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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스본행 야간열차 ㅣ 세계문학의 천재들 1
파스칼 메르시어 지음, 전은경 옮김 / 들녘 / 2014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N22003
˝우리가 우리 안에 있는 것들 가운데 아주 작은 부분만을 경험할 수 있다면, 나머지는 어떻게 되는 걸까?˝
누구나 가끔은 현재 살고 있는 삶에서 벗어나 다른 삶을 살아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곤 한다. 하지만 그런 생각은 생각에서만 멈출 뿐 행동하기는 쉽지 않다. 그 이유는 새로운 것에 대한 두려움 때문일 수도 있고, 지금까지 쌓아 온 것들에 대한 아쉬움 때문일 수도 있다. 현실적으로 선택하기 쉽지 않은 새로운 삶.
그래서 나는 소설을 좋아한다. 소설을 읽으면 내가 경험해 보지 못한, 가보지 못한 삶에 대한 간접경험을 할 수 있고 새로운 삶에 대한 꿈을 계속 꾸게 하기 때문인데, 이번에 읽은 <리스본행 야간열차>는 내가 소설을 좋아하는 이유를 모두 담고 있는 작품이었다.
인생의 터닝 포인트는 급작스럽게 찾아온다. 그리스어와 라틴어를 가르치는 교사 ˝그레고리우스˝는 비오는 아침에 학교로 출근하는 도중 다리를 지나면서 한 여자를 보게 된다. 그녀는 그를 보더니 가지고 있던 종이를 구겨 허공으로 던지더니 갑자기 강으로 뛰어 드려고 한다. 그는 가지고 있던 물건들을 내팽겨치고 그녀에게 욕설을 내뱉어서 그녀의 투신을 막는다. 이후 그녀는 ˝그레고리우스˝에게 다가와 그의 이마에 숫자를 몇개 적는다. 그리고 그녀의 손에 다시 옮겨 적는다.
[˝전…… 저는 이 번호를 기억하지 않으려고 했어요. 잊어버리려고 했는데, 날아가는 편지를 본 순간, 적어두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P.11
그녀는 그에게 조금만 함께 걷자고 말하고, 둘은 아무 말없이 걷기 시작한다. 아침 수업에 늦은 ˝그레고리우스˝는 학교 앞에 도착하자 이제 학교에 가야 한다고 말하는데, 그녀 역시 학교로 따라 들어가서 젖은 몸을 말린다. 그런데 아직도 그의 이마에는 그녀가 적은 숫자가 남아있었다. 이후 ˝그레고리우스˝는 그녀에게 자신이 수업하는 교실로 같이 가자고 제안을 하고 그녀는 따라간다. 이동하면서 그는 그녀에게 모국어를 묻고, 그녀는 이렇게 대답한다. ˝포르투게스˝
[이마에 적힌 숫자는 아직 남아 있었다. 그는 따뜻한 물에 수건 끝을 적셔 이마를 문지르려다 말고 멈칫했다. 갑자기 수수께끼 같은 여자와 만난 흔적을 지우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그 찰나에 들었던 것이다.] P.13
수업을 참관하고 있는 그녀 앞에서 그는 왠지 모를 감정을 느끼고, 어서 빨리 쉬는시간이 오기를 바라게 된다. 하지만 수업 도중 그녀는 조용히 문으로 가서, 떠나기 전 그를 돌아보며 손가락을 입술에 가져다댔다. 무슨 의미 였을까?
그녀가 떠난 이후 정신을 차릴 수 없었던 ˝그레고리우스˝는 수업을 하는 도중 학생들에게 자습을 시키고 갑작스러운 결심을 하게 된다. 그리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학교를 떠나고, 그녀를 처음 만났던 다리로 가서 그녀의 흔적을 찾는다. 그녀를 기다린다. 하지만 그녀는 나타나지 않는다.
다리를 떠난 그는 무엇에 이끌렸는지는 모르지만 몇년만에 에스파냐 책방에 간다. 그리고 그곳에서 포르투갈어로 쓰여진 운명의 책 ‘언어의 연금술사‘를 만나게 된다. 포르투갈어를 몰랐던 그를 위해 책방 주인은 책의 서문 한 구절을 그에게 들려준다.
[우리는 많은 경험 가운데 기껏해야 하나만 이야기한다. 그것조차도 우연히 이야기할 뿐, 그 경험이 지닌 세심함에는 신경 쓰지 않는다. 침묵하고 있는 경험 가운데, 알지 못하는 사이에 우리의 삶에 형태와 색채와 멜로디를 주는 경험들은 숨 숨어 있어 눈에 띄지 않는다. 그러다가 우리가 영혼의 고고학자가 되어 이 보물로 눈을 돌리면, 이들이 얼마나 혼란스러운지 알게 된다.] P.27
서문만을 듣고 깊은 감동을 받은 ˝그레고리우스˝는 운명적으로 이 책을 사게 되고, 포르투갈어를 배우기 위한 책도 산다. 그리고 다니던 학교를 당장 그만두고 무작정 ‘리스본행 야간열차‘를 타고 리스본으로 떠난다. 그가 떠난 이유는 단 한기지였다. ‘언어의 연금술사‘의 저자인 ˝아마데우 드 프라두(이하 아마데우)˝를 만나기 위해서였다. 과연 그는 ˝아마데우˝를 만날 수 있을까? 과연 ˝아마데우˝는 아직까지 살아있을까?
리스본으로 가는 기차 안에서도 ˝그레고리우스˝는 계속 갈등을 한다. 다시 현재의 삶으로 돌아갈까? 이렇게 무작정 리스본으로 가는게 과연 의미있는 행동일까? 하지만 그는 현재를 뒤로 하고 과감히 새로운 삶으로 뛰어든다.
[인생을 결정하는 경험의 드라마는 사실 믿을 수 없을 만큼 조용할 때가 많다. 이런 경험은 폭음이나 불꽃이나 화산 폭발과는 아주 거리가 멀어서 경험을 하는 당시에는 느끼지 못하는 경우가 더 많다. 엄청난 영향력을 발휘하고, 인생에 완전히 새로운 빛과 멜로디를 부여하는 경험은 소리 없이 이루어진다. 이 아름다운 무음에 특별한 우아함이 있다.] P.55
한 여인과의 우연한 만남과 ‘언어의 연금술사‘라는 운명의 책 덕분에 리스본에 도착한 그는 ˝아마데우˝가 남긴 삶의 흔적을 찾아가는 여정을 시작한다. 그는 여정을 통해 다양한 사람을 만나게 되고, 다양한 사실들을 듣게 될 수록 ˝아마데우˝에 대한 사실을 하나씩 알게 된다. 그리고 ‘언어의 연금술사‘ 책 속에 그가 남긴 의미에 대해서 조금씩 깨닫게 된다. 과연 이 여정의 끝에는 무엇이 기다리고 있을까?
[˝사람들은 자기 자신에게 무엇이 없는지 알지 못해요. 그게 나타나기 전까지는 말이에요. 그러다가 그게 나타나면 단 한순간에 확실해지지요.˝] P.455
이 책의 표지와 초반부를 읽었을 때는 우연히 만난 여인을 찾으러 가는 리스본으로의 기차여행 이야기로 생각했는데 그런 ‘사랑‘ 이야기는 아니었다.
오히려 <리스본행 야간열차>는 ‘언어의 연금술사‘ 저자이자 의사인 ˝아마데우˝의 ‘과거‘와, 남아있는 것 없이 교육자의 길만 걸어온 ˝그레고리우스˝의 ‘현재‘의 만남을 보여주면서, 때로는 지나쳐야 하고 때로는 선택해야 하는 ‘인생‘에 대한 여행 이야기였다.
˝여행은 길다. 이 여행이 끝나지 않기를 바랄 때도 있다. 아주 드물게 존재하는, 소중한 날들이다. 다른 날에는 기차가 영원히 멈추어 설 마지막 터널이 있다는 사실에 안도한다.˝
나의 여행도 여기가 끝은 아닐거라 생각한다. 아니 그럴거라고 믿는다. 언젠가는 나도 ‘야간열차‘를 타고 새로운 갈림길로 들어가 보고 싶다. 포르투갈의 조금은 낯선 근대역사를 배경으로 새로운 삶에 대한 인생이야기가 궁금하신 분들께 이 책을 적극 추천한다.
Ps. 기차하면 <춘천가는 기차> 아닌가요.
https://youtu.be/JdaBZO9B6FI
춘천가는 기차는 나를 데리고 가네
5월의 내사랑이 숨쉬는 곳
지금은 눈이 내린 끝없는 철길위에
초라한 내 모습만 이 길을 따라가네
그리운 사람 그리운 모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