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레이브 뉴 휴먼 은행나무 시리즈 N°(노벨라) 17
정지돈 지음 / 은행나무 / 202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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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미래 한국은 인구 절벽을 해결하기 방안으로 국민에게 의무적으로 정자와 난자를 제공받아 인공 자궁에서 출생한, 소위 체외인을 통해 노동력 문제를 해결한다.  


소설에서는 각각의 계층을 대표하는 인물들이 등장한다. 출중한 능력으로 일반인보다 더 성공한 체외인 아미, 자신의 정체성을 찾기 위해 방황하는 체외인 현지, 세속적인 아버지를 혐오하는 일반인 철멍, 체외인에서 승격해 일반인이 된 기업가 리젠쿠이, 아날로그 생활 방식을 지향하는 저널리스트 아날로그맨, 가족과 공동체를 거부하며 젠더 파괴를 주장하는 혁명가 체외인 가나코.  





 


체외인은 인공 자궁에서 태어난 인간을 일컫는다. 인간의 신체 없이도 출생이 가능해진 세상이 도래한 것이다. 정부는 법으로 규정해 대한민국 국적을 가진 건강한 성인 남녀에게 의무적으로 정자와 난자를 기증받아 무작위로 수정한다. 출생률 감소와 인구 저하로 국가 소멸이라는 위기에 봉착하자 만든 대안이었다. 체외인에게 유전적 부모가 존재하지만 생부 생모를 찾는 건 엄격히 금지되었다. 체외인의 부모는 국가이자 시스템이다. 양육, 교육, 사회화는 정부가 전담한다. 대신 체외인은 생명 전반에 대한 채무를 갖는다. 체외인이 사회에 반드시 필요한 존재가 되면서 사람들은 생식의 압제로부터 해방됨과 동시에 다른 한편으로는 인공적으로 인간을 만들어낼 수 있다는 사실에 인간의 본질과 가족의 필요성에 대한 고민이 싹트기 시작한다. 


체외인이 사회의 일부가 된 이후 일반 국민들은 전보다 더 자연분만은 신성시했고 상류층일수록 가족을 중시했다. 체외인은 차별과 배제의 대상이었다. 사람들은 인공체인 체외인의 필요를 인정하면서도 혐오한다. 정부는 체외인을 구분하기 위해 성인이 된 체외인의 오른쪽 손목에 식별 가능한 생체 바코드를 새겼다. 바코드에 관련한 어떤 행위도 금지되며 적발시 체외인의 존재는 말소된다. 


이 즈음까지 읽고  내가 무의식적으로 내뱉은 말은 "왜?"였다(이 소설, 할 말 많겠다싶었다). 소설에서는 일반인들이 체외인을 두고 '제품' '노예' '가축'으로 표현한다. 체외인들이 지켜야할 조건과 환경, 그리고 철저하게 개인의 욕망을 억누른 법적 제한을 보면 '어디'에서 태어났는지를 제외하면 '일반인'과 다를 게 하나 없는데 굳이 이토록 지독하게 제한을 두는 이유는 무엇일까?  


바꿔 생각해보자. '일반적'으로 출생한 인간이 부모의 기대를 저버리고, 가정을 책임지려하지 않고, 자신이 처한 불행을 극복하거나 개척하지 않으려고 한다면(소설에서 체외인에 대한 설명이다), 그 인간은 일반인인가 체외인인가. 주어진 조건을 극복하고 삶을 개척하려는 체외인을 '일인', 발전에 무관심하고 현재에 만족하며 살아가는 체외인을 '이인'이라고 부른다. 이 전제를 우리에게 적용해보자. 나는, 당신은 일인인가, 이인인가. 이 조건대로라면 이인조차 되지 못하는 일반인은 현실에서 수두룩하다.  



​소설에서는 체외인이 부모도 없고, 가족도 없는, 뿌리와 역사도 없는 인간이기에 그들에게는 의무감도 책임감도 정체성도 없다고 정의한다. 그렇다면 과연 일반인들은 의무감, 책임감, 정체성이 확고하다고 단언할 수 있는가? 어떤 인간도 원해서 태어나지 않았고, 제 부모를 선택할 수 없다. 냉정하게 말하자면, 우리는 어쩌다 운이 좋아(그 반대일 수도 있고) 수많은 정자 중에 하나가 살아남은, '생물학적'으로 봤을 때 부모가 될 사람들의 의지와는 별개로(부모들 역시 자식을 선택할 수 없으니) 그야말로 우연으로 태어난 게 아닌가. 설령 체외인이 현실에 존재한다고 하더라도 존재의 필요성이 분명한 그들보다 살면서 끊임없이 혼란과 고민을 겪으며 삶의 방향을 수정해나가야 하는 일반인이야말로 자신의 존재 가치를 더 증명해야하는 처지일지도 모른다. 


ㅡ 


정부는 체외인과 일반인 사이의 경계를 흐린다는 이유로 체외인의 출산을 금지했다. 임신과 출산은 인간 고유의 영역이므로 아무 존재나 하도록 내버려둘 수 없었다. 이에 따르면 체외인은 인간이 아니다. 그렇다면 이 지점에서 인간을 어떻게 정의定義해야 할지 묻지 않을 수 없다. 


정자와 난자, 심지어 추후 발생할지 모를 질환을 대비해 제대혈까지 냉동 보관하는 시대다. 인공 수정뿐 아니라 합법적으로 정자를 기증받아 비혼모 출산이 가능한 나라도 있다. 심지어 소설에서 일반인 부부도 조건에 따라 인공 자궁을 사용할 수 있다. 사지 절단의 환자가 인공 팔다리를 착용하고 일상에 복귀하는가 하면, 동물의 장기를 이식하는 연구도 지속적으로 진행 중이다. 그동안 많은 소설들이 '복제 인간'을 소재로 인권의 범위에 대해 이야기해왔으며, 얼마 전부터는 AI의 지적 소유권까지 얘기가 나오고 있다. 하물며 자궁이 몸 안에 있든 바깥에 있든 그게 무슨 대수란 말인가. 이런 시각에서 봤을 때 이 소설의 설정은 오히려 시대착오적일 수도 있다. 하지만 소설에서 '체외인'이라고 쓰인 자리에 다른 단어를 대신했을 때 전혀 괴리가 없음을 깨닫게 된다. 난민, 이주민, 장애인, 성소수자, 빈민, 독거노인, 보호자 없는 미성년자, 가부장제 사회의 여성. 



소설에서 일반인의 임신과 출산은 '도덕과 윤리의 마지막 보루'라고 썼다. 도덕은 시대에 따라 인간이 만든 기준이다. 독자는 개인의 선택이어야할 아주 사적인 임신과 출산조차 도덕과 윤리의 잣대를 들이미는 것에 냉소를 보낼지 모르겠다. 하지만 현재 우리 사회에서 출산을 장려하기 위해 가장 먼저 내미는 카드가 출산 장려금이다. 아이를 키우는 데 돈은 절대적이다. 부인하지 않는다. 하지만 아이를 낳고(혹은 입양하고) 양육을 장려하는 데에 있어서 돈을 우선하는 발상, 그리고 다자녀 가정을 애국자라고 칭찬하는 모습이 소설에서 도덕과 윤리의 잣대를 들이밀어 출산을 강요하는 것과 비슷하게 느껴지는 건 왜일까.  


그리고 가족을 본질적인 가치로 여기며, 체외인처럼 가족이 결여된 인간은 인간으로서 자격 미달이라고 여기지만, 현재 가족의 형태는 점점 다양해지고 있다. 그들의 기준으로 본다면 '완벽한 자격'을 갖춘 인간은 점점 더 줄어들 것이다.


ㅡ 


인간은 본능적으로 자신이 우월해야 안정감(혹은 만족감)을 느끼는 것 같다. 그래서 애써 비교해 구분하고, 차별할 대상을 만든다. 소설에서 체외인과 일반인을 구분하는 기준은 소설이 진행할수록 모호하고 경계도 애매해진다. 일반인으로 승격한 체외인의 정체성은 무엇일까. 체외인을 비하하면서도 그들보다 더 구차한 삶을 사는 일반인은 기꺼이 사회 구성원으로서의 책임감을 감수하려 들까.


​한 사람의 정자에 수백만 아이를 기계로 찍어내듯이 출생했다는 점, 즉 생물학적으로 거의 동일한 인간으로 만들어냈다는 것은 대부분의 인간이 획일적인 삶을 살아가고 있음을 말하는 것으로 읽혔다. 왜인지 우리네 삶이 소설 속 일반인보다 체외인의 삶에 더 가깝게 느껴지는 건 나만의 생각이 아닐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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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랑이 등에서
쥴퓌 리바넬리 지음, 오진혁 옮김 / 호밀밭 / 202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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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으로 폐위된 오스만 제국의 황제 압둘하미드 2세가 테살로니키 알라티니 저택에 유폐된 3년을 다룬 소설이다. 하지만 소설 전체를 놓고 보면 오스만 제국이 한참 혼란스러웠을 때 즉위한 압둘하미드 2세의 삶 전반과 재위 당시 동안 행해졌던 일들, 그의 즉위 전부터 폐위 이후까지의 오스만 제국 내 상황과 그에 앞선 국제적.정치적 배경, 그리고 다민족.다종교.다인종으로 이루어진 오스만 제국의 특성을 압둘하미드 2세와 그의 주치의인 휴세인 대위의 대화를 큰 틀로 삼아 마치 세헤라자데의 천일야화처럼 서술한다. 


소설은 간접적으로 황제 압둘하미드 2세의 두 얼굴을 번갈아가며 보여준다. 탁월한 경제적 감각과 예술을 즐기는 지적인 청년 압둘하미드와 '붉은 술탄' 혹은 '학살자 '늑대'라고 불리는 절대권력자. 타고난 정치적.외교적 수완을 갖춘 유능한 지도자였다가, 신경을 곤두세우고 아무도 믿지 않는 예민하고 피해망상에 허우적대는 늙은 독재자. 더없이 제국과 제국민을 아끼고 비극을 싫어해 예술 공연마다 희극으로 바꾸라고 명하는 술탄이 한편으로는 비열한 방식으로 제 손에는 피 한방울 묻히지 않고 가차없이 학살을 저지르는 살인자이기도 하다. 술탄 메흐멧 2세의 콘스탄티노플 함락을 기념하는 행사가 그리스인들에게 상처가 될 것이라고 허락하지 않으면서도 기독교 교회의 타종은 금지한다. 자신의 폐위로 공주들의 결혼이 무산될 것을 걱정하면서 암살이 두려워 예방 접종은 가족들 중 맨 나중에 맞는다. 자유주의를 꿈꾸지만 비밀경찰과 검열을 통한 전제專制정치로 제국을 통치했다. 이토록 모순적인 인생이라니! 





 



압둘하미드 2세는 황제 계승 순위가 아홉 번째로서 황제가 될 확률이 낮았다. 아버지 압둘메지드 1세가 결핵으로 39세 사망, 작은아버지 압둘아지즈가 폐위 당한 직후 의문사, 형 무라드 5세는 재위 석 달만에 폐위 후 감금 생활 중 사망. 이러니 그의 불안증을 비웃을 일만도 아니다. 


젊은 군의관과 늙은 전 황제의 대화를 읽다보면 압둘하미드 2세가 자신의 국정 운영에 대해 마치 법정에 선 피고인처럼 스스로를 변호하는 것으로 읽히는데 논리적으로 말하는 노련한 늙은 황제에게 은근히 설득당하며 혼란스러워하는 순수한 군의관의 모습이나, 옛 황제와의 대화를 기록으로 남기는 군의관이 혹여 이 사실이 발각될까봐 긴장하고 주변을 경계하는 모습은 늘 암살을 두려워하던 압둘하미드 2세와 겹쳐지는 등 소설 속에서 주로 등장하는 옛 황제와 군의관이 마주하는 장면은 마치 블랙코미디같다. 


소설 후반부 다시 이스탄불로 돌아온 압둘하미드는 어린 시절을 보낸 베이레르베이 궁으로 보내진다. 그곳은 그의 어머니가 결핵으로 죽은 곳이고, 또한 그가 증오하는 장소다. 압둘하미드는 베이레르베이궁으로 가지 않겠다고 버티며 츠라안궁으로 데려다 달라고 부탁한다. 그러나 츠라안궁이 화재로 재가 되었다는 말을 들은 황제는 세상이 바뀌었고, 바뀐 세상에서 자신은 아무것도 아닌 존재라는 것을 깨닫는다. 이 장면은 압둘하미드가 다시 왕자 시절이었던 유년 시절의 장소로 되돌아온 셈인데, 그의 회한이 단 몇 줄로 전해진다. 


ㅡ 


서구의 혁신적인 기술을 인정하고 오스만의 현 주소를 냉철하게 인지하며 문화와 예술을 적극적으로 수용하면서도, 제국의 분열을 막고 서구 제국주의에 대항하기 위해 범이슬람주의를 주창해 이를 명분으로 전제 정치를 시행해 제국 내 갈등을 오히려 부채질한 셈이 되었다. 이미 제국의 땅을 상실하고 국가 재정이 무너지기 시작할 무렵에 재위에 오른 그는 어떻게 해야 했을까.  


배신과 반란, 암살이 난무하는 황실에서 자란 압둘하미드 2세의 피행망상은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소설은 이러한 황제의 불안증을 비롯해 혁명 전후 당시를 해학적으로 그려낸다. 



오스만 제국 말기의 역사 지식이 있으면 좀더 재미있게 읽을 수 있겠으나, 소설에 나와있는 그대로의 압둘하미드를 탐색하는 과정도 흥미로울 것이다. 어쩌면 배경 지식 없이 읽는 것이 압둘하미드라는 사람을 선입견 없이 알아가는 데에는 더 나을지도 모르겠다. 33년 동안 대제국을 쥐락펴락했던 절대권력자. 그러나 한켠에서는 자신의 큰 코 때문에 외모에 자격지심을 가진 그의 모습을 만나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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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이름은 데몬 코퍼헤드
바버라 킹솔버 지음, 강동혁 옮김 / 은행나무 / 202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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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덮고 곧바로 리뷰를 쓰지 않았다. 서른 살도 되지 않은 데몬의 삶의 궤적을 다시 짚어보고 싶었다. 자신을 엄마의 '나쁜 선택'으로 태어났다고 믿는 아이. 아들을 사랑하지만 마약 및 알콜 중독으로 가정을 돌볼 수 없는 엄마. 소설은 이렇게 시작한다.  


1980년부터 1990년대까지(소설은 2000년 초까지 이어진다) 사실상 미국의 서민들이 겪어왔던 사회적 문제들을 고스란히 담아내고 있다. 공공기관의 부정부패, 위탁 가정 및 위탁 가정을 통해 본 사회복지국과 의료 체계의 허점, 정치 기업 의료계의 유착, 청소년 마약 중독, 빈부격차, 유색 인종 및 성소수자 혐오, 힐빌리로 통칭하는 백인 취약계층 차별, 균등하지 못한 교육 제도, 열악한 노동 환경과 과잉노동, 산업 현장의 기계화로 인한 실업, 이 모든 것이 결과로 나타나는 가난과 불운의 대물림.  





 



데몬은 나고 자란 환경에 의해 노력을 통해 얻은 성취에도, 누군가의 인정과 칭찬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스스로를 의심하는 모습을 보인다. 데몬의 영재성을 알아봐준 암스트롱 선생님과 그의 그림에 남다른 재능을 발견한 애니 선생님 말씀에도, 미식축구팀 제네럴스에서 확고하게 자리를 잡고 학교 내에서도 인싸가 되었음에도, 데몬의 자존감은 낮았다. '여전히 자신을 아무 가치 없는 똥 덩어리라고 여겼다. 자신은 언제든 고아 계급으로 돌아가게 되리라 예상하고 그에 걸맞는 평판을 꾸며대려' 했다.  


그러나 독자가 데몬에게서 눈을 뗄 수 없는 이유는 그가 무엇보다 성장을 원했고, 결정적으로 스스로의 삶을 '선택'했다는 사실이다. 그 선택의 결과가 좋든 나쁘든 데몬에게는 삶의 전환점이 된다. 암스트롱과 애니 선생님과의 만남, 할머니 벳시 우들을 찾아낸 일, 부상을 핑계 삼은 자퇴, 도리와의 연애와 동거, 그리고 라이라와의 만남. 


많은 일들이 있었고 수동적으로 이끌려 다니는 순간도 있었지만 결국 자신의 길을 결정한 사람은 데몬, 그 자신이었다. 그 기준이 옳고 그름을 떠나서 페곳 부부를 기다리지 않고 벳시 할머니를 찾아나선 처음 선택부터 주변의 충고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도리를 떠나지 않았던 일, 가까운 이들을 위해 위험을 감수하며 서슴치 않고 나선 행위, 준 이모의 제안을 받아들여 재활 센터로 들어간 일, 앵거스의 조언을 허투루 듣지 않았던 점, 라이라의 도움을 사심없이 수용하고 배움을 얻었던 일. 열악한 환경에서 데몬은 자신의 삶을 능동적으로 헤쳐나갔다. 


ㅡ 


열 살 아이가 자라서 무엇이 되고 싶냐는 질문을 한 번도 받아보지 못한 채 자란다는 건 계속 살아남는다는 뜻이라고 말한 데몬의 주변에 '어른'은 없었다. 위탁 가정을 운영하면서 양육비를 갈취하고 제대로 된 음식과 잠자리도 제공하지 않은 채 아이들의 노동력까지 착취하는 크릭슨과 매코브. 유일하게 마음을 붙일 곳인 페곳 가족의 집은 금지를 당하고, 집도 위탁 가정도 가고 싶지 않은, 그저 아무것도 아닌 존재가 되고 싶은 어린 데몬의 고립은 안타까움, 그 이상이다.  


데몬의 이야기가 흘려 읽히지 않는 이유는 그의 서사가 국가와 도시를 막론하고 지금도 현재진행형이기 때문이다. 가정폭력은 어제 오늘 일이 아니고, 마약 문제는 더 커지고 있다. 우리 주변에도 부모와 분리 조치되어 가족없이 성장기를 보내야하는 아동과 이렇다할 지원없이 자립을 준비해야하는 청(소)년들이 많다. 데몬의 주변에는 그가 흔들릴 때마다 붙잡아주고 도움을 준 사람들이 있었다. 암스트롱과 애니 선생님, 준 이모, 앵거스, 토미, 라이라 등 그들이 없었다면 데몬이 제 삶을 살 수 있었다고 장담할 수 없다. 데몬 역시 에미, 매곳, 토미, 해머를 돕기 위해 적극적으로 몸을 던졌고, 끝까지 도리를 혼자 두지 않았다. 가끔은 우리도 누군가의 '준 이모'가 될 필요가 있다. 


ㅡ  


이 책을 읽기 시작할 때 마침 두 권의 책을 완독한 직후였다. <그들의 슬픔을 껴안을 수밖에> <아빠가 엄마를 죽였어>. 여타 다른 책에서도 발견할 수 있는데, 가정폭력에서 아버지가 자식을 학대하고 폭행하는 데에 어머니가 방관하는 이유는 대체로 세 가지다. 남편의 가스라이팅, 남편에 대한 두려움, 그리고 경제적 능력의 부재. 여러 책을 접하면서 마지막 이유가 가장 자주 등장한다. 우리가 섣불리 방관자 혹은 동조자인 어머니를 비난하기 어려운 점은 이 이유가 한 개인이 해결하기에는 너무 어렵기 때문이다. 소설에서도 데몬의 어머니는 재혼한 남편 스토너에게 딱 한 차례로 아들을 건들지 말라고 얘기하지만, 구타 한 번에 태도를 바꾼다. 여기에는 폭행에 대한 두려움도 있겠지만, 남편의 경제력이 가장 컸을 것이다. 소설에서 다른 선택을 한 머라이어는 아들을 구해냈으나 자신은 12년 동안 감옥에 갇혀 아들과 떨어져지내야만 했다. 


이 소설이 정말 좋은 작품이라고 생각되어지는 지점은 스토리의 힘도 크지만, 한 명 한 명, 빌런을 따라가다보면 거미줄처럼 촘촘하게 엮어진 부정부패의 카르텔이 드러나고 작가는 이를 면밀하게 짚어낸다. 앞서 언급했던 의사 - 제약회사 - 판매상으로 이어지는 마약 루트, 정부가 지원하는 담배 사업의 폐해가 가장 취약한 아동 노동의 착취와 위탁가정로 이어지기까지의 과정 등 이외에도 당시(사실은 현재에도) 사회적 문제와 부조리한 법 제도를 거시적 관점에서 들여다보면서 이를 주인공 데몬의 삶과 밀착해 보여주는데, 결국 이와같은 일들이 우리 삶과 동떨어져 있지 않음을 말하고 있다. 아마도 800쪽이 넘는 소설을 단박에 읽게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지 않을까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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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츠 카프카 : 알려진 혹은 비밀스러운
라데크 말리 지음, 레나타 푸치코바 그림, 김성환 옮김, 편영수 감수 / 소전서가 / 202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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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야말로 카프카에 대해 어렵지 않게, 한눈에 알 수 있는 그래픽노블이다. 이 책은 평전같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카프카 안내서 같기도 하다. 책의 마지막에는 카프카가 머물거나 들렀던 지역과 식당 들 명칭과 카프카가 그곳에서 어떻게 지냈는지 두어줄에 걸쳐 아주 간단하게 적어놓았는데 다른 책에서는 쉽게 볼 수 없는 부분이다.  


<추천의 말>을 통해 이 책이 목적하는 바가 잘 드러난다. 카프카와 그의 작품에 대한 잘못된 혹은 왜곡된 정보를 바로잡고 불충분한 정보를 보충한다고 썼는데, 카프카의 삶의 궤적과 <변신>을 비롯한 몇 개의 단편을 다루면서 문학가를 넘어 인간 카프카에 대해 삽화와 함께 이야기한다. 






프란츠 카프카가 성장했던 당시 프라하의 혼란스러웠던 사회적 배경과 만연했던 유대 민족에 대한 압력과 긴장은 카프카에게도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거기다 가정 내에서 가부장적이고 보수적이었던 아버지와의 불편한 관계는 이미 알려져 있는 사실이다. 그러나 저자는 대중이 알고 있는 것처럼 카프카가 유별난 별종이 아니었음을 짚는다. 카프카는 사람들의 고정관념과는 다르게 지극히 평범한 사람이었다. 극장에 가는 것을 좋아하고, 여행광이었으며, 항공 기술같은 새로운 기술 동향에 민감했고, 스포츠를 멀리 하지 않았고, 정원도 가꾸었다. 비흡연자였고, 건강이 나빠지기 전까지 채식주의자였다. 또한 우정과 사랑에 있어서도 인상적인 만남들이 있었다. 카프카의 마지막 연인이었던 도라가 언급한 에피소드를 읽으면 그는 참 따뜻하고 배려심이 있는 사람이었음을 알 수 있다.이렇게 몇 줄 만으로도 우리에게 익숙한 카프카와는 사뭇 다른 모습이지 않은가.


특히 그의 직장 생활은 정말 의외의 연속이다. 예전에 강의를 통해 그의 직장 생활에 대해 알게 됐을 때 꽤 놀랐던 기억이 있다. 보험 공사에서 근무했던 카프카는 수석 서기관(이 직책은 제1차 세계대전 징집 대상에서 제외되는 사유가 될 정도로 고위직이다)까지 승진할 정도로 성실하고 능력있는 직장인이었다. 심지어 그가 폐결핵 투병 때문에 사직서를 제출했을 때 그의 능력이 워낙 출중해 반려되었다. 그의 소설을 읽다보면 직업인으로서의 경험들이 작품 속에서 보여진다.   



저자가 지적하는 점 중에서 새삼 눈에 들어온 부분은 카프카의 친구인 막스 브로트가 카프카 사후 출판한 작품들이 막스 브로트의 시선으로 본 것임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고 쓴 부분이다. 카프카의 이미지와 유산을 막스 브로트의 독자적인 시선에 따라 재해석한 것으로도 볼 수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이 부분에 대해서는 브로트가 '아메리카'로 출판한 <실종자>가 대표적인 사례가 아닐까싶다. 제목도 그렇지만 내용의 결말도 사뭇 다른 방향으로 전환된 것으로 알고 있다).


자신이 죽은 뒤 미출간 작품을 모두 불태워달라는 카프카의 부탁을 묵살하고 소설뿐 아니라 일기, 편지, 전기 등을 출간한 막스 브로트에 대한 이야기는 알만한 사람은 다 아는 사실이다. 어떤 의도였는지 그의 진짜 속내야 알 수 없지만, 사후 노골적으로 카프카의 유명세를 이용한 지인들도 있었다는 점에서 개인적으로 아주 순수하게만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2015년 6월, 이스라엘 대법원은 카프카의 모든 문학적 유산을 지닌 막스 브로트 비서의 딸(이 부분도 참 납득이 안 되기는 마찬가지)로 하여금, 모든 문서가 담긴 가방을 예루살렘의 국립 도서관으로 넘겨야 한다고 판결했다. 이 문서에는 미출간된 원고와 단편소설에 포함된 스케치 그리고 카프카의 알려지지 않은 드로잉들이 포함되어 있을 것으로, 저자는 짐작한다. 


체코 문화에 적응하기 어려워했음에도 일생의 대부분을 프라하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던 카프카는 자신의 인생이 프라하라는 원 안에 담겨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정작 체코 문학계에서 그의 작품이 자리를 찾아가는 길은 녹록치 않았다. 그 과정을 짧게나마 읽으면서 문득 앞서 서술한 카프카 작품의 소유권에 대한 내용이 다시 생각났다. 예전부터 이스라엘이 카프카의 모든 문학적 유산을 주장하는 데에 대해 의구심이 들었는데, 체코는 어떤 입장을 취했는지 궁금해었더랬다. 카프카의 유산이 개인의 것이 아니라면 그의 작품은 어디에 귀속되는 것이 적절할까.  



소음에 민감한 카프카가 글을 쓰기 위해 조용한 장소를 필요로해서 이사를 자주 다녔다. 많은 이사 끝에 그가 안착한 집은 <황금 골목 22>. 단편집 『시골 의사』에 수록된 거의 모든 작품을 이곳에서 완성했다. 당시에는 조용한 지역이었지만, 지금은 유명세로 수천 명의 관광객이 다녀가는 곳이다. 저자는 카프카를 찾는 관광객들 중에서 카프카의 진정한 영혼을 들여다볼 수 있는 사람이 얼마될지, 작품뿐 아니라 인간 카프카를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이 있을지 묻는다. 그 물음에 대한 답은 저자가 직접 책의 다른 지면에 써놓았다. 


"본질적으로 카프카는 이 세계와 갈등을 겪었고, 아직까지도 세계는 여전히 그와 갈등을 겪고 있다."  


 "우리는 카프카의 모든 작품을 속속들이 다 이해할 수 없다. 또한 카프카도 모두 다 이해하라고 쓰진 않았을 것이다."  



ㅡ 


대략 6,7년 전쯤에 1년 가까이 재미삼아 문학 강의를 들은 적이 있었다. 현장 강의도 있었고, 온라인 강의도 있었는데 내가 선택한 대부분 작가들은 러시아 작가들이었는데 그중 몇 안 되는 유럽 작가 중 한 사람이 카프카였다. 3회(카프카 강의 횟수가 정확하게 기억나진 않지만)에 걸친 강의가 지루한 줄 모르고 재미있었다. 이 책은 그 몇 시간짜리 강의의 요약본이라고 생각해도 될 것 같다. <변신>의 그레고르 잠자, <소송>의 요제프 K의 모습이 카프카의 전부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 도서지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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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우슈비츠의 자매 - 나치에 맞서 삶을 구한 두 자매의 실화
록산 판이페런 지음, 배경린 옮김 / arte(아르테) / 202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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홀로코스트에서 생존한 유대인 두 자매의 실화를 쓴 이 이야기는 제2차 세계대전 발발 직전부터 종전까지 유대인들의 삶의 궤적을 보여주는 것을 넘어서 네덜란드를 배경으로 나치당이 유럽의 국가 함락, 정부 및 유대인 공동체 장악, 시민 사회로부터 유대인 분리 고립, 파시스트 프로파간다, 인종 학살을 하기까지의 과정 및 방식, 그리고 나치당을 향한 유대인을 포함한 민간인 저항 운동이 비교적 구체적으로 쓰여있다. 온라인 서점에서는 이 책을 '에세이'로 분류했는데 개인적으로 두 여성의 전기에 가까운 책이라고 생각한다.  





 

낙천적이며 예술적 재능을 타고 난 언니 린테 브릴레스레이퍼르, 현실적이고 타고난 반골 기질과 뚝심있는 강인한 성품의 동생 야니 브릴레스레이퍼르.  


야니가 정부 방침을 강력하게 거부했다면, 린테는 순순히 따랐다. 린테가 매번 희망을 기대했다면 야니는 희망은 없다고 여겼다. 네덜란드의 16만 유대인 신분증에 J표식이 새겨졌을 때 야니는 이를 거부했고, 상황을 낙관적으로 본 린테는 정부 방침에 순응했다. 기질을 떠나서 브릴레스레이퍼르 삼남매는 저항활동에 적극적으로 투신하는데, 이후 이들의 삶을 따라가보면 하이네스트에서 체포되기 전까지 그야말로 천운이 따랐다는 생각이 들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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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의 인상적인 부분은 아무래도 <2부 하이네스트>이다. 2부에서는 전쟁 중에도 마치 별천지 같았던 하이네스트와 유대인 수용소를 대비시킨다.  


아무리 외딴 지역에 요새같은 여름별장이라고 하더라도 친 나치 지역 한가운데에서 꽤 오랜 시간을 브릴레스레이퍼르 가家의 대가족뿐만 아니라 도망자들의 은신처였고, 거기다 저항운동 거점 역할을 했다는 사실은 놀라운 일이다. 그들은 그곳에서 가족, 친구와 동지, 도망자들과 함께 노래와 춤을 즐기고, 피아노를 연주하고, 숲이 주는 계절의 아름다움을 누렸다. 그들은 작은 이벤트를 마련했고, 서로를 격려하고 의지했다.  
나치가 유대인을 가득 실은 기차를 수용소로 보내던 1943년, 하이네스트에서는 이디시 문화와 더불어 다양한 예술이 꽃피기 시작했다. 춤, 연주, 노래, 낭독회가 끊이지 않았다. 이렇게 소란스러웠음에도 나치와 독일군, 부역자 이웃들까지, 어느 누구도 이 많은 사람이 하이네스트에 오간다는 사실을 꿈에도 알지 못했다. 하이네스트의 배반자가 나타나기 전까지는.  




3부에서는 하이네스트에 은신해 있던 모든 사람들이 가택 수색으로 체포된 후 수용소 생활을 본격적으로 서술하고 있다.  


베스테르보르크 - 아우슈비츠 - 베르겐-벨젠으로 이어지는 수용소 생활에 대한 처참한 실상은 다른 문헌에서 익히 알고 있는대로 참혹하기 그지없다. 공장식 학살 시설이었던 아우슈비츠만이 지옥이었을까. 베르겐-벨젠에는 '화덕'은 없었지만, '방치'가 있었다. 온갖 역병이 돌고, 산 사람과 죽은 사람과, 쥐가 뒤섞여 있는 그곳은 인간 존엄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그야말로 생매장 당하는 무덤이었다.  


베르겐-벨젠에서 브릴레스레이퍼르 자매와 프랑크 자매를 비롯한 아홉 명의 여자들은 서로를 돌봤다. 물리적인 것뿐 아니라 정서적인 측면에서도 위로를 하며 정신적으로 버팀목이 되어 주었다. 자매는 지옥같은 상황에서 동맹을 맺고 연대할 수 있는 이들을 찾아나선다. 위에서 '천운'이라고 썼지만 그 천운은 자매 스스로 만들어낸 결과일지도 모른다.  


린테에게 죽음이 다가오면 야니가 그 앞을 막아섰고, 야니가 죽음의 덫에 걸려들라치면 린테가 잡아끌었다. 그들이 살 수 있었던 것은 서로가 있었고, 남편과 아이가 살아있을 것이라는 희망때문이었다. 그들, 자매를 비롯한 생존자와 저항자 들의 삶 자체가 기적이다. 



우리가 그동안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점이 유대인 저항운동가에 대한 부분임을, 이 책을 통해서 깨달았다. 유대인 표식을 거부하고, 본인조차 한 치 앞의 나락을 알 수 없는 상황에서 독일군 점령지 한가운데를 들락거리며 위조 신분증을 만들어 다른 유대인의 은신과 탈주를 도모한 유대인들. 신념과 소신에 따라 제국주의 전쟁을 거부하고 탈영해 도망자가 되어 정치범으로 낙인 찍힌 사람들. 그안에는 우리가 알지 못하는 많은 예술가와 문학가들도 있다.  



이 책을 읽으면서 가슴을 눌러내린 답답함이 있었다. 현재 여기저기에서 벌어지는 전쟁과 그에 따른 수많은 난민들이 동시다발적으로 떠올려졌기 때문일 것이다. 발가벗겨져 가스실에 밀어넣어지고 정원에 몇 십 배에 달하는 막사에 짐승처럼 구겨져 들어가 죽음을 기다리는 그들의 모습. 어린이 병원과 난민촌에 폭격을 가해 무너진 콘크리트 더미가 가스실과 다르다고할 수 있을까.  


잠깐이나마 낭만적이라고 느껴졌던 '하이네스트'.
나날이 발전하는 살상무기 때문에 이제는 어디에서도 '하이네스트'는 존재할 수 없다.




※ 도서지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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