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이 만든 가난 - 가장 부유한 국가에 존재하는 빈곤의 진실 Philos 시리즈 25
매슈 데즈먼드 지음, 성원 옮김, 조문영 해제 / arte(아르테)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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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모든 가난이 존재하는가?'라는 질문에서 시작한 이 책은 가난의 원인을 이해하려면 가난한 사람들 너머를 들여다봐야 한다는 문제의식을 기반으로 한다. 저자는 축적된 현장 연구 자료와 각종 보고서, 사회과학 연구들을 결합해 개괄적으로 설명한다.


저자는 노동, 주택, 금융, 복지 부문으로 나누어 분석하면서 미국 사회복지의 문제가 가난한 사람들에게  돈을 '퍼 주는' 게 아니라 적절하게 사용되지 못하고 있음을 짚는다.  








저자는 가난은 불안정과 육체적 통증과 트라우마를 남기며 자유를 상실시키고, 사회는 이를 치료하는 데 투자하지 않아서 가난한 사람들은 각자 알아서 고통에 대처해야 한다. 인류는 과학 기술을 바탕으로 거의 대부분 분야에서 엄청난 발전과 진보를 이루었다. 그렇다면 가난에서는 어떤 진보가 이루어졌을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집권당에 상관없이 가난은 계속 정체되어 있다(물론 미국의 얘기다. 하지만 한국이라고 다를리가!). 저자는 묻는다. 왜 가난은 개선되지 않을까? 이에 대해 우리는 배정된 예산이 적절한 방식으로 적정하게 쓰이고 있는지를 볼 필요가 있다.  


최저 임금, 임시 계약직, 노조에 대한 언쟁은 끊이지 않는다. 같은 일을 하면서도 '계약직'의 임금은 현저히 낮고, 노조의 규모와 역할은 갈수록 축소되어 간다. 자연스럽게 노동자들의 권리는 위축되고, 일자리의 질도 더 나빠졌으며, 이에 따라 소득 양극화와 불균형은 점점 늘어간다. 저자는 경제문제가 교육 문제로 환원될 수없고, 불균등한 일자리 시장이 세계화에만 있지 않음을 지적하면서 몇몇 나라의 실제 사례를 근거로 들어 노조의 부재에 의한 경제적 불평등이 권력과 직결됨을 얘기한다.  


기업은 다양한 방법을 동원해 정부 정책에 영향력을 행사한다. 시장 장악력이 커진 기업들은 임금을 낮추고, 노동자들은 임금보다 더 많은 가치를 기업에 제공하며, 기업은 이러한 패턴을 유지하기 위한 알고리즘을 꾸준히 찾아내어 업데이트 한다. 노동자 개개인이 철옹성같은 기업에 대항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노동비용이 하락하면 기업의 이윤이 증가하는 것은 자명한 이치다. 대기업 이윤으로 득을 보는 건 주주다. 그런데 현재 사회 구성원 중 많은 사람들이 주식시장에 이해관계가 있다. 우리가 앞서 언급한 패턴을 알면서도 외면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저자는 노동자들에게 생활임금을 허락하지 않을 때, 그들은 건강, 행복, 생명 그 자체를 거부당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지난 수백 년 동안 우리는 빈곤 문제에 있어서 초점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맞춰 왔다. 그러나 우리가 정작 던져야하는 질문은 빈곤의 다른 한편에서 이익을 얻는 이가 누구냐는 것이다. 우리는 여전히 정부 예산이 부족하고, 실업 수당이나 여타 지원금 때문에 실업자들이 일을 하지 않으려고 한다는(국민이 게을러진다는) 서사를 받아들인다.저자는 우리가 가난한 사람들의 빈곤을 그들의 노력이 부족하며 복지가 의존성으로 이어져 자립 의지를 꺽는다는 말을 수용하는 것은, 이러한 선동이 설득력이 있어서가 아니라 우리의 경제적 안정이 가난한 사람들의 삶과 맞물려 있다는 사실을 외면할 수 있게 해 주기 때문이라고 얘기한다.  


노동착취를 해결하는 최선의 방법은 노동자의 권리를 증진하는 것이다. 저자는 가장 많은 권력과 자본을 쥐고 있는 사람들은 미국의 막대한 빈곤에 가장 많은 책임이 있다고 일갈한다. 그러면서 우리에게 자신이 속한 사회를 면밀하게 들여다볼 것을 당부한다. 조세회피, 노조 깨기, 저임금 이력 등 착취 기업인지, 궁핍과 절망을 확산하거나 공공 서비스를 반대하는 기업은 아닌지, 저소득층 동네의 젠트리피케이션에 책임이 있는지 등을 살피며 투자와 소비를 결정하고 빈곤 폐지론자가 될 것을 권한다.  


저자가 명명한 '결핍 눈속임'은 아주 익숙한 정치 프레임이다. 본질을 피해 요리조리 말장난을 통한 대다수 국민의 눈가리기가 아직까지 먹히는 이유는 앞서 얘기한 것처럼 결핍에 대한 비난의 대상에 그 모든 사람들을 포함시켰기 때문이다(정작 가장 크게 비난받아야할 사람을 제외한 채). 이에 대응하기 위해서는 항상 정부가 입버릇처럼 얘기하는 '자원이 부족'하지 않음을, 국가의 풍요를 인정해야 함을 강하게 얘기한다.


저자는 빈곤의 종식이 수백만 노동자와 그들의 가족들에게 더 나은 안전과 건강, 안정된 삶을 의미하는 것이며 사회악의 근원을 도려내는 것이라고 말한다(실제로 수많은 범죄와 사건들의 원인이 생계와 직결되어 있지 않은가). 빈곤이 사라진다해도 시장과 사유재산권은 건재할 것이며 소득의 양극화의 일정 크기의 간극은 메울 수 없을 것이다(그러니 너무 겁 먹지 말라는 것(?!)으로 읽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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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으로 내가 하고 싶었던 말들을 신기하리만치 짚어서 서술하고 있기 때문이지 모르겠으나 책은 의외로 술술 읽힌다. 무엇보다 미국의 빈곤과 사회 문제를 서술하지만 특정 법률을 제외한 거의 모든 점이 우리나라와 아주 흡사하다(어느 정치 경제 전문가는 한국이 미국보다 더 신자유주의적 국가라고 했다).  


조문영 교수가 해제에 썼듯 한국은 상대적 빈곤율과 자살률 및 노인 빈곤율이 높고, 출산율은 OECD 국가 중 최 하위이며, 노인인구의 소득 및 자산 양극화는 점점 더 극심해지고 있다. 가난이라는 궤도에 들어서면 벗어날 수 없는 악순환의 원인이 저임금, 외주화, 노동착취임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여기에 이러한 문제들에 있어서 자신은 예외라거나 무관하다는 인식이 팽배하다. 가난이 지속되는 책임이 정부, 기업, 언론에만 있지 않은 이유이기도 하다. 전세 사기를 비롯한 당장의 범죄들이 '한 사회가 돈을 버는 방식이 바로 빈곤을 만드는 방식'이라고 말하는 김윤영 빈곤사회연대 활동가의 말을 증명한다. 


저자와 해제자의 제안은 저임금 불법화와 포용적 노동운동 전개, 정직한 기업, 무조건적인 재분배보다 사회안전망의 균형, 빈곤을 온존하는 정책 재고, 복지 신청 시스템의 개선, 실효성 있는 정책을 향한 지지, 빈곤의 공간적 분리의 지양, 빈자의 선택과 권리 존중이다.


책은 어렵지 않게 쉬운 용어로 쓰여있어서 읽는 데에 전혀 무리가 없지만, 혹시라도 이 책을 다 읽기가 부담스럽다면 조문영 교수의 해제 글만이라도 읽기를 바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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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덱스 - 지성사의 가장 위대한 발명품, 색인의 역사 Philos 시리즈 24
데니스 덩컨 지음, 배동근 옮김 / arte(아르테)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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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얘기를 하면 별나다는 말을 종종 듣는데, 나는 두꺼운 백과사전의 '색인' 읽는 것을 좋아하고, 모르는 한자를 찾을 때면 지금도 앱보다는 옥편을 뒤적거리기를 더 선호한다. 그렇다보니 색인에 역사가 있다고 해서 나름 흥미와 기대를 갖고 책을 펼쳤다.  







이 책은 13세기 유럽의 수도원과 대학으로부터 21세기 실리콘밸리 기업에 이르기까지 색인이 밟아 온 경로를 기록하고, 색인이 독서 생태계의 변화들에 어떤 식으로 대응해 왔는지의 과정과 그런 변화의 지점에서 독자와 독서 자체가 어떤 식으로 변해왔는지를 보여준다.   


색인의 종류에는 용어 색인(콘코던스), 주제 색인, 보편 색인, 풍자적 색인이 있다. 용어 색인은 원문에 충성스러운 색인, 주제 색인은 원문과 독자 사이에서 그 충성도를 적절히 배분하는 색인이다. 두 색인 모두 중세의 동일한 시점에 대두되었는데, 주제 색인이 영향력을 키웠다면, 대조적으로 용어 색인은 19세기라 끝날 무렵까지도 전문가들의 도구로만 쓰이다가 오늘날 컴퓨터의 출현으로 압도적인 존재감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저자는 이상적인 색인은 책이 어떤 방식으로 읽힐지, 그것이 어떤 식으로 이용될지 미리 예측한다고 썼다.  


색인의 역사를 다뤘지만 중세까지 다룬 내용에는 색인뿐 아니라 일부 역사를 이야기하고 있어서 아주 흥미롭다. 색인은 2000년 전에 등장했다. 기원전 3세기 무렵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에서 알파벳 24개 자모를 동원해 배열한 것을 시작으로 시리아 북쪽의 고대도시 우가리트에서 발견된 점토판들을 통해 기원전 8세기 중엽에 그곳에서 알파벳 철자에 순서를 매기는 방식이 정착된 사실, 로마인에게 '인덱스'라는 각각의 두루마리에 다는 이름표 등 시대를 거치며 변화를 가졌고, 알파벳 순서를 이용하는 것으로서 한차원 높은 지적 도약을 이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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색인이 독서 도구로 이용된 것은 13세기에 들어서이다. 독서 과정을 능률화하기 위함이었고 책을 사용하는 방식에서 효율성을 높이기 위함이었다. 그렇다면 색인이 필요해질만큼 책을 빨리 읽어야할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당시 주로 책은 수도사들이 읽었고, 그들은 느릿하게 책을 읽고 명상했다. 그러다 12세기에 들어서면서 백성들 사이에서 공부하고 복음을 전하며 설교를 하는 탁발 수사의 규모가 커졌다. 탁발 수사들에게 대중과의 의사 소통과 설득의 중요성이 새롭게 대두되면서 빠른 시간 안에 텍스트의 분석과 정리가 요구되었다. 정보에 따라 세분화하거나 종합해 효율적으로 관리를 해야할 필요성이 생긴 것이다. 도구로서 색인의 성공 여부는 독자들이 적절한 시간 안에 필요한 구절을 찾을 수 있는가에 달려 있었다. 


하지만 다른 한편에서는 색인으로 인해 책을 읽는 것이 아닌 사용하는 것으로 용도를 퇴색해버렸다는 평가도 있있다. 이는 현대 사회에서 검색 엔진을 사용하는 것에 비유할 수 있을 법하다(책의 마지막 장에서 다룬다). 지금도 검색만 하면 어지간한 정보는 모두 알 수 있다는 이유로 독서의 유의미성에 대해 논하는 것은 독서를 얼마나 편협하고 협소한 시각으로 보고 있는지 알 수 있는 지점이다. 18세기에 들어서면 풍자적 색인을 볼 수 있는데, 이를 통해 색인은 경멸의 대상이자 경멸을 표현하는 도구가 되었다. 



21세기의 소설이나 희곡에 색인이 없다. 왜 소설 색인은 얼마 가지 못하고 사라졌을까? 소설에 관한 색인 부분을 읽다보면 소설 색인이 왜 제대로 기능하지 못했는지를 알 것 같다(기능을 못했다는 건 독자 입장인 나의 판단). 소설의 사건과 감정, 그리고 인물은 하나로 정의할 수 없는 복잡하고 미묘한 점이 많고, 소설 내에서도 현실과 허구의 경계를 넘나든다('인간'을 다루다 보니 그럴밖에). 예를 들어 질투, 분노, 사랑, 우정 등 감정을 색인했을 때 그 한계를 어디에 둘 것이며, 악인 색인을 둔다고 해도 입장과 기준에 따라 선과 악이 달라질 수 있으니 이것 역시 단정하기 어렵다. 더구나 책에서 다룬 예들을 살펴보면 색인 그 이상의 역할울 하고자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18세기에 소설 <클러리사>의 색인이 85쪽에 달했다는데, 이 정도면 중단편 소설의 분량이다. 


색인은 근대의 특성을 갖고 있다. 시간을 아껴주고, 멀게 만 느껴졌던 것들을 가까이 잡아당긴다. 19세기 존 펜턴이 만든 색인 협회의 로고는 의미하는 바가 크다. 색인은 공부 혹은 독서의 이정표이자 길잡이(책에서는 열쇠라고 표현)가 되어준다. 
 
오늘날 해시태그 역시 색인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디지털 시대에 SNS 유저들은 검색자인 동시에 분류자라고 할 수 있다. 세월이 흐르고 시대가 달라져도 색인은 나침반으로서의 역할을 지속할 것이다. 지금도 그렇지만 앞으로는 점점 더 '검색'은 모든 면에서 필수가 될 테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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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색인 만들기] 


한 작가의 모든 작품을 대상으로 하는 첫문장 또는 마지막 문장 색인. 예를 들면 찰스 디킨즈의 모든 작품의 첫문장(또는 마지막 문장) 색인.  


다른 하나는 편집자인 헨리 몰리에서 힌트를 얻었는데 '분노에 대한 색인'을 만들어 등장인물이 화를 내는 대목마다 목록을 작성하고 위치 표시를 하는 것. 그러면 독자는 소설에서 인간이 주로 어느 상황에 놓였을 때 화를 제일 많이 내는지 알 수 있지 않을까. 


재밌는 색인을 만들어보자는 생각을 하다보니 쉬운 일은 아니었다. 인터넷에서 자료를 많이 찾아본 사람이라면 익히 알겠지만, 웬만한 색인은 이미 거의 다 존재한다. 우리는 더 이상 필요한 자료와 정보를 찾기 위해 도서관을 찾을 필요가 없다. 또한 도서관에서조차 무인 검색대가 마련되어 원하는 자료를 사서의 도움 없이는 곧바로 찾을 수 있다. 시기(시대), 대상, 키워드 등 범위만 정해 검색 엔진을 돌리면 순식간에 많은 자료들이 넘쳐난다. 오히려 지나친 정보의 옳고 그름을 따지는 게 더 큰 일이 되어버렸다. 원하는 주제와 범위만 정해 프로그래밍한다면 어떤 색인도 어렵지 않게 만들 수 있다. 인터넷 시대가 도래하면서 색인은 더 중요한 위치에 올랐다고 볼 수 있다. 사장될 뻔한 색인의 화려한 부활을 반겨야 할지, 지나친 정보화 시대를 우려해야 할지 난감한 지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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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린 색인 중 재밌는 색인] 


* '꼬치 꼬치 캐묻는 사람 그리고 떠벌' 224
* '시간 낭비[수고하셨습니다ㅡ색인 작성자] / 시간가 지식 14~15, 3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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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사를 바꾼 50가지 거짓말 - 배신과 왜곡이 야기한 우리가 모르는 진짜 세계사
나타샤 티드 지음, 박선령 옮김 / 타인의사유 / 202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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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공식적으로 알려진 사실 이면에 있는 속사정이나 거짓에 대해 쓴 책이다. 


책에 실린 내용들은 많은 문헌들을 통해 증명된 부분들이 대부분이어서 역사에 통달한 독자라면 익숙하게 읽혀질 것이고, 역사가 어렵다는 독자라면 재밌고 쉽게 접근할 수 있다. 그렇다고 해서 스토리에만 치중한 건 아니다. 고대부터 20세기 현대사에 이르기까지 시대순으로 서술해 앞뒤의 맥락이 이어져 비록 일부분이지만 역사의 흐름도부분적이나마 파악할 수 있다. 특히 근대 초기의 영국과 프랑스의 관계, 19세기 비스마르크 편 등은 분량이 각각 대여섯 장에 불과하지만 복잡한 정세를 간단하게 설명하고 있어 당시의 시대 변화가 어려운 독자는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중세의 스페인 종교재판, 유럽의 마녀 사냥, 전쟁을 부른 비방과 거짓, 강자 위주의 역사 재편과 왜곡이나 해적 잔 드 클리송, 여성 교황 요안나, 반전 운동가 에밀리 홉하우스 등 역사에서 지워진(혹은 알려지지 않은) 여성들의 이야기 그리고 정사正史에서는 잘 다루지 않는 노스트라다무스, 맨더빌 여행기, 메리 토프트, 노예 조셉 나이트 등을 만날 수 있다. 이러한 부분들을 통해 종교적, 문화적 동질성에 대한 이상과 그 당시에도 자극적인 책들이 대중들에게 통했다 것처럼 사회적 분위기를 어렴풋이나마 느끼보는 시간이었다.  



몇 가지 재미있는 점을 꼽아보자면,
로마 황제 콘스탄티누스가 제국의 서부 지역 전체에 대한 권리를 넘겨준다는 <콘스탄티누스의 기증>에 관한 칙령은 8세기에 위조된 가짜인데 이 내용이 기가 막히다. 기증 문서에는 시칠리아, 나폴리, 이탈리아 전체, 갈리아, 스페인, 독일, 영국 등 사실상 제국의 서부 전체를 교회에 기증한다는데(아무리 황제라는 사람이 제국을 통째로 교회에 바친다는 것을 누가 믿겠나), 뒤늦게 이를 주장한 사람은 로렌조 발라(사실 교회에서조차 반박했으면 거의 사기에 가까운!). 이러한 주장을 담은 발라의 책이 1517년 출판되었고, 1520년에 이 글을 읽고 가톨릭교회의 부패 징후를 예감한 사람이 마르틴 루터다. 물론 이 글을 읽기 전에 <95개조 반박문>을 발표하면서 (후대가 이름 붙인)종교개혁을 시작했지만, 발란의 글은 그에게 더 없는 확신이자 증명으로 받아들여졌을 것이다. 이와 관련해 대한 안타까운 사실은 그가 말년에 쓴 유대인 비판이 나치 정권까지 영향을 받았다는 사실이다. <노스트라다무스의 유언>을 읽다보면 예언이라는 것이 그야말로 코에 걸면 코걸이, 귀에 걸면 귀걸이라는 생각이 새삼 들었는데, 반유대주의도 마찬가지라는 생각이 들더라는. 


뜻밖에 임진왜란에 대한 이야기도 한 자리를 차지하는데, 외부자의 시선에서 본 임진왜란에 대한 제법 긴(?) 서술은 거의 처음이라서 생경했다.  


'스페인 독감'이라는 이름은 스페인이 팬데믹에 대해 목소리를 높인 데서 유래되었는데, 이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그 독감이 스페인에서 유래된 것이라고 믿게 되었다는 것. 그것보다 정작 스페인에서는 이 병病을 프랑스 독감이라 불렀다는 점이다. 이 바이러스가 어디서 발생했는지 아직 정확히 밝혀진 바는 없지만, 많은 역사가들은 가장 가능성 높은 출처로 미국을 꼽는다고. 20세기 초의 질병이나 100년이 지난 21세기 초의 전염병이나 의료 및 과학 기술, 여타 학문과 시스템의 발달에도 전염병 출처에 대한 논란은 변함이 없다는 것에 어째 입맛이 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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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 책처럼 재밌게 읽고난 뒤 그 끝에서 '사람'을 생각했다. 헛된 욕망과 두려움 때문에 진실과 거짓을 구분하지 못하는 어리석은 왕, 명예와 유명세를 탐하며 양심을 저버린 지식인, 제 안위와 돈을 위해서라면 나라도 팔아먹을 파렴치한, 타인의 인생 전체를 휘둘러놓은 당황스러울 정도로 간 큰 사기꾼, 날조와 속임수로 점철된 정치와 전쟁, 방치된 가난한 민초, 여성 차별과 그들의 저항, 기득권을 놓치지 않기 위해 또는 우월주의를 강화하기 위한 가짜 뉴스 일색과 다른 한편에서 자행되는 언론 검열(이 부분은 현재 오랜 시간 동안 기득권층이 만들어 놓아 쌓이고 쌓여 축적된 수많은 프레임, 그리고 코비드19 시국에 벌어졌던 일들과 그 궤를 같이한다), 생명윤리의 부재와 인권 유린.    


기록으로 남은 역사들은 어쩔 수 없이 상황에 따라 일방적일 수밖에 없다. 사건의 조각들을 풀고 다시 맞춰 그 안에 숨겨진 진실을 찾아내고 유추하는 건 후대의 몫이다. 과거에 살았던 사람들을 통해 현재를 살아가는 미래의 우리 모습을 그려보는 시간을 갖는 것도 유의미한 일일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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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트] 바깥 일기 + 밖의 삶 - 전2권
아니 에르노 지음, 정혜용 옮김 / 열린책들 / 202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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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에르노가 노벨문학상을 수상하기 이전부터 꽤 많은 번역본이 출간된 덕분에 비교적 여러 작품을 읽을 수 있었다.  


<남자의 자리>를 비롯해 소설들도 좋지만, 나는 아니 에로노의 에세이(혹은 에세이에 가까운) 글을 더 선호한다. 그래서 소설임에도 자전적 기록에 가까운 <세월>을 무척 아끼는데, 그 작품 이후 읽은 아니 에르노의 책들 중에서 이번의 두 권은 무척 마음에 든다.   



무심코 흘려 보낼 수 있는 타인의 일상, 그리고 '나'에게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치지 않는 사건 사고에서 자아와 사회를 성찰할 수 있기는 쉬운 듯 하지만 사실 그렇지 않다. 만약에 그게 쉬웠다면 현대 사회가 이 지경(?)에 이르지는 않았을 것이고.  


양차 대전이 끝나고 더 이상 국가 간의 전쟁은 없을 것이라는 예상은 여지없이 깨졌고, 난민 문제는 원인이 다양해지면서 더욱 증가하고 있다. 이런 차에 아니 에르노의 시각은 많은 깨달음을 던져준다. 


대상의 타자화를 노력하지만, 누구도 완벽하게 타자화하기 어렵다는 진실을, 체험을 통해 독자에게 전달한다. 무엇보다 그가 체험한 것들이 마치 영화 필름을 재생해 돌리듯 지금의 우리에게 너무 현실적으로 깊게 와닿는 것을 느끼면서 과거, 현재, 미래에 대해 다시금 생각한다.  



개인적으로, 서너번 보여지는, 진심이 가득 담긴 시크한 농담(이 아닐지도 모르지만)은 대가의 새로운 발견이기도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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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인간 선언 - 기후위기를 넘는 ‘새로운 우리’의 발명
김한민 지음 / 한겨레출판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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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부턴가 마트에 갈때마다(굳이 대기업형 마트가 아니더라도), 동네를 산책할 때마다 드는 생각이 있다. 한 건물 너머 있는 치킨집을 보면서 '저 많은 닭들은 어디에서 왔을까', 그리고 마트에 탑처럼 쌓여 있는 계란을 보면 '도대체 얼마나 많은 닭이 하루에 몇 개나 알을 낳으면 계란이 저렇게 쌓일 수 있지...?' 라는 궁금증. 살면서 양계장이라는 곳을 가본적이 없어 그저 책에서 읽은 것이 전부니 정말 수천마리의 닭들이 옴짝달싹 못하고 기계처럼 알을 낳는다는 데에 상상도 쉽지 않다. 간혹 고속도로에서 닭을 실어 나르는 대형 트럭을 볼 때면 잠깐 짐작할 따름이다. 
 






 
이 책은 기후 위기에 관련해서 아주 절박하고 시급하며 극단적으로 서술하고 있다. 그래서 아주! 속이 시원했다. 그리고 이론이나 사고의 지적 유희가 아니라 현실과 호흡하며 얻은 실천적 성찰들의 모음이라고 밝힌다. 그래서인지 너무나 현실적이고, 격하게 와닿는다.  


기후 위기에 당면한 현재, 대응책을 모르는 사람도, 국가도 없다. 문제는 변화를 거부하는 관성이다. 이 틈을 자본과 기술이 해결하리라는 낙관론, 그리고 자국 이익이라는 기득권 세력 중심의 이기적 관점이 파고든다. 현재 시급한 문제는 변화의 큰 방향보다 변화의 속도다. '시한폭탄'을 손에 들고 취지는 좋으나 성급하다고, 급할수록 돌아가라는 말을 하는 이들은 사태의 심각성을 모르는 한가로운 말이라고 일갈한다.  


저자는 코로나19 사태를 들어 인간의 적응력, 무언가를 추동할 감각을 마비시키는 적응력이 두렵다고 썼다. 폭염은 에어컨, 미세먼지는 공기청정기, 식량부족은 인스턴트식품, 불편한 진실은 가짜 뉴스, 장마는 건조기 등. 나는 인간의 적응력 뒤에 양산되어 기후 위기를 촉진시킬 그 엄청난 것들이 더 두렵다.  


그는 코로나19와 기후 위기를 같은 선상에 놓고 서술한다. 대기 오염을 '침묵의 팬데믹'이라고 칭하면서 현재 얼마나 심각한 상황인지를 절박하게 얘기하면서, 코비드 시국과 마찬가지로 국가, 정책, 개인 가리지 않고 할 수 있는 건 모두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해법은 체제 변화뿐이라며 작은 실천을 폄하해서도 안 되고, 개인의 실천만 강조해서도 안 된다. 무엇보다 (과학)기술이 모든 걸 다 해결해준다는 망상은 곤란하다고 당부한다. 기후 위기를 드러내고 싶지 않은 집단은 당장 눈에 보이는 현상조차 숨기고 가리기에 급급하다. 하지만 거짓말로 해결할 수 없는 것이 기후 위기다.  


지구 환경에 악영향을 미치는 것만큼이나 나쁜 것은 환경적 영향에 대한 '생각 없음' 이다. 경쟁과 분열이 추동의 연료가 되는 사회, 누가 하나 양보없는 성장의 카르텔이 아닌 무작성 부숴놓고 보는 개발보다 공공적 가치를 우선하는 진정한 도시재생, 녹색 성장이 아닌 탈성장과 성숙을 실현해야 할 때다. 저자는 기후 위기가 체감하기에 와닿지 않는다면 가닿으라고 말한다. 와닿는 순간이 오면 그때 이미 늦었을테니까.  


ㅡ 


저자는 서문을 통해 도구적.실용적인 관점을 떠나 인간에게 쓸모가 없더라도, 존재 그 자체로서 타자의 살아갈 이유를 긍정하는 것이 타자를 알아가는 것이라고 말한다. 탈인간의 궁극적인 지향점을 타자에 대한 앎을 넘어 타자와의 연대를 통한 공동체 구성원의 테두리를 확장해 소외되고 새로운 구성원들을 포용하는 일이다. 


저자가 생각하는 교차성의 힘은 정체성이 아닌 '동일시'에 있다. 차별과 착취의 지배자 원리, 그리고 약자와 소수자가 가장 먼저, 가장 큭 피해를 입는 것은 기후 위기도 예외는 아니다. 사라져가는 북극곰과 고래, 해수면이 높아져 가라앉는 남태평양의 어는 섬주민과 동일시는 바라지도 않는다. 저자가 이 시대의 꼰대들에게 경청은 최소한의 예의라고 충고한 것처럼 제발 제대로 듣고, 제대로 보기라도 하자.  




※ 출판사 지원도서

생태계에는 고정된 중심이 존재하지 않는다. 그저 무한한 관계들이 얽혀 있을 뿐이다. - P12

소수의 사려 깊고 헌신적인 사람들이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걸 결코 의심해서는 안 된다. 사실, 그것 없이 바뀐 적이 한 번이라도 있었던가.
(인류학자, 마거릿 미드) - P20

마지막 나무를 베고 나서야, 마지막 물고기를 먹고 나서야, 마지막 시냇물을 오염시키고 나서야, 그제야 인간은 깨달을 것이다. 돈을 먹고 살 수 없다는 것을.
( 북아메리카 원주민 크리족 속담) - P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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