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부를 하고 글을 쓰면 더 좋을 텐데, 그냥 책을 읽고 그것을 쓰는구나.

 

 

 

 

 

공부로 자신의 세계를 넓히자

 

  공부할 권리

  정여울

  민음사  2016년 03월 10일

 

 

 

 

 

 

 

 

 

 

 

 

 

공부라고 하면 학교 다닐 때 하는 것을 많이 떠올리겠다. 난 이 책 제목을 봤을 때 무슨 생각을 했던가. 별 생각 안 한 것 같다. 책을 다 보고 나니 공부할 권리보다 공부할 자유가 더 낫겠다 싶다. 정여울이 말하는 공부는 누가 하라고 하거나 꼭 해야 하는 건 아니고, 못하게 하는 것은 아니니까. 지금은 그렇지만 옛날에는 못하게 했을지도. 요즘은 공부하라고 한다, 평생 공부. 조선시대 선비는 평생 공부해야 한다고 했겠다. 학교나 부모는 좋은 대학에 가고 좋은 일자리를 얻고 거기에서 더 나아가 좋은 배우자를 만나려면 공부해야 한다고 말한다. 지금은 대학을 나와도 일자리를 구하는 건 쉽지 않다. 오랫동안 한 곳에서 일할 수 없고 비정규직이나 계약직이 훨씬 많다. 비정규직이라도 구하는 사람이 있지만 그것도 못하는 사람이 있겠지. 사는 것도 힘든데 무슨 공부 할지도 모르겠다.

 

지금 힘들다고 하는 사람이 많은데, 이건 늘 그렇지 않을까 싶다. 내가 책을 읽고 어떤 힘을 얻은 경험은 많지 않지만 정여울은 문학과 철학 역사, 심리학과 신화학을 공부하고 힘을 얻었다. 그것을 공부할 때 신났다고 했다. 그 말 보고 난 뭘 할 때 신날까 했는데, 신이 나서 한 게 별로 없는 것 같다. 책을 읽을 때는 즐겁지만, 어떻게 쓰지 하는 생각에 우울해지기도 한다. 책 읽는 것을 제대로 즐기지 못하다니. 난 인문학 책은 별로 못 읽었다. 거기에도 좀 관심을 가져야겠다 생각했는데. 아주 관심 없는 것보다는 나을까. 회사에서 요즘은 인문학을 하라고 한다. 이것도 그저 좋은 일자리를 구하려고 하는 것 같기도 하다. 그런 걸 아는 사람을 바라기도 하니까. 인문학을 잘 아는 건 아니지만, 이건 지식만 얻으려고 하는 건 아닌 것 같다. 지금까지 몰랐던 것을 알기도 하겠지만, 생각하고 실천해야 한다. 실천하는 건 쉽지 않지만, 큰 일보다 작은 일이라도 하면 괜찮지 않을까 싶다. 무슨 일이든 작은 것부터니까. “한 사람의 힘이 정치권력만을 가리키는 것은 아닙니다. 히틀러를 비롯한 부수는 독재자들이 지닌 한 사람의 힘이 아니라, 자신의 행동을 뉘우치는 한 사람의 꾸밈없는 양심이야말로 우리 시대에 필요한 한 사람의 힘입니다.” (180쪽) 한 사람이 양심을 지키면, 두 사람 세 사람…… 갈수록 늘어나지 않을까. 한 사람 힘은 작지만 크다.

 

이런 말하는 건 좀 창피하지만, 왜 그런지 모르겠지만 난 자존감이 낮은 편이다. 어렸을 때는 자신없다는 말을 했고, 지금도 다르지 않다. 자신과 자존감, 다를까. 아주 다르지 않다고 본다. 자신이 없어서 그런 건지 마음이 약해서 그런 건지 다른 사람은 아무렇지도 않아할 말에 난 마음을 잘 다친다. 그걸 하나하나 말하지는 않는다. 시간이 가기를 바랄 뿐이다. 정여울은 자신이 좋아하는 공부를 해서 다친 자신의 마음을 낫게 했다고 한다. 살면서 마음 다치지 않는 사람은 거의 없겠지. 공부와 책읽기는 다를까. 누군가는 책읽기는 공부가 아니고 일상이어야 한다던데. 공부는 책으로만 하는 게 아니어서 그런 말을 한 걸지도. 뭔가 알려면 책을 보아야 한다. 우리보다 먼저 공부를 한 사람은 그것을 책으로 썼다. 나한테는 책읽기가 공부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아주 열심히 하는 건 아니지만. 나도 책을 읽고 마음을 단단하게 다지고 싶다. 만나는 책을 좀더 넓혀야 할 텐데. 어떤 책을 보든 생각을 하고 이렇게 쓰면 좀 괜찮겠지. 한쪽이 아닌 여러 쪽에서 봐야 한다. 그걸로 자신을 가질지 나도 잘 모르겠지만, 책을 볼 때는 그럴 수 있을지도. 보이지 않는 곳에서 자신을 지켜주는 사람은 자기 단의 다른 자신이라 한다. 무의식인가. 예전에 만난 《헤세로 가는 길》에서도 카를 구스타프 융이나 무의식을 말했다.

 

지금 세상은 물질은 넘쳐나지만 정신은 더 가난해졌다. 우리나라는 일본 지배에서 벗어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전쟁을 겪었다. 전쟁이 끝난 뒤 사람들은 경제에 초점을 맞추고 지금에 이르렀다. 여전히 경제를 살려야 한다 말하지만, 한쪽에서는 마음을 쉬게 하려 한다. ‘피로사회’라는 말이 생각나는구나. 그 책은 읽지 않았지만. 공부가 사는 데 도움은 안 될지도 모른다. 이건 책읽긴가. 공부를 하면(책을 읽으면) 세상을 바로 보려 하고 넓게 보려 한다. 자신의 세계도 넓어지겠지. 무언가에 휩쓸리기 쉬운 세상에서 자신을 지키려면 공부하고 생각해야 한다. 스스로를 돕고 남도 돕는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지.

 

 

 

 

☆―

 

존엄의 근거를 바깥에서 찾으려 한다면 자존감은 쉽게 바깥 형편에 따라 비틀거리고 상처입을 수밖에 없지요. 먼저 내가 나를 도울 수 있는가? 이렇게 스스로한테 묻고, 스스로를 도울 수 있는 사람으로 거듭날 때 우리는 남한테 도움을 줄 수 있는 사람, 아니 나는 가진 것이 충분하니 반드시 남을 도와야만 하는 사람이라는 행복한 책임감을 느낄 수 있습니다.  (347쪽)

 

 

나만의 속도, 나만의 깊이를 찾아 떠나는 마음 여행, 누구도 나를 앞지를 수 없는 삶의 방식이 있다. 천천히 걷는 것이다.  (-헨리 데이비드 소로, 《월든》에서, 82쪽)

 

 

 

 

 

    

 

                     

 

                      

 

 

 

 

 

조선시대에도 산문을 썼다

 

  문장의 품격

  안대회

  휴머니스트  2016년 05월 23일

 

 

 

 

 

 

 

 

 

 

 

 

 

조선시대에 글을 쓴 건 남자고 양반이다. 언젠가 조선시대에 아이를 기른 일기를 할아버지가 썼다는 말을 들었다. 손자를 잘 키우려고 했지만 말을 잘 안 들었다고 한 것 같다. 지금은 엄마가 아이를 기를 때 일을 잊지 않으려고 일기를 쓴다. 모두가 쓰는 건 아니겠지만 부지런한 사람은 쓰겠지. 조선시대에 할아버지가 손자 기르는 일기를 쓴 건 어쩔 수 없는 일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그때는 여자가 책을 읽고 글을 쓰는 걸 좋게 여기지 않았으니까. 이것도 모두 다 그런 건 아닐지도 모르겠다. 허난설헌은 결혼하기 전에는 글공부를 하고 시를 썼다. 결혼하고도 썼지만, 죽을 때 자신이 쓴 걸 모두 태우라고 했다. 그래도 조금 남아서 지금까지 전해지는 거겠지. 그때 글을 쓴 여성이 허난설헌 말고 더 있을 텐데, 내가 아는 사람이 별로 없다. 조선시대 그림을 보면서도 여성 화가가 신사임당만 나와서 아쉬웠는데. 이 책을 볼 때도 글을 쓴 여성이 더 많았다면 좋았을 텐데 했다. 편지는 많이 썼을지도 모를 텐데. 남은 게 거의 없어서 우리가 모르는 건지도.

 

지금까지 난 조선시대 사람이 어떤 글을 썼다고 생각했을까. 이런 생각을 하니, 내가 조선시대 사람이 쓴 글을 본 적이 없다는 걸 알았다. 소설에 나오는 건 봤다. 정약용과 황상 이야기가 담긴 책에서는 시를 보았다. 그것밖에 없다. 그것 때문인지 모르겠지만 조선시대 사람은 시를 쓰고 그림을 그렸다고 생각했다. 난 한글로만 글을 써서 한자로 산문이나 소설을 어떻게 쓰는지 모른다. 세종이 일찍이 한글을 만들었지만, 한글로 글 쓰는 사람은 얼마 없었다. 거의 한자로 글을 썼겠지. 중국하고는 좀 다른 식으로 썼겠지만 한자로도 산문이나 소설 쓸 수 있겠다(한문소설이 있다는 건 안다). 양반은 어렸을 때부터 글 공부를 한다. 과거를 보려고 하는 공부기는 해도 여러 책을 보다보면 좋아하는 게 생기고, 뭔가 쓰고 싶을 거다. 사람은 책을 읽으면 글이 쓰고 싶어지니까. 시를 많이 썼겠지만 산문도 썼겠지.

 

여기에서는 일곱 사람 글로 이야기를 풀어간다. 일곱 사람은 허균, 이용후, 박지원, 이덕무, 박제가, 이옥, 정약용이다. 이용휴와 이옥은 처음 듣는 이름이다. 두 사람은 공통점이 있다. 전업작가였다는 거. 조선시대에도 전업자가가 있었을까. 그런 말이 있어서 썼지만, 조선시대에 전업작가로 사는 건 지금보다 힘들었을 것 같다. 책을 읽는 사람은 한정되어 있으니까. 지금은 누구나 책을 읽을 수 있어서 다행이다. 이용휴와 이옥이 놓인 현실이 책을 읽고 글만 쓰게 했을지도 모르겠다. 나머지 다섯 사람도 과거를 보고 벼슬을 했지만 그렇게 잘되지는 않았다. 허균은 사회 부조리에 통곡하고 신분차별에 화를 냈다. 글에도 그런 마음을 담았다. 일곱 사람은 그 시대에서 삐져나온 못 같지 않았을까 싶기도 하다. 정약용은 정조가 죽은 다음에 유배를 떠났지만. 정약용은 유배 간 곳에서 사람을 가르치고 글도 많이 썼다. 유배가 아주 나쁜 건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스스로 벼슬자리를 물러났다면 덜 억울했겠지만.

 

오래전 글이지만 지금 읽어도 괜찮은 건 시대를 앞선 거겠지. 그건 언제까지고 이어질 거다. 일곱 사람은 그런 식으로 글을 쓴 듯하다. 참신하고 독특하게 자기 목소리를 내려 했다. <춘향가>는 신분을 넘은 사랑이라 하는데(다른 해석도 있겠지만), 자유연애도 말하는 게 아닌가 싶다. 신분이 다른 사람이 만났지만 여자가 죽고 남자도 일찍 죽어서 안타까운 이야기 <심생의 사랑>을 보니, 신분이 다른 사람이 만나는 것뿐 아니라 자유연애를 바라는 마음이 담긴 것 같기도 했다. 조선시대에도 자유연애를 하거나 바란 사람 있지 않았을까. 이옥이 쓴 산문 몇 편은 소설처럼 보이기도 한다.

 

글이 어떻다 말할 수 있다면 좋겠지만 그건 못하겠다. 글과 그 사람이 어긋나지 않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그렇게 하기는 어렵다. 지금은 글과 그 사람이 똑같아야 한다고 말하지 않고 글과 사람을 따로따로 보기도 한다. 산문은 좀 다를지도 모르겠다. 자기 안을 잘 들여다보거나 바깥을 보고 다시 자신으로 돌아오기도 하니까. 어떤 글이든 안 쓰는 것보다 쓰는 게 나을지도 모르겠다. 자신이 쓴대로 살지 못해도 그게 무의식에 남아서 때때로 자신을 일깨울거다.

 

 

 

희선

 

 

 

 

☆―

 

종일토록 망련된 말을 하지 말고

종신토록 망령된 생각을 하지 말자!

남들은 대장부라고 안 해도

나는 그를 대장부라고 하리라!

 

마음에 조바심과 망령됨을 갖지 말자!

오래 지나면 꽃이 피리라.

입에 비루하고 속된 것을 올리지 말자!

오래 지나면 향기가 피어나리라.

 

<서쪽 문설주에 쓰다>, 이덕무 (44쪽)

 

 

“마음이 한가로우면 몸은 저절로 한가롭다.”  (147쪽  이덕무)

 

 

큰 사귐은 꼭 얼굴을 봐야 하는 것도 아니고, 깊은 우정은 꼭 가깝게 지내야 하는 것이 아닙니다. 황면지(黃勉之)는 오중(吳中) 포의일 뿐이고, 이헌길(李獻吉)은 문장의 대가에다 지위까지 높아서 그때 세상 귀인으로 거드름을 피울 수 있었습니다. 그래도 천 리 멀리 편지를 보내 결국 마음을 나누는 사이가 되었다 하니 예로부터 드문 성대한 행동이라 하겠습니다.  (163쪽  이덕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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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The Elegy of Whiteness

  한강   차미혜 사진

  난다  2016년 05월 25일

 

 

 

 

 

 

 

 

 

 

 

 

 

 

하얀 개

 

 

 

집을 나가 왼쪽으로 꺾어서 잠깐 걸으면 오른쪽에 대중목욕탕이 있고 그 옆에는 집이 몇 채 있다. 대중목욕탕을 지나고 첫번째 집을 지나가면서 대문 밑으로 얼굴 내민 하얀 개를 보곤 했다. 개를 싫어하지 않지만 짖으면 무섭다. 그 하얀 개는 짖지 않았다. 그저 대문 밑으로 바깥을 보고 있었다. 그렇게라도 바깥이 보고 싶었던 건지도. 오랫동안 하얀 개를 보았는데 언젠가부터 보이지 않았다. 길을 지날 때만 잠깐 만난 개가 보이지 않아도 쓸쓸한데 오랫동안 함께 살던 개가 세상을 떠나면 더 슬프겠다.

 

 

 

 

 

하얀 밤

 

 

 

해가 지면 땅에는 어스름이 내리고 세상은 조금씩 어두워진다.

 

어느 저녁, 해가 졌는데도 창 밖이 캄캄하지 않고 밝았다. 아니 하얬다. 이게 말로만 듣던 하얀 밤인가 하는 생각을 했지만, 그 하얀색은 오래 가지 않았다. 아주 짧았던 건 아니지만, 조금 뒤 본래 밤으로 돌아왔다. 하얀 밤이었던 날, 세상에 무슨 일이라도 일어나는 건 아닐까 했다. 날마다 찾아오는 밤과 아침이지만, 가끔 다른 얼굴을 하고 찾아오기도 한다. 그 얼굴을 볼 수 있는 것도 가끔이겠지.

 

 

 

 

 

하얀 달

 

 

 

어릴 때 어두운 밤을 무서워했던가. 밤이 오는 걸 아쉬워했던 것 같기도 하다. 밤이 오면 자야 했으니까. 어렸을 때 내가 무엇을 했는지 잘 생각나지 않지만, 밤에 자고 싶지 않았던 것 같다. 그때는 달빛을 느낄 수 있었다. 어두운 밤에 보름달이 뜨면 그 빛만으로도 밤길이 무섭지 않았다. 보름달이 떠서 밤길을 걸은 건 아니고, 밤길을 걷다 다른 날과 다르게 밝아서 ‘오늘은 보름달이 떴나보다’ 했다. 난 그 밤에 어딜 간 거지. 먼 곳에 간 게  아니고 잠깐 밖에 나갔다 온 걸지도.

 

밝은 낮과 다르지만 보름달이 뜬 밤에는 모든 게 잘 보였다. 해는 사물에 빛을 쏘아 흩어지게 하지만, 달은 사물을 빛으로 감싼다. 달이 빛나는 건 해가 있기 때문이구나.

 

 

 

 

 

하얀 비둘기

 

 

 

자주 본 건 아니지만, 무슨 행사가 있을 때면 하얀 비둘기를 많이 날렸다. 하얀 비둘기는 평화를 상징한다지. 그 하얀 비둘기는 어디에 있던 걸까. 평소에 보는 비둘기는 거의 잿빛이다. 그런 비둘기는 공원에서 많이 본 것 같은데. 누군가는 아주 많은 비둘기를 하늘 쥐라고 했다. 살이 많이 찐 건 닭둘기라고 하던가. 하얀 비둘기는 잿빛 비둘기보다 드물어서 일부러 그렇게 만든 건지, 따로 하얀 비둘기만 모아서 기르고 행사를 치렀는지도.

 

마술사는 하얀 비둘기로 마술을 부린다.

 

오래전에는 비둘기를 이용해서 소식을 전하기도 했다. 지금은 사라진 전서구. 하루키는 1980년대에 전서구를 보았다니. 그게 그때도 있었나보다.

 

 

 

 

 

하얀 나비

 

 

 

사람이 죽으면 하얀 나비가 된다고 한다. 죽은 사람 혼이 살짝 하얀 나비 몸을 빌려서 보고 싶은 사람을 만나러 오는 걸지도. 죽은 사람이 산 사람을 생각하는 마음보다 산 사람이 죽은 사람을 생각하는 마음이 더 큰 것 같다. 하얀 나비를 죽은 사람 혼이라고 하는 걸 보니. 아이는 그 말을 곧이곧대로 믿고 엄마 무덤에 날아온 하얀 나비를 엄마로 믿었다. 엄마 품이 사무치게 그리운 날 아이는 하얀 나비를 보고 ‘엄마, 엄마’ 외치다 비탈에서 미끄러지고 정신을 잃었다. 아이는 꿈속에서 하얀 나비가 엄마로 바뀌는 것을 보았다.

 

 

 

 

 

흰 눈 사이로

 

 

 

남자는 오랫동안 여자를 찾아다녔다. 여자와 보낸 시간은 짧았지만 그 어느 때보다 따스하고 편안했다. 남자는 그런 날이 오래오래 이어지리라 여겼다. 여자를 만난 겨울이 가고 많은 것이 깨어나는 봄이 왔다. 죽은 것처럼 보이는 것도 봄이면 다시 살아나는데, 그것과 반대로 여자는 시들어갔다. 얼마 뒤 그 날이 찾아왔다. 남자가 밖에 나갔다 돌아오니 여자가 보이지 않았다. 단지 여자가 자주 앉던 흔들의자 밑에 작은 물웅덩이가 있었다.

 

남자는 물웅덩이가 공기 속으로 사라질 때까지 그대로 두었다. 물웅덩이가 모두 사라진 날 남자는 여자를 찾기로 결심했다. 많은 사람을 만났지만 여자를 아는 사람은 없었다. 그래도 남자는 그만두지 않았다.

 

겨울, 큰눈이 내려 길도 없는 산 속으로 남자는 들어갔다. 앞이 보이지 않았지만 남자는 산 속 깊은 곳에 여자가 있다고 생각했다. 남자가 산 속으로 걸으면서 찍은 발자국은 곧 흰 눈에 덮였다. 남자는 여자를 만났을까.

 

 

 

희선

 

 

 

 

☆―

 

삶은 누구에게도 특별히 호의를 갖고 있지 않다, 그 사실을 알면서 걸을 때 내리는 짖눈깨비. 이마를, 눈썹을, 뺨을 물큰하게 적시는 진눈깨비. 모든 것은 지나간다. 그 사실을 기억하고 걸을 때, 안간힘을 다해 움켜쥐어온 모든 게 기어이 사라지리란 걸 알면서 걸을 때 내리는 진눈깨비. 비도 아니고 눈도 아닌 것. 얼음도 아니고 물도 아닌 것. 눈을 감아도 떠도, 걸음을 멈춰도 더 빨리해도 눈썹을 적시는, 물큰하게 이마를 적시는 진눈깨비.  (<진눈깨비>, 5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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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카르페 디엠

  호라티우스   김남우 옮김

  민음사  2016년 05월 19일

 

 

 

 

 

 

 

 

 

 

 

 

 

오래전부터 사람은 글을 썼습니다. 언제부턴지 정확하게 모릅니다. 글을 쓰기 전에는 그림을 그렸군요. 문자도 사람이 발명한 거네요. 여기저기 옮겨 다니고 살 때는 기록을 해야겠다 생각하지 않았겠지요(그때 그림을 그린 걸까요). 한곳에 머물고 농사를 짓고 살게 된 것을 농업혁명이라고 하더군요. 그런 책 많이 못 보았는데 조금 본 게 도움이 되는군요. 잘 알지 못해도 새로 아는 건 기억해두면 나중에 아는 척할 수 있겠습니다. 요새 소설만 죽 만났는데, 다른 쪽 책도 만나봐야겠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잠시 다른 말로 샜습니다. 전 기원전 사람이 쓴 글은 거의 못 봤습니다. 그때 글이 지금까지 제대로 남았는지 그것도 모르겠네요. 다는 아니더라도 남아서 지금 사람이 볼 수 있는 거겠지요. 고대 그리스 철학자가 생각나는군요. 이런저런 전쟁 때문에 책이 타버린 일도 떠오르는군요. 타버린 것도 있지만 일부러 태운 것도 많겠지요. 살아남은 건 운이 좋아서였을까요, 우리가 알 수 없는 힘이 움직인 걸까요. 이것도 조금 쓸데없는 말이네요.

 

이 책 제목 많이 들어본 말이지요. <죽은 시인의 사회>에서 키팅 선생님이 아이들한테 한 말입니다. 영화도 보고 책도 보았는데 자세한 건 생각나지 않습니다. 그래도 이 말 ‘카르페 디엠(오늘을 즐겨라)’은 잊지 않았어요. 이 말했을 때 호라티우스 이야기도 했는지. 키팅 선생님은 시 이야기도 하잖아요. 그 말을 듣고 몇몇 아이가 밤에 모여 시를 읽지요. 그때 읽은 것도 오래전 시가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저 영화 나온 지 오래됐는데, 그때나 지금이나 학교 비슷하지요. 제가 학교 다닐 때랑 지금 좀 달라졌을지도 모르겠지만 책을 보면 그렇게 많이 다르지 않더군요. 예전보다 지금 더 안 좋은 것 같기도 합니다. 누군가를 심하게 괴롭히는 아이도 있잖아요. ‘오늘을 즐겨라’ 하는 말은 학생한테만 할 수 있는 말은 아니군요. 지금을 사는 사람 모두한테 해야 하지요. 많은 사람이 나중에 잘살려고 지금을 힘들게 살기도 하잖아요. 그렇다고 흥청망청 살라는 말은 아니예요. 알지요. 지금을 소중하게 여기고 힘껏 살라는 거겠지요. 오늘은 오늘밖에 없습니다. 이거 알아도 늘 잘 지내기는 어렵습니다. 자신이 좋아하는 걸 하는 시간이 잠깐이라도 있다면 괜찮겠지요.

 

 

 

힘겨운 일에도 평상심을 굳게

지키고, 감당치못할 즐거움은

좋다만 하지 말고 마음을 다스려

절제하라. 필멸의 델리우스!

 

<Ⅱ3 힘겨운 일에도 평삼심을>에서, 87쪽

 

 

 

포스투무스, 포스투무스, 달아나듯

세월은 흘러 지나가고, 신께 빌어도

닥쳐 올 주름과 노년, 막을 수 없는

죽음은 기다려주지 않는다.

 

<Ⅱ14 포스투무스, 포스투무스>에서, 110쪽

 

 

 

옛날 사람이 먹고 살려고 한 일에는 무엇이 있을까 싶기도 합니다. 호라티우스는 가난해서 시를 썼다고 하네요. 시가 돈이 되었다는 말일까요. 옮긴이는 가난을 돈이 없는 것만 뜻하지 않는다고 하더군요. 마음(정신)을 나타내는 걸지도. 이런 시는 서정시일까요. 호라티우스는 시에는 역사와 신화에 나오는 사람이 나옵니다. 제가 그걸 잘 알면 좋겠지만 아는 게 별로 없습니다. 그런 시는 더 상상해서 읽어야 할 텐데 그러지 못했습니다. 그런 것만 잇는 건 아니예요. 호라티우스 자신의 이야기나 친구 이야기도 조금 있습니다. 언젠가 사람은 죽는다는 말도 합니다. 그때는 사람이 더 빨리 죽었군요. 오래 산 사람이 아주 없는 건 아닐 테지만. ‘오늘을 즐겨라’ 하는 말은 그래서 나온 거겠네요. 호라티우스는 검소하게 사는 걸 좋아한 것 같습니다. 가진 게 없다 해도 자신이 좋아하는 시 쓰는 일을 해서 괜찮았겠지요.

 

지금 세상은 복잡하고 빠르게 흘러갑니다. 그런 세상을 따라잡기 힘드네요. 아니 꼭 따라잡지 않아도 괜찮군요. 한가지에만 초점을 맞추지 않는다면 훨씬 좋을 듯합니다. 알아도 그렇게 하기 어려울지도 모르겠네요. 그러면 잠시 생각해보는 건 어떨까요. 생각하는 것도 좋고, 잠시 멈춰서서 스쳐지나는 사람을 보거나 나무 위에 잠시 앉았다 가는 바람을 보는 것도 괜찮겠네요. 파란하늘을 떠다니는 흰구름을 보는 것도 좋겠지요. 시를 만나는 게 그런 것과 비슷할 것 같습니다.

 

 

 

 

 

 

 

 

내일은 없다

 

 

 

오늘은 저축하지 않고

살아야 한다

‘언젠가’ ‘다음에’가 아닌

지금 하자

 

 

 

희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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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으로서의 소설가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양윤옥 옮김 / 현대문학 / 201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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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해 전(2013) 무라카미 하루키 소설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가 순례를 떠난 해》가 일본에서 나온 해와 같은 해에 한국에도 나왔다. 조금 차이 날지 모르겠지만 거의 같은 때 나왔다. 그런 일이 처음은 아니겠지만, 말이 많았던 것 같기도 하다. 난 기사는 못 봤는데 돈을 많이 주고 한국말로 옮겼다고 들었다. 인센가. 이 책도 일본에서 나오고 한해가 지나지 않았다. 기회가 오면 한번 보고 싶다 생각했는데 신기하게도 기회가 찾아왔다. 이런 일이 처음은 아니구나. 다른 일은 별로 잘되지 않지만, 책을 만나는 건 가끔 뜻대로 된다. 이것도 가끔이고 우연이다. 이런 일은 나만 겪는 게 아니다. 누구나 우연히 자신이 바라는 일 일어나기도 할 거다. 하루키한테도 그런 일이 있었다. 은행에 갚아야 할 돈을 마련하지 못했는데 길에서 꼬깃꼬깃한 돈을 주웠다. 신기하게도 은행에 갚아야 하는 돈과 같았다. 그 말 다른 데서 본 것 같다. 그것만 그런 게 아니고 다른 이야기도 한번쯤 본 것 같았다. 이걸 읽고 느낀 건, 그동안 내가 하루키 산문을 많이 만났나보다다. 하루키 글 아주 좋아하지도 싫어하지도 않는다. 자주 만난 건 좋아하는 쪽에 가까운 건가, 그럴지도. 처음 하는 말은 아니지만, 내가 처음 만난 일본 작가가 하루키다. 이것도 인연이라면 인연일지도.

 

많은 사람이 알겠지만 하루키는 대학에 다니다 결혼하고 회사에 다니는 건 싫어서 재즈 카페를 했다. 이런 걸 보면 하루키는 마음먹으면 잘한다는 느낌이 든다. 아니 좋아하는 걸 해선가. 재즈 카페를 한 건 음악을 들을 수 있어서였다. 그곳에 오는 사람에는 좋은 사람도 있고 별로 안 보고 싶은 사람도 있었다. 그렇다 해도 하루키는 사람 만나는 거 좋아하는 것 같다. 사람 관찰하는 걸 좋아하는 것도 있겠다. 학교 다닐 때 큰일을 겪거나 부모한테 문제도 없었다. 하루키가 공부하는 걸 즐기지 않았지만, 좋아하는 책을 읽고 음악을 듣고 자랐다. 부모는 하루키한테 공부 잘해라 하는 말은 거의 하지 않은 듯하다. 하루키는 그런 말 들었겠지만 잘 생각나지 않는다고 했다. 소설 쓴다고 해서 뭔가 남다를 일을 겪는 건 아니다. 어떤 아픔을 가진 사람이 그걸 말하려 하기도 하지만. 작가는 자기 둘레를 잘 보고 거기에서 이야기를 만들어 낸다. 그건 자신만 아는 것이기도 하고 남이 마음 쓰지 않는 것이기도 하겠지. 다 알지만 잊은 것도 말하겠다.

 

스물아홉에 하루키는 야구 경기장에서 소설을 써 봐야겠다 생각하고 만년필과 원고지를 샀다. 만년필이랑 원고지 없어도 글은 쓸 수 있는데. 거의 좋은 연장을 마련하고 그것을 제대로 못 쓰기도 하는데, 하루키는 여섯달 동안 썼다. 처음 쓴 건 재미없었다고 한다. 난 안 되나, 하고 그만두지 않고 타자기를 꺼내서 영어로 조금씩 썼다. 그런 식으로 자기만의 문체를 만들었다고 한다. 오에 겐자부로도 자기 문체를 만들려고 영시나 영어 소설을 읽었다던데. 또 영어구나, 영어라는 것일 뿐이지 자신이 늘 쓰는 말이 아닌 것으로 썼다고 말하려는 거겠지. 하루키 소설은 영어로 옮기기 쉽게 쓴다는 말은 일본 사람이 한 말이었다. 하루키가 일부러 그렇게 쓴 건 아니었다. 이건 새롭게 알았다고 해야겠다. 하루키가 영어로 쓴 것을 일본말로 옮기고 고쳐 쓴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는 《군조》 신인상을 받았다. 그때 하루키는 앞으로 자신이 잘되리라 생각했다. 이건 시간이 지났기 때문에 할 수 있는 말일 거다. 신인상 받고 저런 말 했다면 욕 먹었겠지. 어쩌면 저렇게 생각해서 지금 하루키가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 사람은 자신이 생각하면 그렇게 되려고 애쓰기도 한다. 《군조》 신인상을 받아서 소설가 무라카미 하루키가 있는 거다. 상을 못 받았다면 소설가로 살지 않았을 거다 했다. 그때가 하루키한테 나타난 갈림길일지도. 다음은 외국에서 살고 소설 쓴 거겠다. 그전에도 있었다. 《양을 둘러싼 모험》을 쓰려 한 때.

 

소설가는 오랫동안 소설을 써야 소설 쓰기를 말할 수 있을까, 몇번 써 보고도 말할 수 있을까. 그건 마음먹고 말할 수 있는 건 아닐지도. 자신이 어떻게 소설을 썼는지 하나하나 생각하다보면, 자신이 그렇게 썼구나 하는 걸 알겠지. 그건 좀 써 봐야 뒤돌아볼 수 있겠다. 하루키도 시간이 흐른 다음에 이런 글을 썼다. 한번 정리해 보고 싶었던 거겠지. 정리했다고 해서 이게 끝은 아니다. 하루키는 지금도 자신이 발전하고 있다고 말한다. 소설을 써서 그런 걸까. 많은 사람이 나이를 먹으면 ‘이제와서 뭐 하나’ 한다. 이런 생각은 어릴 때도 할지도. 나이를 먹으면 많은 게 예전과 다를지 몰라도 마음은 다르지 않을 것 같다(난 아직도 철없는데). 난 하루키가 소설을 쓰려고 달리기를 한 거 잘했다 생각한다. 달리기를 할 때 기분은 앞으로도 모를 테지만. 난 걷기 쪽이다. 날마다 걷는 건 아니지만. 학교 다닐 때도 지금도 어디 가려고 걷는다. 단지 걸으려고 걸은 적은 별로 없다. 달리기는 못해도 날마다 걸어볼까 하는 생각을 잠깐 했다. 걷는다고 이런저런 게 생각날지 알 수 없지만. 그래도 걸으면 가끔 좋은 생각이 떠오르기도 한다.

 

이 세상에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하고 사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 지금은 예전보다 많은 것 같다. 소설 쓰기는 하루키가 좋아하는 거다. 하루키는 소설을 쓸 수 없어서 괴로운 적이 없었다고 한다. 하루키는 소설을 쓰고 싶을 때만 썼다. 다른 때는 영어를 일본말로 옮기거나 산문을 썼다. 언젠가도 산문을 보고 하루키 산문 재미있네 한 적 있는데, 이 책 볼 때도 그랬다. 하루키가 웃기려고 한 말은 아닐 테지만, 웃음이 좀 낫다. 내가 이상한가. 하루키는 친한 사람한테는 재미있는 면을 조금 보여줄지도. 글로만 그럴까. 난 글로만 말한다. 글 재미있게 못 쓰지만 실제 만나도 재미없다. 말 자체를 안 한다. 소설 쓰는 사람은 사람 만나는 거 좋아하지 않아도 자신이 좋아하는 사람 만나는 건 좋아하지 않을까 싶다. 그것보다 자신이 쓰는 소설 속 사람 만나기를 좋아할까.

 

다른 사람이 어떻게 글을 쓰는지 알아도 그것대로 쓰는 건 어렵다. 글쓰기도 사람마다 다르다. 자기만의 방법을 찾아야 한다. 그걸 찾은 사람은 작가(소설가)가 되는 건지도. 하루키는 그걸 찾고 지금도 쓴다. 자신을 믿고 자신의 생각을 밀고 나가기도 한다. 하루키는 그런 게 있어서 좋겠다. 난 늘 자신없는데. 하루키 말하다 ‘난 어떤데’ 하는 말을 하다니. 책을 보면 자기 생각도 하지 않는가. 그런 건 자기 마음속에 담아두어야 하는 것일지도. 사람은 다 자신으로 살아야 한다. 다른 사람은 될 수 없다. 남을 보면 자신을 알게 되기도 한다. 소설을 보는 것도 자신을 찾고 싶은 마음에설까. 하루키 소설 조금 읽기는 했지만 잘 못 읽었다. 그런 거 다시 보기도 해야 할 텐데. 이 책을 봐서 이렇게 생각하는 거구나. 난 언제나 우연이 찾아오기를 바라니까. 이런 거 별로 안 좋을지도 모르겠다. 난 앞으로도 그렇게 살 것 같다. 조금 애쓰고 우연이 찾아오길. 나는 나다. 하루키가 아프지 않고 소설 오래 쓰기를 바란다.

 

 

 

희선

 

 

 

 

☆―

 

첫 소설을 쓸 때 느꼈던, 문장을 만드는 일의 ‘기분 좋음’ ‘즐거움’은 지금도 여전합니다. (……) ‘자, 이제부터 뭘 써 볼까’ 하고 생각을 굴립니다. 그때는 정말로 행복합니다. 솔직히 말해서, 뭔가 써내는 것을 괴로움이라고 느낀 적은 한번도 없습니다. 소설을 쓸 수 없어 고생했다는 경험도(고맙게도) 없습니다. 아니, 그렇다기보다 제 생각에는 즐겁지 않다면 애초에 소설 쓰는 뜻은 없습니다. 고역으로 소설을 쓴다는 생각에 저는 아무래도 익숙해지지 않습니다. 소설이라는 건 기본으로 퐁퐁 샘솟듯이 쓰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57쪽)

 

 

제임스 조이스는 ‘상상력imagination이란 기억이다’고 실로 간결하게 정의했습니다. 딱 맞는 말입니다.  (125쪽)

 

 

외로운 일, 이라 하면 무척 범속한 말이지만 소설을 쓴다는 것은, 더욱이 긴 소설을 쓰는 경우에는 실제로 꽤 외로운 일입니다. 때때로 깊은 우물 밑바닥에 혼자 앉아 있는 것 같습니다. 아무도 구하러 오지 않고 아무도 “오늘 아주 잘했어” 하고 어깨를 토닥이고 위로하지도 않습니다. 그 결과물인 작품이 누군가한테 칭찬을 받는 일도 있지만(물론 잘되면), 그것을 써내는 일 그 자체를 사람들은 딱히 평가해주지 않습니다. 그건 작가 혼자 묵묵히 짊어지고 가야 할 짐입니다.  (17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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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콩꽃이겠지 생각했는데 제대로 된 이름이 있었다. 내가 찾아본 말은 자주색콩이다. 이 말로 찾아보니 바로 자주제비울타리콩이 나왔다. 콩꽃보다 자주제비울타리콩이라 하는 게 낫겠지. 다음은 수세미다. 설거지 할 때 쓰는 수세미로 보이지 않지만 껍질을 벗기고 삶으면 수세미로 쓸 수 있다고 한다. 먹을 수도 있겠지. 오이랑 비슷할 것 같았는데 껍질을 벗긴 수세미는 오이하고 아주 달랐다.

 

자주 다니던 길인데 그동안 못 본 게 많다. 왜 그렇게 못 봤을까. 얼마전부터 그 길을 지나가고 올 때 나뭇가지를 보았다. 어느 날 나뭇가지 끝에 열매처럼 보이는 게 열려서 그건 뭔가 했다. 며칠 지나고 그 길을 가니 꽃이 피어서 깜짝 놀랐다. 그건 열매가 아니고 꽃봉오리였다. 처음에는 무슨 꽃인지 몰랐다. 모르는 꽃이 아니었는데, 하긴 다른 건 나무에 핀 것을 봐서 그랬겠지. 그러다 배롱나무꽃이 아닐까 하고 다른 곳에서 배롱나무를 자세히 보았다. 그랬더니 나뭇잎이 같았다. 저것은 나뭇가지만 있지만 나무겠지. 커다란 나무로 자랄 수 있을지. 어쩐지 어려워 보인다. 어디선가 날아온 배롱나무 씨앗이 뿌리를 내리고 자란 걸 텐데. 누군가 아직 작은 배롱나무가 더 커다랗게 자라도록 다른 곳에 옮겨 심으면 좋겠다.

 

 

 

희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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