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낯익은 세상
황석영 지음 / 문학동네 / 2011년 5월
평점 :
아침에 읽으면 안된다.
낮에 읽으면 안된다.
밤에 읽으면 더 안된다.
새벽에도 안되고 점심, 저녁 다 안된다.
그럼 대체 언제 읽으란 말이냐?
아침도 아니고 낮이나 밤이 아닌 때,
새벽도 아니고 오전이나 오후, 어스름 저녁이 아닌 때,
밥 먹기 전도 아니고 밥 먹고 나서도 아닌
아무 때도 아닌 때에,
침대 말고 화장실 말고
식탁은 더구나 말고
책상이나 쇼파도 아닌
아무 곳도 아닌 곳에서.
왜?
그 어느 때,
그 어느 곳에도
남기고 싶지 않은 냄새거든
그 냄새는.
첫장부터 고비다. 읽기 힘들다. 활자 한 개 단어 하나 문장 한 줄 마다 시궁창 냄새가 난다. 냄새 뿐인가. 숟가락에 들러붙는 파리는 더 끔찍하다. 파리와 냄새는 실제가 아니지만 희안하지. 실제가 아니면서 느낌은, 몸서리치게 싫은 그 느낌만은 실제다. 포기하고 책을 덮으려는데 땜통이 나타난다. 나처럼 못견디고 뛰쳐나가고만 싶어하는 딱부리 앞에 구세주처럼 등장한 땜통. 둘은 통성명 하자마자 밖으로 나간다. 쓰레기언덕과 오두막동네를 벗어나 땜통이 딱부리를 데리고 간 곳은 '본부'. 강이 보이고 강병도로가 내려다 보이는 언덕을 지나 '「키 큰 버드나무와 억새며 부들이 바람에 휘적이는 모래언덕 위(29p.)」본부.
땜통과 딱부리를 따라 본부에서 나도 겨우 숨을 쉰다. 한 고비 넘는다.
BU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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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이 붉게 물들면서 동이 터왔다. 쓰레기들은 더럽고 볼썽사나워 보였지만 검고 희고 붉고 푸르고 노랗고 알록달록 반짝이기도 하고 매끈거리기도 하며 네모나고 각지고 둥글고 길쭉하고 흐느적거리고 뻣뻣하고 처박히고 솟아나고 굴러내리고 매캐하고 비릿하고 숨이 막히고 코가 쌔하고 구역질나고 무엇보다 낯설었다. 하나씩 쥐어보면 오래전부터 잘 알고 있던 물건들이었는데도 떨어져나온 아기 인형의 다리처럼 어쩐지 무서운 데가 있었다.(41~43p.)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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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비 넘어 고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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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시간쯤 그렇게 멍하니 앉아 있노라니 차츰 분기가 가라앉았고 섭섭한 마음도 사라져버렸다.(49p.)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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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비 구비 고비,
이 모양 저 모양 끝도 없는 고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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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치로 자란 세월이라 딱부리도 이 동네 어른들이 어떤 식으로 살아가는지 대강은 짐작하고 있었다. 여기 아이들은 제 부모의 일인데도 남의 말 하듯이 킬킬대며 농담을 주고받고는 했다. 다른 동네에서라면 쌍코피가 터지는 싸움이 일어날 만했는데도 서로 실실 웃으며 욕설이나 주고받다가 말았다.(49p.)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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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왜 이러고 있나. 무슨 좋은 끝을 보겠다고 이 책을 붙들고 있나. 이유는 한 가지. 땜통이 과연 여기를 벗어날 수 있을지 어떻게 벗어날지 궁금하다. 딱 그거 뿐이다.
이 소설은 분명 소설인데 소설같지가 않다. 그래서 사실 재미가 없다. 읽는 내내, 얘기가 빨리 끝났으면 빨리 끝장을 봤으면 좋겠다는 생각 뿐이었다. 그리고 결국 끝이 났다.
하아,
이 얼마나 다행인지.
끝을 보고 나서는 내내, 이런 소설을 왜 쓰지? 누가 이런 책을 좋아한다고? 누가 이런 이야기 듣고 싶을거라고? 이런 생각 뿐이었다. 난지도 이야기? 궁금하지도 않고 듣고 싶지도 않다. 그런데 내 돈 주고 사서 내 시간 내서 내 방에서 내 책상에서 읽었다. 황석영 신간,이라는 이유 하나로. 그렇다면 나는 정말 어떤 이야기를 듣고 싶었던 것일까? 유명한 작가의 이야기? 유명한 작가가 얼마나 많은데. 유명한 작가가 쓴 책이라고 다 읽으면 소설 읽다가 죽어도 모자를텐데? 그럼 내가 좋아하는 작가의 이야기? 그것도 이상해. 내가 황석영 작가를 언제 봤다고 그 사람에 대해 뭘 안다고 좋아하고 말고 하냐. 참 나. (그리고 사실, TV에 나왔을 때도 보면서 '구라는 구라다' 그랬잖어? 그리구 솔직히 너, 구라발 쎈 사람 별루 안좋아하잖어?)
뭐가 됐든 나는 책을 읽었고, 다시는 안 읽을 거고, 그러나 한 번으로 충분히 '지울 수 없는' 이미지로 남은 『낯익은 세상』을 낯설은 표정 지으며 생각한다. 아무 때도 아닌 때에 아무 곳도 아닌 곳에서.
나 혼자 사는 세상이 아니다.
아무도 살지 않는 세상이 아니다.
그렇다고 함께 사는 세상은 더욱 아니다.
그럼 결국 아무도 살지 않는 세상이다.
아무 때도 아닌 때에
아무 곳도 아닌 곳에서
아무도 아닌 아무개와
사는 것도 안 사는 것도 아닌
그
낯설고 낯익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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