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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주에 대하여
김화진 지음 / 문학동네 / 2022년 10월
평점 :
N23020
"저는 아무도 상처주지 않아도 알아서 상처를 받는 능력이 있어요. 그리고 그 상처를 무시하거나 덮어놓지 않고 내내 뚫어져라 바라보는 습관도 있고요. 아주 최악이죠."
내가 남자여서 그런지 여성에 대한 심리, 마음을 다룬 작품을 읽다보면 여성은 이런 생각을 하는구나 하면서 놀라기도 하지만, 또 어떤 면에서는 아! 나랑 생각이 비슷한 측면이 있네 하면서 공감하기도 한다.
이런 느낌을 받은 작품이 표제작 <나주에 대하여>와 <꿈과 요리> 였다.
<나주에 대하여>에는 '김단'이라는 여주인공과, 그녀의 남자친구의 전 여자친구인 '나주'라는 여성이 주인공의 회사에 들어오게 되고, 같은 사무실을 쓰면서 느끼게 되는 주인공의 감정에 대한 이야기가 실려있다.
주인공은 '나주'를 오래전부터 잘 알고 있었다. 주인공은 SNS를 통해 그녀를 염탐하고 있었다. 왜 그녀는 '나주'에 대해 그렇게 집착할까? 하지만 주인공은 '나주'에게 자신의 집착을 드러내지 않는다. 그저 떠보기만 한다. 왠지 약간 무섭기까지 하다.
이유는 있었다. 주인공의 남자친구는 11개월전 사고로 사망해서 더 이상 이세상 사람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녀는 SNS를 염탐하면서 예전의 여자친구에게서 남자친구의 흔적을 찾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나보다 더 남자친구에게 어울렸을 거라고 생각되어지는 '나주'. '나주'는 전 남자친구의 죽음을 알고 있을까?
그런데 '나주'에 대한 주인공의 감정은 질투보다는 친해지고 싶음에 가까웠다. 어쩌면 누구에게도 털어놓을 수 없었던 남자친구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서 였을지도 모른다.
남자친구는 나를 만나기 이전에는 어떤 마음이었을까? 어떤 사람을 만나고 있었을까? 과거를 더 좋아했던건 아닐까? 사람에 대한 궁금증은 헤어진 후에도 이별 후에도 사라지지 않는다.
<꿈과 요리> 는 대학 동창인 '수언'과 '솔지'의 속마음을 옂볼수 있는 작품이었다. 함께 어울리는 것보다는 혼자있는 것을 좋아하는 '수언', 그리고 함께 어울리면서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주도하는 '솔지', 대학생때 두 사람은 서로 친하지 않았다. 아니 싫어했다고 하는게 더 맞는 표현일거다.
[수언은 늘 솔지의 목소리가 복잡하다고 느꼈다. 고민을 털어놓 고 이런저런 의견이나 감상을 말할 때의 목소리에 레이어가 있다고, 곁이 있었다. 수언이 생각하기에 그것은 솔지를 풍부해 보이 도록 하는 매력적인 곁이 아니라 쓸데없는 겁이었다. 굳이 분류하 자면 스스로 처세를 잘한다고 믿는 사람에게서 느껴지는, 다른 사람이 자신을 어떻게 볼지를 부자연스러울 정도로 의식하는 (그렇 지만 자신은 매우 자연스럽다고 믿는) 자의식이 도드라지는 사람의 겹이었다.] P.95
'수언'은 '솔지'의 행동을 의미없는 것이라고 무시했었고, '솔지'는 혼자서만 고고한척 하는 '수언'이 눈에 가시였었다. 하지만 몇년 후 '수언'은 대학을 졸업하고 출판사에 취직했고, '솔지'는 어학연수를 다녀오는데 우연히 한 카페에서 마주친다. 외로워서 그랬던걸까? 두 사람은 친구가 된다.
[수언은 자신이 사랑하는 영화에 대한 글을 쓰고 싶었고, 그런 일을 하는 사람이 영화평론가라는 걸 알게 된 이후부터 그 직업이 갖고 싶었다. 다만 핑계 대지 말자고 생각했다. 수언은 자신이 특 별하다고 여기지는 않았다. 되고 싶다고 해서 반드시 되어야 하는 것은 아니고 그런 일은 아무에게도 없으며 자신 역시 똑같다고. 잘하면 되겠지만 잘해도 안될수도 있는 거라고. 될 때까지 하겠지만 결국 안 되었을때 누구의 탓도 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누군가는 그렇게까지 비장한 게 우습다고 할지 몰라도 그래야 했다. 자신을 싫어하지 않기 위해 열심히 한 것까지만 후회하지 말자고 생각했다. 그 이후는 생각하지 말자. 미래는 잘 모르니까 안되어도 누구를 탓하며, 그걸 가지고 핑계를 대거나 알리바이를 궁리하며 꿈을 포기했네 어쩌네 하고 연극적으로 과장되게 굴기는 싫었다.] P.97
직접적으로 드러낸 적은 없었지만 그렇게 서로에 대해 서운한 감정이 아직 남아있는데 친구가 될 수 있을까? 두 사람은 과거에 대해, 서운했던 감정은 이야기 하지 않는다, 마음속에서만 되풀이할 뿐이다. 그럼에도 친하게 지낸다. 마치 마음속에 시한폭탄이 있는것처럼, 두 사람은 마음을 감추지만 갈등의 위험은 점점 커져만 간다. 그러다 펑 터지는데...
어쩌면 두 사람이 서로에게 서운했었던 이유가 서로에 대한 호감, 끌림 때문은 아니었을까? 다가오지 않았던 서로에 대한 아쉬운 마음을 간직한 그들의 우정은 언제까지 유지될 수 있을까? 감춰둔 마음을 상대방이 알기는 쉽지 않다.
김화진 작가님(원래 직업은 편집장이라고 하던데...)의 마음을 다룬 여덟편의 단편들 모두 좋았다. 개인적으는 퀴어(레즈비언) 분야 이야기를 선호하지 않는데 이 책에 실린 이야기들은 흥미로웠다.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어떤 마음인지는 알 수 있었다. 역시 편집도 잘하는 분이 글도 잘쓰나 보다.
- 공감했던 문장들 -
[나는 생애 전반에 걸쳐 그런 사람들을 부러워하며 원망했다. 내가 가지지 못한 성향을 가진, 내향 인간들을 항상 좋아하면서도 서운했다. 나는 매번 제안하는 쪽이었기 때문에, 사람을 천천히 알아가고 조심스럽게 가까워지고 싶다는 사람들의 팔을 붙들고 같이 시간을 보내자고 흔드는 쪽은 백이면 백 나였다. 그런 나도 좀 병적인가. 어느 모임에서나 그런 유의 사람들을 좋아해. 서촌으로 커피 마시러 갈래요? 광화문으로 생선구이 먹으러 갈래요? 하고 물으면 그들은 언제나 사려 깊은 표정으로 아, 네, 좋아요. 언제든 단이씨 편하신 시간에…… 라고 대답해왔다. 거절이 아닌 것만으로 마음이 놓였지만 한편으로는 늘 속이 꼬였다. 너희들은 좋겠다. 우아하게 컨펌할 수 있어서 좋겠어. 누군가가 물어보면 음 하고 고민하고 마침내 네. 라고 대답할 수 있어서 좋겠다. 나도 그런 역할 좀 맡아보고 싶네.] P .63(나주에 대하여)
[나는 머쓱하다는 표정을 지어내며 너의 말을 듣는다. 기분은 좋 았지만 한편으론 무슨 소린가 싶기도 하다. 나도 너처럼 우아하게 가만히 있어도 괜찮고 싶거든. 괜히 아무도 부추기지 않았는데 혼자 침묵에 불안해져 까불지 않고, 나도 누가 웃겨주면 웃고만 있고 싶다고. ] P.65(나주에 대하여)
[예은씨, 혹시 많이 힘든가요. 그 말을 하려다가 하지 못했다. 사실을 되물어봤자 사실일 뿐이라는 생각에 손가락이 자꾸만 멈췄다. 힘들면 그만두라는 말도 말뿐이고, 넌 잘할 거야 원래 잘 견뎠잖아 하는 말은 욕보다 나쁘고, 퇴직한 이 후 말을 고르는 일에 신경을 덜 쓸 수 있어서 좋았는데 아주 오랜 만에 그런 자신이 싫었다. 예은에게 건넬 수 있는 말을 아무리 골라봐도 마땅한 것이 없었다. 텅 빈 것 같았다. 오늘 많이 바빠요? 일 아직 안 끝났어요? 끝없는 물음표를 찍고 싶었지만 곧 모조리 지워버렸다. 은영은 속에 담긴 말을 고르다가 결국 가장 건져올리기 싫었던 문장에 머무르게 되었다. 바쁜 게 아닐지도 몰라. 힘든 게 아니라 힘들어도 이제 나랑 얘기할 필요가 없는 거겠지.] P.141(근육의 모양)
[저 준비하던 거 그만뒀어요. 못하겠어요. 사실 진작 못하겠다고 생각했는데 이제야 그만뒀어요. 잘 모르겠어요. 이젠 아무것도 못 하겠어요. 계획하고 준비하는 거. 미래가 좋을 거야 하고 나한테 내가 최면거는 거.] P.166(척출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