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22014
˝이 모든 게 얼마나 오래된 일인지! 오직 기억만이 남아 있을 뿐! 그리고 기억 속의 젊은 얼굴들은 결코 늙지 않을 것이다.˝
마지막이라는 말은 언제나 아쉬움을 남긴다. 새로운 시작을 위한 마지막이라면 약간의 설레임이라도 있겠지만, 완전한 끝을 의미하는 마지막이라면 쉽게 받아들이긴 힘들다. 특히 마지막이 누군가와의 고별을 의미한다면 아쉬움은 큰 슬픔이 된다.
<마지막 숨결>은 프랑스 작가 ˝로맹 가리˝가 1980년에 권총으로 생을 마감한 후 25년이 지나서 출판된 책으로, 1935년부터 1967년 사이에 쓰여진 그의 일곱개의 단편을 모아놓은 책이다. 두개의 단편은 이 책을 통해 처음 공개된 미발표작품이고, 다섯개의 단편은 다른 간행물에 게재된 단편이라고 하는데, 내 입장에서는 다 처음 읽는 작품이기 때문에 모두 새롭게만 느껴졌다.
일곱편의 작품 모두 뛰어나다고 말할 순 없지만 작품 전반에서 ˝로맹 가리˝ 특유의 색깔이 느껴진다. 그 중에서 가장 여운이 남으면서 추천하고 싶은 단편은 <폭풍우>와 표제작인 <마지막 숨결>이다.
1. <폭풍우>
<새들은 페루에 가서 죽다>의 20대 버젼. 이 작품을 읽으면서 자연스럽게 태평양 한가운데 위치한 뜨거운 태야이 작열하는 작고 외로운 섬이 떠올랐다. ˝로맹 가리˝가 그린 그 섬에는 두개의 방갈로가 있고, 한개는 프랑스인 의사 ˝파르톨˝과 부인인 ˝엘렌˝이 주인이고, 한개는 ˝츠랑˝이라는 마약에 중독된 중국인이 주인이다. 너무나 뜨거운 태양 아래 살아가면서 삶의 의욕도, 사랑도 잃어버린 ˝파르톨˝과 ˝엘렌˝은 더위를 없애줄 폭풍우가 오기만을 기다린다.
아무도 오지 않던 그 섬에 요트 한 척이 도착한다. 그 요트에는 ˝페슈˝라는 백인 남성 한명만 타고 있었고, 그는 내리자 마자 의사 ˝파르톨˝을 찾아간다. 하지만 ˝파르톨˝은 그 섬에 있는 유일한 이웃이자 여기서 두시간 거리에 있는 ˝츠랑˝의 방갈로에 진료를 나가있었고, 집에는 부인 ˝엘렌˝만
남아있는 상황이었다. ˝페슈˝는 의사가 없다는 사실과 부인만 집에 있는 상황 때문이었는지,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어서인지 몹시 불안정한 모습을 보인다.
[침묵이 흘렀다. 페슈는 입을 다물고 있었지만 엘렌은 불규칙한 리듬으로 거칠게 헐떡이는 그의 숨소리를 분명히 들을 수 있었다. 그녀는 그가 무슨 일로 이 외딴섬까지 찾아온 건지 묻지 않았다. 물어봤자 대답해주지 않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베란다 앞쪽에 펼쳐진 안뜰은 텅 비어 있었다. 하늘은 여전히 절망적으로 맑고 구름 한 점 없었다.] P.27
느닷없이 ˝페슈˝는 ˝엘렌˝에게 다가가서 그녀를 덥친다. 그녀는 그의 행동에 완강히 저항하지만, 어느 순간 저항을 포기하고 그에게 몸을 허락하는 제스쳐를 보인다. 하지만 ˝페슈˝ 역시 갑작스럽게 짐승같은 그의 행동을 주저하고 그녀에게서 물러난다. 왜 그랬을까? 혹시 그가 이 섬에 방문한 이유와 상관이 있는걸까? ˝엘렌˝은 그의 주저함에 왠지모를 아쉬움을 느낀다.
이제 ˝파르톨˝은 집에 도착했고, 멀찍이 떨어져 있는 부인 ˝엘렌˝과 처음 보는 ˝페슈˝를 본다. ˝페슈˝는 ˝파르톨˝에게 자신의 진료를 요청한다. 그 순간 바다에는 그렇게 기다리던 폭풍우가 밀려오고 있었다. 진료를 받은 ˝페슈˝는 힘없는 모습으로 자신의 요트로 돌아간다. 그리고 출항하려고 한다. 지금 바다로 나가면 폭풍우 때문에 죽을걸 알면서도 말이다.
[그는 이제 곧 죽을 터였다. 곧 죽을 인간이 남은 자들의 앞날을 염려하는 건 웃기는 일이었다.] P.39
멀리서 이 광경을 지켜보던 ˝엘렌˝은 ˝페슈˝에게 다가가서 그에게 떠나가지 말라고 한다. 그리고 둘은 비바람치는 바닷가에서 사랑을 나눈다. 그럼에도 ˝페슈˝는 사랑을 나눈 후 폭풍우 속으로 요트를 타고 떠난다. 이후 ˝엘렌˝은 ˝페슈˝가 떠나려 했던 숨겨진 진실을 알게되고, ˝엘렌˝의 삶도 소용돌이 속으로 들어가게 된다
[그는 나병에 걸렸어. 퓌지 섬 원주민에게서 옮은거지. 그 섬에선 아주 흔한 병이니까. 그런데 엘렌, 여기서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말해 봐, 무슨 일이 있었냐고.˝
번개가 하늘을 갈랐다. 갑자기 둔탁한 우르릉 소리에 방갈로가 지붕까지 흔들렸다.] P.42
<폭풍우>는 ˝로맹 가리˝가 20대 초반에 쓴 작품인데 문장에서 외로움이 물씬 느껴졌다. 저 나이에 어떻게 저런 감성과 문장이 가능하지? 하는 감탄과 그는 원래부터 천재였구나 하는 생각을 할 수 밖에 없었다. <새들은 페루에 가서 죽다>를 좋아한다면 이 작품 역시 좋아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2. <마지막 숨결>
미국을 배경으로, 60대 중반의 한 남자가 스스로 생을 마감하기를 원한다. 하지만 그는 직접 자살하기 보다는 청부 살인을 의뢰하고, 한 변두리 모텔에서 청부 살인자가 자신의 목숨을 가져가기를 기다린다. 기다리는 동안 그는 자신의 과거와 그가 사랑했던 한 여인을 회상한다.
[삼십 년이라는 세월이 흐른 후 자기가 사랑했던 여자에 대해 말할 때, 그 여자가 아주 아름답고 지적이고, 완벽했다고 말하는 건 지극히 당연하다.] P.66
[물론 내가 다른 여자를 그녀만큼 사랑한 적이 없다는 사실에 무슨 대단한 의미가 있는 건 아니다. 어쩌면 그 이후로 내가 더이상 누군가를 사랑할 수 없게 된 것일 뿐인지도.] P.67
[결국 나는 누군지도 잘 모르는 사람을 찾아내려 애쓰고 그 누군가에게 희망을 걸면서 평생을 살아오지 않았던가.] P.85
이제 청부업자가 도착하기까지는 8분이 남았다. 그는 자신의 마지막 8분에 읽을만한 책을 고민한다. 그리고 그가 선택한 책은 전화번호부였다. 8분후에 나는 어느 곳에 서있을까?
[나는 전화번호부, 사람들과 휴머니즘으로 가득 찬 그 책, 이 세상의 어떤 책도 아닌 바로 그 책, 한 휴머니스트의 마지막 숨결과 함께하기에 가장 적합한 바이블과도 같은 그 책을 손에 든 채로 방 안에 서 있던 내 모습을 기억한다.] P.85
<마지막 숨결>은 ˝로맹 가리˝의 미발표 작품으로, 그가 권총자살한 이후에 발견되었는데, 내용은 모든 영광을 뒤로 하고 자살을 하려는 한 노년 남자의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그래서 그런지 이 작품은 ˝로맹 가리˝의 자전적 느낌이 매우 강하게 들며, 실제 그의 마지막을 떠올리게 한다. 아마 ˝로맹 가리˝는 자살을 결심하기 전까지 그가 느꼈을 감정들과 아쉬움들, 그리고 자신이 죽고싶어 했던 방식을 이 작품에 담으려고 한게 아니었을까라는 생각이 든다. 그의 마지막과 같은 작품.
사실 <새벽의 약속>을 읽으려고 했는데 옆에 있던 이 책의 제목이 너무 마음에 들어서 이 책을 먼저 읽었다. 결과는 대만족이었다. <폭풍우>와 <마지막 숨결>만으로도 이 작품은 충분한 소장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로맹 가리˝는 진정 천재였고, 휴머니스트였고, 로멘티스트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