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22052
˝소설들에는 이 ‘그런데‘, ‘갑자기‘가 너무 자주 나온다. 하지만 작가들은 이 말을 쓸 수밖에 없지 않은가. 그만큼 인생에는 갑작스러운 일들이 얼마나 가득한데!˝
지금까지 체호프의 책은 다섯권을 읽었고, 이정도면 많이 읽었다고 생각을 해서 한때는 이젠 체호프 책은 더이상 안사도 되겠다고 생각을 했었는데, 아직 안읽은 그의 작품들은 많이 남아 있었다. 이번에 읽은 열린책들에서 나온 체호프의 <개를 데리고 다니는 부인> 단편집에는 총 17편의 중/단편이 수록되어 있는데, 이 중 처음 읽은 그의 작품은 무려 11편이었다. 거의 처음 읽는 책 수준이었다.
물론 여기 수록된 작품 중 <6호 병동>, <검은 수사>, <개를 데리고 다니는 부인> 처럼 완성도가 높고 유명한 작품들은 다른 출판사 책에도 실려 있어서 이미 읽었지만 그 외의 다른 단편들도 역시 좋았다.
타 출판사에서 나온 단편집과 차이점을 찾아보자면 종교, 가난, 농민에 대한 삶을 다룬 작품이 다소 많이 수록되어 있다는 점을 들 수 있겠다.
<대학생>은 복음서의 열두 사도 중 베드로에 대한 이야기를 통해 과거나 현재는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고 이어지 있다는 체호프의 통찰력을 보여준다.
[이런 모든 공포가 예전에도 있었고, 현재에도 있으며, 미래에도 있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1천 년이 지나도 현실은 더 나아지지 않을 것이다. 이런 생각이 들자 그는 집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P.203
<농부들>에서는 농노제가 없어져서 농부들은 자유롭게 되었지만, 이후 살아갈 방법을 몰랐던 농부들의 가난과 각종 무거운 세금 때문에 오히려 농노제 이전 시대보다 더 힘들게 살아가는 농부들의 고통을 풍자적으로 그리고 있다. 돈이 들기 때문에 가족들의 죽음을 기대하는 모습에서 가난이 주는 아이러니를 느낄 수 있었다.
[죽음은 부농들만 걱정했다. 그들은 부유해질수록 하느님과 영혼의 구원을 잘 믿지 않았고, 지상에서의 마지막이라는 공포심이 들 때에만 초에 불을 켜고 기도를 드렸다. 가난한 농부일수록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노인과 노파의 얼굴에서는 자신들이 너무 오래 살았고 이제 죽을 때가 되었으며 또 그런 것에 개의치 않는다는 표정을 읽을 수 있었다. 마리야도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늦지 않게 죽음이 찾아와 주기를 바랐고 또 자신의 아이들이 죽기라도 하면 기뻐했다.] P.285
<새로운 별장> 역시 부자 와 가난한 농부의 대비를 통해 농부들에 대한 연민과 풍자를 보여준다. 부자는 돈이 많음에도 이웃의 가난한 농부들을 이해하고 도와주려고 다가가지만, 농부들은 그런 부자의 호의를 인식하지도 못하고 오히려 부자 가족에게 하찮은 피해와 불안만을 계속 안겨준다. 결국 부자 가족은 시골을 떠나 모스크바로 돌아가게 된다. 하지만 농부들은 자신들은 착하고 온순하며, 자신들은 부자의 호의를 요구한 적도 없다며 무엇이 잘못된 것인지를 이해조차 못한다. 그런데 이런 어리석음을 단지 농부들의 무지 탓으로만 돌려야 할까?
[안개에 덮이듯 가장 중요한 것을 보지 못하고, 가축으로 인한 피해, 말 굴레, 펜치와 같이 지금 생각해 보면 아주 하찮은 그런 사소한 것들만 보인 것은 대체 무슨 까닭인가? 별장의 새로운 주인은 평화롭게 살고 있는데, 대체 왜 엔지니어하고는 잘지내지 못했을까?] P.313
이 책에 수록된 처음 읽은 작품중 가장 좋았던 작품은 <문학 교사> 였다. 교사라는 안정적인 직업에 부잣집 딸인 ˝마샤˝의 개인 수업을 해주던 주인공 ˝니끼찐˝은 그녀에게 마음이 있었고, 결국 힘겨운 고백을 통해 그녀와 결혼한다. 많은 지참금을 가지고 온 그녀 덕분에 그는 안정적인 직업과 더불어 풍족하고 아늑한 삶을 살아가게 된다. 여전히 그녀를 사랑하지만 왠지 모르게 그의 마음은 점점 새로운 것을 갈망하게 된다. 점점 자신이 가진 모든 행복을 시시한 것으로 여기게 된다. 왜 어떤 사람들은 현재를 만족하지 못하는 걸까? 사람의 욕망이 어떻게 정점을 거쳐 시들어 지는지를 잘 보여주는 작품이었다.
[나는 어디에 있는가? 주위는 온통 저속함, 저속함뿐이다. 따분하고 보잘것없는 사람들, 발효 크림이 담긴 단지들, 우유가 담긴 항아리들, 바퀴벌레들, 우둔한 여자들..…. 저속함보다 더 무섭고 모욕적이며 슬픈 것은 없다. 여기를 떠나야겠다. 오늘 당장 떠나야겠다. 그렇지 않으면 난 미쳐 버리고 말 것이다.] P.242
가장 충격적인 작품은 역시 <자고 싶다> 였다. 어린 ˝바리까˝는 어느 가정집에서 부모님과 함께 사는 가난한 열세 살 소녀이자 그 집의 유모 였다. 아버지가 죽어도 가볼 수도 없고 아기를 돌보는 일에다가 온갖 집안일에 시달리던 그녀는 자신이 살아있음과 잠을 방해하는 것이 큰 소리로 울어대는 아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그리고 끔찍한 짓을 저지르고 그토록 원하던 잠을 잔다. 그런데 이러한 비극을 오직 그녀 탓으로만 돌려야 할까?
[웃으며 눈을 끔벅이며 초록색 반점을 손가락으로 으르며 바리까는 요람으로 살그머니 다가가 아기 쪽으로 몸을 굽힌다. 아기를 질식시키고 서둘러 바닥에 눕는다. 이제는 잘 수 있다는 기쁨에 웃는다. 1분도 채 지나지 않아 이미 바리까는 곤하게 자고 있다. 마치 죽은 사람처럼...] P.72
그의 작품은 우스꽝스러운 풍자 속에 진지한 의미를 숨겨두고 있고, 가끔 황당하고 갑작스럽게 글이 끝나지만 긴 여운을 준다. 역시 단편은 체호프다.
간결함은 재능의 자매다.… 요점이 있고 간결해야 잘 쓴 이야기라 할 수 있다. 잘 쓴 이야기를 읽는 일은 한 잔의 보드까를 마시는 것과 같다.
<안톤 체호프>
체호프는 반드시 읽어야 할 작가이다. 그는 우리를 정신적으로 성숙하게 만들어 주는 예술가이다.
<수전 손택>
당신의 개를 데리고 다니는 부인을 읽고 나니 다른 사람의 작품은 모두 펜이 아닌 막대기로 쓴 것처럼 여겨집니다.
< 막심 고리끼>
Ps 1. 그래도 역시 가장 좋은 작품은 <개를 데리고 다니는 부인> 이었다. 몇번을 읽어도 좋다.
Ps 2. 내가 지금까지 읽은 체호프의 책은 여섯권인데, 또 읽어야 할 책이 있는지 찾아봐야겠다. 체호프의 모든 단편이 실린 전집세트가 출판되면 좋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