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1980 각본집
강승용.오선영 지음 / 씨네21북스 / 2024년 3월
평점 :
강승용 오선영 각본집 <1980>
*앞 표지에는 평화반점의 주인 철수네 3대의 사진이, 뒷 표지에는 도망치듯 떠나는 영희의 단촐한 식구의 뒷모습이 못내 인상적인 책이었다.
이준익 영화감독이 <왕의 남자>, <사도>를 찍을 때 함께 호흡을 맞췄던 강승용 미술감독이 이 영화의 스피커를 잡았다. ‘감독의 말’을 보면 그는 “철수네 가족사를 풀어가던 2년여의 기간은, 외적으로는 새로운 도전”을 했다고 쓰여있다.
“영화<1980>은 여덟 살 소년과 가족, 그들과 관계 맺고 있는 주변 인물들의 시선으로 풀어간 5·18 민주화운동 10일간의 기록이다. (...) 이야기의 주체인 여덟 살 소년 철수의 맑고 순수한 눈으로 민주화운동을 바라보고 경험한 이야기를 담고자 했다.
계엄군의 잔혹하고 무자비한 폭력에 대항하여 스스로를 지켜야 했던 시민들이 무기를 들게 되면서 ‘폭도’라는 누명을 썼다. 그로부터 40여 년이 지나는 동안 대통령이 여덟 번 바뀌었고, 평화로운 듯 평화롭지 않게 가해자는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넜다.(...)
상처를 평생 가슴에만 묻고 살았을 힘없는 소시민 철수네 가족을 통해, 국가가 휘두른 폭력의 결과가 개인에게 한평생 어떤 영향을 주는지를 담고 싶었다.”(p.29)-기획 의도의 문장이다.
주위의 1973년생들을 떠올려본다. 한참 우리 사회에서 중추역할을 맡았다가 인생의 후반부를 향한 이들이다. 그들이 여덟 살 이었을 때, 특히 광주에서 나고 자란 아이들의 모습을 상상해본다. 박정희 시대의 끝을 보고 힘찬 미래를 꿈꾸었을 그들의 부모가 보인다. 민주화를 열망하던 ‘서울의 봄’이 신군부에 의해 부서지고 어느 날 갑자기 광주시내로 진입하는 탱크들의 행렬을 목격한다.
“1980년 5월 17일부터 10일간, 암울하고 악몽 같았던 여정 한가운데··· 화평반점 1대 철수 할아버지, 2대를 꿈꾸는 철수 아빠, 그리고 3대를 이어야 할 숙명 앞에 놓인 철수가 있었다.”(p.31) 하지만 이들은 평범하기 그지없는 무고한 시민들이었을 뿐이다. 그저 그 공간에 있었다는 이유만으로 이런 비극의 주인공이 되었다.
*1947년의 4.3의 동백꽃이 지고 벚꽃이 졌다. 이제 곧 4.16 세월호의 비극이 지나가면 1980년 광주에서의 5. 18을 지난다. 우리의 근현대사를 접할 때면, 나는 한국인으로서의 봄이 마치 고난주간처럼 느껴진다. 그리고 6.10일이 지나야 겨우 숨통이 트인다.
*이번 4.9일 선거 개표방송을 지켜보며 한결같이 경상도는 국힘을, 전라도는 더불어를 찍는 모습이었다. 그래도 경상도의 지지율이 60% 정도였다면, 전라도는 거의 90%에 육박했다. 그때는 ‘여전하구나’라는 일반화로 별 생각없이 지켜보았더랬다. 그런데 이 각본 속 평화반점이라는 짜장면 집주인의 장남, 철수아빠와 세들어 사는 직업군인, 영희아빠의 관계를 보며 개표방송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철수아빠는 베트남 참전 후 시민으로서의 책임을 다하기 위해 야학을 운영했을 뿐인데 빨갱이로 지탄받았고, 영희아빠는 먹고 살기 위해 직업으로 군인이 되었을 뿐인데 5.18의 가해자가 되었다. 그저 100점짜리 남편감이 되기 위해 군인을 선택한 영희아빠의 죄라고 손가락 질할 수 있을 까? 나는 이 <1980>이라는 각본이 오늘날의 대한민국을 보여준다는 생각이 들었다. 살아남은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은 투표뿐임을, 그 상처를 가진 이들이 아직도 그 지역에 살아있음을, 평화반점이 철거되는 일은 그 일을 기억에서 지우는 것과도 같은 의미일 것이다. 철수, 영희아버지들의 자녀(나라는 5.18로 부모를 잃은 아이를 입양한 아이지만)의 이름이 각각 ‘우리’와 ‘나라’인 것으로 보아 이 각본을 쓴 두 분의 생각 역시 그러했을 것이다.
*너무 비극적이어서 작가님을 조금 원망하기도 했다. 바둑이나 아모레 이모, 철수 엄마의 쌍둥이, 그리고 영희의 부모로 보이는 이들의 마지막이 그랬다. 다시 생각해보니 현실은 더 처참했을 것이다.
*전쟁통에도 아이들은 태어난다는 말을 쉽게들 한다. 철수 엄마 역시 그랬다. 하지만 그녀와 그녀가 낳은 쌍둥이의 비극을 보며 나는 앞으로 ‘전쟁통에도 아이들은 태어난다’는 말을 내뱉을 수가 없을 것만 같다. 그렇게 태어나기가 쉽지 않은 일임을 이 각본집에서 깨닫는다.
*각본집을 처음 읽어보았다. 새삼 매력이 있는 장르임을 이번에 알게 되었다. 전라도나 가끔 나오는 황해도 사투리를 따라 읽으며 대화 사이의 여백이 소설에서 행간을 읽어내야 하는, 그런 유추의 순간이 참 매력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