넣고 뭐든 찍었죠. 한 서른 두 장 쯤 찍으면 꽉 차는 용량이었어요.

 

폐공장에도 기어들어가고, 아파트 옥상 난간에도 올라가고, 지하철이 역으로 들어오는 순간 터널에 목을 들이밀기도 했죠. 거미줄 같은 청계천 뒷골목. 오래된 곤돌라 녹슨 철판의 결을 찍으려고 카메라를 올려놓고 수도 없이 셔터를 눌러댔던 기억도 나는군요. 저녁에 경춘선 육교 위에 올라가면 밤과 낮이 질펀하게 뒤섞이는 그 순간, 석양이 기가 막혔는데, 거기서 한 사흘은 셔터를 눌러댔을 겁니다. 

 

지금은 대체로 없는 것들이네요. 청계천도, 경춘선도 카메라도 뭣도 다 어디로 가 버렸습니다. 심지어 제 외장하드에도 없는 것들이 많아요. 하지만 셔터를 누른 순간의 기억과 그 순간의 쾌감만은 제 뇌장하드에 고이 남아있습니다.

 

당시의 저는 사진에 대해서 쥐뿔 몰랐어요. 얼마나 몰랐느냐면 청와대에 계시는 그 분이 정치에 대해 아시는 것 만큼도 몰랐어요. 다만, 사력을 다해서 찍으니까 때론 그림이 나오더라고요. 그것들 중 몇 몇을 여기에도 업로드 했더랬죠.

 

십년이 넘는 시간이 지나고, 지금은 그보다 다섯 배는 족히 비싼 소니 DSLR를 쓰고 있습니다. 그간 카메라의 모든 수동기능을 마스터했고, 바바라런던의 '사진학강의'도 읽었는데 결과물은 영 변변치가 않네요. 300만 화소 카메라로 찍을 때가 나았어요. 카메라가 좋아서 대충 찍어도 엔간히 나오니까 빛이며 구도를 열심히 재지 않는 탓도 있을 테고, 16기가나 되는 SD카드 덕분에 용량이고 뭐고 마구잡이로 셔터를 눌러대기 때문이기도 하겠죠. 역시 사진은 내공인가요.

 

요즘 카메라와 저의 관계는, 시들시들 하다는 얘기입니다. 

 

오래된 연인처럼.

 

아, 물론 제가 연애를 그렇게 하는 타입은 아니에요. 일반적으로 그렇다는 말이죠. 일반적으로.

 

 

#. 2

 

결핍에 대해서 말 하고 싶습니다. 삶이든 지식이든 다 갖춰져 있으면 사람은 나태해지는 것 같아요. 반대로 뭐가 결핍되어 있다고 인식하는 순간 사람은 그걸 채우기 위해 오만 노력을 다 하죠. 밥이든 섹스든 문학이든 뭐든. 그게 인류 역사가 진보해온 방식이 아닐까요.

 

저는 찍은 사진을 외장하드에 날짜순으로 폴더를 만들어서 정리하는데, 그나마 괜찮은 사진을 찾으려면 결핍됐던 시절의 폴더를 누릅니다. 12년 12월. 2년 전 이맘때로군요. 

 

브리즈번에 살 때였는데, 아주 고단했고, 시간도 없었고, 외로웠어요. 이런 저런 거지같은 이유로 여행이고 뭐고 전혀 할 수가 없었죠. 회복되지 않고 끊임없이 내적으로 갉아먹혀가는 삶이었죠. 그러다 번뜩 용기를 내서 바이런 베이로 가는 버스를 탑니다.

 

거기가 어딘지도 잘 몰랐습니다. 저는 동명의 시인을 알았고, 버스가 있었고, 그냥 탔던 거죠. 호주대륙의 동쪽 끝까지 갔습니다.

 

그리고 세상에.

 

엄청난 풍경이 펼쳐져 있더군요.

 

카메라에 담기 황송할 정도로.

 

 

마침내 타이밍이 왔고, 앵두같은 입술을 조금 벌려서 삼가 공손하게 호흡을 들이마셨고, 섬섬옥수 가녀린 손가락 끝에 힘을 꼭 줘서 몇 장의 사진을 얻어냈답니다.

 

거기서 저는 조금 재충전을 할 수 있었고, 덕분에 세뇨리따님과 이렇게 할랑한 수다를 떠는 오늘날의 제가 있을 수 있었던 거죠.

 

#. 3

 

요즘의 저는.. 앗, 이런 시간이 벌써 이렇게..

 

여기부터는 다음 페이퍼로..

 

메리 크리스마스 세뇨리따님.



PS: 4시 44분은 조금 무리수였죠..? 7시 10분이었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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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phistopheles 2014-12-26 11:2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세뇨리따가 누구랍니까??

(곤잘레스, 산쵸는 어디있나요..?)

뷰리풀말미잘 2014-12-27 00:07   좋아요 1 | URL
음.. 알라딘의 보이지 않는 손이자 어둠의 주시자라고나 할까요. 그에 대해 밝혀진 바는 거의 없습니다. 산초는 추어탕에 있습니다!

Mephistopheles 2014-12-29 13:01   좋아요 0 | URL
누군지...알 것 같은걸요.....므흐흐흐

뷰리풀말미잘 2014-12-30 22:50   좋아요 0 | URL
아니 근데 이 양반은 어디간거지. 댓글하나 안 달고.

세뇨리따 2015-01-06 15: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는김에 완전히 어둠의 주시자로 컨셉을 잡을까, 하다가, 여지없이 글하나만에 무너졌어요 :(

14년 12월 24일 4시 44분에 49바 4444번의 택시는 엄청나게 낭만적이예요. 소설을 쓴다면 나중에 꼭 소재로 삼고 싶을 정도죠. 제가 24일날 그시간에 밖에 있을거라는 전제는 틀렸지만 봤다면 틀림없이 탔을거예요!


`길 없는 숲에 기쁨이 있다.
외로운 바닷가에 황홀이 있다.
아무도 침범하지 않는 곳,
깊은 바다결 그 함성의 음악에 사귐이 있다.`

이름과 명성의 파급이란 놀라워요. 그 고유단어 하나에 놀라운 끌어당김이 생기죠. 그리고 그의 이름은 충분히 이름만으로 당겨질만한 가치가 있어요. 그런데 그렇게 마냥 완벽하게만 보이던 바이런에겐 무슨 결핍이 있어 저런 재능을 꽃피웠던 걸까요?

메리크리스마스는 지났지만, 신년인사는 아슬아슬하게 세이프로 쳐주시죠.
새해복 많이 받으세요 말미잘! 올해는 글도 사진도 외모도 더 아름답도록 합시다.
카메라와의 권태는 물리치세요. 헤어진게 아니면 여전히 연인이니, 기왕 연인일거면 사이좋은게 좋잖아요. 물론 저는 그 장렬한 한마디 코멘트에, 사진은 곁들여 감상하는 수준이지만..

PS: 나의 낭만을... 조금 과장하고, 조금 각색해서, 2시간 16분은 술렁 넘겨서 보기좋은 시처럼 그냥 4시 44분으로 하시지..
 











미생이 대세다. 웹툰이 떠들썩한가 싶더니, 누적 판매부수가 백만부가 넘는다는 얘기가 돌았다. 요즘엔 아예 드라마로 나와서 밤마다 직장인들 혼을 쏙쏙 뽑아가는 모양이다. 죄다 미생 얘기다.


듣자하니 '未生'은 살지도, 죽지도 못한 바둑판의 대마를 얘기한단다. 나는 미생이라는 단어를 여섯 살 때부터 알았지만 의미가 이렇듯 금즉하게 다가온 적은 없는 것 같다. 그건 살얼음판 같은 회사놀음 속에서 속 끓는 비정규직의 삶이겠다. 혹은 집, 회사, , 회사를 반복하며 사는 것 같지도, 죽은 것 같지도 않게 살아가는 우리 모두의 삶이겠다.

 

반딧불이를 잡아 유리병에 꽉 채우면 가까스로 책 종이의 글자를 구분할만한 빛이 모인다고 한다. 아까 얼핏 보니까, 유리로 뒤덮인 잠실의 고층 빌딩마다 불빛이 훤하다. 얼마나 많은 직장인 녀석들이 그 속에서 파닥거리고 있을까.

 

으 추워, 이 엄동설한에 아직도 퇴근하지 못한 친구 B를 생각하며 시를 한 수 적는다.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퇴근하라

 

서로 사귄 직장동료에게는

사랑과 그리움이 생긴다.

사랑과 그리움에는 괴로움이 따르는 법.

연정에서 근심 걱정이 생기는 줄 알고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퇴근하라.

 

숲속, 묶여 있지 않은 사슴이

먹이를 찾아 여기저기 다니듯

지혜로운 이는 독립과 자유를 찾아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퇴근하라.

 

서로 다투는 업무적 견해를 초월하고

깨달음에 이르는 길에 도달하여

도를 얻은 사람은

'나는 지혜를 얻었으니

이제는 상사의 지도를 받을 필요가 없어!'라고 말하고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퇴근하라.

 

동료들과의 유희나 잡담

혹은 회식의 유혹에 젖지 말고

관심도 가지지 말라.

꾸밈없이 칼퇴 사유를 말하면서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퇴근하라.

 

물속의 고기가 그물을 찢듯이

한번 불타버린 곳에는

다시 불이 붙지 않듯이

모든 번뇌의 매듭을 끊어버리고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퇴근하라.

 

퇴근시간에 도달하기 위해 노력 정진하고

야근의 유혹을 물리치고

평판에 연연하지 말며

용맹정진하여 몸의 힘과 지혜의 힘을 갖추고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퇴근하라.

 

이빨이 억세고 뭇짐승의 왕인 사자가

다른 짐승을 제압하듯이

궁벽한 곳에 원룸이라도 마련하고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퇴근하라.

 

자비와 고요와 동정과 해탈과 기쁨을

적당한 때에 따라 익히고

모든 세상을 저버림 없이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퇴근하라.

 

탐욕과 혐오와 헤맴을 버리고

속박을 끊어 일자리를 잃어도 두려워하지 말고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퇴근하라.

 

소리에 놀라지 않는 사자와 같이,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과 같이,

흙탕물에 더럽히지 않는 연꽃과 같이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퇴근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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뷰리풀말미잘 2014-12-01 20: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알라딘에서 슈퍼스타에스엠타운 하는 애는 나 밖에 없겠지.. 외롭다.

다락방 2014-12-01 21:20   좋아요 0 | URL
슈퍼스타에스엠타운이 뭐에요?

뷰리풀말미잘 2014-12-01 21:48   좋아요 0 | URL
왜, 스마트폰 리듬게임 있어요.. 엑소 노래 많음.

2014-12-02 10:0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4-12-02 18:2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4-12-17 16:39   URL
비밀 댓글입니다.

Mephistopheles 2014-12-02 12: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외국에서 서울의 야경이 그렇게 멋있다...라고 한다지요.
그 야경을 밝히며 노상 야근하는 직장인들의 설움은 알랑가 몰라.

뷰리풀말미잘 2014-12-02 18:19   좋아요 0 | URL
아름다운 덴 다 이유가 있는 법인데 말입니다. 하지만 전 대체로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퇴근하는 편이죠. 하하.
 
무질서의 효용 - 개인의 정체성과 도시 생활
리차드 세넷 지음, 유강은 옮김 / 다시봄 / 201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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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삶의 거처는 어떻게 구성되어야 하는가. 도시화 연구의 권위자인 저자는 도시 기저에 응축된 문화적 무질서의 힘으로부터 성숙한 사회가 태동할 수 있다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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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14-12-01 14: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 제목도 어려운데 말미잘님 백자평도 어딘가 어려워요. ㅎㅎ

뷰리풀말미잘 2014-12-01 20:02   좋아요 0 | URL
ㅋㅋ 악.. 이거, 올해의 책 투표를 했을 뿐인데 제 서재에 버젓이 뜨는 걸 몰랐네요. 평생 백자평도 안 쓰는 인간이 상품에 눈이 뒤집혀서 이런 짓을 저지르다니. 욕심에 눈 먼 인생이 부끄럽습니다.

무해한모리군 2014-12-01 14: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막 이런걸 읽는분을 내가 알다니 ♥♥

뷰리풀말미잘 2014-12-01 20:02   좋아요 0 | URL
이게.. 사실 여러가지로 사연이 쪼까 있는 책이올습니다. 고모리님. ㅎㅎ

Mephistopheles 2014-12-01 15: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그래서요....??

뷰리풀말미잘 2014-12-01 20:03   좋아요 0 | URL
역시 예리한 눈매의 소유자 메피님. 원래 이거 세 문장 쓸려고 한 거였거든요? 하지만 회사 윗분이 매의 눈을 하고 제 등 뒤로 다가오셔서. 하하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