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22017
˝플로렌티노 아리사는 페르미나 다사가 길고 지난했던 사랑이 지나간 후 가차 없이 자신을 버린 51년 9개월하고도 4일 전부터 지금까지 한순간도 그녀를 잊은 적이 없었다.˝
˝그는 감옥에 갇힌 사람처럼 매일 벽에 작대기를 그으며 망각의 계산을 할 필요가 없었다. 단 하루도 그녀를 기억하게 하는 일이 일어나지 않고 지나가는 법이 없었기 때문이다.˝
누군가를 50년 넘게 생각한다는게, 기다린다는게 가능할까? 너무나 사랑했더라도 시간이 흐르면 그 감정은 무뎌져야 하는게 정상이겠지만, 항상 그렇다고 말할수는 없다. 가끔은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일어나기도 하니까 말이다. 사랑은 특히 더 그렇다. ˝가르시아 마르케스˝가 그리는 <콜레라 시대의 사랑>에서는 이것이 가능하다고 이야기 하고 있다.
[˝여기서는 사랑 때문에 미쳐서 죽는 사람이 계속 있으니 자네는 며칠 내로 그런 기회를 갖게 될 걸세.˝] 1권 P.13
이 책의 주인공 ˝플로렌티노˝는 어린시절 자신의 첫 사랑인 ˝페르미나˝를 열렬히 사랑하였고, 그녀 역시 그에게 호감을 느껴서 한때 그와의 결혼을 약속하기까지 한다. 하지만 아버지의 격렬한 반대와 이후 ˝플로렌티노˝와의 재화시에 그에 대한 애정이 식어버렸음을 깨달은 ˝페르미나˝는 그와의 결혼을 취소하고, 그와 헤어진다.
[그녀는 그것이 돌아올 수 없는 여행임을 확신하고 있었다. 옷을 입기 전에 그녀는 화장실에 들어가 두루마리 화장지를 뜯어 플로렌티노 아리사에게 보내는 간단한 작별의 편지를 썼다. 그런 다음 화장용 가위로 목 부분 아래의 땋은 머리를 싹둑 잘라 금실로 수놓인 벨벳 상자 안에 말아서 넣고는 편지와 함께 보냈다.] 1권 P.147
갑작스럽게 이별을 통보받은 ˝플로렌티노˝는 엄청난 고통을 느끼고, 그녀를 잊기 위해 모든 수단을 동원한다. 하지만 한번 마음에 들어온 그녀를 잊을 수 없었고, 그녀를 사로잡지 못한 자신의 부족함을 책망하기만 한다.
[플로렌티노 아리사는 질투나 분노를 느끼지 않았다. 대신 자신에 대한 경멸감만을 느낄 뿐이었다. 그는 자신이 불쌍하고 추악하며 열등하다고 생각했고, 그녀뿐만 아니라 지구상의 그 어떤 여자에게도 부족한 남자라고 느꼈다.] 1권 P.268
이후 ˝페르미나˝는 자신을 진료하러 온 의사인 ˝우르비노˝를 만나게 되고, ˝우르비노˝는 그녀에게 반하게 된다. 상류층에 진입하고자 하는 열망이 컸던 그녀의 아버지는 딸과 ˝우르비노˝가 결혼할 수 있도록 노력을 하고, ˝˝페르미나˝는 ˝우리비노˝에게 애정은 없었으나, 결국 그의 청혼을 받아들인다. 하지만 사랑이 없었던 그들의 결혼은 과연 행복할까?
[그녀는 항상 남편이 빌려준 인생을 살고 있다고 느꼈다. 그는 자신만을 위해 건설한 거대한 행복의 제국을 다스리는 절대 군주였던 것이다. 그가 이 세상 그 누구보다. 그리고 그 무엇보다. 그녀를 사랑하고 있다는 것은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오로지 자기를 위한 것이었으니, 그녀는 남편의 신성한 하녀에 불과했다.] 2권 P.107
이제 ˝페르미나˝는 어엿한 상류층 부인으로, 자식도 생기고 겉으로 봤을때는 남편과 함께 안정적이고 다정한 삶을 살아간다. ˝플로렌티노˝가 이제는 그녀를 잊고 새로운 사람을 만나는게 합리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그는 그렇게 하지 않는다. 단지 그림자처럼 그녀의 곁을 맴돈다.
[그러나 기억 속에서 완전히 지워졌다고 믿었을 때, 옛 사랑은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곳에서 과거의 향수의 환영이 되어 그녀 앞에 다시 나타났다. ] 2권 P.111
그리고 언젠가 그녀의 남편인 ˝우르비노˝가 죽게 된다면 그녀가 자신에게 올 수 있을 거라는 무모한 희망을 품는다. 그때를 대비해서 그는 그녀에게 어울리는 남자가 되기 위해 노력한다. 그렇다고 연애를 하지 않는 건 아니었다. 다양한 여인들을 만나고 그들과의 성적 관계를 가지지만, 혹시나 그녀에게 해가 가지 않도록 철저히 숨긴다. 그리고 결혼도 하지 않고, 마치 그녀의 ‘영원한 남편‘처럼 지낸다. 무려 50년 동안 말이다.
[그녀 때문에 그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명예와 재산을 손에 넣었고, 그녀 때문에 건강을 유지했으며, 당시의 다른 남자들에게는 별로 남성적으로 보이지 않던 자기의 외모를 엄격히 관리했으며, 이 세상의 그 어떤사람이나 그 어느 것도 그토록 기다리지 못했을 정도로 한시도 절망하지 않고 그날을 손꼽아 기다려왔던 것이다.] 2권 P.206
결국 ˝플로렌티노˝가 바라던 상황이 50년 만에 찾아왔다. 그녀의 남편이자 의사인 ˝우르비노˝가 낙상사고로 죽게 된 것이다. 의사의 장례를 치르고 있던 ˝페르미나˝에게 그는 사랑고백을 한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그의 고백에 놀라고, 남편의 장례식에 이러한 이야기를 꺼낸 그에게 불쾌한 감정을 느낀 ˝페르미나˝는 처음에는 그를 멀리하지만, ˝플로렌티노˝는 이에 물러나지 않고 젊은시절에 그가 그녀에게 그랬던 것처럼 편지를 계속 보낸다.
[마침내 죽음의 신이 개입하여 자기편을 들어주었다는 것을 확인하고 나자, 그것은 페르미나 다사가 과부로서 첫날을 맞이하는 밤에 죽을 때까지 배신하지 않고 영원히 사랑하겠다는 맹세를 다시 한 번 반복하는 데 필요한 용기를 그에게 갖게 해주었다.] 2권 P.206
오랜 시간동안 사랑 없이 살았던 ˝페르미나˝의 마음은 첫사랑이자 낭만적인 ˝플로렌티노˝에게 조금씩 열리게 되고, 두 사람의 마음은 어느새 젊은시절로 돌아간다. 어린시절 실패했던 사랑의 설렘이 노년이 되어서 다시 찾아온 것이다. 하지만 주위 사람들의 반응은 오히려 냉담함을 넘어선 의심과 역겨움을 느낀다. ˝페르미나˝ 역시 ˝플로렌티노˝의 접근과 그녀의 마음을 남들에게 보이고 싶어하지 않는다.
[남녀 사이의 순수한 우정이란 다섯 살 때에도 불가능한데 심지어 팔십 대에 그런 관계를 가진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우리 나이에 사랑이란 우스꽝스러운 것이지만, 그들 나이에 사랑이란 더러운 짓이에요.˝] 2권 P.286
그럼에도 두 사람의 마음은 결코 숨길 수 없었고, 오히려 더 커지게 된다. 결국 둘은 함께 배를 타고 짧은 여행을 떠난다. 여행을 통해 두 사람은 서로의 사랑을 확인하게 되고, 이 여행이 끝나지 않고 영원히 지속되기를 바라면서 이야기는 끝난다.
[˝언제까지 이 빌어먹을 왕복 여행을 계속할 수 있다고 믿으십니까?˝ 플로렌티노 아리사에게는 53년 7개월 11일의 낮과 밤 동안 준비해 온 대답이 있었다. 그는 말했다. ˝우리 목숨이 다할 때까지.˝] 2권 P.331
평소 나는 책을 읽으면서 항상 왜 책의 제목을 이렇게 지었는지 궁금해 하는데, <콜레라 시대의 사랑>은 책의 마지막 부분에 가서야 책의 제목에 대해 이해할 수 있었다. 보통 ‘콜레라‘와 같은 질병은 사랑을 방해하는 요소로 작용하지만, 이 책에서는 ‘콜레라‘가 꼭 나쁘게만 작용한 것은 아니고, 오히려 ‘콜레라‘ 덕분에 그들의 사랑은 목숨이 다할 때 까지 함께할 수 있는 가능성을 갖게 되었다.
질병과 같은 재난마저 활용할 수 밖에 없었던 그들의 사랑, 그래서 더 진정성이 느껴지고 간절하게 읽혔다. 50년도 넘게 기다렸는데 그까짓 질병이 무슨 문제가 될까? 어쩌면 세월과 죽음을 초월한 그들의 사랑이야 말로 진정한 사랑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