흰 종이에 글자를 채우려 하지만

글자는 가다 멈추고 가다 멈춘다

생각이 손이 미끄러지듯 나아가지 못하고

자꾸 멈칫멈칫한다

 

보이지 않는 생각을

보이게 하는 글

천천히라도

멈추지 않고 쓴다면

언젠가

어딘가에

닿겠지

 

 

 

희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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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랗게 하얗게 핀 꽃이

하얀 날개 단 씨앗이 되고

씨앗은 바람에 날린다

 

바람에 날리는 씨앗은 기쁠까

어디론가 날아가는 건 즐거워도

가고 싶은 곳이 아니면 슬플지도

 

아니

민들레 씨앗은 잘 안다

바람에 날려 떠나야

다시 꽃을 피울 수 있다는 걸

 

민들레가 봄을 맞이하고

다시 씨앗을 맺고

또 어디론가 떠나는 일은 끝나지 않는다

 

 

 

희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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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함박눈이 내리는 길을 걷다 선물가게 진열창에 걸린 겨울나무 그림을 보았다. 별거 없는 그림인데도 그 그림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다음 날 나는 선물가게에 가서 그림을 사려 했다. 하지만 주인은 “저 그림 파는 거 아닌데요.” 했다.

 

 그래도 내가 자꾸 사고 싶다고 하자 주인은 잠깐 생각하더니, “이거 참, 어쩔 수 없군요. 알았어요. 어쩌면 그림이 당신을 만나려 한 건지도 모르겠네요.” 했다.

 

 내가 그림을 들고 나가려 하자 주인이 한마디 했다.

 

 “그 그림 벽에 걸어두고 자주 보세요.”

 

 “아, 네…….”

 

 나는 어색하게 웃고 대답했다.

 

 겨울 동안 난 벽에 걸어둔 그림을 오래 바라보았다. 내가 볼 때는 아무렇지 않았는데 눈이 내리면 그림 속에도 눈이 쌓였다. 눈이 덮인 나무는 기분 좋아 보였다. 그렇게 겨울이 흘러갔다.

 

 봄이 오자 그림 속 눈은 녹았다. 눈이 녹고 한동안 그림은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았다. 사월이 오고 세상에 벚꽃이 피자 그림 속 나무에도 꽃망울이 달리고 꽃이 피었다. 그림 속 나무는 벚나무였다. 그림을 오래 바라보면 꽃잎이 바람에 흔들리는 듯했다.

 

 언제까지고 벚꽃이 떨어지지 않기를 바랐지만 얼마 뒤 꽃은 떨어지고 나무는 풀색잎으로 뒤덮였다. 곧 여름이다.

 

 무더운 여름밤 나무 그림 곁은 어디보다 시원했다. 뜨거운 여름이 가고 나뭇잎은 빨갛게 물들었다.

 

 가을에 나는 그림을 잘 보지 못했다.

 

 겨울에 접어 든 어느 날 그림이 생각나서 보니, 그림 속 나무는 세상 나무가 나뭇잎을 떨구었는데도 가을 모습 그대로였다.

 

 

 

희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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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푸른 풀밭 위에 멋진 집이 있는 그림을 사다 집 안에 걸었더니, 그날 밤 내 꿈 배경은 그 그림이었다. 이튿날 깨어보니 그림 속 집으로 걸어가는 듯한 사람 모습이 보였다. 잘 보니 그건 나였다.

 

 며칠 동안 같은 꿈을 꾸고 그림을 보니 그림 속 나는 문 앞까지 갔다. 이제 조금만 더 가면 그림 속 나는 집 안으로 들어갈 거다. 집 안으로 들어가는 게 좋을지 가지 않는 게 좋을지. 어쩐지 꿈속에서 집 안으로 들어가면, 난 이 세상에서 사라질 것 같았다.

 

 잠이 들고 나는 그림 속으로 들어갔다. 그곳은 다른 날과 다르지 않게 조용하고 평화로웠다. 드디어 난 문 앞에 있었다. 잠시 머뭇거리다 문을 두드렸다. 조금 뒤 찰칵하는 소리가 들리고 문이 조금 열렸다. 나는 조심조심 집 안으로 들어갔다.

 

 집 안에 사람 기척은 없었다. 조금 들어가니 거실이 나왔다. 거실 창은 아주 커다랗고 볕이 잘 들었다. 고개를 돌려 창 맞은편 벽을 보니, 거기에는 많은 그림이 걸려 있었다. 그림은 다르면서도 비슷했다. 방과 그 방 주인인 듯한 사람이 있는 것이. 그리고 나는 맨 끝에 걸린 내 방 그림을 보았다. 빈 방에 내 모습이 조금씩 나타나고 나는 희미해졌다.

 

 나는 그림 속 집 안 그림에 갇혔다.

 

 

 

희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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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에 대하여 오늘의 젊은 작가 17
김혜진 지음 / 민음사 / 201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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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상에는 이런저런 사람이 있고, 그 안에는 동성을 좋아하는 사람도 있다. 오래전에는 그걸 법으로 못하게도 했는데 이제는 달라졌다. 그렇게 된 지 오래되지 않았다. 동성을 좋아하는 사람은 옛날에도 있었을 거다. 꼭 자신과 다른 성을 좋아해야 하는 건 아닐 텐데, 사람은 왜 그래야 한다고 생각했을까. 인류가 잘못 생각한 건 그것만이 아니기는 하구나. 여러 가지를 받아들이게 된 지금이지만, 부모는 그게 자기 자식일 때는 쉽게 받아들이지 못한다. 남은 상관없지만 자기 자식은 안 된다 생각하는 사람 많겠지. 부모는 자식이 평범하게 살기를 바란다. 그건 자식을 위해 생각하는 걸까, 부모 마음이 편하려고 그러는 걸까. 남이 어떻게 볼지 생각하는 사람 많겠지. 난 남의 얘기 안 하지만 그걸 즐겁게 하는 사람도 있다. 그런 사람이 있어서 부모는 자식이 공부 잘하고 대학을 나오고 좋은 일자리를 구하고 결혼하고 아이를 낳고 살기를 바라는 거겠지. 이제는 그런 부모만 있는 건 아닐까.

 

 요양 보호사로 일하는 엄마, 대학에서 강의를 다니는 동성애자 딸. 이럴 때 딸이 이야기를 이끌어갈 것 같은데 이 소설은 엄마가 이야기를 이끌어간다. 제목이 《딸에 대하여》니 어울린다고 해야겠다. 엄마는 딸이 서른 중반이고 좋아하는 사람이 있고 그 사람과 일곱해 정도를 살았는데도 그걸 받아들이지 못하고 지금이라도 딸이 남자를 만나 결혼하기를 바란다. 엄마는 딸한테 돈을 빌려줄 형편이 안 돼서 집에 들어와 살게 하는데 딸이 함께 살던 레인도 함께 온다. 엄마는 그걸 무척 견디지 못하면서도 받은 돈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산다. 아니 딸이 함께 살던 레인한테 집을 나가라는 말도 한다. 예전에 본 다른 소설에서도 동성애자가 이름이 아닌 다른 호칭을 쓰던데, 동성애자는 정말 그럴까. 중요한 건 아니지만. 사람 이름은 거의 남이 지어주기는 한다. 어릴 때는 그 이름을 써도 나이를 먹은 다음에 바꾸는 사람도 있다. 누군가 지어준 이름이 있다는 것도 괜찮은 거 아닌가 싶다. 그 사람을 생각한 사람이 있었다는 거니. 아이 이름을 적당이 짓는 사람도 있겠지만.

 

 엄마는 정말 딸이 예전에는 대단한 일을 하고 지금 치매에 걸려 요양원에 있는 젠처럼 되리라 생각한 걸까. 젠은 다른 사람을 위해 일하고 혼자였다. 사람은 치매만 아니면 조금 힘들어도 자기 힘으로 혼자 사는 게 나을 듯하다. 요양원이 여기 나온 것처럼 다 안 좋은 건 아니겠지만. 요양원을 보니 부모 없는 아이를 돌보는 곳이 떠오르기도 했다. 어릴 때는 그런 곳에서 자란 사람이 나이 들고 병든 다음에는 요양원에서 보내면 우울하겠다. 아니 자신은 그것을 모를까. 엄마는 딸이 남 일을 생각하고 시위하는 게 싫었다. 그런데 엄마는 요양원에서 젠을 다른 곳으로 보내려 하자 그걸 막으려 하고 다른 곳으로 옮겼을 때는 집으로 데려온다. 엄마가 인정없는 사람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꼭 그렇지도 않다. 엄마는 일을 그냥 하지 않고 늘 자랑스러운 마음을 가지고 했다. 예전에는 그런 사람이 많았는데 지금은 거의 없다. 그런 것에도 좋은 점이 있고 안 좋은 점이 있겠지. 돈만 생각하지 않고 다른 사람을 생각하면 좋겠다.

 

 평범하게 사는 게 가장 어렵다고 한다. 그건 맞는 말이다. 난 딸이 남자와 결혼하고 싸우고 사는 것보다 레인과 함께 조용하게 사는 게 더 낫다고 본다. 딸이 남자와 결혼한다고 꼭 싸우지는 않겠지만. 식구라는 건 여자 남자가 결혼하고 아이를 낳고 사는 것만 나타낸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엄마는 딸이 나중에 혼자 쓸쓸하게 죽을 것을 걱정하는 듯하다. 그래서 젠을 집으로 데리고 온 건 아닐까. 젠이 엄마를 만나 잘됐다는 생각이 든다. 엄마가 아니었다면 젠은 지저분한 요양원에서 하루 내내 자다가 숨이 끊어졌을 거다. 젠은 잠시라도 따스한 집에서 지냈다. 피를 나눈 식구가 아니어도 딸과 레인도 그렇게 살 수 있지 않을까(결혼한 부부도 남으로 만났구나). 그래도 엄마는 둘을 이해하지 못하겠지만. 아주 희망이 없는 건 아닌 듯하다.

 

 결혼한 두 사람이 헤어지고 남남이 되는 거나 동성인 두 사람이 함께 살다 헤어지는 거나 크게 다르지 않다. 동성애자는 그저 동성을 좋아하는 것일 뿐인데, 이성애자와 아주 다른 사람으로 보는 것 같다. 이것도 바뀌어야 할 텐데. 이 소설에 나온 것처럼 동성애자여서 일을 그만둬야 했던 사람도 있겠다. 세상이 바뀌면 부모가 덜 걱정할지.

 

 

 

희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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