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스트 인 서울
방현희 지음 / 자음과모음(이룸) / 201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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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스트 인 서울' 서울에 대한 이야기일까? 내가 제일 싫어라 하는 도시가 다른 도시도 아닌 '서울'이다. 서울하면 갑갑하고 도통 나하고는 맞지 않는다.그런 도시에 딸들이 살고 있고 녀석들을 위해 한 달에 한번은 올라간다.작년에도 큰딸을 위해 반찬을 해 나르느라 고속도로를 누비고 다녔고 올해는 두녀석이 모두 객지생활이라 두녀석을 위해 한 달에 한번 서울행을 한다.그렇다고 많이 돌아다니는 것도 아니고 늘 정해진 길을 가는데도 아직도 낯선 동네가 바로 '서울'이다. 낯설음이 쉬 내게서 사라지지 않는다.언제쯤 서울이라는 곳이 단단한 겉껍질을 벗고 나와 환하게 대면할 수 있을까.

 

저자의 소설은 이 책이 처음이다.그러니 더욱 낯선 책이 되었다.서울도 낯설고 저자도 낯설고. <로스트 인 서울>,서울은 많은 이방인들이 와서 꿈을 찾으며 사는 도시이기도 하다. '코리안 드림'으로 우리나라에 와서 사는 외국인들이 서울에만 많은 것이 아니라 지금은 어딜 가도 참 많다. 나 또한 그런 중국인 아줌마를 알고 있고 아줌마는 중국에만 들어가면 남의 나라 같이 낯설어 다시금 우리나라를 찾고 한다.지난해 중국에 들어갔다가 언니가 입원을 하고 있어 병원에 갔는데 떡 하니 나타나서 깜짝 놀랐다.며칠전에 한국에 다시 들어왔단다.한국이 좋단다.왜 어디가 한국이 그렇게 좋을까? 여기 <로스트 인 서울>에서도 한국에 공부를 하러 왔다가 우연하게 방송을 하게 되고 그것이 계기가 되어 결코 '희극'의 삶이 아닌 삶을 서울에서 살게 되는 그렉안나,그녀는 외모가 뛰어나 외모로 먹혀 들었다가 말을 잘못하면서,누군가가 원하는 말이 아닌 말을 쏟아 내면서 그녀의 삶은 비극으로 떨어져 내려갔고 기둥처럼 붙잡게 된 남자에게서 버림받는,코리안 드림처럼 왔던 서울에서 비극의 삶 속에서 사라져 버린다. 과연 그녀의 삶은 꿈은 열정은 어디로 사라진 것일까,서울에서 말이다.그녀의 삶을 '비밀의 방'에서 지켜 보게 된 나, 그녀를 어디에서 찾아야 한단 말인가.

 

<세컨드 라이프>,중국의 가흥,낯선 골목에서 거리에서 나는 이상한 느낌을 받는다. 전생에서 살았던 것처럼 아니 어느 세월 나는 분명히 여기에서 살았다. 그 낯선 골목에서 거리에서 살았던 인물들과 건물등 모든 것들을 기억하고 있다. 그런데 그것을 믿을 수 없는 아내,남편의 말을 어떻게 받아 들어야만 할까? 분명 그 시간을 자신도 기억하고 있는데 그렇다면 '두번째의 삶'이 현재일까 과거일까? 도대체 무엇이 진짜인지 알지 못하겠는데 남편은 너무도 또렷하게 가구 하나하나의 질감에서도 사람에 대한 기억도 너무도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다. 그렇다면 그는 현실을 살고 있는 것인가 과거를 살고 있는가. 몽환적이면서 환상적이라고 할까? 이 알 수 없는 현실을 무엇이라 해야하나. '데자뷰'도 아니고 과거 어느 긴 시간이 한꺼번에 다른 삶을 살았다고 느낀다면 어떨까? 잠깐의 일이라면 이해를 하겠는데 이것은 8년이라는 긴 시간이기에 이해를 할 수 없다.현실도피도 아니고 말이다. 정말 '세컨드 라이프'는 있었던 것일까? 아니면 지금 현재가 세컨드 라이프라는 것일까? 우리의 기억이란 것을 믿을 수 있는 것인가?

 

그토록 행복했고 그토록 고통스러웠던 기억은, 아무것도 없는 지금보다 나은 게 아닐까? 지금은 그 삶의 잔여로서 흘려 보내고 있을 뿐인데, 이 하찮은 삶을 위해 기억을 버려야 하는 걸까?

 

 

<탈옥> 그는 밖에서 돈을 주무르는 일을 했는가보다. 사료와 관련한 주가를 쥐락펴락하며 사람 위에 돈 위에 군림하고 살다가 어느 노인을 통제하지 못해 감옥에 오게 되었다. 돈을 조금 주어 회유를 했어야 하는데 그러지 못하고 자신의 뜻만 내세우다 꺾이고 말았다. 그것을 감옥 밖에서는 알지 못하고 감옥에 와서야 알게 된다. 하지만 이남자,늘 탈옥을 꿈꾼다.어떻게 자신의 장기를 무기로 내세우면서 장기를 하나씩 때내는 그 시간을 '탈옥'의 절체절명의 시간으로 잡는다.하지만 번번히 실패하여 다시금 자신의 방에 갇히고 만다.그렇게 자신의 장기는 탈옥이라는 벽앞에서 하나 둘 생명을 달리하며 죽아가고 점점 더 그는 극심한 고통에 시달리면서도 '탈옥'이라는 꿈과 끈을 놓지 않는다. 그가 탈옥할 수 있을까? 자신의 장기를 인질(?)로 내세우듯 하면서 감옥의 벽을 당당하게 벗어날 수 있을까? '없다' 불가능한 일을 하고 있다. 그의 꿈이라는 것이 너무도 허망하다.어떻게 자신의 장기를 없애가면서 탈옥을 감행하는가.있을 수도 없고 그렇게 모든 것이 자신에게 호락호락하지도 않다는 것을 언제쯤 알게 될까? 그에게 남겨지는 것은 그렇게 해보았자 '죽음'밖에 없다. 자신의 장기를 내세우는 일은 정말 죽음과의 싸움이라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그 남자의 손목시계> 그남자는 똑같은 시간에 골목에 나타나 사라진다. 그 남자는 시계를 아끼는지 그가 차고 있는 시계는 독특하면서도 유별나다.그의 뒤를 쫒으며 그이 정체를 밝혀 보려고 한다. 왜 그가 엄마의 얼굴을 멍들게 했는지 엄마에게 폭력을 행사하는지 알고 싶기도 하다. '그 남자'로 표현된 남자는 다름아닌 자기가 '아버지'라 부를 수 있는 인물이다. 하지만 아버지라 부르기 보다는 남처럼 그를 미행하고 그의 정체를 밝히며 그의 시계에 주목하게 되고 그가 만나는 여자에 관심을 기울이게 된다.그는 직업이 뭘까? 자신이 보기엔 엄마에게 폭력을 행사하는 인물인데 밖에서 그는 중후하고 묵직하며 여자들에게 예절도 뛰어난다.그런데 그가 보는 '그 남자'는 그렇지 않다. 집 안에서의 현실과 집 밖에서의 현실이 다르다. 사람은 처봐야 안다고 한다. 부딪혀 보고 말해보고 함께 뒹굴어 봐야 그사람의 '속'을 알 수 있다.아무리 남이 좋게 평가해도 내가 함께 하다보면 남이 보지 못한 단점에 내가 먼저 손을 들게 되는 경우도 있다. 그렇게 그의 정체는 수면위로 떠 오르며 그가 관계했던 여자의 정체도 밝혀진다.

 

7편의 단편은 서로 제각각 다르다고 느껴지면서 어느 순간 수평선에 놓인 것처럼 연관이 있음을 알 수 있다.'비의로 가득 찬 생의 이면, 정상과 비정상의 경계, 사회적 금기, 욕망의 억압과 해방을 작품의 주된 주제로 삼아온 작가는 이번 소설집에서 일단의 변화를 내비친다.' 그런가하면 '‘서울’은 “한국의 수도라는 특수한 ‘공간’이 아니라 (탈)근대 도시의 보편성을 함유한 ‘장소’”(허희, 문학평론가)로서 제시된다. 작가는 ‘병든 서울’에서 “꿈을, 기억을, 자유를, 가족을, 사랑을, 자신을, 삶을 상실하고 있”는 인물의 심리적 움직임을 미세한 결까지 잡아낸다.' 작품 소개에서 옮겨 본다. '로스트 인 서울' 처럼 뭔가 꿈을 이룰 것만 같던 그렉안나의 삶은 '희극'이 아니라 '비극' 되었고 탈옥에서 주인공은 자신의 장기를 매계로 감옥을 벗어나려고 하지만 그것이 이루어 질 수 없는 일이란 것을 알면서도 또 시도를 한다. '세컨드 라이프' 는 처음 가는 곳이면서 자신이 그곳에서 살았다고 말을 한다.아니 기억한다. 그 기억을 믿을 수 있을까? 현실인지 과거인지 미래인지 모를 이야기를 한다. '그 남자의 손목시계' 또한 그는 현실에서 아버지지만 그의 삶을 잘 모른다. 그렉안나가 꿈 꾸었던 그 삶,깨어진 꿈과 잃어버린 미래,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처럼 우리는 그런 현실속에 살고 있다. 무언가 이 현실을 벗어나고 싶어 하지만 현실에 갇혀 살기도 한다. 현실이라는 오늘은 곧 과거가 되고 현실은 또 미래가 될 수 있다.독특한 소설 속에서 잠시 나도 현실을 잊고 몽환적인 어느 거리에 내 몰린 것처럼 잠시 현실을 잊었다. 그렇게 작가를 기억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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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친구 기리시마 동아리 그만둔대 - 제22회 스바루 소설 신인상 수상작 자음과모음 청소년문학 31
아사이 료 지음, 이수미 옮김 / 자음과모음 / 201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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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일곱살의 세상을 그렸다. 그들이 동아리활동을 통한 세상을 이야기 해서'파란 세상'이라 칭해 보았다. 아직 때묻지 않은,그런가하면 학교안에서의 세상과 학교밖의 세상은 다르다는 것을 아직 감지하지 못한 풋풋한 소년 소녀들의 이야기다. 제목에 '기리시마'가 나오지만 이야기 속에서 기리시마는 어디에도 등장을 하지 않는다.거기에 일본은 우리와 교육제도가 달라서인지 동아리 활동이 빠져 나올 수 없이 모두가 이수해야 하는 과정인듯 하다. 우린 동아리 활동에 중요도를 그리 주지 않지만 그들은 기본적으로 동아리활동을 열심히 하고 그 속에서 성과 또한 학교에서 따지는 평가도도 중요한 듯 하다.

 

그와 처음으로 이야기를 나눴다는 사릴에 나는 약간 흥분 상태가 되었다.저쪽 그룹 아이들과는 접촉할 기회도 없었고 그래서도 안 된다고 생각했다.

 

'기리시마'는 배구부의 주장이었다.빛과 같은 존재인데 그가 동아리 활동을 그만둔단다. 그렇다면 누군가 다른 학생이 기리시마가 맡았던 역할을 해야 하고 배구부의 위치도는 바뀔 것이다. 기리시마는 말하자면 '위'와 같은 존재였다. 밑에 있는 '아래'의 아이들이 바라보기엔 정말 높은 곳에 위치하면서도 모범생과 문제아 정도로 급이 다른 친구엿다.그런 친구가 동아리 활동을 그만둔다고 하면서 일파만파 학교내 동아리활동을 하는 친구들에게 퍼지는 '나비효과'가 같은 이야기를 그려내고 있어 기리시마는 실상 이야기 속에 등장을 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의 존재는 무척 컸나보다.

 

나는 분한 마음에 에리카에게 사실을 말할 수 없고,그러면서도 카레 말고 하이라이스를 먹어야겠다는 말은 잘도 하고, 하지만 "카오리는 이제 없어. 난 미카야" 라고 말하지 못하고,나는 뭐랄까 좀 더,내면적으로, 이 사람에겐 중심이 있구나.라고 생각하게 할 만한 인간이 되고 싶은 것이다.

 

저자가 19살에 17살 친구들의 이야기를 쓴 소설이다. 우리와는 다른 문화권이라 약간은 조금 읽어나가며 '뭔가'하는 생각도 해 보았지만 읽다보니 그들의 위,아래 그리고 학교에서의 안과 학교 밖의 이야기인 안과 밖의 대립된 이야기가 펼쳐진다. 아이들은 학교를 졸업하면 좀더 넓은 물로 나아가게 된다. 대학을 가든 사회에 나가든 그야말로 '사회인'이 되는데 아직은 학교 안에서 그들만의 파란세상에 갇혀 있다. '미카가 카오리'로 살아야 하는 것처럼 그들은 아직 자신의 정체성을 정확하게 인지 하지 못한 삶을 살고 있다. 미카는 아버지와 살다가 카오리라는 언니와 새 엄마와 한 식구가 되었다.하지만 아버지와 언니 카오리가 대입을 보러 가는 길에 교통사고를 당하고 아무도 살아 남지 못하는 큰 사고를 당하면서 그의 새 엄마는 그녀를 미카가 아닌 자신의 딸 카오리로 기억을 한다. 하지만 미카는 카오리가 아니라 '미카'로 살고 싶고 엄마에게도 그렇게 기억되고 싶다. 하지만 현실은 미카가 아니라 카오리다.자신의 정체성에 그녀는 흔들리고 있다. 열일곱이라는 나이가 그런 나이인듯 하다. 동아리 활동 또한 아직은 정제성을 두기엔 무엇하지만 그들의 관계 속에는 위와 아래가 정해져 있다.

 

우리는 아직 열일곱 살이고, 앞으로 뭐든 하고 싶은 걸 할 수 있고, 희망도 꿈도 모두 갖고 있다고는 하지만, 사실이 아니다. 앞으로 뭐든 손에 넣을 가능성을 품고 있는 손바닥만 있을 뿐, 지금은 그저 텅 비어 있다.

 

열일곱이란 나이는 아직 무언가 똑바로 중심을 세우기엔 아직 이르다. 많이 부족한 나이지만 영화부의 친구는 영화를 찍어 상을 받기도 하고 교장선생님은 그들을 '하얀 도화지'라고 표현을 한다. 하얀 도화지에 무언가 아직 채워지지 않았고 마음껏 그림을 그릴 수 있는 준비가 된 나이라고 본다. 하지만 정말 그들은 하얀 도화지일까? 아래의 아이들은 위의 아이들은 가득 채워져 있다고 본다. 그런데 가득 채워져 있다고 할 수 있는 '기리시마'는 왜 동아리활동을 그만 둔 것일까? 모두에게 그는 완벽한 친구였는데 그가 무너지듯 동아리를 그만두고 그들은 자신의 정체성과 교장 선생님이 늘 말하는 '하얀 도화지'에 대하여 생각을 해보며 자신을 다시 보게 된다.

 

괜찮아, 넌 다시 시작할 수 있어.라고 기리시마에게 말해주자. 너는 나와 달리, 지금까지 진심을 다해 맞서 왔잖아. 그런 사소한 일로 포기하면 아까워, 라고 말해주자.

 

열일곱이란 나이는 금방 상처를 받고 살얼음 같아 작은 충격에도 산산이 부서질 수 있는 나이다. 그런 친구에게 '칭찬'과 '격려'를 해주려는 친구, 기리시마가 어떤 이유로 동아리를 그만 두었는지 그저 팀원들과 불화가 약간 있었던 것 같은데 그런 일로 그만두게 되었다면 '아래'의 아이들은 어떨까? 친구의 스치듯 하는 한마디에도 크게 흔들리는 나이인 열일곱 그들에게 박수를 보낸다. 열일곱이란 나이는 부모나 선생님보다 친구의 작은 응원이 더 힘이 나는 나이기도 하다. 분명 친구들의 응원에 기리시마도 친구들도 모두 열심히 맡은바 동아리 활동을 열심히 할 것이리고 열일곱을 지나 다른 시간으로 그렇게 힘차게 걸어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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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비 제너레이션 - 좀비로부터 당신이 살아남는 법
정명섭 지음 / 네오픽션 / 201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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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비란 무엇인가? '살아 있는 시체들'이다. 부두교 주술사들이 저주를 걸어 탄생시킨 살아 있는 시체,영혼이 없는 시체들이 세상에 나타나고 그것이 바이러스처럼 급속하게 퍼져나가 내가 어제까지 아니 방금전까지 알고 지내던 '사람'이 '좀비'가 되어 내 생명을 위협하고 있다면, 그런 세상에서 살아 남으려면 어떻게 해야할까? 좀비는 영화속에나 존재하는 것 같지만 요즘은 '신종 바이러스'다 뭐다 해서 정말 세상이 시끄럽고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는 가운데 '좀비 제너레이션' 은 좀비 세상에서 생존하는 '생존 매뉴얼' 을 현실적으로 제시한 소설이다. 그것이 도시든 시골이든 대처법이 약간은 다른 듯 하면서 비슷하게 현실적인 대안법을 제시하고 있는데 '글쌔'하면서도 현실적인 이야기고 남의 나라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나라 서울에서 벌어지는 이야기라 더 현실적으로 다가온 소설이다.

 

작가가 얼마동안 바리스타여서인지 이야기의 시발점은 '카페'다. 부모님과 여동생이 어렵게 마련해준 돈으로 뒷골목 조금 후미진 곳 이층이지만 자신만의 카페를 내걸고 알바비까지는 여유를 부리지 못하지만 혼자서 열심히 카페를 운영해 나가는 그의 가게에 몇 번 왔던 동아리 모임이 그날도 있었다. 그들은 그의 눈에 거슬렸고 빨리 가주었으면 하는 손님들이었는데 그들이 가고 난 후에 남기고간 맥가이버칼과 '매뉴얼'은 정말 현시대에 쌩뚱맞은 이야기라고 치부해 버렸지만 다른 이들이들이 전해주는 이야기로는 그리 쌩뚱맞은 것이 아니었다. 역사 속에서 분명 있었던 '좀비'의 존재, 그는 매뉴얼을 그냥 읽어보게 되었는데 동아리손님들이 와 있던 그 시점에 서울에 불시착하듯 비행기가 추락하고 그 뉴스는 쉬쉬하듯 지나가는데 그후로 급속도로 반전의 세상이 도래한다. 신종바이러스처럼 급속도로 확산된 '좀비'가 서울을 장악하듯 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동아리모임 손님들이 놓고 간 '매뉴얼'이 실제 상황에서 필요한 것이 될까? 그는 그 매뉴얼을 이용하여 살아 남는 방법대로 움직인다. 카페에서 비상식량및 비상약품등을 챙기고 라디오를 듣고 불빛을 차단하지만 폐쇠된 공간에서의 그의 생존은 오래가지 못하고 아래층 라멘집 사장과 그곳을 벗어나야만 하는,좀비들이 그들의 가게에까지 쳐들어 오는 사태가 빚어진 것이다. 그렇다면 좀비가 이렇게 많이 확산되었다는 것인가. 좀더 좀비들이 어떻게 확산되고 파괴되어가는지 경과가 실감나게 그려졌다면 더 재밌는 이야기가 되었을텐데 주인공과 그외 사람들이 좀비로부터 살아남기 위하여 지형지물을 이용하여 숨거나 도망치며 라디오에서 들은 M타워를 찾아가는 그곳에서 탈출하는,마지막에도 탈출하는 부분도 조금 밋밋하게 그려졌다. 동아리모임 사람들이 다 완성하지 못한 [좀비 생존 매뉴얼]을 자신이 탈출을 하면서 자신이 겪는 이야기를 주축으로 하여 [매뉴얼]을 완성해 놓는 것으로 이야기는 끝이 난다.

 

그와 함께 좀비로부터 도망치려고 했던 이들 또한 모두 좀비가 되고 만다. 그들에게 자신이 살기 위하여 무기를 겨누어야 하는 마음 아픈 상황이 닥치기는 했지만 자신이 살기 위하여 그들에게 감정을 실지 않고 처단하는,그리고 자신만의 [생존 매뉴얼]을 완성해 내지만 뭔가 조금 약한 부분이 있다. 우리에겐 소방훈련은 익숙해도 '좀비 대응 훈련'이나 '좀비 생존 매뉴얼'은 글쎄 하지만 스마트폰 시대라고 하지만 먹통이 된다면 의지할 것이 없다.그야말로 아나로그속에 갇히게 되는데 그 속에서 살아 남는 방법은 동물적 감각뿐인듯 하다. [좀비 생존 매뉴얼]을 완성하는 모든 이야기의 축이 그 하나로 기울듯 하여 조금 아쉬운 부분이 많았지만 신종 바이러스도 그렇고 좀비도 그렇고 이젠 어느 한곳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는 듯 하다.좀더 이야기가 다채로워다면 더 재밌는 이야기가 되었을텐데 주인공이 살고자 '생존 매뉴얼'을 완성하기 위하여 한 몸 던져 좀비 세상에서 빠져 나온것처럼 조금 단조로운 맛이 있는게 흠이지만 어쩌면 더 많은 이야기의 서막이기도 할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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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하루 다른 행복 - 부처 핸섬, 원빈 스님과 함께 가는 행복의 길
원빈 지음 / 이지북 / 201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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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분 좋은 날은 세상이 아름답고, 기분 나쁜 날은 세상이 암담합니다.'그것'이 달라지니 세상이 달라집니다. 당신이 어떤 선택을 하든 이루어집니다. 당신이 보는 세상이 당신의 미래입니다.어떤 세상을 바라보실 건가요? 어떤 세상을 자녀에게, 후손에게 대물림해주실 건가요?

 

올해의 우리의 화두는 '행복'이라고 한다. 그래서일까 서점가에도 '행복'이 들어간 제목의 책이 더 많이 우리를 찾아 오는 듯 하다. 우리는 늘 '행복'을 꿈꾸지만 네잎클로버의 '행운'을 세잎의 '행복'을 지나쳐 더 많이 기다리기도 하고 원하기도 한다. 왜 늘 우리가 처한 현실이 '행복' 바탕위에 있는데 그 행복을 지나쳐 행운을 기대하는지. 행복과 불행은 동전의 양면처럼 생각하기 나름이다. 자신이 처한 현재의 상황이 행복이라 생각하면 행복이고 불행하다고 생각하면 불행으로 치닫는다.정말 위의 글처럼 기분이 좋으면 세상 모든 것이 다 아름답게 보이고 기분이 나쁘면 불행하다고 생각하게 된다. 암흑이다. 모든 것은 생각하기에 달려 있다.세상을 기분 좋게 아름답게 볼 수 있는 '창'을 열어 주는 '부처 핸섬', 원빈 스님과 함께 하는 시간 기분 좋았다.

 

연애인과 같은 이름의 원빈 스님,내가 가끔 가는 절과 인연이 있는 스님이라 더 친근감이 가서 친구와 이야기를 하는 기분으로 읽게 되었다. 원빈 스님이 페이스북에 올린 글이라 하는데 페친이 아니기에 몰랐는데 가끔 이런 글을 만나면 영양제처럼 하루가 에너지 충만하여 기분 좋은 하루가 될 수 있다. 행복은 타인이 줄 수 없다. 내 안에서 내 자신이 스스로 만들어 내는 '샘물'과 같은 존재이다.하지만 이런 기분 좋은 글을 읽으면 바이러스처럼 괜히 기분이 좋아지는 글,욕심을 내려 놓고 행복으로 충만하게 만드는 메시지들은 대부분 우리가 지키기에는 어렵지만 읽는 순간에는 내려 놓아야 되는 것을 알기에 그것으로 충분하다.

 

이기는 것은 좋은 것이고, 지는 것은 나쁜 것이라고 정해놓은 개념들을 위치성이라고 합니다. 이 위성을 놓아버릴 때, 즉 이기고 지는 마음을 초월할 때, 이기는 것에 더 이상 집착할 필요가 없어집니다. 진다고 해서 더 이상 슬퍼할 필요가 없어집니다.

 

우리는 늘 누군가를 이겨야만 하고 남보다 더 가지기를 원한다. 내가 가진 것을 내가 아직 가지지 못한 것을 '내려놓기'란 정말 힘들다. 내가 가진 것에 대하여 만족을 한다면 행복은 쉽게 얻을 수 있고 인정하게 되지만 내가 가지지 못한 것 때문에 '행복'은 자꾸만 멀어지게 된다. 행복은 먼 곳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 가까이 내 주변에 있다. 그것을 감지하지 못할 뿐이지 행복은 늘 나와 함께 있는 것이다.현대인들은 너무 바쁘게 살아가고 나를 보고 인정하고 받아 들이기 보다는 남을 따라가거나 남보다 더 '좋은' 위치 더 좋은 것을 원한다. 행ㅂ복을 지나 그 행복을 맛보기 이전에 다른 감정을 만나게 되는 순간이 많다.현재 자신에게 만족한다면 행복은 내 안에 있는데 그 '위치'를 보게 한다.

 

행복해지고 싶지만 불행하기만 한가요?

착각입니다.

아직 행복을 선책하지 않.았.을.뿐입니다.

행복을 선택하고 행복에 대해 배워야 합니다.

우리에게 무한한 가능성이 있다다는 것을 기억하세요.

 

행복을 선택하고 행복을 느낄 무한 가능성에 대한 이야기들이 결코 어려운 것들이 아니지만 평상시에 실천하기에 또 힘든 것들이 또한 너무 쉽다고 생각하는 것들일 수 있다. 나의 일상은 단조롭기도 하고 평범하기도 하다. 그 속에서 행복을 찾는 일이란 힘들다고 느끼겠지만 모든 것이 다 행복이라고 생각을 하면 나의 하루는 행복으로 충만하다. 내가 늘 함께 하는 식물들에게서도 어제와는 다른 오늘을 발견하게 되면 그것이 행복이다. 어제까지는 아니 몇 년을 키워도 꽃대를 올리지 않았던 것이라 꽃이 피려니 생각도 못하던 것이 '오늘' 갑자기 보다보니 꽃대가 올라와 있는 경우를 발견하게 되면 무한한 행복으로 빛이 난다.그런 경우가 며칠전에 일어났다. 몇 년 키운 사랑초에 꽃이 피지 않았는데 어느 날 갑자기 꽃대를 발견하게 되었다. 그것이 지금 꽃을 피우고 있는데 그것만 보아도 행복이다. 그 꽃은 내게 행복을 가져다 주었다. 그것이 결코 큰 것이 아니라 정말 작은,존재하는지 존재하지 않는지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면 발견하지 못하고 그냥 지나칠 수도 있을 식물인데 작은 꽃대 하나가 내 우주를 바꾸어 놓았다. 행복은 그런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먼저 연습하세요. 먼저 다가가보세요. 먼저 칭찬해주세요.먼저 사랑을 말하세요. 다가가는 것은 사랑이요,물러서는 것은 두려움입니다. 세상과 자신과 소통하고 싶다면? 한 걸음 더 세상을 향해 다가서세요.

 

부처 핸섬,원빈 스님의 말씀은 그런것 같다. '세상을 향해 한 걸음 더 다가가라' 물러서지 말고 두려움을 갖지 말고 다가가 사랑하고 칭찬하고 먼저 안아주는 것이다. 남이 내게 다가 올 때까지 무한정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내가 먼저 세상을 향해 한걸음 다가가는 것이다. 사랑은 받을 때도 물론 행복하지만 나눌 때가 더 행복하다. 내 안에 쌓아 놓을 때보다 나누고 베풀 때가 더 많은 행복을 느끼는 것이다.요즘은 있는 사람들이 자신의 모든 것을 내 놓아 많은 이들과 나누려는 세상이다. 그런가하면 한편에서는 더 많은 부를 축적하기 위하여 해서는 안되는 욕심으로 망치는 사람들도 분명 있다. 행복은 내것을 두레박을 퍼 올리며 남에게 베푸고 나눌 때 더 배가 되고 부풀어 오르는 것이다. 행복해지고 싶다면 그런 자신으로 나를 먼저 바꾸면 세상이 바뀐다. 내가 바뀌지 않으면서 세상이 바뀌길 기다리는 바보가 되지 말고 먼저 자신을 바꾸면 세상도 바뀐다는 값진 말씀들이 원빈 스님의 이야기에서부터 시작을 해서 기분 좋게 내 자신을 바라보고 인정하며 행복하게 해준다. 세상을 바꾸려면  힘들지만 내가 바뀌면 참 쉽다.그리고 행복하다.

 

지금까지 내가 소중히 여긴 고집은 나를 힘들게 만든 똥 덩어리일 뿐입니다. 인생이라는 등산, 그 냄새나는 고집을 끝까지 짊어지고 힘들게 가실 건가요? 던져버리고 가뿐하게 즐거운 마음으로 가실 건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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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 D현경 시리즈
요코야마 히데오 지음, 최고은 옮김 / 검은숲 / 201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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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 제목이 참 독특하다. 대부분 우리가 기억하는 국경일이나 그외 큰 사건이 있던 날은 숫자로 많이 불린다. 숫자 속에는 피해를 당한 이들의 고통과 그 고통을 현재진행형으로 껴안고 있는 가족들의 아픔까지 고스란히 담겨 있다. '요코하마 히데오'의 이 작가의 작품은 처음인데 그는 '경찰소설'을 쓰면서 사건이 아닌 '경찰' 그중에서도 외진 곳에서 있는 인물들을 더 부각시키고 사회문제와 함께 결부한 작품을 쓴다고 하는데 이 작품은 여기저기 소문이 대단해서 한번 읽어봐야겠다고 생각하던 차에 기회가 왔다.그런데 정말 두껍다. 대부분의 미스터리소설은 '사건'이 주가 되는데 이 작품은 '사람'이 주가 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64, '14년 전' 아마미야 쇼코 유괴 살인사건' 을 가리키는 기로호, D현경 관내에서 일어난 강력 범죄사건이었다. 몸값 2천만 엔을 고스란히 빼앗겼고, 납치된 일곱 살배기 소녀는 참혹한 주검으로 발견됐다. 아직 범인은 붙잡히지 않았다. 당시 수사1과의 특수범 수사계에 있었던 미카미는 ' 추적반'의 일원으로 몸값 인도 장소로 향하는 피해 아동 아버지의 차를 쫓았다.

 

소설의 시작은 미카미와 그의 아내인 미나코는 가출한 딸이 찾는다.그들은 소녀의 시체가 안치된 곳으로 가서 혹시나 가출한 딸인 아유미의 시신인지 확인을 하며 아유미가 아니어서 안심을 하지만 누군가는 딸의 시체를 보고 무너져 내릴 것이다. 그들은 딸이 어딘가에서 살아 있기만을 바란다. 그렇다면 미카미의 딸 아유미는 왜 집을 나갔을까? '외모' 때문이다. 아빠를 닮아 얼굴 어느 한 곳 자신의 맘에 드는 것이 없던 아유미는 마음의 병까지 얻어 병을 고치기 전에 집을 나가버렸다. 그로 인해 아내마져 마음의 병을 갖게 되었고 미카미는 20여년 동안 형사부에 있가 홍보담당관으로 인사이동을 하고 경찰이라는 조직과 기자라는 조직과 부딪히게 된다. 경찰과 기자, 물과 불의 관계 속에서 그들은 늘 부딪히게 되고 이 난국을 헤쳐 나가야 하는데 형사부에 속해 있던 미카미의 몸속엔 아직도 형사의 피가 흐르고 있는 것처럼 자꾸만 형사부쪽으로 맘이 기울게 되는데 소설 속엔 다시 형사부와 경무부의 마찰이 그려진다. 홍보담당관이면서 형사부를 응원하는 그에겐 어쩌다보니 이도저도 아닌 그런 형상이 되고 말았다. 이 난국을 슬기롭게 헤쳐나가려면 누군가는 총대를 메어야만 한다.선구자로 나선이가 미카미일까.

 

홍보실은 창문이다. 그렇게 말할 건 바로 담당관입니다.그런 분이 다른 경찰들과 마찬가지로 조직 편만 들면 어쩌라는 겁니까.바깥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조직에 쓴소리를 할 각오와 객관성을 갖춘 사람이 없으면 경찰은 영영 창문 없는 블랙박스로 남을 겁니다.그래도 괜찮다는 겁니까?

 

'64사건' 이 시효 만료 1년을 앞두고 경찰총장이 피해자 가족을 방문한다고 한다. 하지만 일차적으로 미카미가 피해자 가족을 만났을 때 그는 거절을 한다. 왜 일까? 그의 굳은살이 박힌 손과 그동안 아내가 뇌출혈로 인해 죽었다. 딸의 죽음은 또 다른 피해자를 남긴 것이다. 그리고 아마미야 또한 온전한 삶을 살지 않은것처럼 급노화가 왔다.일곱살 딸의 유괴 살인사건으로 인해 가족 모두가 피해자가 되어 삶을 잃듯 했다. 그 사건은 모두에게서 지워지듯이 아직도 범인을 잡지 못했고 이젠 경찰들의 이권 다툼에 이용되려 하고 있다. 피해자 가족은 잊을 수도 없고 평생 내려 놓을 수도 없는 사건인데 왜 이런 아픔이 남의 이권 다툼에 이용이 되어야 할까? 14년 동안 잠잠했던 사건인줄 알았던 '64 사건' 뒷이야기처럼 그 날의 누군의 잘못으로 인해 사건 관련자인 경찰들이 종적을 감추었거나 은둔자가 되었다. 그런가하면 함구령이라도 내려진 것처럼 쉬쉬하는 부분이 있다. 무엇이 숨겨져 있길래 '64사건'의 문이 닫혀 있는 것일까? 미카미는 그 창문을 활짝 열고 그 속을 들여다 보고 싶다. 은둔자와 종적을 감추었던 이들 그리고 사건에 관련된 이야기들을 하나 하나 들어가며 '64사건'의 편린을 맞추다 마지막 한조각을 찾아 완벽한 조각을 맞추듯 '숨은그림'을 모두 찾아내게 된다. 그리고 그 사건과 함께 '경찰조직'의 힘에 대하여 알게 된다. 형사로 편하게 살아 왔던 그의 삶이 이젠 홍보담당관으로 살아야 하는데 형사부를 벗어남으로 해서 경무부와 형사부의 '조직'이란 것을 제3자의 눈으로 보게 된다. 그리고 자신이 앞장서 총대를 메게 된다. 잘못되었다면 누군가는 앞장서서 바꾸어야 한다. 비록 지금 자신이 나설 떳떳한 상황은 아니다. 딸은 가출한 상태이고 아내는 은둔자처럼 되어 가고 있다. 그래도 형사부와 경무부의 '박쥐'가 된다해도 이 물에서 오랜 시간을 견뎌내려면 바꾸어야 한다.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는 얼굴, 아무것도 믿지 않는 얼굴이었다. 아마미야가 빼앗긴 것은 감각이나 관념이 아니었다. 사랑 있는 사랑스러운 딸을 잃었다. 그에게는 쇼와도,헤이세이도 없다.아마미야는 딸이 없는 세상을 표류하고 있다.

 

미카미 자신의 딸은 '얼굴',외모가 맘에 들지 않아 병적인 생활을 하다가 가출을 했지만 딸을 잃은 아마미야는 딸의 얼굴이 아닌 '사랑스러운 딸'을 잃었다고 했다. 소중한 것을 잃은 사람의 고통이 고스란히 느껴진다. 그리고 아내마져 세상을 등졌다. 그에게 남겨진 것은 무엇일까? 그런 아마미야를 통해 미카미는 가출한 딸을 다시 떠올리게 되고 딸과 함께 했던 모든 것들을 되새김질 하며 딸에 대한 생각을 바꾸게 된다. 살아서 돌아오기만 간절히 바란다. 그렇다면 그의 아내는 못생긴 자신의 외모를 보고도 결혼을 했다면 후회하지 않을까? 그녀는 무척이나 미인인데. 일본이나 우리나라나 외모지상주의에 젖어 젊은이들이 자신감을 잃거나 자신의 정체성을 잃기도 한다. 그런가하면 목숨도 하찮게 취급하는 사회문제를 그 밑에 깔아 두기도 한다. 그로인해 가정이 와해될 수 있음을 간접적으로 그리기도 한다. 하지만 딸을 잃은 아마미야에겐 외모가 중요한게 아니라 사랑스런 딸로 기억된다. 자신의 인생을 바치듯 모든 것을 송두리째 빼앗아 가버린 사건이었다.

 

한편 언론은 보도의 자유와 국민의 알 권리를 스스로 제한하는 딜레마에 빠지게 되지만,그 반동을 이용해 권력 감시 기능의 중요성을 소리 높여 외치고, 나아가서는 제안을 수락했다는 걸 내세워 수사 정보를 공개하라며 경찰에 요구한다. 냉정하게 생각하면 일반적인 취재로는 절대로 수집할 수 없는 대량의 수사 정보가 가만히 있어도 굴러들어 오는 셈이니 언론에 유리한 계약이지만 그렇게 생각하는 기자들은 거의 없다.

 

이 소설에서 미카미의 역할을 크다. 경찰과 기자라는 두 조직 사이에서 완충역할을 하기도 하는가 하면 형사부와 경무부의 완충지대가 되어야 한다. 그런가하면 조직이란 '개인'과 '개인'이 어울려 만든 사회다. 그 조직속에서 개인들이 어떻게 어울려서 큰 힘을 발휘하느냐에 따라 조직의 성패가 달려 있다. 그 앞에서 멋진 지휘자 역할을 하는 미카미는 개인대 개인으로 아직 잘 뭉쳐 굴러가지 않던 홍보실을 그야말로 한 조직으로 멋지게 탈바꿈하게 만든다. 비 온 뒤에 땅이 단단하게 굳어지듯이 '64'사건의 재조명으로 인해 홍보실은 그야말로 홍보실로 자리매김하고 형사부가 아닌 홍보실의 담당관으로 미카미는 자신의 자리가 '우연이 필연을 만들듯'이 우연히 인사이동으로 인해 홍보담당관이 되었지만 그 옷을 멋지게 자신의 옷으로 소화해낸다. 그런가하면 '64사건'은 노인이 된 아마미야의 14년 동안 사건을 잊지 않고 기억한 덕분에 미제사건으로 남았던 것을 멋지게 결말을 짓는다.

 

저자는 추리소설 속에 '탐정'이나 '트릭'을 그린 것이 아니라 그야말로 '경찰', 그 속에서도 우리가 잘 알지 못하는 그늘에 가려진 사람을 그리고 있다. 이 한편의 소설이 10년의 시간속에 갈고 닦아져 나온 것이라고 하는데 난 하루 온종일 꼬박 앉아서 읽으며 '너무 쉽게 읽는것 아닌가?' 하는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어느나라나 사건이 일어나면 그와 관계된 많은 이들이 사건을 해결하기 위하여 움직인다. 모두가 잘 움직여 사건이 해결이 나면 좋겠지만 운이 따르지 않아 '미제사건'으로 남는 경우 피해자들은 더욱 큰 고통을 안고 평생을 살아간다. 누군가는 그 사건을 기억해야 하는데 그것이 '공소시효'를 넘기다 보면 모두의 기억에서 사라져 버리고 만다. 그렇다면 피해자의 아픔은 누구의 것이란 말인가? 그 피해자와 사건을 기억하고 해결하려는 누군가가 있다면 그 사건은 미제사건으로 남겨진다고 해도 피해자의 고통과 아픔을 반은 나눈 것이라 본다.

 

미카미는 홍보실은 '창문'이라고 표현을 한다. 그 창문을 누군가 꼭 닫아 놓았다. 안에서 닫았건 밖에서 닫았건 창문이 닫혀 있다. 누군가는 밖으로 나가서라도 함께 열어야 한다고 말을 한다. 경찰은 형사부 경무부와 도시와 지방이 서로 대립하여 싸운다. 그런가 하면 기자와 경찰, 사건과 언론은 서로 대립하여 싸우고 가해자와 피해자 또한 대립하여 있지만 가해자가 피해자의 고통과 아픔을 알까? 피해자는 가해자에게 그 고통과 아픔을 고스란히 느끼게 해주싶고 밖에서 볼 수 있는 경찰의 창문이 닫혀 있다면 누군가는 나서서 '국민의 알 권리'만큼 열어야 한다고 미카미는 주장하고 있다.사람의 외모가 아니라 그 내면을 봐야 하는 것처럼 조직도 중요하지만 그 속에 있는 개인들의 능력 또한 중요한 것이고 개인과 개인이 뭉쳐야 조직이 굴러가는 것이다. 누군가는 지구대의 창문을 올빼미의 눈으로 광고를 그려내기도 했지만 밤에도 깨어 있어야 하는 시민의 안전을 책임질 경찰, 그 뒤의 그늘에서 활동하는 미카미와 같은 이들이 있기에 우린 좀더 진실성이 있는 '언론' 을 만날 수 있는 것이다. 사건 앞에서 보도 앞에서 진실해야 하듯이 조직의 직책이 밥그릇 싸움에 무대가 되어서는 안된다. 12년간 신문기자로 활동해서인가 기자와 경찰의 밀당의 상황을 잘 그려내기도 했고 사건에 주가 되는 추리소설이 아닌 그 뒤에서 활동하는 이들을 중심적으로 그려내 그 깊은 속을 보다 더 진실되게 들여다보는 기회를 준 소설이며 그의 딸을 찾지 못한 부분이 남아 있는데 그 또한 다음 소설을 예고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을 가져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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