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 각본집
강승용.오선영 지음 / 씨네21북스 / 202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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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승용 오선영 각본집 <1980>

*앞 표지에는 평화반점의 주인 철수네 3대의 사진이, 뒷 표지에는 도망치듯 떠나는 영희의 단촐한 식구의 뒷모습이 못내 인상적인 책이었다.
이준익 영화감독이 <왕의 남자>, <사도>를 찍을 때 함께 호흡을 맞췄던 강승용 미술감독이 이 영화의 스피커를 잡았다. ‘감독의 말’을 보면 그는 “철수네 가족사를 풀어가던 2년여의 기간은, 외적으로는 새로운 도전”을 했다고 쓰여있다.

“영화<1980>은 여덟 살 소년과 가족, 그들과 관계 맺고 있는 주변 인물들의 시선으로 풀어간 5·18 민주화운동 10일간의 기록이다. (...) 이야기의 주체인 여덟 살 소년 철수의 맑고 순수한 눈으로 민주화운동을 바라보고 경험한 이야기를 담고자 했다.
계엄군의 잔혹하고 무자비한 폭력에 대항하여 스스로를 지켜야 했던 시민들이 무기를 들게 되면서 ‘폭도’라는 누명을 썼다. 그로부터 40여 년이 지나는 동안 대통령이 여덟 번 바뀌었고, 평화로운 듯 평화롭지 않게 가해자는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넜다.(...)
상처를 평생 가슴에만 묻고 살았을 힘없는 소시민 철수네 가족을 통해, 국가가 휘두른 폭력의 결과가 개인에게 한평생 어떤 영향을 주는지를 담고 싶었다.”(p.29)-기획 의도의 문장이다.

주위의 1973년생들을 떠올려본다. 한참 우리 사회에서 중추역할을 맡았다가 인생의 후반부를 향한 이들이다. 그들이 여덟 살 이었을 때, 특히 광주에서 나고 자란 아이들의 모습을 상상해본다. 박정희 시대의 끝을 보고 힘찬 미래를 꿈꾸었을 그들의 부모가 보인다. 민주화를 열망하던 ‘서울의 봄’이 신군부에 의해 부서지고 어느 날 갑자기 광주시내로 진입하는 탱크들의 행렬을 목격한다.

“1980년 5월 17일부터 10일간, 암울하고 악몽 같았던 여정 한가운데··· 화평반점 1대 철수 할아버지, 2대를 꿈꾸는 철수 아빠, 그리고 3대를 이어야 할 숙명 앞에 놓인 철수가 있었다.”(p.31) 하지만 이들은 평범하기 그지없는 무고한 시민들이었을 뿐이다. 그저 그 공간에 있었다는 이유만으로 이런 비극의 주인공이 되었다.

*1947년의 4.3의 동백꽃이 지고 벚꽃이 졌다. 이제 곧 4.16 세월호의 비극이 지나가면 1980년 광주에서의 5. 18을 지난다. 우리의 근현대사를 접할 때면, 나는 한국인으로서의 봄이 마치 고난주간처럼 느껴진다. 그리고 6.10일이 지나야 겨우 숨통이 트인다.

*이번 4.9일 선거 개표방송을 지켜보며 한결같이 경상도는 국힘을, 전라도는 더불어를 찍는 모습이었다. 그래도 경상도의 지지율이 60% 정도였다면, 전라도는 거의 90%에 육박했다. 그때는 ‘여전하구나’라는 일반화로 별 생각없이 지켜보았더랬다. 그런데 이 각본 속 평화반점이라는 짜장면 집주인의 장남, 철수아빠와 세들어 사는 직업군인, 영희아빠의 관계를 보며 개표방송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철수아빠는 베트남 참전 후 시민으로서의 책임을 다하기 위해 야학을 운영했을 뿐인데 빨갱이로 지탄받았고, 영희아빠는 먹고 살기 위해 직업으로 군인이 되었을 뿐인데 5.18의 가해자가 되었다. 그저 100점짜리 남편감이 되기 위해 군인을 선택한 영희아빠의 죄라고 손가락 질할 수 있을 까? 나는 이 <1980>이라는 각본이 오늘날의 대한민국을 보여준다는 생각이 들었다. 살아남은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은 투표뿐임을, 그 상처를 가진 이들이 아직도 그 지역에 살아있음을, 평화반점이 철거되는 일은 그 일을 기억에서 지우는 것과도 같은 의미일 것이다. 철수, 영희아버지들의 자녀(나라는 5.18로 부모를 잃은 아이를 입양한 아이지만)의 이름이 각각 ‘우리’와 ‘나라’인 것으로 보아 이 각본을 쓴 두 분의 생각 역시 그러했을 것이다.

*너무 비극적이어서 작가님을 조금 원망하기도 했다. 바둑이나 아모레 이모, 철수 엄마의 쌍둥이, 그리고 영희의 부모로 보이는 이들의 마지막이 그랬다. 다시 생각해보니 현실은 더 처참했을 것이다.

*전쟁통에도 아이들은 태어난다는 말을 쉽게들 한다. 철수 엄마 역시 그랬다. 하지만 그녀와 그녀가 낳은 쌍둥이의 비극을 보며 나는 앞으로 ‘전쟁통에도 아이들은 태어난다’는 말을 내뱉을 수가 없을 것만 같다. 그렇게 태어나기가 쉽지 않은 일임을 이 각본집에서 깨닫는다.

*각본집을 처음 읽어보았다. 새삼 매력이 있는 장르임을 이번에 알게 되었다. 전라도나 가끔 나오는 황해도 사투리를 따라 읽으며 대화 사이의 여백이 소설에서 행간을 읽어내야 하는, 그런 유추의 순간이 참 매력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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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2일, 시작의 날 - 계절 앤솔러지 : 봄 자음과모음 청소년문학 115
박에스더 외 지음 / 자음과모음 / 202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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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2일, 시작의 날>

*“신비롭고 다정한 문학의 세계를 보여 주는 작가들의 청소년과 어른의 마음을 함께 감싸안을 다섯 가지 이야기”라는 다홍빛의 띠지를 두른, 박에스더, 범유진, 설재인, 이선주, 한정영 작가님의 앤솔러지 책이다. 제목처럼 3월 2일, 시작이라는 봄을 담은 이야기. 개인적으로는 제목에서도 뭔가 고심의 흔적이 느껴졌다. ‘3월’이라고 할 법도 한데, 굳이 ‘2일’을 붙였다는 점과 또 ‘3월 1일’ 해버리면 역사라는 장르로 가버리니 이 얼마나 편집자의 노고가 붙은 제목인가!!

*우연찮게 며칠 전에 읽은 <오후에는 출근합니다>에서 범유진 작가님의 이야기를 이미 만난 터라 반가웠다. 이 책에서는 <3월에 벚꽃색 입히기>로 첫 시작을 연다. 엄마의 소원대로 선생님이 된 영우는 학교에 과연 적응할 수 있을까? 상처받은 영혼을 감싸안을 때 이들은 서로 상생할 수 있을까? 이런 질문을 남긴 단편이다.

*이선주 작가님의 <여러분은 분명 실패할 겁니다>가 나에게는 특히 인상적이었다. 누군가가 원하던 대학을 입학했지만 전혀 행복하지 않은 슬아, 자기처럼 오고 싶었던 대학에 청강 온 보람이를 만나는 주인공 ‘나’는 20살의 아가씨처럼 보이지 않았다. 그저 고3의 연장선처럼 보였다. 이런 부분에 대해 작가는 이렇게 묘사한다.
“대학교 정문에 가까워지자 패딩을 껴입고 머플러까지 한 채로 서 있는 슬아가 보였다. 신입생의 차림새는 아니었다. 나를 살폈다. 슬아와 비슷한 모습이었다. 3월 2일, 봄이라고는 하나 겨울의 끝자락과 더 닮았다. 몸도 마음도 추워서 무엇으로라도 덮고 싶었다.”(p.48) 봄이라는 단어는 참 예쁘고 따뜻하지만 사실은 아직 추운, 그런 3월 2일을 정확하게 표현했다. 그런 그녀들이 “여러분은 분명 실패할 겁니다”라는, 저주같은 말을 노교수로부터 듣는다. 이 상황이 현실이라면 대부분의 학생들은 질문하러 가지 않았을 것이다. 이 소설의 주인공 중 한 명은 심각한 마음의 병을 안고 있고, 나머지 둘은 이 학교를 목표로 했으나 떨어진 학생들이라 더더욱 질문하러 가기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교수에게 질문을 하러 간 그녀들의 용기와 패기가 만들어낸 소설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인지 노교수를 찾아가는 능동적인 모습의 삶의 태도가 그녀들의 삶을 어떻게 바꾸는지 앞으로 지켜보라는 작가의 의도로 읽혔다. 사실 이런 주제는 굳이 이런 노교수를 만나지 않더라도 책을 읽다보면 많은 책들이 실패하라고 권해오지 않았나 생각이 들었다. 소설에서는 역사의 주인공처럼 승리하고 극복해낸 사람들이 아니라 찌질하고 실패한 사람들이 주인공으로 나오는 장르이니 말이다. 하지만 부러웠다. 슬아와 하람이라는 원군을 둔 ‘나’가. 그리고 아직 20살에 불과한 그녀들의 앞으로의 이야기가.

*여기에 있는 다섯 개의 단편들은 앞으로의 삶이 더욱 기대되는 주인공들의 시작부분에 대한 내용이다. 이들은 이제 막 서문을 열었을 뿐이다. 이들의 이야기가 여름에도, 가을에도, 겨울에도 계속 이어졌으면 좋겠다. 그렇게 계속되어 벽돌 소설이 되면 좋겠다. 한국문학에서는 단편이 주 장르이고, 가물어버린 장편이지 않은가, 이 책이 아주 두꺼운 장편이 되어 단비같은 소설이 되었으면 좋겠다. 한 여름의 중간에는 소나기 편도 나오고 겨울에는 눈이 펑펑오는 그런 엔솔러지도 나오길 상상해본다.
p.s 곧 더워질 것이다. 계절 앤솔러지 여름의 책도 응원한다. 그리고 이분들의 장편소설도 응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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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반도체 쇼크, 이미 시작된 미래 - 반도체 최악의 위기에 대응하는 7가지 시나리오
최윤식 지음 / 인플루엔셜(주) / 202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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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반도체 쇼크 이미 시작된 미래>
-반도체 최악의 위기에 대응하는 7가지 시나리오
지난주, 대만의 화롄시 지진으로 TSMC가 큰 타격을 받았다고 한다. 이로 인해 삼성이 반사이익을 받을 수 있을지에 대한 뉴스가 보이는 요즘이다. 심지어 오늘 뉴스에는 삼성전자의 주식이 3년만에 장중 최고가였다는 소식이 들린다. 이 오름세에 대만의 지진의 여파가 없을 수 없을 것이다. 따지고 보면 미중 전쟁이라는 큰 바둑판은 4차산업혁명에서 가장 중요한 핵심인 반도체 싸움이고, 반도체를 제조하는 대만과 우리나라는 그 판에서 빠질 수 없는 돌이다. 바둑의 프로기사들이 보통 100수를 내다본다고 하는데, 그 중 이 책은 7가지의 수를 내다본 책이라 할 수 있겠다.

‘프롤로그’에서 최윤식 저자는 “한국의 반도체 산업은 국가 경제에 있어 매우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라고 말한다. 사실 내가 삼성을 다니는 것도 아니고 삼성 주식을 가지고 있는 개미도 아니라고 한다면 반도체와 나의 삶과 무슨 상관이냐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에 대해 저자는 “반도체는 수출 주력 상품으로 전체 수출액의 약 20퍼센트를 차지하며, 경상수지 흑자에 절대적 기여를 하고 있다.”(p.7)라고 설명한다. 그렇다. 사람을 인적자본 취급하는 우리나라는 작아 자원이 없어 사람의 힘으로 만들어낸 것을 수출해야만 먹고 살 수 있는 나라라고 국민학교때부터 우리는 배우지 않았던가. 요새 삼성 주식이 10만, 11만을 바라보며 오르고 있다 한들, 엔비디아 주식만큼은 아니다. 심지어 우리의 반도체는 메모리 반도체에 불과하기에 오히려 대만의 TSMC가 만드는 반도체처럼 ChatGPT에 필수적인 것도 아니다. 그렇다고 중요하지 않은 것이라고 말할 순 없지만 삼성의 기술을 빠르게 따라오는 중국이나 다시 전자제품의 영광을 재현하고 싶어하는 일본이라는 강대국 사이에서 우리는 국뽕에 취해 있을 수 만도 없는 시점이다. 이런 상황에서 저자는 “잠재적 위기 역시 보이지 않게 다가오고 있기 때문”에 “우리가 반도체 최악의 위기에 대응하는 일곱 가지 시나리오를 찾아야”(p.7)한다고 말한다. 처음에는 아리송해서 여러번 읽었던 프롤로그의 제목으로 ‘완벽한 예측은 없고, 불가능한 미래도 없다’라고 지은 이유일 것이다. 이 책의 목차다. 1장 영원한 아군은 없다-첫 번째 시나리오: 트럼프의 한국 반도체 공격2장 미래는 징후를 보이며 다가온다-두 번째 시나리오: 중국-대만 전쟁의 발발3장 한반도 최악의 위기, 코리아 디스카운트-세 번째 시나리오: 백두산 화산 폭발4장 미국의 달러 패권이 흔들린다-네 번째 시나리오: 달러 붕괴와 미국 정부 디폴트 선언5장 새로운 동맹이 시작된다-다섯 번째 시나리오: 차이메리카 어게인6장 반도체 시장의 중심이 바뀐다-여섯 번째 시나리오: 새로운 기술의 등장7장 인공지능이 반도체 산업을 이끈다-일곱 번째 시나리오: 허물어진 기술 진입 장벽사실 백두산 폭발에 대한 3장이나 미중이 손을 잡는 5장을 읽을 즈음에는 살짝 저자가 멀게 느껴지기도 했지만 저자가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은 7가지 시나리오 중 7장이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4차산업혁명을 이끄는 핵심이 담겨있다. 이에 대한 내용은 시나리오라는 픽션이 아니라 우리가 앞으로 받아들여야할 팩트라고 생각한다. 1장에서부터 6장을 읽으며 6가지 시나리오에 대해선 캄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어느 시나리오 하나 우리에게 녹록하지 않은 것이 없다. 결국은 7장의 인공지능에 대한 기술보유만이 우리나라가 살 길이다. 이번주 수요일 선거를 앞두고 지금의 국제정세에서 우리나라의 길을 밝혀줄 사람들이 당선되길 바라며 이 책을 덮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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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에는 출근합니다 소원라이트나우 7
김선희 외 지음 / 소원나무 / 202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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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에는 알바에 대한 에세이인줄 알았다. 하지만 아니었다. 각각 색다르며, 전혀 예상이 되지 않는 스타일과 내용이 담긴, 아찔하며 흥미진진한 단편소설이다. 다 읽고 난 지금, 이 다섯꼭지를 묶어 ‘오후에는 출근합니다’로 묶인 제목에게 조차 박수를 보낸다. 표지에도 잘 드러나듯이 오후에 출근하는 청소년 다섯명의 아르바이트를 소재로 한 이야기다.

첫 번째 단편 <인형 탈을 쓰면>은 질풍노도의 시기를 온몸으로 맞고 있는 ‘나’가 주인공이다. 일상에서 엄마에게 느끼는 서운함과 가족들의 고충은 “어차피 인간은 언젠가 헤어질 텐데 인간관계를 맺으면 뭐 하나, 나중에 헤어질 때 괴로울 뿐이지,”(p.37)로 이어져 세상에서 ‘나’만이 알고 있는 우물을 파게 한다. 하지만 절친, 단아가 하던 인형탈 아르바이트를 대신하게 된 주인공 ‘나’는 여러 인형탈을 써보면서 다른 사람들의 시선에 의한 편견에 대해 생각한다. 이 객관화는 “세상을 보는 시선이 뭐랄까, 더 넓어지고 깊어졌달까. 예전에는 평면으로 보이던 것들이 이제 입체적으로 보이게 됐어. 세상을 더 많이 알고 싶어.”(p.37)로 이어진다. “아무튼 탈을 쓰고 있으니까 없던 용기도 막 생기네. 아니지. 없던 용기가 생길 리는 없지. 원래 용기는 있었는데 내가 꺼내지 못했던 거잖아. 용기 말고 또 어떤 것들이 내 안에 숨어 있을까? 앞으로는 꺼내지 못했던 것들을 하나씩 꺼내보고 싶어.”(p.37)라고 소심하게, 하지만 주인공의 성격상으로는 매우 대범한 고백으로 이어진다. 사실 나는 이 소설에서 주인공의 친구, 단아가 요새 아이들처럼 매우 쿨했다는 것과 친구인 이단아, 최주우도 이름이 있고, 방에서 나오지 않는 동생도 은우라는 이름이 있는데 주인공 ‘나’의 이름이 나오지 않는다는게 인상적이었다. 여러 인형탈을 쓰듯 우리도 인생에서 여러 이름이 필요하다는 의미도 될 것이고, 이 책을 읽는 독자 모두의 이름을 대입할 수도 있을테니 말이다.

<마법소녀 계약주의보>는 알바할때는 계약서를 자세히 읽으라는 메시지를 진하게 느낄 수 있었다. 한편으로는 핑키에게 속는 주인공들을 본다. 사실 아르바이트를 시키는 이들은 주로 자영업 종사자들이다. 비싼 임대료 때문이라는 핑계에 청소년들의 임금을 파묻는 주인들 말이다. 청소년들이 직접 보기에 사장님들이 나빠보이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 겉모습에 속아 임금이 체불되는 등의 억울한 일을 당하는 것들을 생각해볼 때, 작가의 핑크색 쥐, 핑키는 정말 잘 만든 캐릭터라는 생각이 들었다. 한편으로는 청소년 알바라는 소재에 판타지 장르를 녹아낸 작가님이 대단하다는 생각이 든 소설이기도 했다.

요새 독서동아리 분들이 정해연 작가님의 <홍학의 자리>에 열광 중이다. 세 번째 이야기, <그 아이>를 읽으며 같은 작가님이구나 싶어 놀랬다. 그리고 들은 바와 너무 달라 또 한번 놀랬다. <그 아이>는 픽션인 데 논픽션인 듯 느껴져 인상적인 작품이었다. 그 정도로 홍구와 민준이는 내 주변에도 있는 아이 같기도 했고, 그런데 그렇게 신고까지 해서 챙겨줄 아이가 없을 것 같기도 했다. 이런점이 아이러니하게 느껴져서 문학적으로 다가온 신기한 소설이었다. 따뜻함은 덤.

<역방향으로 원 스텝!>은 AI의 상담자 역할을 하는 청소년이 주인공이다. AI가 인간 지적능력을 보조하는 4차산업혁명 시대의 미래일 것이다. 따지고 보면 근미래를 담은 SF소설이다. “우리를 아르바이트로 소모한다는 말, 그리고 보완재의 보완 아르바이트라는 말, 우리가 일종의 도구라는 표현까지, 하지만 난 동의할 수 없다. 난 아르바이트를 하는 것뿐이지, 존재 자체가 아르바이트일 수 없으므로. 말 그대로 임시로 일을 하는거지 임시로 살고자 하는 게 절대 아니니까 말이다. 임시로 하는 일이 나의 정체성의 근간을 흔든다면 관둬야 한다. 난 도구로서 삶을 살 수도 없고 부정한 도구로 쓰이는 일을 해서도 안 된다.(pp.187~188)
아르바이트라는 도구에 불과한 쓰임이라 해도 결코 나의 주체를 잊어서는 안된다는 작가의 목소리가, 청소년들을 향한 좋은 어른의 글이 아이들에게 닿기를 응원하게 되는 소설이었다.

<호 탐정의 조수가 되고 싶어> 미다스의 딸이 대체 누구인지를 알아내는 추리소설이다. 이 작품의 전개 역시 흥미진진했다. 개인적으로는 이 작가분이 우리 아파트에 사셨던 분이실까, 내 이웃이었을까 추리하게 되는 소설이었다. 난 다행히도 이 책에 나오는 사람들보다는 벌레를 잘 잡는 편이라..

몇 년 전 들었던 김누리 교수님의 강연 중 ”우리나라 교육은 아이들 모두 대기업의 관리자가 될 것을 가정하는 수업들로 이루어져있다“라는 내용이 생각났다. 수업을 듣는 대부분의 아이들은 노동자가 될텐데 어째서 관리자 수업만을 하고 있느냐고 말이다. 이 책의 주인공들은 단순히 대학에 가기 위한 공부를 하지 않고 아르바이트에 도전한다. 그 아르바이트가 프리즘이 되어 아이들에게 다양한 삶의 색을 보여준다. 이 다섯 가지 단편에 나오는 청소년들은 자라서 관리자가 될지 노동자가 될지는 알 수 없다. 하나는 확실하다. 자기 삶의 당당한 주인이 될 것이라는 것이다. 응원한다. 이 책 주인공들 뿐 아니라 이 책을 읽을 청소년들을. 미래에 당당한 노동자 혹은 삶의 주인이 되어 있을 아이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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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한 저녁의 연인들
서윤빈 지음 / 래빗홀 / 202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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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주토끼>로 내게 눈도장 쾅 찍은 래빗홀에서 신간이 나왔다.
<영원한 저녁의 연인들>.
영원한 저녁이 있을 수가 있던가,
호기심이 저녁노을처럼 스며드는 제목이다.
사실 ‘저녁의 연인들’까지는 황학주 시인의 시 제목이다.
그의 시 중 이런 부분이 있다.

“이제 찾아오는 모든 저녁의 애인들이
인적 드문 길을 한동안 잡아들 수 있도록
당신이 나를 수습할 수 있도록
올리브나무 세 그루만 마당에 심었으면”

여기에 ‘영원한’이란 수식어를 붙였다.

사람의 장기를 임플란트처럼 대체할 수 있는 미래다.
하지만 비용이 꽤 되기 때문에 장기렌탈할 금액을 낼 수 없는 이들은 죽음을 선택한다.
그런 죽음을 계획하는 사람들의 연인, 유온이 주인공이다.

따지고 보면 서윤빈 작가님이 저녁의 연인들이라는 시 제목에 ‘영원한’이라는 임플란트 수식어구를 장기렌탈했구나 싶다. 댓가는 무엇으로 지불하려나.

이 소설의 장르를 따지자면 SF Romance 정도 될 것이다. 인상적인 부분은 디테일이다.

“버디의 등장으로 우리 시대의 인간은 장기를 하나씩 임플란트로 갈아 끼우며 영원히 살 수 있게 되었고, 모든 것을 기억할 수 있게 되었다.”(버디, 모드라는 신기술이 등장한다. 이름도 가볍게 참 잘 지었다)

“버디를 달지 않은 옛날 사람들은 막연한 불안에 시달렸다고 하는데, 이 시대에는 불안이 당신에게 직접 말을 건다.”(버디는 3세 경 뇌에 문신하듯 새기는 기술이다. 이제 현대인의 불안이 해결될 날이 머지 않았음을 이 근미래 소설에서 느껴본다. 만세!)
“발전하는 기술은 휴대전화를 바꾸는 걸로 따라잡을 수 있으니 기술 발전에 밀려 버디가 낙후되는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하기 위한.”(더 이상 내가 노인이 되었을 때 기술을 못 따라가서 낙후 될 걱정또한 필요없다. 모듈화가 잘 되어 있어 걍 돈으로 휴대전화만 사면 된다)
“기본적으로 운동은 건강에 좋지만, 신체에 불필요한 손상이 쌓여서는 본말 전도다.”(노화에 대한 많은 이론들이 있는데 많이 쓰면 그만큼 많이 닳는다는 게 진리인 세계인 것이다. 지난 주에 궤도님이 티비에 나와서 비만은 10년 내로 해결될 것이라는 이야기 급으로 쇼킹했다)
“근육은 임플란트도 없어.”(아니 장기보다 근육이 훨씬 만들기 쉬울 것 같은데 대체 왜 근육이 없단 말이냐!)
SF 장르는 작가의 상상력을 구경하는 재미가 큰데 이 소설은 120% 만족할 수 있을 것만 같다. 유온이 서하와의 데이트로 급하게 나가는 와중에 옷을 잘 차려입는 부분이 있다. 그때 이런 문장이 써 있다. “작은 성의가 큰 차이로 이어지는 법이다. 신이 디테일 안에 산다면 사랑의 신도 아마 그 안에 있을테니.” 그렇다. 이 작가님의 SF 신도 이 디테일에 살고 있는 듯하다.

해가 저무는 시간이다. 중랑천에 가득한 벚꽃 사이로 손을 맞잡은 연인들이 보인다. “영원한 저녁의 연인들”이라 불러본다. 나는 황학주 시인님처럼 올리브 나무 가지 말고 벚꽃 가지로 꽂혀있고 싶다. 일 년에 며칠뿐이지만 이런 꽃길을 만들어내는 저 벚나무는 내년에도 필 것 같으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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