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22036

˝내 머리는 내 가슴을 억제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나쓰메 소세키가 큰 병을 앓고 난 후, 새해 첫날부터 시작해서 춘분지나고 까지 쓸 예정이라서 지은 제목인 <춘분 지나고까지>는 제목이랑 직접적으로 연관이 없는 내용을 담고 있다. 그런데 왠지 제목과 책의 내용이 잘 어울린다는 느낌이 드는건 왜일까?


<춘분 지나고까지>는 소세키의 다른 작품들과는 다르게 구성도 약간 특이한데, 여러 단편들들 묶어 놓은 연작 소설이다. 총 7개의 쳅터로 구성어 있고, 모든 이야기의 한 구석에는 이 책의 메인 케릭터인 ˝게이타로˝가 있는데, 어떤 작품에서는 주인공으로, 어떤 작품에서는 화자로 나온다. 7개의 쳅터는 크게 세가지 이야기로 구분할 수 있다.




1. 모리모토 이야기

˝게이타로˝와 같은 하숙집에서 사는 ˝모리모토˝에 대한 이야기이다. 그는 어느 관청에서 일을 하고 있는데 어떤일을 하는지, 어떤 생각을 하는지 궁금증만 자아낼 뿐 ˝게이타로˝에게는 속시원하게 이야기 하지 않는다. 하지만 다양한 인생경험을 쌓아온 그는 ˝게이타로˝에게 신기한 이야기를 들려주고, 일자리를 구하고 있는 ˝게이타로˝에게 자신이 일하는 직장을 소개해주겠다고 한다. 하지만 어느날 그는 밀린 방세만을 남긴채 감쪽같이 사라지고, 이후 ˝게이타로˝에게 편지를 보내서 자신은 현재 만주에 있고 자신의 물건인 뱀 머리가 새겨진 지팡이를 가지라고 한다. 그리고 더이상 ˝모리모토˝는 책에서 등장하지 않는다. 하지만 ˝게이타로˝는 그가 준 지팡이를 가지고 진기한 경험을 하게 된다.

[아무튼 젊을 때는 뭐든지 색다른 것을 해보고 싶어 하는 법이지. 그런데 그 색다른 일을 다 해보고 나서 생각해보면 어쩐지 바보 같고, 그런 일이라면 하지 않는 게 훨씬 나았을 거라는 생각이 들 뿐이네.]  P.35

(중간평가 : 이야기 자체가 재미있지만 이게 뭐지? 하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2. 게이타로 이야기

결국 직장을 못구한 그는 친구인 ˝스나가˝에게 부탁을 하고, ˝스나가˝는 사업가인 이모부 ˝다구치˝에게 ˝게이타로˝의 취직을 부탁한다. ˝게이타로˝는 ˝다구치˝의 집을 방문하고 그로부터 일자리를 주겠다는 확약을 받는다.  몇일이 지난 후 ˝게이타로˝는 ˝다구치˝로부터 한통의 편지를 통해 임무를 지시받는다. 그 편지에는 눈섭 사이에 커다란 점이 있는 한 남자를 정찰하고 보고하라고 쓰여 있었다. 그리고 그는 지정된 장소에서 한 남자를 기다린다. 아무리 기다려도 남자는 나타나지 않았고, ˝게이타로˝는 그곳에서 예쁘지는 않지만 자신의 눈길을 끄는 20대의 한 여자를 발견한다.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는것과 같은 그녀, ˝게이타로˝는 그녀를 남몰래 처다보고 미행한다. 그런데 마침 자신이 정찰해야 할 남자가 나타났는데, 그 남자는 바로 그녀가 기다리던 사람이었다. 40대 중반으로 보이는 이 남자와 그녀는 무슨 관계일까?

(중간평가 : 추리소설?처럼 보였던 이 이야기는 결국 ˝다구치˝의 장난으로 밝혀진다. 만약 내가 현실에서 ˝다구치˝의 장난을 당했다면 한대 때렸을 것이다.)




3. 스나가 이야기

사실 이 책의 진정한 주인공은 ˝게이타로˝의 친구인 ˝스나가˝이며, ˝스나가˝의 이야기가 이 책의 메인이었다. 이 책이 두꺼워서 언뜻 손이 안간다면 213페이지 부터 시작하는 <스나가의 이야기> 부터 읽어도 괜찮을 것 같다.


˝스나가˝에게는 ˝지요코˝라는 사촌 여동생이 있고, 그녀는 ˝다구치˝의 딸이다. 그와 그녀의 부모님은 두 사람이 성인이 되면 결혼을 시키고 싶어했고, 이 바램은 특히 ˝스나가˝의 어머니에게서 강했다.


성격적으로 내향적인 ˝스나가˝는 외향적이고 자신의 감정에 솔직한 ˝지요코˝에게 다소 부담을 느낀다. 그녀에 대한 그의 마음 한구석에 사랑이라는 감정이 약간은 있는 듯 했지만, 자기와 너무나도 달랐던 그녀와의 결혼이 자신에게는 불행이 될거라 미리부터 겁을 먹고 그녀를 멀리하려 한다. 하지만 그럼에도 ˝지요코˝ 는 계속해서 그에게 다가온다. 그리고 그에게 호감이 있음을 내비치지만 ˝스나가˝는 결코 마음을 열지 않는다.

[나는 늘 생각한다. ‘순수한 감정만큼 아름다운 것은 없다. 아름다운 것만큼 강한 것은 없다‘라고, 강한 사람이 두려워하지 않는 것은 당연하다. 내가 만약 지요코를 아내로 맞이한다면 아내의 눈에서 나오는 강렬한 빛을 견딜 수 없을 것이다. 그 빛이 꼭 분노를 드러내는 것이라고는 할 수 없다. 인정의 빛도, 사랑의 빛도, 혹은 깊은 사모의 빛도 마찬가지다. 나는 분명 그 빛 때문에 꼼짝하지 못할 게 뻔하다. 그것과 같은 정도로 또는 그 이상으로 빛나는 것을 그녀에게 답례로 돌려 주기에는 감정에 좌우되기 쉬운 나는 너무나 모자라다.]  P.244



˝스나가˝는 ˝지요코˝에게 접근하는 다른 남자 때문에 극심한 질투심을 느끼기도 한다. 그리고 언뜻 내비치는 ˝지요코˝의 행동에 설레이기도 한다. 하지만 그녀에게 다가가지 못하고, 그녀와의 결혼을 추진하려 하는 어머니의 행동을 멈추게 하지도 않으며 다만 자신의 결정을 미룰 뿐이다. 도대체 무엇이 문제인걸까? 자신의 마음을 알 수 없어서 그런 것일까, 아니면 다른 문제가 있는 걸까? 그러고 보니 왜 어머니는 그렇게 ˝지요코˝와의 결혼을 강하게 원하는 걸까?

[사물의 진상은 모를 때야 알고 싶은 법이지만 막상 알고나면 오히려 모르는 게 약이라며 지나간 옛날이 부러워 지금의 자신을 후회하는 경우도 적지 않은데, 자신의 결론도 어쩌면 그와 비슷한 것일지도 모르겠다고 쓴웃음을 지으며 말하고는 단상에서 물러갔다.]  P.321

(중간평가 : 나름 소세키식의 반전이 숨어 있다. 그리고 지레 겁을 먹고 다가서지 못하는 ˝스나가˝의 비겁함이 결코 낯설지 않다. 예전의 내 모습을 보는 것 같다.)




소세키의 작품들이 다 그렇듯이 물 흐르듯 잘 읽혔지만 <춘분 지나고까지>는 그의 다른 작품들에 비해 ‘아~  좋다‘는 느낌이 들지는 않았다. 게다가 연작 소설이어서 그런지 약간 산만하기까지 했다.
(아니면 책을 읽는 나의 마음이 산만해서 그렇게 느껴졌을지도 모르겠다.)

개인적으로 이 책이 나쁘지는 않았지만 소세키를 전작하려고 하는 사람이 아니라면 그렇게 추천하고 싶지는 않다.



Ps. 지금까지 현암사 소세키 전집 14편 중 12편을 읽었고, 이제 전작까지는 두편(갱부, 명암) 남았다. 벌써부터 아쉽다. 전작 후에 종합 페이퍼를 써봐야 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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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ni74 2022-03-03 16:06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새파랑님 아무리 봐도 난 사람 ㅎㅎ 대단하세요. 잔작읽고 종합 페이퍼 쓰신다니 기대됩니다. *^^*

새파랑 2022-03-03 16:10   좋아요 4 | URL
난사람 이라기 보다는 한 작가만 열심히 팝니다 ㅋ 다음 책으로 무슨 책을 읽을지 고민 입니다~ 좀 얇은 책을 읽어야 할거 같아요 ^^

레삭매냐 2022-03-03 16:13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전 고양이도 읽다 말다
하다가 결국 완독은 못한
것으로 기억합니다.

대단하십니다.

새파랑 2022-03-03 16:19   좋아요 4 | URL
개인적으로 <고양이>가 저는 소세키 작품중에 제일 별로였습니다~! 다른 작품으로 다시 시작하시면 아마 좋아하실거 같아요~!!

물감 2022-03-03 17:50   좋아요 3 | URL
아 역시 그랬나요? 저도 소세키를 고양이로 시작했다가 중도하차하고 지금까지도 나랑 안맞는 작가라 생각하며 살아왔어요...

새파랑 2022-03-03 18:40   좋아요 3 | URL
소세키의 초기 작품이 인기가 많던데 개인적으로는 그후ㅡ산시로ㅡ행인ㅡ마음 요렇게 네작품이 좋은거 같아요 ^^

페크pek0501 2022-03-03 16:48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고양이~ 보단 도련님이 좋았어요. 저는.

아, 이 잘생긴 책들... 표지가 빳빳해 보입니다. 한 질 장만하고 싶당!!!

새파랑 2022-03-03 16:59   좋아요 5 | URL
저는 소세키 초기작보다는 후기작들이 더 와닿고 좋더라구요. 점점 인간의 내면에 대한 탐구가 집요해지는 느낌이었어요. 저는 지금 현암사 시리즈로 열심히 모으고 있습니다~!!

페넬로페 2022-03-03 16:51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두구두구두~~
이제 2편만 남았네요👍👍
이 책이 단편들을 모은 연작소설이군요~~
책을 사놓고도 이제야 알았어요.
새파랑님께서 소세키의 작품중 가장 마음에 안드시는 책인것 같군요. ㅎㅎ
남은 2권은 더 좋았으면 해요^^

새파랑 2022-03-03 17:04   좋아요 5 | URL
이걸 단편 모음이라고 하기도 애매한게 이야기는 계속 이어집니다 ㅋ 이 책 사놓으셨군요~! 이책 좋다는 분들도 많으셔서 아마 페넬로페님은 다르게 느끼실 수도 있을거 같아요~! <갱부>를 10분의 1쯤 읽었는데 왠지 코믹한 느낌이 들더라구요 ㅋ

거리의화가 2022-03-03 17:36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오 전작페이퍼까지 두편 밖에 남지 않았네요. 저도 좋아하는 작가가 한둘쯤 생기는데 나중에 전작읽기 함 도전해봐야겠습니다!ㅎㅎ

새파랑 2022-03-03 18:41   좋아요 1 | URL
전작 읽기도 나름 재미있고 의미있는거 같아요. 대가라고 해도 안좋은 작품들이 중간에 있기는 하지만 그런거 읽는것도 나름 즐겁더라구요 ^^

coolcat329 2022-03-03 17:53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연작소설이군요. 두 권 남으셨다니~어떤 기분이실까요~~

새파랑 2022-03-03 18:42   좋아요 3 | URL
소세키의 책은 다 전작해도 꼭 다시 읽어보고 싶어요 ㅋ 너무 좋은 작품들이 많습니다~!!

서니데이 2022-03-03 18:20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아직 조금 남았지만, 곧 춘분이 되겠네요.
일본은 지역에 따라 3월에도 추운 지역도 있지만, 남쪽은 따뜻한 편이라서 그런지 <춘분 지나고까지>라는 제목에서 봄이 된다는 것을 생각합니다.
잘읽었습니다. 새파랑님, 좋은 하루 보내세요.^^

새파랑 2022-03-03 18:42   좋아요 3 | URL
3월 14일이 춘분인가 그렇더라구요 ㅋ 이제 봄이 맞습니다~!! 저녁시간 즐겁게 보내세요 ^^

서니데이 2022-03-03 18:45   좋아요 3 | URL
올해 춘분은 3월 21일 입니다.^^

청아 2022-03-03 19:0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책을 모아놓으니 색감이 참 예쁘네요! 제 생각에도 책을 읽을때 컨디션,상황이 감상에 적지않은 영향을 미치는것 같아요. 게이타로의 이런저런 개입과 소세키식 반전이 궁금합니다🤭

새파랑 2022-03-03 19:21   좋아요 2 | URL
제가 현암사 책으로 다 모으면 실물을 한번 찍어보겠습니다~!! 책을 읽으면서도 걱정거리가 생각나서 집중을 잘 못했어요 😅

stella.K 2022-03-03 20:0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엇, 저만 그런 게 아니었군요.
고양이 제목도 좋아서 두 번 정도 읽으려고 시도했는데
저도 실패했습니다. 저는 책은 정말 첫인상이 중요한 것 같더라구요.
첫번에 좋은 게 아니면 그 다음엔 잘 손이 안 가요.
에밀 졸라도 그래서 못 읽는 작가죠. <작가> 읽다 엎어버리고 이내...ㅠ

새파랑 2022-03-03 20:18   좋아요 3 | URL
저는 <그 후>를 먼저 읽어서인지 아주 좋았어요 ㅋ 고양이 보다 훨씬 더 좋은 작품이 많습니다~! 다른것도 꼭 읽어보세요~! 저도 첫 작품이 안좋아서 못읽는 작가 있어요(레이먼드 카버랑 피터 한트케 ㅎㅎ)

그레이스 2022-03-04 06:36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연재소설이 이런 경우가 있긴 하더라구요.
특히나 소세키가 아프고 나서 쓴 소설이라...!
고양이로소이다 읽다가 별 감흥이 없던 저는 오랜 시간 지나서 행인 읽고 너무 좋아서 전작읽기 했어요.
맨 마지막에 나는 고양이로소이다를 다시 읽었는데 너무 좋았구요~
전작 페이퍼 기대할께요~~

새파랑 2022-03-04 10:31   좋아요 2 | URL
저도 그럼 다 읽고 고양이를 다시 읽어봐야 겠습니다~! 아파도 이정도 쓰는 소세키의 필력은 대단한거 같아요 ^^

희선 2022-03-05 00:14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앞으로 두권 남았군요 그러면 소세키 소설을 다 만나시다니... 저는 몇 권 못 봤네요 이건 장편이 아니어서 보고 싶지 않다 생각하기도 했어요 그렇게 생각하다니... 새파랑 님은 소세키 소설을 좋아하시는군요 마지막까지 즐겁게 만나시기 바랍니다


희선

새파랑 2022-03-05 07:14   좋아요 3 | URL
제가 좋아하는 일본작가 두명은 하루키와 소세키 입니다~!! 키로 끝나는 특징이 있네요 ^^ 아직 안읽은 단편집도 읽어봐야 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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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돌이 2022-03-03 13:4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고약한 사람들을 벌하는건 우리가 하고 용서는 하느님이 하면 안될까요? ㅎㅎ

새파랑 2022-03-03 15:53   좋아요 0 | URL
듣고 보니 저도 바람돌이님 말에 동의합니다 ㅋ 언제나 용서만 하고 살수는 없겠죠? 😆

페크pek0501 2022-03-03 16:4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바람돌이 님의 댓글, 꽤 웃겨요. 하하~~ 기발하십니다.

용서를 배워야 하는 이유는 자기 마음이 편하기 때문이 아닐까요.
하늘에 맡기면 언젠가는 벌이 내리는 것 같아요. 벌이 없다면 최소한, 복은 안 주지 않을까 싶어요.
그러니 그건 하늘이나 하느님께 맡기고 우리는 마음 편한 쪽으로 하는 걸로요...^^

새파랑 2022-03-03 16:57   좋아요 0 | URL
저는 용서를 잘 하는 편이긴 한데 가끔은 반대로 하고 싶은 생각도 들더라구요. 전 선한 사람은 아닌듯 합니다 ^^
 

나름 특이한 소세키의 연작 소설이었다.




그 사람은 아무리 쾌청한 하늘 아래 있어도 사방이 꽉 막힌 것 같아 괴로웠다고 한다. 나무를 봐도 집을 봐도 거리를 걷는 사람을 봐도 또렷이 보이지만 자신만 유리 상자에 넣어져 바깥 존재와 직접 연결되지 않았다는 생각이 끊이지 않아 결국에는 질식할 것같이 힘들었다고 한다. - P89

나는 늘 생각한다. 순수한 감정만큼 아름다운 것은 없다. 아름다운 것만큼 강한 것은 없다‘라고, 강한 사람이 두려워하지 않는 것은 당연하다. 내가 만약 지요코를 아내로 맞이한다면 아내의 눈에서 나오는 강렬한 빛을 견딜 수 없을 것이다. 그 빛이 꼭 분노를 드러내는 것이라고는 할 수 없다. 인정의 빛도, 사랑의 빛도, 혹은 깊은 사모의 빛도 마찬가지다. 나는 분명 그 빛 때문에 꼼짝하지 못할 게 뻔하다. 그것과 같은 정도로 또는 그 이상으로 빛나는 것을 그녀에게 답례로 돌려 주기에는 감정에 좌우되기 쉬운 나는 너무나 모자라다. - P244

나는 나를 좋아하지 않는 여자를 억지로 안는 기쁨보다는 상대의 사랑을 자유의 들판에 놓아주었을 때의 남자다운 기분으로 내 실연의 상처를 쓸쓸하게 지켜보는 것이 양심에 비추어 훨씬 더 만족스럽다고 생각한다. - P274

내 머리는 내 가슴을 억제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 P287

지요코처럼 모든 것을 다 드러내놓고 속을 보여주지 않으면 성에 차지 않는 사람이 보면 늘 뚱한 태도를 보이는 나 같은 사람은 결코 마음에 들 리 없겠지만, 거기에서는 또 꿰뚫어 볼 수 없는 묘한 마음의 존재가 희미하게 보여서 그녀는 옛날부터 나를 완전히 간파할 수 없었고, 따라서 경멸하면서도 어딘가 무서운 구석을 가진 남자로서 어떤 의미에서 존경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는 공공연하게 말하지는 않지만 지요코도 마음속 깊이 정식으로 인정하고 있고 나도 부지불식간에 그녀로부터 내 권리로 요구하고 있던 사실이다. - P305

"좀 들어보세요. 그건 피차일반이라는 거죠? 그렇다면 그걸로 좋아요. 뭐 받아달라고 말하지는 않겠어요. 하지만 왜 사랑하지도 않고 아내로 맞이할 생각도 없는 저한테…왜 질투하는 거예요?" - P308

말이나 행동은 아무래도 상관없어요. 오라버니의 태도가 모욕을 준 거예요. 태도가 주지 않아도 오라버니의 마음이 준 거예요. - P309

사물의 진상은 모를 때야 알고 싶은 법이지만 막상 알고나면 오히려 모르는 게 약이라며 지나간 옛날이 부러워 지금의 자신을 후회하는 경우도 적지 않은데, 자신의 결론도 어쩌면 그와 비슷한 것일지도 모르겠다고 쓴웃음을 지으며 말하고는 단상에서 물러갔다. - P3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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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부 전선 이상 없다 열린책들 세계문학 67
에리히 마리아 레마르크 지음, 홍성광 옮김 / 열린책들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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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22035

"사실 전쟁을 원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 그런데 느닷없이 전쟁이 터지는 거야. 우린 전쟁을 바라지 않았어. 다른 사람들도 그렇게 주장하지. 그런데도 세계의 절반이 전쟁에 참가하고 있어."


독일의 군사학자로 널리 알려진 "클라우제비츠"는 그의 저서 <전쟁론>에서 "전쟁은 정치의 연장이다."라고 했다. 그렇다면 정치는 누구를 위한 것일까? 당연히 국민의 생명과 재산일텐데, 국민의 생명을 대규모로 희생하면서 까지 치뤄야 하는 전쟁은 과연 합리적인 것일까? 무엇을 위해 평범한 사람들이 정치가의 결정에 의해 모든 것을 잃고 비참하게 전장에서 살인을 하고 죽었어야 했을까?

[우리는 서로에 대한 연민의 감정을 죄다 잃어버렸다. 쫓기는 우리의 시선에 다른 사람의 모습이 보인다 하더라도 우리는 누가 누군지 거의 알아보지 못한다. 우리는 이제 감정이 없는 죽은 사람이 되어 버렸다. 속임수와 위험한 마술을 써서 달리고 또 달리며 그저 살인을 저지를 뿐이다.]  P.127



<서부 전선 이상없다>는 1차 세계대전의 독일을 배경으로 쓰여진 작품으로, 가장 위대한 전쟁 문학작품 중 하나라고 한다. 읽어보니 허언이 아니었다. 이 작품을 읽는다면 누구든지 잔혹한 전쟁의 실상을 간접체험할 수 있고, 작가인 "레마르크"가 실제로 1차 세계대전에 참전한 경험을 가지고 글을 써서인지 너무 리얼하고 참혹하다.


이 책의 주인공인 19세의 "파울"은 담임 선생님의 허황된 애국심 때문에 친구들과 함께 자원입대 하여 10주간의 강압적인 신병훈련을 받고 최전방에 배치된다. 그리고 그곳에서 오직 생존을 위해 상대방을 죽인다. 잠시라도 딴 생각을 했다가는 내가 죽을 수 있기 때문에 그들은 오직 동물적인 생존본능만을 가지고 살아간다. 전우애를 제외하고 그들은 오직 살고 먹고 죽이는 데에만 집중한다.

[포탄에 맞는 것도 우연이듯이 내가 살아 있는 것도 마찬가지로 우연이다. 포탄으로부터 안전한 엄폐부에서도 나는 당할 수 있다. 그리고 엄폐물이 없는 전쟁터에서 열 시간 동안 포탄이 비 오듯 쏟아져도 상처 하나 없이 무사할 수 있다.어떤 군인이든 온갖 우연을 통해서만이 목숨을 부지할 수 있다. 그리고 군인이면 모두 이런 우연을 믿고 신뢰하는 것이다.]  P.111



전쟁 속에서 "파울"은 절친한 친구들과 전우를 한두명씩 떠나 보낸다. 이중 그의 고향 친구였던 "케머리히"는 허벅지에 총을 맞고 군병원에 입원한다. 그리고 다리가 절단된다. "파울"은 친구에게 다리가 절단된 것을 숨긴 채, 곧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희망을 말하지만 "케머리히" 본인도 예감했고 다른 사람들도 알고 있었다. "케머리히"는 오래 살지 못할 거란 것을. 결국 그는 큰 고통속에서 비참하게 죽는다. "파울"은 고향에 있는 그의 어머니에게 어떻게 이 사실을 어떻게 전할지 고민한다. 사실대로 말해야 할까? 아니면 그가 편안한 죽음을 맞았다고 거짓말을 해야 할까?

[하지만 그는 머리를 옆으로 돌리고 울기만 할 뿐이다. 그는 자기 어머니, 자기 형제들에 대해 말하지 않는다. 그는 아무말도 하지 않는다. 어쩌면 이미 그럴 능력이 없을지도 모른다. 그는 지금 열아홉 살 된 자신의 조그만 생명과 홀로 대면하면서, 그 생명이 자신을 떠나려 하기 때문에 울고 있는 것이다.]  P.40



이후 많은 전투를 치룬 "파울"은 포상휴가를 얻고 고향에 간다. 하지만 그는 고향을 떠나기 전과는 다른 인간이 되어버렸다. 그는 어머니 앞에서조차 그가 겪은 참혹한 실상을 말할 수 없었다. 본인조차 믿을 수 없었기에, 사실을 말하기에는 너무 잔인했기에 말이다. 전장의 잔혹함을 모른 채 안전한 후방에서 편하게 전쟁이야기를 하는 마을사람들에게 분노보다는 허탈함을 느낀다. 그리고 이제 더이상 과거로 돌아갈 수 없음을, 더이상 꿈을 꿀 수 없다는 것을 깨닫는다.

[아, 어머니, 어머니! 전 어머니에겐 어린아이에 불과합니다. 왜 저는 어머니의 품에 얼굴을 파묻고 울 수 없나요? 왜저는 늘 씩씩하고 의젓한 사람이 되어야 하나요? 저도 한 번쯤 울면서 위로를 받고 싶습니다. 저는 아직 어린아이에 지나지 않아요. 장롱에는 아직 내가 어릴 때 입던 짧은 바지가 걸려 있다. 그때가 마치 어제와 같은데, 왜 그 시절이 이처럼 훌쩍 지나가 버렸는가?]  P.195



"파울"은 다시 잔혹한 전장으로 복귀하지만, 오히려 친구와 전우를 만나고 나서 마음이 편안해짐을 느낀다. 그는 더이상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다만 전쟁의 도구로서 어쩔수 없이 살아간다. 애국심? 그런건 없다. 그에게 남아있는 유일한 인간적인 것이라면 전우애 뿐이었다. 살아 돌아갈 희망? 그런건 없다. 그는 하루하루 그져 죽음을 향해, 시체를 밟고 앞으로 나아갈 뿐이었다.

[예전의 영상이 소망보다는 오히려 슬픔, 즉 무시무시하고 걷잡을 수 없는 우울을 불러일으키는 이유는 바로 이러한 정적 때문이다. 이러한 영상은 과거에 존재했지만 다시는 되돌아오지 않는다. 추억은 지나가 버렸다. 그것은 우리에게서 지나가 버린 다른 세계이다.]  P.132



전장에서 젊은이들이 잃어버린 소중한 것들은 어떻게든 보상받을 수 없다. 누가 치유해 줄 수도 없다. 결국 "파울"의 곁에 있던 친구들은 모두 죽는다. 그리고 이제 "파울" 혼자 남았다. 다음 차례는 "파울"일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파울"은 슬프하지 않았다. 다만 아무도 그의 죽음에 대해 신경쓰지 않을 거라는 사실이, 전쟁은 계속 될 거라는 사실이 허탈할 뿐이다. 과연 전쟁은 누구를, 무엇을 위한 것이었을까?    

[온 전선이 쥐 죽은 듯 조용하고 평온하던 1918년 10월 어느 날 우리의 파울 보이머는 전사하고 말았다. 그러나 사령부 보고서에는 이날 <서부 전선 이상 없음>이라고만 적혀 있을 따름이었다.]  P.304




이 책은 반전이나 영웅중의, 정치적 교훈을 담고 있지는 않다. 단지 전쟁의 있는 그대로의 얼굴을, 참혹함과 비참함, 젊은이들이 잃어버린 삶과 꿈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그래서 더 큰 울림과 공감이 독자에게 전해진다. 과연 전쟁은 누굴 위한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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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파랑 2022-04-09 11:18   좋아요 2 | URL
thkang님 축하 감사합니다. 즐거운 주말 보내세요 ^^

thkang1001 2022-04-09 11:19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새파랑님! 감사합니다! 새파랑님께서도 즐거운 주말과 휴일 보내세요!

청아 2022-04-09 13:28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새파랑님~♡ 2관왕 축하드려요!! 우크라이나 사태 때문에 더 읽어보고 싶어요. 주말 바쁘셔도 유쾌하게 보내시길 바래요(*ᴗ͈ˬᴗ͈)ꕤ*.゚

새파랑 2022-04-09 15:11   좋아요 3 | URL
어쩌다 보니 2관왕(?) 인데 이번달은 안될거 같아요 ㅋ 빨리 퇴근하고 소세키의 책을 읽고 싶네요 ^^ 감솨합니다~!!

페넬로페 2022-04-09 15:28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새파랑님, 레마르크의 소설로 리뷰당선되셔서 더 축하드려요.
열심히 읽는 성실함을 언제나 닮고 싶어요**

새파랑 2022-04-09 18:33   좋아요 1 | URL
저는 페넬로페님의 글쓰기를 더 닮고 싶습니다 ^^ 감사합니다. 즐거운 주말 보내세요~!!

scott 2022-04-09 15:50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이곳은 세문집 맛집!
새파랑님의 완독의 황제!
2관왕 추카!추카!^^

새파랑 2022-04-09 18:35   좋아요 1 | URL
제가 세문집만 많이 읽는거 같아요 ㅋ 완독만 하지 잘 이해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 스콧님 감사합니다. 즐거운 저녁 보내세요 ^^

그레이스 2022-04-09 16:14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축하드려요
1차 대전 관련 내용에 레마르크의 소설이 유럽과 미국에 큰 호응을 불러왔다는 내용이 있더군요
저는 다른 출판사걸로 있는데 꺼내놨어요^^

새파랑 2022-04-09 18:36   좋아요 2 | URL
요 책이 번역이 안좋다는 말이 있어서 다른 출판사 읽는게 더 좋을거 같아요~!! 그레이스님 행복한 저녁 시간 보내세요 ^^

bookholic 2022-04-09 21:4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새파랑 님의 이달의 당선작 축하드립니다~~
늘 좋은 책 소개 감사드려요~~
봄꽃 아래 즐거운 독서 되시길...^^

새파랑 2022-04-10 09:32   좋아요 0 | URL
북홀릭님 두번 감사합니다~!! 오늘 무슨 책을 읽을지 고민해봐야 겠어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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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도 흥미진진하다.


아무튼 젊을 때는 뭐든지 색다른 것을 해보고 싶어 하는 법이지. 그런데 그 색다른 일을 다 해보고 나서 생각해보면 어쩐지 바보 같고, 그런 일이라면 하지 않는 게 훨씬 나았을 거라는 생각이 들 뿐이네. - P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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