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어령의 마지막 수업 - 시대의 지성 이어령과 ‘인터스텔라’ 김지수의 ‘라스트 인터뷰’
김지수 지음, 이어령 / 열림원 / 202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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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웅혼한 기개로 동물 세계를 호령하는 호랑이해 벽두에 맞닥뜨린 혈육의 죽음은 안타까움과 분노, 서글픔과 무상감으로 가슴 한복판에 처연한 블랙홀을 만들었습니다. 예기치 않은 죽음의 늪에 빠져 허우적거리다 서너 달이 지나서야 산 자는 어떻게든 살아내야 한다는 당위성을 안고 정신을 차렸습니다. 시한부 선고를 받고 암 투병 중인 이어령 선생님의 마지막을 담으려는 기자의 걸음은 갈기갈기 찢어진 마음을 봉합하여 미답의 길을 걷게 합니다. 단순한 전쟁의 신이 아니라 법과 정의를 지키는 신 티르에서 유래한 화요일 기자는 스승을 찾아 물음표와 느낌표 사이를 오가며 죽음 앞에서도 담대한 어른을 만났습니다.


   앞에 쓴 글에 대한 공허와 실패를 딛고 매번 다시 시작하는 글쓰기를 숙명처럼 여기며 죽을 때까지 글을 쓰고 싶었던 선생님은 각혈하듯 자신의 이야기를 세상에 남아 있는 자들에게 들려주었습니다. 매주 화요일 저자는 생사를 건네주는 스승 곁에서 삶 속의 죽음, 죽음 곁의 삶을 조명하며 불가피한 인간의 죽음에 대한 배움을 전합니다. 선생님은 3월이면 자신은 이 땅에 없을 것이라며 죽음을 숙고하면서 죽음과 놀이하듯 삶을 마감하였습니다. 죽음이 무엇인지 알게 되면 삶이 무엇인지 알게 된다는 선생님은 죽음을 기억하며 살기를 바랐습니다.


  시한부 삶을 선고받은 이들은 일반적으로 부정·분노·타협·우울·수용5단계를 거치며 생존에 대한 갈증을 돋우며 여러 방법을 찾곤 합니다. 항암 치료를 거치며 이를 능가할 대증치료법을 찾아 나서는 경우가 있지만 선생님은 여느 암환자들과는 확연히 달랐습니다. 두려움 없이 죽음을 이성적으로 받아들이고 꿀벌이 스스로 꿀을 만들기 위해 화분으로 꽃가루를 옮기는 것처럼 작가로서의 소명을 다하였습니다. 인간의 지혜가 아무리 뛰어나도 어쩔 수 없는 일들이 벌어짐을 알아차리고, 자신이 감내하여할 것들을 수용하는 과정은 겸허한 태도로 삶을 살아가는 데 있음을 일깨웁니다권력자 앞에서도 당당하였던 디오게네스의 단호함은 강자 앞에서 비굴하지 않았던지 성찰케 합니다.


  선생님은 신을 믿지 않았으면서도 감당하기 힘든 극한의 상황에 놓인 딸의 불행을 목도하며 딸의 소망을 들어 세례를 받고 기독교인으로 살았습니다. 의식이 혼미해진 상황에서도 생명력이 용솟음쳤던 선생님은 방황하여 길을 잃게 되더라도 남의 신념대로 살지 말기를 당부하였습니다. 선생님은 다 채우면 허무해지는 물독보다는 우물 안에 두레박을 던져 물을 비워내는 지적 보헤미안으로 한곳에 정주하지 않기를 바랐습니다. 숨을 편안하게 쉬기도 힘들의 생과 죽음이 교차되는 때에도 약물치료를 거부하고 죽음과 함께 생활하다 영면하기를 바랐습니다. 항암 치료를 마다한 채로 기력을 다해 글을 쓰고 강연하며 죽음까지 기록할 다큐멘터리를 찍었습니다.


   죽음은 동물원 철창을 나온 호랑이가 내게 덤벼드는 기분이라는 말로고통을 수반하는 공포임을 자각하면서도 죽음 역시 삶의 일부로 받아들이며 선생님은 인생을 갈무리하였습니다. 자신의 힘으로 이뤘다고 생각한 모든 것이 선물이었다고 회고하는 선생님의 한마디는 겸허하게 삶과 죽음을 수용하는 통찰적인 시선을 투영하고 있었습니다. 죽음의 그림자가 생존 에너지를 뒤덮어 자신을 짓누르는 상황에서도 선생님은 글을 쓰고 말로 전하면서 찰나를 살더라도 자기만의 문양을 수놓으며 살았습니다. 큰딸이 먼저 갔던 그 길을 따라 간 선생님은 이 세상 소풍 끝내고 온 것처럼 즐거운 인생이었다고 말하였을 것입니다.


   삶이 지속되는 시간에도 죽음을 기억하며 유일한 존재로 자리매김한  자신이 타자를 있는 그대로 있게 함으로 더불어 발전하는 생활을 꿈꿔왔습니다. 물이 위에서 아래로 흐르듯 선생님은 품위 있게 죽음을 받아들이며 지금 선택한 일에 집중하였습니다. 죽음으로 내몰린 낭떠러지에서 인문학적 통찰을 일깨운 선생님 덕분에 시야를 확장하여 자신을 돌아보고 정진할 수 있는 힘을 얻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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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지 않은 문자를 받고 확인용 글을 쓴다.

여성 화학자로 괄시를 당하면서도 꿋꿋이 일하며

새로운 변화를 시도하는 그녀의 나날이 다채로웠다. 

일상에서 만나는 화학적 반응을 흥미진진하게

담은 레슨 인 케미스트리1~2권을 읽고 쓴 리뷰대회에서 2등에 입상한 모양이다.

제세공과금 22,000원을 결제하고 백화점 상품권 도착을 기다린다.

상품권은 딸 손에 들어가겠지만........

뭔가를 성취했다는 점에서 기록으로 남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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얄라알라 2022-08-31 15: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축하드립니다

자성지 2022-09-01 09:10   좋아요 0 | URL
축하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

scott 2022-08-31 17: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축하드립니다 ^^

자성지 2022-09-01 09:11   좋아요 1 | URL
스콧 님의 해박한 지적 성찰을 통해 배움의 물꼬를 틀 때가 있습니다. 독자 선정 위원회 활동할 때 눈에 띄는 글 보고 탄성을 내곤 하였습니다.
 
작별인사
김영하 지음 / 복복서가 / 202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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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 번의 짧은 삶을 살다가는 육신은 인생의 종착역을 향해 가는 중이다. 마지막이 언제인지 알 수 없는 시간을 보내고 있기에 지금을 허투루 보내지 않는 일상은 정체성을 찾으며 살아갈 당위성에 의미를 부여한다. 4차 산업혁명시대의 아이콘으로 떠오르는 AI·VR 기술을 살려 죽은 자와 산 자를 연결하여 애절한 그리움을 담은 프로그램에서는 기계와 인간의 공존을 환영처럼 드러냈다. 인공지능을 바탕으로 한 과학 기술은 시공을 초월한 세계를 재조명하여 단절된 세계를 이어 핍진함을 더하였다. 머지않은 미래에 인간을 닮은 로봇인 휴머노이드는 인간의 관계를 지원하며우리와 함께하다 때가 되면 작별하지 않을까 싶다.

   생명체의 죽음을 목도한 날, 평화로운 일상에는 균열이 오고 믿음의 중심부가 흔들려 종잡을 수 없는 감정들이 넘나든다. 의식이 있는 존재는 자기와 자기를 둘러싸고 있는 것들에 대해 생각한다. 다른 존재의 고통에도 공감할 수 있고, 자신에게 고통을 준 이들을 용서할 수도 있다. 휴머노이드이지만 인간으로 알고 살았던 철이 믿었던 세계에 균열이 생기면서 존재에 대한 회의(懷疑)는 소설 전개의 다른 국면을 맞는다

   평양의 로봇연구소 휴먼매터스 랩에서 일하는 최 박사는 휴머노이드 철이를 멸균 상태로 보호하기 위해 홈스쿨링으로 철이를 양육하였다. 인공지능의 폭주는 인류의 종말을 초래하고 말 것이라며 휴머노이드 양산을 경계하였다. 학부에서 철학을 전공한 최 박사는 인공지능의 윤리적 책임을 중시하며 인공 지능 기계가 대량으로 생산되는 시스템을 제어하기 위한 방안을 모색하는 시간이 늘어났다. 무등록 휴머노이드 압류법 통과로 로봇 수용소로 납치당한 철이는,

  ‘나는 누구인가?’

  라는 생각에 빠져들면서도 전투 로봇들이 벌이는 살육 전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방법을 모색해야 했다.

   인간의 감정과 윤리를 가지고 있는 철이는 아버지라 여겼던 최 박사가 자신을 만들어 낸 이유가 뭔지 궁금했다. 고장 난 기계는 부분을 수리하여 쓰다 더 이상 수리가 불가능한 기계는 버려진다. 짧은 생의 대부분을 특정 공간에 갇혀 지낸 민이, 복제인간 선이를 만남으로써 철이는 자신의 정체를 알아차렸다. 인도산 애완 휴머노이드인 민이는 기계의 부품처럼 수명이 다하면 폐기물로 처리되는 수순을 밟는다. 기억을 간단하게 지운 뒤 휴머노이드를 해체한 후 부품을 재활용함으로써 이를 폐기한다.

   상업적인 이유로 인간 배아를 복제하여 불법적으로 배양한 클론들을 팔아넘겨 수익을 올리는 비윤리적인 일들을 자행하는 기계문명의 검은 손은 지금도 밀거래를 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인간의 유전자에서 배양된 선이는 인간에 대한 불신이 깊었다. 영적 기운이 넘쳐난 선이는 눈앞의 혼란으로 전전긍긍하는 철이에게 무한대의 관점으로 우주의 시간을 보라고 조언하였다.

  인간이 만든 모든 것을 부정하는 재생 휴머노이드인 달마의 말이 인상적이  다. 인간은 불멸을 꿈꾸었지만 결국에는 인공지능과 결합함으로써만 가능한 만큼 기계의 시간에 종속될 것이라 했다. 오직 폭력으로만 문명을 유지하는 기동타격대의 무분별한 공격에 문명의 이기 역시 파괴되었다. 기계로 조작된 삶을 살다 자율적 선택 의지 없이 폐기되는 것처럼 사유 없이 인생을 살다 결딴나서는 안 된다는 믿음이 커진다.

    손상 입은 철이의 의식을 네트워크에 연결해 활성화하는 데 성공한 최 박사는 철이 로봇 고양이 데카르트로 살기 시작토록 하였다. 사람의 몸이 육신과 영혼으로 되어 있다고 여긴 철학자 데카르트는 오직 사람에게만 있는 영혼은 모양도 없고 자유로운 유기체로 봤다. 최 박사의 바람과는 달리 철이는 개별적 신체를 가진 휴머노이드로 영원불멸의 존재로 남기를 바라지 않았다. 개별적 존재로 사라지는 삶을 선택한 철이는 마지막을 보낼 선이를 찾아 그녀의 아픔에 공감하며 소통하는 시간을 보내며 그녀와 이별한다.

   유한한 삶의 의미를 빛나게 하는 생자필멸(生者必滅) 회자정리(會者定離)의 인생 법칙에 있다. 이미 존재하는 누군가를 위해 아이를 낳아 종족을 보존하려는 결정이 이기심으로 간주하며 인류와 인공지능을 연결하는 상징적인 존재로 개발된 휴머노이드 철이는 최 박사의 이기심에서 발로되었다. 인간의 필요에 제작되고 필요 없으면 폐기 처리되는 기계로 전락하는 인공로봇들을 보면서 철이는 감정을 느끼고 사유를 바탕으로 의식하기를 바라지 않았다.

  ‘내가 누구이며 어떤 존재인지를 더 이상 묻지 않아도 되는 삶. 자아라는 것이 사라진 삶. 그것이 지금 맞이하려는 죽음과 무엇이 다를까?’

삶에 대한 주체성 없이 편의성과 효율성을 따른다며 수월성의 논리대로 세상을 살아온 것은 아닌지 반문한다.

  ‘우리는 어떤 존재로 살다 인생을 회향하여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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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이라는 착각 - 얽매이고 상처받은 가족을 치유하는 마음 기술
이호선 지음 / 유노라이프 / 202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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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1세기로 오면서 다양한 가족 형태가 생겨났지만 일반적인 가정의 가족은 유전적 조합으로 이뤄진 형태이다. 태어나 살다 보니 맏이로 집안일을 도맡아 지내야 했다. 십 리를 걸어다니며 아침을 준비하여 밥상을 차리고 설거지하며 동생을 돌보는 일은 내 몫이었다. 생계를 전담하던 홀어머니를 대신해 아홉 살 때부터 시작된 집안일은 50대 중반을 넘긴 지금도 계속 된다.


  선택보다는 유전적 조합으로 이뤄진 가정의 가족을 떠올려 본다. 애증의 그림자를 짙게 드리운 채 갈등 요소들이 도처에 자리해 불만을 터뜨리지만 현실은 달라지지 않는다. 서로 다른 자아가 만나 각자의 몫을 드러내며 욕심을 버리지 못한 채 욕구를 채우려는 이기적 발상을 보인다. 맞벌이하면서 육아를 전적으로 책임져야 했던 30년 전이 떠오른다. 공동 육아를 그렇게 부르짖어도 자신이 몸 담고 있는 직장이 우선이었고, 연계한 친목 모임이 우선이었다. 


  결혼은 미친 짓이라는 말이 절로 나올 정도로 힘들었던 시간을 뒤로 하고 지나온 시간을 반추하니 모든 것이 허허롭다. 결혼 면허라는 소설에서 부르짖듯 결혼을 위한 자격증 취득이 우선적으로 이뤄져 공동 육아에 나설 용기가 없는 사람들은 결혼을 안 하는 것이 맞을 듯하다. 출생률이 1명 이하로 떨어진 우리나라 인구 정책에는 반하지만.........30대 중반에 결혼한 제자들은 하나같이 딩크로 살겠다는데 그 이유가 바로 자녀 양육 문제에 있다고 하였다. 어렵게 가정을 이뤄 자녀들을 제대로 키울 자신이 없어 자신 같은 부당함을 겪게 하고 싶지 않다는 것이 이유였다. 


   나와는 다른 사람이 만나 가정을 이뤄 가족으로 살아가는 일이 쉽지 않다. 문화적 차이를 포함한 환경적 차이는 친인척을 포함한 가족까지 아우르는 일들을 병행하기 힘들다. 엄연히 가른 개체인 구성원인데 가족이라는 이유로 타인의 생각을 저버린 채 어떤 일을 강요하는 일은 생기지 않아야 한다. 가족이라라고 편하게 생각하여 그것도 못해 주냐고 말하기 전에 상대의 입장에서 그 사람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한다. 내가 아닌 타인인 제3자로 여기며 적정한 ‘거리 두기’는 필수이다. 내리 사랑이라는 명분으로 의존적인 자식으로 키우는 것은 아닌지 살펴봐야 한다. 자식을 믿으며 자립할 능력을 길러주는 일은 더더욱 필요한 때이다. 나이 마흔이 넘어도 부모에게 기생하는 자식들이 많기 때문이다.


  여고 동창으로 만나 지금껏 우정을 쌓고 지내는 친구와는 같은 길을 걷는 교육 동지이다.

초드학교 보건교사로 일하는 친구는 내 뜻대로 안 살아지는 것이 인생이라며 정퇴냐 명퇴냐를 두고 서로 대화할 때가 있다. 

 "친구야, 나는 교직에서 물러날 수 있을 때 나올 수 있게 자식이 내 발목을 안 잡아야 할 텐데......옆에 선생님 보면 명퇴를 하고 싶어도 자식 때문에 못하고 스트레스로 힘든 것 보면 자식이 무섭더라고......."

 라는 친구의 말에 공감하며 자식들 역시 냉정한 사랑을 베풀며 적정 거리를 유지할 필요가 있다. 가족이라고 너무 많이 관여하여 지치는 관계가 아닌 서로 성장하는 건강한 관계 회복을 위해 노력해야 할 것이다. 


  한 번뿐인 인생 하고 싶은 일하면서 노년을 보낼 수 있게 가족이라는 테두리에서 벗어나 홀로 걸어갈 남은 생을 생각하니 지금에 충실한 삶에 답이 있을 뿐이다. 오지 않은 미래 당겨 걱정하지 말고, 이미 지나가버린 시간 끌어다 후회하지 말고 현재에 충실하하는 선지식의 감로법을 새기며 가족을 떠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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밝은 밤
최은영 지음 / 문학동네 / 202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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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 세기를 아우르는 네 여인의 일상이 세대를 넘나들며 기억 속 빗장을 풀고 흘러나온다. 흐름이 완만한 개울물이 강으로 흘러들고 바다로 합수되어 격랑의 파고를 견디며 융화되는 것처럼 지연은 흘러간 시간 속 직조된 추억을 불러 모은다. 지연은 평범한 가정을 이루고 싶은 바람으로 결혼 생활을 꿈꾸었지만 이마저도 쉽지 않았다. 남편의 바람으로 마음을 다해 한 일들에 모멸을 느낀 지연은 이혼을 하였다. 지연의 부모는 믿음을 기반으로 쌓은 가정이 붕괴되어 참담한 심정인 딸을 위로하기는커녕 몸 약한 사위의 안위를 걱정하며 상처를 더했다. 전근대적인 사고에 사로잡힌 남자와 그 가족으로부터 착취당하기만 한 엄마는 남자가 필요하다며 헛헛한 딸의 마음까지 짓뭉개었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길이 막힘없이 뚫려 크고 작은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데 별 어려움이 없으면 다행한 삶이지만 뜻대로 안 되는 인생길에서 인연은 한 사람의 발목을 잡기도 한다. 짧은 결혼 생활을 청산한 지연은 이혼 후 희령 천문대 연구원으로 채용돼 살던 도시에서 이탈할 수 있었다. 탐욕의 먹이사슬이 유혹하는 문명세계와는 달리 한산한 희령에서 조용히 지내며 조금씩 나아지기를 바랐다. 당시 지연은 상대의 비화를 가십거리로 삼아 뒷공론하지 않는 홀로 존재할 수 있는 공간에서 익명으로 살 수 있기를 바랐을 것이다.


    지연은 외도를 하고도 죄의식 없이 자기 합리화에 급급한 남편을 보면서 함께 갈 수 없는 사람의 길임을 알면서도 씁쓸함과 비통함이 드는 것은 인지상정이었을 것이다. 열 살 때 엄마와 함께 왔던 희령은 여름으로 기억되는 도시 이다. 울울함이 더한 시간이었지만 고개 들면 바다가 한눈에 들어와 견딜 만했다. 슬픔과 냉혹한 현실의 짐을 포용하고 흐르는 바다는 넉넉한 사랑으로 그동안 살아내느라 고생하였다며 위로의 말을 건네는 듯했다. 자연으로부터 사람에게서 얻을 수 없던 위안을 받으며 최소한의 활동으로 행동반경을 줄이며 지내던 중 지연은 열 살 이후로 만나지 못했던 외할머니와 재회하였다.


  ‘익명으로 살고 싶은 내 의지와는 반대의 상황이 벌어지면 어떡하나?’

   우려하면서도 지연은 할머니와 서로의 집을 오가며 그동안 끊어진 대화의 물꼬를 트기 시작한다. 지연은 지금의 자신을 있게 한 모계의 선대인 증조모와 증조부 이야기를 할머니에게 들으며 생생한 삶의 이야기 속으로 빠져든다. 증조모는 백정의 딸이라는 이유로 갖은 천대와 멸시를 당하면서도 병환이 깊은 고조모를 봉양하며 지냈다. 전쟁 와중에 결혼하지 않은 여성은 전리품으로 차출되어 학대를 받았던 시절, 증조모는 개성으로 가자는 증조부의 말을 따를 수밖에 없었다.


  ‘세상에서 가장 무거운 죄가 있다면 그건 여자로 태어나 여자로 산다는 것

이라는 증조모의 한마디는 나락에서 자신을 건져 준 증조부에게 고마워하는 대신 한 남자의 날개를 꺾은 죄책감을 이식하며 지내야 했다. 지연은 피난민 행렬에 끼어 불안정한 삶을 부지하며 생존을 위해 힘쓴 선대의 서사를 들으며 고통으로 이어진 과거사를 떠올렸다. 타인에게 의지하지 않고 자력으로 살아갈 에너지를 비축하며 지내온 할머니 입을 통해 흘러나온 모계 역사는 선대 여성들이 겪어온 사료(史料)로 의미가 크다.


   증조모는 명약관화한 불행을 피해 개성으로 가서 혼인 신고하고 살자는 증조부의 말을 따른다. 백정의 딸이라는 꼬리표는 증조모를 힘들게 하였지만 곰살궂게 따스함을 전하는 새비 아주머니를 만나 서로 의지하며 소통하고 공감하는 시간으로 채웠다. 말로 전할 수 없는 메시지를 담은 편지는 실의에 젖은 사람에게 힘이 되기도 한다. 새비 아주머니가 낙담하여 힘들어할 때 증조모는 살아야 할 이유를 담아 그녀에게 편지를 썼다. 한 곳에 오래 정착하여 살지 못하는 전쟁 상황은 생이별의 아픔을 감내하며 살아야 하는 운명적 공동체임을 확인시킨다. 새비 아주머니는 고모가 있는 대구로 피난을 갔고, 개성에서 남으로 내려 온 증조모는 증조부의 말만 믿고 희령으로 와 고단한 시간을 보낸 여인들을 하나 둘씩 맞았다.


   중혼한 남편과 헤어진 지연 할머니는 붙박이별처럼 희령에서 지냈다.

   ‘어딜 가든 뭘 하든 네가 하고 싶은 대로 해. 하지만 열흘 후에는 꼭 건강하게 돌아와야 하는 거야. 그것만 약속해줘.’

   지연의 엄마가 지연을 맡기고 자유의 시간을 보낼 때에도 할머니는 딸의 생각을 지지해주었다. 그 후로 마음의 결이 서로 달라 모녀간의 왕래는 끊어졌지만 지연이 희령에서 생활하게 되어 모녀는 관계를 조금씩 회복해 갈 여지가 생겼다. 새비 아주머니도 전쟁 통에 남편을 잃고 딸 희자와 함께 희령을 찾아 상실의 아픔을 상쇄하였듯이 희령은 끊어졌던 인연의 고리를 연결해 고단한 심신을 위무하는 공간으로 자리한다.


   남성들 우정 못지않게 소설 속 여성들에게서도 진한 우정은 빛을 발한다. 지연은 어린 시절 엄마의 사랑을 갈구하며 지냈다. 차갑고 곁을 내어주지 않는 엄마 대신 외로움과 헛헛함을 채우기 위해 지연은 밤하늘의 별을 보며 또 다른 세계를 꿈꿔왔는지도 모른다. 천체 동아리에서 만난 지우와 소통하며 교유한 시간은 현실을 딛고 일어나 더 큰 세상으로 나아갈 힘을 준다. 결혼 전 지연의 엄마가 근무한 우체국에서 만난 명희 아줌마가 엄마 수술비용을 건네주며 쾌차를 바란 일은 아낌없이 전하는 사랑이다.


   소설에서는 여성들 위에 군림하는 가부장적 사고에 갇혀 지내는 지연의 부계 중심의 서사 비중을 줄이고 여성들의 굴곡진 삶을 여과 없이 드러내어 암흑의 밤을 등불로 밝힌다. 새비 아주머니, 증조모, 영옥, 희자, 지연은 생물학적 여성성이 갖는 특징을 넘어 유기적 생명체로 존재하기 위해 애쓰는 인간으로서의 본질을 천착한다. 생전에 대구에는 걸음도 하지 말고 네 갈 길을 가라는 엄마의 메시지를 잊지 않고 파혼한 뒤 독일로 유학 간 희자는 암호학자로 위상을 떨치며 학문의 길을 걷는다. 지연이 희령에서 들은 모계 중심의 서사를 통해 다른 곳에서 살아갈 힘을 얻었다. 전쟁의 참상을 겪으면서도 생존을 위해 안간힘을 써서 자신의 길을 찾아 새로운 길 위에 선 것처럼 지연 역시 대전에 서 새로운 삶을 시작한다. 희령에서 떠나보낸 반려견 대신 반려묘 현미와 함께 낯선 세계에 발을 딛고 다시 일어설 힘을 모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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