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의 힘 - 파국의 시대, 한 사회학자가 안내하는 읽고 생각하고 쓰는 기술
오사와 마사치 지음, 김효진 옮김 / 오월의봄 / 2015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사람은 생각하는 동물이다 한다. 나도 사람이 생각하기에 왜 사는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자주 생각한다고 여겼다. 하지만 그런 생각을 하는 사람이 아주 많지 않은가보다. 사는 게 바빠서 제대로 생각할 시간이 없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바쁘지 않은 나는 쓸데없는 생각을 많이 한다. 차라리 좋은 생각을 하고 시간을 보내는 게 나을 텐데. 예전에는 책을 보아도 쓰지 않았다. 책을 읽을 때는 아주 재미있었는데 시간이 흐르면 무엇을 보았는지 잊어버렸다. 잘 모르는 건 더 빨리 잊었다. 책을 읽고 그것을 쓰지 않아도 생각했다면 좀 나았을 텐데, 바로 다른 책을 보았다. 어떤 사람은 책을 보고 그게 아주 좋아서 오랫동안 생각했다고 한다. 그렇게 할 수 있는 책을 내가 만나지 못한 건지. 좋아하는 건 여러번 되풀이해서 보는 사람도 있다. 쓰지 않아도 여러번 보면 잘 잊지 않고 무언가 말할 수도 있을 거다. 그런 거 부럽다. 부러운 게 하나 더 있는데, 그건 여러 책을 이어서 말하는 거다. 책은 한권 한권 다를지라도 이어져 있기도 하다. 그걸 잘 잇거나 합쳐서 생각하고 싶은데 잘 안 된다. 이런 생각을 한 건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언젠가부터 책을 읽으면 쓴다. 지금도 좋은 생각을 쓰지 못하지만 쓰고 얼마 안 됐을 때는 더 못 썼다. 소설을 많이 읽고 줄거리를 정리하고 느낌은 짧게 적었다. 그렇게 쓰다보니 줄거리 쓰는 건 익숙해져서 더 길게 썼다. 내가 말하고 싶은 건 그 책에 어떤 이야기가 담겨 있는지여서 줄거리를 쓴 거다. 시간이 더 지난 뒤에야 책을 그렇게 보면 안 되겠구나 했다. 내가 줄거리를 말하지 않아도 그 책을 보면 다 알고 자신이 책을 보고 어떤 이야긴지 아는 게 훨씬 좋다. 지금도 많이 달라지지 않았지만, 전에는 책을 어떻게 읽어야 하는지보다 책 내용을 어떻게 쓰지 했다. 그 책이 무엇을 이야기하는지보다 그 책을 보고 자신이 어떤 생각을 했는지가 더 중요할 것 같다. 책 읽기도 ‘마주이야기’라고 한다. 내가 그걸 잘 못한다. 본래 다른 사람이 하는 말 듣는 걸 더 좋아해서. 이 책 제목은 《책의 힘》인데 본래 제목은 ‘사고술思考術’이다. 쉽게 ‘생각하기’ 라고 해도 괜찮겠다.

 

사람은 가만히 두면 생각하지 않는다고 한다. 자극이라고 할까 어떤 충격이 있어야 생각한단다. 어쩌면 그럴지도 모르겠다. 이 책 제목을 왜 《책의 힘》이라 했는지 조금 알겠다. 사람이 생각하게 하는 게 책이기 때문이다. 사춘기 때는 달리 책을 안 봐도 여러가지 생각한다. 나는 어땠는지 모르겠지만, 아니 나는 더 나중에 사람을 생각했다. 왜 사람은 나고 사는 걸까 하는. 누군가는 그런 생각하기보다 살아가라 하지만. 사람이 왜 사는지에 답은 없기는 하다. 죽을 때도 알기 어렵겠지. 사람은 나고 살고 죽는다. 이럴 때 사는 거 덧없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덧없다 해서 그 삶을 하찮게 여기지 않아야 한다. 나고 살고 죽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것을 받아들이고 생각하고 살아야 한다. 누구나 평생에 걸쳐서 답을 얻기 위해 생각하는 게 있을까. 오사와 마사치는 그런 게 있는가보다. 사회학자기 때문일 것 같다. 일반 사람이라고 해서 그런 거 생각하면 안 되는 거 아니겠지. 책을 읽고 그때그때 생각할 때가 많다. 오랫동안 책을 보고 생각해서 답을 얻어야겠다 하는 건 없다.

 

철학자나 작가는 자신이 알고 싶은 문제 답을 찾기 위해 글을 쓴다. 책을 보고 생각하고 쓰는 거겠지. 어떤 소설가도 자신이 어떤지 알기 위해 소설을 썼다고 한다. 소설을 쓰면서 생각을 하고 새로운 것을 찾아내기도 한다. 이런 경험 나도 있다. 책을 본 다음에 쓰다보면 어떤 생각이 떠오른다. 책을 읽고 생각만으로 끝내지 않고 써야 그 생각이 열매를 맺겠지. 평생 알고 싶은 주제는 없지만, 책을 읽으면서 사람이 어떤지 알고 싶다 생각한다. 사람의 어떤 것이 알고 싶은 건지 나도 잘 모르겠다. 그저 세상에는 나와는 다른 사람이 있다는 걸 알려는 건지. 작가는 거의 ‘구원’을 생각하고 글을 쓴다. 나는 그렇게 못해도, 얼마 되지 않는 사람한테 내 글이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기를 바란다. 그런 마음으로 책을 읽고 써야 하는데, 아직 모자라서 나를 위해서 쓴다. 자신을 먼저 알면 다른 것도 조금 보이지 않을까. 바깥에서 무언가를 찾는 사람도 있고 자기 안에서 찾는 사람도 있겠지. 그렇다고 한가지만 하는 건 아닐 거다.

 

읽고 생각하고 쓰기 앞으로도 즐겁게 해야겠다.

 

 

 

희선

 

 

 

 

☆―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는 것은 닫힌 세계 안에서 안심하고 있기 때문이다. 놀라거나 감동하거나 하는 것은 자기 안에 선 세계로 모으고 정리할 수 없는 무언가를 감지했을 때다.  (47쪽)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희지의 세계

  황인찬

  민음사  2015년 09월 18일

 

 

 

 

 

 

 

 

 

 

 

 

 

 

새가 시라는 은유는 몰라요 시가 개라는 은유도 몰라요 누군가 시를 쓴다면 그건 그냥 시예요

(<멍하면 멍>에서, 14쪽)

 

 

한발짝 다가섰다 여겼는데 어느새 당신은 두발짝, 아니 서너발짝 앞서갔네요. 제가 당신 걸음을 쫓아갈 수 있을까요. 지금은 어렵다 해도 언젠가 좀더 가까워질 날도 있겠지요. 당신이 서두르지 않고 제가 걷기를 멈추지 않는다면. 걷다 지친 저는 가끔 멈춰설지라도, 당신은 그런 저는 아랑곳하지 않고 앞으로 나아가겠지요. 저를 기다릴 수 없는 당신을 제가 놓치지 않아야겠네요. 제가 그럴 수 있을까요. 조금 자신 없습니다. 당신을 따라가는 게 싫지 않지만 가끔은 어려워요. 좀더 쉬운 말로 하면 좋을 텐데 싶습니다. 미안해요. 제가 잘 못 알아듣는 건데. 어저면 당신은 어려운 말을 했다고 여기지 않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당신은 그게 무슨 말인지 몰라도 된다고 할 것 같네요. 정말 그렇다면 좋겠어요. 앞에서 한 말과 뒤에서 한 말 맞지 않는 것 같기도 합니다. 당신을 따라가려는 것인지, 당신이 하는 말을 알아들으려는 것인지. 얼핏 보면 다른 말 같지만 같은 말입니다.

 

 

 

물산

 

 

 

이곳은 내가 오래도록 살아온 마을이고 개나 고양이가 많이 살고 있다

“슬픈 개는 꼬리를 왼쪽으로 흔든다 행복한 개는 오른쪽으로 흔든다”

그 말을 들은 이후로 개 꼬리를 유심히 보게 된다

공원에서, 학교에서, 주택가에서

홀로 걷는 개들과 목줄을 매고 걷는 개들

언제부턴가

나는 오른쪽과 왼쪽을 구분할 줄 알고, 무엇이 슬픈지

분간할 수 있게 되었다

어느 날 개 한 마리가 우리 집 마당에 찾아왔다

얼결에 밥을 주고, 무심코 머리를 쓰다듬으며

개는 나와 함께 살게 되었다

개는 자주 오른쪽으로 꼬리를 흔들었다 가끔 왼쪽으로 흔들기도 했다

비가 오는 날이면 밖으로 나갔다

오른쪽으로 흔들리는 꼬리와 온종일 걸었다

그리고 또 어느 날 밤,

잠든 개를 보았는데 꼬리를 왼쪽으로 흔들었다

그걸 보고 나도 퍽 슬펐던 기억이 난다

이후로는 개 꼬리를 일부러 보지 않게 되었다 개가 꼬리를 왼쪽으로 흔들면 슬퍼지니까

어느 날 밤비가 조금씩 내릴 때, 나는 작은 개집에 웅크리고 들어가

내내 잠들어 있었다

일어나, 일어나, 오른쪽으로 흔들어도, 아무리

흔들어도

깨지 않았다  (80~81쪽)

 

 

 

어렵다 해도 저 나름대로 보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개가 꼬리를 흔드는 쪽에 달라 기분이 다를까요. 사람은 그것을 나타내기 어려운데. 꼬리는 없어서 안 되니 손을 흔들까요. 슬플 때는 왼손, 즐거울 때는 오른손. 그건 모든 사람이 아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어렵겠네요. 잘 모르는 사람은 ‘저 사람은 왜 손 흔드는 거야’ 할 거예요. 슬퍼도 즐거워도 겉으로 드러내지 않는 게 더 낫겠습니다. 왜냐구요, 시간이 흐르면 슬픔도 즐거움도 지나가니까요. 어쩌면 개도 자기 마음을 알아달라는 뜻으로 꼬리를 흔드는 건 아닐지도 모르겠어요. 그냥 버릇이겠지요. 그래도 우연히 개를 만나면 꼬리를 어느 쪽으로 흔드는지 마음 써서 볼 것 같아요.

 

 

 

아름다운 마음들이 모여서

 

 

 

어느 날의 수업 시간, 내가 좋아하던 아이가 내게 속삭이듯 말했다

 

“나는 곧 죽을 거야. 나는 네가 참 밉다.”

 

머지않아 그 애는 전학을 갔고 그 애를 다시 보는 일은 없었지만 나는 생각했다

 

좋은 일을 하면서 살아야 한다고

 

그 애가 없는 저녁 교실을 혼자 서성이다 본 것은 저 너머 작은 산이었다

 

작은 산이 무너지고 있는 것이었다

 

세계의 끝이 아니고, 누군가의 죽음도 아닌 일이 일어나고 있었는데

 

나는 한 가지 일만 자꾸 생각하고 있었다  (93쪽)

 

 

 

이 시를 봤을 때 황순원 소설 <소나기>가 떠올랐어요. 슬픔은 시간이 흐른 뒤에 더 커지기도 합니다. ‘나’는 자신이 좋은 일을 하면 그 애를 다시 만날 수 있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니 그 애가 죽지 않기를 바라고 좋은 일을 해야겠다 한 건지도. 그 애는 왜 그런 말을 한 걸까요. 마음과 다르게 심술궂게 말하는 때가 있겠지요, 그런 거겠지요. 떠나는 사람보다 남은 사람 마음이 더 아플 것 같아요. 혹시 이건 다른 일을 나타내는 걸까요, 은유 말이에요. 그렇게 읽어내지 않아도 괜찮겠지요. 다른 뜻은 뭔지 모르겠어요. 그런 것도 아는 때가 올지. 왜 다른 걸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느냐면, 제목과 내용이 어긋나 보여서예요. 이게 포스트모던인가요. 이런 것도 나름대로 괜찮습니다.

 

저는 걸음이 느립니다. 앞으로도 당신 뒤를 따르는 게 힘들겠지요. 당신과 함께 걷지 못할 때가 더 많을 거예요. 그래도 저는 당신을 따라가는 게 즐거워요. 그 즐거움 잊지 않도록 애쓸게요. 그러니 당신, 너무 멀리 가지 마세요.

 

 

 

 

 

 

 

  

 

 

동백만 한번에 떨어지지 않네

어쩌면 바람에 못이겨 떨어진 것일지도

꽃은 미련을 남기지 않고 진다

아니 다음을 위해 지는 거겠지

사람도 그렇게 산다

 

 

 

희선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크게 휘두르며 26

히구치 아사

講談社  2015년 12월 22일

 

 

 

이번 거 보고 25권 볼 때 기분이 아주 안 좋아서 그것을 썼던 게 생각났다. 그때부터는 아니지만 올해는 내내 별로다. 뜰뜨지 않아서 낫고 크게 기대하지 않아서 낫겠지만. 난 무슨 기대를 한 걸까. 그때 몇달 동안 어깨가 아프다고 했는데 올해 일월인지 이월인지 어깨 이제 괜찮네 했다. 그 생각을 하고 며칠 뒤에 다시 나빠졌다. 그것도 좀 오래가나 했는데 지난해만큼은 아니었다. 지금 아주 편하다 말하기 어렵지만 처음만큼 나쁘지 않다. 본래대로 돌아온 건지도. 근육이 뭉쳐서 편하지 않은. 이건 자주 그런다. 운동을 별로 안 해서 그런 거겠지. 가끔이라도 풀어주어야 할 텐데. 겨우 하루나 이틀 운동한다고 괜찮아지지 않겠지. 평소에 운동하지 않는다. 걸어다니는 것 말고는. 걷기라도 자주 하면 여러가지 좋을 텐데. 우울한 마음도 좀 나아지겠지. 덜 우울하려면 걷기라도 해야겠다. 야구는 아홉 사람은 있어야 하지만 걷기는 혼자서도 할 수 있다. 난 뭐든 혼자 하는 걸 더 좋아하는구나.

 

야구는 혼자 하는 게 아니다. 투수와 포수를 비롯해 모두 중요하다. 여러 사람이 힘을 함쳐야 하는 운동은 다 그렇다. 흐름이랄까 분위기랄까 그것도 좋아야 한다. 그런 것과 상관없이 경기 잘하는 사람은 아주 대단한 거다. 정신이 쉽게 무너지지 않으니까. 정신은 운동에서만 중요한 건 아니다. 정신력으로 버텨라 하는 말 별로지만, 뭐든 마음을 굳게 먹으면 조금이라도 제대로 하겠지. 난 자주 ‘못하겠다’ 한다. 그러고도 꾸역꾸역 하지만. 마음 약하게 먹어도 끈기가 아주 없는 건 아닐지도. 끈기라도 있어서 다행인가. 시간이 흘러서 앞에서 어땠는지 많이 잊어버렸다(이 말 안 할 때가 없는 것 같다). 예전에 쓴 걸 잠깐 봤다면 좋았을 텐데 안 봤다. 오랜만에 봐서 그런지 좀 낯설기도 했다. 처음에 여러 권 볼 때는 야구 재미있다 했는데. 여전히 잘 모르는 게 있어서 아쉽다. 경기가 어떻게 흘러가는지는 안다. 이건 누구나 다 알겠다.

 

앞에 거 모두 잊어버린 건 아니다. 타지마가 하나이를 많이 생각하게 된 것(같은 편끼리도 경쟁하는 것). 전에는 하나이가 타지마를 보고 경쟁심을 가지고 잘해야 한다 생각했는데, 지난 번에는 반대였다. 하나이가 가진 좋은 점은 키가 큰 거다. 타지마도 키 커야 할 텐데. 시간이 흐르면 지금보다 크겠지. 5회말까지 니시우라는 센다와 잘 싸웠다. 투수 미하시가 혼자 공 던지기 연습을 해서 경기 때 자세가 흐트러지고 공을 마음대로 던지지 못했다. 미하시 공은 느려도 던져야 할 곳에 잘 던졌는데. 미하시도 자신이 왜 그렇게 됐을까 당황했다. 25권은 6회초 센다가 1점을 얻는 데까지 나왔다. 26권은 6회초 조금 지난 다음부터 시작했다. 아베(포수)가 여러가지 생각해서 미하시한테 공을 던지게 했는데 센다가 그걸 치고 점수도 냈다. 6회초가 이번 책에 반이나 나온다. 반이나 나온다는 건 센다가 점수를 많이 낸다는 거다. 아웃 시키기가 이렇게 어려울 때도 있다니. 미하시는 보크를 하기도 한다. 이런 일 한번도 없었는데, 미하시는 공을 던지려다가 잘못 쥐었다 하고는 멈췄다. 주자가 있을 때 그런 행동을 하면 안 된다. 그것 때문에 센다는 1점 얻었다.

 

봄과 여름을 지나고 가을을 맞기까지 미하시와 아베 사이는 좋아졌다. 처음에도 나빴던 건 아니지만, 함께 이야기하고 공을 던지고 받지 않았다. 아베가 다친 뒤에 미하시는 자신도 생각해야 한다는 걸 깨닫고 아베한테 그런 말을 했다. 둘이 아주 친하게 말하지 않지만 전보다는 서로 믿고 경기한다. 센다가 점수를 많이 내자 아베는 미하시 기분이 가라앉지 않게 마음 썼다. 타지마도 미하시한테 혼자가 아니다 말했다. 6회초에서 센다는 8점이나 낸다. 6회말 니시우라 공격 때는 센다 투수가 바뀌었다. 아베는 미하시한테 그 투수가 던지는 공을 잘 보라고 했다. 하루나보다 대단하다고. 센다 투수가 던지는 공은 빠르지 않지만 회전수가 많아서 치기 어려운가보다. 미하시도 그런 공을 던질 수 있다는 걸 말하려는 거였을까. 7회말 때 타지마는 그 공 쳐 보고 싶다고 자기보다 앞에 아이들한테 루에 나가라고 했다. 전에는 그런 말 했을 때 그것을 이루기도 했는데 이번에는 그러지 못했다. 센다가 콜드게임으로 이겼다. 센다는 야구 잘하는구나.

 

니시우라가 여름대회 때는 한해 전에 현에서 일등한 학교와 경기하고 이겼다. 토세이보다 센다가 더 잘할까. 그때는 운도 따라서 니시우라가 이겼겠지. 여름대회에서 비죠다이사야마한테 졌을 때는 아이들이 울었는데, 이번에는 밝았다. 가을대회는 여름대회보다 큰 게 아닐지도. 감독도 아쉬워할 시간은 없다고 하고, 다음 대회(네개 시대회)를 생각하자고 했다. 하나이는 니시우라가 센다보다 정신력이 떨어진다고 여겼다. 가을대회에서 졌다고 해도 다 끝난 게 아니구나 아이들 정신력은 어떻게 키울까. 미하시도 괜찮아지겠지. 운동경기 꼭 이기는 게 좋은 건 아닐지도 모르겠다. 지고 배우는 것도 있을 거다. 니시우라 야구부 아이들 지기도 하고 이기기도 하고 자라겠다.

 

 

 

희선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記憶屋 (角川ホラ-文庫) (文庫)
織守 きょうや / KADOKAWA/角川書店 / 2015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기억술사

오리가미 교야

 

 

 

저도 모르게 눈물을 흘리는 여자, 여자는 왜 눈물을 흘릴까요. 이 책을 보다보니 떠오른 한 장면입니다. 생각나는 건 없고 갑자기 눈물 흘리는 여자라니. 소중한 무엇인가를 잊어버려서 여자가 눈물 흘린 건 아닐까요. 여자가 잊기를 바란 건지, 다른 사람이 그것을 바란 건지. 다른 사람이 그러기를 바란 건지도 모르겠어요. 그 사람은 여자가 앞으로 살아가려면 자신을 잊는 게 낫다 생각한 것이겠지요. 남의 기억을 멋대로 지우다니, 그래도 되는 걸까요. 이것과 비슷한 이야기 여기에도 나오는군요. 자신을 아프게 하는 걸로 자신이 살아있다는 걸 느끼려한 여자아이한테 변호사 다카하라 도모아키는 다른 어른처럼 말하지 않았습니다. 목숨을 하찮게 여기는 사람한테 충고하고 싶지 않고, 아픔은 단지 신호일 뿐이다 했습니다. 신호는 죽음이 다가오는 것을 말하는 걸까요, 살고 싶다는 걸까요, 누군가 도와줘 하는 것일 수도 있겠네요. 어쨌든 여자아이는 그 말 듣고 더는 손목을 긋고 싶지 않았답니다. 여자아이는 다카하라를 따르고 학교에도 잘 다니게 됐어요. 그 뒤에도 잘 지냈다면 좋았겠지만 다카하라 몸이 안 좋아졌습니다.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은 다카하라는 여자아이가 자신이 없어도 살아가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여자아이 기억에서 자신과 만난 일을 기억술사한테 지워달라고 해요.

 

책 제목을 뭐라 하면 좋을까 생각하다가 《기억술사》라 하기로 했어요. 이런 말 없지만, 풀어서 ‘기억을 지우는 사람’이라고 할까 하다가 명사도 있어야 할 듯해서. 일본말 제목도 사람을 나타내는 거예요. 이런 도시전설이 있어요. “해 질 무렵 공원에 있는 풀색 긴 의자에 앉아 있으면 기억술사가 나타난다. 그리고 잊고 싶지만 어떻게 해도 잊을 수 없는 기억을 지워준다”는. 이 말은 요시모리 료이치가 초등학교에 들어가기 전에 들은 말이기도 합니다. 대학생이 된 료이치는 다시 그 이야기를 듣습니다. 그것도 자신이 마음에 들어한 한학년 위 선배 교코한테서. 교코는 밤에 돌아다니는 걸 무척 무서워합니다. 언젠가 밤길을 걷다가 치한을 만난 적이 있어요. 큰일은 없었는데 그때 충격이 컸는지 교코는 밤길을 다닐 수 없게 됐답니다. 료이치가 교코를 도와주려 하지만 잘 안 됩니다. 료이치와 함께 집에 가도 무섭다고 해요. 교코는 료이치와 잘 지내고 싶어서 기억술사를 만나고 무서운 일을 잊습니다. 기억술사는 잊고 싶은 기억만 없앤다고 했는데 교코는 료이치까지 잊어버립니다. 그거 좀 이상했는데 왜 그랬는지 지금은 알겠습니다. 저만 알아서 미안하네요.

 

어제까지 알던 사람이 자신을 잊으면 무서울까요. 아니 무섭다기보다 슬프겠네요. 자신은 잊지 않았는데 상대가 자신을 잊는다면. 료이치는 어렸을 때도 비슷한 일을 겪었습니다. 료이치보다 세살 어린 친구 마키는 어떤 일 때문에 많이 울었던 일을 다음날 기억하지 못했습니다. 마키는 지금도 친구로 지내요. 이런 설정 일본 만화에 아주 많은데, 만화 많이 본 건 아니지만. 어린 료이치는 마키가 어떤 일을 잊어버린 게 무서워서 더는 그 이야기 꺼내지 않았답니다. 료이치는 아무리 힘들고 괴롭고 슬프고 아파도 기억을 지우는 거 좋게 여기지 않았어요. 기억은 자신을 이루는 것이기도 하니까요. 료이치는 자신을 잊은 교코가 예전 교코와 다르다고 여깁니다. 자신을 잊었다 해도 좋아한다면 다시 시작할 수도 있을 텐데, 료이치는 그러지 않았습니다. 료이치는 교코 기억이 돌아오지 않는다는 걸 알았습니다. 어쩌면 교코가 다시 자신을 잊는 건 아닐까 하는 두려움이 있어설지도. 료이치는 교코 때문에 기억술사를 찾으려고 하는데 어떤 일 때문에 자신도 무엇인가를 잊었다는 걸 깨달아요. 료이치는 자신이 기억술사한테 가까이 다가가서 기억술사가 자신의 기억을 지웠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일 있으면 겁나서 그만둘지도 모를 텐데, 료이치는 그만두지 않고 다시 기억술사를 알아봅니다. 료이치는 기억술사를 찾고 다른 사람 기억을 지우는 일을 그만두게 할 수 있을까요.

 

누구나 한번(여러 번일지도)은 괴롭고 슬픈 기억 지우고 싶다 생각할지도 모르겠습니다. 끔찍한 일을 당한 사람은 자신을 지키기 위해 기억을 바꾸기도 합니다. 한 곳에 있어도 사람마다 다르게 기억하는 일도 있군요. 기억은 정확하지 않은 것이기도 하네요. 저는 힘들어도 기억을 지우는 거 안 좋다고 생각합니다. 괴롭고 아프고 슬픈 건 싫지만. 그런 저도 가끔은 처음부터 하지 말걸 하는 생각도 해요. 현실은 지금까지 있었던 일 지우고 다시 시작할 수 없습니다. 그걸 알아서 조심하기도 하는군요. 모두 지우고 깨끗하게 다시 시작하고 싶다고 하는 사람도 있을지 모르겠지만, 똑같은 일이 이어지면 그때는 어쩌죠. 그러면 다시 지워야 할까요. 기억이 있다 해도 똑같은 잘못을 되풀이하는데 그걸 지운다고 그러지 않으리라는 보장은 어디에 있는지. 사람은 약합니다. 사람마다 느끼는 것도 다르죠. 작은 일을 크게 받아들이는 사람도 있지요(저도 그렇습니다). 사람이 약해도 이런저런 일을 겪다보면 조금씩 단단해지겠지요. 아주 힘든 때가 지나면 그게 덜할 거예요. 그 시간을 버티지 못하는 사람도 있지만. 버티지 못한다 해도 잊는 게 약은 아닙니다. 어떤 일을 잊으면 자신이 잊었다는 것도 모릅니다. 그게 더 슬플 것 같아요. 그런 사람을 바라보는 사람이 더 슬플까요. 맨 앞에서 말한 여자는 무언가를 잊었지만 슬픈 일이 있었다는 게 남아서 눈물 흘린 거겠지요. 여기 나오는 사람에서 그런 모습이 보이는 하나도 사람은 없습니다. 기억술사를 만난 걸 잊고 기억술사가 진짜 있다면 만나지 않겠다고 해요. 그걸 보고 그런 생각 더 빨리 하지 했습니다.

 

지우고 싶은 기억이 있으면 지울까를 먼저 생각했는데, 자신한테 남의 기억을 지우는 힘이 있다면 어떻게 할까도 생각해볼만 하네요. 그것도 별로 안 좋을 듯합니다. 살다보면 누구한테나 좋은 일뿐 아니라 나쁜 일도 일어나니까요. 좋은 일만 기억하는 거 별로일 것 같아요. 그때는 안 좋은 일이어도 지나고 나면 그것 때문에 자신이 달라졌다 생각할 수도 있잖아요. 기억은 한사람이 지나온 역사기도 합니다. 이렇게 생각하면 쉽게 기억을 지우고 싶다 생각하지 않겠지요.

 

 

 

희선

 

 

 


댓글(2)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2016-04-29 04:0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05-01 00:33   URL
비밀 댓글입니다.
 
시의 힘 - 절망의 시대, 시는 어떻게 인간을 구원하는가
서경식 지음, 서은혜 옮김 / 현암사 / 2015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요새 새로 나오는 책을 다 만나지 못하지만 우연히 어떤 책이 나오는지 보기도 한다. 제목을 보고 마음에 들면 어떤 책일까 조금 관심을 갖기도 하고, 그냥 넘어가기도 한다. 이건 다른 사람도 마찬가지겠지. 내가 몇해 전부터 시를 봐야 할 텐데 하는 생각을 해선지, 많은 사람이 나처럼 시에 관심을 가지게 되어선지 시를 말하는 책이 나오는 것을 보았다. 얼마 전에도 《시를 잊은 그대에게》(정재찬)을 보았다. 그 책과 이 책 좀 다르다. 이 책 제목이 《시의 힘》이어서 그 책과 비슷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먼저 했다. 이 글을 쓴 서경식이 재일교포라는 것만 알고 다른 건 몰라서 그러지 않았을까 싶다. 미술 이야기도 써서 말랑말랑한 이야기를 하리라 생각했는지도. 책은 못 봤지만 다른 책 제목은 결코 부드럽지 않은데 왜 그랬을까. 내가 시를 그런 것만 보려 해선지도 모르겠다. 변명한다면 지금은 모두와 함께 싸워야 할 커다란 무엇이 없어서다. 아니 있는데 내가 잘 못 보는 거겠지. 나는 단순하게 살지만 그게 내 삶이다. 지금은 다들 자기 살기 바쁘다.

 

우리나라는 일제강점기를 거치고 전쟁을 겪고 군사독재정치를 겪었다. 그때를 살고 글을 쓴 사람은 글로 저항하기도 했다. 학교 다닐 때 그런 시인 소설가 많이 배운 것도 같은데. 이상화, 한용운, 윤동주. 이밖에도 더 있겠지. 한용운은 창씨개명을 하지 않았다고 한다. 스님이지만 딸이 있었는데 그때 힘들었다고. 이런 이야기는 라디오 방송에서 주워들었다. 일본은 조선 사람이 창씨개명 안 할 수 없게 만들었다. 한용운 시 <님의 침묵>에서 님은 조국이라고 배운 게 떠오른다. 지금은 이 시를 다르게 볼 수도 있다. 다른 사람 시도 마찬가지겠다. 일본 도시샤 대학에 윤동주 시비가 있다는데, <서시>에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을 “모든 살아있는 것들을”이라 옮겼다 한다. 그랬다니. 비슷한 말이다 여길 수 있지만 뜻을 생각하면 차이가 난다. “모든 죽어가는 것을”은 목숨 있는 건 언젠가 죽기에 불쌍하다는 뜻 아닐까. “모든 살아있는 것들을”이라 하면 애틋한 마음이 들지 않는다. 며칠전에 본 책에서도 윤동주 시 이야기를 했는데, 여기에서도 하다니. 윤동주와 고종사촌 송몽규 두 사람이 함께였지만, 시를 남긴 윤동주가 더 잘 알려졌다. 영화 <동주>에서 윤동주는 송몽규 그림자 같다고 한다. 어떤 생각을 잠깐 했는데 그건 쓸데없다는 생각이 든다. 윤동주 자신이 무엇인가 할 수 없어 안타까웠을 테니까.

 

일제강점기 때 우리나라 사람도 일본 시인 이시카와 다쿠보쿠 시를 읽은 걸로 안다. 일본에서 자기 나라를 비난하는 글 쓰기 쉽지 않을 텐데. 그때 그런 사람이 아주 없지 않았겠지. 루쉰은 중국에서 일본으로 의학공부를 하러 갔구나. 몰랐던 거다. 일본말로도 글 잘 쓴다고 말해서, 일본에 공부하러 간 걸 몰랐을 때는 일본말 어떻게 공부했을까 했다. 루쉰 이름은 알지만 잘 모른다. 다른 사람이 쓴 글에서 루쉰은 글로 사람들을 일깨우려 애썼다고 한 말만 보았다. 일본이 우리나라를 지배하는 게 길어지자 많은 작가가 일본에 좋게 글을 썼다. 그런 일이 그때만 있었을까. 그렇지 않다. <타는 목마름으로>라는 시로 민주주의를 외친 김지하도 달라졌다. 이렇게 말하지만 자세한 건 나도 잘 모른다. 그런 말을 조금 들었을 뿐이다. 내가 시를 보기 시작했을 때 신동엽, 김수영, 신경림, 김지하, 박노해, 최영미, 정희성 시를 보았다. 정희성과 김수영 시집은 못 봤구나. 김수영은 학교 다닐 때 배워서일지도. 김남주도 있는데, 서경식은 김남주는 모르는가보다. 나도 예전에나 사회참여시를 보았지 지금은 잘 안 본다. 최영미 시 <서른, 잔치는 끝났다>는 그때 무슨 뜻인지 알고 봤을까. 그때 내가 어떻게 봤는지 생각나지 않는다. 조금은 알았다고 믿고 싶다. 최영미가 왜 《청동정원》을 썼는지 조금 알 것 같기도 하다. 그 소설 읽지도 않았는데 이런 말을 하다니. 내가 생각하는 건 내 생각일 뿐일지도.

 

글을 쓰는 사람은 역사와 사회에 관심을 갖고 그것을 써야 한다고 말한다. 그 말 틀리지 않지만 모든 사람이 그래야 할까. 그것을 더 많이 생각하고 좋아하는 사람이 쓰면 안 될까. 이런 말이나 하다니. 내가 글을 전문으로 쓰는 사람은 아니지만, 저런 말 때문에 나는 안 되겠구나 한다. 그것 때문에 부끄럽기도 하고. 아주 모르는 척하는 건 아닌데. 모르는 척하는 것보다 아예 모르는 게 더 큰 죄일지도. 개인이 없이 나라가 있을까. 갑자기 다른 말로 넘어갔다. 서경식은 제국주의가 다시 되풀이될 수 있다는 것을 걱정한다. 그건 일본만의 문제는 아니다. 우리나라도 그런 거 있다. ‘나라를 위해’ 이런 거. 그렇게 된 건 일본한테 지배받은 영향은 아닐까 싶기도 하다. 그때는 일본이었고 지금은 한국이 된 거다. 나는 어디에도 들어가지 않는다는 생각이 든다. 그게 아쉽기도 하고 마음 편하기도 하다(어디는 어딜까, 사람은 어딘가에 들어가고 싶어한다. 나는 그런 게 없다는 거다. 한쪽만 생각하고 싶지 않기도 하다. 어중간해서 더 안 좋아 보일지도). 서경식은 일본에서 조선사람으로 살기 힘들었겠다. 우리나라에 오면 일본 사람이라 본 사람도 있겠지. 어디에도 들어가지 못하는 처지 다는 아니지만 조금은 안다. 그런 곳에 있기에 다른 사람은 볼 수 없는 것을 보기도 하겠지(나는 그렇게 못하지만). 서경식이 교포기 때문에 한국에 좋게 말하는 게 아니고, 객관성을 가지고 일본을 보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일본이 일으킨 전쟁이나 후쿠시마 사고. 여러가지 생각하면 내가 일본에서 태어나지 않아서 다행이다. 만약 내가 일본사람이면 어땠을지. 일본 정부 잘못을 비판했을까. 상상하기 어렵다.

 

서경식은 개인에서, 나라 그리고 세계를 생각해야 한다고 말한다. 맞는 말이다. 지금은 자기 나라 이익만 생각하면 안 된다. 지구에서 사는 사람이라 하는 게 좋겠다. 같은 잘못을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 그 일과 제대로 마주해야 한다. 전쟁 이야기나 유대인 학살 이야기가 자꾸 나오는 건 그래서겠지. 그것 말고 우리가 모르는 일도 많을 거다. 글을 쓸 수 없어서 알리지 못한 일도 많겠지. 자신이 보고 듣고 느끼고 생각한 것을 글로 쓸 수 있다는 것은 좋은 일이다. 시뿐 아니라 글에는 사람 마음을 움직이게 하는 힘이 있다. 남을 속이는 글은 안 되겠지. 서경식하고 처지가 다른 우리는 무엇을 써야 할지. 아픈 사람을 보고도 못 본 척하지 않기, 이것밖에 생각나지 않는다. 십년도 더 전에 《서준식 옥중서한 1971-1988》을 보았는데 서준식이 서경식 형이라는 거 이제야 알았다.

 

 

 

희선

 

 

 

 

☆―

 

‘문학’이 저항의 무기로 유효한지 의심스럽다. 내가 쓰는 것을 ‘문학’이라 할 수 있을지는 더욱 의심스럽다. 그런데도 이런 책을 내려는 까닭은 본문에서 루쉰이 한 말을 빌렸듯, “걸어가면 길이 되기” 때문이다. 아직 걸을 수 있는 동안은 걷는 수밖에.  (277쪽)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