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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보는 마음
김유담 지음 / 민음사 / 2022년 3월
평점 :
해방둥이인 어머니는 가부장적인 질서가 엄존했던 시대에 시어머님을 모시면서 세 살 터울인 오누이를 돌봐야 했다. 둘째 며느리임에도 불구하고 돌연한 일로 젊은 남편을 멀리 떠나보내고, 생계유지를 위한 경제활동을 병행하며 쉴 틈 없이 이어지는 돌봄에 지칠 겨를도 없었다. 스물여덟 나이부터 시작된 돌봄은 일흔 여덟인 지금까지 끝이 나지 않았다. 어느새 50을 훌쩍 넘긴 중년의 자식들을 걱정하며 상처를 안고 사는 딸을 돌본다. ‘특별재난구역’ 속 일남은 출산 후 병을 앓다 세상을 뜬 어머니를 대신해 열 살 때부터 부엌살림을 도맡으면서 시작된 가족 돌봄은 손녀까지 양육해야 했다. 아들의 공무원 합격을 바라며 손녀 가영을 돌보는 일남은 중증 치매로 요양병원에서 지내는 아버지를 챙기느라 바빴고 별세한 아버지 곁을 지켰다.
대추나무 집으로 통하는 집의 ‘대추’는 살이 차올라 한 입 베어 물면 입 안 가득 달콤함이 퍼진다. 할머니는 중병으로 입원 치료를 받는 중에도 손자 영석의 병문안에 반색하며 마당 귀퉁이에 자리한 대추를 맛보고 싶은 바람을 드러냈다. 지금은 남의 집이 되어 외부인 출입이 쉽지 않은 상황에서 손자와 손녀는 할머니 소원을 들어주기 위해 모험에 나섰다. 알이 굵은 대추를 손에 넣고 병원으로 향하며 할머니가 중병으로 고통 받지 않고 돌아가시길 바라는 마음을 드러내는 영석을 보며 누군가를 돌보는 일이 고통의 시간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자 씁쓸해진다. 평생 한량처럼 살아온 남편을 대신해 가사를 책임지고 살아온 ‘입원’ 속 분례는 남편의 갖은 폭력을 욕하면서도 치매를 앓는 시아버지와 귀 어두운 시어머니를 돌보며 지냈다.
‘오늘 당신은 그곳에 가게 될 거라고, 그곳이 당신의 마지막 장소가 될 거라고......’
치매 중증으로 요양병원 입원을 앞둔 남편을 향한 아내의 외마디는 돌봄의 끝을 예비하고 있다.
열 달 동안 아이를 뱃속에 품었다 산고(産苦)를 겪으며 아이를 양육하는 과정은 녹록지가 않다. 한 생명체가 세상에 나오면서부터 부모의 시간은 아이들을 챙기며 돌보는 시간으로 채워진다. 엄마는 처음이라 쉽지 않은 때, 온라인 카페를 중심으로 한 정보 교환은 어둠을 밝히는 등불처럼 자리한다. 걸어보지 못한 길을 걸을 때면 내키지 않을 때도 있지만 엄마이기에 용기 내어 지금 이 길을 걸어가야 할 때가 있다. 산후조리원에서 제일 인정받는 여자는 젖 잘 나오는 산모라는 말을 서슴지 않는 ‘조리원 천국’에 머물며 산후 조리하는 산모들의 경쟁 심리는 천국 이면의 지옥을 떠올리게 한다. 상황에 따라 달리 생각될 수 있는 공간에서 벌어지는 세계 속 진풍경은 익숙지 않은 길을 걸어가는 데 소소한 힘을 불어넣는다.
눈치 안 보고 육아휴직을 챙길 수 있는 직장인이더라도 자아실현과 자녀 양육 사이의 괴리가 커질수록 이상과 현실의 거리는 멀어진다. 마흔 넘어 어렵게 얻은 딸을 키우다 회사 복직을 앞두고 아이를 돌봐 줄 베이비시터를 고용하기를 반복하는 미연의 무거운 일상을 담은 ‘돌보는 마음’은 워킹 맘의 비애가 드러난다. 직장 여성이 안심하고 맡길 수 있는 베이비시터라 여겼던 남희가 치매 걸린 시모를 학대하는 광경을 보고 아연실색하는 대목은 섬뜩함을 부른다.
남아를 키우는 정윤은 온라인 카페에서 띠 동갑 혜미와 소통하는 일이 잦아졌다. 두 달 차이로 태어난 아들을 키우는 공통점은 띠 동갑 나이 차가 무색할 정도다. 정윤은 손끝이 야무지고 살림 솜씨가 좋은 혜미를 보며 절대적인 희생과 엄청난 노동을 요구하는 육아의 본을 보는 듯했다. 하지만 정윤은 만남의 기회가 늘어날수록 소비를 줄이며 살뜰하게 살림하는 혜미의 극도의 개인주의에 염증을 내며 ‘내 이웃과의 거리’를 확보하기에 이른다.
딸이 엄마처럼 살지 않기를 바라며 엄마는 딸에게 고소득 전문직 여성으로 안정적인 직장에서 일하기를 바랐다. 의대나 약대에 진학하여 걱정 없이 자신의 능력을 발휘하며 부를 쌓기를 바라던 엄마 기대를 저버린 딸은 사회학과에 진학하여 기자로 생활하다 결혼하였다. 연애 시절 비슷한 관심사로 서로 소통하며 교감하던 시간은 결혼 후 종적을 감췄고, 그 자리에는 시댁을 찾아 함께 음식을 나누고 치우는 일로 채워졌다. 주말에는 집에서 쉬며 에너지를 충전하고 싶다고 말하는 아내의 마음을 헤아리지 않는 남편과 결혼 생활을 지속할 수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서로의 의견에 귀 기울이며 배려하지 못한 점을 뉘우치던 연인도 현실적 무게에 봉착해서인지 크고 작은 마찰은 부서진 조각처럼 이어붙이기 힘들어지고 만다. ‘안(安)’과는 점점 멀어진 채............
살다 보면 의도하지 않은 대로 삶이 흘러갈 때가 왕왕 있다. 결혼 후 아이를 낳고 양육에 힘쓰던 주인공은 사고로 아이를 잃은 뒤 아이 하나도 제대로 건사하지 못하는 문제 엄마로 낙인찍힌 채 이혼하였다. 아이를 잃은 상실감으로 고통의 시간을 보내고 있을 엄마는 몹쓸 엄마로 익숙한 공간에서 살아갈 수 있는 에너지조차 고갈되어 머나먼 이국에서 새로운 생각을 써내려가야 하는 현실이 처연하다. ‘연주의 절반’에서 연주는 꺾인 생의 절반을 조심스레 꺼내어 결혼이라는 격식을 차리지 않은 대신 비혼모를 선택하여 유튜버로 활동하며 잊고 지낸 꿈을 찾아 나섰다.
유교적 가르침이 지배적인 전근대적 사회보다 현대사회에서의 여성은 인권을 존중받으며 제 목소리를 내며 지낸다고 하지만 그렇지 않은 부분이 산재한다. 남편과의 졸혼을 결심한 아내는 ‘태풍 주의보’가 발령된 날, 독신주의였던 시누이가 나이 많은 남자의 재처로 들어간 사연들을 들으며 일순 흔들리기도 했지만 마음을 다잡는다. 현실적 당위성을 강조하는 남편은 마음의 소리를 내는 아내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 이불 먼지를 털면서 베란다 너머로 뛰어내리고 싶은 충동에 휩싸여 한참을 서있었던 아내의 외로움을 살피며 육아의 어려움을 함께 나누려는 남편의 돌봄은 환상 속에서나 가능한 것일까?
배우 오디션을 보러 다니던 ‘경자’가 권력자의 첩이 되어 나타났을 때 보인 가족들의 냉대는 그녀의 걸음마저 얼어붙게 하였다. 하지만 구치소에 감금된 아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고모를 찾았을 때의 반응은 절연에 가까워 안타까움을 자아냈다. 결혼 후 다양한 모습으로 살아가는 여성들의 삶의 애환이 슬픈 미소로 화답한다. 누군가를 돌보며 살아가는 이들의 마음은 여러 빛깔로 채색될진대 칙칙한 빛을 짙게 드리운 삶의 그림자는 쉽지 않은 인생에 새로운 시도를 부추긴다. 잊고 지낸 자아의 본질을 찾아 정체성을 탐구하고, 자신이 원하는 바대로 살아갈 힘을 불어넣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