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나눠서 읽고 잘 못 썼지만, 여기에 잘못 쓰인 게 있어서. 이 말은 예전에도 했던 거다. 그때는 다른 책이었는데, 여기에 또 나올지 몰랐다.

 

 

 

 

거미줄로 들어가다

 

  무당거미의 이치 상   絡新婦の理 (1996)

  교고쿠 나쓰히코   김소연 옮김

  손안의책  2014년 08월 25일

 

 

 

 

 

 

 

 

 

 

 

교고쿠 나쓰히코 책 본 지 그렇게 오래되지 않았는데 또 보게 되었다. 이것보다 앞에 것 《철서의 우리》도 세권이었는데, 이 《무당거미의 이치》도 세권이다. 얼마전에 ‘백귀야행’ 두권을 다 보았는데, 거기에서 본 사람이 여기에도 나와서 그렇구나 했다. 거기에서 제대로 끝나지 않은 이야기 뒤가 이것인가 싶기도 하다. 병풍 위에서 사람을 엿보는 요괴를 본 다다 마키, 결혼을 앞두고 웃는 연습을 하다 누군가한테 죽임 당한 여자는 여기에서 피해자로 나온다. 누군가 자신을 보고 있다고 생각한 남자는 가까이에 사는 열아홉살 처녀를 죽이고 말았다. 그 사람이 여기에서 일어난 살인사건 범인이라는 말이 나온다. 돈을 받고 몸을 파는 일을 하는 여자를 싫어하는 형사도 나온다. 아내 기모노에서 손이 나와서 집을 뛰쳐나간 스기우라 다카오 아내 스기우라 미에는 남편을 찾았다. ‘백귀야행’이 생각나서 이 책을 제대로 보기 어려웠다. 그것은 그거고 이것은 이것이다 해야 하는데, 아주 상관없지 않기도 하다. 다다 마키는 여기에서는 아주 짧게 나와서 별로 안 좋게 보일지 모르겠지만(허가 받지 않고 사람한테 방을 빌려주었다. 몸을 파는 사람한테), ‘백귀야행’을 봤다면 이 사람이 어떻게 살았는지 알 수 있다. 이건 다른 사람도 마찬가지구나. 그것을 다 설명하기 어렵지만. ‘백귀야행’은 교고쿠도 시리즈에서 크게 다루지 않은 사람 이야기다.

 

처음 시작은 여자가 누군가한테 죽임 당한 일이다(그전에 다른 이야기가 잠깐 나왔다). 이게 네번째였다. 무엇보다 죽은 여자 모습이 비슷했다. 두 눈이 뽑힌 거다. 그래서 경찰은 한 사람이 네 여자를 죽였다고 여겼다. 앞에 죽임 당한 세 여자는 품행방정(이 말을 그대로 쓰다니)한 열아홉살 처녀, 물장사하는 서른다섯살 여자, 근엄하고 성실한 서른살 여교사다. 네번째는 정통있는 포목점 안주인이다. 네 사람한테 공통점은 없다. 이것은 정말 연쇄살인일까. 처음 범인으로 보인 사람이 아닌 다른 사람을 보았다는 말을 형사 기바 슈타로가 듣는다. 기바 슈타로는 가와시마 신조를 알아서 검은 안경을 주웠는데 아무한테도 말하지 않았다. 말할 때를 놓쳤다. 마음속으로는 그 사람이 여자를 죽이지 않았을 거다 생각한 건지도. 아직 무엇 하나 확실하지 않다. 네 사람을 같은 사람이 죽인 건지, 다른 사건인지. 처음에 죽은 여자는 다를지도 모르겠다. 세 여자는 연관 있을지도. 기바가 가와시마 사무실에 갔을 때 그곳에서 달아나는 가와시마를 만났다. 가와시마는 기바한테 아직 붙잡힐 수 없다 하고, ‘여자한테, 거미한테 물어봐’ 하는 말을 남겼다.

 

첫째 권에서는 세가지 이야기가 얽혀간다. 첫번째밖에 말하지 않았는데, 두번째는 성 베르나르 여학교에서 저주를 걸어서 사람이 죽은 이야기가 나온다. 실제 학교 선생이 목이 졸려 죽임 당한다. 그 선생은 학생한테 나쁜 짓을 했다. 그 학생은 저주해서라도 선생을 죽이고 싶어했다. 이 학교 선생이었던 여자도 학생이 저주해서 죽었다고 한다. 앞에서 말한 세번째 여자다. 세번째는 이 학교를 지은 오리사쿠 집안 이야기다. 당주라고 할 수 있는 오리사쿠 유노스케가 죽었다. 이 집안에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는 선녀와 나무꾼이다. 뒤는 조금 다르지만 이 이야기는 그저 비슷한 것일 뿐일까. 은혜 갚은 학은. 부잣집은 언제나 재산 때문에 문제가 일어난다. 이 집에서는 재산보다 누가 오리사쿠 가문을 이을까를 더 중요하게 여겼다(이것도 다르지 않은 건가). 오리사쿠 집안에는 딸만 태어나서 데릴사위를 얻었다. 죽은 유노스케한테도 딸이 넷이었다. 첫째는 죽고, 둘째는 결혼했는데 남편이 별로였다. 셋째는 결혼하지 않겠다 하고, 넷째는 아직 중학생이다. 괜찮지 않다 해도 집안을 이을 사람은 둘째딸 남편밖에 없다. 그런데 오리사쿠 유노스케 장례식 다음날 그 사람도 죽임 당한다. 어쩐지 죽는 사람이 많다. 여자만 죽는 게 아니고 남자도 죽는다. 여자와 남자를 죽이는 것은 무슨 연관이 있는 거지.

 

맨 앞에서 스기우라 미에가 사라진 남편 스기우라 다카오를 찾는다고 했는데, 미에는 탐정 에노키즈 레이지로한테 남편을 찾아달라고 한다. 남편과 헤어지기 위해서다. 미에는 여성 운동을 하는 듯하다. 사람들과 모여서 공부하는데 그곳에서 오리사쿠 집안 셋째딸 오리사쿠 아오이를 만났다. 남편 스기우라 다카오는 죽임 당한 술집 여자와 함께 있었다고 한다. 성 베르나르 여학교 이사장은 그곳에 퍼져 있는 이상한 일을 거두어 달라는 일을 에노키즈 레이지로한테 부탁했다. 그 말을 들은 사람은 교고쿠도 추젠지 아키히코다. 정리하는 것도 복잡하구나. 추젠지 아키히코는 우연히 일어난 일처럼 보이는 일을 누군가 일이 그렇게 일어나게 이끌었다고 한다. 지금 관심을 갖게 한 사람은 스기우라 다카오다. 스기우라 다카오는 죽임 당한 여자와 있었고, 선생이 죽임 당한 학교에 있었다. 이 사람이 지금까지 일어난 일에 관계있을까. 그것보다 이용당했을지도 모른다. 사람을 죽일 사람으로 보이지 않았는데, 사람은 겉보기와 다를지도 모르겠다.

 

이 책 한권을 보고 알 수 있는 건 별로 없다. 제목에 무당거미가 들어가서 누군가 거미줄을 쳤다고 말한 건지도. 오리사쿠 집도 거미집처럼 말하기도 했다. 베를 짜는 기계 역직기를 만들어서 부자가 되었다고. 이름에도 짠다는 말이 들어간다. 일본말로 직녀를 오리히메라고 한다. 견우와 직녀도 일본에 전해 내려오는 이야긴데. 저주로 사람을 죽인다는 일을 푸는 게 먼저구나. ‘검은 성모’ ‘거미의 종(거미를 따르는 하인일까)’ 사람은 저주로 죽지 않는다. 사람이 사람을 죽인 걸 거다. 남은 두권을 보면 왜 그랬는지 알 수 있겠지. 여성 운동도 관계있을까.

 

 

 

 

☆―

 

마스다가 생각하기에 추젠지는 수수께끼를 해명하지 않는다. 추젠지는 수수께끼에 해답을 내놓는 것이 아니라 수수께끼 쪽을 일반 사람이 이해할 수 있는 수준까지 해체하는 것이다. 수수께끼가 수수께끼가 된 배경을 흔들어, 수수께끼 자체가 효과 없는 모습을 비슷하게 만들어 낼 뿐이다. 다시 말해서 현실을 일단 못 쓰게 만들어 버리고 속임수든 궤변이든, 수수께끼가 수수께끼가 될 수 없는 또 하나의 현실을 겉으로 드러내는 게 추젠지 방식이다.  (358쪽)

 

 

 

 

 

 

 

책을 다 읽었지만

 

  무당거미의 이치 중 · 하  

  絡新婦の理 (1996)

  교고쿠 나쓰히코   김소연 옮김

  손안의책  2014년 08월 25일

 

 

 

 

 

 

 

 

 

 

“당신은 무질서하게 행동하는 인자들에 일부러 자극을 주어서 사건을 산출하는 네트워크, 그 망상조직을 재생산하여 사건이 이뤄지게 하는 환경을 만들어냈어요. 개개의 인자나 그 행동은 계획 자체에는 많은 영향을 미쳤지만, 계획의 움직임──사건은 인과 작용에는 반응하지 않고, 그저 사건 자체를 되풀이해서 산출해 나갔지요. 당신은 깨닫지 못하는 사이에, 움직이는 것 자체가 시스템, 곧 체계를 규정하는 계획을 생각, 발동시키고 있었던 겁니다──.”

 

“그러면──저는.”

 

“──이 경우 주체와 객체, 능동과 수동이라는 이원으로 쌍을 이루는 인식론 도식은 효과가 없어지지요. 그렇게 되면 깨달음 없는 관찰자는 일을 잘못 볼 뿐입니다. 관찰자는 당사자가 파악한 현실을 객관성을 갖고 궤도를 고칠 수 있는 처지에는 더 이상 있지 않게 되고, 알 수 없는 정보가 많으면 많을수록 관찰은 그저 현실을 숨길 뿐인 행위가 되지요. 움직여버린 계획은 그저 끊임없이 사건의 되풀이, 재생산을 되풀이합니다. 그래서──그리고 당신 바람은 이루어졌어요. 하지만 당신은 반면, 많은 것을 잃었지요.”  (상권, 21쪽)

 

 

마지막까지 읽었는데 제대로 안 건 반쯤 될까. 알 것 같기도 하지만 정리해서 말하기 어렵다. 교고쿠 나쓰히코 책은 거의 그런 식으로 본 듯하다. 예전에는 추리소설을 본 지 얼마 안 되었다는 말을 했지만, 그때나 지금이나 알쏭달쏭한 느낌은 비슷하다. 무엇인가 복잡하게 얽혀있다. 잘 몰라도 그런 것을 재미있게 느끼는 것인지. 두번보다 세번쯤 보면 반 이상 알 수 있을까. 게으른 나는 그렇게까지 읽지 못한다. 이번에는 예전 이야기가 나오기도 해서 더 복잡하다(다른 데도 앞에 이야기가 조금씩 나온다). 사람 관계가 복잡하다. 여기에서 떠오르는 말은 ‘세상은 넓은 듯하지만 좁기도 하다’다. 《우부메의 여름》 《망량의 상자》 《광골의 꿈》 《철서의 우리》에서 세 가지는 어렴풋이 생각나는데 ‘광골의 꿈’은……, 그때 나온 사람이 여기에 나온 것인가. 《백귀야행》에 나온 것도 조금 이해했다. 다는 아니고 누군가 자신을 바라보고 있다고 여긴 사람(히라노 유키치)만 알았다. 아내 기모노에서 손이 나왔다고 여긴 사람(스기우라 다카오)도. 그리고 계획은 벌써 그때부터 움직이고 있었다. 이렇게 생각하니 조금 무섭다. 작가가 처음부터 생각하고 쓴 것인지, 쓰면서 그렇게 엮은 것인지 둘 다일지도 모르겠다.

 

시대 때문에 일어난 일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일본에는 일본에서 내려오는 문화가 있고, 서구문화가 들어왔다. 가부장제가 서구문화라고만 할 수 없겠지만. 이것은 우리나라도 비슷했을 것 같지만, 아니 우리나라 조선은 유교 사회였기 때문에 일본보다 더 오랫동안 가부장 사회였다. 불교도 비슷했을까. 우리의 가부장 사회는 더 오래됐을 거다. 조선 초기에는 조금 달랐다고 하지만. 일본에는 모계 사회였던 때가 있고, 무사시대가 되면서 가부장 사회가 되었다고 한다. 서양문화 또한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일본에 모계 사회 풍습이 모두 사라진 건 아니었다. 전쟁이 끝난 뒤 남성은 그것을 다르게 바꾸어버렸다. 여자 쪽에서 보면 보통인 게 남자 쪽에서 보면 그것은 매춘이었다. 여기 나온 이야기는 모계 사회와 가부장 사회가 싸우는 것처럼 보인다. 그 싸움에 여러 사람이 휘말리고 말았다. 아니 어쩌면 그 일을 꾸민 사람도 거기에 걸려든 건지도 모르겠다. 한 집안에서 일어난 핏줄 싸움이 있었고, 나중에 자신의 자리를 만들기 위한 싸움이 더해졌다고 해야겠다.

 

오리사쿠 집안은 모계 집안이다. 대대로 데릴사위를 들이고 첫째딸이 집안을 이었다. 딸이 낳은 아이라고 해야겠다. 그런데 한사람이 바깥에서 딸을 낳아와서 집을 잇게 했다. 아내가 가만히 있었을까. 자신의 핏줄(오리사쿠)을 끊기게 하지 않으려고 애썼다. 이것은 남편도 마찬가지였다. 그때 희생당한 것은 여성이다. 딸이라고 해야겠다. 시대는 창부, 곧 몸 파는 여자를 차별하고 여성도 차별했다. 모계 사회 풍습은 아이 아버지가 누구든 상관없다. 어머니가 낳은 아이면 되었다. 마치 이것은 창부처럼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이것은 조금 다르다. 돈이 아닌 다른 것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전쟁이 끝난 뒤 그런 것을 끌어내린 게 바로 남성이다. 남성은 자기 핏줄을 남기고 싶어하지 않는가(다 그런 건 아닐지도 모르겠다). 모계 집안에 반발한 사람이 나올 법도 하다. 사람들이 죽은 데는 이런 배경이 있었다. 하지만 이상하게 얽혀서 죽었다. 누군가는 저주했고, 다른 한쪽은 자기 어머니를 죽게 했다고 여겼다. 두쪽 다 진짜 죽이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눈알 살인마를 조종하는 것처럼 보였는데, 아주 아닌 건 아닌가.

 

여러 사람이 죽었을 때 얻을 수 있는 것은 자신의 일을 숨기고 자신이 있을 곳이 생기는 건가. 어떤 일은 바라지 않았을 텐데, 한번 움직이기 시작한 일은 멈추지 않았다. 많은 사람이 죽고서야 멈추었다. 자신도 그렇게 되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을 것 같은데. 자기 손은 더럽히지 않고 사람을 자기 마음대로 조종하는 사람은 정말 싫다. 왜 그렇게까지 했는지. 여성 차별이 심한 때여서일까. 그 사람 마음은 잘 모르겠다. 우리나라도 그렇지만 일본도 남자는 남자다워야 한다고 했다. 이 말은 남자가 전쟁에 나가게 하기 위한 것이기도 하단다. 듣고 보니 맞는 듯했다. 남자는 남자다워야 하고, 여자는 여자다워야 한다는 말이 맞을까. 사람에 따라 여성스러운 남자도 있고, 남성스러운 여자도 있다. 자신이 가진 성향을 죽이고 사회에서 말하는 것에 따라야 할까. 지금은 예전과 많이 달라졌지만, 예전에는 그것 때문에 괴로운 사람 많았을 거다. 여성이 여성 인권을 위해 운동한다고 해도 가부장제에서 자유로울까. 아쉽게도 그렇지 않은 듯하다. 어딘가에 매이지 않고 자유롭게 생각하는 건 쉽지 않다. 자신한테 한쪽으로 치우친 생각이 없는지 늘 확인해보아야 한다. ‘백귀야행’을 보고 스기우라 다카오가 자기 아내 마음을 알려고 하지 않았다고 했는데, 아내 또한 스기우라를 제대로 보려고 하지 않았다.

 

종교 이야기도 꽤 나온다. 일본 민간 신앙도. 그런 것은 그런가보다 하면서 보았다. 사람이 책을 보고 안 것을 그대로 믿으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종교의 차이도 알아야 하는구나. 성 베르나르 여학교는 기독교와는 관계없었다. 그렇게 보였는데 아무 상관이 없었다니. 그것 때문에 해를 입은 아이도 있다. 오리사쿠 집안 딸은 다 안됐다. 하나 아쉬운 것은 신라에서 왜로 건너간 하타씨가 중국 진시황 후손이라 한 거다(여기에는 하타씨를 쓸 수밖에 없었다). 《항설백물어》에도 그런 식으로 나왔는데. 그때는 작가도 그렇게 알고 있는지 모르겠다고 생각했는데, 이 책을 보니 그렇게 알고 있었던가 보다. 이 책이 나온 1996년에는 일본 역사책에 그런 말이 더 많았을지도(지금은 제대로 됐을까. 절에 있는 비석 글씨는 고쳤다고 한 것 같은데). 내가 이런 변명을 하다니. 나는 작가가 일부러 그렇게 쓴 건 아니다 생각한다. 잘못 쓰인 역사책을 봤기 때문일 거다. 나도 역사 잘 모르는데 이런 말을 했다. 쇼토쿠 태자의 총애를 받은 하타노 가와카쓰(진하승)는 신라에서 왜로 간 사람이다. 전에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일본편》에서 본 말이 나오기도 한다. 누에 신사, 오사케 신사, 샘 그리고 우즈마사 광륭사에 있는 미륵반가사유상.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일본편’이 일본에도 나온다니, 이 부분을 일본 사람이 잘 봤으면 좋겠다.

 

 

 

희선

 

 

 

 

☆―

 

“넌 여자가 되고 싶어서, 되고 싶어서 견딜 수가 없는 놈이야. 세상은 변태라고 하지. 하지만 그렇다고 부끄러워할 것 없어!”  (하권, 104쪽)

 

 

“인간은 누구나 남성성과 여성성 둘 다 가지고 있습니다.”

 

“누구나?”

 

“그래요. 이건 균형 문제고, 그 가운데 어느 쪽 비율이 높은지, 어느 쪽이 겉으로 드러나는지, 거기에서 개인차가 생기는 것에 지나지 않아요. 여성성이 큰 남성이 열등한 것도 아니고, 남자니까 남자다워야 한다는 것도 어리석은 차별이고 근거 없는 편견일 뿐입니다. 그것들은 어느 특정한 곳과 시간 문화속에서만 뜻을 가질 뿐이에요.”  (하권, 10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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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3-20 16:28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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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3-22 00:11   URL
비밀 댓글입니다.
 
한글전쟁 - 우리말 우리글 5천년 쟁투사
김흥식 지음 / 서해문집 / 201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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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나라 말에는 그 나라 문화와 그 나라 사람 생활이 담겨있다(잠시 문화 안에 생활이 들어간다는 생각이 들어서 문화만 쓸까 하다가 생활까지 적었다). 말을 잃으면 나라를 잃는 것과 같다고 한다. 아주 오래전 고조선 때 우리말이 어땠을까. 아쉽게도 우리는 그때 말을 모른다. 그때뿐 아니고 고구려, 신라, 백제, 고려도 모른다. 조선이라고 해서 아는 건 아니다. 이 책을 보니 중국(예전에는 다른 이름이었을 테지만) 가까운 곳에서 살던 사람은 한자가 어렵고 자기들 마음을 다 나타낼 수 없다고 여기고 자기들이 쓸 글자를 만들었다고 한다. 그 글자는 거의 한자를 바탕으로 만들었다. 하지만 그것 또한 쓰기에 어려워서 지금까지 남은 게 별로 없다. 일본도 한자에서 글자를 만들어서 가나(仮名)라고 했다. 그 사이에 있는 우리나라 지배층은 한자를 잘 썼다고 한다. 다른 글자가 있어야 한다는 것을 느끼지 못했다. 그렇다고 다른 글자가 없지 않았다. 신라는 향찰로 향가를 쓰고 설총이 만든 이두는 오랫동안 조선 중간관리가 썼다고 한다. 하지만 그것은 백성이 쓰기에는 어려웠다. 세종은 여러가지에 관심을 가져서 글자에도 관심을 가진 게 아닐까 싶다. 얼마전에 본 소설에서 세종이 신미 대사한테 우리 글자를 만들라고 해서 신미는 범어에서 자음과 모음을 만들었다고 하던데. 여기에는 그런 말이 없다. 역사로 인정하지 않는 걸까. 범어를 찾아보고 거기에서 어떻게 우리 자음과 모음이 나왔을까 했다. 글자 모양보다 읽는 것에서 가져온 것일까. 글자가 어딘가에서 뚝 떨어지지 않았을 테지. 오랫동안 알아보고 만들었으리라고 본다. 소설에는 세종이 왜 훈민정자(訓民正字)가 아닌 훈민정음(訓民正音)이라 했는지 나왔는데, 나는 그 말에 더 믿음이 간다. 백성을 가르치는 바른 글자가 아닌 백성을 가르치는 바른 소리로 보이게 하려고(한자 공부하는 데 도움이 된다는 말이 아니었을까). 그렇더라도 훈민정음 쓰기를 반대하는 사람이 있었다. 그 싸움에서 세종이 이겼다.

 

훈민정음을 세상 사람이 알게 했지만 그게 오랫동안 이어지지 않았다. 연산군은 언문을 배우고 쓰지 못하게 했다. 자신의 나쁜 모습을 쓴 편지 때문이다. 그 편지를 쓴 사람을 찾았다면 좀 달랐을지도 모르는데(이때 사람들한테 글씨를 쓰게 해서 같은 글씨체를 찾으려고 했는데, 그것은 아주 어려운 일이었다). 배우지 못하게 한다고 해도 몰래 배우는 사람은 있다. 조선시대에 언문 소설이 널리 퍼져서 언문을 아는 사람이 늘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한자를 가르치는 책에 훈민정음이 있었다. 최세진은 중국말(글을 잘 썼을까, 말도 했겠지)을 잘해서 벼슬을 하게 되었다. 여러 책을 썼는데 그 안에 어린이한테 한자를 가르치는 《훈몽자회》가 있었다. 《훈몽자회》에 훈민정음을 적고 그것을 익힌 다음 한자를 익히라고 했다. 최세진은 자음 이름뿐 아니라 모음을 지금 우리가 아는 순서로 적었다. 한자를 가르치기 위한 책에 훈민정음을 쓰다니(옛날 사람은 그대로 읽어도 지금 사람은 읽기 조금 어렵다). 최세진은 그것으로 훈민정음을 알게 되는 사람이 늘어나리라는 것을 알았을까. 어쩌면 최세진이 훈민정음을 익힌 다음 한자를 공부했는지도 모르겠다.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때문에 백성은 조선 정부를 인정하지 않았다. 이때 선조는 백성한테 내린 글을 훈민정음으로 썼다. 그때 그 문서가 보물 제915호가 되었다. 1728년 노래꾼 김천택은 시조를 모아서 《청구영언》을 펴냈다. 훈민정음이 만들어지고 450년이 지난 1894년 11월에 훈민정음을 우리글로 인정한다.

 

한글 신문이 나오고 주시경이 여러 사람과 맞춤법을 만들었다(이때 한글이라는 말도 생겼다). 신소설과 신체시 같은 게 나왔다. 많은 사람이 글을 쉽게 배울 수 있게 되었다고 생각했는데 얼마 뒤 우리는 나라를 빼앗긴다. 다행하다고 해야 할지 아직 우리말과 글은 빼앗기지 않았다. 하지만 일본은 우리를 자신들 노예로 만들기 위해 치밀하게 계획을 세우고 우리말과 문화를 많이 알아보고 없애려고 했다. 청일전쟁 때는 우리말과 글을 못 쓰게 하고 이름까지 바꾸게 했다. 이런 형편에서 사람들은 조선말사전을 만들려고 애썼다. 광복이 되기 얼마전에 원고를 일본 경찰한테 빼앗겼는데 역에서 찾았다. 우리가 일본 지배에서 벗어나고 이제는 한글만 쓰게 되었다. 이것은 교과서가 그랬고 신문에는 한글과 한자가 함께 쓰였다. 일본 지배에서 벗어난 우리 땅에서 전쟁이 일어난다. 이렇게 힘들 때 이승만은 국어 맞춤법을 바꾸라고 한다. 그런 일도 있었다니. 말은 시간이 흐르면서 바뀌고 발음이 바뀌기도 한다. 이승만은 미국에 있다가 우리나라에 돌아와서 바뀐 게 어렵게 보였나보다. 자신이 어렵다고 많은 사람이 쓰고 있는 것을 바꾸라고 하다니. 이 책은 한글로 본 우리 역사 같은 느낌이 든다(모든 걸 다 알 수 있는 건 아니지만). 좋은 것도 있지만 안 좋은 것도 있다.

 

한글만 쓰는 것과 한자를 함께 쓰는 것 어떤 게 더 낫다고 말하기 어렵다. 한자는 우리 문화와 관계있으니까. 오래전에 우리 글자가 없어서 한자를 받아들여서 그때 쓰던 말이 없어지기도 했다고 한다. 지금은 영어가 그 자리를 대신하는 듯한 느낌이 든다. 외래어는 우리말처럼 된 외국말이다. 그것을 받아들일 때 그대로 쓰기보다 우리말로 바꿀 수 없는지 생각해보면 좋을 텐데, 거의 그대로 쓴다. 그저 한글로 쓸 뿐이다. 한글이지만 뜻을 알 수 없는 말 아주 많다. 한글은 여러 소리와 모양을 나타낼 수 있다. 색도 있구나. 한글이 뛰어난 것은 맞는데 우리가 그것을 잘 살려쓰지 못하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우리말에는 약점도 있다. 그것도 인정해야겠지). 우리말로만 나타낼 수 있는 정서가 있다. 그게 정신이 아닐까 싶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만의 것이다. 어디에서 살든 그곳에서 하는 말을 배우고 익히면 이야기하는 데 어려움은 없다. 그러면 모두가 같은 말을 하면 좋을까. 이러저런 말 배우지 않아도 하나만 알면 여러나라 사람과 말할 수 있다면 편하기는 할 거다. 하지만 그 나라의 고유성이 없어진다. 세계화가 영어를 잘하는 건 아니다고 생각한다.

 

세상에 나온 지 오백년이 넘은 한글, 우리는 이것을 지킬 수 있을까. 나도 한글을 지키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잘 모른다. 나는 순우리말을 써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순우리말이어도 무슨 뜻인지 모르는 거 많으니까. 한자 공부하는 거 좋다고 생각한다. 전에 초등학교 교과서에 한자를 같이 쓴다고 들었는데. 급수 따기 위한 공부가 아닌 자연스럽게 하는 공부라면 훨씬 좋을 텐데. 이것은 어떤 공부나 그렇다. 재미있게 공부하면 훨씬 오래 남는다. 우리말과 글 사라지지 않게 잘 가꾸고 지켜가면 좋겠다.

 

 

 

희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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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나영 2016-06-16 21: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헐 님 한자공부만하면 중국갈것도 아니고 우리말을 지켜야죠

희선 2016-06-17 00:02   좋아요 0 | URL
한자 공부만 하자는 말은 안 했는데, 그렇게 보일 수도 있을까요 우리말 지켜야죠 제목에 그렇게 썼는데... 얼마전에는 다른 책을 보고 한글을 만들었을 때 더 많은 사람이 한글을 썼다면 좋았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아쉽게도 그러지 않았죠 많지 않아도 한글을 쓴 사람이 있어서 지금까지 사라지지 않았네요


희선
 

 

 

 

  치즈 스위트 홈 8

  코나미 카나타

  講談社  2011년 04월 22일

 

 

 

 

 

 

 

 

 

 

 

 

사람이 고양이와 함께 살아도 고양이 생활을 다 알 수 있을까. 고양이는 집안에서만 지내지 않을 거다. 아니 요즘은 집에서만 지내는 고양이가 더 많을지도 모르겠다. 비싼 것도 많으니까. 그래도 집에서 밖으로 자유롭게 나다니는 고양이도 있겠지. 치도 처음에는 집 밖에 나오지 못했다. 요헤이네가 전에 살던 집에서는 동물을 키울 수 없었다. 치는 길에서 주웠지만(그렇다고 길고양이는 아니다, 어미와 떨어진 것뿐이다), 요헤이와 엄마 아빠는 치를 함께 사는 식구로 여기게 되었다. 요헤이네는 치를 키우기 위해, 아니 치와 함께 살기 위해 동물을 기를 수 있는 집으로 이사했다. 그렇게 하는 동안 시간은 얼마나 흐른 걸까. 새 집으로 옮기고 치가 돌아다니는 곳은 조금 넓어졌다. 검정 고양이를 다시 만나고, 새 친구 코치를 만났다. 코치는 밖에서 사는 얼룩 고양이다. 치와 크기는 비슷하지만 길에서 살아가는 방법을 어느 정도 아는 듯하다. 만화 속 시간은 정말 천천히 흘러가는구나. 현실에서 고양이는 몇달만 지나면 꽤 클 텐데, 치는 여전히 귀여운 새끼 고양이다. 사람인 요헤이도 여전히 어리다. 치는 언제까지나 새끼 고양이일지도 모르겠다.

 

고양이는 높은 곳에서 떨어져도 크게 다치지 않는다. 자연스럽게 땅에 내려온다. 몸이 가벼운 것도 있고 땅에 내려올 때 몸에 충격을 덜 받게 하는 방법이 있는 건지도. 치는 먼지떨이로 청소하는 엄마를 따라다니면서 놀자고 한다. 먼지떨이가 강아지풀처럼 생겨서 치는 엄마가 놀자고 하는 걸로 생각한 거다. 엄마가 높은 곳 먼지를 털어서 치 발이 닿지 않았다. 치는 이층으로 가는 계단으로 올라가서 먼지떨이로 발을 내밀었다. 그러자 치는 계단에서 밑으로 떨어졌다. 고양이든 물건이든 높은 곳에서 떨어지는 시간은 아주 짧다. 만화에서는 어떻게 나타냈을까. 공중으로 뜬 치는 뭐지 하는 모습이었는데, 조금씩 몸을 돌려서 바닥에 사뿐히 네 발을 디딘다. 그 모습을 이렇게 설명하다니. 높은 곳에서 내려온 건 이때만은 아니다. 요헤이, 엄마, 아빠가 치와 놀아주지 않자 치는 공원에서 만난 코치를 생각하고 그곳에 간다. 코치는 공원에 있었다. 치가 같이 놀자고 하니 ‘나는 바빠’ 하고 다른 곳에 가려고 했다. 그런 코치을 멈추게 한 것은 빈 상자였다. 치가 먼저 안에 뭐가 들었나 발로 눌러보니 코치도 똑같이 했다. 둘이 앞발을 집어 넣고 뭔가 있다고 하는데 서로의 앞발이라는 것을 곧 알았다. 둘은 조금 아쉬워했다.

 

공원에서 나온 치와 코치는 어느 집을 지나다 담 안으로 들어갈 수 있는 틈(문양)을 보고 둘이 한번에 들어가려고 했다. 두 마리가 한번에 빠져나갈 만큼 크지 않아서 차례차례 들어갔다. 그전에 코치가 뭔가 무서운 게 나올지도 모른다고 해서 치는 조금 겁을 먹었다. 치는 자기 발로 밟은 나뭇가지가 부러진 소리에 놀라고 얼굴에 닿은 풀잎에 놀랐다. 둘은 빈 플라스틱 통을 굴려보고, 나뭇잎과 벽 사이로 좁은 하늘을 보고 놀라워했다. 별일 없이 그 집에서 나왔다. 얼마 뒤 개가 나타났다. 치는 겁을 냈는데 코치는 줄에 묶여있으니 괜찮다고 했다. 사람이 개줄을 놓쳐서 치와 코치한테 달려왔다. 치와 코치는 개한테 쫓겨서 나무로 뛰었는데 치는 조금밖에 못 뛰었다. 코치가 치한테 위로 올라가자고 했지만 치는 잘 올라가지 못했다. 개가 치를 핥자 깜짝 놀라서 빨리 위로 올라갔다. 조금 뒤 주인이 나타나서 개를 데려갔다. 드디어 치가 높은 곳에 올라갔구나. 고양이는 높은 곳에 올라가지만 내려오는 건 어렵다고 한다. 치와 코치도 나뭇가지에서 밑을 보고 어떻게 내려가지 했다. 코치가 먼저 내려오고 치도 내려왔다.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짧게 말하다니. 사람과 사는 고양이는 자기도 사람으로 생각한다는데 치도 그랬다. 그러면서 코치와 놀다니. 코치는 대체 뭐냐고 치한테 물어보고 싶다.

 

한번은 코치가 치를 바깥으로 불렀다. 우유를 먹다가 치는 바깥으로 나갔다. 코치가 좋은 곳을 찾았다면서 치한테 따라오라고 했다. 그곳은 창고였다. 코치와 치가 그 안에서 놀면서 거기 쌓인 물건을 건드려서 큰 소리가 났다. 그 집 사람이 나와서 코치와 치를 내쫓았다. 치는 바깥으로 나오지 못하고 거기 숨어있었다. 사람이 물건 정리를 하고 문을 닫아서 치는 그곳에 갇혔다. 오랫동안 그 안에 있으면 어쩌나 했는데, 치가 나갈 곳을 찾으려고 물건을 건드려서 또 소리가 났다. 그 소리를 들은 사람이 나타나서 문을 열었다. 사람이 치를 잡으려고 했을 때 치는 요헤이와 엄마 아빠를 생각하고 사람을 잘 피했다. 한편 코치는 치가 어디로 갔는지 찾아다니고, 집에서도 요헤이와 엄마 아빠가 치가 돌아오지 않은 것을 알고 이런저런 걱정을 했다. 그러다 밖으로 나와서 찾아다녔다. 코치와 치가 함께 오는 모습을 요헤이가 보았다. 배가 고픈 치는 집에 가서 우유를 먹어야지 했는데, 엄마 아빠는 치를 씻겼다. 치가 창고 안에서 돌아다녀서 먼지가 묻어서 지저분했다. 먼지 때문에 치는 눈이 안 좋아졌다. 결막염이었다. 동물이 발로 눈을 건드리지 못하게 할 때 고깔 모양을 씌우지 않는가. 치도 그것을 목에 둘렀다. 그거 이름이 엘리자베스 칼라인가보다. 처음 알았다.

 

요즘은 고양이와 살면서 일어나는 일을 그린 만화와 책이 많이 나온다. 이것도 그런 것 가운데 하나다. 치는 새끼 고양이로 요헤이네 식구와 살아가면서 일어나는 이야기와 다른 고양이와 노는 이야기도 나온다. 지난번에도 코치와 놀았구나. 앞으로도 코치와 노는 일이 많이 나올까. 사람이 모르는 일을 볼 수 있어서 재미있는데 고양이가 정말 이럴까 싶기도 하다. 실제보다 더 귀여우니까. 아니 진짜 새끼 고양이는 귀여울거다. 그 시간이 짧을 뿐이구나. 큰 고양이는 그것대로 사람 마음을 따듯하게 해줄지도.

 

 

 

희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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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3-04 13:3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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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3-05 03:0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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윌리엄 터너 엽서집
조지프 말로드 윌리엄 터너 지음 / 유어마인드 / 201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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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모르는 작가지만 이 사람 그림으로 엽서집이 나왔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아는 사람은 벌써 알고 있었나봅니다. 저는 빛의 화가 하면 클림트가 가장 먼저 떠오르는데, 작가 소개를 보면 조지프 말로드 윌리엄 터너도 빛의 화가라고 쓰여 있습니다. 이름도 기네요(클림트도 앞에 다른 게 있군요). 클림트하고는 또 다른 빛을 그림에 나타낸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렇게 말하지만 클림트도 그렇게 잘 아는 건 아니예요. 지난번에는 색을 칠해야 하는 엽서였는데, 이번에는 화가 그림으로 만든 엽서예요(색칠하는 엽서 더 나오면 좋겠다 생각했는데, 진짜 나왔더군요. 이건 우연히 알았습니다). 제가 엽서를 좋아하는 것 같네요. 할 말이 그렇게 많이 떠오르지 않을 때 쓰기에 엽서가 좋습니다. 편지도 그렇게 길게 쓰지 않지만. 거의 편지지 두장뿐이에요. 이것은 편지지가 그런 식으로 들어 있어서 그렇게 쓰는 거군요. 그것보다 그 이상 말을 못하는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예전에 알았던 친구는 아주 긴 편지를 쓴 적도 있다고 하는데, 저는 아직 한번도 아주 긴 편지를 써 본 적 없습니다. 앞으로도 아주 긴 편지 못 쓸 듯합니다. 여러 날에 걸쳐서 쓰면 좀 길게 쓸지도 모르겠네요. 편지를 쓰면 바로 보내고 싶어서 그건 어렵겠습니다. 저는 거의 편지를 쓴 다음날 보내고, 아주 가끔 그날 써서 보내기도 해요. 편지를 거둬가는 시간 안에 쓰면 말이죠.

 

몇 해 전에 저한테 괜찮은 엽서가 좀 있었는데, 여름에 비가 엄청나게 와서 집안까지 물이 들어오는 바람에 그 엽서는 쓸 수 없게 되었습니다. 아끼다 못 썼다고 해야겠네요. 그렇게 된 게 엽서만 있었던 건 아닙니다. 편지지에 책에 공책에……. 아직도 그때 일어난 일 때문에 여름이 오면 비 많이 올까봐 걱정한답니다. 저도 이런 제가 좀 싫어요. 언제쯤 그 걱정을 안 하고 살까요. 일층이 아닌 데서 살면 그만할지도 모를 텐데요. 어떤 일이든 자신만 피해가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나쁜 일일지라도 편하게 받아들여야겠습니다. 이 엽서집이 나온 곳을 보면 어떤 그림이 있는지 볼 수 있어요. 작가가 어떤지 잘 모르지만, 이렇게 작가 이름을 알게 된 것만 해도 괜찮지 않나 싶습니다. 엽서집에서 그림을 떼어서 액자에 넣고 벽에 걸어도 좋을 듯합니다. 그림이 작아서 가까이에 두고 봐야 하지만. 가까운 곳에 그림을 두고 보는 것도 마음에 도움이 되겠지요. 그런 거 저도 해 본 적 없는데 이런 말을 했습니다. 누군가한테 짧은 말을 써서 보내도 좋을 테지요.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나면 편지는 없어질까요. 그때까지 제가 살아있을지 모르겠지만, 편지는 없어지지 않으면 좋겠습니다. 제가 그러기를 바란다고 해서 없어질 게 없어지지 않을 리 없겠지만. 아직 편지가 사라지지 않아서 다행입니다. 저한테 편지는 말하는 것과 같아요. 목소리를 내서 하는 말보다 글로 하는 말을 더 좋아합니다. 그래도 가끔 누군가와 이야기를 나누고 싶기도 하지만, 그게 편지여도 괜찮아요. 편지는 바로 대답하지 않고, 시간을 들여서 생각할 수 있으니까요. 이 말은 답장을 늦게 써도 괜찮다는 게 아니고(가끔 늦게 쓸 때도 있군요), 말은 다른 사람이 저한테 하면 거기에 바로 대답해야 하지만 편지는 말처럼 바로 하지 않아도 괜찮다는 거예요. 편지는 가는 데 사나흘, 오는 데 사나흘 걸립니다. 제가 말하는 시간은 바로 이때예요. 다 아는 것을 이렇게 말했습니다. 어쩐지 편지를 쓰자 같은 말을 한 듯합니다. 이런 말을 하는 저는 지난 이월에 편지 많이 못 썼습니다. ‘이 책 다 보면 써야지’ 하면서 미뤘거든요. 어쩌면 할 말이 떠오르지 않아서 그런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편지도 재미있게 쓰고 싶은데 재미있는 일이 없어서. 자꾸 쓰다보면 한 말 또 하고 또 합니다. 그럴 때 짧게 엽서를 쓰면 되겠군요. 앞에서도 이런 말을 했네요.

 

지난달이 가기 전에 편지 두 통 썼습니다. 이월이 오고 얼마 안 됐을 때 받았는데, 답장은 이월이 다 갈 때쯤 썼네요. 본래는 며칠 더 늦게 쓰려고 했는데 어쩐지 그러면 안 될 듯해서 한통 쓰고, 다음날 다른 편지를 보고(받은 날 안 보고 편지 쓴 날 봤습니다. 그 편지를 보면 바로 쓰고 싶어질 것 같아서 그랬는데 실제 그랬습니다. 편지 받으면 거의 바로 쓰는데 그 두 통은 그러지 못했습니다) 그날 썼습니다. 주말이 끼어 있어서 삼월에 보냈어요. 바로 쓰는 것도 괜찮지만 그렇게 시간을 두고 쓰는 것도 괜찮은 듯합니다. 이월에는 시간을 좀 많이 두었지만. 삼월에는 즐겁게 써야겠습니다. 이렇게 생각하고 또 ‘이 책만 다 읽고’ 할지도 모르겠네요. 언젠가도 예전에 편지를 많이 쓰고 지금도 쓴다는 말을 했는데, 이번에도 이런 말을 했네요. 이것도 쓴 이야기 또 쓰는 거군요. 사실은 지난해 십이월에도 그런 말 썼습니다. 지금까지 제가 가장 많이 쓴 건 편지였다고. 뭔가 써야 한다고 생각하고 편지를 쓰던 때도 있었습니다. 지금은 그냥 쓰죠. 편지 때문에 무슨 일이 있었다, 하는 이야기가 아니어서 재미없지요. 그런 일이 없다는 게 조금 아쉽습니다. 별걸 다 아쉬워하는군요. 별일 없어도 앞으로도 편지 쓸 거예요. 편지 쓰는 게 특별한 일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사실은 쓰는 제가 더 즐겁습니다. 다른 것도 즐겁게 쓰면 좋을 텐데요.

 

 

 

 

 

 

 

날아서

 

 

 

오늘 전 여행을 떠나요. 희진이가 친구 영주한테 저를 보내려 하거든요. 사람들이 여행을 좋아하는 것처럼 저도 여행을 좋아해요. 비록 평생에 한번뿐이지만 멋진 여행이 될 거예요.

 

하지만 그곳에 가면 향수병에 걸릴지도 모르겠어요.

 

 

 

 

아침에 희진이는 영주한테 이것저것 하고 싶은 말을 제 몸 위에 썼어요. 영주는 단짝이었는데, 얼마전에 다른 곳으로 가서 섭섭했나봐요. 그래도 보고 싶다고 쓰더군요.

 

제 옷에 주소 쓰는 걸 보고 전 놀랐어요. 서울도, 부산도, 대구도 아닌 미국이었거든요.

 

희진이는 할말을 다 쓰고 기분 좋게 벌어진 제 옷을 풀로 붙였어요.

 

 

 

 

떠날 시간이 오니 아쉬워요. 그래도 희진이 마음을 갖고 가는 거니까 그렇게 슬프지 않아요.

 

‘음, 이 편지가 정말 갈까?’

 

희진이가 이런 생각을 하면서도 저를 들고 우체국에 갔어요.

 

제가 미국에 가려면 우푯값이 더 드는가봐요.

 

희진이는 우체국에 들어가자 저를 우체국에서 일하는 사람한테 내밀었어요. 그 사람은 저를 저울 위에 올렸어요. 그때 희진이가 그 사람한테 말을 했어요.

 

“여기에 붙일 그냥 우표로 주세요.”

 

그 말을 듣지 못했는지 그 사람은 우푯값만 말하고 저를 자기 앞으로 가지고 갔어요.

 

희진이가 가만히 서 있자, 그 사람은 자신이 우표를 붙이겠다고 했어요.

 

희진이는 아쉬운 듯 저를 한번 바라보고는 우체국에서 나갔어요. 그 사람은 제 옷에 기계에서 나온 우표를 붙여줬어요. 그러고는 외국으로 가는 친구들이 모여 있는 곳으로 저를 갖다뒀어요.

 

다들 외국으로 가는 것이 슬픈지 울먹이는 모습으로 있었어요. 전 씩씩하게 울지 않았어요. 그러고는 잠에 빠져 들었죠.

 

 

 

 

얼마나 잤을까 깨어보니 둘레가 어두웠어요. 무슨 기계 돌아가는 소리가 작게 들리는 것도 같았어요.

 

“여기는 어디지?”

 

“여긴 비행기 안이야.”

 

옆에 있던 커다란 상자가 말했어요.

 

“비행기가 뭐죠?”

 

“하늘을 나는 기계야. 사람도 이 기계를 타고 하늘을 날지.”

 

“우리는 지금 하늘 위에 있는 거군요.”

 

“맞아.”

 

“상자 님도 처음 비행기를 탔을 텐데 잘 아시는군요.”

 

“그런 건 그냥 알게 돼 있어.”

 

우리가 이야기를 나누고도 비행기는 한참 날아갔어요.

 

비행기가 멈추자 사람들은 우리들을 다시 차로 옮겼어요. 피곤이 몰려와서 저는 잠이 들었어요.

 

 

 

 

제가 깨어났을 때는 캄캄한 곳에 혼자 있었어요. 갑자기 밖이 밝아지더니 어떤 손이 저를 꺼냈어요.

 

저를 받아야 하는 영주였나봐요. 영주는 저를 보고 활짝 웃었어요. 힘든 여행이었지만 영주가 웃는 걸 보니 제 마음도 기뻤어요.

 

 

 

 

이제 저는 희진이 마음을 담은 채 영원히 이곳에 있어야 해요.

 

전 깊은 잠에 빠져들 거예요. 언젠가 또 다른 제가 영주한테 찾아올지도 모르죠.

 

 

 

 

*더하는 말

 

편지는 가면서 잠만 자더니, 그곳에 가서도 잠이 드는군요. 편지가 누군가와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건 아니네요. 이건 예전에 쓴 건데, 조금 고쳤습니다. 좀 더 고쳤으면 좋았겠지만, 더할 말이 생각나지 않아서. 자주 쓰는 게 편지여서 편지와 관계있는 걸 쓰기도 했네요. 지금은 떠오르는 게 없다는 게 아쉽습니다. 별로 생각도 안 하면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조금 생각했을 때는 떠오를 것 같으면서 떠오르지 않았습니다.

 

 

 

희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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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3-04 13:5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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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3-05 02:45   URL
비밀 댓글입니다.
 
쿠쉬나메 - 신라 공주와 페르시아 왕자의 사랑
배유안 지음, 강산 그림, 이희수 원작.자문 / 한솔수북 / 201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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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이라는 나라가 있기까지 이 땅에는 많은 나라가 서고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이런 생각을 하다보니 ‘한국’이 몇백년 몇천년 뒤에도 한국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라 이름이 바뀐다고 해도 이곳에서 살아가는 사람은 쉽게 바뀌지 않겠지. 누군가 이곳에 와서 나라를 빼앗고 여기 사는 사람들을 모두 다른 나라로 쫓아내지 않는 한. 이것은 조금 무서운 생각이구나. 한 나라를 다스리려고 하는 사람한테는 그 나라에서 살아가는 사람도 있어야 한다. 아주 넓은 땅에서 혼자 살아가고 싶다고 하지 않는다면. 이런 생각까지 하다니. 자기가 사는 나라 역사를 배우는 건 옛 사람한테서 가르침을 받기 위해서겠지. 우리는 역사에서 좋은 것은 본 받고, 안 좋은 것은 왜 안 좋은지 생각한다. 우리나라 역사를 잘 안다고 말하기 어렵다. 학교에서 조금 배운 것밖에 모른다. 그것도 오래돼서 거의 잊어버렸다. 학교 다닐 때 국사 시간 별로 안 좋아했다. 나라가 서고 스러진 연도, 왕이나 중요한 사람 이름, 법(제도) 그런 것을 외우게 하고 시험에는 그런 것만 나왔다. 지금은 학교에서 우리 역사 어떻게 가르칠까. 예전과 크게 다르지 않을 듯하다.

 

역사를 알아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그런 책을 잘 찾아서 보지 않는다. 우연히 소설을 보면 거기에서 조금 배우기도 한다. 역사책보다 소설이 더 재미있고, 소설에는 딱딱한 이야기보다 사람 이야기가 적혀 있어서 그게 좋은 건지도. 이렇게 말했지만 역사 소설도 그렇게 많이 본 건 아니다. 그때는 이런 생각을 한다. 역사 배경을 잘 모르는데, 하는. 다행이라 할 수 있는 건 책을 보기 전에 그런 생각을 하는 건 아니다는 거다. 책을 보면서 그런 생각을 한다(책 보기 전에 한 적도 있을지도). 이런 말을 하다보니 내가 역사책을 보고 별로 상상하지 못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책 속에 있는 글만 보고 그때 사람이 어떻게 살았을까 상상하지 못했다. 그런 것을 상상하고 역사 시간을 보낸 사람은 역사를 좋아했을 것 같다. 학교에서 역사를 재미있게 가르쳐주지 않는 것만 탓할 수 없겠다. 상상력 없었던 나를 탓해야겠다. 어릴 때 책을 거의 읽지 않아서 그런 건지도. 역사에서 책읽기 이야기를 했구나. 아주 상관없지 않을 듯하다. 내가 어렸을 때는 어땠는지 잘 모르겠지만, 지금은 이런저런 책이 많다. 어린이가 볼 만한 책도. 거기에는 우리나라 역사를 바탕으로 쓴 이야기도 많을 거다. 이름이 잘 알려진 사람 이야기가 더 많을지도 모르겠지만. 그것을 읽어보는 것과 안 읽어보는 것은 차이가 나지 않을까.

 

우리가 고구려, 백제, 신라 세 나라로 나뉘었을 때 어디나 세 나라를 하나로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세 나라가 친하게 지낸 적도 있었을 텐데. 나라를 하나로 만들려고 한 것은 나라를 크게 만들기 위해서였을까. 이런 생각밖에 안 드는구나. 본래 한 나라였기 때문인 것도 있었겠지. 그때 사람 진짜 마음은 어떤 거였을까. 세 나라를 하나로 통일한 곳은 신라다. 그때 힘을 많이 쓴 사람 가운데 한 사람은 김유신이다. 이 이야기는 여기까지 하고, 책 제목인 ‘쿠쉬나메’는 페르시아 대서사시다. 신라와 페르시아를 잇기 어렵지만, 신라가 통일신라가 되기 전에 나라를 잃은 페르시아 왕자가 신라에 온 이야기가 쿠쉬나메에 적혀있다고 한다. 그것이 알려진 것은 2010년이다. 우리뿐 아니라 옛날에 페르시아였던 이란도 모르는 역사가 깨어났다. 쿠쉬나메에는 신라 공주가 페르시아에 가서 페르시아 영웅 페리둔을 낳았다는 말도 있다고 한다. 나라를 잃고 신라에 와 도움을 받은 왕자는 아비틴이고 아비틴과 결혼하는 공주는 프라랑이다. 신라 태종무열왕 자식 가운데 이름이 프라랑인 사람이 있었는지 찾아봤지만 나오지 않았다. 원효대사와 결혼해서 설총을 낳은 요석 공주는 나왔는데. 태종무열왕 이름은 김춘추다. 딸 이름을 프라랑이라 지을까 하는 생각을 잠시 했다. 어쩌면 쿠쉬나메에 프라랑이라 적혀 있는 건지도. 신라에서는 그 기록을 남겨두지 않은 건가 보다. 아니면 우리가 그것을 찾아내지 못한 건지도 모르겠다. (이 책을 읽고 시간이 좀 지나서 다른 책을 봤는데, 우리나라가 한자를 받아들여서 한자 때문에 성이 중국식으로 바뀌고, 글을 쓸 때도 한자를 우리말식으로 썼다고 한다. 오래전 기록이 지금까지 남아 있지 않은 게 안타깝다. 신라에서 향찰로 쓴 향가도 그렇게 많이 남아 있지 않고 그것을 해석하기도 어렵다고 한다.)

 

아주 먼 옛날 신라 공주는 외국 사람과 결혼하고 자신이 나고 자란 나라를 떠나다니. 식구들과 헤어지는 것이 많이 슬펐을 것 같다. 가까운 곳이라면 가끔 만날 테지만, 페르시아는 아주 먼 곳이어서 두번 다시 만날 수 없다는 것을 알았을 텐데. 그런 용기를 내다니 대단하다. 공주와 자기 아들을 결혼시켜서 무엇인가 이루려고 한 사람 때문에 그런 결정을 한 거지만. 꼭 그것 때문만은 아니었다. 프라랑도 아비틴을 좋아했다. 작가가 상상으로 썼다 해도 진짜 그랬으리라고 생각한다. 억지로 다른 나라에 가서 높은 자리에 올라간 사람도 있지만(원나라 기황후, 잘 모르는데 생각났다). 우리나라에는 대단한 여성이 많은 듯하다. 프라랑은 공주로서 페르시아 왕자와 결혼한 거지만. 페르시아로 가고 몇해 뒤 아비틴은 죽는다. 프라랑은 페리둔을 지키고 키웠다. 그 이야기는 짧게 나오지만, 그 시간 그리 쉽지 않았을 것 같다. 아비틴과 프라랑 아들 페리둔은 페르시아 왕이 되고 신라를 도와 당을 물리쳤다. 신라가 고구려, 백제와 싸울 때 당나라한테 도움을 받는다. 당나라가 아무것도 바라지 않고 신라를 도와준 건 아니었다. 나중에 신라는 당나라 때문에 골치를 썩였다. 이때 페르시아가 도움을 주었나보다. 이것도 우리 역사에 기록되지 않았거나 찾지 못한 것 같다.

 

지금을 살아가는 사람은 자신이 살아온 시간은 알지만, 자신이 살지 못한 시간은 모른다. 그것을 알게 해 주는 게 역사다. 역사는 바뀌지 않지만 그 안에 우리가 모르는 새로운 것은 많을 거다. 페르시아 대서사시 쿠쉬나메에 적힌 신라와 페르시아 관계를 찾아낼 수도 있고, 오래전에는 밝힐 수 없었지만 지금은 말할 수 있는 것도 있을 거다. 그것을 먼저 알게 되면 많은 사람한테 알려주면 좋겠다. 무엇인가 찾아내도 그것을 바로 말할 수 없을지도 모르겠다. 그게 진짠지 가짠지 증명해야 할 테니까. 우리가 몰랐던 역사를 새로 아는 건 즐거운 일이다. 역사학자가 새로운 것을 많이 밝혀내면 좋겠다.

 

 

 

희선

 

 

 

 

☆―

 

“공주님은 신이 내린 운명을 믿으십니까?”

 

“글쎄요. 아직은 ‘이것이 운명이다’ 하는 것을 만나 보지 못해서요.”

 

“한번도 들어본 적도 없는 신라 땅에 와서 이렇게 시를 읊고 있으니 문득 운명이라는 말이 떠오릅니다. 우리 조상 잠시드는 분명 까닭이 있어서 나를 이리로 이끄신 것 같습니다.”

 

“무슨 까닭인가요?”

 

“아직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잠시드가 곧 알려주실 것입니다.”  (74쪽)

 

 

“페리둔을 감추어야 합니다. 나는 페리둔을 페르시아 왕으로 키울 것입니다. 그래서 아비틴의 한을 풀고 그가 하려던 일을 하게 할 것입니다. 운명이 나에게 맡긴 일을 해낼 것입니다.”  (21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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