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이 내가 상상하는 사람이 아닌 다른 어떤 사람이라는 생각을 했어. 당신의 정체성에 대해 내가 착각을 했다는 생각.˝
정체성이란 무엇일까? 내 자신이 스스로 인식하는 걸까? 아니면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만들어지는 걸까?
밀란 쿤데라의 <정체성>을 읽고 나면 아마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와 같은 생각을 할 것이다. 아무리 주변에 휘둘리기 싫더라도, 나 자신의 생각이 중요하다 하더라도 우리는 인간이기 떄문에 주변 사람들을 신경쓸 수 밖에 없고, 휘둘릴 수 밖에 없다. 사람을 괜히 人間 이라고 한게 아니었다. 어쩌면 나의 정체성은 주변사람들이 나를 바라보는 시선의 다른 말이 아닐까?
소설 <정체성>의 주인공은 전 남편과의 사이에서 자식이 있었으나, 자식이 죽고나서 전 남편과 이혼하고 혼자 살아가는 ˝샹탈˝과 그녀의 연하의 연인 ˝장마르크˝ 이며, 두 사람의 관계 속에서 서로의 정체성에 대해 고민하고 이에 대한 해답을 찾아가는 이야기이다.
남자친구 보다 하루 일찍 노르망디 해변에 있는 한 호텔을 찾은 ˝샹탈˝, 그녀는 해변을 거닐면서 ‘남자들이 결코 더 이상 나에게는 한눈을 팔지 않느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또한 남자친구인 ˝장마르크˝는 다음날 해변으로 내려가 ˝샹탈˝을 찾지만 다른 여자를 보고 그녀로 혼동한다. 도대체 내가 사랑하는 그녀는 누구일까? 그는 이러한 혼동을 얼마나 자주 겪었을까? 내가 사랑하는 사람과 타인의 차이는 무엇일까?
이후 ˝샹탈˝은 연인인 ˝장마르크˝에게 남자들이 더이상 자신을 돌아보지 않는다는 말을 하게 된다. 아주 가벼운 말투로. 하지만 그 말을 하는 그녀의 목소리는 쓸쓸하고 우울했다. 이 말을 들은 ˝장마르크˝는 이러한 그녀의 말에 혼란을 느낀다.
[남자들이 더 이상 돌아보지 않아서 슬프다고? 그는 이렇게 말하고 싶었다. 그렇다면 난 뭐야? 난 말이야? 당신을 찾아 해변을 수킬로미터씩 헤맸고, 울면서 당신 이름을 부르며 달려갔고, 당신을 따라 지구 끝까지라도 뛰어갈 수 있는 나는 뭐지?] P.29
어느날 ˝샹탈˝에게 발신이 없는 한통의 편지가 도착한다. 그 편지는 그녀를 남몰래 연모하는 사람이 보낸 것으로, ˝샹탈˝은 처음에는 불쾌하였으나, 이후 자신을 바라보는 남모를 시선을 의식하게 되고, 왠지 모를 호기심을 가지게 된다. 마치 이 한통의 편지로 자신의 정체성을 찾은것처럼 그녀는 편지의 발신인을 찾기 위해 주위를 살피게 된다. 그리고 보이지 않는 시선을 의식해서 자신을 꾸민다. 그렇다면 그녀의 옆에 있는 연인 ˝장마르크˝는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한 남자가 한 여자에게 편지를 쓴다면 그것은 훗날 그녀에게 접근하여 유혹하기 위한 토대를 마련하는 것이다. 그리고 여자가 이 편지를 비밀로 간직한다면 그것은 오늘의 조심성이 내일의 모험을 보호해 주길 바라기 때문이다. 한 걸음 더 나아가 편지를 간직한다면 그것은 그녀가 이 미래의 모험을 사랑으로 이해하려는 준비가 되었다는 것을 뜻한다.] P.109
발신인 불명의 편지를 둘러싼 두 연인은 이후 갈등을 겪는다. 그리고 그녀는 그에게 감정적인 폭발을 경험하게 되고 무작정 런던으로 떠난다. 도대체 그의 잘못은 무엇이고, 왜 그녀는 그렇게 분노했던 걸까? 무작정 그녀의 뒤를 쫓는 ˝장마르크˝, 두사람은 오해를 풀고 다시 관계를 회복할 수 있을까? 서로의 ‘정체성‘에 대한 답을 찾을 수 있을까?
이야기 자체가 어렵지는 않지만 작가인 ˝쿤데라˝가 작품속에 다양한 메세지를 숨겨놓고 있다. 특히 어디까지가 현실이고 어디까지가 꿈인지에 대한 구분이 모호하고, 마지막 부분에 나오는 난잡한 꿈에 대한 해석은 상당히 어려웠다.
그럼에도 이 책이 독자에게 전해주는 메세지 하나는 확실히 느꼈다. 우리는 타인과의 관계를 통해서만 나를 알 수 있다고, 타인의 사랑만이 우리를 구원할 수 있다고.
[˝나는 더 이상 당신으로부터 눈길을 떼지 않을 거야. 쉴 새 없이 당신을 바라보겠어. 내 눈이 깜박거리면 두려워, 내 시선이 꺼진 그 순간 당신 대신 뱀, 쥐, 다른 어떤 남자가 끼어들까하는 두려움. 그냥 당신을 보기만 할 거야. 밤새도록 스탠드를 켜 놓을 거야. 매일 밤마다.˝] P.183
오랜만에 읽은 ˝쿤데라˝ 옹의 작품으로, 내가 읽은 그의 네번째 작품이었다. 이전에 읽은 <농담>, 참을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불멸>에 비해서는 다소 재미 측면에서는 떨어지지만, 그래도 역시 대가의 작품은 다르다는 것을 느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