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홍은주 옮김 / 문학동네 / 202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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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을 읽은 덕분에 나에 대해 중요한 사실을 알아냈다. 공개할 수는 없다. 그러지 않을 것이다. 사실 책을 읽는 동안 나는 꽤 여러 번(최소 스무 번 이상) 소설이 아니라 회고록을 읽는 기분을 느꼈는데 그렇다고 해서 작가에 대해 더 알고 싶다거나 그가 쓴 글들을 찾아 읽겠다는 식으로 말하려는 건 아니다. 다만 소설을 읽고 나서 3주가 지났는데도 그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이 사라지지 않고 나에게 자꾸 나를 찾아보게 만든다는 점과, 바로 이런 게 소설을 읽는 이유라면 이유겠거니 하는 심사를 밝혀두고 싶어서 리뷰(라기 보다는 짧은 소감을)를 쓴다.

책은 '나'로 시작하고 나로 끝난다. 등장인물은 열 명 남짓인데 그 중 다섯 명은 끝끝내 이름을 알 수 없다. 나, 너, 문지기, 이름이 없는 그냥 커피숍 직원 그녀, 옐로 서브마린 소년, 이렇게 다섯 명이다. 어느 순간 당연하다는 듯 나는 이 사람들 모두가 무라카미 하루키 자신일 거라고 믿었다. 믿고 싶었다. 그래서 이름을 밝힐 필요가 없었을 거라는 식으로 말이다. 사실 이름을 몰라서 불편한 건 없다. 오히려 그들에게 나나 내 주변 인물들을 대입해가면서 이야기 속으로 빨려들어갔던 건지도 모른다.

올해 유난히 장례식장에 갈 일이 많았다. 아직 9월인데 생각나는 것만 해도 10번이 넘는다. 그래서 그랬을 것이다. 처음엔 '벽'이 죽음을 뜻한다고 생각했다. 벽도 어디 그냥 벽인가. 움직이는 벽, '그 불확실한 벽' 아닌가 말이다. 누구나 죽는 건 알아도 언제일지는 알 수 없으니 얼마나 직관적인 비유인가 말이다. 하지만 그렇게 간단할 리가! 벽은 죽음을 상징하지 않는다. 다른 세상으로 통하는 포털도 아니다. 벽은 경계다. 말 그대로 벽. 이쪽과 저쪽을 나누는 도구. 높이 나는 새에게는 의미가 없는.. 새들에겐 없겠지만 나에게는 강력한 의미가 있는 벽.

틀림없다. 나는 벽 안쪽에 있다. 의심의 여지가 없다. 이렇게나 새들의 날개짓이 부러운 걸 달리 어떻게 설명할 수 있겠나 말이다. 벽같은 명절이 코앞이기 때문일지도 모르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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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nine 2023-09-27 08:2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상의 날개가 문득 떠오르는데, 벽으로 나뉘어진 다른 세계에 살면서 탈출을 꿈꾸는 주인공, 유폐된 공간인 방의 의미...이런 것들 때문인가봐요.
이 책도 읽어보고 싶게 하셨어요. ^^

잘잘라 2023-09-27 12:19   좋아요 0 | URL
등짝에다 날개의 씨앗을 심어서 키우는 사람들이 떠올라요. hnine님 댓글을 보면서 방금 저도 두 알 심었습니다. 날아다니고 싶어요. 훨훨 ㅎㅎ

blanca 2023-09-27 12:3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잘잘랄라님처럼 이 소설을 읽으면서 오랜만에 맞아, 이래서 소설을 읽지, 이게 진짜지, 싶은 감정을 느꼈어요. 정말 좋았어요. 오래 기억에 남고...

잘잘라 2023-09-29 12:08   좋아요 0 | URL
blanca님도 같은 감정을 느끼셨다니 기뻐요. 사진가가 사진으로 말하듯, 화가가 그림으로 말하듯, 소설가 무라카미 하루키가 소설로 말한 덕분이라는 것을 기억하겠습니다.

새파랑 2023-09-28 10:3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마지막 문장을 보니 또 이렇게 생각실수 있다는게 놀랍습니다~! 회고록 읽는 느낌 완전 공감합니다~!!

잘잘라 2023-09-28 23:51   좋아요 1 | URL
그쵸 맞죠 회고록 읽는 느낌요. 완전 대공감!! ㅎㅎ 명절 연휴 첫날밤이 깊어갑니다. 아무리 긴 연휴라도 결국 마지막날이 오겠지요!!! 그날을 기다리며~~~ ??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에 이어 『벽 타는 아이』를 주문했다. 어제 항저우 아시안게임 수영 남자 800미터 계영 경기를 본 뒤라 나는 벽으로 릴레이 주문을 이어가기로 했다. 무라카미 하루키 소설의 벽에서 최민지 그림책의 벽으로 이어지는 주문이라니 모처럼 재밌는 일을 만들어 낸 기분이다. 벽 타는 아이 다음으로는 어떤 벽을 주문해야 할까. 아 맞다. 일단 한가위 명절이라는 벽부터 어떻게 좀 해봐야지. 아아 진짜 벽같은 명절이다. 이눔의 벽을 어떻게 넘어뜨리나. 벽을 인정하고 나 하나만 왔다갔다 하자는 식으로 지내자니 눈치 없고 양심 없는 그 벽이 해가 갈수록 기고만장 높아만 간다. 힘에 부친다. 벽은 높아가고 나는 희미해져간다. 내가 정말 벽을 무너뜨리고 싶기는 한 건가? 그것이 문제로다. 안되겠다. 명절은 길다. 책을 더 사자. 책 속에 든 도끼를 꺼내 벽을 두드려 드리지. 2023-09-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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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홍은주 옮김 / 문학동네 / 202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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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틀 동안 다 읽었다. 빨려들어갔다고 해야겠다. 끝끝내 ‘나‘의 이름은 나오지 않는다. 당연하다. 주인공 ‘나‘는 응당 ‘무라카미 하루키‘ 자체니까(그래서 그랬나? 가끔은 작가의 회고록을 읽는 기분이었음). 추석이 다가온다. 내 그림자를 떼어내서 KTX 태워 보내고 싶구나. 아아 명절이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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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크pek0501 2023-09-15 14:0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최신작을 벌써 읽으셨군요. 발빠르십니다. 빨려들어가신 것 보니 꽤 재밌나 보군요.

잘잘라 2023-09-15 23:01   좋아요 1 | URL
지금 제 상황에 딱 필요한 이야기였던 거라고, 저 혼자 흐믓해하고 있어용. 홍홍홍
 
상황과 이야기 - 에세이와 회고록, 자전적 글쓰기에 관하여
비비언 고닉 지음, 이영아 옮김 / 마농지 / 202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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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p.) 어떤 글이 우리 마음에 와닿는 것은, 글을 읽는 시점에 필요한 우리 자신에 관한 정보를 제공해주기 때문이다.』 그렇다. 『상황과 이야기 The Situation and the Story』 가 이토록 내 마음에 와닿는 것은, 바로 지금 필요한 나에 관한 정보를 제공해주기 때문이다. 어찌나 굿타이밍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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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를 읽는 힘
메르 지음 / 토네이도 / 202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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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쪽) 세상의 정보를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고, 행간을 해석해 내 것으로 만들 수 있는 사람은 살아남을 것이다.」 그렇다. 돈 많은 사람이 살아남는 것이 아니다. 순서대로 1.세상의 정보를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2.행간을 해석한다. 3.내 것으로 만든다. 끝까지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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