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이리 읽으면서 아픈지 모르겠다..

투명하게 사라져버린 새를 새라고 부를 수 있을까? - P7

모든 별은 태어나서 존재하다가 죽는다. 그것이 별의 생리이자 운명이다. 인간의 몸을 이루는 모든 물질은 별로부터 았다. 별들과 같은 생리와 운명을 배고 태어난 인간은 별들과 마찬가지로 존재하다가 죽는다. 다른 것은 생애의 길이뿐이다. - P17

나에게 중요한 건 그리는 순간이니까. 그게 전부니까. - P28

내 어머니의 손을 닮았던 삼촌의 손을 기억한다. 인주의 집에서 처음 삼촌을 만난 날, 저런 손을 가진 남자도 있구나, 생각하며 놀랐다. 먹이 묻은 손, 음식을 만드는 손, 뜻 없이 인주의 머리를 쓰다듬는 손, 살결이 거칠어 보이는 손, 푸릇한 멍들이 손등에 앉은 손, 무언가를 많이 참아본 사람의 손, 불현듯 내 손을 뻗어 크기와 온기를 재보고 싶던 그 손. - P49

난 말이지, 정회야, 사랑한다는 말을 들으면 이상한 기분이 들어. - P52

나를 사랑한다는 그 어떤 남자의 말은, 자신을 사랑해달라는 말일 수도 있고, 나를 오해하고 있다는 말일 수도 있고, 내가 그를 위해 많은 걸 버려주길 바란다는 말일 수도 있지. 단순히 나를 소유하고 싶거나, 심지어 나를 자기 몸에 맞게 구부려서, 그 변형된 형태를 갖고 싶다는 뜻일 수도 있고, 자신의 무서운 공허나 외로움을 틀어 막아달라는 말일수도 있어. - P52

그러니까. 누군가 나를 사랑한다고 말할 때, 내가 처음 느끼는 감정은 공포야. - P53

당신에 대한 기억은 어떻게도 단언할 수 없다. 모른다고밖에는, 모든 것이 덩어리로 다기왔다고 밖에는. 스며들고 빈저갔다고밖에는. 당신의 그림속에 떨고 있던 모세혈관들치럼. - P63

누군가의 죽음이 한번 뚫고 나간 삶의 구멍들은 어떤 노력으로도 되살아나지 않는다는 것을. 차라리 그 사라진 부분을 오랫동안 들여다보아 익숙해지는 편이 낫다는 것을 그때 나는 몰랐다. 헤아릴 수 없는 시간을 그것으로부터 떨어져나오기 위해 달아나고, 실제로 까마특히 떨어져서 평생을 살아간다 해도, 뚫고 나간 자리는 여전히 뚫려있으리란 것을, 다시는 감쪽같이 오므리들 수 없으리란 것을 몰랐다. - P64

이 상황의 모든 것이 이상한 비현실감을 띠고 물러서는 것을 나는 느낀다. 그가 체머리를 떨며 담배에 불을 붙이는 불과 몇 초의 시간동안 깨닫는다. 두렵지 않다는 것을. 내 삶이 얼마나 헐벗어 있었는지를. 잃거나 부서질 것을 겁낼 어떤 귀중한 것도 가지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 P117

확신할 수 있는 것 따윈 없어
확신할 수 있는 건 모두 죽었어. 썩어서 사라졌어. - P144

한번도 종교를 가져본 적 없지만, 알 수 없는 누군가에게 기도해본 적은 있습니다. 가장 많이, 간절하게 기도한 내용은 죽게 해달라는 것이었습니다. 기도를 들이주는 누군가가 정말 존재했다면 난 이미 여러번 죽었을 겁니다. 지금 내가 살아 있다는 건, 그때마다 내가 그만큼 더 강하게 살아 있길 택했다는 걸 뜻합니다. 이건 말장난이 아닙니다. - P146

내가 아픈 곳은 달의 뒷면 같은 데에요. 피 흘리는 곳도, 아무는 곳도, 짓무르고 덧나는 곳, 씩어가는 곳도 거기에요. 당신에게도, 누구에게도... 나 자신에게도 보이지 않아요. - P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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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대로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316
버지니아 울프 지음, 이미애 옮김 / 민음사 / 201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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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25037

"내일 날이 맑지 않더라도...내일은 또 다른 날이 될 거야."


어느날 과거의 특정 순간의 기억이 떠오르는 경우가 있다. 똑같은 장소에 다시 갈 때, 혹은 어떤 생각을 할 때, 혹은 음악을 들을 때 그런 일이 종종 발생한다. 그때 그랬었지, 그때 누군가를 좋아했었지, 그때 정말 기뻤거나 슬펐던 과거의 감정들. 과거의 나는 미래의 내가 이 순간을 애뜻하게 떠올릴 줄 알았을까? <등대로>를 다 읽고 나서 든 생각이다.


<등대로>는 큰 사건 없이 이야기가 진행된다. 줄거리를 보자면, 과거에 등대에 가려고 했으나 날씨기 안좋아 등대를 못갔었고(1부), 이후 많은 시간이 흘러 많은 것이 변하고 많은 사람들이 죽고 사라졌지만(2부), 현재 살아남은 사람들이 이번에는 등대에 가려고 하는(3부) 이야기이다. 줄거리만 보면 엄청 간단한데 결코 쉽게 읽을 수 있는 작품은 아니다.


버지니아 울프 작품답게 문장들은 의식의 흐름 기법으로 쓰여있고, 주인공 격인 렘지부인, 릴리 뿐만 아니라 등장인물 모두 자신들의 생각을 늘어놓는다. 게다가 타인에 대한 감정은 시도때도 없이 바뀌고 이에 맞춰서 화자도 계속 바뀐다. 텍스트만 따라 읽다보면 이해가 안되는 부분이 생기기도 했다.

[바로 지금, 고통스럽게도 인간관계의 불완전함, 가장 완벽한 관계에도 흠이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남편을 사랑하면서도 진실에 대한 본능적 갈구 탓에 진실을 직시하려 하지만 견딜 수 없던 바로 그 순간에, 고통스럽게도 자신의 무가치함이 입증되었다고 느끼고 이런저런 거짓과 과장 탓에 자신에게 주어진 역할을 하지 못했다고 느끼는 순간에, 고양된 기분의 여파로 이처럼 비참하게 초조해진 바로 이 순간에, 카마이클 씨는 노란 슬리퍼를 신고 발을 질질 끌며 지나가고 있었고, 내면의 어떤 악마적 충동으로 그녀는 지나가는 그를 소리쳐 부를 수밖에 없었다. ] P.86




머리속에 있는 생각을 모두 글로 끄집어 내어 한편의 그림처럼 묘사한 작품이 <등대로>라고 할 수 있겠다. 나는 <등대로>를 읽으면서 각 파트별로 같은 장소에 대한 세편의 그림을 그려봤다.


1부 : 창

일몰이 조금 지난 저녁 시간, 별장의 창밖으로 바다가 보인다. 그리고 바다 한가운데 등대가 있다. 그 등대 주위로 파도가 높게 친다. 별장 옆으로는 몇명의 어른과 아이들이 거닐고 있고, 별장 안에서는 만찬이 이뤄지고 있다. 어른들의 표정은 지극히 현실적이고, 아이들의 표정에서는 실망이 엿보인다. 그리고 아이들 옆에있는 엄마는 아이들을 달래고 있다. 등대를 가고싶어 하는 아이들, 그리고 날씨가 안좋아 등대에 갈 수 없다고 단정짓는 어른들.

[그날 오후에 다른 일로 이미 느꼈던 것처럼 사물에는 응집성과 영속성이 있다. 덧없이 흘러가고 사라지고 유령처럼 형체를 잃어버리는 것에 맞서 변화를 초월한 어떤 것이 루비처럼 빛을 발한다는 뜻이다.(그녀는 반사된 빛이 잔물결을 일으키는 창문을 힐끗 바라다보았다.) 그래서 오늘 밤에 다시 그녀는 이미 낮에 한 번 느꼈던 감정, 평화로움과 평안함을 느꼈다. 앞으로 영원히 지속되는 것은 이런 순간들로 이루어진다고 그녀는 생각했다. 이 순간이 남을 것이다.] P.234




2부 : 세월이 흐르다

밖은 한밤 중이며, 집안은 적막이 느껴진다. 가족들은 촛불을 켜놓고 테이블 주위에 모여 있다. 이젠 더이상 아이들이 아닌 청소년들 처럼 보이는데, 숫자도 줄고 표정도 좋지 않다. 하지만 별장의 바깥에는 여전히 등대가 보인다. 희미하지만 빛나는 빛을 비춘다. 파도는 어둠에 가려 보이지는 않는다. 좋은 날씨일까, 나쁜 날씨일까. 엄마의 모습은 보이지 않고, 아빠의 모습은 어딘지 외로워 보인다.

[램지 씨는 어느 어둑한 날 아침에 비틀거리며 복도를 따라 걷다가 양팔을 내밀었다. 하지만 그가 팔을 내민 전날 밤에 램지 부인이 다소 갑작스레 죽었기에, 그의 팔은 텅 빈 채로 남고 말았다.] P.287

[그해 여름 프루 램지는 출산 중에 죽었다. 정말 비극적인 일이라고 사람들은 말했다. 그녀보다 더 행복해야 할 사람은 없었다고 사람들은 말했다.] P.297

[포탄이 폭발했다. 프랑스에서 청년 이삼십 명이 포탄에 맞았고, 그중에 앤드루 램지가 끼어 있었다. 다행히도 그는 즉사했다.] P.299




3부 : 등대로

해가 떠 있고 별장의 창 밖으로 등대가 보인다. 하지만 이번에는 등대 주위의 파도가 잔잔하다. 그리고 등대 주위에 작은 배가 한척 보인다. 그곳에는 대여섯명의 사람이 타고 있는데 아마 등대로 향하는 것 같다. 그리고 그 등대와 작은 배를 그리고 있는 한 여인이 보인다. 한 가족이 등대로 가기 까지의 우여곡절을 다 보고 있었던 건까? 장소는 그대로다. 등대는 계속 거기에 있었다. 다만 시간이 흘렀을 뿐이고 많은 것이 변했다. 사람도, 감정도 말이다. 그래서 옛시절이 그립다. 변한게 없었다면 그리울게 있겠는가.

[그녀는 그림을 보았다. 어쩌면 그림이 그의 답일 것이다. '당신’과 '나’ 그리고 '그녀’가 지나가고 사라진다는 것, 그 무엇도 지속되지 않는다는 것, 모든 것이 변한다는 것, 그러나 단어들이나 그림은 그렇지 않다는 것. ] P.401



예전에 열린책들 버젼으로 등대로를 처음 읽었고, 이번에 민음사 버젼으로 다시 읽었는데, 확실히 재독하니까 안보이던게 보이고 훨씬 이해하기도 쉬웠다. 괜히 명작이 아니었다. 다음번에는 <댈러웨이 부인>을 재독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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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넬로페 2025-04-24 19:3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등대로, 정말 좋게 읽었어요.
여성의 삶은 시대와 장소에 상관없이 비슷한 것 같아요.
램지부인과 앤드류 램지의 죽음과 그 이후 남겨진 가족의 삶이 슬퍼더라고요.

새파랑 2025-04-25 16:12   좋아요 1 | URL
예전에는 버지니아 울프 많이 읽던데 요즘은 버지니아 울프에 대한 관심이 줄어든거 같습니다~!
언제나 남겨진 사람은 슬픈거 같아요 ㅜㅜ

희선 2025-04-25 03:5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시간이 흘러서 바뀌는 것도 있지만, 그대로인 것도 있겠습니다 등대는 그대로겠네요 예전보다 낡았겠지만... 날씨가 안 좋아도 갈 수 있었을지도 모를 텐데 싶기도 하네요


희선

새파랑 2025-04-25 16:13   좋아요 1 | URL
이 책은 바뀌지 않는 것들에 대해 이야기 하는거 같아요. 사소하지만 인상깊었던 그 순간은 남아 있을거라는.. 인상 깊은 작품입니다~!!!
 

처음 읽는 12월 12일, 대단하다.

"세상이라는 것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 같은 것은 아니라네." - P20

‘세상이란 그런 것이야. 네가 생각하는 바와 다른 것, 때로는 정반대되는 것, 그것이 세상이라는 것이야!’
이러한 결정적 해답이 오직 질풍신뢰적으로 나의 아무 청산도 주관도 없는 사랑을 일약 점령하여 버리고 말았다. 그 후에 나는 네가 세상에 그 어떠한 것을 알고자 할 때에는 우선 네가 먼저,
‘그것에 대하여 생각하여 보아라. 그런 다음에 너는 그 첫 번 해답의 대칭점을 구한다면 그것은 최후의 그것의 정확한 해답일 것이니.’ - P21

불행한 운명 가운데서 난 사람은 끝끝내 불행한 운명 가운데서 울어야만 한다. 그 가운데에 약간의 변화쯤 있다 하더라도 속지 말라. 그것은 다만 그 ‘불행한 운명’의 굴곡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 P22

M 군! 살길을 찾아서 고향을 등지고 형제를 떨치고 친구를 버리고 이곳으로 더듬거려 흘러온 나는 지금에 한 분밖에 아니 계시던 어머님을 잃었네그려! 내가 지금 운명의 끊임없는 장난을 저주하면 무엇을 하며 나의 불효를 스스로 뉘우치며 한탄한들 무엇을 하며 무상한 인세에 향하여 소리 지르며 외친들 그 또한 무엇하겠나! 사는 것도 죽는 것도 모두가 허무일세. 우주에는 오직 이 허무 외에는 아무것도 없는 것일세. - P35

친구를 잃은 슬픔은 어느 결에 사라졌는가. 지금에 나의 가슴은 고향 땅을 밟을 기쁨, 친구를 만날 기쁨, 형제를 만날 기쁨, 이러한 가지의 기쁨들로 꽉 차 있네. 놀라거니와 나의 일생에 있어서 한편으로는 양심의 가책을 받아가면서라도 최근 며칠 동안만큼 기뻤던 날이 있었던가를 의심하네. - P93

남의 것을 거저—남의 것을 거저 갖지 않았느냐—비록 그 사람은 죽어서 이 세상에 있지 않다 하더라도—그의 유서가 그것을 허락하였다 할지라도—그의 유산의 전부를 거리낌이 없을 만치 그와 나는 친한 사이였다 하더라도—나는 그의 하고많은 유산을 거저 차지하지 않았느냐. 남의 것을—그는 아무리 친한 사이라 하더라도 남이다—남의 것을 거저, 나는 그의 유산의 전부를—사회사업에 반드시 바쳤어야 옳을 것을—남의 것이다—상속이 유언된 유산—거저—사회사업—남의 것 - P100

"내 생각 같아서는 그건 내 생각이지만 그렇게 두고 고생할 것 없이 병신 되기는 다— 일반이니 아주 잘라버리는 것이 좋을 것 같소. 저 내가 아는 사람도 하나, 그 이야기는 할 것도 없소만—어쨌든 그것은 내 생각에는 그렇다는 말이니까 당신보고—자르라고 그러는 말은 아니오만—하여간 그렇다면 퍽 고생이 되겠는데—" - P104

"글쎄 말씀이야 좋은 말씀이외다만 원 아무리 고생이 된다 하더라도 어떻게 제 다리를 자르는 것을 제 눈으로 뻔히 보고 있을 수가 있나요?" - P104

"저 오늘이 며칠입니까?"
"12월 12일."
"12월 12일! 네— 12월 12일!" - P119

아까 그 신사나 따라갈 것을! 차라리!’
어찌하여 이런 생각이 들까 그는 몇 번이나 생각하여 보았다. M 군과 T는 나를 얼마나 반가워하여 주었느냐—나는 눈물을 흘리기까지 아니하였느냐—업의 손목을 잡지 아니하였느냐—M 군과 T는 나에게 얼마나 큰 기대를 가지고 있지 아니하냐—나는—그들을 믿고—오직—이곳에 돌아온 것이 아니냐—
‘아— 확실히 그들은 나를 반가워하고 있음에 틀림은 없을까? 나는 지금 어디로 들어가느냐. - P126

사람은 속이려 한다. 서로서로—그러나 속이려는 자기가 어언간 속고 있는 것을 깨닫지 못하는 것이다—속이는 것은 쉬운 일이다. 그러나 속는 것은 더 쉬운 일이다—그 점에 있어 속이는 것이란 어려운 것이다. 사람은 반성한다. 그 반성은 이러한 토대 위에 선 것이므로 그들은 그들이 속이는 것이고 속는 것이고 아무것도 반성치는 못한다. - P127

인생은 결코 실험이 아니다. 실행이다. - P135

다달이 나는 분명히 T의 아내에게 그것을 전하여 주었거늘! 그것이 다시 돌아오지 아니하기 시작한 지가 이미 오래거든—그러면 분명히 T는 그것을 자기 손에 다달이 넣고 써왔을 것을—T의 태도는 너무 과하다—극하다. - P164

남의 사랑을 받는 것은 행복입니다—남을 사랑하는 것은 적어도 기쁨입니다. 남을 사랑하는 것이나 남의 사랑을 받는 것이나 인간의 아름다움의 극치이겠습니다. - P1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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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렵지만 대단한 작품이란걸 그냥 느낄 수 있었다.


일이 꼬이기 시작한 건 그때부터다. 서씨는 사실 그 시점에서 모든 것을 털어놓은 셈이다. 그런데도 나는 그 사실을 제대로 알아차리지 못하고 홀리듯이 서씨의 말 속으로 빠져들었다. 내가 마음의 끈을 놓치고 전혀 다른 방향으로 들어가게 된 것은 그 때문이다. 다른 방향으로 들어갔으나 결국에는 다시 돌아올 수 밖에 없는 그런 길이었다. - P61

하지만 여기에서 모순점이 나온다. 과연 서혁민이 칠십 평생 동안 완벽하게 이상의 삶을 흉내내 자신의 삶을 창작해내고 그를 이상을 찾아서라는 수기로 남겼다면, 이 수기를 일러 과연 완벽한 창작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자, 여기에 이 사건의 본질이 숨겨져 있다. 먼저 창작된 삶이 존재하고 그를 반영한 이상을 찾아서가 있다. 그 창작된 삶은 이상을 찾아서에 들어오지 않는다. 이때 이상을 찾아서는 완벽한 창작인가, 진실을 담은 회고록인가? 창작이라면 이 수기가 보증하는 그 데드마스크는 가짜이고 회고록이라면 그 데드마스크는 진짜다. - P88

사람이 비밀이 없다는 것은 재산 없는 것처럼 가난하고 허전한 일이다. - P140

불행한 운명 가운데서 난 사람은 끝끝내 불행한 운명 가운데서 울어야만 한다. 그 가운데에 약간의 변화쯤 있다 하더라도 속지 말라. 그것은 다만 그 ‘불행한 운명‘의 굴곡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 P149

내 왼쪽이 입양기록중이 있었다면, 오른쪽에는 이상 전집이 있었다. 니는그 둘중 어느 쪽이 과연 진짜 나의 아이텐티티를 증명해주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내게 이상 문학의 세계란 바로 그랬다. - P2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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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음사 판으로 다시 읽은 등대로. 너무 너무 좋다.

"그래, 물론이지. 내일 날이 맑으면 말이야." 램지 부인이 말했다. "하지만 종달새가 지저귈 때 일어나야 할걸." - P5

"내일 날이 맑지 않더라도." 램지 부인은 눈을 들어 윌리엄 뱅크스와 릴리 브리스코가 지나가는 것을 흘끗 바라보면서 말했다. "내일은 또 다른 날이 될 거야. 자." - P55

바로 지금, 고통스럽게도 인간관계의 불완전함, 가장 완벽한 관계에도 흠이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남편을 사랑하면서도 진실에 대한 본능적 갈구 탓에 진실을 직시하려 하지만 견딜 수 없던 바로 그 순간에, 고통스럽게도 자신의 무가치함이 입증되었다고 느끼고 이런저런 거짓과 과장 탓에 자신에게 주어진 역할을 하지 못했다고 느끼는 순간에, 고양된 기분의 여파로 이처럼 비참하게 초조해진 바로 이 순간에, 카마이클 씨는 노란 슬리퍼를 신고 발을 질질 끌며 지나가고 있었고, 내면의 어떤 악마적 충동으로 그녀는 지나가는 그를 소리쳐 부를 수밖에 없었다. - P86

자신에게 미모의 횃불이 있음을 그녀는 깨닫지 않을 수 없었다. 그녀는 어느 방에 들어서든지 그 횃불을 꼿꼿이 들고 다녔다. 결국 그녀가 횃불을 베일로 덮고 단조로운 자세를 벗어나려 해도, 그녀의 아름다움은 또렷이 드러났다. 그녀는 늘 흠모를 받아 왔다. 그녀는 사랑을 받아 왔다. 애도하는 사람들이 앉아 있는 방에 들어서면 사람들이 그녀 앞에서 눈물을 흘렸고, 남자들과 여자들 모두 복잡다단한 사정을 더 이상 생각하지 않고 그녀와 함께 소박한 위안을 나누었다. - P89

수프를 떠 주면서 그녀는 이제 모든 것을 지나왔고, 모든 것을 통과했으며, 모든 것에서 벗어났다는 느낌이 들었다. 마치 저기 회오리바람이 일고 있어서, 그 안에 휘말릴 수도 있고 거기서 벗어날 수도 있는데, 자신은 벗어난 느낌이었다. - P185

영국에서 요리로 통하는 것은 (그들이 이미 동의한 대로) 혐오스럽기 그지없다. 물에 그저 양배추를 삶고, 고기가 가죽처럼 질겨질 때까지 굽고, 채소의 맛있는 껍질을 깎아 버리는 것이다. "껍질 안에 채소의 영양소와 맛이 다 들어 있는데 말입니다."라고 뱅크스 씨는 말했다. 그리고 음식 낭비도 이루 말할 수 없다고 램지 부인이 대답했다. 영국인 요리사 한 명이 낭비하는 재료의 양은 프랑스의 한 가족이 먹고 살 수 있을 정도였다. - P224

그날 오후에 다른 일로 이미 느꼈던 것처럼 사물에는 응집성과 영속성이 있다. 덧없이 흘러가고 사라지고 유령처럼 형체를 잃어버리는 것에 맞서 변화를 초월한 어떤 것이 루비처럼 빛을 발한다는 뜻이다.(그녀는 반사된 빛이 잔물결을 일으키는 창문을 힐끗 바라다보았다.) 그래서 오늘 밤에 다시 그녀는 이미 낮에 한 번 느꼈던 감정, 평화로움과 평안함을 느꼈다. 앞으로 영원히 지속되는 것은 이런 순간들로 이루어진다고 그녀는 생각했다. 이 순간이 남을 것이다. - P234

램지 씨는 어느 어둑한 날 아침에 비틀거리며 복도를 따라 걷다가 양팔을 내밀었다. 하지만 그가 팔을 내민 전날 밤에 램지 부인이 다소 갑작스레 죽었기에, 그의 팔은 텅 빈 채로 남고 말았다.) - P287

그해 여름 프루 램지는 출산 중에 죽었다. 정말 비극적인 일이라고 사람들은 말했다. 그녀보다 더 행복해야 할 사람은 없었다고 사람들은 말했다. - P297

포탄이 폭발했다. 프랑스에서 청년 이삼십 명이 포탄에 맞았고, 그중에 앤드루 램지가 끼어 있었다. 다행히도 그는 즉사했다. - P299

실로 긴 세월이 지나고, 램지 부인이 죽은 후에 돌아와서 그녀가 느끼는 것이 무엇일까? 아무것도, 아무것도 없었다. 말로 표현할 수 있는 것은 전혀 없었다. - P324

아마도 위대한 계시가 찾아오는 일은 결코 없을 것이다. 대신에 사소한 일상의 기적이나 등불, 어둠 속에서 뜻밖에 켜진 성냥불이 있을 뿐이었다. - P361

"삶은 여기에 정지해 있다."라고 말한 램지 부인. 그 순간을 영원한 것으로 만든(다른 영역에서 릴리 자신도 순간을 영원한 것으로 만들려고 노력했듯이) 램지 부인. 이것이 계시의 본질을 드러내는 것이었다. 혼돈의 와중에 형상이 있었다. 외적인 변천과 흐름이(그녀는 지나가는 구름들과 흔들리는 이파리들을 보았다.) 영속성 안에 고정되었다. 삶은 여기에 정지해 있다고 램지 부인이 말했다. "램지 부인! 램지 부인!" 그녀는 되풀이해서 불렀다. 이 계시를 얻은 것은 부인 덕분이었다. - P361

기억하세요?’ 통발이 깐닥깐닥 움직이고, 편지지들이 날리던 날 바닷가에서의 램지 부인을 다시 떠올리며 그녀는 그의 옆을 지나면서 묻고 싶었다. 아니, 이 오랜 세월이 흐른 후 그 이전과 이후에 있었던 일은 공백으로 남았는데, 그 장면만이 살아남아 아주 멀리까지 에워싸고 환히 불을 밝혀서 극히 사소한 것까지도 뚜렷이 보이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 P382

그녀는 그림을 보았다. 어쩌면 그림이 그의 답일 것이다. ‘당신’과 ‘나’ 그리고 ‘그녀’가 지나가고 사라진다는 것, 그 무엇도 지속되지 않는다는 것, 모든 것이 변한다는 것, 그러나 단어들이나 그림은 그렇지 않다는 것. - P401

자신이 생각하는 것과 보고 있는 것에 가슴이 벅차서, 마치 나눠 가져야 할 것이 있지만 이젤을 떠날 수 없다는 듯이 붓을 든 채 릴리는 카마이클 씨를 지나 잔디밭 끝으로 걸어갔다. 그 배는 지금 어디 있을까? 램지 씨는? 그와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다. - P4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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