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시, 나의 가장 가난한 사치
김지수 지음 / PageOne(페이지원) / 2011년 9월
평점 :
품절
밧줄이라는 단어를 참 좋아한다. 밧줄은 나를 지탱해주는 마지막 보루 같고, 밧줄 앞에 서면 왠지 모르게 절박해지고, 밧줄은 나를 어디론가 데려가 줄 것 같고, 밧줄은 절대 끊어지지 않을 것 같다.(188p.)
진짜 처음 본다.
밧줄,이라는 단어를 좋아한다니. 그냥 좋아하는 것도 아니고 '참' 좋아한다니.
아니 무슨. 하늘,도 아니고 바람,도 아니고 강, 산, 들, 호수, 바다, 숲... 다 놔두고
하필 무슨 '밧줄' 같은 단어를 좋아하냐고. 그것도 '참'
일의
기쁨과 슬픔
출산이 임박해서 마감을 하던 한 선배는 양수가 터져 병원으로 실려가면서도 취재 수첩을 놓지 않았다. 육아지에 실릴 아기 배변 구별법에 관한 한 페이지 기사가 그녀에겐 인류를 구하기 위해 시한폭탄의 암호를 푸는 일처럼 절대적이었다. 언젠가는 시아버지 초상을 치르다가도 그날 저녁 검은 옷을 입은 채로 돌아와 마감하는 데스크를 보고 엄숙해진 적도 있었다.
아! 일이란 대체 무엇인가? 그럴 땐 부모님의 부고 소식을 들은 직후 무대에 올라가 남들을 웃겨야 했다던 코미디어니 일화가 생각난다. 그 코미디언이 결국 박수를 받지 못했다고 해도, 눈물을 참고 마감을 사수하려던 데스크의 노력이 밀린 인쇄 공정 때문에 물거품이 됐다 해도, 배변 구별법이 전문가의 오류로 독자들의 항의 엽서를 받았다 해도, 그들은 자기가 해야 할 일을 했다는 데 안도감을 느낄 것이다.(164p.)
나 또한 몇 년 전 배우 박해일을 인터뷰하러 가던 아침에 고속도로에서 차가 전복되는 사고가 있었지만, 뒤집어진 차에서 기어나와 전철을 타고 촬영장으로 향했다. 그날 모든 일정이 다 끝난 오후가 돼서야, 정신을 놓고 강남 대로변에서 병원을 찾아 헤맸다. 대체 무엇이 우리로 하여금 그토록 일에 매달리게 하는가? 사실 아무도 우리에게 그토록 몸 바쳐 일하라고 요구하지 않았건만. (165p.)
이 또한 처음 들어보는 얘기다. '제정신이야? 아니 어떻게 고속도로에서 차가 전복되는 사고가 있었는데, 뒤집어진 차에서 기어 나와 전철을 타고 일을 하러 가냐고! 나 원 참.'
여기 무대로 한 여자가 걸어나온다.
밧줄,이라는 단어를 좋아하는 여자,
사고로 뒤집어진 차에서 기어 나와 전철을 타고 일을 하러 가는 여자,
시인의 꿈과 아나운서의 꿈을 절충해서 패션지 에디터가 된 여자,
시를 '읽어주기' 위해 시를 '읽는' 일이 제 삶을 온통 뒤흔들 만큼 놀라운 사건이었다는 여자,
그것이 시를 쓰는 것보다 더 황홀한 경험이었다는 여자,
패션잡지 『보그』 에디터 김 지 수.
그녀가 시를 읽어준다.
시는 그녀가 고른 50 편.
눈 감고 조용히 들어보자.
똥구멍으로 시를 읽다 -고영민
하나 더,
삶은 달걀 - 백우선
하나 더?
딱 하나만 더,
넥타이 -나해철
낭송은 여기까지.
아, 좋다. 시인은 시인이구나. 시인은 정말 다르구나. 이런 걸로도 시를 쓰는구나. 그래서 시인이구나.
겨울산에 가서 똥이 마려워도 시를 쓰는구나.
유머시리즈를 보고 웃지만 않고 시를 쓰는구나.
그냥 겨울산을 바라만 봐도 시를 쓰는구나.
넥타이를 매면서도 시를 쓰는구나.
아, 시인은 시인이구나.
아, 시는 시구나.
.
.
.
감탄하지만 정작 내 마음에 들어온 시는 따로 있다.
시 읽어주는 여자 김지수의 말부터 들어보자.
그 애
그리고 나
삶은 기나긴 스토리텔링이어서, 다들 내 인생을 소설로 쓰면 열 두 권이 넘을 거라고 하지만, 삶에서 가장 황홀한 시간은 시가 만들어지는 순간이다.
아! 이 순간은 시가 되겠구나... 그걸 일찍 감지할 수 있는 사람이 천부적인 시인이다. 그걸 놓치지 않고 잡아둘 수 있는 사람이 성실한 시인이다.
...
「그 애가 물동이의 물을 한 방울도 안 엎지르고 걸어왔을 때」라는 서정주 시인의 시는 '눈이 부시게 푸르른 날은 그리운 사람을 그리워하자' 처럼 한 문장이 시가 되는 명시다. 순식간에 다른 세계로 빨려 들어가게 하는 사차원의 대문이다. (29~30p.)
그 애가 물동이의 물을 한 방울도 안 엎지르고 걸어왔을 때 -서정주
아.... 그래. 사차원의 대문이 활짝 열렸네. 순식간에 빠져 들어가네.
그 애가 물동이의 물을 한 방울도 안 엎지르고 걸어왔을 때.
이래서 시를 쓰는구나.
이래서 시를 읽는구나.
시를 읽는 소리를 들으니
내 마음에도 시가 흐른다.
시시시시시시시
(어라? 잘못 들으면 오해하게 생겼네.)
그렇다믄
시이이시이이 시이이시이이
이건 워뗘?
'흐른다'기 보담은 '분다'
시가 분다, 이게 낫겄나?
얼씨구~
니 그러다 시 쓴다고 설치게 생깄네~
좋은 시 좀 들었다고 개나 소나 시 쓴다고 뎀비면
소는 누가 키우는데?
엉? 김밥은 누가 싸는데?
아차차.. 내일 산에 가기로 했지.
물 끓여야지. 김밥 싸야지. 오이 사야지.
어이구야. 바쁘네?
바빠서 시는 못쓰겄네?
히히히.
(으이구. 왠일인가 했다. 그렇잖아두
야가 오늘 으째 이래 진지 모드랴? 했다구!)
크크크.
그래두 나 내일 산에 간다.
누가 아나? 산에 가서 나도 다리가 아파서 잠시
앉았다가 시 하나 써 올란지?
음.. 내일은 특별히,
시집을 한 권.. 아니 뭐 고민할 것도 없이
이 책을 들고 가봐야쓰겄구만 그랴.
굿 아이디어~~~
(친구 따라 강남 간 책엔 이런 싸인 없었기에 하마터면 못 보고 넘어갈 뻔 했는데
알라딘에 주문해서 받은 책에는 이렇게 작가가 직접 싸인(볼펜똥 보이삼?)을 해줘서
기분이 좋았다. 글씨도 아주.. 시적이네 그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