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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버드 스퀘어
안드레 애치먼 지음, 한정아 옮김 / 비채 / 2022년 2월
평점 :
N22047
˝그는 나보다 딱 세 걸음 앞서가는 내 운명이었다.˝
누군가와 친해지고 싶다는 생각이 들 때 거기에는 많은 이유가 있을 것이다. 하지만 가장 큰 이유는 아마 그 사람이 편하기 때문일 것이다. 나의 진짜 모습을 본다고 해도 떠나지 않을 사람. 아무에게나 보여줄 수 없는 나의 진짜 모습을 보여줄 수 있는 사람을 만난다는 건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 아니 어쩌면 운명적이라고 밖에 할 수 없다.
이집트 출신의 유대인 ˝나˝와 튀니지 출신의 아랍인 ˝칼라지˝의 만남은 운명이었다. 꿈과 좌절이 혼재된 미국이라는 낯선 곳에서, 명문 대학 ‘하버드‘ 인근 상점인 ‘카페 알제‘에서 두 사람은 만났다. 당시 ˝나˝는 하버드 대학원 생으로, 1차 종합시험에서 떨어져서, 이제 1번의 기회밖에 남지 않은 학생일 뿐이었다. 만약 다음 종합시험에서도 떨어져야 한다면 ˝나˝는 고향으로 돌아가야 했다.
그런 좌절감과 외로움 속에서 ˝나˝는 ‘카페 알제‘에서 ˝칼라지˝를 만났다. 하버드 대학원생이자 미국의 영주권이 있는 ˝나˝와는 다르게 ˝칼라지˝는 택시 운전사에 영주권은 없는, 불법체류자의 신세였다. 여러모로 ˝나˝와는 다른 모습이지만, ˝나˝는 그에게 끌렸다. 그리고 우리는 곧 친구가 되었다. 왜 ˝나˝는 ˝칼라지˝에게 끌렸던 걸까?
1. ˝칼라지˝는 ˝나˝의 숨겨진 모습을 대변해주는 사람이었다.
‘하버드 대학원생‘이라는 신분, 그리고 반드시 졸업을 해야 했던 ˝나˝는 언제나 ˝나˝의 본래 모습을 숨겨야 했다. 교수들 앞에서, 학생들 앞에서 ˝나˝는 그들에게 잘 보이기 위해, 인정받기 위해 노력해야만 했다. ˝나˝의 전공인 영문학이 싫은 것은 절대 아니었다. ˝나˝가 좋아서 하는 측면도 있었고, ˝나˝에게는 졸업이라는 목표가 있었기 때문에 감수할 수밖에 없는 문제였다. 하지만 낯선 타지에서 혼자서만 지내야 했던 ˝나˝에게, ˝칼리지˝는 나의 속마음을 보여줄 수 있는 유일한 구원이었다. 평소 감정을 억누르고 답답하게 살던 ˝나˝와는 달리 모든 사람에게 솔직하게 직설적으로 말하는 ˝칼리지˝의 모습은 숨겨놓았던 ˝나˝의 본래 모습을 대변해준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래서 나와는 너무나도 다른 ˝칼라지˝에게 끌리게 되었다.
[나는 모두를 포용했지만 단 한 사람도 사랑하지 않았다. 그는 사랑을 솔직하게 표현했지만 내 사랑은 마음속 깊은 곳에 묻혀 있었다. 그는 미국에 온 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벌써 케임브리지에 사는 거의 모든 주민과 말을 튼 반면, 나는 하버드 대학원에서 사 년째 공부했지만 그해 여름에는 거의 모든 날을 아무하고도 말하지 않은 채 보냈다. 그는 기분이 상하거나 지루할 땐 발끈해서 안절부절못하다가 폭발했지만 나는 그야말로 평정심의 화신이었다. 그는 모든 일에 대해 확고한 자기 의견을 갖고 있었지만 나는 타협이란 이름과 평정심이란 별명을 갖고 있었다. 그가 무슨 일을 시작하면 아무도 그를 막을 수 없었지만 나는 누가 조금만 얼굴을 붉혀도 아무것도 못 했다. 그는 누군가를 버리고 깨끗이 잊을 수 있었지만 나는 누군가를 버리기로 결정하고 나서도 영원히 그에게 앙심을 품곤 했다. ] P.72
2. ˝칼라지˝는 ˝나˝의 실패한 미래의 모습을 미리 보여주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나˝와 ˝칼라지˝ 사이에는 보이지 않는 신분의 벽이 존재했다. 단순히 유대인과 아랍인의 관계 이상으로, ˝나˝는 미국 영주권이 있었지만, ˝칼라지˝는 불법 체류자였다. ˝칼라지˝는 언제 추방되더라도 이상할게 없는 사람이었다. ˝나˝는 그를 보면서 ˝나˝를 다잡을 수 있었다. 만약 종합시험에서 한번 더 떨어진다면 ˝나˝의 미래는 ˝칼라지˝와 다를 바 없을 것이다.
[그는 날마다 벼랑 끝에 서 있었지만 나는 벼랑 밑을 내려다봐야 했던 적이 한 번도 없었다. 내게는 그 심연을 가릴 담장이나 생울타리가 항상 있었던 반면 그에게는 그런 것이 주어지지 않았다. 한편 또 다른 차이도 있었다. 그는 그 벼랑에서 물러서서 살아나올 방법을 알고 있었지만 나는 벼랑과 나 사이에 그를 세워놓았다. 그는 내 가림막, 내 스승, 내 목소리였다. 어쩌면 내가 그토록 필사적으로 추구했던 삶이 그의 삶이 었는지도 모르겠다.] P.96
그래서였는지 ˝나˝는 하버드 대학 관계자 앞에서 ˝칼라지˝와 함께 있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꼭 그가 부끄러웠기 떄문만은 아니었다. 단지 그와의 만남이 ˝나˝의 신분상의 문제로 이어질까봐 걱정이 되었기 때문이다. 어쩌면 정말 부끄러웠던 건 ˝나˝의이기적인 마음이었을 것이다.
[나는 그를 부끄러워했고, 그를 부끄러워하는 나 자신이 부끄러웠다. 내가 속물이라는 사실이 부끄러웠다. 우리의 공통점이 열악한 경제 형편 말고도 훨씬 더 많다는 사실을 남들에게 들키는 것이 부끄러웠다. 내가 그를 얼마나 좋아하는지 스스로 인정하지 않는 게, 우리를 하나로 묶는 것은 저급한 카페에서 어울리기 좋아하는 극빈자 정체성뿐이라고 생각하는 나 자신이 부끄러웠다.] P.303
3, 그럼에도 불구하고 ˝칼라지˝는 나의 모든 것을 이해해주는 사람이었다.
˝칼라지˝는 아마 ˝나˝의 이런 이중적인 마음을 알았을 것이다. 그럼에도 그는 ˝나˝를 비난하지 않았다. 있는 그대로의, ˝나˝의 모든 부끄러움과 잘못까지도 이해해주는 사람이었다. ˝나˝가 말하지 않더라도 만나지 않았으면 하는 사람과의 만남에 있어서는 알아서 자리를 피했고, ˝나˝가 한동안 연락이 없더라도, ˝나˝가 필요에 의해서만 갑자기 연락하더라도 ˝칼라지˝는 항상 그 자리에 있었다. 그리고 나를 반겨주었다.
[나는 칼라지의 그 멍한 표정을 절대로 잊지 못할 것이다. 그는 나를 못 본 척하지 않았다. 그를 못 본 척하는 내 모습을 못 본 척하고 있었다. 그는 나를 자유롭게 놓아주고 있었다.] P.319
하지만 ˝나˝는 정작 ˝칼라지˝가 도움을 요청할 때 나의 안위를 위해서 그를 진심으로 도와주지 않았다. 자주 ˝칼라지˝를 피했다. 2차 종합시험을 통과하고 이제 창창한 미래가 막 열리려고 할 때는 오히려 ˝칼라지˝가 내일이라도 당장 추방되기를 마음속으로 바란적도 있었다. 하지만 ˝칼라지˝는 그런 못난 ˝나˝를 마지막 순간까지도 이해해주고 배려해 주었다.
[내가 무슨 수를 써서라도 피하고 싶었던 것은 눈물의 작별이었다는 끔찍한 사실을 깨닫기까지 시간이 좀 걸렸다. 나는 그가 우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았다. 내가 울고 싶지도 않았다. 포옹도 싫었고, 야단스러운 약속도 싫었고, 슬픔을 과장하는 피상적인 말도, 비참한 기분도 싫었다. 깨끗하고 태연하게 작별하고 싶었다. 나는 완전히 구제불능으로 가식적인 인간이었다.] P.372
˝나˝는 도대체 왜 그렇게 매몰차게 ˝칼라지˝를 외롭게 떠나보낸 걸까?
[그가 떠나고 오랜 시간이 흘렀지만 여전히 내 안에서 옥신각신 싸움을 벌이고 있었다. 나는 그를 발견하는 일이 결코 없기를 바라면서도 끝까지 그를 찾고 싶어했다. 매사추세츠 대로를 달리고 있거나 브래틀 거리에 주차된 그의 택시를 보면 더 이상 대면하고 싶지 않은 다양한 감정과 의문들이 내 마음속에서 되살아났다] P.381
많은 시간이 흘러 이제 나의 아들이 하버드 대학생이 되고, 나는 아들게 함께 모교인 하버드를 방문한다. 잊었다고 생각했는데, 이젠 괜찮다고 생각했는데 아직도 남아있는, 다시 돌아갈 수 없는 그때 그시절의 흔적은 나를 추억속으로 불러들인다. 그리고 생각한다. ˝칼라지˝는 잘 살고 있을까? ˝칼라지˝에게 있어서 ‘카페 알제‘, ‘하바드‘ 그리고 ˝나˝는 어떻게 추억될까?
[자네가 날 찾아내서 정말 다행이야. 난 잘 지내, 딸이 둘 있지. 좋은 추억을 갖고 있고, 사랑해..
나도 당신을 사랑해요.] P.390
<하바드 스퀘어>는 1인칭 주인공인 ˝나˝의 시각으로 글이 진행되어 독자에게는 오로지 ˝나˝의 감정이 직접적으로 전달되지만, 개인적으로는 간접적으로 드러난 ˝칼라지˝의 감정에 더 이입하여 책을 읽었다.
주인공인 ˝나˝가 바라본 ˝칼라지˝는 세 발자국 앞서 나가는 운명이었지만, ˝칼라지˝가 바라본 ˝나˝는 아마 닿을 수 없는 운명이었을 것이다. 겉으로는 절대로 표현하지 않았지만, ˝칼라지˝는 아마 닮고 싶었던, 그러나 결코 될 수 없었던 ˝나˝의 모습을 동경하지 않았을까?
그래서인지 항상 ˝나˝의 부탁을 들어주고 옆에 있고 싶어했던, ˝나˝에게 조그마한 도움이라도 주려고 했던 ˝칼라지˝의 모습에 연민과 동질감을 느꼈다. 눈치가 빠른 ˝칼라지˝는 ˝나˝가 함께 있길 꺼려하는 상황을 분명히 눈치챘을 것이다. ˝나˝의 마음이 변했음을 분명히 느꼈을 것이다.
그럼에도 ˝칼라지˝는 어쩔 수 없는 상황에 이르기 전까지도 ˝나˝를 떠나지 않았다. 마지막까지도 원망하는 말 조차도 남기지 않았다. 어쩌면 이런게 진짜 동경이고, 진짜 사랑이라는 생각이 든다.
‘하버드‘를 떠난 ˝칼라지˝가 다른 곳에서는 행복하길, 그리고 ‘하버드 스퀘어‘에서의 추억을 아름답게 간직하길 바래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