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22024
˝나는 바다에 대하여 말할 줄 모른다. 내가 아는 모든 것은, 그것이 일시에 나를 내 모든 의무로부터 해방시켜준다는 것이다. 바다를 바라볼 때마다 나는 하나의 행복한 익사자가 된다.˝
우리의 인생 자체는 어쩌면 한편의 긴 소설이라 할 수 있다. 누구도 대신 할 수 없는 나의 삶이고, 누구도 똑같은 삶을 살 수는 없기에, 나의 삶은 타인에게는 멋진 소설이 될 수 있다. 그런데 여기 누구보다도 드라마틱하고 웅장하게 살았던 한 작가가 있다. 그의 이름은 ˝로맹 가리˝ 이고, 그가 경험한 인생 이야기를 담은 자서전 <새벽의 약속>은 아마 그의 작품중 가장 멋진 소설이라고 확신한다. 왜냐하면 그의 파란만장한 인생이 고스란히 담겨져 있으니까, 그리고 이 이야기는 진실이니까.
˝끝났다. 빅서 해안은 텅 비어 있고, 나는 넘어진 바로 그 자리에 누운 채로이다.˝ 라는 문장으로 시작하는 <새벽의 약속>에서 40대 중반의 화자인 나(로맹 가리)는 해안가에서 어린시절과 나의 동반자인 어머니를 추억한다. 어머니는 유태인 출신인 미혼모였고, 나는 어머니와 함께 러시아에서 폴란드를 거쳐서 프랑스로 망명하게 된다. 아버지도 모른 채, 아무 도움도 없이 그렇게 프랑스로 올 수 있었던 데에는 어머니의 엄청난 열정이 있었다. 어머니의 프랑스에 대한 맹목적인 애정은 곧 나의 애정이 된다.
어려서 부터 나의 미래는 어머니에 의해 정해졌다. 나는 프랑스 문학의 거인이 될 것이고, 장교가 될 것이며, 외교관이 될 것이라고 말이다. 그리고 어머니는 없는 형편에도 불구하고 나에게 엄청난 투자와 뒷바라지를 한다. 언제나 내가 최고라고 주변에 나를 추켜 세우고, 학교에도 마구 찾아간다. 어머니가 가끔 부끄럽지도 하지만 나는 어머니의 의지를 거부하지 않고, 오히려 어머니가 정한 나의 미래가 이루어질 것이라는 믿음을 가진다. 어머니는 나에게 절대적인 사람이기 때문에.
그렇다고 어머니가 아들을 치맛폭에만 감싸고 키운건 아니었고, ˝로맹 가리˝ 역시 그저 마마보이는 아니었다. 어머니는 자식이 자신감이 없어하는걸 절대 허락하지 않았고, 특히 폴란드 친구들에게 어머니에 대한 모욕을 들은 어린 아들이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울며 돌아섰다는 고백을 듣자 어머니는 아들을 위로해 주기는 커녕 오히려 아들의 뺨을 때리고, 나에게 강해지라고 말한다. 이 후 모자는 그곳을 떠난다. 그리고 로맹가리는 절대로 타인 앞에서 물러서지 않는 강한 남자가 된다.
[˝내가 한 말을 명심해두어라. 지금부터 너는 나를 위해 싸워야 한다. 저들이 주먹으로 너를 어떻게 하건 나한텐 상관없어. 내 마음을 아프게 하는 것은 그게 아니야. 필요하다면 넌 죽기라도 해야해˝] P.149
프랑스로 망명한 두 모자는 힘겨운 삶을 이어간다. 하지만 어머니는 아들에 대한 열정 하나만으로 어떻게든 돈을 벌게 되고, 아들에 대한 교육을 어떻게든 이어간다. 아들은 문학가가 되고, 장교가 되고, 외교관이 되어야 하니까. 하지만 이제 오십대 중반에 접어든 어머니의 건강은 점점 악화되고 있었고, 나는 어떻게든 빨리 어머니의 꿈을 이뤄드리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그 꿈의 실현이 어머니의 생명을 연장시켜 줄 테니까 말이다. 그래서 틈틈이 글을 써나간다. 그리고 법과 대학에도 입학한다.
[서둘러야겠다는 것을, 어서 빨리 불후의 명작을 써야겠다는 것을 느꼈다. 나를 전무후무한 최연소 톨스토이로 만들어, 즉시 어머니의 고생을 보상해주고, 어머니 일생에 왕관을 가져다줄 수 있게 할 걸작을.] P.180
[나에겐 도망칠 권리가, 어머니의 도움을 마다할 권리가 없었다. 나의 자존심, 나의 남성다움, 나의 존엄성, 이 모든 것은 고려의 대상이 될 수 없었다. 내 미래에 대한 전설이 어머니를 살아 있게 하는 힘이었다.] P.213
법학 공부의 마지막 학년이 되었을 때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게 되고, 나는 드디어 어머니의 한가지 꿈을 이룰 수 있게 되었다. 나는 공군 장교에 지원을 하고, 어머니는 이를 너무 기뻐한다. 하지만 나는 장교로 임관하지 못하고, 하사로 임관한다. 그 이유는 내가 최근에 귀화했기 때문이었다. 이후 휴가를 받은 나는 집으로 가지만, 어머니에게 이 사실을 알릴 결심이 서지 않았다. 결국 어머니의 충격이 걱정된 나는 어머니에게 거짓말을 하게 된다.
˝난 소위로 임관되지 못했어요. 삼백명중에 나 혼자만 임관되지 못한거에요. 항공 학교 중대장 부인을 홀려놓았거든요. 부관이 우리 이야기를 폭로했어요... ˝
다음에 이어진 어머니의 반응은 ˝예쁘니? 사진 있니? 남편에게 죽을 뻔 했구나!˝ 였다. 역시 그 어머니의 그 아들이었다. ˝로맹 가리˝의 위트는 유전이 확실하다.
이후 나는 전장에 나가야 했지만 왠지 두렵지 않았다. 그리고 어머니도 나에 대해 걱정하지 않았다. 마치 나는 어머니의 꿈을 이루기 전까지는 죽을 수 없다는 운명과 협약이라도 맺은 것처럼 말이다.
[˝네겐 아무 일도 생기지 않는다˝ 하고 어머니가 고요히 말했다. 어머니의 얼굴은 완벽한 확신과 자신감의 표정을 담고 있었다. 마치 어머니는 아는 것 같았고, 운명과 협약이라도 맺은 것 같았으며, 망쳐버린 자신의 운명 대신 어떤 대가를 제공 받았고 어떤 약속을 얻어낸 것 같았다. 나 역시 그것을 확신케 되었다. ] P.270
전장의 포화 속에서 많은 죽을 고비를 넘기고, 중병에 걸려서 종부성사까지 하기도 했지만 나는 죽지 않았다. 주위 사람들이 하나 둘 사라져 갔지만 나는 결코 사라질 수 없었다. 아직 어머니와의 약속을 지키지 못했으니까. 결국 나는 장교로 진급하게 된다. 그리고 전쟁 중에 틈틈히 써내려간 <유럽의 교육>을 발표하고, 유럽에 나의 이름을 알리게 된다. 결국 어머니와의 세가지 약속 중 두가지를 이룬 것이다.
[이십 년 전의 나의 무엇인가가 내게 그대로 남아 있다고, 나는 완전히 사라진 것이 아니라고, 그러면 나는 약간 원기를 회복하고, 내 검을 쥐고서 힘 있는 걸음으로 정원으로 나아가 하늘을 바라보고 칼을 쳐드는 것이다.] P.364
전쟁 중에도 어머니는 나에게 계속 편지를 보냈다. 그 편지는 날짜가 적혀있지 않은, 스위스를 통해 비밀리에 온 편지들이었다. 그 편지는 내가 전장의 어디로 가든 나를 계속 쫓아왔는데, 마치 보이지 않는 탯줄이 어머니와 나를 이어주고 있는 것처럼, 어머니가 나를 지켜주고 있다는 확신을 주었다. 이후 전쟁이 끝나고 나는 한권의 소설과 많은 훈장을 매달고 집으로 향한다. 하지만 어머니는 이미 이 세상에 없었다. 그렇다면 그동안의 편지는 누가 보냈던 걸까?
[그러나 어머니는 자신이 나를 받쳐주고 있다고 느끼지 못하면 내가 서 있을 수 없음을 잘 알고 있었고, 그래서 준비를 했던 것이었다. 죽기 앞선 몇 달 동안 어머니는 거의 이백오십 통의 편지를 썼고, 그것을 스위스에 있는 한 친구에게 보냈던 것이다. 내 아들은 알지 못할 것이다, 편지들은 규칙적으로 발송될 테니까. 바로 그거였다. 그리하여 어머니가 죽은 지 삼 년이 넘도록 나는 계속 내가 지탱하기 위해 필요한 힘과 용기를 어머니로부터 받았던 것이다. 탯줄은 계속 기능을 발휘하고 있었던 것이다.] P.409
결국 어머니는 나와의 약속이 실현된 것을 보지 못한채, 내가 전쟁에서 살아 돌아왔다는 사실도 알지 못한채 그렇게 저세상으로 가버리셨다. 하지만 어머니가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그녀의 의지와 약속은 내 마음속에 남아있기 때문에, 그리고 보이지 않는 탯줄로 연결된 내가 이렇게 살아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슬픔은 슬픔이었고, 지울수는 없었다.
[나이는 상관없지요, 가슴이란 결코 늙지 않으니까요. 거기다 가슴에 자국을 남긴 공허나 부재는 언제까지나 남아 있어서 더욱 커지기만 할 따름이니까요.] P.196
<새벽의 약속>은 ˝로맹 가리˝가 1956년 <하늘의 뿌리>로 공쿠르 상을 받은 이후 1960년에 출간한 그의 자전적 소설로, 그의 성장기와 군생활, 그리고 그의 데뷔작인 <유럽의 교육>이 출간되기까지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이 책을 읽고나서 그의 인생에 절대적인 영향을 끼친 사람은 바로 어머니였음을 알 수 있었고, 이 책 이후 출판된 ˝로맹 가리˝의 작품들이 왜 그렇게 위트 있으면서도 쓸쓸했는지 어렴풋이 알수 있었다. 실제로 그가 자살로 인생을 마무리 할 수 밖에 없었던 이유도 어쩌면 어머니의 부재 때문이었는지도 모르겠다. 더이상 이뤄야 했던 약속이 남아있지 않았기 때문에... 뭐든 이유는 있는 거니까.
˝이 새들이 모두 이렇게 죽어 있는 데에는˝ 하고 그는 말을 이었다. ˝이유가 있을 거요˝
˝로맹 가리˝의 작품을 아직 접해보지 않은 분들에게 <새벽의 약속>을 가장 먼저 추천하고 싶다. 이 책을 읽고 나면 결코 인간 ˝로맹 가리˝를 싫어할 수는 없을 것이다. 아니 분명히 사랑하게 될 것이다.
Ps. 오늘부터 나의 최애 ˝로맹가리˝ 작품은 <새벽의 약속>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