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22040
˝숲에서 신비를 벗겨내면 서 있는 목재만 남는다. 바다에서 신비를 벗겨내면 짠물만 남는다.˝
돌이킬 수 없는 총성 한발이 그렇게 오랜 이별을 가져올 지 신은 알고 있었을까? ˝윌리엄 트레버˝의 <루시 골트 이야기>는 운명의 장난으로 소중한 것들과 함께 할 수 없었던 ˝골트˝ 가족의 80년 인생을 차분하게 그리고 있다.
먼저 이 책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시대적 배경을 알아야 하는데, 1921년 아일랜드가 자치를 인정받기 이전까지 아일랜드의 땅은 신교도인 영국인 지주들의 차지였다. 그리고 카톨릭인 아일랜드인은 자신들의 땅을 빼앗긴 채 소작농으로 살아야 했다. 하지만 1921년 아일랜드가 영국으로부터 독립하게 되고, 영국인으로부터 지배를 받던 아일랜드인 소작농들은 그들에게 분노를 표출한다. 그리고 이러한 분노에 위협을 느낀 영국인 지주들은 아일랜드를 떠날 수 밖에 없었다.
[아일랜드에서 과거는 적이다, 아빠는 그렇게 말한 적이 있었다.] P.21
아버지는 신교도의 지주였고, 어머니는 영국인이었기 때문에 ˝골트˝ 집안의 집인 ‘리하단‘ 역시 아일랜드인의 표적이 될 수 밖에 없었다. 어느 날 밤 ‘리하단‘을 방화하려고 아일랜드 젊은이들이 침입했고, ˝루시 골트˝의 아버지인 ˝에버라드 골트˝는 자신의 집을 지키기 위해 그들에게 총을 쏜다. 그리고 침입자 중 한명인 ˝호라한˝은 어깨에 총상을 입는다. 이후 ˝에버라드 골트˝는 부상당한 ˝호라한˝의 집을 찾아가서 사죄를 하지만 받아들여지지 않고, ˝골트˝ 가족은 생명의 위협을 느끼게 되어 아일랜드를 떠날 수 밖에 없는 상황에 놓이게 된다.
[이 마지막 밤에 그는 너무 경솔하게 과거를 팔아넘겼고, 이어서 손쉬운 위안으로 딸과 아내를 배신했다고 자신에게 말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P.50
하지만 당시 어린 소녀였던 ˝루시 골트˝는 자신이 너무나 사랑하는 ‘리하단‘과 마을을 떠나길 원하지 않았다. 그리고 아일랜드를 떠나기 전날 밤에 아무도 몰래 집을 나간다. 자신이 없다면 부모님이 집을 떠나지 못할 거라는 단순한 생각 때문이었다. 그리고 자신만이 알고 있는 숲속의 비밀 장소를 찾아간다. 하지만 그곳으로 가는 도중 다리를 다치게 되어 걸을 수 없는 상태로 숲속에 남겨지게 된다.
딸이 사라진걸 알게 된 ˝골트 부부˝와 하인들은 그녀를 찾으러 여기 저기 돌아다니지만 찾지 못한다. 그러던 중 물가에서 그녀의 옷가지와 신발을 발견한다. 그들은 그녀가 물에 빠졌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동네 어부들에게도 수소문해보지만 ˝루시 골트˝를 보았다는 말을 들지는 못한다. 자신들이 괜히 아일랜드를 떠나겠다고 해서 딸이 그런 사고를 당했다고 자책한 ˝골트 부부˝는 결국 딸이 익사한 걸로 확신하고 아일랜드를 떠나 유럽 대륙으로 도망간다. 그리고 자신들의 아픔이 남아있는 아일랜드에는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것이며, 어디에도 정착하지 않고 떠돌아 다니며 살겠다고 결심한다.
[환경과 사건들을 먹이로 독자적인 힘을 얻은 것인지 대위, 그리고 그의 아내와 하인들을 현혹하고 있는 거짓에는 의문이 제기되지 않았고 거부되지도 않았다.] P.57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아니면 또다른 비극이라고 해야 할까? ˝골트 부부˝가 유럽 대륙으로 떠나고 한참이 흘러 숲속에 쓰러져 있던 ˝루시 골트˝가 구조된다. 그리고 ‘리하단‘으로 옮겨지고, 집을 관리하고 있던 ˝헨리˝와 ˝브리짓˝의 보호를 받게 된다. 지인들은 ˝루시 골트˝가 살아있다는 사실을 ˝골트 부부˝에게 알리기 위해 노력한다. 하지만 아무 연고도 없이 유럽의 이곳 저곳을 떠돌아 다니는 ˝골트 부부˝에게 그 소식은 전해지지 못한다. ˝골트 부부˝가 한번쯤은 ‘리하단‘으로 소식을 전하는 편지를 보냈을법도 한데, 그들 부부는 자식을 잃은 고통이 다시 떠오를까봐 단 한번도 ‘리하단‘에 연락을 하지도 않았고, 궁금해 하지도 않았다.
[그가 아내와 함께 바닷가에 수없이 내려갔다는 것, 낮이나 밤이나 지옥 같은 괴로움으로 고통을 겪었다는 것, 아마도 당분간은 정처 없이 떠돌아다닐 듯하다는 것.] P.86
어린시절 잠깐의 실수로 인해 부모님에게 큰 상처를 주었고, 그 실수로 인해 본인 역시 외롭게 남겨진 ˝루시 골트˝는 자신의 집인 ‘리하단‘을 벗어나지 않고, 부모님이 돌아오실때 까지 참회하는 삶을 살아가게 된다. 가까운 지인 이외에는 누구도 만나지 않았던 그녀의 외로움은 점점 커진다.
[한 아이가 자초한 비극, 그리고 그 이후 아이의 삶은 좋은 이야깃 거리가 되었고 낯선 사람들에게는 전설의 소재로 보였다.] P.121
그러던 어느 날 길을 잘못 들어 자신의 집을 방문하게 된 ˝레이프˝를 만나게 된다. ˝루시 골트˝와 ˝레이프˝는 첫 만남부터 서로에게 호감을 갖는다. 그리고 그녀의 주위에 있던 어른들 역시 외롭게만 지내고 있는 그녀에게 ˝레이프˝가 친구가 되기를 바란다. 그렇게 해서 둘은 가까워 지고 서로 사랑에 빠진다.
[그가 길을 잃지 않았다면 그들은 만나지 못했을 것이다. 루시는 그 사실을, 그들이 만나지도 않았고 레이프의 존재를 알지도 못하는 상황을 생각해보려 했다. 그녀에게는 그가 난데없이 나타난 것 같았기에 그가 라하단을 떠나면 난데없는 곳으로 돌아가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 것은 아닌지 궁금했다. 그녀는 절대 그를 잊지 못할 터였다. 평생 그간의 수요일 오후들, 그리고 지금 흐르고 있는 시간을 기억할 터였다. 자신이 나이가 들어, 레이프가 꾸며낸 존재였고 이 여름도 마찬가지 였다고 믿게 되는 날이 온다 해도 상관없었다. 시간은 어차피 기억을 꾸며낸 일로 바꾸어놓기 때문이었다.] P.187
˝레이프˝는 그녀에게 사랑을 고백하고, 그녀와 결혼하고 싶다는 마음을 전한다. 하지만 부모님에게 큰 죄를 지었다고 생각하고 있는 ˝루시 골트˝는 그의 청혼을 받아들이지 못한다. 아직 부모님께 참회를 못했기 때문이다. ˝레이프˝는 계속 그녀를 설득하지만 그녀는 부모님이 고통받고 있는데 자신만 행복할 수 없다는 생각으로 이를 거부한다.
[˝떠나면 보고 싶을 거예요. 다시 돌아오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P.188
결국 ˝레이프˝는 ‘리하단‘을 떠난다. 그리고 그녀에게 계속 편지를 보낸다. 언제까지나 기다릴 거라고 말한다. 그는 기다릴 수 있을거라 믿었다. 하지만 ˝레이프˝ 역시 시간의 힘을 거스를 수는 없었고, 결국 다른 여인과 결혼을 한다. 하지만 마음한구석에는 ˝루시 골트˝에 대한 그리움을 간직한다. 언젠가 그녀의 부모님이 돌아오면 다시 만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희망과 함께...
[˝너는 나를 잊게 될 거야, 올여름도 잊을 거야. 나는 희미해지다 그림자가 되고 목소리는 웅얼거리는 소리가 되어 들리지도 않게 될 거야. 지금은 우리가 여기 앉아 있는 이 현재는 하나의 현실이지만 이건 지속되지 않을 거고, 지속될 수도 없는 현실이야.˝] P.196
한편 ˝골트 부부˝는 유럽을 계속 돌아다니다가 마지막으로 스위스에 정착을 하는데, 하지만 그곳에서 ˝골트 부인˝은 유행병에 걸려 사망하게 된다. 자식을 잃을 슬픔에 계속 짓눌려 살았던 부인은 결국 고향에 딸이 살아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 채 그렇게 타지에서 슬픈 최후를 맞는다. 남편인 ˝에버라드 골트˝는 아내를 스위스의 묘지에 묻어두고 드디어 아일랜도로 돌아간다.
[˝이건 우리 아일랜드의 비극이야.˝ 그는 여러 번 그렇게 말했다. 이런저런 이유로 우리가 귀하게 여기는 것을 계속 떠날 수밖에 없다는 건.˝] P.135
그리고 그곳에서 자신의 딸이 살아있다는 기쁘지만 충격적인 사실을 알게 된다. 하지만 시간이 너무 흘렀던 걸까? ˝루시 골트˝는 아버지를 한번에 알아보지 못한다. 그리고 아버지 역시 기쁨보다는 약간의 어색함을 느낀다. 또한 그녀가 사랑했던 ˝레이프˝와의 사랑을 다시 시작할 수도 없었다. 이미 너무나 많은 세월이 흘렀던 것이다. ˝루시 골트˝는 이제부터라도 과거에서 벗어나 자신만의 인생을 찾을 수 있을까? 아직까지 참회는 끝나지 않은 걸까?
[그러나 회한과 후회와 관련하여 그가 한 모든 말에도 불구하고 대위는 뭔가 해소되지 않은 것이 남아 있음을 알고 있었다. 딸의 음울한 세월은 그 나름의 뭔가를 만들어내 오래전에 딸아이를 사로잡고, 한기를 느끼게 하는 안개처럼 딸아이를 감싸고 있었다. 그렇게 보였다.] P.260
모두에게 아픔일 수 밖에 없었다. 아직 어려서 부모님이 왜 ‘아일랜드‘를 떠나려고 했는지 몰랐던 ˝루시 골트˝는 자신의 가출 때문에 이러한 비극이 일어날 줄 짐작이나 했을까? 그리고 가족을 지키기 위해 ˝에버라드 골트˝가 쏜 한발의 총알이 가족을 찢어놓는 아픔의 시작이 될 줄 상상이나 했을까? 누구의 탓이라고 할 수도 없다. 원인을 찾자면 당시 혼란스러웠던 아일랜드의 시대 상황을 탓해야 할 것이다. 우연과 우연에 의해 발생한 비극은 어쩔 수 없이 스스로 극복하는 수밖에는 없다.
<루시 골트 이야기>는 전형적인 ˝윌리엄 트레버˝의 작품이라는 생각이 든다. ˝루시 골트˝의 기나긴 인생 이야기가 이어지는 동안 문장들은 절대 흥분하지 않는다. 차분하게 흘러간다. 게다가 책속 인물들도 수다스럽지 않다. 딱 필요한 만큼만, 아니 그보다는 약간 부족하게만 이야기한다.
또한 감정을 겉으로 드러내기 보다는 속으로 되내인다. 감정을 표현하지 않은 문장에서조차 아픔의 감정이 느껴진다. 드러나지 않은 아픔이 오히려 더 슬픈 것처럼 말이다. 그래도 책의 마지막 페이지에서 ˝루시 골트˝가 바깥을 바라봤을때 느꼈을 감정이 슬픔은 아니었으면 좋겠다.
[그녀는 창가 의자에 자리 잡고 앉아 수국의 어둑한 푸른빛을 물끄러미 내다본다. 진입로는 어슬어슬해져 나무들의 윤곽이 하늘을 배경으로 또렷하다. 매일 저녁 이 시간이면 그러듯 떼까마귀들이 내려와 풀밭을 헤저으며, 하루가 희미해지는 것을 지켜보는 동안 그녀의 벗이 되어준다.] P.379
Ps. 국내에 번역된 ˝윌리엄 트레버˝의 장편은 세작품인거 같은데 이제 다 읽었다. 개인적인 순위를 매기자면 다음과 같다.
1.여름의 끝 (95점)
2. 루시 골트 이야기 (94점)
3. 펠리시아의 여정 (93점)
(개인적으로 잔잔하고 여운이 남는 작품을 좋아함...)
그런데 ˝윌리엄 트레버˝의 하나의 작품을 다른 사람에게 추천해야 한다면 줄거리가 명확하고 스릴과 재미가 있는 <펠리시아의 여정>으로 하겠다. <여름의 끝>과 <루시 골트 이야기>는 취향에 따라서 약간 심심할 수도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