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읽은 국내 소설. 좋다.
어르신은 다 늙은 사람이 이제 와 겁낼 게 뭐 있겠느냐고 말은 하면서도 개인정보가 드러나는 것은 극도로 조심하는 눈치였고, 결국 나중에 밍밍 씨를 통해 몇몇 부분은 반드시 삭제해달라고 요청해오기도 했다. - P16
지붕과 벽이 있는 공간안에서만 유효한 용기. 내가 하는 동성애가 더는 사생활이아니게 되는 순간, 단체에서 벌이는 거리 캠페인이나 시위활동을 통해 내가 바로 성소수자라고 세상에 소리쳐야 하는 순간, 나는 내 안에 꿈쩍도 하지 않는 바리케이드가 있다는 걸 실감하며 물러서게 됐다. 거기까지 가고 싶지는않았고 거기에 있는 사람들처럼 절박해보이고 싶지도 않았지. - P21
남들과는 다른 욕망을 지녔다는 이유로 어린 시절부터 자신의 신체에 수치심과 모멸감을 적립해온 사람이라면, 반복되는 혼란과 부정 속에서도 기어코 규범을 거스르는 쾌락 쪽으로 향하는 자신에게 진저리 쳐본 사람이라면, 제아무리 벽장으로부터 자유로워졌다 한들 이 소설에서 자신의 어떤 시절을 겹쳐보지 않을 수는 없을 테니까. - P32
그 이후로 지금까지도 나는 줄곧 게이인 화자를 내세우며 글을 쓰고 있다. 내 성적 정체성과 화자의 성적 정체성을 일치시키자 그간 소설을 쓸 때마다 감지되었던 위화감이 거짓말처럼 사라졌고, 그 소설들은 실제 내 삶에도 영향을 미쳐 나는 소설 밖에서도 내가 어떤 사람인지 말할 수 있게 되었다 - P34
이런 죽음과 그런 죽음이 과연 다를까요? - P38
아버지는 내게 많은 것을 묻는 사람이 아니었기에 무언가 물을 때면 그냥 넘어가기 힘들었다. - P57
문제는 주말이었다. 생각이 넘쳐흘러 무슨 짓을 저지를지 모르겠다는 두려움이 들었다. 그래서 술을 마셨다.어느 주말인가, 밤새 술을 마시고 잠이 들었다가 눈을 떠보니 일요일 오후 3시였다. 겨우 몸을 일으켜 욕실 세면대 앞에 섰는데 코피가 났다. 코피를 보는 순간 현기증이 일어 주저앉았다. 나는 주저앉은 김에 한번 울기로 했다. 코피가 멈출 때까지 소리 내어 울었고 뜨거운 물로 샤워를 했다. 욕실에서 나와 집을 둘러보니 거대한 쓰레기통 안에 있는 기분이었다. 나는 천천히 청소를 시작했다. 그리고 쓰레기를 버리러 밖에 나갔다가 다시 집으로 올라가기가 싫어서 그대로 슬리퍼를 끌고 산책을 나갔다. - P60
하지만 나는 결국 묻지 못했다. 손을 잡지 않았어도, 그저 나란히 서 있기만 했어도 그 둘이 평범한 관계가 아니라는 걸 나는 본능적으로 알았던 것 같다. - P67
그런데 이게 화상이 아니라구요? 엄청 뜨거웠는데,이건 동상. 뭐, 증상은 비슷한데. 되게 뜨거웠는데, 불에 덴 것처럼. 그게 너무 차가워서 뜨겁다고 느끼는 겁니다.얼마나 갈까요? 좀 걸립니다. 어떻게, 오래 잡고 계셨나 봐요. - P67
알잖아. 중요해 보여도 실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거. 어려운 것도 아니고. - P76
결국 우리는 자신이 믿을 수 없는 나이에 들어서게 되니까. - P77
어떤 마음은 없는 듯, 죽이고 사는 게 어른인 거지. 그렇지? 그런데 어째서 당신들은 미래가 당연히 존재할 것이라고 믿는 건가? 그러나 이 모든 말을 나는 할 수 없었다. 수형의 뒤에서 하얀 수증기가 뭉게뭉게 피어오르고 있었다. 자기야, 꿈같아. 내가 겨우 입을 열었다. - P88
N22098"프로스퍼는 말을 많이 하지 않았고, 그가 할 수도 있었을 어떤 말은 전혀 하지 않았다. 해야 한다는 건 알았지만 하고 싶지 않았다."트레버의 단편집 <그의 옛 연인>에는 총 열두편의 단편이 실려 있는데 어느 한편 빠지는 작품이 없었다. 이 단편집을 전체적으로 관통하는 키워드는 죄책감과 후회. [9년 내내, 사랑이 있었다. 단순한 위안을 넘어서는, 위안에 지나지 않는다고 하기엔 너무 강렬한 사랑, 은밀함은 아직도 짜릿할까? 그 의문 역시 입 밖에 낸 적 없었다.] P.57 <방>이 책의 단편들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각각 어떤 사건을 경험하게 되는데 누군가는 이를 털어버리고 아무일도 없었던 것처럼 살아가지만, 누군가는 마음에 계속 담아두고 얽매여서 살아간다. 그때 그 선택을 하지 않았더라면, 그때 진심을 말했더라면 어땠을까 하는 후회와 함께.[거기 간다 해도 그는 햇볕이 비치는 의자에 앉아 있지 않을것이다. 버스 정류장에서 기다리고 있지 않을 것이다. 슬롯머신에서 게임을 하고 있지도 않을 것이며, 맥도널드에 있지도 않을 것이다. 하지만 눈을 감으니 거기에 그의 미소가 있었고 그것은 사라지지 않았다. 그녀는 그가 준 선물인 목걸이에 입을 맞췄다. 그것을 항상 고이 간직하겠다고 그녀는 다짐했다.] P.143 <오후>[아빠는 코니의 손을 잡았고 다 알고 있는 딸에게 달리 말은 하지 않았다. 아이는 울지 않았다. 자신의 짐작과 다를 수도 있으니 물어보고도 싶었지만 짐작과 같다면 그 말은 듣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묻지 않았다.] P.217 <아이들>어떤 건 자세히 설명을 해야만 이해가 되지만 어떤 건 단 한줄 만으로도 모든걸 말해주기도 한다. 나에게 있어서 트레버의 단편은 후자다. 트레버의 단편은 불친절하다. 절대로 감정을 자세하게 표현하지 않는다. 시점도 아무 설명도 없이 갑자기 바뀐다. 하지만 책장이 한페이지씩 넘어갈 수록 감정은 조금씩 쌓이면서 서서히 진심을 드러낸다. 그리고 마지막 페이지에서 그 감정이 남기는 여운은 상당하다."어떤 슬픔은 파도처럼 밀려오고, 어떤 슬픔은 잉크처럼 천천히 번지는 거야." <헤어질 결심> 중..."설명해 주지 않으면 모른다는 건 설명해 줘도 모르는 거야." <1Q84> 중...역시 윌리엄 트레버는 좋다. 누군가 나에게 최고의 단편 작가를 소개해 달라고 하면 망설임없이 윌리엄 트레버라고 말하겠다.
역시 트레버는 트레버다. 완전 좋음
고통은 없었다. 고통이 없도록 잘 보살폈다. 어머니가 호스피스 시설에 있었을 때나 마지막 무렵에 갑자기 원해서 집에 돌아와 지낼 때나, 고통이 없다는 것은 누가 봐도 알 수 있었다. "우리가 기도했기 때문인 것 같아요." 코니는 모든 것이 끝났을 때 그렇게 말했고, 아버지도 그런 것 같다고 말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고통이 없었다는 사실이었다. - P200
"아, 로버트, 백만 년이 흐른들 제가 어떻게 당신을 거절할 수 있겠어요." - P208
이제는 더 잘해야겠다. 그렇게 다짐하며 주위를 둘러본 그녀는 전에 조문객들을 둘러보던 때처럼 이번에도 자신을 떠난 남자를 발견하기를 반쯤은 기대했다. 그녀는 그가 거기에 있기를 바랐고, 자신이 다시 사랑받고 있다는 것을, 그가 그토록 무심하게 가했던 모욕을 견디고 살아남았음을, 이제는 행복하다는 사실을 그가 알기를 바랐다. 하지만, 당연한 얘기지만, 그는 거기 없었다. 모두 끝난 일이었다. - P209
아빠는 코니의 손을 잡았고 다 알고 있는 딸에게 달리 말은 하지 않았다. 아이는 울지 않았다. 자신의 짐작과 다를 수도 있으니 물어보고도 싶었지만 짐작과 같다면 그 말은 듣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묻지 않았다. - P217
그리고 로버트는 그 여름의 결정이 어떤 것이었는지는 흐르는 시간이 정리해줄 것임을 알았다. 시간이 이야기의 끝을 마무리할 것이며, 추억을 소중히 한 딸의 마음은 그 또한 중요한 심지어 더욱 중요한 사랑이었음을 확인시켜줄 것이었다. - P227
마멀레이드를 바른 빵을 남편 쪽으로 옮긴다. 예전만큼 가장에 능하지 않은 그의 얼굴은 아무것도 감추지 못한다. 그녀는 홀로 남겨진 여자를 생각하고 있는 남편을 바라본다. - P235
주방에서 나온 사내는 여전히 말이 없다가 돌아서서 가버린다. 윌비는 자신이 다른 사람으로 오인되었다는 인상을 받는다. 와인을 조금 더 따르고 다시 책을 읽는다. 윌비는 책을 많이 읽는다. 그리고 술을 많이 마신다. - P28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