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음사 판으로 다시 읽은 등대로. 너무 너무 좋다.

"그래, 물론이지. 내일 날이 맑으면 말이야." 램지 부인이 말했다. "하지만 종달새가 지저귈 때 일어나야 할걸." - P5

"내일 날이 맑지 않더라도." 램지 부인은 눈을 들어 윌리엄 뱅크스와 릴리 브리스코가 지나가는 것을 흘끗 바라보면서 말했다. "내일은 또 다른 날이 될 거야. 자." - P55

바로 지금, 고통스럽게도 인간관계의 불완전함, 가장 완벽한 관계에도 흠이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남편을 사랑하면서도 진실에 대한 본능적 갈구 탓에 진실을 직시하려 하지만 견딜 수 없던 바로 그 순간에, 고통스럽게도 자신의 무가치함이 입증되었다고 느끼고 이런저런 거짓과 과장 탓에 자신에게 주어진 역할을 하지 못했다고 느끼는 순간에, 고양된 기분의 여파로 이처럼 비참하게 초조해진 바로 이 순간에, 카마이클 씨는 노란 슬리퍼를 신고 발을 질질 끌며 지나가고 있었고, 내면의 어떤 악마적 충동으로 그녀는 지나가는 그를 소리쳐 부를 수밖에 없었다. - P86

자신에게 미모의 횃불이 있음을 그녀는 깨닫지 않을 수 없었다. 그녀는 어느 방에 들어서든지 그 횃불을 꼿꼿이 들고 다녔다. 결국 그녀가 횃불을 베일로 덮고 단조로운 자세를 벗어나려 해도, 그녀의 아름다움은 또렷이 드러났다. 그녀는 늘 흠모를 받아 왔다. 그녀는 사랑을 받아 왔다. 애도하는 사람들이 앉아 있는 방에 들어서면 사람들이 그녀 앞에서 눈물을 흘렸고, 남자들과 여자들 모두 복잡다단한 사정을 더 이상 생각하지 않고 그녀와 함께 소박한 위안을 나누었다. - P89

수프를 떠 주면서 그녀는 이제 모든 것을 지나왔고, 모든 것을 통과했으며, 모든 것에서 벗어났다는 느낌이 들었다. 마치 저기 회오리바람이 일고 있어서, 그 안에 휘말릴 수도 있고 거기서 벗어날 수도 있는데, 자신은 벗어난 느낌이었다. - P185

영국에서 요리로 통하는 것은 (그들이 이미 동의한 대로) 혐오스럽기 그지없다. 물에 그저 양배추를 삶고, 고기가 가죽처럼 질겨질 때까지 굽고, 채소의 맛있는 껍질을 깎아 버리는 것이다. "껍질 안에 채소의 영양소와 맛이 다 들어 있는데 말입니다."라고 뱅크스 씨는 말했다. 그리고 음식 낭비도 이루 말할 수 없다고 램지 부인이 대답했다. 영국인 요리사 한 명이 낭비하는 재료의 양은 프랑스의 한 가족이 먹고 살 수 있을 정도였다. - P224

그날 오후에 다른 일로 이미 느꼈던 것처럼 사물에는 응집성과 영속성이 있다. 덧없이 흘러가고 사라지고 유령처럼 형체를 잃어버리는 것에 맞서 변화를 초월한 어떤 것이 루비처럼 빛을 발한다는 뜻이다.(그녀는 반사된 빛이 잔물결을 일으키는 창문을 힐끗 바라다보았다.) 그래서 오늘 밤에 다시 그녀는 이미 낮에 한 번 느꼈던 감정, 평화로움과 평안함을 느꼈다. 앞으로 영원히 지속되는 것은 이런 순간들로 이루어진다고 그녀는 생각했다. 이 순간이 남을 것이다. - P234

램지 씨는 어느 어둑한 날 아침에 비틀거리며 복도를 따라 걷다가 양팔을 내밀었다. 하지만 그가 팔을 내민 전날 밤에 램지 부인이 다소 갑작스레 죽었기에, 그의 팔은 텅 빈 채로 남고 말았다.) - P287

그해 여름 프루 램지는 출산 중에 죽었다. 정말 비극적인 일이라고 사람들은 말했다. 그녀보다 더 행복해야 할 사람은 없었다고 사람들은 말했다. - P297

포탄이 폭발했다. 프랑스에서 청년 이삼십 명이 포탄에 맞았고, 그중에 앤드루 램지가 끼어 있었다. 다행히도 그는 즉사했다. - P299

실로 긴 세월이 지나고, 램지 부인이 죽은 후에 돌아와서 그녀가 느끼는 것이 무엇일까? 아무것도, 아무것도 없었다. 말로 표현할 수 있는 것은 전혀 없었다. - P324

아마도 위대한 계시가 찾아오는 일은 결코 없을 것이다. 대신에 사소한 일상의 기적이나 등불, 어둠 속에서 뜻밖에 켜진 성냥불이 있을 뿐이었다. - P361

"삶은 여기에 정지해 있다."라고 말한 램지 부인. 그 순간을 영원한 것으로 만든(다른 영역에서 릴리 자신도 순간을 영원한 것으로 만들려고 노력했듯이) 램지 부인. 이것이 계시의 본질을 드러내는 것이었다. 혼돈의 와중에 형상이 있었다. 외적인 변천과 흐름이(그녀는 지나가는 구름들과 흔들리는 이파리들을 보았다.) 영속성 안에 고정되었다. 삶은 여기에 정지해 있다고 램지 부인이 말했다. "램지 부인! 램지 부인!" 그녀는 되풀이해서 불렀다. 이 계시를 얻은 것은 부인 덕분이었다. - P361

기억하세요?’ 통발이 깐닥깐닥 움직이고, 편지지들이 날리던 날 바닷가에서의 램지 부인을 다시 떠올리며 그녀는 그의 옆을 지나면서 묻고 싶었다. 아니, 이 오랜 세월이 흐른 후 그 이전과 이후에 있었던 일은 공백으로 남았는데, 그 장면만이 살아남아 아주 멀리까지 에워싸고 환히 불을 밝혀서 극히 사소한 것까지도 뚜렷이 보이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 P382

그녀는 그림을 보았다. 어쩌면 그림이 그의 답일 것이다. ‘당신’과 ‘나’ 그리고 ‘그녀’가 지나가고 사라진다는 것, 그 무엇도 지속되지 않는다는 것, 모든 것이 변한다는 것, 그러나 단어들이나 그림은 그렇지 않다는 것. - P401

자신이 생각하는 것과 보고 있는 것에 가슴이 벅차서, 마치 나눠 가져야 할 것이 있지만 이젤을 떠날 수 없다는 듯이 붓을 든 채 릴리는 카마이클 씨를 지나 잔디밭 끝으로 걸어갔다. 그 배는 지금 어디 있을까? 램지 씨는? 그와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다. - P4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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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로의 여행 페이지터너스
슈테판 츠바이크 지음, 원당희 옮김 / 빛소굴 / 202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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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25036 역시 츠바이크 작품답게 재미있었다. 표제작인 <과거로의 여행>이 특히 좋았다. 인간은 결코 추억만으로 살 수는 없다는 것을, 과거는 단지 흔적일 뿐이라는 사실을 너무 사실적으로 그리고 있다. 두번째는 아니 만났어야 좋았을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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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넬로페 2025-04-14 15:4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직 읽지 않은 츠바이크의 글이 계속 늘고 있네요.
이 책도 찜합니다^^

새파랑 2025-04-15 07:52   좋아요 1 | URL
책태기가 왔을때는 츠바이크 작품이 최고인거 같아요. 술술 읽히고 재미있습니다 ㅋ
 
시간의 계곡
스콧 알렉산더 하워드 지음, 김보람 옮김 / 다산책방 / 202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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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25035 동쪽으로는 미래의 20년, 서쪽으로는 과거의 20년이 펼쳐지는 세계에서 나는 어느쪽을 선택할까? 아마 대부분이 서쪽을 선택할 것이다. 서쪽은 그리움이고 동쪽은 희망일테니까. 작가의 상상력은 대단하나, 세계관의 스케일이 다소 작아 아쉬움이 남는 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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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이상 평안은 없다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08
치누아 아체베 지음, 이소영 옮김, 브루스 오노브락페야 그림 / 민음사 / 200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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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25034

<더 이상 평안은 없다>는 <모든 것이 산산이 부서지다>에 이은 치누아 아체베의 아프리카 반식민문학 두번째 이야기이다. 전작이 서구 문명에 대항하여 나이지리아의 전통을 지키려는 이야기였다면, 이 작품은 서구 문명과 전통 사이에서 무엇도 지키지 못하고 타락하는 나이지리아의 젊은 엘리트의 이야기다.


주인공인 오비 오콩고는 이보족 출신으로, 그는 부족의 장학금을 받고 영국으로 유학을 간다. 이후 귀국한 그는 나이지리아의 고위 공무원으로 일하게 되고, 남들은 일년동안 일해야 벌 수 있는 돈을 한달만에 벌 정도로 성공한다. 하지만 소설의 첫 부분에서 그는 법정에 피고인으로 서게 된다.


오비 오콩고가 살던 시기에 나이지리아의 공무뭔 세계는 부정부패가 판치는 곳이었었다. 지식인이 된 그는 처음에는 이런 뇌물을 거부하고 서구 식민주의에 저항했지만, 경제적으로 점차 쪼들리게 되고 결국 뇌물 수수죄로 제판을 받게 된 것이다.

[뭣 때문에 교육을 받는 거지? 자기 자신과 가족들을 위해 가능한 한 최대의 이득을 취하려고 하잖아. 날마다 기아와 질병으로 죽어 가는 수백만 명의 동포들에 대해서는 눈곱만치의 관심도 없단 말이지.] P.171




게다가 사랑하는 연인이 천민 출신이어서 집안의 강력한 반대로 헤어지게 되고, 자신을 유학보내준 부족 모임에서 눈밖에 난 오비 오콩고는 혼란스러운 시기에 이방인일 수밖에 없었다. 누군가의 음모였을까? 아님 그가 나쁜 사람이었던걸까? 아님 구조적으로 뭔가가 잘못된 것이었을까? 그 결과 오비 오콩고는 본인의 이름이 의미하는 ˝마침내 평안해진 마음˝을 얻지 못하고 이제 ˝더이상 평안은 없게˝ 되버렸다.

[왜 그랬을까 모두들 이상하게 여겼다. 지금까지 보았듯이 박학다식한 판사는 교육받은 젊은이가 어떻게 저따위 짓을 할수 있는지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영국 문화원 직원도, 심지어는 우무오피아 사람들도 알 수 없었다. 또한 그토록 확신에 차 있던 그린 씨 역시 알지 못했다고 추정할 수밖에 없다.] P.246




낯선 아프리카 문학이지만 생각보다 어렵지 않고 오히려 재미있게 읽을 수 있었다. 왜 식민사회에서 부정부패가 만연할 수 밖에 없는지, 고급 교육을 받은 사람 역시 타락하게 되는지를 너무 잘 그린 작품이었다. 세상 사는게 어디나 다 비슷한것 같다. 특히 나쁜 쪽으로는 말이다. 세번째 이야기에서는 어떤 반전이 있을지 기대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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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여자의 열매 - 2024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개정판
한강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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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25033

˝눈물 따위로 버틸 생각은 처음부터 하지 마˝


이 책을 사놓은 건 몇년전이다. 그때는 아직 작가님이 노벨상을 수상하기 전이어서 우주점에 중고책이 많았다. 그래서 그때 영등포점이었던가? 작가님의 책을 중고로 몇개 업어 왔는데, 그동안 안읽고 있다가 아주 뒤늦게 읽었다. 뒤늦게 읽은 소감은... 너무 좋았다. 노벨상 후광효과가 아니더라도 완전 최고였다.


이렇게 슬픔으로만 꽉 채워진 작품이 가능한건가, 이렇게 감정의 높낮이가 없이 계속 높은 밀도의 우울로 글을 쓰는게 가능한건가. 내가 우울한걸 좋아하긴 하지만, 한강 작가님의 우울은 내가 소화하기에는 너무 깊다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강 작가님의 작품은 계속 읽고 싶어진다.


이 책은 한강 작가님의 세 단편집 중 두번째로 엮은 단편집으로, 총 여덟편의 단편들이 수록되어 있는데, 어느 하나 빠지는 작품 없었다. 한편 한편 너무 무겁고 여운이 깊게 남아서 연속해서 읽기가 쉽지 않았다. 그래서 다 읽는데 오래 걸렸다. 다 좋았지만 그 중 몇가지 인상적인 단편들을 소개해 보자면,




1. 내 여자의 열매

이 작품의 표제작이다. 언제 부터인가 아내의 몸에서 피멍을 보게 된 나는, 처음에는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다가 계속해서 커지는 멍을 보고 아내에게 병원진료를 권유한다. 하지만 병원에서는 이상이 없다고 하고, 아내는 점점 식물처럼 말라간다. 그러면서 아내에 대한 예정도 점점 식어간다.

[아내의 몸에서 피멍을 처음 본 것은 늦은 오월의 일이었다. 관리실 옆 화단의 모란은 잘린 혀 같은 꽃이파리들을 뚝뚝 밸어대고, 노인정 어귀의 보도블록에는 분드러진 흰 라일락꽃들이 행인들의 구두 밑창에 엉기던 봄날이었다.] P.9


해외출장을 다녀온 어느 날 집이 엉망이 된걸 보게 된 나는, 베란다에 있는 아내가 초록빛을 띠는 나무가 되어 있음을 알게 된다. 나는 다시 아내에게서 아름다움을 느끼게 된다. 그렇게 시간은 흐르고 아내의 몸에서 석류알과 같은 열매들이 쏟아져 나온다. 나는 그 열매를 다른 화분에 심는다. 가을이 가고 겨울이 오면서 아내의 몸도 시들어간다. 봄이 오면 아내는 다시 돋아날까?

[어머니, 낯선 사람들로 가득한 이 거리를 늙고 망가진 얼굴로 떠돌게 될 줄을 그때는 몰랐어요. 고향에서도 불행했고 고향 아닌 곳에서도 불행했다면 나는 어디로 가야 했을까요.] P.34


=> 처음 읽었을때 느낀 감정은 당혹이었다. 작가님은 무슨 메세지를 전달하고 싶었던 걸까? 소통의 부재? 낯선 도시에 대한 두려움? 고향, 자연으로의 회귀? 어디론가 떠나고 싶지만 갈 수 없는 아쉬움? 상당히 어려운 작품이었다. 그럼에도 상당히 강렬했다. 채식주의자랑 비슷한 느낌이었다. 여기 실린 다른 단편 중 가장 아름답고 슬픈 문장들이 가득했다.




2. 해질녘에 개들은 어떤 기분일까?

아이는 아빠와 엄마와 함께 푸드트럭에서 장사를 한다. 아빠의 우는 모습이 좋아서 결혼했다는 엄마는 어느날 집을 나간다. 아빠의 의처증에 지쳐서인지, 찢어진 가난에 지쳐서인지, 희망없는 현재의 삶이 지겨워서인지는 모르지만 엄마는 아이도 버리고 떠난다. 해질녁의 개들은 어떤 기분일까?

[해질녁에 개들은 어떤 기분일까. 해질녁에 아이는, 여관방 창 너머로 아스라이 사위는 바다를 향해 걸어가고 싶어진다. 흙펄을 핧는 파도의 거품이 흰빛인지 황금빛인지 가까이서 보고 싶어진다.] P.43


이후 아빠는 나를 데리고 엄마를 찾아 다닌다. 하지만 어디에서도 엄마를 찾을 수 없었다. 매일 술을 마시는 아빠와 함께 하루하루를 여관방에서 근근히 살아간다. 아빠에게는 더이상 희망이 없고, 아빠는 나와 함께 죽어버리려는 생각까지 한다.


하지만 마지막 순간에 아빠는 포기한다. 엄마에 대한 여전한 사랑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나에 대한 미안함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혼자남은 외로움 때문이었을까? 오히려 나는 아빠가 밉지 않고 안쓰럽다. 아빠의 슬픔을, 무서움을 이해하니까. 이제 더이상 해질녘 개들의 기분은 궁금하지 않다.

[바닷바람이 아이의 옷 속으로 파고든다. 오그라드는 가슴을 퍼려 애쓰며 아이는 계속해서 걸어간다. 무허가 주택들의 들쭉날쭉한 담벼락들이 흐린 시야 속에서 겹처진다. 해질녁의 개들이 어떤 기분일지 아이는 궁금하지 않다. 너무 아팠기 때문에, 오래 외로웠기 때문에, 아이에게는 이 순간 두려운 것이 없다.] P.99


=> 아이의 눈으로 바라본 아빠와 엄마의 이별 이야기. 엄마가 지겨워하는것도, 아빠가 무서워하는것도 다 이해가 되지만 그래도 함께 갈수는 없었던 걸까? 그들을 헤어지게 한 것은 무엇이었을까? 사람이 함께 간다는건 그만큼 어렵다. 서로 사랑한다 해도 말이다.




3. 아기 부처

나는 어느날 아기 부처의 꿈을 꾼다. 그 아기부처는 불상이 아니었다. 내 자신의 손으로 주물러서 만들어진 얼굴이 아기 부처의 얼굴이었다. 나는 아기부처의 얼굴을 주무르지만 내가 생각했던 인자한 얼굴은 만들어지지 않고, 빚으면 빚을수록 눈초리는 더 날카로워졌다. 그리고 잠에서 깨어났다. 아기 부처 꿈은 무엇이었을까?


주인공인 나에게는 남펀이 있다. 남편은 뉴스 아나운서였고 누구나 다 아는 유명인이었다. 그런 남편에게는 아무도 모르는 비밀이 있는데, 바로 얼굴과 목을 제외하고는 온 몸에 화상을 입어 큰 흉터가 있다는 것이다. 화려한 것을 싫어하는 평범한 나는 남편과 결혼할 생각이 없었다. 하지만 남편이 아무에게도 밝히지 않은 상처를 나에게만 보여준 순간 그와의 결혼을 결심한다.

[나는 그의 흉터와 용기를 함께 받아들이기로 했다. 아니, 바로 그 흉터가 나에게 안겨준 충격 때문에, 평생 숨기고 싶었을 알몸을 보여줄 만큼 나를 신뢰해준 데 대한 고마움 떼문에 그를 받아들였다는 편이 옳을 것이다.] P.127


그런데, 견딜수 있을 줄 알았지만, 상처투성이의 남편의 육체는 내가 감당하기 힘든 것이었다. 연민에서 시작한 사랑이 결혼 후 고통으로 바뀌었다. 나의 이런 고통을 말로 표현하지는 않았지만, 남편은 느꼈을 것이다. 내가 남편을 피한다는 사실을, 증오한다는 사실을. 남편은 결국 다른 여자를 만난다, 하지만 나는 그런 사실에 오히려 안도감을 얻는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믿기지 않는 일이었지만 나는 그의 흉터 때문에 그를 사랑한다고 생각했고, 이제 그 흉터 때문에 그를 혐오하고 있었다. 그의 흉터가 다만 한 겹 얇은 살갖일 뿐이라는 것을 나는 분명하게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 안다는 것이 내 마음의 얇은 한겹까지 벗겨내주지는 못했다. ] P.134


나는 두번째 아기 부처의 꿈운 꾼다. 이번에 나는 아기 부처의 얼굴 주변을 진흙으로 덮어버린다. 그러나 아기 부처의 얼굴은 더욱 선명하게 살아나서 나를 쳐다본다. 나의 몸이 진흙에 꼬꾸라진다. 이 꿈은 또 무엇을 의미하는걸까? 나는 결국 남편과 이혼할 결심을 한다. 둘 중 한 사람이 죽지 않는 한 영혼할 거라 믿었던 관계는 그렇게 망가져 버렸다. 육체의 한꺼풀도 극복하지 못하는 나의 나약함.

[삶이 얼마나 긴 것인지 몰랐던 죄, 몸이 시키는 대로 가지 않았던 죄, 분에 넘치는 정신을 꿈꿨던 죄, 분에 넘치는 사랑을 꿈꿨던 죄, 자신의 한계에 무지했던 죄, 그리고도 그를 증오했던 죄,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가학했던 죄.] P.135


어느날 남편이 술에 잔득 취해 들어온다. 그리고 그 여자와 헤어졌다고 말한다. 그 여자는 남편의 비밀을 알게 되었고, 그 여자는 나를 존경한다는 말을 남편에게 남기고 떠난다. 그는 아무도 자신을 사랑해주지 않는 자신의 처지에 대해 비관한다.

[나는 얼마나 어리석였나. 그 어리석음으로 서로를 망쳐면서도 그것을 몰랐나. 그것을 인내라고, 혹은 연민이라고 부르며 믿었으나, 과연 누구를 위한 인내였나.] P.159


그날 밤 나는 마지막으로 아기 부처의 꿈을 다시 꾼다. 그런데 그곳에는 아기 부처의 얼굴은 없었고, 아기부처를 이루던 모래알들은 부서져 내렸다. 잠에서 깬 나는 옆에 잠들어있는 남편을 본다. 남편의 흉터에 내 손을 뻗어서 어루만진다. 그리고 내 안에 있던 남편에 대한 증오가 이제 사라진것을 느낀다. 나는 남편의 유자차를 준비한다.


=> 이 단편집에서 제일 좋았던 작품이다. 연민이 사랑이 되었다가 증오가 될때까지 주인공은 남편과의 거리를 두고 방관했지만, 결국 깨닫는다. 문제는 남편의 흉터가 아니라, 남편의 육체가 아니라, 바로 나였다고, 내 마음이었다고. 아기 부처의 얼굴은 내 마음에 쌓여있던 증오였다.

증오를 극복하는 것도, 다시 시작할 수 있는 것도, 상대방을 구원하는 것도 결국 내 마음가짐이다. 극복하는게 쉽지는 않겠지만, 갈등은 영원할 수 없다. 긴 겨울을 이겨낸다면 봄은 반드시 올 것이다.




4. 붉은 꽃 속에서

주인공인 선이는 어린시절 가족과 함께 절에 가서 연등회를 본다. 그때 선이른 일곱살, 동생 윤이는 네살이었다. 그 연등회에서 선이와 윤이는 많은 인파속에서 엄마 일행을 놓치고, 나중에 엄마에게 혼난다. 그럼에도 선이는 윤이와 함께 바라본 붉은 연등과 사미니(예비승려)를 마음 깊은 곳에 새긴다.

[그때 그는 자신이 언젠가 일 년에 하루뿐인 초파일을 아쉬워했던 것을 기억했다. 하지만 일 년에 하루만 볼 수 있는 게 아니라면, 그만큼 아름답게 느껴질 수 있을까.] P.260


일년후 다시 연등회를 찾았지만 작년과 달라진게 있었다. 동생 윤이가 사고로 죽은 것이다. 이제 여덟살인 선이는 동생이 어디서 왔는지, 또 어디로 갔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매년 선이는 연등회에 가서 윤이를 추억한다. 그리고 현실에 허무함을 느낀 그녀는 여승이 된다. 이제 세상과의 인연을 끊고 깨달음과 평안을 얻기 위해 산으로 들어간다.

[신기한 것은, 순서 없이 떠오르는 그 기억들 속에서 어떤 감정이 솟아났을 때 그것을 잠자코 들여다보고 있자면, 그래서 그 감각과 생김새를 찬찬히 헤아리고 나면 어느 사이 그것이 사라져 있곤 한다는 것이었다. 사라지고 난 밝고 빈 마음속에서 그는 잠시 쉬었다. 다시 기억이나 감정이 솟으면 그것을 들여다보았고, 사라지고 나면 다시 쉬었다. 선방에서 나와 잠시 경내를 걸을 때면 보이고 들리는 것들이 폭우에 씻긴 듯 또렷해져 있곤 했다.] P.284


속세에서 동생 윤이를 지키지 못했다는 죄책감과 가정과 학교에서 사랑받았지 못한 아픔을 가진 선이는, 이제 승려가 되어 깨닫는다. 모든 감정에는 육체가 있다고, 눈으로 보이는 어떤 것에도 흔들리지 않겠다고.

[불빛은 제가 불빛인 줄을 알았을까. 붉은 꽃 속에 제가 밝혀져 있었던 것을 알았을까.] P.287


=> 이 단편집에서 가장 쓸쓸한 작품이었다. 누군가를 잃은 슬픔을 종교적으로 승화한 작품인데, 불교에 대한 전문용어를 모르더라도 그 슬픔과 체념이 잘 전달되었다. 그날 윤이와 함께 바라본 붉은 꽃속에는 무엇이 들어있었을까? 무언가가 아름답다고 느끼는 건 그 속에 추억이 담겨져 있기 때문이다.




이 외에도 다 한결같이 여운이 깊게 남는 작품들이었다. 앞으로 한달에 한권씩만 한강작가님의 작품을 읽어야 겠다. 두권씩 읽으면 정상적인 생활이 안될거 같다... 하지만...아직 안읽은 한강 작가님 책이 많아서 행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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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넬로페 2025-04-13 19:4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사실 사람 사는 것에 우울하고 힘든 요소가 더 많지 않나 생각되어요.
그것을 잘 포착하는 것 같아요.
한강 작가의 책탑, 멋져요^^

새파랑 2025-04-13 22:15   좋아요 1 | URL
한강작가님 작품 너무 우울합니다 ㅜㅜ 이제 다섯권 읽었는데 올해 안에 다 읽을 수 있을거 같습니다~!!

자목련 2025-04-14 14:4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 소설집, 애정해요! 저는 초판을 가지고 있는데 혼자 대견하고 뿌듯해요^^
근데 개정판도 갖고 싶네요. ㅎ

새파랑 2025-04-15 07:54   좋아요 0 | URL
초판 부럽습니다 ㅜㅜ 저 알라딘 우주점 가면 일단 초판인지 보는데 ㅋ 좋아하는 작가의 초판을 모으는거 너무 좋아요~!! 이 소설집 진짜 대박입니다~!!!

독서괭 2025-04-14 15:3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요즘 새파랑님의 한작가 책탑 시리즈 멋지네요!! 두권씩 읽으면 정상적인 생활이 안 될 것 같다는 말씀에 ㅎㅎㅎ 저는 세권 읽었는데 더 읽어야하는데 말입니다 ㅜㅜ

새파랑 2025-04-15 07:56   좋아요 1 | URL
아직 김연수 책탑이 남아있습니다 ㅋ
독서괭님은 일단 한달에 책을 열권씩 사야합니다~! 다음 한강작가님 책은 뭘 읽어야할지 고민입니다 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