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험으로 알아가는 공부가 그 무엇보다 소중함을 알면서도 바쁘다는 핑계를 대며 직접 경험으로 삶의 의미를 찾아가는 과정에 소홀해지는 경우가 흔하다. 여러 이유로 행동하기 어려울 때에는 한계를 뛰어넘는 방편으로 책을 읽으며 지낸다. 자신만의 생각을 가꾸고 다듬는 과정에 독서의 선한 영향력은 가늠하기 힘들 정도로 지대함을 알면서도 책 한 권을 붙들고 읽는 시간이 점점 줄어드는 매체 발달의 시대를 보내고 있다. 책 읽기의 진가를 뒤늦게 발견한 후로 좋은 책을 접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고 싶은 욕구는 커진다. 책을 읽고 표현하는 데 쌓인 힘은 문제를 해결하며 살아갈 용기를 준다. 출근하기 위해 나서는 길 가방에는 읽을 책 한 권을 넣는다.

 

   열매를 거둬 노년을 준비하는 인생의 가을, 높아지는 하늘은 명징함으로 마음을 맑게 틔운다. 32년째 청소년들과 함께 만나 소통하며 지내 온 시간은 다채로운 빛깔로 인생을 물들이며 너와 나를 성장케 한 소중한 시간이다. 도서실에서 아이들을 기다리며 책 이야기를 나누던 찰나는 추억 속 의미를 짙게 드리우고 사제 간의 정을 이어준다. 여순 사건을 계기로 흑백으로 나뉘어 쫓고 쫓기는 상황에 전쟁터를 방불케 하는 분단된 국가의 아픔은 순수한 사랑과 대비돼 통절함을 더했다. 1년 남짓 청소년용으로 출간된 태백산맥을 읽고 문학기행을 꿈꾸며 다양한 독후활동을 벌인 뒤 동아리 회원들과 함께한 여정이라 추억의 명장면으로 떠오른다.

 

   분단문학의 최고봉이라는 조정래 작가의 작품 <<태백산맥>>의 산실인 문학관으로의 기행은 일제 말기해방여순사건한국전쟁으로 이어지는 현대사를 작품 속에 고스란히 담아 둔 대하소설 작품 속으로 들어가는 여정이다. 문학관에 이어 소설 속 등장인물들의 집을 둘러보면서 소설 속 인물들을 불러내 보았다. 사상적 삶을 실현하기 위해 소화를 이용하기 위해 접근한 정하섭은 박꽃처럼 수수한 소화의 아름다움과 그녀의 맑은 기품에 끌려 외줄타기 사랑을 이어갔다. 이념을 위해 사랑을 거세한 채 스스로를 옥죄며 시련의 길을 택한 이상주의자 정하섭을 가슴에 품고 사는 박꽃 같은 새끼 무당 소화(素花)의 헌신적인 사랑은 숭고함이 더한다. 정하섭의 이념을 따르며 그를 향한 사랑의 표식으로 아이를 옥에서 낳으면서까지 그와의 정신적 합일을 지향했다.

 

   2017년 중학교로 내려와 초등학생 티를 벗지 못한 아이들과 함께 생활하며 애를 먹었다. 45분 수업 시간 오롯이 앉아 있기는커녕 교실을 돌아다니며 어수선함을 조장하기 일쑤라 수업 진행 자체가 힘들었다. 공책을 마련하여 짧은 시를 옮겨 적고 공감 가는 구절을 찾아 이유와 함께 발표하며 문학 작품과 함께하는 시간을 늘렸다. 친구의 발표에 귀를 기울이고 공감하는 횟수가 늘면서 교사의 발표에도 조금씩 집중하는 모습을 보였다. 문제를 급하게 해결하기보다는 조금 더디 가더라도 이들의 행동 변화를 기다리며 작품으로 아이들과 만나 마음을 토닥이기로 했다.

 

   소설을 발표하는 시간, ‘태백산맥을 다시 읽으며 소설 속 인물에 대한 이야기를 덧붙였다. 한 뱃속에서 나온 형제도 각기 달라 어떤 길을 걸을지 알 수 없다는 말은 염상진과 염상구를 두고 이르는 말일 테다. 염상진은 신분적 차별 없이 인간답게 살아갈 평등한 세상을 꿈꾸며 빨치산 투쟁을 선도하는 지도자로 조직원들의 힘을 규합하는 일에 앞장섰다. 반면 형의 영민함에 짓눌려 기를 펴지 못하던 염상구는 형을 향한 시기와 분노를 표출하였다. 염상진 대장의 뜻을 따르며 갖은 고초를 달게 받는 혁명가 하대치는 빨치산들이 자멸하는 과정에서도 끝까지 살아남아 다리에 총상을 입은 안창민을 끝까지 보호하려는 두터운 인간애를 드러낸다.

 

  201712월 태백산맥문학관 개관 9주년을 기념해 마련한 조정래 대하소설 태백산맥과 우리의 미래라는 주제로 이뤄진 북 토크에 참석해 작가와 함께한 시간은 문학 작품을 읽고 표현한 활동에 감칠맛을 더했다. 숱한 등장인물들 속에서 이념을 위해 싸우는 이들이나 집에서 자식들을 건사하는 이들이나 모두 한 인간으로서의 삶에는 의미가 있다는 작가의 말은 방향 감각을 잃고 헤매는 십 대들과의 생활에 의미를 찾게 한다. 그 나름대로 의미를 안고 성장하느라 안간힘을 쓰고 있으니 정형화된 틀을 벗어나더라도 이해하고 받아들이자고…….

 

 

  

선이 굵은 대하소설로 우리 민족의 정체성을 확인하여 가는 여정에 분단문학의 최고봉이라는 작품 <<태백산맥>>은 일제 말기∼해방∼여순사건∼한국전쟁으로 이어지는 현대사를 작품 속에 고스란히 담아 민족의 화해를 시도하는 작품입니다. 이념의 소용돌이 속에 많은 이들은 형장의 이슬처럼 사라졌고, 또 다른 이들은 갖은 고초를 겪으며 죽어간 이들은 살아남은 자들에게 새 역사를 만들어가는 길 위에 서야 함을 일깨워주고 핏빛 선연한 골짜기를 넘어 피안의 세상으로 갔습니다. 사선을 넘나드는 일촉즉발의 위기 속에 목숨을 보전한 이들은 한낱 주검으로 화한 영령들의 주검을 목도하며 밝은 내일의 희망을 잃지 않고 스스로 존재의 당위성을 역사적 진보에 담으며 미명의 어둠을 걷어내는 일에 가세하였습니다. 질곡의 시대 광복의 기쁨을 만끽하기도 전에 사상적 갈등으로 첨예한 대립을 보인 민족적 충돌은 서로에게 총칼을 겨누어 잔혹한 죽음으로 관계를 와해시켜 민족적 아픔을 심화했습니다.

 

  광복의 기쁨에 젖을 새도 없이 좌우익의 첨예한 대립으로 칼날을 세우고 대척하다 보니 균형 있는 사회의 조화를 이루기에는 정치적 혼란이 가중되었습니다. 분단 조국의 아픔을 고스란히 전하며 통일을 염원하는 대장정에 나서서 분단국가로 동강 난 민족의 허리를 잇는 일이 소중함을 일깨운 작품 이념적 대립으로 서로를 향한 반목과 질시에서 벗어나 사랑의 손길을 내밀며 살아남은 하대치를 통해 인동초 같은 생명력을 발견합니다. 단신이지만 타고난 뼈대가 굵었고, 어려서부터 농사 등의 잡일을 하느라 단련된 하대치는 강단지게 염상진 대장의 뜻을 따르며 갖은 고초를 달게 받는 혁명가로 거듭납니다. 신봉하던 이들의 가치가 곤두박질치는 와중에도 하대치는 흔들림 없이 새로운 역사를 잇는 주체로 오롯이 자리하는 그의 생존과 존재의 이유를 묻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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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 국어 어휘력이 독해력이다 5단계 A <초등 5~6학년> 추천 과정 - 어휘로 시작하는 초등 공부력 향상 프로그램 초등 국어 어휘력이 독해력이다
키 초등학습방법연구소 지음, 민효인.정윤슬 그림 / 키출판사 / 202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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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탄산음료를 마시고 있는 학생에게,

탄산음료 마시지 말고 속이 더부룩할 때에는 매실 액에 물을 희석해 마시는 것이 좋겠다고 말하였다. 말이 떨어지자마자 한 학생이 물에 매실 액 타 먹으라면 되지 굳이 희석이라는 단어를 쓸 것까지는 없지 않느냐고 말해 한마디 했다. 한글 창제 이전에는 한자의 음과 뜻을 빌어 의사소통을 해온 만큼 한자어는 삶 속에 들어와 있어 한자어에 대한 의미를 알아야 우리말을 잘 쓸 수 있다고 하니 알았다고 한다. 한글 창제 이전부터 쓰여 온 한자어는 글 속에 많아 이해하기 힘들다고 말하면서도 한자어의 의미를 공부하려 들지는 않는다.

 

    초등국어 어휘력이 독해력이라는 제목에서처럼 이 학습서는 어휘에 대한 이해를 시작으로 긴 글을 독해하며 한 편의 글을 오롯이 알게 한다. 한자어의 음과 훈을 어휘의 뜻과 연결하여 학습 어휘를 단계마다 반복 제시하여 어휘력을 길러준다. 어휘의 뜻과 쓰임을 문장 속에서 짐작하며 유의어, 반의어, 다의어 등의 문제를 통해 어휘 관계를 익히는 데 효율성을 더한다. 확장된 문장으로 구성된 두세 문단의 짧은 글을 읽고 내용을 이해하고, 다양한 갈래의 긴 글을 독해 원리에 따라 읽으며 단계별로 배우는 나선형 학습으로 독해력을 키워가도록 안내한다.

 

    5학년 1학기 여덟 교과목-국어, 사회, 과학·수학, 예체능·실과-을 각 장마다 실어 교과서에 나오는 어휘를 익히는 데 도움을 준다. 국어 영역에는 현대시와 고대소설, 논설문에 교과 융합 수업까지 포괄하여 다양한 글을 제시하였다. 역사의 섬 강화도로 당일치기 여행을 다녀온 뒤 쓴 기행문을 읽기 전 빈칸에 들어갈 알맞은 어휘를 쓰고 한자어의 음()과 훈()을 달아 그 뜻을 밝혀 문장에서 쓰인 예를 들었다.

) 전등사는 고구려의 승려가 ( 창건 )한 절이다.

: 건물이나 조직체 따위를 처음으로 세우거나 만듦. 비롯할, 시작할 창(), 세울 건()

) 두 어휘의 뜻이 서로 비슷하면 =, 반대이면 표를 해 보세요.

웅장하다 ----------- -------------- 작다

창건 -------------- = -------------- 설립

현존 -------------- = -------------- 실재

학습한 어휘가 쓰인 짧은 글로 어휘력을 쌓게 하고, 일치하는 내용을 찾아 사실적 사고를 명확히 하는 문제를 실어 내용에 대한 이해를 돕는다. 기행문의 3요소인 여정과 견문, 감상을 찾아 기행문 특성을 파악하며 읽도록 각 장마다 다른 글을 실어두고 있다

  

   각 단원이 끝나면 그 단원에서 공부한 어휘를 학습하며 기초 실력을 쌓도록 구성하였다. 여러 유형의 문제를 해결하며 지금껏 배운 어휘를 확인하는 시간은 독해력을 키우는 여정으로 흘러들어 글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힌다. 문장의 용례를 실어 맞춤법 실력을 키워주고 있어 잘못 쓰고 있는 어휘를 바로 잡아 정밀한 글을 쓰기에 안성맞춤인 구성으로 이뤄져 있다. 쉬어 가기 부문에서는 어떤 소재와 관련 있는 사자성어를 실어 그 쓰임을 보이고 있다.

) 왜군에게 둘러싸여 사면초가(四面楚歌)인 상황에서도 고군분투(孤軍奮鬪) 끝에 결국 승리하더니, 이순신은 역시 백전백승(百戰百勝)의 명장이야.

고군분투 외로울 고(), 군사 군(), 떨칠 분(), 싸움 투()

도움을 받지 못하는 외로운 군대가 적군과 용감히 맞서는 모습을 말합니다.

 

[1~6] 다음 뜻풀이에 알맞은 어휘를 아래 글 상자에서 찾아 동그라미 해 보세요.

     1. 이미 짜인 것에 끼어 들어감

    2. 길의 중요한 통로가 되는 어귀

 3. 그렇게 하는 것이 옳거나 당연하다

 4. 깨뜨려 못 쓰게 하거나 깨져 못 쓰게 됨.

 5. 대기 중에서 높이가 같은 주위보다 기압이 낮은

6.  6. 모든 인간이 인간으로서 당연히 가지는 기본적 권리

 

 

 

[7~9] 밑줄 친 어휘와 뜻이 비슷한 어휘를 보기에서 골라 괄호 안에 쓰시오.

 

<보기> { 속출하다, 보장하다, 누리다, 폐지되다 }

 

7. 시청률이 낮은 몇 가지 프로그램이 없어졌다.

8. 국가는 개인 생활의 자유를 보호해야 한다.

9. 가뭄이 계속되어 농작물의 피해가 잇따르고 있다.

 

[10~13] 괄호 안에 들어갈 알맞은 어휘에 하시오.

10. 아버지 고향은 산골이라 버스가 하루에 한 번만 ( 운행 / 진행 ) 한다고 들었다.

11. 제헌절은 ( 명절 / 국경일 )이지만 공휴일이 아니어서 쉬지는 않는다.

12. 황사가 ( 거치면 / 걷히면 ) 산책을 나갈 것이다.

13. 향긋한 산나물의 향이 내 입맛을 ( 돋우었다 / 돋구었다 ).

 

[14~16] 괄호 안에 들어갈 알맞은 어휘를 보기에서 골라 쓰시오.

 

<보기> { 살펴보다, 등지다, 재해, 제재, 지형, }

 

14. 우리에게 언제 닥쳐올지 모르는 자연 ( )에 대비해야 한다.

15. 법을 어긴 사람들은 강력한 ( )를 받을 것이다.

16. 음식에 무엇이 들어갔는지 성분 표를 꼼꼼하게 ( ).

17. 그는 속이 빤히 보이는 ( )에 넘어가지 않았다.

 

[18~20] 주어진 어휘를 활용해 문장을 만들어 보시오.

 

18. 들르다

19. 떨쳤다

20. 맞서다

 

   위의 20문제는 학습 지원이 필요한 중1 학생들과 함께 해결할 문제로 뽑아 구성한 학습지이다. 도서실에서 서너 명이 둘러앉아 국어사전을 들추며 학습하는 시간이 쌓일수록 어휘를 활용하는 힘은 길러질 것이라 예상하며 오늘도 자투리 시간을 이용해 문제를 해결하였다. 하루 한 장씩 풀다 보면 어느새 어휘력은 늘어 글을 읽고 이해하는 능력이 쌓이는 기쁨을 맛볼 수 있을 듯하다. 하고 싶은 말이 있어도 적확한 어휘가 떠오르지 않아 공감을 얻기 어려운 글을 쓰고 말았던 적이 있었다면 이 책으로 독해력을 기르길 바란다. 배움의 열망을 돋우는 학습서, 학령기에 걸맞은 학습서 선택으로 실력을 쌓았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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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의 기쁨과 슬픔 - 장류진 소설집
장류진 지음 / 창비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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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생의 가을에 접어든 나이, 32년째 직장인으로 생활하며 겪은 일들은 복합적인 감정과 함께 살아가는 법을 익히게 하였다. 설익은 사과처럼 풋풋한 십대들과 함께하며 쌓인 크고 작은 경험은 애증의 그림자를 드리우고 여럿을 키워냈다. 몸담고 있는 조직에서 인간관계로 힘들어질 때마다 사람들의 심리를 살피는 책들을 가까이 하며 쉽게 곁을 주지 않던 자신을 발견하고 자신을 돌아보았다. 그 때는 어느 누구의 말도 통하지 않았던 고집이 독선과 독단으로 치달아 소통의 물꼬가 쉽사리 트이지 않았지만 세월 따라 수용의 폭이 조금씩 넓어지면서 이해의 깊이가 더해졌다. 상충하는 의견으로 맞설 때에도 상대의 의견을 설득하려는 데에만 초점을 맞추지 않고 다름을 받아들이고 또 다른 인간 세계를 확인하며 수용하기에 이르렀다

    

   인간에 대한 사랑보다는 합리적인 해결책을 중시하며 이윤을 중시하는 자본주의 사회 구조 속에서 직장인으로 살아가는 일이 쉽지는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하고 싶어도 일할 직장이 없다는 구직자들의 푸념을 들을 때마다 경제적 자립을 돕는 직장에서 자생력을 키우고 비전을 실현하는 현실적 삶이 고마울 때가 늘어난다. 직장인으로 서로 다른 뜻을 품고 살더라도 화합할 때에는 함께하는 일의 기쁨과 슬픔을 조율하며 살아가는 일이 평범한 삶이기도 하다. 무탈한 나날 속에 꿈을 꾸고 살아가는 직장인의 삶을 잇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다행이라 스스로를 다독이면서도 뜻대로 굴러가지 않는 현실을 달가워하지 않는 청년 직장인들이 늘고 있다.

 

   다큐멘터리 PD를 꿈꾸는 대학생이 취직을 준비하며 여름방학 3개월 동안 더블린으로 워킹홀리데이를 가려 한다. 갚아야 할 학자금 대출에 취업 준비까지 자기 힘으로 이뤄내야 하는 취업 준비생들의 시간은 여유가 없다. 어학연수 대신 워킹홀리데이라도 다녀와야 피디 지망생으로 면이 선다고 여겼기에 나는 아일랜드로 가기로 했다. 경유지 탐페레 공항에서 우연히 만난 핀란드 노인과의 짧은 산책은 힘을 불어넣는 시간이었다. 시력을 잃어가는 사진작가 노인은 항상 이번이 마지막이라는 생각으로 동창회에 참석한다며 훗날 추운 겨울 오로라를 찍으러 오라는 말을 남겼다. 워킹홀리데이를 마치고 졸업 후 방송국 신입 피디 공채에 낙방한 끝에 다른 일자리를 찾아 일하며 지냈다. 이후 6년이 흘러 신입 피디 공채를 보고 지원하려다 마음을 접은 날, 핀란드에서 만난 노인이 보낸 사진과 편지를 보며 마음을 다잡는다. 노인이 전한 따스한 한마디는 또 다른 꿈을 꾸면서 살아갈 이유를 찾게 한다.

 

   대학 졸업 후 수많은 소개서와 이력서를 써서 인턴과 계약직으로 일하며 겪은 직장인의 비애는 클 것이다. 백한 번째 이력서와 첫 번째 출근길의 주인공은 제목처럼 정규직 직장인으로 출근하는 첫날의 설렘과 두려움은 긴장으로 가득할 것이다. 일한 대가로 받을 돈을 미리 계산하며 새로운 욕망과 소비의 주체로 서기 위한 준비운동에 들어갔다. 출근 첫날 주인공은 앞으로 어떤 일들이 벌어질지 확연히 알기는 어렵지만 현실적인 감각을 유지하며 새로운 욕망을 추구하는 직장인의 면모를 갖추어갈 것이다. 판교 테크노밸리의 스타트업 회사에서 일하는 직장인의 애환을 담은 일의 기쁨과 슬픔은 직장인의 비애를 담고 있다. 회장의 심기를 건드렸다는 이유로 카드 포인트로 월급을 받은 카드회사 직원의 이야기를 듣고 주인공은 상사의 독선과 아집에 혀를 내두른다. 스타트업 회사답게 수평적인 업무 체계 환경을 조성한다고 하지만 실상은 부조리한 자본주의적 구조를 재생산하고 있는 셈이었다.

 

    지상에 자기 한 몸 눕힐 공간도 확보하지 못한 채 사람답게 사는 일은 꿈도 꾸기 힘든 상황에서 결혼을 포기하고 살아가는 20·30 세대들이 늘고 있지만 청첩장은 꾸준히 날아든다. 부부의 연을 맺고 잘 살아보겠다는 다짐의 글은 SNS를 타고 계좌번호까지 찍혀 온다. 코로나19 상황에 참석이 어려운 경우라고는 하지만 금전적인 거래를 위한 계고장 같아 기분이 썩 내키지는 않는다. 세상 물정 모르는 빛나와 회사 동료인 민희의 청첩장 전달기를 담은 잘 살겠습니다는 씁쓸함이 더한다. 빛나 언니가 건넨 청첩장을 받고 마뜩찮은 주인공은 교환 거래를 떠올리며 되갚아준다. ‘이에는 이, 눈에는 눈이라는 속담처럼 밥값과 찻값을 환산해 되갚는 상황은 정글 같은 세상에서 살아가느라 고단한 직장인의 일면을 드러낸다.

 

  포털 사이트 관계사에 근무하면서 댓글 모니터링 업무를 맡은 20대 여직원은 노골적인 음란 홍보물을 지우는 일을 주로 한다. 돈으로 욕구를 충족하려는 수요자들은 꾸준히 댓글을 달고 그 댓글을 기계적으로 지우는 일 사이에 접점은 없다. 오피스텔을 개조한 곳에서 혼자 사는 여자의 집에 남자들이 찾아와 초인종 누르는 이야기 새벽의 방문자들은 평범한 남자들의 기이한 행동에 공포를 느끼다 자구책을 찾기 위해 시도한다. 오피스텔 성매매 장소를 잘못 찾아 온 남성들이라는 사실을 알아차렸고, 그 중에는 안정적인 삶이 보장된 것처럼 보이는 대기업 직원인 전 남자친구도 있었다는 사실에 여자는 회의를 품는다.

 

   맞벌이를 하면서 1주일에 두세 번 가사도우미를 고용하여 집안일 도움을 받는 가정이 늘고 있다. 직장에서 돌아와 고단한 몸으로 집안일까지 하면서 부부가 부딪치는 것보다는 돈이 나가더라도 도움의 손길을 받는 것이 낫다고 여긴 부부는 가사 도우미를 부르기로 했다. 남의 집 살림을 제대로 살기는커녕 가정의 리듬을 깨뜨릴 수도 있는 부분이 있어 신중하게 사람을 쓰게 된 뒤 겪는 일들은 자본의 위력에 휘둘리는 사람의 마음을 가늠케 한다. 창틀 청소를 해달라고 부탁한 뒤 아줌마에게 건넨 웃돈은 다음번에도 창틀 청소를 하고 싶다는 도우미의 반응은 자본의 힘을 떠올리게 한다. 고마움을 표현할 때에도 돈은 기쁨을 낳고 감사 영역을 확장한다. 자본의 위력을 떠올리게 하는 장면이 유쾌하지는 않지만 돈으로 해결하려는 부분을 용인하는 분위기는 위험천만한 일을 부르기도 한다

 

   지훈은 여자에게 자신의 매력이 먹힐 때 자신감을 회복하며 지낸다. 직장에서 만나 호감을 갖고 있던 나의 후쿠오카 가이드지유와의 연락이 닿아 그 나름의 계략으로 후쿠오카로 가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다. 번듯한 직장에 여자 경험도 많은 지훈이 여자로부터 자신의 매력과 애정을 확인 받는 방식으로 자족해왔던 근간이 흔들리게 되자 상대를 욕하며 분노한다. 임의대로 생각하고 행동하며 자신의 뜻대로 되지 않는다고 화를 내는 부분은 자아도취형의 남성에게 발견되는 일면이기도 하다.

 

   걷잡을 수 없는 코로나 19사태로 무대 공연이 열리지 않자 SNS 상의 개인 방송으로 감각을 잃지 않고 자신의 일을 잇고 있는 이들이 늘고 있다. 다소 낮음속 장우는 아버지가 선물한 효율성이 낮은 4등급 냉장고를 보며 장난스럽게 쓴 가사가 유튜브 조회 수가 50만에서 100만으로 늘어나자 계약 제의가 들어왔다. 현실감각이 떨어진 장우는 여러 곡의 음원을 제공하는 CD형태의 음반 제작을 바라며 호재를 잡지 않았고 함께했던 유미마저 그의 곁을 떠나 극빈 예술가로 전락하였다. 가파르게 오른 임대료를 충당하지 못해 가난한 예술가들은 중심 거리인 홍대에서 점점 밀려나 변두리로 작업실을 옮겨야 했다. 에너지 효율성이 떨어지는 냉장고의 소음이 텅 빈 공간의 정적을 깨는 자리에서 평안함을 느끼는 예술가의 삶이 안타까움으로 밀려든다.

 

   치열하게 살아도 될까 말까한 시대를 살아가는 20·30세대들의 기쁨과 슬픔이 고스란히 전해져오는 단편들을 만났다. 어렵게 들어간 중소기업의 비정규직 사원으로 1년 남짓 일하며 열심히 일하면 정규직 발령이 가능할 것이라는 희망을 꺾은 코로나 19는 지금껏 지속되고 있다. 일하고 싶어도 고용을 줄이는 현 상황에서 비정규직으로라도 일할 곳이 있으면 좋겠다는 20대 후반 딸의 푸념에 슬픔은 배어 있다. 대외 활동에 어학연수까지 다녀온 스펙을 갖췄지만 이력서를 넣을 곳마저 줄어든 지금, 아르바이트를 전전하는 20·30 세대를 보면서 이들이 경제인으로 자립할 수 있는 힘이 실리기를 바라는 마음만 커진다. 일의 기쁨과 슬픔을 느낄 수 있는 직장인의 삶이 이내 펼쳐지리라 믿으며 일과 생활의 균형을 회복할 날을 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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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홍범도 - 송은일 장편소설
송은일 지음 / 바틀비 / 202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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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광복 76주년 카자흐스탄에 묻힌 홍범도 장군의 유해가 공군 전투기 6대의 엄호 비행을 받으며 고국에 송환되어 대전현충원에 안장되었습니다. 이역만리에서 망해가는 나라를 구하려는 일념으로 척왜 항일 운동을 맹렬히 벌이느라 개인의 안전은 도모하지 않은 그의 행적은 숭고한 경외를 품게 합니다. 조선 독립을 위하여 일군에 맞서느라 청춘을 바친 헌신적인 나라 사랑 실천은 붉은 표지의 책에서도 빛을 드러냅니다. ‘나는 홍범도는 역사 교과서와 봉오동 전투 영화에서 봤던 대장의 애국심이 붉게 타올라 꺼지지 않을 민족애로 승화되는 듯하였습니다.

 

    어려운 고비가 밀려들 때마다 범도를 도와주고 그가 나갈 길을 가르쳐준 이들은 인생의 스승입니다. 핏덩이 아들에게 젖 한 번 물리지 못한 채 숨을 거둔 어머니였기에 범도는 아버지의 젖동냥으로 자랐습니다. 그의 나이 아홉 살 때 아버지마저 세상을 뜨고 머슴살이를 시작해 종이공장 노동자로 일하며 얼마의 새경을 떼어 주인에게 맡겼습니다. 하지만 공장에서 일하며 맡긴 돈을 내놓을 생각이 없는 주인 박가를 밀쳤다 살인자가 된 범도는 독 안에 든 쥐 신세를 벗어나기 위해 길 위에 섰습니다.

    오갈 데가 없는 범도는 신계사에서 행자로 생활하며 글눈을 틔우고 선무도 수련에 정진하였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이 원하는 대로 되어간다는 의성 대사의 말대로 수행자의 삶에 젖어갔습니다. 하지만 눈이 맑고 미소가 아름다운 천진 보살 같은 모지 스님을 만난 뒤부터는 수행자의 삶에 정진할 수 없었습니다. 말을 길게 하지 않아도 서로 마음이 끌린 두 사람은 수행자의 계율을 어기고 환속하여 부부의 연을 맺었습니다. 자식을 더 이상 낳지 못한 탓을 손녀 옥영에게 돌린 할머니는 그녀가 태어난 사월 초파일에 옥영을 절에 맡겼습니다. 자리이타(自利利他)의 보살도를 전하며 수행에 정진하던 두 사람의 인연은 속가를 떠난 공간에서 맺어질 운명이었던 듯합니다.

    파계하여 산문 밖으로 나온 부부는 반기는 이는 없어도 찾아갈 곳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다행이라 여기며 인적 드문 산길을 걸었습니다. 북청 안산사로 향하던 중, 오만에 찬 범도는 적을 얕보다 당하고 아이 가진 아내를 패악한 이들에게 빼앗기고 자신을 지키지 못했습니다. 회한 가득한 혈혈단신으로 험하고 깊은 골짜기인 먹패장골을 향해 걸었습니다. 산세가 험하고 산짐승들이 깃들어 사는 곳이라 범인(凡人)들은 쉽게 찾을 수 있는 곳이 아니었습니다. 먹패장골은 세상에서 꺼져야 할 자들이 기를 쓰고 찾아드는 은신처 같은 곳입니다. 그는 그곳에서 만난 심 포수와 함께 지내며 사냥 기술을 익혀 야생으로 생존하는 법을 체득하였습니다. 일등 궁수이자 총격수로 자질을 연마하며 자연의 질서대로 살던 먹패장골에서의 생활은 스스로를 돌아보게 하였습니다.

   ‘내가 여기서 뭘 하고 있나, 무엇을 위해 여기에 왔나?’

    일제의 국권 피탈로 유린당하는 양민들의 고통은 눈덩이처럼 불어났습니다. 친일분자들은 조선인을 짓밟고 일본에 기생하면서 기득권으로서의 자리를 굳히고, 일군들은 이들을 등에 업고 남의 나라에서 주인 행세를 서슴지 않았습니다. 군대 나팔수로 일하던 범도는 나라와 백성을 보호하지 못하는 군대는 필요치 않다며 상사의 명령을 거부하였고, 갑신정변의 주역인 개화파의 충의계(忠義契)를 근간으로 의병대를 꾸렸습니다. 그는 어엿한 사람이자 사나이로 살아가기 위해 망한 나라를 구하려는 일념으로 의병들과 규합하여 항일투쟁에 나섰습니다.

    모든 전투는 적의 공격을 능히 막을 수 있는 방어로써 나아가, 적을 이길 수 있는 공격으로써 승리한다는 홍 대장의 신념은 용의주도한 준비로 일군과의 전투에 임하였습니다. 먹패장골에서 심 포수와 함께 지내며 익힌 무예는 비밀 조직을 결성하여 일제의 식민 통치 기관을 폭파하고 일군들을 물리치는데 한몫했습니다.일군을 먹패장골로 유인하여 한나절 사이 백 명이 넘는 일군을 사살하여 그곳은 해골이 굴러다니는 골짜기로 불렸습니다. 호좌의진 지휘부는 의병대가 충주성에 갇힐 수 있음을 예상치 못한데다 실제로 전투를 벌이는 하부에서 내는 의견을 듣지 않았습니다. 헌병대를 태우고 그 안에 있던 일군을 모두 사살했으나 동무·동지이자 형제였던 수협을 잃은 범도는 그를 가슴에 묻고 만민이 평등해질 조선을 위해 싸우기로 다짐했습니다.

    ‘어디로 가든 원산 포구 고만동네 어창에다 기별 남기라.’

    는 말을 남기며 의병 부대 재정비를 위한 준비기에 들어갔습니다. 대장은 일제의 잔혹한 고문에 세상을 뜬 아내, 어머니 희생의 장본인인 일군과 친일 분자들을 향해 총구를 겨누다 희생된 큰아들을 심장에 품고 마음을 다잡았습니다. 생전 옥영은 식구들을 건사하면서도 전답을 팔아 남편의 의병 투쟁과 척일 투쟁을 지원하는데 인색하지 않았습니다. 신식 무기로 무장한 적들을 향해 돌진하는 희열에 달뜬 아름다운 사람들은 서로를 추동하며 서로를 견인하여 일군을 몰아내는 일에 힘을 모았습니다. 항상 춥고, 덥고, 배고프고, 헐벗고 고될지라도 나라를 되찾겠다는 간절한 의지와 불굴의 용기를 가진 자들이 모여들어 조직된 조선 군대는 망국의 한을 풀어야 했습니다.

    하지만 의병대들의 활약이 거세어질수록 가혹한 탄압에 고통받는 양민들을 보며 의병대들은 해산하였고 설상가상으로 일본에 귀순하는 의병들도 늘어났습니다. 남은 자들의 사기를 진작하고 일제를 타격하기 위해 북청 헌병대를 공격한 뒤 부인의 유해가 담긴 함을 큰아들 무덤 옆에 안치하였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떠나보낸 애끓는 울분을 삼키고 압록강을 건너 봉오동 골짜기 곳곳에 매복해 해마다 증간되는 일군의 화력에 맞섰습니다. 봉오동 주민들을 안전하게 대피시킨 뒤 독립군 토벌에 나선 월강 추격대를 격파하며 전승으로 이끌었습니다. 대장은 신식 무기로 무장한 중과부적의 일군과 맞서야 하는 불리한 상황을 이겨내기 위해 봉오동 지형을 십분 활용하여 적을 물리친 지략가였습니다.

    통찰력 있는 상부 지휘관인 홍 대장은 전세가 기운 상황에서 악에 받친 놈들을 공격하다가는 아군 사상자가 더 나올 수 있으니 전투를 멈추라는 신호를 보내어 완급을 조절하였습니다. 여의치 않은 생활에도 무기를 구할 수 있는 돈과 식량, 옷을 마련하며 헌신적으로 도왔던 거주민들의 독립의지는 망국의 설움을 안고 신산하게 살면서도 조국 광복의 열망을 놓지 않았습니다. 이태에 한 번씩 여천이 고국을 찾을 때면 그의 동지들은 십시일반 힘을 보태어 군자금을 마련했습니다. 항용 총탄이 모자라는 전투를 해온 탓에 적에 맞서 총검, 신체 등을 사용하여 싸우는 육박전인 백병전에 강하였습니다. 일본의 주구(走狗)로 조선인을 유린하고 핍박하는 친일 분자들을 색출하여 양민들을 짓밟은 이들을 응징하며 항일 운동으로 구국운동을 벌였습니다. 개인의 안위를 염려하며 스스로를 돌보기보다는 조국 광복을 위한 일념으로 나라 잃은 민족의 굴욕적인 삶을 끝내려는 독립 의지는 죽음도 달게 받겠다는 숭고한 민족애로 길이 남을 것입니다.

   ‘이제는 고국에서 편히 쉬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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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란사 - 조선의 독립운동가, 그녀를 기억하다
권비영 지음 / 특별한서재 / 202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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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양장 차림의 여성이 세상을 호기롭게 보고 있는 한 장의 사진 아래 조선의 독립운동가 김란사를 간단히 소개하고 있다. 귀에 익지 않아 낯선 인물에 대한 호기심은 나라의 독립을 위해 실천한 의로운 인물들을 떠올리게 한다. 주권을 빼앗은 일본제국주의의 횡포에 맞서 민족의 독립을 위해 헌신한 애국지사들의 의로운 삶을 접할 때마다 이들을 향한 외경심이 든다. 나라의 독립을 위해 목숨을 바쳐서라도 지켜내고 싶은 비장감이 짙은 란사는 허름한 복색으로 변장을 하고 중국으로 향하였다. 사는 방법은 달라도 서로 안부를 전하며 나라의 독립을 위한 일에는 한마음으로 지냈던 화영에게 구겨진 노트 한 권을 맡긴 채 그녀는 홀연히 길을 떠났다.

 

   아버지의 조언대로 란사는 본처와 사별한, 나이 많은 하상기와 결혼하였다. 그녀는 어린 나이에 전처의 자식을 봐야 하였지만 남편의 전폭적인 지원으로 신식교육을 받을 수 있었다. 아내를 깍듯이 예우하는 남편은 그녀가 주눅 들지 않고 당당하게 살아갈 입지를 형성하는 조력자로 남았다. 불우한 처지의 여성들을 위해 일하며 살기를 바라며 자신이 원하는 삶의 길을 닦아갔다. 딸아이를 낳아 유모 손에 맡긴 뒤 미국에서 문학사 학위를 받은 후 귀국한 그녀는 나라를 구하기 위해 공부해야 한다는 일념으로 후학들을 양성하는데 힘을 쏟았다.

 

   유모 손에 커온, 그녀의 딸 자옥은 엄마를 서양 귀신이라 부르며 데면데면하게 지냈지만 시간이 흘러 엄마라 불렀다. 자옥이 25세로 요절하자 란사는 딸을 잘 보살피지 못하였다는 자책으로 홀로 동굴에 숨어 지낼 정도로 딸이 없는 세상을 외면하고 싶은 마음이 컸다. 이를 안타깝게 여긴 남편의 위로는 딸을 가슴에 묻고 고통을 안으며 살아야 했던 아내가 몸과 마음을 추슬러 민족적 사명의 길에 나설 수 있도록 도왔다. 그녀는 이화학당 여 사감으로 학생들이 공부하여 구국 운동으로 나설 수 있도록 독려하였다

  

  ‘구더기 같은 년

   이토 히로부미의 애첩 배정자를 욕하는 란사의 찰진 한마디는 할머니로부터 받은 유산 중 하나다. 고종의 신임을 받고 궁에 드나들며 정황을 살피고 염탐하여 전하는 등의 친일 행각을 벌였다. 배정자는 이토가 암살당한 뒤에도 만주에서 활동 중인 항일 독립 운동가들을 밀고하며 구차한 삶을 이은 매국 행위를 일삼았다. 이중적인 잣대로 살기를 자처하는 기회주의자들도 편승해 조국 광복을 위한 길은 바람 앞의 등불처럼 위태로웠다. 화영의 남편은 독립 운동 자금을 대기도 하면서 후대 왕위를 계승할 의화군과의 화친을 위해 줄을 대보려고 안간힘을 쓰기도 하였다.

 

   세상이 어지러울 때에는 큰 뜻을 이루기 위해 본색을 드러내지 않고 지내야 하는 이들도 쉽게 만날 수 있다. 미국 유학 중에 란사는 광인처럼 주색에 빠진 것을 가정해 일제 감시를 피해 살아야 했던 의친왕 이강을 만났다. 섣부른 행동으로 이강을 파락호로 폄하하며 욕했던 점을 뉘우치며 이후 이강의 독립운동에 가담하게 되었다. 란사는 비밀 서재를 만들어 그의 은신처로 제공하였으며 임정의 어려움을 알려 독립 운동 자금을 모으기 위해 멀리 나서기도 하였다. 그녀는 조선의 자주 독립을 이루려는 열망으로 이강과 함께한 시간이 늘어날수록 그를 향한 마음도 커졌다. 하지만 결혼한 여자로 마음속 깊은 정을 품고 대의를 위해 그와 뜻을 함께하였다.

 

   하고자 마음먹은 일은 꼭 해내고 마는 뚝심으로 선택적 삶을 살아온 란사는 이강과 함께 상해 임시정부로의 탈출을 모의하고 실행에 옮겼다. 배고픔을 견딜 수 없어 도둑질을 하다 발각된 병수를 털보 이 씨는 받아들였다. 도둑질하지 말고 배고프면 오라는 말을 기억한 병수는 건어물 가게에서 심부름하며 지내다 상해 임시정부를 찾아 나서는 길에도 동행하였다. 일본 경찰의 감시를 피하기 위해 특별한 분장술로 늙은 부부로 변장한 이강과 란사는 상해에서의 계획을 실행에 옮기던 중 생이별을 하였다. 낯선 중국에서 상해 임시정부를 찾아 본격적인 독립 운동에 가담하기도 전 란사는 독살 당하였고 이강은 일본경찰에게 발각당하여 본국으로 강제 송환되었다. 밀고로 임시정부 요원들과 접선하려는 뜻을 채 이루지도 못하고 낯선 땅에서 유해로 마감한 란사의 짧은 생은 처연함을 돋운다.

 

   신여성으로 널리 배운 만큼 후학들에게 가르침으로 돌려주었던 란사는 살아서 고국을 찾지 못할 것이라는 자신의 운명을 예감하고 화영에게 심경을 담은 공책을 전한 듯하다. 은애하는 이강을 위하여 만든 비밀 공간에서 그가 필요할 때 지낼 수 있기를 바란 일, 어린 자신을 다독이며 살뜰한 지원을 아끼지 않은 남편에게 존경심을 드러낸 일 등은 그녀가 없는 공간에 씨줄과 날줄로 무늬를 아로새겼다. 독립 운동의 단초를 마련한 곳에서 밀알로 흩어져 자생하는 야생의 꽃들처럼 피어난 이들은 일본의 손아귀에서 벗어날 우리나라의 앞날을 그리며 조국 독립의 깃발을 휘날리고 있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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