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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죽음 ㅣ 열린책들 세계문학 49
짐 크레이스 지음, 김석희 옮김 / 열린책들 / 2009년 12월
평점 :
N25052
"<행복한 죽음>을 그렇게 쉽사리 강탈당히는 결과를 자초한 것은 너무 무책임했다. 고통과 노년의 유동적인 세계에 도달할 때까지 기를 쓰고 나아갔어야 했다. 꿋꿋하게 참고 견뎌서, 침대에서의 편안한 죽음이라는 정당한 보상을 받으려고 애썼어야 했다."
가끔 죽음을 생각한다. 어떻게 살것인가도 중요하지만 어떻게 죽을것인가도 중요하다. 당장 내일 무슨일이 있을지도 모르는데, 죽음의 순간을 예측하기란 쉽지 않다. 그래도 갑작스럽게 죽고 싶지는 않다. 마지막이 다가왔을때 마음을 준비할 시간, 정리할 시간, 작별의 시간이 주어지길 바랄 뿐이다.
짐 크레이스의 <그리고 죽음>은 내가 생각하는 죽음과 정반대인, 최악의 죽음을 그리고 있는 작품이다. 직전에 읽은 한강작가님의 <작별>이 정신적으로 아름다운 죽음을 보여준다면, <그리고 죽음>은 육체적으로 적나라한 죽음을 보여준다. 이런게 죽음이라고?
[여러분이나 나 같은 동물의 수명은 겨우 90년입니다. 거북보다 휠씬 짧지요. 우리는 거북보다 먼저 죽어야 합니다. 그건 틀림없습니다. 우리는 거북보다 먼저 죽도록 프로그램되어 있으니까요. 우리의 탄생은 죽음으로 들어가는 관문일 뿐입니다. 갓난아기가 태어날 때 큰 소리로 우는 것은 바로 그 때문이지요. 이 말을 필기하지 마세요. 사람은 살기 시작하는 순간 죽기 시작합니다. 삶은 자궁에서 시작되는 내리막길, 정자가 난자를 만나 달라붙는 순간부터 시작되는 내리막길입니다.] P.49
작품은 시작부터 강렬하다. 주인공인 50대 부부인 남편 조지프와 아내 셀리스가 죽어있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인적이 없는 바닷가 모래언덕 뒤에서 옷을 입지 않고 있는 두 부부가 육체가 심하게 회손된 상태로 죽어있었던 것이다. 도대체 부부는 거기서 뭘하고 있었던 걸까? 왜 옷을 벗고 있었던 걸까? 누가 죽인 걸까? 이후 왜 그들이 거기에 갈 수 밖에 없었는지 왜 죽을 수 밖에 없었는지, 어떻게 발견된건지 과거와 현재의 시간이 변하면서 이야기는 진행된다.
[그런데 하고 많은 부부들 중에 하필이면 그 두 사람이. 세상에 있을 법하지 않은 열정의, 세상에 있을 법하지 않은 희생자가 되어, 속옷도 입지 않은 채 두개골이 함몰된 그런 꼴로 발견되다니, 이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 그만한 나이에 그만한 학식을 가진, 볼품이라곤 없는 남녀가 야외에서 섹스와, 그리고 살인과 맞닥뜨리게 될줄 어느 누가 생각이나 했겠는가?] P.9
30년전 부부는 자신들이 살해된 그 장소에 있었었다. 당시 부부를 포함한 생물학자 여섯명(남4, 여2)은 이곳 근처의 연수원에서 처음 만났다. 혈기왕성한 20대 생물학자들은 자신들의 연구분야인 생물과 별반 다를게 없었다. 연구와는 별개로, 혈기왕성한 성욕을 억제하지 못하고 짝짓기에 몰두하고 있었다. 사실 남편 조지프에 대한 아내 셀리스의 첫인상은 안좋았다. 남편은 겉보기에도 남자답지 않아 보였고 범생이처럼 보였기 때문이었다. 아내 셀리스는 다른 남자들을 욕망하였지만 그들은 셀리스보다는 다른 여성 생물학자인 페스타에게 더 관심을 보였다.
어찌어찌하여 조지프와 셀리스는 눈이 맞게 된다. 그냥 그렇게 끝났으면 다행인데 문제가 생긴다. 그들의 방관 혹은 사소한 실수로 큰 사고가 발생하여 동료중 한명이 죽은 것이다. 게다가 큰 사고가 일어난 순간에 두 부부는 자신들이 (미래에) 죽는 모래언덕에서 사랑을 나누고 있었다. 이 사고는 아내인 셀리스에게 트라우마를 남기지만 남편인 조지프에게는 아니었다. 그는 첫사랑이었던 아내와 사랑을 나눴던 그 모래언덕을 소중한 추억의 장소로 생각해서 사고가 난 이후에도 혼자서 찾아가곤 했던 것이었다.
[그는 언제나 아내와 함께 해안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당연하다. 첫 만남이 최고다. 바리톤만에 갑시다. 옛 추억을 위해서. 죽기 전에. 그는 수천 번이나 제의하곤 했다. 그러나 셀리스는 단 한 번도 동의하지 않았다. 조지프를 만난 그 주일과 그들의 첫 섹스를 회상하는 것조차 좋아하지 않았다. 그 주일을 생각하면 페스타와 화재가 생각났기 때문이다. 열정이 어떻게 사람을 죽일 수 있는지, 사랑이 어떻게 불을 지를 수 있는지를 새삼 기억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P.180
30년 후 그들은 자신들의 사랑이 시작된 곳이지만, 타인이 비극으로 끝난 그 모래언덕을 찾아간다. 그르고 거기서 살해당한다. 책을 읽어나가다보면 왜 그들이 갑자기 거기에 간건지 이유가 나온다. 모래언덕에서 아내 셀리스의 성욕으로 인해서 두 사람이 사랑이 시작되었다면, 30년 후 남편 조지프의 성욕으로 인해 두 사람의 사랑이 끝난 것이었다.
[그들의 이력은 확정되있다. 앞으로 일어 날 일은 아무것도 없다. 덧붙일 것도 없다. 그들이 죽은 날짜는 기록되었고, 그것은 결코 지울 수 없다. 아무것도 바뀌거나 수정될 수 없다. 그것을 바꿀 수 있는 것은 죽지 않은 이들의 심정이나 그들이 지어내는 신화뿐이다. 그것이 세상이 존재하는 유일한 <최후의 심판일>이다. 뒷궁리가 주는 이익. 죽은 사람들 자신은 추억을 박탈당한다. 그들은 자신의 죽음을 이해할 필요가 없다.] P.194
두 사람은 모래언덕에서 서서히 썩어간다. 다양한 생물들은 그들을 부패시킨다. 죽은 그들에겐 더이상 존엄이 없다. 그저 죽은 생물체이자 생태계의 일부일 뿐이었다. 딸인 실비는 연락이 안되는 부모를 찾아 나선다. 처음에는 걱정하지 않았지만 점점 죽음을 예감한다. 결국 경찰이 바닷가에서 썩어가는 부부를 발견한다. 딸인 그녀는 부모의 비참한 죽음을 상상이나 했을까? 그러나 실비는 엄청 슬퍼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부모의 죽음으로 해방을 느낀다. 이또한 죽음의 아이러니 인걸까?
[살인 사건이 일어난 지 아흐레째 되는 날 해질 녁에는 그곳에 뿌려진 생명과 사랑의 흔적들은 모두 사라졌다. 자연계가 홍수처럼 되돌아왔다. 우주의 화려함이 되돌아왔다. 모래 언덕에 잠시 머문 조지프와 셀리스의 몸에서 흘러나온 피가 흙 속에 남아 있다 해도, 그것은 풀의 활기 찬 속삭임을 북돋워 줄 뿐이다.] P.209
살해 과정과 사체가 부패되는 과정에 대한 묘사가 적나라해서 막 추천하기에는 꺼려지는 작품이지만 내용 자체는 흥미로웠다. 새로운 스타안의 책을 만나고픈 분들에게만 추천하고 싶다. 어차피 인간도 생명체일 뿐이다. 죽으면 결국 생태계의 일부분일 뿐이다. 그래서 살아있을때 즐겁고 행복하게 살자. 죽음도 잘 준비하고. 죽으면 다 끝이니까. 죽음은 모든 생물에게 공평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