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22075
˝합리주의만으로는 밝힐 수 없는 게 이 세상엔 수두룩하잖아요.˝
그렇다. 세상을 합리적으로만 바라본다면 이 세상은 삭막함 그 자체일 것이고, 풀지 못한 숙제로 가득할 것이다. 그리고 믿는다면 신이란 인간의 내면에 살아 있는건지도 모르겠다. 설명할 수 없는 믿음은 그렇게 강한 것이다. 엔도 슈사쿠의 <깊은 강>은 이소베, 미쓰코, 누마다, 기구치, 오쓰 등 총 다섯명의 인물들을 통해 설명할 수는 없는 믿음과 구원에 대해 말하고 있다.
1. 이소베
중년의 남성 이소베에게는 말기암에 걸린 부인이 있다. 평소에 무똑똑하고 애정표현도 없지만 이 세상에서 단 한명 의지할 수 있었던 부인이 곧 이 세상에서 사라진다고 하니 막막하기만 하다. 그는 부인에게 그녀가 말기암이라는 사실을 결코 말할 수 없었기에 어떻게든 숨긴다. 하지만 부인은 자신의 죽음을 이미 예감하고 있었다.
[˝저 나무, 얼마나 살아왔을까요?˝ ˝200년쯤 아닐까? 아무튼 이 부근에서 가장 오래된 나무겠지.‘ ˝저 나무가 그러더군요. 목숨은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고.˝] P.12
그녀는 자신이 죽을 운명을 남편에게 숨긴다. 아파도 아픈 내색을 하지 않는다. 오히려 마음속으로는 홀로 남아 궁색하게 살아갈 남편을 걱정한다. 이게 사랑인걸까? 그녀는 꼭 다시 태어날테니 자신을 꼭 찾아달라고 남편에게 부탁한다.
[˝나 반드시 다시 태어날 거니까, 이 세상 어딘 가에. 찾아요. 날 찾아요. 약속해요, 약속해요.˝ 약속해요, 약속해요라는 마지막 목소리만은 아내의 필사적인 소망이 담겨서일까, 다른 단어보다 강했다.] P.25
그리고 아내는 그렇게 떠난다. 그리고 이소베는 49제를 지낸다. 이소베는 이제 다시는 아내를 볼 수는 없지만 왠지 다시 돌아올 것만 같은 기분이 든다. 집에 와서 아내가 남기고 간, 아내의 손길이 스쳐간 물건을 볼 때다 강한 그리움에 쌓인다. 그러면서 아내가 다시 태어나겠다는 말을 믿고 싶어진다. 그리고 아내가 환생할거라 생각되어지는 인도의 갠지스강으로 떠난다.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남녀가 있지만, 그중에서도 인생의 동반자가 된 인연. 필시 그것은 우연한 만남일게 틀림없는데도, 지금의 이소베는 그 인연이 태어나기 전부터 있었던 느낌이 든다.] P.240
2. 미쓰코 그리고 오쓰
자신을 속박하는 것에 냉소를 보내고 단지 삶에 지겨움을 느꼈던 대학생 미쓰코, 그녀는 자신과는 달리 기독교 신앙에 빠져 사는 샌님 오쓰라는 대학생을 알게 된다. 그리고 그를 타락시고 싶어서, 신에게서 그를 빼앗고 싶어서 그에게 접근한다. 그리고 그를 유혹한다.
[˝간단해요. 그런 갑갑한 학생복, 입지 말아요. 저녁에 쿠르톨 하임에 가서 무릎 꿇고 기도 따위 하지 말아요. 당신 어머님은 믿었을지 모르겠지만, 당신은 그런 거 믿지말아요.˝] P.63
오쓰는 처음 경험한 연애의 강렬함 때문에 잠시 신을 멀리하고 그녀에게 빠진다. 하지만 미쓰코는 그를 사랑한게 아니었기에, 그녀에게는 진심이란게 없었기에 자신의 손아귀에 들어온 오쓰를 바로 버린다. 오쓰는 괴로움을 느끼지만, 어쩌면 이게 기회가 되건지도 모른다. 그는 이 경험을 통해 더욱 신학에 매진하게 되고, 성직자가 되기 위해 프랑스로 떠난다. 왜 그녀는 그렇게 못되게 그를 대했던 걸까?
[˝당신한테 버림받았기 때문에, 나는 인간에게 버림받는 그 사람의 고뇌를 조금은 알게 되었습니다. 나루세씨한테 버림받고, 너덜너덜해져 갈곳도 없이 어떡하면 좋을지 알 수가 없었고, 도리없이 다시 그 쿠르트 하임에 들어가 무릎끓고 있는 사이, 나는 들었습니다. 오라, 하는 목소리를, 오라, 나는 너와 다름없이 버림 받았도다. 그러니 나만은 결코 너를 버리지 않겠노라, 하는 목소리를˝ ] P.92
미쓰코는 부유한 집안으로 시집을 가지만 그곳에서도 적응하지 못한다. 결국 이혼을 하고 누구와도 어울리지 못한채 살아가며, 공허한 마음을 달래기 위해 주말에는 병원 봉사활동을 하며 살아간다. 하지만 공허한 마음은 사라지지 않는다. 그러던 어느날 오쓰가 프랑스를 떠나 인도의 겐지스강에 있다는 이야기를 우연히 듣는다. 성직자를 꿈꾸던 그가 왜 힌두교의 인도로 떠났는지 궁금증도 생기고, 평소 오쓰에 대한 죄책감을 가지고 있던 그녀는 인도의 겐지스강으로 떠난다.
[대학 시절에 몸속을 마냥 치달았던 자신을 더럽히고 싶다는 그 충동이 얼마나 어리석은 것이었는지 그녀는 사회인이 되고서야 깨달았다. 마음 깊숙이 뭔가 파괴적인 것이 숨죽이고 있다. 그것이 분명한 형태를 취하기 전에 미쓰코는 칠판지우개로 글씨들을 모조리 지우듯 소멸시키고 싶었다.] P.77
3. 누마다
어린시절 키우던 강아지와의 교감을 통해 마음의 안정을 얻었던 누마다, 그는 강아지와의 추억 덕분에 동물에 관한 이야기를 그리는 동화작가가 된다. 하지만 누마다는 부인과의 관계에서는 내색은 하지 않지만 왠지 모를 고독을 느낀다. 인간과 인간 사이에는 건널 수 없는 강이 있는걸까? 그는 오히려 자신이 키우고 있는 새에게 동질감을 느낀다.
[누마다는 어떤 부부건 간에, 서로 용해될 수 없는 고독이 있음을 결혼 생활을 지속하면서 알았다. 그러나 그 자신의 고독과 이 새의 고독은 밤의 정적 속에서 서로 통한다.] P.115
그러던 어느날 누마다는 패결핵에 걸리게 되고, 생사를 넘나드는 투병생활을 하게 된다. 이를 안쓰러워하는 아내는 평소에 동물과의 교감을 즐거워하는 남편을 위해 구관조 한마리를 선물한다. 누마다는 구관조에게 마음을 열고 자신의 고통을 고백한다. 이를 통해 마음의 평안과 구원을 얻는다.
[만약 인간이 진심으로 이야기 나누는 대상을 신이라 한다면, 누마다에게 신은 때때로 검둥이이거나 코뿔소새이거나 이 구관조였다.] P.121
이후 수술은 성공적으로 끝났다. 하지만 그가 수술하는 동안 그의 구관조는 죽게 된다. 누마다는 자신을 살리려고 구관조가 죽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리고 자신을 살린 구관조에 보답하기 위해, 구관조의 명복을 빌기 위해 인도의 겐지스강으로 떠난다.
[˝다릅니다. 목욕재계는 죄의 더러움, 몸의 더러움을 정화하기 위한 행위이지만, 갠지스강의 목욕은 정화와 동시에 윤회 환생으로부터의 해탈을 기원하는 행위이기도 합니다.] P.161
4. 기구치
최악의 전투라고 알려져 있는 임팔전투에 참가했던 기구치, 보급선이 막혀 후퇴할 수 밖에 없었던 그의 부대는 아사로 인해, 병으로 인해 다수의 희생자가 발생한다. 기구치 역시 이를 피해갈 수 없었다. 말라리야에 걸린 그는 부대원들과 함께 후퇴할 수 없었고 움직이지도 못하고 혼자 남겨질 수 밖에 없는 상황에 처한다. 하지만 동료 쓰가타는 그를 버리고 갈 수 없었고, 곁에 남아서 기구치를 돌본다.
먹을 것이 전혀 없던 그곳에서 쓰가타는 인근 마을에서 발견한 고기를 얻어 온다. 그리고 그와 함께 나눠먹으면서 어떻게든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 발버둥을 친다. 신의 구원이었을까? 동료의 헌신 때문이었을까? 그 둘은 생존해서 일본으로 돌아온다. 기구치는 그럭저럭 풍요로운 삶을 살지만, 쓰가타는 전쟁의 충격 때문인지 알콜중독에 빠져 살고, 결국 병원에 입원한다.
[˝난 말이제, 전쟁에서 돌아온 뒤로, 기구치 씨처럼 사회생활도 변변히 꾸려 나갈 수 없었다니께. 술이라도 안 마시면 속이 갑갑한 기라. 내 맘 이해하겠지?˝ 하고 대답했다.] P.136
기구치는 살기 위해선 술을 끊어야 한다고 쓰가타에게 말하지만 쓰가타는 도저히 술 없이는 버틸수 없다고 한다. 그리고 쓰가타는 기구치에게 충격적인 사실을 고백한다. 그때 임팔에서 우리가 먹었던 고기는 동료의 인육이었다고, 귀국해서 동료와 너무 닮은 아들을 본 순간 동료가 계속 떠올라서 너무 괴로웠다고, 그래서 술 없이는 도저히 버틸 수 없었다고.
[˝미얀마에서 말야, 죽은 병사의 고기를…… 먹었어. 아무것도 먹을 게 없었지. 그렇게 하지 않고는 살아남지 못했어. 그만치 아귀도에 빠진 자를, 당신의 하느님은 용서해 주시는가?˝] P.152
전쟁의 비참했던 경험과 쓰가타의 괴로움을 옆에서 지켜봐야만 했던 기구치는 그의 명복을 빌기 위해, 전쟁에 대한 참회를 위해 인간의 생과 사가 만나는 인도의 겐지스강으로 떠난다.
[˝신이란 당신들처럼 인간 밖에 있어 우러러보는 게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인간 안에 있으며, 더구나 인간을 감싸고 수목을 감싸고 화초도 감싸는 저 거대한 생명입니다.˝] P.177
이런 다양한 사연을 가진 다섯명의 사람들이 인도의 겐지스강에서 만난다. 죽은자도 산자도 모두가 찾아오는 이곳, 삶과 죽음이 만나는 이곳. 저마다 온 이유는 다르겠지만, 그들은 이곳에서 저마다의 구원을 얻을 수 있었다. 그 구원이 무엇이라고 정확히 설명할 수는 없겠지만 스스로가 구원을 받았다고 믿는다면 그걸로 답은 찾은거라 생각한다. 꼭 신을 만날 필요는 없다. 신은 인간 안에 있는거니까.
[강은 그의 외침을 받아 내고 그대로 묵묵히 흘러간다. 그런데 그 은빛 침묵에는, 어떤 힘이 있었다. 강은 오늘까지 수많은 인간의 죽음을 보듬으면서 그것을 다음 세상으로 실어 갔듯이, 강변의 바위에 걸터앉은 남자의 인생의 목소리도 실어 갔다.] P.285
Ps. 엔도 슈사쿠가 사망했을 때 자신의 관에 넣어달라고 한 작품이 <침묵>과 <깊은 강> 이라고 한다. 지금까지 위의 두 작품과 <바다와 독약> 까지 세 작품을 읽었는데, 모두 100점짜리 작품이었다.
그래도 굳이 순위를 매겨보자면
1.깊은 강 2. 침묵 3. 바다와 독약 순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