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22022
˝그는 기억 밖에서는 건드리지 말아야 했던 것을 건드렸다. 기억 속에서는 모든 것이 영원히 그곳에 있었고 아무것도 변할 수 없었다.˝
이렇게 아름다우면서도 쓸쓸한 단편이 또 있을까? ˝윌리엄 트레버˝의 단편집 <밀회>에는 표제작인 <밀회>를 포함한 열두편의 작품이 실려있다.
몇 작품을 소개해 보자면,
<고인곁에 앉다>는 사랑없는 결혼 후 남편을 보낸 한 여인의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어리석은 결혼의 댓가로 고통의 삶을 살았던 그녀에게 남편의 죽음은 결코 슬픈 일이 아니었다. 그래도 그와의 작별의식을 통해 그녀는 과거를 떠올린다. 가까운 사람의 상실은 사이가 안좋았더라도 슬픔이 남기 마련이다. 잔잔한 슬픔이 느껴지는 작품.
[˝여러분이 오신 집에는 슬픔이 없어요.˝] P.21
<저녁 외출>은 소개팅(?) 업체를 통해 첫 만남을 가진 남녀의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서로에게 맞지 않은 사람이라고 알아본 두 사람, 하지만 그들은 바로 헤어지지 않고 다른 장소로 가서 식사까지 한다. 이미 더이상 잘 보일 필요가 없는, 숨길게 없는 두 사람은 솔직한 자신의 속마음을 이야기 한다. 그리고 즐거운 시간을 보낸다. 그리고 헤어진다. 다음 만남은 없다. 그럼에도 그 둘은 이 만남을 아까워하지 않는다.
[그들은 악수를 나누지 않았고 함께 보낸 저녁 시간을 어떤 식으로든 언급하지 않았다. 그러나 헤어질 때 두 사람에게는 약간의 놀라움이 남았다. 마땅히 일어났어야 할 상황과 비교하면 그들이 서로를 이용한 것은 스스로에 대한 존엄이었다. 그 기분은 서로 다른 두 개의 승강장에서 열차를 기다리는 동안에도, 각자가 타야 할 열차가 도착해 다시 멀어져갈 때에도 여전히 남아 있었다. 그 기분은 그들이 깜박이는 어둠 속을 이동할 때에도 계속되었고, 함께 나눈 즐거움만큼이나 은밀했다.] P.102
<그라일리스의 유산>은 한때 자신과 정신적 교감을 나누었던 어떤 여인이 죽고 나서 ˝그라일리스˝에게 유산을 남겼지만, ˝그라일리스˝는 자신의 기억속에 감춰놓은 그녀와의 추억을 밖으로 꺼내고 싶지 않아 유산 상속을 거부한다. 그리고 그가 원하는 것은 단지 ‘작은 기념품‘ 정도라고 변호사에게 말한다. 그리고 그는 그녀와의 과거를 회상한다. 특별한것도, 죄책감을 가질 것도 없었지만 단지 소문이 두려워 접어야 했던 관계. 하지만 그 짧았던 순간은 그에게 너무나도 강렬하게 남아있었다. 그래서 어떤 현실적은 것들이 끼어드는 걸 단호하게 거부한다.
[그들은 자기 삶에 대해 이야기하는 데는 관심이 없었다. 그들의 대화는 그렇지 않았으나, 본인들이 모르는 사이 그들의 우정으로 전과 달라진 방 안에는 그들의 삶이 있었다. 두 사람은 감정을 건드리지 않았고, 후회나 과거에 있었을지 모를 것들을 건드리지 않았다. 그들은 단어를 통제하는 능력을 잃지 않았다.] P.117
[그 이상은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것이다. 장식품도 받지 않을 것이다. 그러면 현실을 속이게 되기 때문이었다. 도자기 한점도 받지 않을 거라고, 그는 그렇게 편지를 쓸 것이다. 비밀의 그림자 속에 겨울 꽃이 흩어져 있었고, 기만이 조용한 사랑을 기렸다.] P.120
<고독>은 어린 시절 아버지의 잦은 부재로 외로움을 느끼면서 어머니의 외도를 목격한 한 소녀가 어떤 사고를 일으키게 되고, 이후 사고로 인해 그곳을 떠날 수 밖에 없었던 소녀는 아빠 엄마와 함께 집을 떠나서 여러 호텔을 전전하며 살아간다. 그리고 세월이 흘러 아버지도, 어머니도 모두 죽는다. 이제 과거의 비밀을 안고 혼자 살아가야 하는 그녀 앞에 있는 건 고독 뿐이었다. 내가 아는 내가 과연 진정한 나의 모습일까?
[내 콤팩트의 거울을 들여다볼 때, 또는 햇볕이 좋은 날 가게의 유리창에 얼굴이 반사될 때나 거리의 거울을 힐끗 볼때면 종종 나는 저 여자를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더 오래 바라볼 때면 내가 보고 있는 것은 한때 어린아이였던 그림자에 내 상상력이 부여한 환상이 아닐지,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온전히 존재하지 않는 게 아닐지 궁금해진다.] P.144
<신성한 조각상>은 천부적인 조각 능력을 타고난 한 남자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그는 그 재능을 발견하고 자신이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조각상을 만드는데 매진한다. 하지만 꿈꾸던 것처럼 그의 조각상은 팔리지 않고, 그는 생활고에 시달리게 되며, 결국 조각을 만드는 일을 포기하게 되며 다른 직업을 찾는다. 하지만 당장 생활비가 없는 그와 그의 부인은 각자가 돈을 마련하기 위해 지인집을 방문한다. 심지어 부인은 자신의 뱃속에 있는 자식을 불임인 친구에게 팔려는 제안까지도 한다. 생활고 때문에 인륜마저 포기하려는 그녀의 모습. 그녀의 잘못일까? 세상의 잘못일까?
[˝당신은 늘 최선을 다했어, 코리.˝ 이 말이 자리에 남아 대화를 매듭지었다. 사실이기에 반드시 해야 하는 말이었고, 이 말을 반복하는 것이 그들 삶의 고비를 누그러뜨렸다.] P.157
<거리에서>는 ˝셰릴˝이라는 여성이 거리에서 우연히 전 남편인 ˝아서스˝를 만나고, 그에게서 전날 밤에 있었던 일을 듣게 된다. ˝아서스˝는 한 여인을 살해하고 온 길이었다. 너무나 무덤덤하게 그녀에게 그때 당시의 상황을 들려주고, 빨래방으로 가서 피가 묻은 자켓을 빤다. 마치 자주 있었던 것처럼. 그녀는 그의 잔인함을 안다. 하지만 그녀는 전남편의 그늘을 벗어날 수가 없다. 어떤 마음이 남아있길래 거부하지 못하는 걸까? 살인(?)도 정적으로 묘사하는 ˝트레버˝의 글 솜씨에 깜짝 놀랄 수 밖에 없었던 작품.
<밀회>는 두 남녀의 은밀한 만남과 감정 변화를 섬세하게 그리고 있는 작품으로, 표제작으로 선정된게 바로 이해가 되는 작품이었다. 이혼을 한 여자는 더이상 주변 사람들어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신경쓰지 않겠다고 한다. 하지만 가정이 있는 남자는 가진것을 포기하지 않는다. 그리고 이제 이혼을 한 그녀에게 오히려 부담을 느낀다. 항상 내일은 없을거라는 우려가 그의 마음 한구석에서 사라지지 않는다. 그럼에도 둘의 밀회는 진행형이다. 현재가 좋은데, 미리 절망을 상상하는건 너무 앞선 우려일 뿐이다.
[말하지 않았으나 이해한 사랑의 규칙은 끝나지 않은 것을 끝내는 괴로움 속에서도 깨지지 않았고 앞으로도 깨지지 않을 것이었다. 오늘 사랑은 조금도 부서지지 않았다. 둘은 그 사랑을 지니고서 몸을 떼고 서로에게서 멀어져갔다. 미래가 지금 보이는 것만큼 절망적이지 않다는 것, 그 미래 안에 여전히 두 사람의 과묵한 섬세함과 한때 사랑이 만든 그들의 모습이 남아 있으리라는 것을 알지 못하는 채로.] P.287
단편집 <밀회>는 쉽게 읽히는 책이 아니었다. 단어 하나 하나가 그냥 쓰인게 없었고, 이야기가 직접적이지 않고 간접적인데다가, 갑작스럽게 쓰인 단 한 문장으로 상황을 설명하고 있다. 분위기도 대단히 정적이다. 사람이 저렇게 살 수 있는건가 할 정도로 대단히 차분하다.
(나같이 시끄러운 사람은 트레버의 세계에서는 못살거 같다.)
게다가 시점은 갑작스럽게 현재와 과거를 오간다. 보통 단편의 경우 현재 시점으로 화자의 생각과 대화를 통해 이야기를 전개하는데, ˝트레버˝의 단편들은 대화도 별로 없고 갑자기 시점도 바뀐다. 그래서 그의 단편은 페이지를 쉽게 넘길 수 없었고, 다 읽고 나서는 다시 한번 앞으로 돌아가서 찾아보고 이해해야 했다.
그럼에도 그의 단편집은 너무 좋았다. 여백의 미가 이런걸까? 뭔가 흐릿하지만 그럼에도 많은 잔상이 남아서 한 단편을 읽고 쉽게 다음 단편으로 넘어갈 수 없었다. 겉으로 표출되지 않은 감정이 오히려 더 울림을 줄 수 있다는 것을 ˝트레버˝의 작품을 통해 느꼈다.
[˝좋은 소설을 두 번째로 읽으면 언제나 전에는 몰랐던 것들이 보여요.˝] P.147
˝윌리엄 트레버˝의 작품은 꼭 두번 이상 읽기를 추천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