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대받은 여자 2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435
시몬 드 보부아르 지음, 강초롱 옮김 / 민음사 / 202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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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는 점차 이 소설이 세 사람의 '사랑'에 한정되어 있지 않음을 알 수 있다. 3인칭으로 쓰여 있지만 몇 개의 장章을 제외하면 프랑수아즈의 관점에서 서술되는데 그녀의 고민과 혼란은 독자의 그것과 맞닿아 있다. 반드시 사랑이 아니더라도 본질적 자아, 자아의 실존 등 타인과의 관계를 포함해 삶에 있어서 우리는 얼마나 나로서 존재하고 있는지를 짚어보게 된다.  





 



개인적으로 읽으면서 가장 의문이 들었던 부분은, 프랑수아즈는 지나치다싶을만큼 그자비에르의 모든 말에 하나하나 예민하게 반응하고 혼자 짐작하고 판단하는데, 그 이유는 무엇이냐는 거다. 때로는 타당하고 때로는 즉흥적이고 때로는 감정적이고 때로는 유순하고 수시로 모순적인 언행을 보이는 그자비에르는 프랑수아즈, 즉 보부아르가 스스로에게 던져왔던 실존, 그리고 사회적 테두리 안에서의 자유에 대한 물음표가 아니었을까 짐작해본다.  


피에르와 그자비에르가 서로 사랑한다고 선언한 이후에도 프랑수아즈는 여전히 그들 곁에 남아 있는다. 그들을 떠나기에는 피에르와 결속된 감정을 정리하지 못하고, 그자비에르에게는 매순간 이중적 감정을 가지면서도 그녀에 대한 애정을 접지 못한다. 또한 피에르와 단둘이 있을 때에야 안정감을 찾는데, 이런 불편하고도 애매한 관계를 지속하는 프랑수아즈의 모호한 태도는 실제로 늘상 현실적인 문제에 직면하는 우리를 보는 것 같다.


피에르와 그자비에르 곁에서 느끼는 프랑수아즈의 감정은 행복과 자유와는 거리가 멀다. 그녀가 혼잣말로 중얼거리는 몇 마디에서 그녀의 심경이 그대로 드러난다. '비참하다' '구차하다' '대체 나는 누구인가?' '나는 그 누구도 아니다' '내가 원하는 건 무엇일까?' 등. 그러면서 결국 마지막에 내뱉는 말은 "소중한 그자비에르."다. 그자비에르가 변덕스럽다면 프랑수아즈는 모순적이며 피에르는 이중적이다. 그런데 이들의 모습이 불편한 까닭은 그들에게 문제가 있어서가 아니다. 프랑수아즈가 문제와 갈등의 원인을 자신에게서 찾았듯 우리가 세 사람의 관계가 거북한 것은 아마도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내재되어 있는 우리의 모순과 이중성을 맞닥뜨리기 때문이 아닐까. 그러나 독자로서 답답한 부분은 이런 과정을 거친 후에도 두 사람을 대하는 프랑수아즈의 태도가 크게 달라지지 않는다는 데에 있다. 그녀는 여전히 그자비에르를 받아주고, 피에르가 자신만을 사랑한다고 믿고 싶다.  


사실 세 사람다 개인적으로 마뜩치 않지만, 가장 거슬리는 사람은 피에르다. 그는 자기 방식대로 상황을 해석하고, 자신이 내린 결론이 정답이라고 주장하는 아집덩어리다. 심지어 두 여성이 자신의 말이라면 무조건 신뢰하기를 바란다(사이비 교주냐!). 거기다 자신은 프랑수아즈와 그자비에르를 둘 다 사랑한다며 당당하게 삼각관계를 이어가야한다고 우기기까지 하는데, 정작 본인은 그자비에르가 잠시도 제르베르와 같이 있는 꼴을 못본다. 소설 후반부로 갈수록 피에르는 점점 더 꼴사나워지는데 눈뜨고 못 볼 지경이다. 이런 모습을 지켜보는 프랑수아즈는 안타까워하는데, 나라도 그랬을 것 같다. 자신과 하나이자 존경해온 영혼의 반려자가 어린 연인의 일거수일투족을 시시콜콜 따지고 들고 그릇된 질투심으로 아끼는 제자를 경멸하며 추태를 부리니 참담한 심경이지 않겠나.  


프랑수아즈는 자신도 인식하지 못한 채 피에르에게 끌려다닌 셈인데, 그자비에르의 등장이 프랑수아즈로 하여금 자립적 현존에 대해 각성하는 계기가 되어준다. 즉 피에르와 그자비에르의 관계를 제3자의 입장에서 목도하면서 과거 피에르와 자신의 관계를 반추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동안 프랑수아즈가 피에르에게 정서적 구속을 인지하지 못한 채 지내오면서 순종의 형태로 이끌려 다녔다면 그자비에르가 담뱃불로 자신의 살갗을 지지는 행위는 프랑수아즈와는 다르게 반항의 형태로 나타난 것이 아닐까싶다.  


ㅡ 


시간이 흐를수록 그자비에르는 갈수록 피에르를 닮아가고 있다. 누군가를 독점하려 들고, 독점한 대상을 제 소유라고 여긴다. 그래서 전쟁이 발발하고 피에르가 입대한 상황에도 그자비에르는 프랑수아즈를 향해 끊임없이 빈정거리고 질투가 가득한 경멸어린 말투와 공격적인 말을 쏟아내는데, 프랑수아즈는 왜 받아주고 있는 걸까? 


어쩌면 보부아르는 그야말로 현실에서는 이루기 힘든 자유를 바탕으로 한 공존에 대한 바람이 컸다는 생각이 들었다. 얽히고설킨 그들의 관계에서 그나마 보부아르가 이상적으로 그린 관계는 프랑수아즈와 제르베르인 듯 하다. 동료이자 사제관계라고 할 수 있고, 우정을 바탕으로 서로를 사랑하지만 상대를 구속하지 않는다. 누군가는 그들이 진짜 사랑한다면 그럴 수 없다고 할지도 모르겠다. 


예상치 못한 비극적 결말이 보부아르가 말하고자 했던 실존의 한 방식이라면 우리는 어떻게 인간으로서 존재할 수 있을까. 





※ 리딩투데이를 통한 출판사 지원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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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받은 여자 1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434
시몬 드 보부아르 지음, 강초롱 옮김 / 민음사 / 202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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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단순한 연애소설이 아니었다! 


일단 평범한 연애관을 가진 나는 세 사람의 연애관을 납득하기가 어려운데, 그들의 관계를 일대일 연인에서 인간 관계로, 실존의 문제로 확장시키면 얘기는 달라진다.




  



 
프랑수아즈는 피에르와 자신을 '하나'라고 확신하고, 피에르는 프랑수아즈를 연인, 그 이상의 존재로 여긴다. 피에르에 대한 프랑수아즈의 신뢰는 각별하다. 그녀는 피에르가 자신에게 고통을 줄 리 없고, 두 사람 사이에서 서로 오해하는 일은 생기지 않을 것이라 장담했다. 힘든 상황에 직면할 수도 있겠으나, 서로에 대한 이해로 극복할 것이라 철썩같이 믿었다. 두 사람은 서로의 존재가 그들을 완벽하게 만들어준다고 생각했다. 이러한 철옹성같은 관계에 끼어든 그자비에르. 사실 그녀가 끼어들었다기보다 싫다는 소녀를 어르고 달래며 억지로 파리로 불러올린 사람은 다름아닌 프랑수아즈다.  


그자비에르는 프랑수아즈가 만나온 사람들 중 가장 독특한 인물이다. 그자비에르는 딱히 관심이 있는 것도 없고, 반드시 무언가를 해야만 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생계를 위해 타협하는 삶을 살고 싶지 않으며, 원하는 대로 살 수 없다면 안 살면 그만이라고 여긴다. 강렬한 느낌을 받는 것이야말로 인생이라고, 다람쥐 쳇바퀴 돌듯 사는 삶은 인생이 아니라고 잘라말하는 소녀의 허세를 흥미롭게 받아들인 것이 화근이었다.
아마 이쯤에서 프랑수아즈가 그자비에르를 고향으로 돌려보냈다면 앞으로 일어날 사달은 벌어지지 않았을 터다(사실, 읽는 내내 프랑수아즈는 무엇 때문에 이 아이를 고집스럽게 데리고 있는지 이해하기 어렵다).


그자비에르가 나타날 즈음, 피에르는 공연을 성공시켜야하다고 스스로를 압박하는 상황에 회의를 느끼고 있었다. 아마 그래서 즉흥적이고 본능적이며 아름다움을 탐하고 이기적으로 관심과 사랑을 요구하는 그자비에르에게 빠져들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프랑수아즈는 이런 두 사람을 보면서 태연한 척하며 피에르에게 그가 원한다면 그자비에르와 사랑에 빠져도 된다고 말한다. 애써 자신은 질투하고 있지 않으며, 이런 감정은 실재하지 않는다고, 또한 연연애하지 않으며 자유롭다고, 스스로를 다스린다. 그런데 그자비에르는 한 발 더 나아가 프랑수아즈와 삶의 방식과 인간 관계를 지적하며 자유가 없다고 비판하는데, 점점 선을 넘으며 프랑수아즈를 도발한다. 이걸 흥미롭다고해야 궁금하다고 해야 하나... . 프랑수아즈는 이렇게 감정이 기복이 심하고 흥분하면 되는대로 말을 내뱉는 그자비에르를 보면서 오히려 그녀의 열정에 도취되어 연륜이 쌓일수록 열정이 사그라드는 자신에게 스스로 굴욕감을 느낀다.  


이제 피에르는 프랑수아즈에게 관심이 없다. 신경이 온통 그자비에르에게 쏠려 있다. 피에르를 붙잡으려면 그자비에르를 받아들이고 피에르와 같이 그녀의 기분을 맞춰줘야한다. 얼마 전까지만해도 그자비에르가 프랑수아즈 삶의 한 조각이었다면 어느 순간 주객이 전도된 셈이다. 여기서 가관은 피에르다. 한동안은 그자비에르에 대한 감정에 선을 긋는 척이라도 하더니 결국에는 프랑수아즈 앞에서 온갖 말을 늘어놓더니 그자비에르와 자신이 서로 사랑하고 있다는 결론에 도달했다고 말하면서 프랑수아즈를 존중한답시고 피에르와 그자비에르는 그들 멋대로 그녀에게 두 사람의 사랑을 축복하라고 강요한다.

 
ㅡ 


프랑수아즈가 생각하는 사랑은 무엇일까?
즉흥적인 격렬한 감정에 가치를 두지 않으며 이에 휘둘리지 않는 사랑도 여전히 사랑일까. 상대를 내 영역 안에 가두고 지배하는 것이 사랑이 아니라 집착이라고 말들 하지만, 누구도 연애할 때 양다리를 용납하지 않는다. 또한 유부남과 불륜 관계인 엘리자베트의 사랑을 제 잣대로 단정짓는 프랑수아즈 역시 자신의 사랑을 타자화하지 못한다.  


그자비에르는 노력보다는 타고난 재능과 영감이 우선한다고 말하면서 획일적인 인생을 살아가는 기성 세대를 경멸하지만, 경멸하는 기성 세대의 후원을 받아 거의 무위도식하며 살고 있는 자신의 처지를 당연하게 여긴다.  


그자비에르는 작가와 예술가는 자유로운 삶을 살 거라고 생각했는데 피에르와 프랑수아즈처럼 시간에 얽매야 살 줄 몰랐다면서 보들레르와 랭보를 제외하면 결국 예술가도 공무원과 다를 바 없다고 말한다. 규칙적으로 일을 하고, 수면 시간을 고려하고, 매일 제 때 끼니를 챙기고, 시간을 내서 산책을 하는 것. 어쩌면 이 소설을 쓸 때 보부아르가 고민했던 딜레마가 이것이 아니었을까 생각해보게 된다. 


프랑수아즈가 본인의 얼굴을 절대 보지 않는다는 그자비에르의 말에 생각에 잠긴 프랑수아즈는 스스로를 탐색한 적이 없음을 깨닫는다. 그리고 무채색처럼 군중 속에서 전혀 드러나지 않는 자신의 존재감에 대해 생각하면서 자신을 여과없이 드러내는 그자비에르를 본다. 이처럼 여러 부분에서 그자비에르는 프랑수아즈를 각성하게 만드는 역할을 한다.  



2권으로 가면 현존과 실존에 대해 본격적으로 서술하고, 다른 한편으로 제르베르와 프랑수아즈의 관계가 피에르와 그자비에르의 관계와 대비된다.  


다음 얘기는 2권에서!  




※ 리딩투데이를 통한 출판사 지원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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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 있다는 것이 봄날 - 제1회 "어르신의 재치와 유머" 짧은 시 공모전 수상 작품집
성백광 외 지음, 김우현 그림, 나태주 해설 / 문학세계사 / 202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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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시인협회가 대한노인회와 함께 주최한 짧은 시 공모전에 입상 및 선정된 시 100편 모음집이다. 


이 시집에 대해 처음 알았을 때 "응?"하며 인터넷 서점의 미리보기를 열었다. 첫 번째에 실려있는 대상을 수상한 4행의 짧은 시와 삽화를 보자마자 입가에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그리고 세 번째에 실린 <로맨스 그레이>를 읽으면서는 입이 꾹 다물어지고 눈이 뜨거워졌다. 유독 흥이 많고 예술적 기질이 남달랐던 욱이 씨가 아직 은섬 씨 곁에 있었다면 두 사람이 함께 복지관에서 춤을 추는 날이 있었을까, 라는 별 의미없는 궁금증이 일었다. 네 번째 시 <당신을 못 떠나는 이유>를 쓰신 김왕노 님이야말로 진정한 로맨티스트가 아닐런지. 그러다가 아흔세 살 김순중 님의 <중꺽마>에서 '써글...'에 빵 터져 한참을 웃었다. 세상에... 그 몇 분 사이에 나 혼자 미소 짓다가, 울컥했다가, 깔깔대며 오락가락했다. 시에서 이것보다 더 필요한 것이 있으랴. 






시집에는 이제 노년에 접어든 60대부터 90대에 이르기까지 노년의 일상들을 만날 수 있다.
캠퍼스 커플에서 시작한 부부가 복지관 커플이 될 때까지 얼마나 많은 일들를 함께 견뎌왔을까. 치매를 완화하기 위한 약을 먹었는지 안 먹었는지 아리송한 어느 할아버지의 한줄짜리 시는 웃프다. 자식에게 받은 용돈을 손자에게 건네는 조부모의 사랑, 같이 살아도 각방 살이에 고독한 노후, 신체활동에서 느껴지는 노구의 서글픈 현실, 이제는 좀 게으르게 살아도 된다고 나 스스로에게 보내는 위안, 자식들은 바빠서 얼굴 보기 힘들고 이제는 할머니라고 불리는 나이에도 돌아가신 어머니의 손맛이 그립기만하다. 호랑이같던 아버지의 마지막 거처는 요양원, 오는 이 가는 이 없는 섬같은 외로움, 어머니보다 자기가 먼저 죽을까 걱정하는 딸의 나이는 일흔 살. 베스트프렌드가 따로 있으랴, 살아서 곁에 있는 이가 절친이다. 


지극히 현실적이라서 더 와닿고, 아직 내가 경험하지 못한 감정이라 낭만적이기까지 한 시詩들이다. 노인의 굽은 등이 아름답다는 양명희 님의 시는 나를 돌아보게 한다.
과학기술이 급속도로 발달해 노화를 멈추지 않는 이상, 순리대로 산다면 나 역시 언젠가는 노인이 될테고 죽음을 맞이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시대가 달라졌다고해서 그들이 살았던 삶의 궤적과 나의 미래가 크게 다르다 생각치 않는다. 때로는 서러울 날이 있을테고, 고독하기도 할 것이고, 책임을 내려놓을 수 있어 홀가분하다 느낄지도 모르고, 늙어간다는 것에 막연한 두려움이나 억울함이 있을 수도 있겠다. 하지만 이 책에 실린 시들은 삶을 부정적으로 바라보지 않는다. 사는 거 힘들지. 그러나 살만 해! 라고 말해준다. 


연륜은 무시할 수 없다.
이 촌철살인은 어쩜 좋아.
그리고 삽화가 너무 따뜻해. 




※ 협찬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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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마른 삶 휴머니스트 세계문학 33
그라실리아누 하무스 지음, 임소라 옮김 / 휴머니스트 / 202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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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넌 짐승이야, 파비아누."
"넌 사람이야, 파비아누." 



소설은 소몰이꾼 파비아누 가족이 가뭄을 피해 무작정 길을 나선 데에서 시작한다. 목적지를 향해 계속 가야했지만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는 상황은 그동안 살아온, 앞으로 살아갈 파비아누의 삶을 도입부부터 간접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소설은 가뭄으로 인해 삶의 터전을 잃은 이주민의 애환만을 얘기하지 않는다. 사회적 약자층에 가해지는 차별과 폭력으로 인해 불공정과 불의에 익숙해져 체념적 삶을 살아가는 파비아누 가족을 통해 고된 삶을 살아가는 서민들의 애환과 당시의 사회상을 사실적으로 그려내고 있다.  


파비아누는 카브라(흑인과 백인 혼혈인 물라토와 흑인 사이에서 태어난 혼혈인)이고 남의 땅에 살며 남의 가축을 돌보며 살았다. 백인들 앞에서는 몸을 움츠렸고, 온갖 역경에서 버텨내는 힘은 스스로를 역경을 이겨낼 수 있는 짐승이라는 데에 있었다.  


파비아누는 교육을 받아본 적이 없었고, 자신의 생각을 설명할 줄 몰랐고, 무지했다. 그는 자신이 감옥에 갇힌 이유가 무지하기 때문인지 자문한다. 만약 그렇다면 무지한 것이 죄란 말인가? 노예처럼 일하며 살아왔고 거짓없이 성실하게 살았다. 무지한 것이 파비아누의 잘못일까, 그렇지 않다면 누구의 잘못인가? 생각의 실타래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지만 파비아누는, 잘못이 누구에게 있는지 정말 모르겠다. 


가뭄때문에 떠난 피난길에서 파비아누 가족은 살기 위해 키우던 앵무새를 잡아먹었다. 그렇다면 노란 제복의 군인들도 살기 위해서 의사를 제대로 표현할 줄 모르는 파비아누를 잡아 가둔 것일까. 정부가, 기득권층이 약자를 핍박하고 차별하는 것 역시 같은 이유에서 일까? 파비아누는 여전히 잘 모르겠다. 


파비아누는 판단하기 어려운 일이 생길 때마다 머릿속에서 제분소 주인인 토마스 씨를 소환한다. 그는 투표권이 있는, 마을에서 존경받는 사람이다. 피난길에 오르기 전까지만 해도 파비아누는 자신의 일조차 토마스 씨에게 결정을 부탁했다. 이는 "참아요, 정부에게 얻어맞는 건 부끄러운 일이 아니에요."라고 외쳤던 파비아누를 비롯한 사회적 약자층의 위치를 잘 드러낸다.  


ㅡ 


소설은 상징과 비유를 통해 전달하고자 하는 바를 극대화한다. 특히 한 가정의 가장인 파비아누와 그들이 키우는 강아지 발레이아를 같은 선상에 놓음으로써 독자는 발레이아의 삶을 관조하는데 이는 곧 파비아누의 삶임을 알 수 있다.  


발길질을 당하는 일이 예사인 개 발레이아는 그럴 때마다 도망간다. 때로는 발목을 물어버리고 싶지만, 그 욕망을 실현할 수 없으리란 것을 알기에 분노는 금세 사그라든다. 이 모습은 억울하게 감옥에 갇혔을 때의 파비아누와 아주 흡사한 모습이다. 감옥 안에서든 밖에서든 군인을 향한 잔인한 복수를 상상하며 기뻐하지만 실제로는 자신의 억울함을 단 한마디도 항변하지 못해 포기하고 만다. 그러나 이를 두고 파비아누의 무지를 탓할 수만은 없다. 


또한 술이 들어가자 파비아누는 노란 제복 군인을 만나면 한판 붙기로 결심하고 발로 땅을 차며 소리를 질러대다가도 막상 노란 제복 군인이 나타날 것을 두려워해 가판대 너머로 몸을 숨긴다. 아무도 관심을 두지 않는 그의 도발에 정작 본인 혼자 두려워하며 식은땀을 흘리는 모습은 애처롭기까지 한다. 


복종으로 일관했던 지난 삶을 떠올리며 마지막까지 저항하지 못한 채 죽어가는 발레이아의 모습 역시 파비아누와 아주 닮았다. 발레이아 삶의 끝을 읽으면서 파비아누 역시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파비아누가 일방적으로 발레이아의 죽음을 결정하고 실행에 옮기는 과정에서 나타나는 농장 주인과 파비아노의 부당한 관계, 그리고 가뭄과 광견병이 불가항력이라는 차원에서 우리는 왜 발레이아의 죽음이 아프게 다가오는지 짐작할 수 있다.  


ㅡ 


이외에도 자신들의 권력과 약자들의 무지를 이용해 약자들을 착취하는 기득권층의 억압, 이자와 빚의 악순환으로 증서 없는 노예생활을 이어가야만 하는 소작농과 소몰이꾼, 가난과 천대받는 신분의 대물림, 그리고 교육의 부재를 꼬집는다.  


그들의 메마른 삶이 가뭄때문만이었을까. 
가뭄이 아니더라도 오직 견디고 복종하는 것 외에는 다르게 사는 방법을 모르는 사람들에게 삶 자체가 가뭄일지도 모른다. 한평생 등이 배기는 나무살 침대에서 잠을 자야하는 씁쓸함에도 불구하고 당연하다는 듯 등을 아프게 하는 나무살을 제거할 생각조차 하지 못하는 그들. 


큰아이에게 있어서 좋은 장소는 그가 알고 있는 장소, 즉 염소 우리, 축사, 진흙탕, 안뜰, 물가, 푸른 산, 언덕 등 비록 때때로 위험이 있어도 엄연히 존재하는 현실 세계다. 큰아이에게 좋은 곳인 현실 세계는 언제까지 좋은 곳으로 남을 수 있을까. 


어떻게든 인생을 바꿔보고 싶지만 그 방법을 알 수 없어 곧바로 체념하고마는 비토리아 어멈의 모습은 안타깝다.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나쁜 기억을 떨쳐버리고 아름다운 것들에 주목하려고 노력하는 것뿐이다. 파비아누 가족이 살인적인 가뭄에서 살아남은 건 기적이지만, 그게 전부다. 파비아노가 자신을 억울하게 감옥에 가두고 매질까지 가한 군인에게 복수는 커녕 허리를 굽힌 이유는 두려움이었을까, 아니면 뼛속까지 새겨진 복종의 습성이었을까. 


그럼에도 그들은 꿈에을 꾼다. 대도시로 가 아이들은 학교에 다닐 것이고 부부와는 다른 삶을 살 것이다. 21세기의 여느 부모가 그렇듯, 부부는 그 희망으로 매일을 견딜 것이다.  


ㅡ 


책을 읽으면서 얼마 전에 기후 정의에 대한 자료를 찾던 일이 떠올랐다. 가뭄과 홍수가 극단적으로 오가는 소설 속 브라질의 모습은 현재 기후 변화의 폐해를 고스란히 드러내는데, 이것을 작가가 의도했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작가의 의도 여부와 상관없이 이 소설에서는 기후 변화가 어떻게 전지구적으로 불평등을 초래하고, 인권 및 생명권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는지를 너무 잘 나타내고 있다.  


​비만 온다면 씨암소도 돌아오고, 농장의 목동이 될 것이다. 살이 오르고 혈색이 도는 아이들은 뛰어 놀고, 비토리아 어멈은 화려한 치마를 입을 것이며, 소들은 우리를 가득 채우고 카칭가는 완연한 초록빛으로 물들 것이다. 이것이 파비아누가, 그리고 지금을 살고 있는 우리가 바라는 바다.  



160여쪽에 불과한 소설은 매 페이지마다 밀도감있게 채워져있다. 내용의 무게감과 글 전체에 존재하는 상징성은 웬만한 장편 소설을 능가한다. 작품도, 작가도 최초 번역이라는데 좋은 작가를 알게 됐다. 




※ 출판사 지원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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픽션으로부터 멀리, 낮으로부터 더 멀리
박대겸 지음 / 호밀밭 / 202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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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홉 편의 단편이 실린 소설집이다.
SF, 호러, 미스터리, 오컬트, (소위)순문학 등 다양한 장르가 한 권에 모두  담겨 있다. 한 사람이 썼다는 게 의아할 정도로 다채로운 색깔과 정서를 보여주는 소설들은 단행본을 읽듯 각각의 작품마다 다른 매력이 있다.  



우리가 온전히 목마름과 추위를 동반한 고립과 단절에 처했을때 가장 바라는 건 의외로 서로 체온과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누군가다. 소설에서 보자면, 극단적인 외로움을 넘어 일상에서 늘 따라오는 반복되는 공포와 두려움은 극심한 난시로 안경이 없으면 한 치 앞도 보지 못하는 승호(부러진 안경), 이러나 저러나 결국 총을 맞게 되는 남자(글록17)로 대변된다. 또한 사회 안에서 존재감이 점점 사라져가는 현대인의 외로움은 <호세 알프레도를 찾아서>를 비롯해 작품 전반에 드러난다. 


집단 내 괴롭힘, 성소수자 등 우리 사회에서 자행되는 차별과 편견 속에서 갖는 외로움뿐 아니라 당면한 삶을 주어진대로 살아오다가 어느 순간 길을 잃거나 반복되는 생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현대인, 우리에게 고독은 늘 곁에 있다.  







 
소설에는 서술자 시점이 있다. 대부분 1인칭과 3인칭으로 쓰여지는데 사실 2인칭 시점은 거의 찾아보기 힘들다. 그런데 2인칭 소설에는 독특한 매력이 있다. 적어도 내가 읽은 2인칭 소설은 다른 서술자 시점보다 독자의 긴장감이 길게 이어진다. 이 책에 실린 <빛의 암호> 역시 그렇다. 특히 독자가 등장인물의 '수첩'과 '죽음'에 담긴 의미를 충분히 짐작하고 있다고 자신했을 때 그 수첩을 '너'에게 건넨 이유가 따로 있음을, 그리고 그의 죽음에 다른 이유가 있음을 깨닫게 된다. 여기서 '너'라고 불리는 2인칭 시점 장치는 읽고 있는 내 마음을 더 묵직하게 눌렀다. 마치 나에게 하는 말인 것처럼. 


그런데 책에 실린 각각의 소설 속 등장인물들은 대부분 외부에서 가해지는 두려움이나 고통에 그대로 노출되어있음에도 도망가지 않고 대면한다. 대표적인 인물이 <글록17>의 주인공이다. 부조리한 선택을 강요받으면서도 이를 거부하지 못하는 모습도, 막상 도망갈 기회가 주어져도 차마 도망가지 못하는 그의 모습은 매순간 선택할 수밖에 없는 삶을 살아가는 우리의 모습이기도 하다.  



희망적이다가도 비관스럽고, 한편으로는 무위와 체념이 오가는 소설들은 우리가 살면서 처하고 느꼈을, 적어도 한두 번은 겪었을 법한, 말로 다 할 수 없는 수많은 상황과 감정들을 실제적으로 그리고 있다.  


작가는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나비의 속도>에서 말하고 있다.
클릭 한 번이면 공간 이동이 가능한 세상에서 택시를 타는 사람들. 발열이 우리 몸에 문제가 생겼다는 신호이듯 쉼에  대한 욕구 역시 아주 오래 전부터 인간의 DNA에 새겨진 생존본능 중 하나가 아닐까.  



소설에서 좋았던 부분 중 하나는 거리에 대한 서술이다. 몇몇 작품('부러진 안경' '그날 있었던 일' '시간의 유속' 등)에서 인물들이 자신의 현 위치와 이동하면서 보이는 거리의 모습을 구체적이고 사실적으로 묘사하는데 이는 마치 독자가 인물과 함께 그곳에 있다는 현장감을 주어서 개인적으로 좋아한다. 특히 우리나라 소설이다보니 알고 있는 지역이나 지명이 나오면 친근하게 느껴지는 건 어쩔 수 없다. 


때때로 카프카적이고, 때때로 카를로스 푸엔테스 같은 느낌.  




오랜만에 눈에 훅 들어오는 우리나라 작가의 단편을 읽었다.
종종 근래에 나온 한국 단편들 중에는 소재나 전달하는 메시지, 심지어 정서적인 부분까지 너무 흡사해 읽고난 후에는 누구의 작품인지 구분이 안 되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뒤표지에 보면 '소설이 가진 힘을 믿는 새로운 정직성의 출현'이라는 문구가 있다. 동의하는 바다. 단편임에도 장편같은 힘을 가진 소설이라는 느낌을 받았다. 너무나 만족스러운 독서였다.



※ 출판사 지원도서

싸우지 않고선 살아갈 수 없는 생명체들. 먹기 위해 싸우고, 종족을 번식하기 위해 싸우고, 때론 자연과 싸울 때도 있지만, 어떨 때는 그곳에서 더 이상 살 수 없어서 싸우기도 하고, 어떨 때는 조금이라도 더 편하게 살고 싶어서 싸우기도 하지. 그도 아니면 그저 싸우고 싶어서 싸우기도 하고. - P17

이 남자는 왜 내 대답 같은 건 들을 생각도 하지 않고 자기 하고 싶은 말만 하는 걸까. 앞이 잘 보이지도 않는 상태로 계속 이 사람이 하고 있는 말을 듣고 있어야 하나. 아니면 내가 그냥 이 자리를 피하는 게 나을까. - P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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