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23076

˝선물 같은 거야,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건˝


오늘은 ‘윌리엄 트레버‘의 <운명의 꼭두각시> 리뷰를 써야겠다는 생긱이 들었다. 그래서 이 책을 가지고 무작정 집을 나섰다. 내가 지금까지 국내에서 출판된 책은 다 읽을 정도로 트레버의 팬이고, 리뷰도 다 썼지만 이 책은 쉽게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해 여름, 7월 마지막 주와 8월 내내, 그리고 9월의 3일간 난 평생 그 여름을 사랑해왔다.]  P.165



일단 트레버의 작품 중에서도 독특한 편이고, 다른 어떤 소설하고도 비교를 해봐도 매우 유니크하다. 그리고 이 작품은 리뷰를 읽는 순간 스포가 되기 때문에, 앞으로 이 책을 읽을 분들에게 피해가 갈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절대 리뷰를 쓰는게 귀찮아서 그런건 아님...)



책은 총 6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1장,4장은 윌리,
2장,5장은 메리엔,
3장,6장은 이멜다
의 이야기이다. 구성을 보면 정말 간단하지만 결코 간단하지가 않다. 4,5,6장은 대단히 짧다. 그런데 대단히 강렬하다.

[나는 우리가 걷고 또 걷는 동안 당신이 격식을 차리느라 지루하다는 말을 못 한 건 아닌지, 그게 궁금했다. ˝우리는 킬네이에 갈 수도 있어요.˝ 내가 제안했다. ˝당신에게 킬네이를 보여주면 좋을 텐데.˝ 당신은 미소 지으며 그러고 싶지만 당신에게 너무 슬프지 않을까요, 라고 말했다. 당신과 함께면 슬플 일은 없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말하지 않았다.]  P.168



이야기하고자 하는 바는 더 간단하다. ‘복수 그리고 피할수 없는 운명‘ 이라고 할까나. 아무리 노력하고 발버둥쳐도 일어날 일은 일어나고 만나야 할 사람은 만나게 된다. 단지 그렇게 만나는 일과 사람이 꼭 행복을 가져다 주는 건 아닐뿐... 아주 오랜 시간이 흘러야만 가능한 것도 있고...

[˝내 말은, 이멜다, 일이 그렇게 된다는 거야. 가장 중요한 일은 우연히 일어난단다.˝]  P.291



그저 가업을 이어받고 싶었던 주인공 ‘윌리‘는 어쩔 수 없는 운명에 의해 사랑 대신 복수를 선택한다. 그리고 그의 운명의 변곡점에 끼어든 사람이 바로 ‘메리엔‘이다. 그녀가 그를 만나지 않았더라면 두 사람의 운명은 분명히 바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가정을 할 필요는 없을듯하다. 아주 오래전부터 두 사람은 ‘운명의 꼭두각시‘ 처럼 만날 수 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긴 이별을 위한 짧은 만남이었다고나 할까?

[당신 방 앞에 선 나는 아주 가볍게라도 문을 두드리지 않았다. 그저 문을 열었다. 모든 두려움과 도덕이, 세상의 모든 잣대가 내게서 사라졌다. 난 아무것에도 관심을 두지 않았다. 내가 당신을 사랑한다는 걸 당신이 알아야 한다는 것 말고는, 내가 당신을 사랑한다는 걸 알면 당신이 적어도 약간의 위안을 얻을지 모른다는 것 말고는. 난 램프를 화장대에 올려놓고 당신 이름을 불렀다.]  P.198



각자가 자신의 의지를 가지고 최선의 행동과 선택을 하지만 그 결과가 언제나 행복을 가져다 주진 않는다. 오히려 인간은 불완전하기에 한번의 선택이 최악의 불행으로 이어질지도 모른다. 그렇더라도 인간은 의지를  가지고 있기에 선택을 해야 하고,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 가만히 있으면서 운명의 꼭두각시처럼 살 수는 없으니.

[그는 사진속의 미소를 짓고 그가 사랑하는 소녀는 밀짚모자 띠에 조화 장미를 달고 있다. 그들은 딸의 미친 상념 속 짧은 서사시에서 자신들이 그렇게 존재한다는 것을 안다. 그들은 이 끝에 볼로냐 소녀의 머리 위를 떠돌던 성체만큼이나 놀라운 기적이 있음을 안다. 그들은 오늘같은 날이 허락된 것에 감사하고, 추함이라곤 없는 딸의 고요한 세계의 은총에 감사한다.]  P.336



잔혹한 운명일지라도 사람은 작은 희망을 가지고, 누군가를 기다리며, 시간을 인내하고, 사랑을 꿈꾼다. 인생이 아름다운건 사람 때문이다.




Ps 1. 영국과 아일랜드 간의 역사적/종교적 갈등을 공부하고 이책을 읽으면 이해가 한층 쉬울것이다.

Ps 2. 이게 다 러드킨 중사 때문이다.

Ps 3. 한겨레출판사에서 나온 윌리엄 트레버 작품들의 책탑이다. 너무 뿌듯하다. 여섯권 모두 100점  만점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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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okholic 2023-11-18 18:3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모아 놓으니, 책들이 무척 예쁘네요..^^

새파랑 2023-11-18 18:38   좋아요 1 | URL
알록달록 완전 마음에 듭니다 ㅋ 한겨레출판사에서 더 많이 번역해주면 좋겠습니다~!!

페넬로페 2023-11-18 18:4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찌찌뽕~~
저도 며칠간 이 책에 대한 리뷰를 쓰려고 고민하고 있는데 정말 힘드네요 ㅠㅠ
책탑이 넘 예쁜데
읽을 때 계속 책을 양손에 잡고 있어야해서 좀 많이 불편해요.출판사가 이 점을 고려해줬으면 좋겠어요^^

새파랑 2023-11-18 18:48   좋아요 1 | URL
페넬로페님 리뷰를 기다리다가 제가 먼저 썼습니다 ㅋ 리뷰 밀린게 많아서 일단 급하게 썼습니다~!! 그런 불편함이 있었군요. 전 전혀 몰랐습니다. 그냥 그러려니 하고 읽어서요 ㅋㅋ

청아 2023-11-18 21:4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와...이렇게 쌓아 놓으니 참 근사합니다ㅋㅋ새파랑님이
독특하다고 강조하시니 더 궁금하고요. 지금 밀린 책이 많지만<운명의 꼭두각시>를 꼭 읽어봐야겠네요.

새파랑 2023-11-18 21:50   좋아요 1 | URL
전 이런 구성의 책을 처음 읽어봤습니다 ㅋ 트레버 장편중에는 이 책이 가장 좋은거 같아요~!!
이 책은 소장각입니다~!!

Falstaff 2023-11-18 21:44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ㅎㅎ 전 리뷰 써놓았습니다. 마리오 바르가스 요사의 켈트의 꿈 읽은 것이 도움이 되더군요.

새파랑 2023-11-18 21:52   좋아요 3 | URL
폴스타프님의 리뷰가 너무 궁금합니다~! <켈트의 꿈>을 읽어봐야 겠습니다~! 한번 읽었을때는 좀 어리둥절했고 다시 읽으니까 아! 이랬습니다. 역시 트레버는 좋네요~!!

페넬로페 2023-11-19 01:20   좋아요 2 | URL
저도 켈트의 꿈
읽어봐야겠어요.

Falstaff 2023-11-19 07:14   좋아요 2 | URL
제 독후감은 12월 13일 올라올 겁니다. 지금 읽어봤는데, 참 드럽게 못 썼더군요.
˝이게 다 러드킨 중사 때문이다.˝
저는 이게 불만이라 별 하나 깠습니다. 학살, 폭력, 범죄자들은 이산하가 말했듯이 언제나 평범한 모습을 하고 있는 인간들입니다. 이 평범한 배추 장수 한 명이 없어진다고 평화가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고, 없었어도 퀸턴 가는 거덜이 났을 테니까요.

새파랑 2023-11-19 08:48   좋아요 1 | URL
아 그러셨군요. 엄마의 러드킨에 대한 원망(집착?) 때문에 후손들이 운명의 굴레에 갇혔다고 생각했는데 ㅋ 생각해보니 러드킨이 아니었더라도 윌리와 메리엔은 만날 운명이었긴 하네요~!!

그레이스 2023-11-19 09:4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트레버는 새파랑님과 폴스타프님 리뷰로부터..!

새파랑 2023-11-19 09:47   좋아요 1 | URL
저는 리뷰를 쓰다만거 같아서 민망하네요 ㅋ 이 작품 그레이스님이 좋아하실거 같아요~!!

자목련 2023-11-20 11:2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새파랑 님이 사진을 보니 트레버의 전작을 모으고 싶은 열망이 마구마구!

새파랑 2023-11-20 11:36   좋아요 0 | URL
트레버는 사랑! 입니다! 모아놓으니 더 예쁜거 같아요~!!
 

책 전체에다가 밑줄을 긋고 싶었다.

그해 여름, 7월 마지막 주와 8월 내내, 그리고 9월의 3일간 난 평생 그 여름을 사랑해왔다 - P165

나는 우리가 걷고 또 걷는 동안 당신이 격식을 차리느라 지루하다는 말을 못 한 건 아닌지, 그게 궁금했다. "우리는 킬네이에 갈 수도 있어요." 내가 제안했다. "당신에게 킬네이를 보여주면 좋을 텐데." 당신은 미소 지으며 그러고 싶지만 당신에게 너무 슬프지 않을까요, 라고 말했다. 당신과 함께면 슬플 일은 없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말하지 않았다. - P168

"놓치지 마, 윌리."
"뭐를요?"
"너의 사랑. 선물 같은 거야,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건."
"근데 메리앤이 날 좋아하는지조차 모르겠어요. 그녀가 좋아하지 않으면 소용이 없잖아요."
"당연히 널 좋아하지. 편지를 써, 윌리. 제발, 얼른." 그녀는 다급하게 말하더니 잠시 내 팔에 손을 얹었다. 조니 레이시 앞에서 드러낸 만족감과 그 아내와 아이들에게 보낸 미소에도 불구하고 겉으로 드러나지 않은 어떤 슬픔이 그곳에 있었다. 시카고로 내쫓긴 소녀를 다시 생각나게 하는 내밀하고 외로운 슬픔이었다. - P182

당신 방 앞에 선 나는 아주 가볍게라도 문을 두드리지 않았다. 그저 문을 열었다. 모든 두려움과 도덕이, 세상의 모든 잣대가 내게서 사라졌다. 난 아무것에도 관심을 두지 않았다. 내가 당신을 사랑한다는 걸 당신이 알아야 한다는 것 말고는, 내가 당신을 사랑한다는 걸 알면 당신이 적어도 약간의 위안을 얻을지 모른다는 것 말고는. 난 램프를 화장대에 올려놓고 당신 이름을 불렀다. - P198

"내 말은, 이멜다, 일이 그렇게 된다는 거야. 가장 중요한 일은 우연히 일어난단다." - P291

그는 사진속의 미소를 짓고 그가 사랑하는 소녀는 밀짚모자 띠에 조화 장미를 달고 있다. 그들은 딸의 미친 상념 속 짧은 서사시에서 자신들이 그렇게 존재한다는 것을 안다. 그들은 이 끝에 볼로냐 소녀의 머리 위를 떠돌던 성체만큼이나 놀라운 기적이 있음을 안다. 그들은 오늘같은 날이 허락된 것에 감사하고, 추함이라곤 없는 딸의 고요한 세계의 은총에 감사한다. - P3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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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lcutta 2023-11-18 23:3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북마크 카와이^^

새파랑 2023-11-19 08:43   좋아요 1 | URL
ㅋ 친구가 개띠라고 🐕 북마크를 줬습니다 ㅋㅋ
 

뭔가 10퍼센트 부족했다. 그래도 나쁘지는 않았다.




고독이 나를 짓누른다. 친구가 그립다. 진실한 친구가………… - P37

이런 나의 탄식을 곁에서 들어줄 사람이라면 아무라도 상관없다고 생각한다. 하루 종일 그 누구하고 아무런 대화도 나누지 않은 채 거리를 헤매다 밤이 되어서 집으로 돌아오면 녹초가 된다. 손톱만큼밖에 안 되는 우정과 사랑이라도 얻을 수만 있다면, 나는 그것을 위해 내가 가진 모든 것을 내놓을 것이다. - P37

보통은 죽음에 대해 곧 잊어버리지만, 누군가와 기약없이 헤어진다거나 하면 나도 모르게 ‘나는 외톨이로 살다가 이대로 죽겠지‘라는 생각이 들어 견딜 수가 없다. 나는 슬픈 마음으로 비야르를 쳐다보았다. - P46

늘 그렇다. 아무도 나의 애정에 대답해 주지 않는다. 내가 바라는 건 누군가를 사랑하고 그저 몇 명의 친구를 갖는 것, 단지 그것뿐이다. 그럼에도 늘 나는 외톨이다. 다들 나를 기대하게 만들고, 그렇게 박절하게 떠나가 버린다. 나는 정말 운도 없다. - P50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잠이 오지 않아, 군대에서의 일들을 하나씩 하나씩 생각해보기로 했다. 고통스러운 경험을 했던 장소도 기억 속에서는 아름다운 장소로 바뀌었다. 이율배반적인 이야기다. 어렸을 적에 배운 노래는 되도록 부르지 않으려고 한다. 너무 자주 불러대면 추억이 퇴색되기 때문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군대에서의 일들도 어쩔 수 없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되도록 회상하지 않으려고 애쓴다. 추억은 머릿속에 소중히 간직해 두는걸로 족하다. 내 머릿속에는 추억의 서랍이 있다. 나에게 그런 추억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 P86

고독, 얼마나 아름답고 또 슬픈 일인가. 스스로 선택한 고독은 더할 나위 없이 숭고하지만, 내 뜻과 상관없는 오랜 세월의 고독은 한없이 서글프다. 강한 사람은 고독해도 외로움을 느끼지 않는다. 하지만 나는 약한 존재이다. 그래서 친구가 없으면 외롭다. - P1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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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도 최고다. 사랑을 할 줄 아는 인간은 그 자체로도 아름답다.

우리의 생각은 연기처럼 올라가 하늘을 흐리게 만듭니다. 나는 오늘 아무것도 하지 않고, 아무런 생각도 하지 않았어요. 그러자 하늘이 내 손안으로 들어왔습니다. 이미 저녁이지만, 당신에게 오늘의 가장 아름다운 순간을 전하지 않은 채로 하루를 흘려보내고 싶지 않네요. - P17

나는 페이지마다 하늘의 푸르름이 스며든 책만을 좋아합니다. 죽음의 어두움을 이미 경험한 푸름 말이에요 나의 문장이 미소 짓고 있다면, 바로 이러한 어둠에서 나왔기 때문입니다. 나는 나를 한없이 끌어당기는 우울에서 벗어나려고 발버둥 치며 살아왔습니다. 많은 대가를 치르고 나서야 이 미소를 얻었어요. 당신의 주머니에서 떨어진 금화와 갈은 이 하늘의 푸르름을 나는 글을 쓰며 당신에게 돌려드리고 있답니다. 이
장엄한 푸름이 절망의 끌을 알려주며 당신의 눈시울을 붉게 만들 거예요. 무슨 말인지 아시겠지요? - P21

"마리아예요." 이 말이야말로 삶에서 생각해야 할 전부다. 자신의 목소리, 자신이 뱉은 말 그리고 강렬한 침묵 속에서 불쑥 나타나는 인간 외에 다른 수수께끼는 없다. - P30

우리는 말을 할 때 바로 그 말속에 머물며, 침묵할 때면 바로 그 침묵 속에 머문다. 하지만 음악을 연주할 때는 그 자리를 정리하고 벗어나, 말과 침묵의 고역에서 해방된 희미한 선율 속으로 멀어져 간다. 어디로 향하는지도 모르는 채 멀어져 가는 한 젊은 남자처럼, 우리도 멀어져 간다. 목적지를 안다면 멀어지는 것이 아니다. 음악 안에 있다는 건 사랑 안에 있는 것과 같다. 연약한 인생의 오솔길에 들어선 것이다. 우리는 A라는 점에서 B라는 점으로, 한쪽 빛에서 다른 쪽 빛으로 건너간다. 어둠 속에서 비틀거리며 그사이 어디쯤에 우리가 있다. 불확실함을 견디고 주저함에 미소지으며, 다른 모든 것은 잊은 채로 우리 안의 희미한 생의 움직임에 주의하면서 말이다. - P54

그래도 인젠가 끝은 찾아온다. - P57

단 한 번의 봄이 일생의 모든 봄이었고, 단 한 순간의 삶이 모든 순간을 살아낸 삶과 같았다. 사랑은 누군가가 강처럼 별처럼, 금은화처럼 당신에게 말을 건네는 순간 시작된다. 그 꽃의 향기는 나를 취하게 하고 어제는 그녀를 취하게 했다. 더는 이 곳에 있지 않고 땅속에 머물다 이제는 이름을 알게 된 천사들 곁에 있는 그녀를. - P68

두 눈은 영원에 둘러싸인 채 나는 신비로운 대기를 삼킨다. 그리고 나는 쓴다. 이것이 대답 없음에 대한 나의 대답이요, 함께 일어나는 선율이며, 시간의 잎사귀에서 들려오는 날갯짓 소리다. 당신이 더는 이 세상에 없기에, 나는 당신에게 미모사에 대해 이야기해줄 수는 없지만 미모사는 당신에 대해 아주 잘 알려준다. 모든 고결한 것은 죽은 자들의 나라를 건너 우리에게 이르는 것이라고. - P70

각 페이지에 쓰인 모든 단어들이 너에 관한 것임을 너와 너를 향한 나의 사랑 사이. 너와 너에게 전할 나의 단어들 사이, 그리고 너와 밤에 잉태된 단어들 사이의 황홀한 우연의 일치에 관한 것임을. 그 단어들은 너를 따라 내 영혼에 들어와 나를 평화롭게 만드는 무질서가 낳은 것이었다. - P76

내가 글을 쓸 때 네가 방해된 적은 단 한 번도 없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너만을 위해서 글을 썼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너를 알기 전 아주 오래전부터, 우리가 만나기 전 어두웠던 무한한 시간 속에서조차 나 는 너를 위해 글을 썼다. 이 메마른 사막 속에서 난 사랑을 기다리며 글을 썼다. 사랑이 올 수 없는 불가능 속에서 사랑이 오는 것을 기다리며 글을 썼다. 밤보다 더 격렬한 단어로, 밤보다 더 어두운 단어로 글을 썼다. 밤이 지나가길 바라면서, 더 깊은 어두움으로 밤이 흩어 지기를 바라면서. 그러던 내가 지금은 사랑 안에서, 밝 은 빛 안에서 글을 쓴다. 빚을 지나기 위해, 더는 이지러지지 않는 빛에 도달하기 위해, 세월의 더딘 윤회에도 길을 잃지 않는 빛을 얻기 위해 빛보다 더 환한 단어들로 글을 쓴다. - P76

너와 함께 글을 쓴다. 밤과 낮의 단어들, 사랑의 기다림과 사랑의 단어들, 절망과 희망의 단어들. 나는 너와 함께 이 단어들이 서로 다르지 않음을 본다. 우리만이 알고 있는 이 깨달음 속에서 글을 쓴다. - P77

너에게 쓴다. 이 수첩뿐만이 아니라 내가 쓰는 모든 것 안에 네가 있다. 몽펠리에로 보내는 이 글의 처음 부터 끝까지 네가 있다. 단지 상황에 따른 것만은 아닌, 당신에 대해 말한다는 내가 처한 그 불가능성 안에 네가 있다. 네가 내 안에 있는 이 밤에, 단어들에서 비롯 된 밤과 뒤섞인 네가 있는 빛나는 밤에 나는 글을 쓴다. 너에게 쓴다. - P77

너를 불러본다. 이 페이지 위에서 너를 부른다. 이 숲에서, 이 연못 근처에서, 이 길 위에서, 우리의 발걸음이 영원으로 닿던 이 땅 위에서 너를 부른다. - P77

"나는 책에 속고 싶지 않습니다."
나는 이 말이 이렇게 들린다.
"책이나 세상 그 무엇으로 인해 그녀에게서 단 일 초라도 멀어지는 것을 원치 않습니다. 우리가 가장 소중히 여겼던 것들이 끝내 허무의 입에 삼켜지고 대리석처럼 단단한 이에 찢어 발겨지는 것을 바라보는 걸 방해받고 싶지 않아요." - P81

나에게 이상적인 삶이란 책이 있는 삶이며 이상적인 책은 어느 여름날 쥐라‘의 길에서 마주친 사자상 분수의 머리에서 흘러나오던 차가운 물과도 같다. - P93

아름다움에는 부활의 힘이 있다. 보고 듣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우리가 살아있는 동안 천국에 들어서지 못하는 건 주의를 기울이지 않아서, 오직 그 이유 때문이다. - P129

세상은 성인들로 넘쳐난다. 순교자들 말이다. 나는 저 두 단어를 구분하지 않는다. 우리는 날마다 늘고 있는 그들을 ‘알츠하이머‘라 부른다. 점점 더 늘어나는 그 병이 우리에게 기본으로 축소된 삶을 선물한다. 고단하고 기진맥진하게 만드는 일들, 물건을 사고 타인을 질투하고 경쟁에서 승리하는 것이 전부인 현대 생활의 모든 질서에서 우리를 해방한다. 이들에게는 삶이 아닌 삶, 한 번도 삶이었던 적이 없는 삶은 끝이 난 것 이다. 그들의 눈은 깊이를 가늠할 수 없는 것들을 향해 두려울 정도로 열려있다. 그들이야말로 세상을 허물어 뜨리는 형이상학적 질병의 먹잇감이다. 우리는 그들을 살아있는 보물처럼 여겨야 한다. - P133

그들은 떨리는 손으로 천사의 손을 찾는다. 천사가 존재한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가끔 그들은 한 때 그들과 가까웠던 죽은 이들에게도 말을 건넨다. 모든 것을 잊은 그들이지만 오래전 그들의 마음을 사로잡은 이들은 잊지 않는다. - P134

사람들은 그들이 우리를 알아보지 못한다고 말하지만, 나는 그 말을 믿지 않는다. 알아본다는 것은 사랑한다는 것이고, 사랑한다는 것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원초적인 것이다. 비록 아버지는 나에 대한 기억을 모두 잃었음에도 내가 누군지 여전히 알고 계셨고, 나는 그것을 느끼고 있었다. 우리가 직접 경험하고 느끼는 것들은 과학이 우리에게 말하는 모든 것들보다 훨씬 커다랗다. 내 이름을 기억하지 못하는 아버지는 질문들에 교묘히 돌려 답했다. 내가 누군지 물으면 ‘우리가 잊지 않은 녀석‘이라 하셨고, 어머니에게는 ‘최고로 훌륭한 사람‘이라고 대답했다. 쉽게 기억을 잊는 이 사람들은 중요한 것은 절대 잊지 않는다. 그것이 우리와 다른 점이다. - P134

나는 하늘의 푸르름을 바라본다. 문은 없다. 아니면 오래전부터 문은 이미 열려 있었는지도 모른다. 가끔 이 푸르름 안에서 꽃의 웃음과 같은 웃음소리를 듣는다. 곧장 나누지 않으면 들을 수 없는 소리를, 그 푸르름을, 당신을 위해 여기 이 책 속에 담는다. - P1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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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 최진영 작가라는 생각이 든다. 독보적이라는 느낌이 든다.


우리 사이가 지금보다 조금이라도 가까웠다면...
어린 나무는 말을 잇지 못하고 맞은편의 나무를 가만히 바라봤다.
좋았을까?
맞은편 나무가 나뭇잎을 마주쳐 바스락 소리를 내며 물었다.
둘 중 하나는 죽었을 거야 - P8

왜 모두 다를까. 다른 삶을 살다가 결국 죽을까. 생명은 어째서 태어날까. 탄생이 없다면 두려워할 죽음도 없을 텐데. - P153

한편으로 정원은 목화가 선물한 라일락 나무를 매일 아침 해가 드는 곳으로 옮기고 비 예보가 있으면 창밖에 내놓는 사람이었다. 목화의 출퇴근길을 걱정하는 사람. 양말과 속웃을 살 때 목화 것까지 사고, 자기는 김밥만 먹으면서도
목화가 끼니를 대충 때우려고 하면 염려하는 사람. 어딘가에 부뒷히거나 베여서 목화의 몸에 상처가 생기면 바로 알아보는 사람. 모두 정원의 사랑이었고 그와 같은 다양함에는 충돌이 없였다. - P184

사랑하는 사람이 생긴다는 건 신에게 구걸할 일이 늘어난다는 것. 목화는 아무도 사랑하고 싶지 않았다. - P187

보이지 않는다고 사라진 건 아니라고 - P222

어떤 사랑은 끝난 뒤에야 사랑이 아니었음을 안다.

어떤 사랑은 끝이 없어서 사랑이란 것을 알아차리지 못한다.

어떤 사랑은 너무 멀리 있어 끝이 없다.

어떤 사랑은 너무 가까이 있어 시작이 없다. - P233

젊은 시절 자기가 살리던 단 한 명들처럼 자기 또한 누군가의 단 한 명이었을 가능성에 대하여. 그렇게 살아났기에 사람을 살리는 일을 맡았을 가능성에 대해서도. - P241

인간만이 목적이나 의미를 생각하고 뒷에 걸린다. 굴레에 같힌다. 고통을 느끼고 죄책감에 빠지며 괴로워한다. - P5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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