놀이하는 인간의 철학 - 호모 루덴스를 위한 철학사
정낙림 지음 / 책세상 / 201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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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은 3부로 구성된다.

1부는 고대의 놀이적 사유 유형을 헤라클레이토스와 플라톤을 통해 살펴본다.

2부는 놀이의 근대적 사유 유형을 칸트, 실러를 중심으로 살펴본다.

3부는 놀이의 현대적 사유 유형을 탐색해 본다.

 

[정리]


<들어가기> 

놀이는 인간의 본성 (노동과 놀이의 차이)

1) 노동은 기본적으로 외적 강요가 전제되고, 놀이는 생존을 위한 물질적 보상보다는 개인의 명예이다.

2) 노동은 자신의 먹적이나 의도를 대상에 실현하는 인간의 행위이다. 그러나 놀이는 놀이, 그 자체를 목적으로 한다. (예술가의 행위는 놀이의 본질을 실현하는 대표적인 사례)

3) 노동은 효율성을 추구하기 때문에 결과의 예츨 가능성이 중요하다. 놀이는 결과를 예측하기가 어렵다.

4) 놀이의 열광은 꿈과 상상력의 산물이다.

5) 놀이는 사회적 활동이다.


철학자들이 놀이에서 발견한 가치

1) 놀이에서 중요한 것은 주체나 중심이 아니라 놀이하는 과정 자체이다.

2) 놀이는 존재와 생상에 관한 전통 형이상학의 좌표를 전도한다.

3) 놀이에 담긴 생성과 우연, 순가의 속성은 인간의 상상력과 창조의 뿌리가 된다.'


<1부 놀이의 고대적 사유 유형>

헤라클레이토스가 정의한 단편 B52는 관점에 따라 번역이 달라져 여러 의견이 존재한다.

(헤라클레이토스는 대립자들의 배후에 대림과 조화를 가능하게 하는 내재적 법칙이 존재한다고 확신했다. 이것을 로고스라 일컫는다.) 여러 의견을 종합해 보면 '삶은 하나의 규칙에 따라 기계적으로 진행되지 않는 놀아움의 연속이다. 삶의 놀라움은 아이가 놀이에서 왕이 되고 왕국의 통치권자가 될 수 있게 하는 것이다. 이것으로 헤라클레이토스는 우둔하고 어리석은 어른들을 비판한다. 플라톤은 놀이가 형이상학적. 인식론적. 윤리적으로 매우 부정적으로 의미를 담고 있다. 하지만 세 살부터 여섯 살까지 유아의 영혼에 적절한 교육 수단임을 인정한다. 아이들이 법을 지키는 놀이를 하게 되면 준법적이고 진지한 사람으로 성장하지만, 반대로 범을 지키지 않는 놀이에 익숙한 아이들은 결코 그런 사람으로 성장할 수 없다는 의미이다. 놀이와 관련한 고대 철학자의 이해는 플라통이 전형적으로 잘 보여주며,그가 놀이를 대하는 태도는 이후 오랫동안 서양 철학사를 지배한다.

p31

무슨 일에서든 훌륭한 사람이 되고자 하는 이는 바로 그걸 어릴 적 부터 줄곧 수련해야만 하는데, 이는 그일에 적합한 각각의 것들로 놀이를 할 때나 진지하게 임할 때나 그리해야만 한다고 저는 주장합니다. (플라톤)


 

<2부 근대 철학에서의 놀이 이해>

칸트가 파악하는 놀이는 우연적이며 특수하고, 그 자체로 어떠한 법칙에 종속되어 있지도 않으며, 어떠한 목적도 지향하지 않으면서도 그 속에서 법칙과 목적을 담아내는 활동이다. 여기에서 많은 철학자들은 칸트의 놀이 개념이 인식능력, 즉 상상력과 지성, 상상력과 이성을 연결하는 가교 역할을 하기 때문에 놀이가 수단적 지위를 벗어나지 못하는 것에 비판한다. 칸트에 따르면, 우리가 어떤 대상을 보고 아름답다고 느끼는 능력인 취미는 상상력과 지성의 조화와 일치에서 된다. 또한 칸트는 놀이개념의 속성이 목적에서 자유롭고 어떠한 의도나 강제로부터도 자유롭다고 설명한다. 상상력과 지성의 자유롭고 우연적 일치를 놀이라고 한다.

놀이는 상상력이 지닌 잡다함과 무질서를 지서의 규칙에 일치시킴으로써 미적 판단의 보편성을 가능하게 한다.

p127

칸트에 따르면 훈육이 필요한 이유는 태어날 때부터 안고 있는 인간의 '방종으로서의 자유'에 대한 성벽 탓이다. 즉 방종으로서의 자유에 대한 선호는 인간이 버려야만 할 본능이며, 이에 대한 근본적인 처방은 '이성의 명령에 복종'하는 것을 어린 시절부터 익숙하게 하는 것이다.

즉 칸트에서 인간의 방종으로서의 자유는 동물적 야만성의 핵심이다.

칸트는 교육적인 측면에서 놀이는 엄격하게 제한되어야하며 수단이라는 차원을 넘어서는 안된다고 말하고 있다.

칸트는 일과 놀이의 가치를 분명히 구분한다.

p129

일을 하면서 전심전력하여 몰두하는 것 자체는 우리에게 즐거운 것도 아니고 편안한 것도 아니다. 사람들은 어던 목적을 위해서 일을 실행에 옮긴다. 반면에 놀이를 하면서 전심전력하여 몰두하는 것 자체는 어떠한 목적도 지향하지 않ㅇ으며 우리에게 즐겁고 편안한 것이다.

칸트의 놀이 개념은 아이들의 신체단련과 휴식의 방편 이상의 의미가 없다. 칸느의 이러한 놀이개념은 근대적 사유 틀 속에 있으며 그 한계도 분명하다. 칸트에 이론에 대해 니체는 비판한다. 니체는 칸트가 놓친 예술가의 창작과정에 시선을 집중하고, 세계와 예술가의 관계 맺음을 놀이로 설명한다. 또한 우리의 사고란 실제로 보고 듣고 느끼는 매우 정교하게 서로 얽힌 놀이일 뿐이라고 말하다. 더불어 실러는 말한다.

p159

인간은 오로지 아름다움과 더불어 놀이해야 하며, 오직 아름다움과 더불어서만 놀이해야 한다. 간략하게 말하면, 인간은 오직 그가 그 말의

완전한 의미에서 인간일 경우에만 놀이하며, 놀이할 경우에만 온전한 인간이다.

곧 놀이(충동)은 인간성의 전체성 회복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3부 현대철학에서의 놀이 이해>

현대에 놀이는 인간의 본질을 이해하는 데 없어서는 안 될 중심 개념으로 자리 잡는다.

디지털 시대의 놀이는 더욱 빛난다,. 디지털 문화에서 중심은 끊임없이 생서되고 이동하며 사멸한다. "모든 것은 흐른다"는 헤라클레이토스의 언명은 디지털 시대의 정신을 가장 잘 대변해준다.

현대의 놀이와 곤련한 철학적 이해는 니체에서 출발한다. 니체는 놀이를 철학의 제한적이 영역으로 수용하고 설명하는 여느 철학자들과는 달리 자신의 모든 철학적 주장을 놀이로 설명한다.

니체는 세계를 '스스로 분만하는 에술작품'이라고, 더 극단적으로는 '세계 자체가 예술'이라고 선언한다.  여기서 예술은 더 이상 연주회나 전람회에 갇혀 있기를 거부한다. 니체는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통해 생성, 우연, 순간, 차이, 웃음, 춤 등에 가치를 둔다. 이러한 가지의

바탕에는 놀이의 정신이 있다.

p205

아이의 놀이가 잘 보여주듯이 자기 극복은 낡은 서판의 율법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모든 순간과 우연의 긍정에서, 그리고 모든 순간에 자기를 뛰어넘어 창조하는 행위에서 현실화 한다. 놀이하는 아이의 '새로운 출발'은 세계사의 새로운 시작, 가치의 전도, 즉 니힐리즘 국복의 출발을 뜻한다.

p207

니체 놀이철학의 극치는 '힘을 향한 의지' '영원회귀' '운명애' 등과 같은 그의 핵심 사유를 놀이로 설명하는 데서 찾을 수 있다. 이때 놀이는 세계와 삶에 대한 가치를 전면적으로 전환하는 동시에 니힐리즘을 극복할 수 있는 새로운 가치를 제시하는 등대 구실을 한다. 니체의 놀이철학은

우리에게 순간과 우연의 긍정을, 그리고 운명의 사랑을 알려준다. 니체는 문화의 건강함은 바로 놀이를 받아들이는 감수성에 따른다고 본다.

가다머는 놀이와 예술을 같은 선상에서 놓고 있는데, 놀이와 예술작품의 존재방식에서 공통적으로 더 본질적인 것, 즉 주체를 놀이하는 사람이 아니고, 놀이하는 사람을 통해서 표현되는 것이라고 말한다. 표현은 미적 존재의 본질에 속하고, 이 표현은 놀이이며, 관객은 놀이에서 본질적인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시작과 끝 (목적)이 아니라 경과 또는 진행됨이다. 가다며가 볼 때 동물의 놀이든 인간의 놀이든 모두 자기펴현이다. 특히 인간의 놀이는 '무엇에 대한' 표현이면서 동시에 '누구를 위한' 표현일 수도 있는데, 이러한 놀이가 바로 예술놀이이다.

핑크의 실존 범주로서의 놀이를 살펴보면 놀이는 다른 실존 범주인 죽음, 노동, 지배, 사랑과 같은 무게를 지닌다.  핑크는 놀이를 '놀이세계'라는 개념으로 통합한다. 놀이는 재미를 추구하고, 의미가 있으며, 공동체에서 이루어진다. 또한 규칙이 있고 도구가 용된다. 따라서 놀이세계는 현실세계와 분리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p294

놀이는 의무, 진지함, 목적, 의미에서 일탈하는 것으로 보이고 선.악의 경계마저 모호하게 하는 수수께끼 같은 것이지만, 삶의 통일성을 위해 빠질 수 없는 실존 범주이다. 그래서 핑크는 놀이의 중요성을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진지함을 놀이하며, 진정성을 놀이하며, 현실성을 놀이한다.

우리는 노동과 토쟁을 놀이하며, 사랑과 죽음을 놀이한다. 심지어 우리는 놀이조차 놀이한다."

비트겐슈타인은 언어활동의 전 과정을 '언어놀이'라고 일컫는다. 간의 삶이란 직간접으로 언어를 배개로 이루어질 수밖에 없으며, 따라서 삶의 조건과 과정도 언어놀이의 형식을 취한다고 주장한다. 어놀이에서 규칙을 따른다는 것은 하나의 규칙을 그저 안다는 것이 아니라 그 맥락을 이해하고 생한다는 의미이다. 즉, 놀이의 규칙은 체적인 삶의 현장에서 시작되고, 수정되고, 변한다. 그래서 놀이의 규칙은 삶의 양식의 한부분이라고 말할 수 있다는 것이다.

p329

이간이 언어를 습득하고 사용한다는 것은 인간과 자연, 인간과 인간 사이의 질서, 그리고 공동체의 규범을 배우고 따른다는 것을 의미한다. 것은 문화의 뿌리가 언어놀이에서 출발한다는 것을 뜻한다. (...) 언어의 의미는 언어놀이를 통해서 획득되며, 언어놀이는 인간 삶의 형식 속에서 이루어진다. 결국 문화는 삶의 형식에서 이루어지는 인간의 언어놀이의 산물이다.


<4부 탈현대와 놀이의 질주 - 현대예술과 놀이>

예술과 관련하여 니체가 주목한 것은 '도취'이다. 인간이 자신이 바라는 것을 구현하고자 할 때, 언제나 도취가 함께한다. 도취가 없다면 인간은 감흥을 얻을 수 없다고 말한다. 니체는 예술생리학에서 예술은 천부적으로 비범한 천재가 작품을 구현함으로써 감상자에게 감동을 준다는 칸트식의 근대적 예술관을 거부한다. 예술생리학에서 예술은 장르, 재로, 양식에 따라 구분되지 않는다. 근대에 예술은 대부분의 인간을 관람자와 소비자의 지위로 묶어두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늘 외부의 자극에 반응하는 수용자의 위치에 머물렀다.

p357

예술생리학은 예술을 도취와 힘을 향한 의지의 차원에서 정의 내림으로써 예술을 확장한다, 자신의 힘을 극대화하는 유.무형의 활동 자체를 예술로 본다면, 이론적으로 모든 인간은 예술가가 되고 모든 것은 예술이 되는 자격을 얻을 수 있다. 즉 니체에게 예술가란 '자기 자신을 조형하는 자'이다. (...) 인간 개개인에게 잠자고 있는 창조의 능력을 일꺠움으로써, 외부에서 주어진 가치를 수용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가치의 주체임을 확인 시킨다. 세계를 자신의 눈으로 인식하고, 자신의 힘을 세계에 투사하여 세계를 자신의 방식으로 조형하는 이러한 일련의 과정은 삶의 과정이자 예술 창작의 과정이다. 삶을 예술작품을 창작하듯 살아가는 것, 이것이 니체가 궁극적으로 희망하는 삶이다.

플럭서스 운동의 특징은 360쪽의 선언문에 잘 드러나 있다.

부르주아적 질병의 세계, 즉 '지식인적인' 전문적이고 상업화한 문화를 제거하라, 죽은 예술,모방, 인공예술, 추상예술, 환상주의 예술, 수학예술의 세계를 제거하라!/ 예술에서 혁명적인 흐름과 조류를 촉진하라. 살아있는 예술, 반-예술을 촉진하라. 비평가, 딜레탕트를, 전문가들에게만이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이해될 수 있는 비예술실재를 촉진하라./문화적.사회적. 정치적 혁명가들의 핵심집단을 통일된 전선과 행동으로 융합하라.

플럭서스는 삶에서 소외되는 예술활동 일체를 부정한다. 예술활동의 과정 자체를 더욱 중요하게 생각한다. 플럭서스는 실험과 창조의 놀이로 파악한다. 플럭서스가 추구하는 바는 모두 놀이의 정신에서만 가능한 일이다. 오늘날 우리의 관심을 끄는 디지털 예술의 유형은 바이오 기술을 웅용한 터치스크린과 관객의 움직임을 감지하는 센서 기술을 적극 활용한다. 이는 작품과 관람자의 상호작용을 가능하게 한다. 디지털 예술의 특징은 이러한 고전적 예술작품의 원본성과 물질성의 개념을 해체한다. 결론을 말하자면 예술행위는 온갖 절망스럽고 부정적인 삶에도 좌절하지 않고 자신을 조형하는 것, 자신을 조형한다는 것은 자기를 긍정하고 동시에 자기를 국복하고자 하는 것이다. 예술과 삶은 분리될 수 없는 것이다.

 


 

책을 덮으면서...

결국 인간의 본질은 놀이에서 시작해서 사는 동안 다양한 형태로 놀이를 바탕으로 하는 삶을 산다는 것이다.그 놀이에는 언어를 기본으로 철학,예술까지 즐거움과 호기심을 탐닉하는 놀이를 추구하는 심리로 발전을 거듭한다는 것이라고 생각된다.

그렇다면 우리가 받고 있는 교육 등 지식의 축적을 대하는 우리의 마음을 다른 각도로 바꾼다면 좀더 긍정적이고 효율적으로 전환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나는 아직도 현대미술이나 여러 디지털 예술들은 머리로는 이해하고 있지만 가슴으로 느끼는 감흥까지는 아직 다가가지 못하고 있다. 이는 내가 단순 관람자이기 때문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불현 듯 든다.


책을 읽는동안 이해가 안 되는 부분도 있었고, 반복 기술되는 부분이 있어서 지루한 면도 없지 않았지만 니체와 비트겐슈타인을 좋아하는 나로서는 일면 반갑기도 했다.

과다한 배움에 지친, 혹은 강요에 의한 지식 축적에 지치신 분들 일독해 보시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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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낌없이 뺏는 사랑
피터 스완슨 지음, 노진선 옮김 / 푸른숲 / 201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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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아나는 희망이 보이지 않는 최빈곤층, 소위 밑바닥 인생이다.

이대로 살다간 자신의 앞날은 불보듯 뻔하다.

삼류건달의 성상납이나 하며 살든가, 마약 복용자가 되어 어느 날 죽게 되거나...

그렇게 살 수 없었던 영리한 리아나에게 달콤한 사탕이 던져졌다.

호강에 겨워 정신 못차리는 오드리로부터...

한번 달콤한 사탕 맛을 본 리아나는 그 인생을 결코 포기할 수 없었을 것이다.

리아나에게 달콤한 사탕이 사실은 보편적인 평범한 삶일 뿐인데

불행의 극에 다달았던 리아나에게는 모든 것을 던져서라도 쟁취하고 싶었던 복권

같은 것이였을테다.

삶의 밑바닥에서 빠져나오고 싶은 욕망.

다른 사람이 되어 다른 인생을 살아보고 싶은 간절한 소망.

오드리 한 사람의 희생으로 가능했던 꿈이 조지로 인해 계획이 틀어져 버린 리아나.

어쩌면 리아나가 마지막까지 조지를 이용했던 건 애당초 자신의 계획을 망쳐놓은

복수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남자 주인공 조지를 보자.

읽는 내내 이 남자 때문에 복장 터지는 줄....

대학 신입생 시절 만나 석달 동안 사랑하고 헤어진 여자에게

바닥까지 이용당하고 있다는 걸 알면서도 끝까지 자신에 대한 사랑을

믿고 싶은 남자. 왜일까?  왜지?

진심 묻고 싶다. 

당신은 그게 사랑인가요? 라고....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전 애인의 인생 계획을 틀어놓고 해맑게 사랑타령이나 하는

이 어리숙한 남자.

조지의 죄는 리아나의 고통을 이해하지 못한데서부터 시작한게 아닐까.....

그래서 털어낼대로 털어낸 후 어리석은 조지를 골로 보내놓고 깔끔하게 자취를 감춘

리아나에게 부정적인 감정이 덜 생기는 아닌가 싶다.


소설 중 제일 마음에 들었던 캐릭터는 아이린.

조지와 애인, 친구 중간 어디쯤에 있는 사이.

인간적으로 애정이 가는 캐릭터.

타인을 배려할 줄 알고 이해할 줄 아는 여자.

이런 여자를 두고 리아나에게 눈 돌리는 조지가 이해는 안되지만

내가 남자는 아니므로 그 심리는 그냥 그러려니 하는걸로...



등장인물의 캐릭터나 흐름이 거슬리는 부분은 있으나

재미면에서는 즐겁게 읽을 수 있는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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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 책문, 새로운 국가를 묻다 - 개혁군주 정조의 78가지 질문
정조 지음, 신창호 옮김 / 판미동 / 201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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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에 관한 계책을 묻고 그에 대한 답을 적게 하는 시험, 책문(策問)을 출어놓은 책이다.

 

지도자는 무엇이며, 백성을 향한 어떤 애민심을 가져야 하는가.

그것을 이루기 위해 얼마만큼 고심을 해야 하는가,

그래서 국가 최고지도자는 어떠한 삶을 살아야 하는가를 보여준다.

정조는 정치,사회, 문화, 수학, 과학, 복지, 인사, 지리, 운송, 예술에 이르기까지 놓치는 것이

없었다.


신뢰와 소통, 공정성과 균형의 중요성을 알고 있는 왕,

정치가 늘 봄날같아 백성에게 좋은 날만 있기를 바랬던 왕,

사회 전반에 조화를 중시했던 왕.

사치를 멀리하고 차별을 경계했던 왕.

끊임없는 독서와 함께 신하들을 독려했던 왕.

어디서 이러한 최고지도자를 만날 수 있을까.


1. 올바른 정치를 향한 소망

p27

어째서 민심은 나날이 갈라지고 시론은 더욱 괴리되고 있는가? 동서남북으로 제각기 학파를 서우고 이쪽과 저쪽, 자신의 편과 남의 편으로 갈라 사사로이 비교하고 있는가? 이렇게 논의하는 모습을 살펴보면 시시비비를 가릴 만한 공평함을 잃었다. 그들이 실천하는 일을 어찌 정정당당한 도리에 근거하여 증명할 수 있겠는가? 이런 작태를 멈추지 않는다면 앞으로 나라가 나라답지 못하고 사람이 사람답지 못하리라. 이런 상황에서 세상의 중심에 서서 백성을 바로잡을 수 있겠는가?

그것은 뒷걸음질 치면서 앞으로 나아가기를 바라는 것과 다를 바 없다.

p31

윗사람은 아랫사람을 믿지 않고 아랫사람은 윗사람을 믿지 않는데, 이것은 서로 이끌어주지 못해 그러한가? 아니면 세상에 서로 신뢰하는 분위기가 떨어져서 그러한가? 위로는 최고지도자인 군주로부터 아래로는 일반 서민에 이르기까지. 어떻게 하면 믿음이 마음 한가운데서 우러나와 서로 신뢰할 수 있겠는가? 인심은 날로 두텁게 되고 정치가 바르게 되어 빛나는 문명사회를 만들 수 있겠는가? 여러 학자 관료들은 혼신의 힘을 닿여 제가기 대책을 고민하여 저술해 주시라.

p48

그간 당파끼리 일삼던 분쟁으로 묵은 폐단은 점점 나타나고 있다. 그들을 면전에 불러 명령하고 귀에 대고 당부했지만, 내 말을 듣고도 꿈쩍 하지 않고 나를 멀리 한다. 틈만 나면 남을 속이고 자신에게 유리하도록 일을 도모하느라 국가를 위해 일할 겨를이 없다, 농단으로 이익을 꾀하면서 자신이 저지른 일도 남이 그렇게 했다고 팽계를 댄다. 상황이 이러하니 누가 국가를 위한 헌신을 본받으며, 누가 기꺼이 나라의 일을 맡겠는가! (...) 아! 붕당이 혁파되어야 국가의 명백이 손상되지 않으리라. 황국이 건립되면 왕도가 창성하리라. 나의 부족함은 그대들이 보고 들은 것이니, 앞으로 어떻게 나를 지도할 것인가? 붕당을 해소할 방법을 제시해 보라. 그리고 조심스럽다고만 하지 말고 진정으로 분명하게 나를 꺠우쳐 보라.

p58

누가 이 혼미한 시대의 나침밤이 외겠는가? 누가 담을 등지고 나아가기를 청하겠는가? 마음을 펼치기 전에 자신을 함양하여 바르게 하는 방법을 굳게 지킬 수 있겠는가? 밤낮으로 조심하고, 드러냄과 은미함을 한결같이 하여 마음을 태연하게 가질 수 있겠는가? 그리하여 자신을 완성하는 동시에 다른 모든 사물도 완성시키는 데 기여할 수 있겠는가? 그런 '경'에 관한 공부를 효과적으로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p65

어떻게 하면, 사람의 다섯가지 성품 가운데 지혜를 회복할 수 있겠는가? 나라의 어리석은 사람을 깨우쳐, 옳고 그름의 분별을 물에 비추어 보듯 공평하게 하고, 사물과 이치에 통달함을 하늘과 땅처럼 높고 넓게 하여, 잔꾀나 꼼수를 영원히 축출하고 함께 올바른 길로 갈 수있겠는가? 그대들은 반드시 지혜에 관한 뛰어난 생각이 있을 것이니 각자 저술하라.

 

정조는 단합된 정치를 소망했다. 지혜와 현명함을 모아 백성들을 보살피기를 희망했다. 붕당으로 시장경제가 무너지고 서민들은

살기 힘들었으며, 권력에 기대어 아부하는 자들이 넘쳤다. 이를 알고 있던 왕은 끊임없이 그들을 설득하고 고민했다.

비록 정조 사후 정치는 퇴보했지만, 그를 부족한 리더라고 누가 말할 수 있을까....


 

2. 지도자의 열정과 그에 걸맞은 인재등용

p101

강직한 인재를 구하고 싶은데, 누가 새벽의 기운을 받아 안은 봉황인가? 나라를 위기에서 구할 대책을 의뢰하고 싶은데, 누가 산속에 있는호랑이인가? 하루 빨리 나라의 기강을 세워야 하는데, 나를 도와 정치를 쇄신하고 개혁할 사람은 누구인가? 공정한 법집행을 신중히 해야 하는데, 누가 나를 정치적으로 도와줄 수 있겠는가? (...) 어떻게 하면 사람을 보고 인격을 판별하는 정밀한 기술이 있어, 선대의 왕들이 사람을 알고 인재를 등용하는 방법을 오늘날 다시 재현할 수 있겠는가?

p119

어찌 인재를 등용하는 기준을 문벌에 제한할 수 있겠는가?

p120

이 좁은 땅에서 또 서얼을 제거한다면 온 나라 인재의 절반을 이미 상실한 것이나 마찬가지다. 그 나머지 가운데 또 향곡을 제거한다면 인재 중 4분의 1만 남는다. 여기에서 또 권문세가나 문벌이 이편저편으로 나눈다면 한 인재를 모조리 등용할 수 없고, 등용하는 인재도 반드시 현명하다고 할 수 없다. (...) 재능을 지녔는데도 문벌과 지역에 가로막히고, 시대에 차별을 받는 저들이 모두 곤구하게 늙어 간다면, 이 또한 천지의 재앙과 마찬가지다.

p135

내가 백성을 사랑하려는 정책에 힘쓰고 싶으나, 모두들 다른 사람의 닭을 훔쳐 먹으며서 아직은 기다리라는 식이다. (...) 지금 내가 최고지도자 자리에 있을 떄, 한번 최고의 정치에 부흥하고 싶다. 그 방법을 어디에서 찾을 것인가?

p150

세상을 격려하고 사회 분위기를 바로잡는 데는 언론보다 좋은 것이 없다. 언론은 의사소통의 마당이다. 하지만 끼리끼리 패거리를 지으며 당파를 맺고 싸우는 것은 당파마다 결의한 자신들의 견해에 가려졌기 때문이고, 구차스럽게 이런 저런 핑계로 자리를 차지하는 것은 온갖 생각을 만들어 내는 계기가 되었다, 그리하여 가타부타 하지 않는 것을 "사회 분위기에 휩쓸리지 않는다."고 하고, 사람을 따라 부화뇌동하지 않는 것을 "일을 안다."고 한다. 그런데 모두들 묵묵히 있는데 혼자 말을 하면 "일을 만든다."고 하고, 모두들 옳다고 하는데 혼자 그르다고 하면 "헛소리를 하고 있다."고 비난한다.

 

계급 사회에 의한 서얼들의 차별, 붕당 정치 등 정조는 고른 인재 등용에 애를 먹었을 것이다. 정조 시대에 서얼들이 벼슬길에 나갈 수 있었으나

그것도 한시적일 뿐, 정조의 욕구에는 턱없이 부족했을 것이다. 얼마나 현명하고 어진 이들을 찾고 싶었겠는가. 왕보다 권문세가의 권력이

강했던 세상에서 정조는 일할 사람조차 얻기도 힘들었을 것이다.


 

3. 문예부흥으로 빛나는 문명국가 건설

p194

학자들이 열심히 공부하도록 할 방안은 없는가? 모두가 학문에 마음을 쏟아 성실히 임학고, 그렇된 학설을 물리치고 올바른 학설을 옹호하며, 집안에 있을 때눈 덕망을 성숙시키고, 세상에 나오면 군주를 높이고 백성을 보호하며 세상을 구제할 수 있도록 격려할 방안은 없는가?


 

4. 정치 치침서를 통한 리더십 함양

p310

나는 세상의 도리가 한 쪽으로 치우치는 것을 민망히 여긴다.사람의 마음이 거칠어지는 것을 두려워한다. (...) 그런 논의가 일시적으로 입으로 말하고 귀로 듣는데 그친다면, 한낱 형식적인 도구일 뿐이니 좋은 정책을 확장하는 효과를 기대하기는 어렵지 않을까 염려된다. 지금 진정으로 내가 이말을 하게 된 뜻을 알아 평소 정책으로 펼 수 있으면 좋겠다. 글을 읽고 나서 아무런 일도 없었다는 비판을 모면할 수  있었으면 고맙겠다. 맹자가 말한 것처럼 편안한 집에 거처하고 올바른 길을 행하는 계기가 되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정조는 진정한 최고지도자가 되기를 열망했다. 현명하고 올바른 신하들이 자신을 잘 보필해 주기를 바랐다. 그래서 고른 인재등용을 열망했고,

붕당을 혁파하고, 개혁을 하고자 했다. 정조가 열망했던 바들이 성공의 여부를 떠나서 고뇌하는 리더에게 우리는 비난을 쏟을 수 없다.


 

5. 함께 잘 사는 나라를 만드는 노력

p333

국가가 백성을 구휼하는 정책을 주진이라 한다. 주진은 특히, 홍수나 가뭄과 같은 재해로 굶주리는 백성이나 가난한 사람, 소외된 사람 등 사회적 약자를 구휼하는 일이다. 이는 국가의 가장 중요한 책무다.

p406.

차라리 국가에서 손해를 보더라도, 조운선의 계책을 무작정 따를 수는 없는 일이다, 그러나 조운의 일로 백성이나 나라에서 곤란을 겪고 있으니, 어찌

작은 일이겠는가! 국가에서 차마 좌시하고 가만히 있을 수만은 없다, 어찌 백성을 구제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학자 관료들이여! 그대들은 옛날과 지금의 여러 제도에 달통하고 있지 않은가! 조운 제도의 근원을 탐구하여 국가나 백성 모두가 편리하고 해묵은 폐단을 제가할 수 있는 방법을 강구해 보시라.

p414

잘못된 정치가 있다면 무엇을 고쳐야 하는가? 백성에게 이로운 일이 되게 하려면 어떤 부분을 일으켜야 하는가? 백성이 하고 싶어 하는 것 가운데  반드시 따라 주어야 할 것은 무엇인가? 백성이 곤경에 처한 가운데 반드시 풀어 주어야 할 것은 무엇인가? 이런 문제에 대해 여러 학자 관리들에게 책문을 내어 자문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먼 바다의 어란이나 해사의 실정을, 뜰에도 나가지 않고 손바닥을 가리키듯 알아볼 수 있겠는가?

p435

재화가 땅에 버려지지 않게 하되 관청의 창고는 채워지지 않게 하고, 재능은 실질보다 현란하지 않게 하되 인재가 재야에 버려지지 않게 해야 한다. 백성들에게 교육을 알게 하고, 금수에 가깝지 않게 하여 풍속을 돈후하게 해야 한다. 법규는 엄중하게 해서 백성들에게 넘지 못할 한계가 있다는 것을 알게 하여 죄를 범하지 않게 해야 한다. 그러려면 어찌해야 하겠는가?

 

중세에서 근대로 넘어가기 전이였던 정조 시대. 새로운 문물이 끊임없이 들어오면서 경제 활동도 변화가 생긴다. 이 변화를 빠르게 읽고, 기본인 농업을 지켜 민생을 안정시키고자 했던 왕. 그의 고민이 보였다.


 

정조가 하고자 했던 바와 더불어 도가 사상 유행, 금난전권의 폐지, 북학파 등 직접적으로

언급된 바는 없지만, 정조가 그것에 관련 된 배경들을 유추하며 읽을 수 있었다.


독서는 나를 들여다보는 과정이다.

자신과 주변을 끊임없이 돌아봐야 하는게 삶이다.

그런 선상에서 본다면 정조는 일분일초를 아낌없이 삶을 영위한 사람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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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것도 아닌 것들에 대하여 - 어느 수집광의 집요한 자기 관찰기
윌리엄 데이비스 킹 지음, 김갑연 옮김 / 책세상 / 2017년 5월
평점 :
절판


  이 책을 처음 받았을 때 미니멀리즘을 지향하는 나로서는 조금 난감했다.

          수집이라니... 수집에는 전혀 관심이 없는 나는 첫 책장을 넘길때부터 문장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이래서 안되겠다싶어 읽는 관점을 바꾸어 보기로 했다.

표지 뒤쪽에 나오는 문장들....

'나는 왜 모으는가.

 나는 왜 다른 사람들이 미련 없이 내버리는 모든 것을 사랑하는가.

 무언가를 모으고, 쌓아두고, 기억하려는 충동에 대해 사유하다.'

 

수집을 하는 행위를 넘어 저자가 수집을 하게 된 동기, 수집에 집착하는 원인 등에

관심을 두고 책을 읽기로 했다.

이 작가의 수집이 독특한 이유는 수집가로서 관심을 갖기에는 평범 이하의 물건들만

주로 수집한다는 점이다. 대체로 남들은 전혀 관심을 갖지 않는 물건에만.

돈을 주고 사지도 않는다. 뒤지거나 줍거나. 왜일까?

이 책은 수집에 대한 얘기가 아닌 수집을 통해 드러난 저자의 심리에 대한 책이 아닐까 싶다.

 

저자의 가정환경은 아주 일반적인 선에서 조금 벗어나 있다.

장애가 있는 누나, 누나에게 맞춰져 있는 가족들의 관심,

그로인해 자신에게 쏠린 부모의 기대. 그에 따라 알아서 커줘야 하는 다른 형제들.

아이들이 성장해감에 따라 조금씩 지쳐가는 부모님을 지켜보는 아들들.

 

p123

아직 십대였던 나는 젊은 햄릿의 역할을 수행했고, 아버지 또는 아벚의 다양한 형상들과

겨루고 버둥거리면서 정체성을 수립하려 몸무림치고 있었다. (...) 나는 긴장하고 얽매인

사람이 되었다. (...) 살면서 행동 불안도 겪었는데, 그 불안장애가 예술에서는 마술처럼

사라졌다. 처음에는 연극 무대에서, 나중에는 글, 음악, 섹스, 수집에서 물안감이 사라졌다.

나는 그런 것들에서 유창해졌다. 거기서 내 똥을 이해했다.

나를 포함해서 많은 수집가들이 어린 시절의 트라우마에 응답하는 보상적 대상물에 집착한다는

사실을 나눈 알고 있다, 지금껏 인간이라는 대상이 불안정한 존재라고 증명되었다면 물질적,

대상물이 그것을 대신할 수도 있을 터. 수집가들은 잊을 수 없는 상처를 사랑의 껍질 안에서

메아리치게 하고, 그 껍질은 배아적 자아를 에워싼다. (...)

수집은, 그리고 특히 수집의 능동적 구성요소로서 반복되는 소유의 행위는 적대적인 세상에서

보상의 형식으로, 또 생존의 수단으로 기능한다.

 

이 구절만으로 수집이 저자에게 청소년 시절부터 어떤 의미였는지 짐작할 수 있다.

더불어 p134~135를 읽어보면 수집은 자신에게 결여된 부분을 자신만의 물건들에게서

의미를 찾고 있는게 아닌가 싶다.

또한 p168을 읽다보면 유년시절 충분한 애정을 받지 못한 것 또한 수집의 형태로 나타난게 아닐까...

저자에게 수집은 '따뜻한 포옹'과 같은 의미를 부여하고 있는게 아닐까...

저자는 스스로 정신과 치료를 받을 만큼 자신에 대해서 잘 인지하고 있다.

중년이 지난 저자에게 수집은 과연 애정결핍과 애착에 대한 표출이기만 할까?

 

p200 이후부터는 수집은 작가에게 개인의 역사다.

생활 속의 소소한 것들을 수집함으로써 자신의 기호와 선호도를 기록의 형태로 남긴다.

이는 한 개인의 역사라고 할만하다.

그는 돈을 지불하고 물건을 수집하지 않는다.

 

p256

내가 능동적으로 돈을 써서 물건을 수집한다면, 나는 전톡적 의미의 수집가일 것이므로

근심거리를 떠안게 될텐데, 나는 그런 수집가가 되고 싶지 않다. (중략)

나는 수집 취미가 혹여 내 인간관계를 방해했을 가능성도 마음 한구석에 담아두지만,

다른 한편으로 생각하면 수집이 내 인간간계들을 향상 시켰을지도 모를 일이다.

수집은 내가 항상 하고 있는 일로, 내 취향을 따른다거나 나 스스로를 조향해 사회적

관습이라는 덤불숲을 통과한다거나 둥지를 구하고 유지한다거나 하는 일과 다를 바 없다.

 

p265

내 스크랩북들은 20세기 후반을 관통하는 동안 나와 결부되었던 모든 것을 답고 있다.

내가 지나온 항적은 의심할 바 없이 당신의 항적과 여러 번 교차할 것이다.

 

수집은 저자 자신의 역사이며 '버려졌다가 선택되어 다시 간수되는 것들'에 자신을

투사시킨건 아닌지 묻고 싶다.

 

저자는 책을 마무리 하면서 자신의 성장에 대해 쓰고 있다.

 

내가 자 자신을 좋아하는 쪽으로 성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중략)

이 책은 어떤 의미 있는 것, 어떤 의미 있는 사람에 관한 책이다.

 

저자는 외롭고 불안했던 자신을 오닐 속으로, 연극 속으로, 아무것도 아닌 것들의

백색 소음 속음로 숨어들었었다고 고백한다. 그러면서 작가는 말한다.

 

p358

내 삶의 이야기, 또는 이야기들, 우리는 이런 것들을 가지고 있다. 이런 측면에서 보면

모든 사람은 수집가다. 경험은 이야기를 만들어내고, 이야기들은 기억 속에서 더미를 이룬다.

새로운 관계의 시작은 이 점을 본명히 해준다.

 

이제 작가는 수집이 집착이 아닌 역사의 기록으로 사용할 것이다.

우리도 내 삶의 어느 한 부분들을 기록으로 남겨야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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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도 꽃피우기 위해 애를 쓴다
정목 지음 / 꿈꾸는서재 / 201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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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도 꽃피우기 위해 애를 쓴다>
- 정목 스님


오랜만에 읽는 위로 산문집

가끔은 살다보면 나만 억울한거 같고,
나만 힘들게 걸어가는 거 같고,
나만 손해보는 듯한 기분.

그럴 때마다 위로 한마디씩 건네주는 말들.
하지만 내 마음은...

'누가 몰라서 못하나? 살다보면 그렇지...'

맞는 말이다.
알면서도 쉽지 않은 마음가짐, 행동가짐.
그러니 가끔 머릿속에 넣어주자.
이미 내가 알고 있는 사실들을.


43.
상대방에 대한 깊은 이해 없이 자신의 기준으로
그 사람을 재어보고 판단하는 습관을 끊어버릴 때
비로소 상대의 내면 속에 웅크린 채 떨고 있는
외로운 영혼을 알아볼 수 있게 됩니다.

46.
내가 두렵듯이 남을 두렵게 하지 말라. / 붓다

52.
달콤한 칭찬과 인정받고 싶은 마음에 끌려가지도 말고,
헐뜯거나 비방하는 말이 거슬린다며 거기에 묶일
이유도 없습니다. 순간적이고 즉흥적인 기분에 자신을
자주 내맡기면 쉽게 화가 일어나고 자주 슬픔에
빠지게 됩니다.

90.
자신에게 너그러워지지 않으면 남의 말이 귀에 들어
오지 않아요. 내 마음의 평수가 너무나 협소해서
누구의 말도 들어올 여백이 없는 겁니다.

95.
'하지만...'이라는 군더더기 변명없이 간결하면 본성은
서로 통합니다.

126.
진리는 책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삶 속에 있습니다.

164.
삶이 즐거울 때 비로소 죽음도 즐겁습니다.

221.
인간의 가장 큰 불행은 가난과 질병이 아니라 아무도
자기를 필요로 하지 않아 버림받는 것이다.


사랑한다는 것은 서로 마주보는 것이 아니라, 같은
방향을 함께 바라보는 것.
/ '인간의 대지' 에서, 생 텍쥐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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