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통의 노을 자음과모음 청소년문학 82
이희영 지음 / 자음과모음 / 202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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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열일곱 아이들과 함께 1년을 보내다 보면 고해(苦海) 같은 현실에 비탄하는 이들을 종종 만나게 된다. 아버지 폭력을 피해 핏덩이 아들과 네 살 딸을 할머니에게 내밀 듯 던져 버리고 이른 아침 첫차를 타고 줄행랑을 친 엄마를 지금도 용서할 수 없다는 소녀의 속내를 듣다 보면 안타까움이 더한다. 조손 가정에서 생활하는 아이들이 많은 시골 학교의 생태적 환경에 좌절하면서도 아이들에게 도움을 줄 만한 일을 찾아 나섰다. 꿈 장학생으로 추천하여 매달 20만 원을 장학금으로 전하며 부정적인 관념으로 가득한 여고생이 그래도 아직은 살 만한 세상이라 여기며 더 이상 비탄에 젖지 않길 바라고 있어서이다.

 

   바이러스 감염이 창궐하는 세상에서 평범하게 혹은 보통으로 살기 점점 어려워진다는 이들이 늘고 있다. 상식이라 정한 틀을 벗어나는 일들이 일어나지 않기를 바라지만 살다보면 세상일은 궤도를 이탈하여 수습하며 살기 힘든 상황에 놓이곤 한다. 열일곱 아들은 서른넷 엄마와 함께 한 배를 타고 순항 중이다. 애가 애를 키워야 하는 상황에 처한 미혼모 최지혜 씨는 세상의 편견에 무너지지 않기 위해 생활력 있는 가장으로 함께 살아내야 했다

 

   아들을 키우기 위해 정든 공간을 나왔고, 익숙한 이들과 결별하며 새로운 공간에서 가정을 지켜야 했다. 엄마는 미혼모 시설에 머무는 동안, 액세서리 수업에서 배운 기예를 바탕으로 지혜 공방을 차려 액세서리를 만들어 팔거나 수강생을 대상으로 한 수업으로 생계를 이었다. 일찍 철이든 아들은 중국집에서 주말 아르바이트를 하며 용돈을 벌었다. 양파를 까거나 야채를 다지는 일이 주된 일이지만 일의 경중을 헤아리지 않고 무엇이든 최선을 다하는 노일이다.

 

   한순간을 붉게 타올랐다 어둠 속으로 스러져가는 노을 진 풍경을 보며 태중 아기에게 붙인 이름에 엄마 성을 붙여 최노을이 생존하게 되었다. 같은 건물에만 요리를 배달한다는 철칙을 지키는 짜장·짬뽕 집 사장은 특별하다. 돈벌이가 되었던 때, 배달사고로 목숨을 잃은 20대 대학생 사건 이후 돈을 적게 벌더라도 타인의 목숨을 해할 수도 있는 배달은 안 하는 것이 옳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대신 같은 건물 엄마가 일하는 지혜공방에는 배달이 가능하여 종종 엄마를 만날 수 있어 노을은 좋았다. 시험이 끝나는 날이면 바쁜 엄마를 대신해 집안 청소를 하고 요리를 하면서 서로 부족함을 채워 진일보한 생활을 위해 노력하는 아들이다.

 

    평준화된 틀에서 벗어난 출발로 보통의 가족과는 다른 모습을 한 노을 네이지만 모자(母子)가 서로 의지하며 살아가는 데는 일반 가정과 별잔 다르지 않다. 둘은 서로 의지하며 사랑하는 가족으로 당면한 현실을 외면하지 않고 당당하게 살고 있다. 비싼 패딩을 사러 간 옷가게 점원이 노을을 보고 동생이냐고 물었을 때 그는 당당히 아들이라고 밝히며 비밀에 갇혀 지내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노을은 앞으로의 시간은 보통의 모습으로 평범하게 살고 싶었으나 보통으로 보이지 않는 일들이 일어난다.

 

   엄마를 5년 동안 바라봐 온 연하의 남자 성빈은 막역하게 지내온 친구 성하의 열 살 위 오빠이다. 엄마보다 여섯 살이 적은 성빈은 엄마의 사랑을 얻기 위해 열심히 공부하여 마침내는 대기업 정규직으로 입사하였다. 여러 이유를 들어 성빈의 사랑을 거절하였던 엄마는 한 가지 한 가지 자기와의 약속을 이뤄낸 그의 기다림에 조금씩 마음을 열었다. 열여덟 살 아들이 딸린 서른넷의 아줌마와 연하남의 사랑을 곱게 봐 줄 리 만무하다며 보통으로 사는 일이 이리도 힘든지 통감하는 시간이기도 하였다. 이 일을 둘러싼 파생적 문제를 두고 성하와 대화하며 우려했던 일들은 성빈 아버지의 한마디에 무색해지고 만다. 성인인 두 사람의 사랑을 믿어주고 지켜보는 것 이상의 역할은 없을 것 같다는 의미심장한 한마디는 통상적으로 일컫는 평균적 사랑에 잣대를 두고 있었던 자신을 돌아보는 시간이기도 하였다.

 

   좋아하는 사람이 일하는 곳을 깜짝 방문해 관심을 드러낼 때가 있다. 노을이 일하는 중국집을 찾은 동우는 성하를 소개해 달라고 하였지만 실상은 노을을 만나고 싶어서였다. 말수가 적고 신중한 우등생으로 혼자 있는 시간이 많은 친구 동우의 고백은 노을을 당혹스럽게 하였다. 동성애자임을 밝히는 동우에게 거부감을 강하게 드러내는 대신 자신은 이성애자라고 말하는 부분은 상대의 감정을 인정하되 자신과는 다름을 분명히 했다. 되돌릴 수 없는 일을 탓하며 현실을 외면하기보다는 있는 그대로의 현실을 수용하며 서로 성장하는 길을 택한 노을과 엄마의 모습에서 희망을 읽을 수 있다. 보통의 삶을 갈구할수록 보통의 삶과는 비껴나 얽히고 설기더라도 꼬인 매듭을 풀어 나가는 인생에 또 다른 획을 긋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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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 이제는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오늘을 산다
가네코 유키코 지음, 박승희 옮김 / 즐거운상상 / 202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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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갱년기를 조심하자.’

   열여덟 살 아이들이 중학교 3학년 졸업을 앞두고 학급 신문을 만들면서 선생님 인상을 한마디 남기는 대목이 적힌 구절이다. 갱년기를 조심하라는 한마디에 등짝은 활활 타오르는 화롯불처럼 뜨거워졌고 헛웃음이 절로 나왔다. 소통이 안 될 때가 생길 때면, 아이들을 향해 소리를 질렀던 적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감정이 널을 뛰면서 언행에 민낯을 드러내었다는 사실이 후회막급이지만 돌이킬 수 없는 그대로 받아들이며 지금부터라도 후회를 최소화하는 방향으로 우회하며 살아갈 일이다.

 

   나이 50, 자전거를 타고 해안가를 달리는 중년의 모습은 동적이면서도 활기차 보인다. 이제는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오늘을 산다는 제목은 50대 중반에 이른 자신에게 물음을 던진다.

   “그대는 지금 현재를 잘 살고 있는가?”

    라는 물음에 긍정적인 답을 내리기 힘들지만 더 나이 들기 전에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살아가고 싶다는 포부를 담는다. 후회를 덜하기 위해 지금 하고 싶은 일이 있다면 머뭇거림 없이 실행에 옮기고 싶다. 그 때 그 자리에 나가지 않았더라면 내 인생은 달라졌을 것이라는 막연한 생각들이 머리를 밀고 올라올 때가 있다. 현재의 삶이 심드렁하고 하는 일이 뜻대로 안 된다고 푸념할 때면 더더욱 그러하다.

 

   잠자리에서 눈을 뜨고 일어나 움직이기 전 오늘 하루도 깨어 있음에 감사하는 기도를 올리며 악업을 짓지 않으리라 다짐하며 하루를 시작한다. 무릎이 시큰거리고 발바닥에 통증을 느끼며 어깨가 아플 때가 늘어나지만 살아있어 감각을 잃지 않았기에 감사하다. 아직은 큰 병 없이 움직이며 일터에서 가치를 발휘하는 일상이 소중한데 달갑지 않은 갱년기는 50대 여성의 그림자처럼 따라 다니며 공허한 일상으로 만들기도 하지만 이제는 이 시기를 관찰하며 자신을 돌아보는 여유가 생겼다.

 

   살다 보면 인생이 녹록치 않음을 느낄 때가 늘어난다. 피할 수 없다면 즐기라는 말처럼 유한한 시간의 흐름 속에 자신을 저당 잡힌 채 아등바등 살아내느라 놓치고 있는 것들이 무엇인지 마음에 물음을 던져할 시기 50대이다. 비록 시행착오를 겪게 되더라도 하고 싶은 목록 순위를 정해 시도하며 지금을 생생하게 호흡하며 살아가고 싶다. 어느 때가 되면 해야겠다고 생각만 하지 말고, 하고 싶었던 일들을 뽑아 순위를 매겨 실행하는 용기가 필요하다. 일상에서도 일의 순서가 있듯, 인생에서도 우선순위에 두어야 할 것들이 있다. 혼자 실천하기에는 용기가 잘 나지 않을 때에는 마음 맞는 친구들과 함께할 목록을 뽑아 하나하나씩 실천하는 것도 방법이다.

 

   저자는 50대에 새롭게 시도하는 인생의 한 궤를 밟아온 과정을 관찰하듯 풀어놓는다. 캠핑 장비를 땡 처리 숍에서 하나하나씩 마련하여 친구와 함께 후지산 캠핑에 성공하였고, 자전거를 타고 여행하며 승용차를 타고 갔을 때 보지 못했던 것들을 확인하며 자연 깊숙이 들어가 생생하게 호흡하는 시간을 즐겼다. 서핑을 하고 싶어 수영 강습을 시작하고는 시니어 바디보드 강습교실에서 서핑 기술을 익힌 뒤에는 파도를 타기 시작하였다. 몸이 잘 안 따라준다는 말로 다음으로 미뤘던 요가 교실에 등록하여 굳은 근육을 풀며 유연성을 기르고 싶은 열망을 더한다.

 

   팔순에 가까운 어머니들이 살았던 50대와는 다른 50대를 살고 있지만 신체 곳곳에서 적신호를 보내고 있어 마음이 무거워질 때가 있다. 하고 싶은 일이 있어도 피로에 대한 부담이 있어 주저하면서도 지금 아니면 다시 행하기 힘들다는 점이 동전의 양면처럼 들러붙어 있는 중년의 시간 다시 용기 내어 가지 않은 길을 걷는다. 오지 않은 노후에 대한 염려로 지금의 시간을 유예하며 안달재신하지 않을 용기는 비워도 좋을 것들을 범주화하게 만든다. 다음보다는 지금이 더 의미 있고 즐거운 시간이기를 바라며 현재 채워야 할 것들을 마음에 담고 목록을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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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사진 야산에 뿌리를 내리고 자란 야생차는 고향 하동의 특산물로 가정의 상비약처럼 자리한다. 변변한 약국 한 군데 없는 궁벽한 동네, 봄과 여름에 채취한 찻잎은 환절기 건강을 챙기는 데 요긴하였다. 할머니는 봄에 찻잎을 따다 찻잎을 시들게 한 뒤 아랫목에서 발효시킨 차를 겨울에 끓여 주었다. 방안을 훈훈하게 데우는 화로 위에는 김이 모락모락 나는 잭살차 주전자가 놓여 있다. 방안을 달구는 화톳불 빛깔처럼 붉은빛으로 우러난 잭살차는 약용 음료로 감기 예방에도 한몫했다. 기관지에 좋은 돌배를 함께 끓이면 단맛은 배가 되어 면역에도 도움 되었다.

 

 할머니는 세상을 뜨기 전 농약을 치지 않으면 물러 떨어지는 감 농사 대신 병이 잘 안 들고 벌레도 잘 안 먹어 기르기 수월한 차 농사를 지었으면 하였다. 조상들 제사를 모시는 조건으로 받은 땅에 차나무를 심어 손자들이 자라면 찻잎을 수확하여 차 맛을 볼 수 있을 것이라 기대하였다고 한다. 할머니는 생전 후손들을 위해 가을에 씨앗을 받아 그늘에 말려 두었다가 이듬해 봄 심은 뒤 여름에 손가락만큼의 가지를 잘라 심었다 이듬해 봄 움트기 전에 밭으로 옮겨 심었다고 한다. 할머니의 바람대로 차나무는 잘 자라 잎을 내어주고 가을에는 꽃을 피워 그윽한 차향을 바람에 실어 보낸다. 잘 익은 열매를 짠 기름으로 나물을 무치면 느끼함이 덜하여 주로 쓴다. 녹차 씨를 이용한 기름에는 카테킨·사포닌 같은 노화 예방 성분이 풍부하게 들어 있어 건강한 기름으로 유용함이 더한 녹차이다.

 

   828년 신라 흥덕왕 3년 대렴(大廉) 공이 당나라에 사신으로 갔다 오면서 차나무 씨앗을 가져와 왕명으로 화개 동천에 차를 심었다. 지리산 남녘 화개동천은 밤낮 기온차가 크고 지리산 골짜기를 타고 내려오는 개울이 흘러 다습하고 안개가 많아 녹차 시배지로 적합한 조건을 충족한다. 그래서인지 하동읍에서 화개를 향해 섬진강변을 달리다 보면 차밭이 제각각 도열하듯 늘어서 있다. 차밭에서 차와 함께한 시간을 헤아리기 힘들 정도로 차를 만드는 사람들은 선대에서부터 존재해 왔던 것이다.

   ‘차를 만드는 사람에서는 차를 만들어 소비자들과 교유하는 생활이 일상이 되어 버린 사람들의 인터뷰가 실렸다.

   ‘차는 하면 할수록 어려워요. 근데 그게 너무 재미있어.’

   7대째 차 농사를 지어 온 도심다원 대표는 전통 방식을 지키며 차를 만들어온 장인의 손길이 전해진다. 어려서부터 차를 마시며 자랐고, 어른이 되어서는 차를 만들며 평생을 차와 함께해온 관록이 묻어난다. 대표는 집집마다 다른 김치 맛만큼이나 녹차 역시 깊이를 따라잡기는 쉽지 않을진대 경험으로 알아차리는 순간을 중시한다. 4월에 딴 새순으로 만든 차는 일 년 내 품고 있던 성분을 배로 가지고 있어 5월에 만든 차보다 깊은 맛이 우러난다며 차 농사를 지으며 터득한 내용들을 생생하게 들려준다. 전통의 맥을 이어나가기라도 하듯 그는 도심다원에 있는 큰 차나무를 가꾸며 오늘도 차밭을 지킨다.

 

   고통 없이는 지혜를 얻을 수 없다는 하동 토박이 만수가 만드는 차에 대한 인터뷰를 보면서 큰 욕심 내지 않고 자신의 일을 사랑하며 사는 일의 소중한 가치를 일깨운다. 건강해지고 싶어 몸에 좋은 차를 만들어 마셨고, 만수가 만든 차를 마시고 소비자들이 건강해지길 바라는 마음으로 차를 만드는 질박함이 그의 목소리에서 묻어난다. 극도로 가난하지만 행복지수가 높은 나라 부탄을 찾아 현지인들에게 도움이 될 경제적인 작물로 선정된 녹차를 가르쳐준 일을 들려준 삼태다원 대표 말에 마음이 따뜻해진다.

 

   우리나라에서 차 사업을 처음 시작한 조태연가 대표는 우리 차를 세계 시장에 알리기 위해 실천하였다. 1990년대 작업을 할 때에는 육 년을 혼자 골방에 틀어박혀 차를 만들었다는 말에서는 좋은 차를 만들겠다는 그의 집념을 알 수 있었다. 차에만 골몰하다 보니 아집이 생겨 차에 대한 안 좋은 평을 받아들이기 힘들어하고 있다는 것을 직시하고 열린 마음으로 차를 만들며 생긴 문제점을 조금씩 줄일 수 있었다고 했다.

 

   차 동호회에서 쌍계사 근처로 차를 마시러 왔다 인연이 되어 살고 있다는 천년지향 부부는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살았다. 부부는 주거 안정을 바라기보다는 아무것이 없어도 어디에 가든 몸 가고 솥만 있으면 차를 만들었을 정도로 차를 사랑하고 차와 함께해온 삶이다. 찻잎은 상온에서 산소와 만났다 시간이 지나면 달궈진 솥에 들어가 열기를 쬐며 덖어지다 향은 깊어진다. 덖은 차의 열기를 식히며 비비기를 반복한 뒤 다시 솥에 들어가는 찻잎은 그윽한 향을 더한다

 

   농사를 짓는 이들은 태양의 움직임에 따른 절기(節氣)를 염두에 두고 계절마다 챙겨야 할 것들을 준비한다. 욕심을 내지 않고 뿌린 대로 거두는 일상에 익숙한 팔순의 어머니는 고향 하동에서 25년째 차를 만들고 있다. 섬진강 건너 광양 매화 밭, 매화가 꽃망울을 터뜨리기 시작하면 찻잎이 올라오기를 기다리며 차밭을 오가며 올해 차 농사를 가늠한다. 봄비가 내려 백곡을 기름지게 한다는 곡우에 곡물들이 잠을 깬다는 속담처럼 녹차 농사를 짓는 이에게 곡우는 좋은 차를 만들어 내는 분수령이 되는 절기이다.

 

   초의선사는 지리산 칠불선원 아자방에서 참선하던 중 고전다서에서 필요한 내용을 뽑아 다신전으로 묶었다. 이 다서(茶書)는 찻잎 따기에서부터 차 만드는 방법, 차를 오래 보관하는 법, 다구(茶具)로 차를 우려 마시는 법까지 차에 대한 이론을 개괄적으로 싣고 있다. 지리산이 품고 있는 산비탈에는 야생으로 자란 차나무들이 이웃하여 자라 지역민들의 삶 속으로 깊숙이 들어와 있다.

 

   보살핌의 손길이 미치지 않아도 시절 인연에 따라 잎을 내밀고 꽃을 피우듯 차나무에는 새순이 돋는다. 햇볕이 가득한 산비탈에는 4월 초순부터 눈을 틔우기 시작한 녹차는 참새 혀처럼 뾰족하게 내밀고 올라온다. 이른 봄부터 시작되는 채다(採茶)는 여름이 깊어질 즈음 끝이 난다. 너무 서둘러 찻잎을 따면 차 맛이 온전치 못하고, 너무 늦으면 신성함이 흩어져 다신(茶神)이 사라진다고 다신전에서는 기술하고 있다.

   어머니는 이슬이 채 깨기도 전, 새벽의 서늘한 기운을 받으며 주먹밥을 챙겨 차밭으로 향한다. 손으로 찻잎을 끊어내는 톡톡 소리는 만물을 일깨우며 녹차 밭의 고요를 깬다. 찻잎을 딸 때는 절기가 중요한 만큼 찻잎은 때에 맞춰 따야 한다. 곡우 전 5일을 최고로 삼아 차를 만드는 만큼 우전차는 녹차의 맛과 향, 기운까지 빼어나 차를 즐기는 이들에게 인기가 있다. 참새 혀처럼 올라온 잎을 따기 시작하면 하루가 다르게 찻잎은 자라므로 여린 순을 톡톡 따 담으려고 손을 재게 놀린다. 하루 종일 찻잎을 따더라도 혼자 2킬로그램을 따기 힘들 정도로 고된 일이지만 어머니는 녹차 잎이 돋기 시작하는 봄을 기다린다.

   차향 가득한 하동에서만 볼 수 있는 독특한 차밭 풍경을 담은 그림은 싱그러운 빛으로 안온함을 준다. 오십 년 넘게 봐왔던 낯익은 고향의 모습이지만 어느 것 하나 놓치고 싶지 않은 이유는 봄 한철 차밭에서 찻잎을 따고 차를 만드느라 자신을 돌보지 못한 채 지내는 어머니의 주름진 얼굴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차 문화의 시초인 쌍계사와 차 시배지 등을 담은 그림은 오랫동안 차와 함께해온 삶의 흔적들이 켜켜이 쌓여 이뤄낸 문화를 형상화한 것이었다.

   조그마한 일에도 크게 반응하며 에너지 넘치는 십대들과 생활하는 시간, 차 한 잔을 마시며 격해지는 감정을 가라앉힌다. 다관에 끓인 물을 부은 뒤 차를 넣어 우려 마시는 상투(上投) 방식으로 찻물을 따라 마신다. 홀로 차를 음미하는 시간은 신령스러운 기운을 느끼기 쉽다고 한 것처럼 차 한 잔에 굴곡진 인생의 조각들을 녹여내며 마음을 다스린다. 향기롭고 맛이 일품인 차를 가까이하며 해마다 녹차를 만드는 철에는 고향을 찾는다. 노쇠한 어머니 혼자 차를 따고 만드는 일이 쉽지 않음을 알고 있기에 힘을 보태고 싶어 서이다. 녹차 여린 잎을 따서는 차를 덖고 비비는 과정을 거쳐 수제차를 만들며 자부심을 갖는 어머니는 불의 열기를 잘 다스려야 한다고 당부한다. 어느 것 하나 허투루 해서는 안 된다며 그 옛날 할머니가 하던 방식대로 차를 만들어 손님들에게 차를 보낸다. 차 맛으로 오롯이 평가받으려는 견습생처럼 오늘도 차 공부를 하면서 차향을 맡는다.

 

다원 순례길, 표지판에 그려진 마스코트 찻잎새는 이정표가 되어 도보 여행자들이 헤매지 않도록 길을 안내한다. 차에 문외한이었던 찻잎새가 다도 경연을 앞두고 칠불사를 찾아가 초의선사의 혼령을 만나 다인(茶人)으로 새롭게 태어나는 과정은 우리 녹차에 대한 애정을 더한다. 잭살차를 어려서부터 마시고 십 수 년 동안 어머니와 함께 차를 만들며 녹차 한 잔을 마시며 하루를 열고 있지만 한 잔의 차가 내게로 오기까지의 공정을 잊을 때가 많다. 차 한 잔에 담긴 다인들의 노력과 정성을 새기며 오늘도 마음을 다스리는 명약으로 차 한 잔을 우려 마신다. 물이 끓어오르는 찰나 산란한 마음을 재우고 집중하는 가운데 맑은 차를 음미하는 시간은 번민을 털어내는 정화의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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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이 꿈꾼 나라 - 실록으로 읽는 세종의 위업
이석제 지음 / 인간과자연사 / 202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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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말과 한자가 서로 통하지 않아 제 뜻을 능히 펴지 못하는 백성들을 위한 한글 창제는 세종의 큰 업적으로 남아 있다. 자주·애민·실용·창조 정신으로 집약되는 훈민정음 창제 정신을 넘어서는 세종의 인간애는 성군으로 자리할 바탕을 이룬다. 태종은 충녕대군에게 할 일이 없으니 평안하게 즐기라는 말 덕분에 유희와 애완의 격물을 두루 갖추며 성장하였다. 자유분방한 양녕대군은 세자로서 궁중 규범에 어긋나는 행동으로 종사를 이을 수 없다는 신하들 상소에 따라 충녕대군은 조선 4대 왕위에 올랐다. 외유내강형의 충녕대군은 학문을 좋아하는 군주로 선택과 집중의 지도력을 발휘하며 조선을 통치하였다.

 

   학문을 즐기며 경연을 게을리하지 않은 세종은 고질병에 시달리면서도 글을 읽는 동안 생각을 일깨워 정사에 접목하여 시행하는 부분이 많았다. 새벽 5시에 일어나 하루를 시작한 세종은 꽉 짜인 일정을 소화하면서도 성리의 학문을 정독해 고금의 모든 일에 통달하여 어느 한쪽에도 막힘이 없었다. 편안한 때에도 위태로운 일이 닥칠 수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며 나라를 보호하는 계책을 널리 알렸다. 강한 나라를 만들기 위해 군사 훈련을 독려하며 화포를 비롯한 각종 신무기 개발에도 전력을 다하였다. 세종은 국토를 안전하게 방어하여 백성의 삶을 편안하게 하는 것이 왕의 사명이라고 여기며 왜인과 야인에 대한 경계심을 풀지 않았다.

 

   세종은 왕이 거처하는 궁궐에서 포를 쏘아 올려 최강의 나라를 향한 선전포고를 드러내며 치국과 관련 책을 두루 섭렵하며 무사 양성 계획을 세워 실행하였다. 궁궐 내 활터를 지어 활쏘기 연습을 시키고, 격구로 무예 연습을 지속하였으며, 도순검사들을 각 도에 파견하여 군대 형편을 살피게 하였다. 조선에 복종하면서 평화롭게 지내다가도 갑자기 침략과 약탈을 자행해 변방의 골칫거리로 떠오른 여진족을 토벌하는 데 공을 세운 최윤덕은 6진을 개척한 김종서와 함께 북방 정책을 펴 나라를 튼튼히 하는 데 힘을 쏟았다.

 

   편안한 때일수록 위태로운 것을 잊지 않고 경계함은 나라를 위하는 도리임을 한시도 잊지 않은 세종은 강한 나라를 만들기 위하여 변경에 성을 쌓는 일은 만세의 장구한 계책을 위함이었다. 한가할 때 성책을 굳게 하고 수비하기 위해 천리장성을 완성하기까지 백성들의 궁핍과 고통은 수반될 수밖에 없었지만, 세종은 뜻을 함께하는 신하들과 함께 변방을 방어하기 위해 군비를 강화하며 후일을 도모하였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원하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손에 넣으려는 야욕은 힘없는 나라를 침탈하는 일로 이어져 백성들이 받는 고초는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컸다. 일왕의 대장경판 구걸과 사신 단식 투쟁, 노략질 모의 등은 끊이지 않았고, 훗날 자신들이 이루지 못한 욕심을 채우기 위한 일제의 야만적 침략은 핍박으로 이어져 굴욕적인 역사로 큰 발자국을 남겼다. 세종초, 대마도 토벌 이후 많은 것을 주면 줄수록 더 많은 것을 찾아서 배를 타고 넘어오는 왜인들로 삼포 왜인 단속은 강화될 수밖에 없었다.

 

   세종은 나랏일을 보면서 모든 부정적인 일들을 자신의 부덕과 책임으로 돌리고 성찰하며 지혜를 모으기 위해 경서를 읽고 또 읽었다. 백성들 삶을 고통스럽게 하는 제도는 혁파하고, 쇄신 정책을 펴나갔다. 공정성을 상실해 힘없는 백성들의 피해를 막기 위해 공법(貢法)을 정해 시행하였다. 전 백성을 대상으로 여론조사를 벌여 백성에게 좋은 방안을 찾아 실행에 옮겼을 정도로 세종은 민본 사상을 실현하였다. 병든 노인과 환과고독(鰥寡孤獨)에게 은혜를 더 베풀었고, 여자 노비들은 출산 전과 출산 후 휴가를 법제화해 모성을 보호하였다. 백성이 법을 몰라서 죄를 범하게 되는 일이 생기지 않도록 법을 알게 하는 것이 긴요하며 죄수를 가두는 옥을 정결하게 유지하는 일까지 살폈을 정도로 자애(慈愛)를 실천하였다

 

   무지몽매함을 벗어난 백성들이 스스로 잘 살아갈 힘을 얻을 수 있음을 간파한 세종은 누구나 쉽게 익힐 수 있는 문자를 창제하였다. 백성들이 읽으면 도움이 될 만한 책들을 지어 널리 보급하려는 큰 뜻을 세웠다. 집현전 학자들과 함께 훈민정음을 창제했다고 대부분 알고 있던 것과는 달리 세종 혼자서 비밀리에 했던 일임을 실록의 기술을 통해 알 수 있었다. 14431230일 세종은 정음 28자를 처음 만들어 예를 간략히 들어 보인 뒤 집현전 학자들에게 한글 서적을 편찬케 하였다. 세종은 한글 창제 후 한글의 쓰임을 실험하고 연구하기 위해 고질병을 들어 세자에게 섭정을 위임코자 하였다. 하지만 신하들의 거센 반대로 이마저도 쉽지 않았다. 찌르는 듯 아픈 임질[대상포진]과 시야가 흐려지는 안질을 앓으면서도 선택한 일에 집중하는 실천력으로 한글은 세상에 빛을 보았다.

 

   글자를 가진 민족만이 영원히 존재할 수 있다는 신념으로 한글 작업 완료 시점을 몇 개월 남겨두었을 때 최상의 결과를 얻기 위해 세종은 왕위를 내려놓겠다고 하였다. 새 글자인 한글을 창제한 후 집현전 학자를 중심으로 중국어 자전을 번역하게 해 책자 보급에도 힘을 썼다. 부뚜막의 소금도 집어넣어야 짠 것처럼 세종은 백성들이 전하고 싶은 바를 쉽게 전하여 소통할 수 있는 일상을 위해 쇠한 몸으로 선택한 일에 집중하였다. 우리 말과 중국의 말이 다름을 아는 데서 출발한 자주적 관점과 백성들의 안위를 염려하며 만백성의 삶이 나아지길 바라는 민본주의적 관점은 시대를 초월하는 인간에 대한 사랑을 세종답게 실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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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파트먼트
테디 웨인 지음, 서제인 옮김 / 엘리 / 202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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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라온 환경이 다른 둘이 한 집에서 살아가기 위해 서로에게 배려할 부분은 많다. 가보지 않은 길을 걷다 보면 돌연한 일들에 발목이 잡혀 상처를 내며 살아갈 때도 왕왕 있다. 경험하지 않은 시간을 함께한다는 것은 위험 부담을 떠안고 출발하는 모험 같은 것이다. 대학 입학을 앞두고 시 생활에 익숙지 않은 친구 둘은 월세를 아낀다는 명분으로 셋방에서 함께 지내다 1년은 근근이 버틴 뒤 갈라섰다. 소설 아파트먼트에서 함께 생활하게 된 주인공과 빌리의 관계를 들여다보니 스무 살의 룸메이트가 떠올랐다.

 

   방 한 칸에서 함께 지내더라도 청소와 빨래, 연탄재 처리 등 해야 할 일들이 있었지만 여러 이유를 들어 핫바지 방귀 새듯 빠져나간 친구가 떠올라 한참을 웃어젖혔다. 짙은 어둠이 채 가시지도 않은 새벽 연탄재를 버리러 가는 일은 늘 내 몫으로 자리했다. 지난밤 숙취로 늦잠을 잔다거나 새벽바람을 쐬면 비염이 도져 생활이 힘들다는 등의 이유를 대는 친구를 대신해 고무 대야에 연탄재를 이고 가는 시간은 계약 기간 만료일까지만 버티자고 곱씹으며 자신을 달래야 했다.

 

    작가를 꿈꾸는 이들이 전문적인 교육과정을 통해 재능을 연마하며 기량을 발휘하는 길을 찾아 나선다. 보증된 기성체제 안에서 소설가의 길을 걷고 있다는 안도감을 찾을 수 있기를 바라며 나는 1996년 뉴욕, 컬럼비아대학의 대학원에서 문예창작 워크숍 수업을 듣고 있다. 용기 내어 자신이 쓴 소설을 두고 합평 수업이 이뤄진 날, 원생들의 신랄한 비판과 교수의 혹평에 희망을 품기 힘들었다. 유일한 동료 수강생 빌리는, 소설가로 성장할 재능이 스스로에게 있는지 반문하며 실의에 젖어 있는 나에게 힘을 돋워 주었다. 자신의 소설을 지지해준 빌리의 문학적 재능에 매혹을 느낀 나는 그에게 룸메이트를 제안하였다.

 

   아버지가 지원해주는 학비와 용돈으로 별 어려움 없이 대학원 생활을 하는 나와 달리 빌리는 문학적 재능이 뛰어나지만 경제적 어려움을 겪고 있어 밤에는 바텐더 일을 하며 학비와 용돈을 마련해야 했다. 빌리가 일하는 바에 들른 주인공은 햇볕 한 줌 들지 않는 바의 지하실에 임시로 묵고 있는 그의 처지를 안타깝게 여겨 임대한 대고모 집에서 함께 살자고 제안하였다. 작가로 성공하려는 꿈을 좇아 작품 활동을 하는 동안 서로의 글을 읽으며 평을 함으로써 개선책을 모색하는 최고선을 지향하며 지낼 수 있으면 좋으련만 둘 사이에는 틈이 생기기 시작하였다

 

   주인공은 우연한 자리에서 만난 여성과 문학적인 삶을 함께하는 꿈을 꾸며 마음을 나누려 하지만 남성성은 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였다. 하지만 빌리는 수려한 용모에 강한 남성성으로 여성을 압도하는 힘이 있어 주인공에게 열등감을 일으키기도 하였다. 대고모 소유의 아파트이지만 안정적인 의식주가 해결되는 공간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힘이 되었던 주인공은 빌리와의 생활이 쌓일수록 열패감이 자리하였다. 그에게 선의를 제공하며 스스로 좋은 사람이라 평가하며 살던 주인공도 그와 살면서 부딪히는 일들에 본색을 드러내게 되었다. 나를 정말로 이해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라는 말로 고립된 시간을 보내고 있는 주인공은 문학적 동반자로 곁에 있는 빌리조차 받아들이기 힘든 존재로 자기 균열이 일어났다

 

   일을 크게 만들지 않으려 애쓰며 지낸 주인공은 자신이 가진 특권을 쉽게 조롱하면서도 후하게 베푸는 것들에 매어 사는 빌리를 보면 환멸을 느꼈다. 창작지원 장학금을 받아 그가 아파트를 떠나기를 바라면서도 한편으로는 그가 공모전에 작품을 낼 수 없도록 원고 파일을 날려버렸다. 주인공은 그가 간직하고 있는 애장품 같은 물건들을 파기하였다. 창작의 영감을 주는 기록물과 습작 모음집 등을 모두 찾을 수 없는 곳으로 버리고 강도가 든 것처럼 위장하였지만 빌리는 모든 사실을 알아차렸다. 주인공은 강도 위장 사건으로 불법 임대 거주 사실이 드러나 다른 곳으로 이사해야 했다.

 

   감정의 밑바닥에 자리하는 동물적 본능을 여과 없이 드러낸 주인공을 비웃으며 빌리는 창작 지원금을 받고 다른 룸메이트를 찾아 이사를 갔다. 읽고 쓰기를 좋아한다는 교착점이 빚은 환상에 끌려 친밀해진 두 사람의 관계는 파국으로 치달았다. 그 후 그는 중간급 작가로 가정을 이루었고 대학 교수로 재직하며 성취를 더하였다. 한편 주인공은 작가가 될 역량을 갖추고 있지 않음을 알아차리고 출판사 교열팀장으로 일하며 또 다른 길을 찾았다. 동일한 구조의 칸칸이 들어앉은 아파트 거주 가정이 각양각색의 삶을 꾸려가고 있다. 서로의 영역을 침범하지 않고 존중해주기를 바라며 작가의 꿈을 꾸며 지내온 두 청년의 열망은 서로에게 완충재로 자리하지 못하였다. 존재의 소멸과 가치의 상실을 받아들이며 조금씩 깊어지는 것이 인생이 아닐는지 두 청년의 청춘 시절을 통해 떠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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