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지의 세계
황인찬
민음사 2015년 09월 18일
새가 시라는 은유는 몰라요 시가 개라는 은유도 몰라요 누군가 시를 쓴다면 그건 그냥 시예요
(<멍하면 멍>에서, 14쪽)
한발짝 다가섰다 여겼는데 어느새 당신은 두발짝, 아니 서너발짝 앞서갔네요. 제가 당신 걸음을 쫓아갈 수 있을까요. 지금은 어렵다 해도 언젠가 좀더 가까워질 날도 있겠지요. 당신이 서두르지 않고 제가 걷기를 멈추지 않는다면. 걷다 지친 저는 가끔 멈춰설지라도, 당신은 그런 저는 아랑곳하지 않고 앞으로 나아가겠지요. 저를 기다릴 수 없는 당신을 제가 놓치지 않아야겠네요. 제가 그럴 수 있을까요. 조금 자신 없습니다. 당신을 따라가는 게 싫지 않지만 가끔은 어려워요. 좀더 쉬운 말로 하면 좋을 텐데 싶습니다. 미안해요. 제가 잘 못 알아듣는 건데. 어저면 당신은 어려운 말을 했다고 여기지 않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당신은 그게 무슨 말인지 몰라도 된다고 할 것 같네요. 정말 그렇다면 좋겠어요. 앞에서 한 말과 뒤에서 한 말 맞지 않는 것 같기도 합니다. 당신을 따라가려는 것인지, 당신이 하는 말을 알아들으려는 것인지. 얼핏 보면 다른 말 같지만 같은 말입니다.
물산
이곳은 내가 오래도록 살아온 마을이고 개나 고양이가 많이 살고 있다
“슬픈 개는 꼬리를 왼쪽으로 흔든다 행복한 개는 오른쪽으로 흔든다”
그 말을 들은 이후로 개 꼬리를 유심히 보게 된다
공원에서, 학교에서, 주택가에서
홀로 걷는 개들과 목줄을 매고 걷는 개들
언제부턴가
나는 오른쪽과 왼쪽을 구분할 줄 알고, 무엇이 슬픈지
분간할 수 있게 되었다
어느 날 개 한 마리가 우리 집 마당에 찾아왔다
얼결에 밥을 주고, 무심코 머리를 쓰다듬으며
개는 나와 함께 살게 되었다
개는 자주 오른쪽으로 꼬리를 흔들었다 가끔 왼쪽으로 흔들기도 했다
비가 오는 날이면 밖으로 나갔다
오른쪽으로 흔들리는 꼬리와 온종일 걸었다
그리고 또 어느 날 밤,
잠든 개를 보았는데 꼬리를 왼쪽으로 흔들었다
그걸 보고 나도 퍽 슬펐던 기억이 난다
이후로는 개 꼬리를 일부러 보지 않게 되었다 개가 꼬리를 왼쪽으로 흔들면 슬퍼지니까
어느 날 밤비가 조금씩 내릴 때, 나는 작은 개집에 웅크리고 들어가
내내 잠들어 있었다
일어나, 일어나, 오른쪽으로 흔들어도, 아무리
흔들어도
깨지 않았다 (80~81쪽)
어렵다 해도 저 나름대로 보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개가 꼬리를 흔드는 쪽에 달라 기분이 다를까요. 사람은 그것을 나타내기 어려운데. 꼬리는 없어서 안 되니 손을 흔들까요. 슬플 때는 왼손, 즐거울 때는 오른손. 그건 모든 사람이 아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어렵겠네요. 잘 모르는 사람은 ‘저 사람은 왜 손 흔드는 거야’ 할 거예요. 슬퍼도 즐거워도 겉으로 드러내지 않는 게 더 낫겠습니다. 왜냐구요, 시간이 흐르면 슬픔도 즐거움도 지나가니까요. 어쩌면 개도 자기 마음을 알아달라는 뜻으로 꼬리를 흔드는 건 아닐지도 모르겠어요. 그냥 버릇이겠지요. 그래도 우연히 개를 만나면 꼬리를 어느 쪽으로 흔드는지 마음 써서 볼 것 같아요.
아름다운 마음들이 모여서
어느 날의 수업 시간, 내가 좋아하던 아이가 내게 속삭이듯 말했다
“나는 곧 죽을 거야. 나는 네가 참 밉다.”
머지않아 그 애는 전학을 갔고 그 애를 다시 보는 일은 없었지만 나는 생각했다
좋은 일을 하면서 살아야 한다고
그 애가 없는 저녁 교실을 혼자 서성이다 본 것은 저 너머 작은 산이었다
작은 산이 무너지고 있는 것이었다
세계의 끝이 아니고, 누군가의 죽음도 아닌 일이 일어나고 있었는데
나는 한 가지 일만 자꾸 생각하고 있었다 (93쪽)
이 시를 봤을 때 황순원 소설 <소나기>가 떠올랐어요. 슬픔은 시간이 흐른 뒤에 더 커지기도 합니다. ‘나’는 자신이 좋은 일을 하면 그 애를 다시 만날 수 있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니 그 애가 죽지 않기를 바라고 좋은 일을 해야겠다 한 건지도. 그 애는 왜 그런 말을 한 걸까요. 마음과 다르게 심술궂게 말하는 때가 있겠지요, 그런 거겠지요. 떠나는 사람보다 남은 사람 마음이 더 아플 것 같아요. 혹시 이건 다른 일을 나타내는 걸까요, 은유 말이에요. 그렇게 읽어내지 않아도 괜찮겠지요. 다른 뜻은 뭔지 모르겠어요. 그런 것도 아는 때가 올지. 왜 다른 걸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느냐면, 제목과 내용이 어긋나 보여서예요. 이게 포스트모던인가요. 이런 것도 나름대로 괜찮습니다.
저는 걸음이 느립니다. 앞으로도 당신 뒤를 따르는 게 힘들겠지요. 당신과 함께 걷지 못할 때가 더 많을 거예요. 그래도 저는 당신을 따라가는 게 즐거워요. 그 즐거움 잊지 않도록 애쓸게요. 그러니 당신, 너무 멀리 가지 마세요.

동백만 한번에 떨어지지 않네
어쩌면 바람에 못이겨 떨어진 것일지도
꽃은 미련을 남기지 않고 진다
아니 다음을 위해 지는 거겠지
사람도 그렇게 산다
희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