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22096
˝왜 반드시 진실을 말해야 해? 진실은 묻어두어도 여전히 진실이야. 그걸 꼭 까발리고 떠들어야 하나?˝
진실을 말하는게 꼭 답인걸까? 우리는 살면서 항상 진실만을 말하지 않는다. 때론 선의의 거짓말을 하고, 내 마음을 보여주기 싫어서 괜찮은 척 하며, 싫지만 어쩔 수 없이 동의하기도 한다. 언제나 진실일 수는 없다. 생각해보면 모든 사람들이 진실만을 말한다면 과연 진실이라는게 의미가 있을까?
김은국 작가의 <순교자>는 ‘신‘ 그리고 ‘진실‘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1950년 10월 유엔군은 북한의 수도 평양을 점령했다. 그리고 주인공인 이 대위는 이 시기에 평양 육본 파견대 정치정보국에서 근무하고 있었다. 어느날 국장인 장대령은 이대위를 부른다. 그리고 한가지 업무를 그에게 준다. 그 임무는 북한군에 의해 학살된 12명의 목사에 대해 알아보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상한건 북한군에 의해 끌려간 목사는 총 14명인데, 왜 2명은 살아돌아왔냐는 것이었다.
[˝훌륭한 선전 자료가 된다는 얘기군요. 이건 공산주의자들이 저지른 아주 중대한 종교탄압의 경우로서 국제적 중요성, 특히 미국에서 큰 중요성을 가질 만한 사건이다. 그런 뜻이죠? 달리 말하면 기독교 순교사에 들어갈 한국의 장(章)을 전 세계에 보여줄 수 있게 된다는거고요.˝ ] P.18
장대령은 목사 학살 사건을 북한군의 무자비함을 보여주는 사건으로 포장하여 전 세계 언론에 공포하려는 계획을 세웠고, 이를 위해서는 당연히 희생된 12명의 목사는 순교자가 되어야 했다. 그리고 이를 증언하기 위해 살아남은 2명의 목사가 필요했고, 2명의 목사를 설득하는 역할을 이대위에게 맡긴다. 그러면서도 장대령은 마음 한편에 2명의 목사가 배교를 해서 살아남은거라 의심한다. 과연 진실은 무엇일까?
[˝기독교인이나 목사도 인간이란 점을 잊지 마시오. 그들을 잴 때는 다른 인간에 대해서도 똑같이 적용되는 척도와 저울대 위에 올려놓고 그 감정과 허약함을 재어야 하지 않겠소? 나는 나 자신은 물론 다른 어떤 성직자도 육체적 정신적 고문에 결코 굴복하지 않을 것이라고는 보지 않습니다.˝] P.54
이대위는 살아남은 두명의 목사인 신목사와 한목사를 찾아간다. 그런데 한목사는 미쳐 있었고, 신목사는 자신과 한목사는 12명의 목사가 학살되는 장소에 없었다고 말하며, 자세한 상황에 대해서는 입을 다문다. 이대위는 신목사가 무언가 진실을 숨기고 있다는 생각을 한다. 그리고 신목사와의 대화를 통해 신목사는 결코 배교를 할 인물이 아니라는 확신을 갖는다.
[˝내가 말하는 진리는 내 양심의 진리요, 대위.˝
˝제겐 진리를 판단할 힘이 없단 말씀입니까?˝
˝이것 보오.˝그는 엄숙한 어조로 말했다. ˝당신은 인간에 관한 사실을 얘기하고 있고 나는 내 신앙의 진리를 얘기하고 있다는 걸 모르시오?˝] P.55
결국 장대령은 현장에 있던 북한군 장교를 생포하고 그를 통해 당시 사건에 대한 진실을 알게 된다. 사실 학살된 12명의 목사는 순교자가 아니었고 서로를 고발하고 울부짓으며 살려달라고 했었다는 것을, 사실 그들은 마지막에 기도하는걸 버리고 신을 포기했다는 것을, 그리고 마지막까지도 믿음을 유지했던 사람은 신목사였다는 것을. 하지만 이미 학살된 12명의 목사는 순교자였고, 살아남은 신목사는 진실을 숨기고 배교의 의혹을 받고 있는 상황이었다.
[˝그자는 유일하게 내게 대항했던 자였어. 난 당당하게 싸우는 걸 좋아해. 그자는 용기가 있었어. 내 얼굴에 침을 뱉을 만큼 배짱 있는 친구는 그자 하나뿐이었어. 난 내게 침을 뱉을 수 있는 자를 존경해. 그래서 그자만은 쏘지 않았던 거야. 사실은 쏘아버렸어야 하는 건데. 너도 마찬가지야. 너도 진작 쏴 죽였어야 했어. 난 너를 알고 있어, 이 가짜 목사야!˝] P.141
여기서 장대령과 이대위는 서로의 의견 차이로 갈등을 겪는다. 공산주의의 악행을 폭로하는게 우선인 장대령은 진실이 무엇이든지 간에 상관하지 않는다. 반면 이대위는 진실을 말해야 한다고, 신목사의 의혹을 벗겨야 한다고 대립한다.
[장대령 : 그러나 장 대령은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말을 이어나갔다. ˝열두명 목사들의 순교는 이제 확고한 사실이 됐어. 이제 필요한 건 더 많은 질문이 아니라 그 사실을 공표해서 그들의 영웅적이고 성스러운 행동을 정당하게 평가해주는 일이야. 그 순교자들의 영광을 증언하는 데는 신 목사를 제쳐놓고 다른 적격자가 없어!˝] P.130
[이대위 : ˝목사님, 무엇 때문이죠?˝ 나는 다시 절망에 잠겨 말했다. ˝왜 사람들을 속이는 겁니까? 우리가 지금 여기서 당하는 고통은 고통일 뿐 거기에는 우리가 이승 너머에서 찾아낼 어떤 정의로움도 없습니다. 그런데 왜 사람들을 속여야 합니까?˝] P.254
신목사는 어떤 선택을 할까? 진실을 말할까? 진실을 숨길까? 끝까지 신에 대한 믿음을 저버리지 않았었기에 신목사는 살아남을 수 있었던 걸까? 아니면 단지 운이 좋아서 살아남은 것이었을까? 가난하고 힘없는 자들의 희망을 꺼버릴 수 없기에 자신을 희생하면서 까지 하는 선의의 거짓말은 괜찮은걸까?
[나는 인간이 희망을 잃을 때 어떻게 동물이 되는지, 약속을 잃었을 때 어떻게 야만이 되는지를 거기서 보았소. 그렇소. 당신이 환상이라 부른 그 영원한 희망 말이오. 희망없이는, 그리고 정의에 대한 약속 없이는 인간은 고난을 이겨내지 못합니다. 그 희망과 약속을 이 세상에서 찾을 수 없다면 (하긴 이게 사실이지만) 다른 데서라도 찾아야 합니다. 그래요, 하늘나라 하나님의 왕국에서라도 찾아야 합니다.] P.271
엔도 슈사쿠의 <침묵>과 많은 부분에서 비교가 되는 작품이었다. <침묵>의 페레이라 신부가 보여주는 신앙 대한 강인한 믿음과 <순교자>의 신목사가 보여주는 희생은 어느정도 일맥상통하지만, <침묵>이 신의 존재에 집중했다면 <순교자>는 신앙의 목적에 집중했다는 느낌을 받았다. 결론은 두 작품 모두 아주 좋다는 거지만.
이 책을 읽고 과연 항상 진실을 말하는게 옳은건가 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어차피 진실은 말하지 않아도 진실일텐데, 누군가의 믿음을 깰수도 있는 진실이 그렇게까지 의미가 있는걸까? 상황에 따라 다르긴 하겠지만 개인적으로는 항상 진실이 궁금하기는 하다. 그것이 나 자신을 절망에 빠뜨릴지라도 말이다.
ps. 이 책의 저자인 김은국 작가 완전 엄친아임. 드라마틱한 인생을 살아서인지 작품 자체도 완전 리얼하게 느껴진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