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22012
누군가가 자신을 좋아해주고 잘해준다면 받는 사람의 마음은 크게 두가지로 나눠질 것이다. 하나는 그러한 호의를 감사하는 마음, 다른 하나는 그러한 호의를 당연하게 생각하는 마음. 이 책의 주인공 ˝나나˝는 후자에 해당한다. 호의가 계속되니까 둘리인 줄 아는, 당연한 줄 아는 ˝나나˝에게 있어서 모든 남자들은 다 그녀의 호구였다.
˝에밀 졸라˝의 ‘루공마카르 총서‘ 아홉번째 작품인 <나나>의 주인공은 ˝나나˝로, 그녀는 <목로주점>의 주인공인 ˝제르베즈˝(세탁소 사장님)의 딸이다. ‘루공마카르 총서‘ 일부에는 ˝제르베즈˝의 자식들이 주인공으로 등장하는데, 아호번째 작품인 <나나>의 ˝나나˝, 열세번째 작품인 <제르미날>의 ˝에티엔˝, 열네번째 작품인 <작품>의 ˝클로드˝, 열일곱번째 작품인 <인간짐승>의 ˝자크˝가 바로 그 자식들이다.
이 중 내가 기존에 읽은 작품은 <인간짐승> 이었는데, <나나>를 읽고나서 들었던 생각은 이 작품은 ‘여자판 인간짐승‘ 이라는 것이었다. 이 책에는 자신이 가진 매력으로 주변의 모든 남자를 다 파멸시켜 버리는 ˝나나˝의 ‘팜므파탈‘적인 모습이 적나라하게 담겨져 있다.
자신의 육체적인 매력으로 모든 남성의 관심을 홀리는 ˝나나˝는 자신의 몸을 팔아 생계를 이어가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의 육체적인 매력을 알아본 극단의 대표는 <금발의 비너스>라는 연극의 주인공으로 그녀를 발탁하고, 연극속에서 그녀는 비록 연기도 못하고 발성도 별로지만 자신의 육체적인 매력을 위주로 연기한다. 그리고 그녀는 파리에 있는 모든 남성들의 성적 욕망의 대상이 된다.
[이제 그녀의 조그만 움직임도 관객의 욕망을 부풀게 했고, 그녀가 새끼손가락만 움직여도 육체들이 뒤틀렸다. 둥그렇게 굽은 관객들의 등은 보이지 않는 활이 살갗 위를 스치는 것처럼 떨렸고,목덜미는 어느 여자의 입에서 나왔는지 모를 훈훈하게 떠도는 입김에 솜털이 곤두섰다.] P.44
이후 파리의 귀족들이나 돈많은 남자들, 심지어 어린 학생과 노인까지도 그녀에게 접근한다. 그녀와의 하룻밤을 위해서는 큰 돈을, 그녀와의 오랜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더 큰 돈을 그녀에게 주어야 했고, 이런 호구들 때문에 그녀의 콧대는 하늘높은 줄 모르고 높아지기만 한다.
[그는 나나에게 사로잡혔다고 느꼈다. 오늘밤 그녀를 한 시간만이라도 소유할 수 있다면 모든 것을 부정하고 전 재산을 팔아치워도 좋을 것 같았다. 그의 젊음이 마침내 눈을 뜬 것이다. 가톨릭교도의 냉정한 가슴속에, 중년 신사의 위엄 속에 청춘의 탐욕스러운 정욕이 갑자기 불타오르고 있었다.] P.208
이러한 관계에 싫증이 난 그녀는 배우를 그만두고 같은 극단의 배우와 살림을 차리고 서민의 생활로 잠시 돌아간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뿐, 남자의 폭력과 물질적 빈곤에 시달린 ˝나나˝는 다시 돈과 쾌락이 있는 곳으로 돌아간다. 그리고 더 강력해진 ‘팜므파탈‘의 모습을 보인다.
[호화로운 저택 한가운데서 사치스러운 생활을 하면서도 나나는 따분해서 죽을 지경이었다. 밤마다 남자들이 끊이지 않았고, 화장대의 서랍 속에는 빗과 솔에 섞여 돈이 가득 들어 있었다. 그러나 이제 그녀는 그런 것에 만족하지 못했다. 어딘지 허전함을 느꼈고, 하품 나오게 하는 구멍 같은 것을 느꼈다.] P.405
모든 남자들은 그녀가 문란한 여자라는 것을, 그녀가 동시에 많은 남자들을 만난다는 것을, 그녀가 하는 말들이 모두 거짓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그리고 그녀의 뒤에서는 그녀를 욕한다. 하지만 그녀 앞에 서거나, 그녀가 먼저 접근하면 남자들은 속수무책으로 무너진다.
[그는 나나가 거짓말을 한다는 것을 알았다. 그러나 꽉 붙든 팔에 느껴지는 따뜻한 체온이 그를 무기력하게 만들었다. 이제 그는 그토록 오랜 기다림에도 불구하고 화를 내지 않았고 원한을 갖지도 않았다. 그의 유일한 관심거리는 지금 붙들고 있는 그대로 그녀를 지키는 일이었다.] P.261
한때는 순수했던, 연민이 가득했던 ˝나나˝는 자신의 마력 때문에 도리어 점점 자신을 잃어가게 되고, 끝없는 과소비 속에서 무엇으로도 그녀의 아음을 채울 수 없게 된다. 그리고 점점 폭주한다. 그녀에게는 이제 이성이 없고 아무 남자하고나 잔다. 그리고 그녀에게 반한 남자들은 모두 골수까지 퍼주고 난 다음에 버려지게 된다. 어떤 남자는자살을 하기도 하고 어떤 남자는 경제적으로 파산하기도 한다.
[그녀는 매우 아름다운 짐승 같은 무의식을 지니고 있었다. 자기가 한 일이 무엇인지 여전히 잘 모르는 천진한 소녀였다. 그녀는 쾌활하고 건강한 모습으로 풍만하고 기름진 육체를 지니고 있었다. 모든 것이 마음에 차지 않았다. 호화로운 저택도 그녀에게는 우스광스러웠고, 미어터질 듯 가득찬 세간이 그녀를 거북하게 만들었다.] P.578
끝이 안좋을거를 알면서도 그녀를 벗어나지 못하는 남자들, 그리고 연민마져 사라져 버린 ˝나나˝. 무엇이 그들을, 그리고 그녀를 그렇게 타락시켰던 걸까? 그녀의 미래는 어떤 모습일까?
자연주의 작가인 ˝에밀 졸라˝는 작품 <나나>를 통해 당시 프랑스 귀족 남자들의 성적 욕망과 물질 만능주의를, 프랑스 여자들의 돈과 성공에 대한 욕망을 비판하고 있다. 이 책에는 사랑이 없다, 부끄러움도 없다, 진실도 없다. 오직 동물적인 욕망만이 가득하고, 단지 서로의 욕망을 위해 누군가를 속일 뿐이다.
이 책을 읽고 나서 <나나>를 사실주의 작품이라고 칭할 수 있을지 의문이 들었다. 정말 당시 프랑스 사람들이 저렇게 문란하게 살았을까? 거짓과 배반도 서슴치 않고 살았을까? 당대의 현실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게 사실주의일텐데 내가 그시대를 살아보진 않았지만 이 책의 내용은많이 과장되어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내가 읽은 ˝에밀 졸라˝의 작품 중 <나나>가 가장 타락한 인간군상을 보여준다. 오히려 ˝에밀 졸라˝는 이러한 과장을 통해 당시 프랑스 사람들의 삐뚤어진 욕망을 풍자한건 아니었나 하는 생각도 해보았다.
인물들 자체가 약간 비현실적이고, 동물처럼 욕망만 가득하다보니 독자에 따라서는 <나나>에 대한 호불호가 갈릴거라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개인적으로는 점점 끝도없이 욕망만 늘어나는 ˝나나˝의 인간적 추락과 속수무책으로 무너지는 남자들의 모습을 보는 재미가 있었다.
그런데 책을 읽고 나서 불행한 주인공에게 연민이 안느껴지기는 처음이었다. 아마 책속에서 ˝나나˝가 점점 연민이라는 감정을 잃어갔기에 나 역시 그렇게 느꼈나 보다.
Ps 1. 다음날에는 ˝에밀 졸라˝의 <제르미널>을 읽어야 겠다.
Ps 2. 내가 지금까지 읽은 ˝에밀 졸라˝의 작품중에서는 이 책이 가장 선호가 떨어지지만, 그래도 좋은 작품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