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 이별, 죽음에 관한 짧은 소설
정이현 외 지음 / 시간의흐름 / 202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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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23027

˝누구나 자신의 방식으로, 이 사람은 이 사람의 방식으로 풍화를 견디는 중이었다.˝


<시간의 흐름> 시리즈 책을 좋아한다. 좋아한다고 해봤자 지금까지 네권밖에 안읽었지만...그냥 좋다. 원래 좋아하는데는 이유가 없는거다.


이번에 읽은 책은 나름 신작인 <사랑, 이별, 죽음에 관한 짧은 소설>이라는 세편의 단편을 모은 책이다. 정이현, 임솔아, 정지돈 세분의 작가가 참가하였다. 일단 책 제목부터 너무 마음에 들었다. 사랑, 이별, 죽음 이 세 단어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키워드 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표지도 너무 깔끔해서 이건 안살수가 없었다.


짧은 세 단편 모두 좋았다. 특히 한번 읽었을때는 잘 몰랐었는데, 두번 읽으니까 처음에 못느꼈던 감정들을 느꼈다. 특이한 점은 사랑, 이별, 죽음이라는 일반적인 키워드를 주제로 했지만, 내용은 좀 일반적이진 않았다. 그래서 더 좋았다.





<사랑 : 우리가 떠난 해변에>

14년전에 일반인들의 짝짓기 연애 프로그램인 ‘러브 애드벌룬‘이 있었다고 한다. 10회분만 방영하고 프로그램은 사라졌다고 하는데, 이 프로그램의 모토는 ‘사회적 조건에 종속된 사랑이 진짜 사랑일까?‘ 였다. 출연자의 모든 사회적 배경은 밝히지 않은채 오직 그 사람 하나만을 가지고 서로를 관찰한다. 그리고 1차 커플이 만들어진다. 이제 마지막 순간이 오고, 서로는 서로의 사회적 배경을 밝혀야 한다. 만약 상대방의 배경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커플은 사랑의 걸음을 멈춰야 한다.

[출연자들이 사흘 동안 서로의 신상에 대해 알게 되는 거라곤 이름이 전부였다. 노정훈 씨, 이혜정 씨 그리고 다른 모든 출연자들도 캠프 애드벌룬 안에서 오직 한명의 개인으로만 존재했다. ‘사회적 조건에 종속된 사랑 이 진짜 사랑일까.‘ 선우는 공식 홈페이지의 기획 의도에 그런 말이 적혀 있었다고 기억했다. ‘조건에 얽매인 결혼 상대자로서가 아니라 자유로운 인간 대 인간의 만남. 네이키드 상태에서 피어나는 진실한 사랑을 찾기 위해 기획되었다.‘ 유치하고 조악한 문장이었다.] P.20



피디인 ‘선우‘는 14년전에 ‘러브 애드벌룬‘에서 본 한 커플을 기억하고 있었다. 커플이 된 두 사람은 서로의 사회적 배경을 밝히는데, 너무나도 많은 차이가 있었다. 그럼에도 두 사람은 이를 극복하고 진짜 커플이된다. 그리고 결혼까지 했다고 한다. ‘선우‘는 이 커플이 아직도 잘 살고 있는지 궁금해 하며, 두 사람을 대상으로 다큐멘터리를 만들겠다는 구상을 한다. 그래서 주인공인 ‘설‘과 함께(선우가 주인공이 아니다...) 두 사람을 찾아간다. 과연 두 사람은 행복하게 잘 살고 있을까? 사회적 배경의 차이는 잘 극복했을까?

[두 사람은 모든 게 달랐어요. 그냥 다른 세계의 사람들처럼 보였어요.태어날 때도 자라는 동안에도 어른이 되어서 경험한 삶에도 접점과 교차점이 없는 사람들. 이런 두 사람이 사흘 만에 어떻게 사랑에 빠지게 되었 을까요. 그게 경이롭고 끔찍하게 불가사의했어요! 선우의 느낌표가 환청처럼 귓가에 부서졌다. 두 사람 의 유튜브 영상에서 추천 수가 가장 많은 댓글은 다음과 같았다.

‘보고 또 봅니다. 사랑의 첫 순간에 대해 생각하면 저 는 항상 이 장면이 떠오릅니다.‘] P.24



사랑하는데 있어서 재산, 집안, 직업 등 그 사람 자체가 아닌 주위 조건들을 우리는 어떻게 인식해야 할까? 조건을 신경쓰는 사람을 속물적이라 말할 수 있을까? 이상과 현실에 있어서 사랑만큼 큰 괴리를 보여주는 것도 없다는 생각이 든다.

[사랑이 고정불변한 틀 안에서 존재한다는 것도 착각 아닌가요? 사랑은 감정인데 네모 통에 담으면 네모가 되고 원형 통에 담으면 또 원형이 되는 거죠.] P.35







<이별 : 쉴 곳>

이별이란게 꼭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만 일어나는 건 아니다.이 작품은 자신을 불안하게 했었던 과거의 기억과 나를 속박했던 현실과의 이별을 그린 작품이다.


누구나 어린시절 트라우마가 있을 것이다. 주인공인 민영은 어린시절 부모님을 떠나보내고 스무살 정도의 나이차가 나는 오빠와 새언니 밑에서 자랐다. 어린시절 오빠와 새언니는 자주 싸웠고, 민영은 그때마다 불안을 느꼈다. 그리고 그 불안은 성인이 되어서까지 이어졌고, 민영은 사람들과 이야기할 때면 몸을 떠는 습관이 생기게 되었다. 그런 민영은 사람을 피하게 된다.


하지만 뭐든지 시간이 지나면 무뎌지는법, 민영은 이제 오빠와 새언니가 싸우더라도 떨지 않는다. 그리고 직장 사람들과 있으면서도, 회사를 떠나면서도 예전과는 다르게 마음이 편했다. 자신을 둘러싼 불안과 이별하게 된 민영은 조금 더 홀가분하게 살아갈 수 있을까?

[˝언니, 해볼래? 자기가 운전하면 멀미가 안 나.˝
˝안 한 지 오래됐는데.˝
˝그냥 해봐. 달걀 꺼내듯이.˝
그럴까? 라고 말하며 정화는 활짝 웃었다. 민영은 갓길에 차를 세웠다. 정화와 자리를 바꿨다. 차는 천천히 나아갔다. 잔뜩 긴장한 듯 정화는 운전대에 상체를 바짝 붙였다. 차가 크게 휘청였고 정화가 급브레이크를 밟았다. 웅덩이였다. 정화의 손이 떨려왔다. 민영은 비상등을 켰다. 한쪽 손을 정화의 손 위에 포갰다.
˝걱정 마. 아무렇지도 않아.˝
민영은 민기에게 배운 말을 뱉었다. 정화가 고개를 끄덕였다. 더는 손이 떨리지 않았다.] P.69



시간이 해결해준다는 말이 있다. 개인적으로는 이 말을 좋아하지는 않지만, 무뎌지게 해주는건 확실히 맞는것 같다. 지쳐가게 하는 것일수도 있지만...







<죽음 : 나는 어디에 있는가>

˝내가 말하고 싶은 건 몸과 마음이 생각보다 단단하게 연결되어 있지 않다는 사실이야. 몸은 의식에 따라 다르게 인지될 수 있는 고깃덩이에 불과해.˝



(당연히 둘을 분리해서 이야기할 수 없지만...)
나라는 존재를 대표하는건 육체일까? 정신일까? 이 작품은 이런 물음을 독자에게 제시한다. 개인적으로는 당연히 육체보다는 정신이라고 생각을 했는데, 이 작품을 읽고나서 생각이 약간 바꼈다. 왜인지 궁금하시다면? 이 단편을 한번 읽어보시길 추천한다. 작가의 상상력이 아주 인상적인 작품이었다. 이 책에 실린 세편의 단편이 다 좋았지만 하나만 꼽으라고 하면 이 작품을 선택하겠다. (그래서 자세한 줄거리는 생략....ㅎㅎ)

[만약 그의 기억 역시 그대로 이어진다면 그를 다른 사람이라고 할 수 있냐고 졸탄은 물었다. 부활한 그가 목소리도 얼굴도 전과 다르지만, 아무도 모르는 모어와의 기억을 정확히 떠올릴 수 있고, 되살아난 스스로를 인지한다면 다른 사람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그래도 그건 다르죠. 몸이 다르면 존재도 달라지는 거니까.]

[그럼 심장 이식수술을 한 사람은요? 전신 성형을 한 사람은? 이렇게 생각해봅시다. 사고로 뇌에 손상이 생겨서 성격이 전혀 달라진 사람이 있다면 그는 다른 사람인가요? 나를 나로 만드는 건 무엇일까요?] P.95



어떤 단어를 듣고 떠올리는 건 사람마다 다를 수 밖에 없다. 내가 떠올렸던 사랑, 이별, 죽음에 관한 이미지와 이 책에서 그리는 이미지는 많이 달랐지만, 다르기 때문에 더 신선하게 읽혔다. 그리고 이 책을 통해 좋은 작가 세분을 알게 되어서 너무 좋았다. 작가님들의 다른 작품도 찾아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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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크pek0501 2023-05-19 09:3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참 좋은 작품을 읽으신 것 같습니다. 저는 사랑과 죽음 둘 다 관심이 가네요.
사랑, 에서 그 커플은 잘 살고 있는지 저도 궁금하네요. 그리고 어떤 노력이 필요했는지 아니면 사랑하기 때문에 모든 차이를 극복할 수 있어 노력을 하지 않아도 되었는지 궁금해요.
장바구니에 담겠습니다.^^

새파랑 2023-05-19 12:51   좋아요 1 | URL
음... 잘살지는 못한거 같아요 ㅋ

이 책 좀 얇고 비싸지만 그만큼 값어치가 있는거 같아요. 전 대만족입니다~!!

페넬로페 2023-05-20 00:2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사랑, 이별, 죽음이 우리 주위의 거의 전부를 이루고 있는데 뻔할 것 같아도 다양한 스토리가 수없이 나오기도 하는듯요^^
저는 연애관련 예능을 좋아하지 않는데 결국 사람들이 조건으로 실망하고 애정하는 것이 보기 싫더라고요^^

새파랑 2023-05-20 11:15   좋아요 1 | URL
조건을 보지 않고 사람 그 자체로만 사람을 바라보기는 쉽지 않겠죠? 그래도 페넬로페님 같은 분이 있어서 다행입니다~!!

저도 연애관련 예능을 안봅니다. 티비 자체를 안보기는 하지만요 ㅎㅎ

희선 2023-05-20 02:0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별 하면 사람하고 헤어지는 게 먼저 떠오르는데 불안과 헤어진다니 좋네요 저도 헤어지고 싶군요 어려울 것 같아요 소설에선 그런 거 잘 하는구나 하기도 해요 실제로는 참 어려운데...


희선

새파랑 2023-05-20 11:16   좋아요 0 | URL
사람이든 습관이든 뭐든지 헤어지는건 정말 어려운거 같아요. 저도 그렇습니다 ㅜㅜ

얄라알라 2023-06-08 12:5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새파랑님, 역시 당선글 목록에서 새파랑님의 이름을 봅니다! 역시!
축하드려요~~

새파랑 2023-06-08 15:53   좋아요 0 | URL
와우 ㅋ 저번달에 별로 못읽었는데 당첨이라니 ㅋ 감사합니다~!! 책 또사야겠습니다~!!
 
알렉시.은총의 일격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51
마르그리트 유르스나르 지음, 윤진 옮김 / 문학동네 / 201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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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23026

"책 속엔 삶이 들어 있지 않소. 책 속에 있는 것은 삶이 타고 남은 재, 흔히들 인간적 경험이라고 부르는 바로 그거요."


퀴어문학이 보여주는 사랑의 극단을 좋아한다. 가끔 육체적으로 너무 세밀하게 묘사(?)하는 작품은 좀 싫지만,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의 심리에 대해 묘사하는 작품은 정말 좋아한다.


이번에 읽은 알렉시/은총의 일격(두편의 단편이다)은 내 취향과 완벽히 맞는 작품은 아니었다. 1인칭 시점으로 이야기가 진행됨에도 주인공들은 자신의 속내를 완전히 드러내지 않는다. 10마디 단어중에 1마디 단에에만 속내를 숨겨놓는다. 마치 누군가가 훔쳐볼 것을 걱정하듯이, 마치 나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당신에게 부탁하고 싶은 것은 아직까지 내가 당신에게 부탁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은 너무도 힘들 게 써나갈 이 글을 한 줄도 빠뜨리지 말고 읽어달라는 거요. 삶을 사는 것도 힘들지만, 자기 삶을 설명하는 것은 더 어려운 일이라오."] P.20



그래서일까? 드러낼 수 없었던 주인공의 생각과 감정을 찾아가는 재미가 있었다. 그리고 더 진정성 있게 느껴졌다. 우리가 우리의 생각을 완벽하게 글로 써내려 갈 수 있을까? 머릿속에 있는 생각중 과연 몇 퍼센트가 글이라는 형태로 표출될까?


우리의 생각이 글로 표출될 때 그 생각은 정제되어 나올 수 밖에 없다. 때론 과장되고, 때론 생략되어지면서 말이다.



<알렉시>는 주인공인 알렉시가 부인을 떠나면서 그녀에게 남긴 편지로 된 글이다. 그는 그녀를 떠나는 것에 대한 미안함을, 그녀에 대한 애정이 없었음을, 그동안 그가 품었던 어려움을 편지글로 전달한다.

[난 늘 죽는 것이 쉬우리라 생각했소. 내가 죽음을 생각하는 방식은 사랑을 상상하는 방식과 크게 다 르지 않았다오. 힘이 다 빠진 상태, 아마도 달콤할 패배이리라 생각했지. 그날 이후 사는 내내 그 두 가지 강박적 생각이 번갈아 나타났소 하나에 시달리면 다른 하나가 나타나서 낫게 해주면서 말이오. 하지만 그 어떤 추론도 두 가지 병에서 다 낫게 해주진 못했다오.] P.44



하지만 왜 그가 그녀를 떠나려는지에 대한 진짜 원인에 대해서는 쓰질 않는다. 다만 그의 성적 취향이 동성애임을 암시하는 몇마디 단어가 아주 잠깐 등장한다.

[난 조언을 구할 사람이 아무도 없었소, 금지된 성향의 첫번째 결과는 우리가 우리 자신 속에 갇히게 된다는 거요. 침묵하든지 아니면 공모자들에게만 이야기해야 하기 때문이오. 나 자신을 이겨내려고 애쓰 는 동안 고통스러웠던 건, 나에게 용기를 주는 사람도 연민을 품어주는 사람도 기대할 수 없다는 것, 진정한 선의가 누릴 자격이 있는 아주 약간의 존중이라도 베풀어줄 사람을 기대할 수 없다는 것이었소.] P.55



그런데 알렉시는 동성애자라는 이유 하나 때문에 아내를 떠나려는게 맞는걸까? 자신을 찾기 위해(동성애) 소중했던 것(아내)을 버리는 행위에 대해 나는 어떻게 판단해야 할까?

[그대여, 우리는 삶이 우리를 변화시킨다고 믿지만, 그렇지 않다. 삶은 우리를 마멸시키고, 우리 안에서 마멸되는 것은 우리가 배워서 알게 된 것들이 오 난 전혀 변하지 않았소. 단지 나와 나 자신의 타고난 기질 사이에 사건들이 끼어들었을 뿐이오. 나는 이전의 나 그대로였고, 어쩌면, 환상과 믿음이 하나둘 스러져갈 때마다 우리 자신의 진정한 모습을 더 잘 알게 되니, 이전보다 더 깊숙하게 나 그대로였소. 수없이 노력하고 수없이 성의를 쏟았지만 결국 이전과 똑같은 나..] P.107



책을 다 읽고 나서도 이 의문은 떠나지 않았다.





<은총의 읽격>은 조금 더 재미있고 쉽게 읽을 수 있는 단편이다. 1차 세계대전 이후 내전을 치루고 있는 발트해 연안을 배경으로, 에릭이라는 1인칭 주인공 시점으로 서술된 책인데, 주요 등장인물은 딱 세명이다. 에릭(남), 소피(여), 콘라드(남) 인데...


소피와 콘라드는 남매지간이다. 그리고 소피는 주인공 에릭을 좋아한다. 그런데 에릭은 콘라드를 좋아한다. 소피는 이 사실을 모른다. 에릭은 자신에게 계속 다가오는 소피를 받아주지 않는다. 소피는 왜? 하며 괴로워한다. 미친 삼각관계의 끝은 과연 어떻게 될까?

[어느 순간부터 우리의 게임을 이끌어간 것은 그녀였다. 그녀는 자신의 인생을 걸었기 때문에 더욱 치열했다. 게다가 주의를 쏟아야 할 다른 일이 많아 신경이 분산된 나와 달리, 그녀는 오로지 나에게 집중했다. 나에겐 콘라드도 있었고, 전쟁도 있었으며, 그 이후로 버렸지만 그때까지는 어느 정도 야심도 있었다. 그녀에게는 이내, 마치 주변 사람 모두가 비극의 단역이 되어버린 것처럼, 오직 나만 혼자 존재했다.] P.145



이 작품에서도 에릭의 동성애적인 말이나 행동은 드러나지 않는다. 읽다보면 에릭이랑 콘라드 사이에 뭐가 있긴 한건가? 라는 의문도 생긴다. 그러면서 아! 1인칭 주인공 시점이어서 그렇구나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과연 우리는 우리 자신에 대해 어디까지 솔직할 수 있는걸까?

["무서워하지 않는 건 나쁘다는 생각이 들 때가 많아요. 하지만 행복하기만 하다면." 그녀는 첼로의 저음처럼 늘 나를 감동시키는 투박하면서 부드러운 원래의 목소리로 말했다. "그럼 죽어도 괜찮을 것 같아요. 단 오분이라도 행복하다면 그건 신이 내려준 신호일 거예요 당신은 행복한가요? 에릭?"] P.174



그리고 결국 진실을 알게 된 소피는 두 사람을 떠난다. 그녀가 느꼈을 배신감은 어느정도 였을까?



해설을 읽어보니 이런 작품을 <말하려는 것을 남겨두고 그 주변의 것들을 기술함으로써 대상을 드러나게 하는 기법인 '음각적 글쓰기'> 라 한다고 한다. 어쩐지 문장들이 상당히 입체적이란 느낌이 들었다. 말할 수 없는 것을 남겨 둠으로써 오히려 핵심을 부각하는 글쓰기, 이게 정말 사람의 마음이랑 비슷한게 아닌가 싶다. 드러나는 고통보다도 숨겨져 있는 고통이 더 고통스러운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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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유행열반인 2023-05-17 21:46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엇갈린 작대기만 봐도 혼란하다 혼란해 ㅎㅎ전자책 한참 전에 사놨는데 읽어보긴 해야겠네요. ㅎㅎㅎ

새파랑 2023-05-18 06:07   좋아요 3 | URL
엇갈린 작대기 맞습니다 ㅋ 제가 편견을 안기지려고 노력을 많이 하지만 나한테 저런(?) 상황이 발생하면 충격이 클거 같아요 ㅎㅎ

희선 2023-05-18 02:4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전쟁 소설로도 높이 평가 받는다는 말이 있네요 그때는 이런 거 말하기 어려웠겠습니다 없지는 않았지만, 많은 나라에서 동성애를 금지하기도 했군요 그런 걸 금지하는 법이 있었다니... 지금 생각하니 왜 그런 법을 만들었나 싶기도 하네요 그때 사람은 많이 힘들었겠습니다 지금도 차별이 아주 없지 않지만...


희선

새파랑 2023-05-18 06:09   좋아요 0 | URL
그때보다는 그래도 지금이 많이 좋아지고 표현하기도 더 자유로운거 같아요. 아 전쟁소설로도 높이 평가받는다니 몰랐습니다~!!

독서괭 2023-05-18 04:56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오 음각적 글쓰기라니 흥미롭네요. 나 자신에 대해 얼마나 솔직하게 쓸 수 있는가.. 특히 퀴어의 경우는 더 힘들겠어요.

새파랑 2023-05-18 06:10   좋아요 2 | URL
예전에 퀴어문학하면 독서괭님이 선구자 아니셨나요? ^^ 음각적 글쓰기 라고 하던데 읽다보면 뭔가 빙빙 돌려 말하는게 느껴집니다 ㅋ

페넬로페 2023-05-18 07:2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인용해주신 문장들이 이 책을 읽고싶게 만드네요~~
‘책 속에 있는 것은 삶이 타고 남은 재‘라는 문장이 좋아요^^
알렉시가 아내에게 무슨 말을 남겼을지도 궁금하고요
이제부터 책 좀 열심히 읽어야겠어요^^

새파랑 2023-05-18 09:32   좋아요 2 | URL
여행은 잘 복귀하셨나요? ^^ 페넬로페님 이제부터 열독서 모드시겠군요 ㅋ 이 책 추천합니다~!!

coolcat329 2023-05-18 10:1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 이 책 있는데 발췌글 읽어보니 참 모호하네요. ‘음각적 글쓰기‘ 또 하나 알았습니다. 책 속엔 삶이 타고 남은 재가 들어있다는 말이 멋지네요

새파랑 2023-05-18 11:27   좋아요 1 | URL
ㅋ 저도 이번에 처음 들어봤습니다 ㅋ 역시 없는게 없는 쿨캣님의 서재군요~!!

그레이스 2023-05-18 22:2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퀴어 문학이었군요
자주 올라오길래 궁금하긴 했는데...^^

새파랑 2023-05-19 13:17   좋아요 2 | URL
표지부터 약간 퀴어문학 느낌이 있습니다 ~! 상당히 괜찮았습니다~!!
 

한번 읽을때는 잘 몰랐는데, 두번 읽으니까 완전 좋아졌다. 너무 좋았다.








<사랑>

출연자들이 사흘 동안 서로의 신상에 대해 알게 되는 거라곤 이름이 전부였다. 노정훈 씨, 이혜정 씨 그리고 다른 모든 출연자들도 캠프 애드벌룬 안에서 오직 한명의 개인으로만 존재했다. ‘사회적 조건에 종속된 사랑 이 진짜 사랑일까.‘ 선우는 공식 홈페이지의 기획 의도에 그런 말이 적혀 있었다고 기억했다. ‘조건에 얽매인 결혼 상대자로서가 아니라 자유로운 인간 대 인간의 만남. 네이키드 상태에서 피어나는 진실한 사랑을 찾기 위해 기획되었다.‘ 유치하고 조악한 문장이었다. - P20

<사랑>

모든 게임에는 규칙이 있다. 러브 애드벌룬의 세계도 그랬다. 첫 번째 선택은 예선에 불과했을 뿐이고 결선은 그 다음이었다. 예선전을 통과한 남녀는 - 미래의 연인 후보를 향해 - 미리 적어낸 편지 형태의 자기소개서를 묵독으로 읽어야 했다. 그러면서 그/그녀를 둘러싼 외적인 환경을 그녀/그는 비로소 알게 된다. 이제 그들은 정말로 마지막 결정을 내려야 한다. 제각각의 결정이었다. 이 사람이 나와 어울리는지, 어울리지 않는지, 그럼 에도 불구하고 사랑의 방향으로 계속 걸어갈 것인지 아 니면 그냥 여기서 걸음을 멈출 것인지.
그건 좀 그러네요.
설이 중얼거리자, 잔인하죠, 라고 선우가 대답했다. - P21

<사랑>

두 사람은 모든 게 달랐어요. 그냥 다른 세계의 사람들처럼 보였어요.태어날 때도 자라는 동안에도 어른이 되어서 경험한 삶에도 접점과 교차점이 없는 사람들. 이런 두 사람이 사흘 만에 어떻게 사랑에 빠지게 되었 을까요. 그게 경이롭고 끔찍하게 불가사의했어요! 선우의 느낌표가 환청처럼 귓가에 부서졌다. 두 사람 의 유튜브 영상에서 추천 수가 가장 많은 댓글은 다음과 같았다.

보고 또 봅니다. 사랑의 첫 순간에 대해 생각하면 저 는 항상 이 장면이 떠오릅니다. - P24

<사랑>

사랑이 고정불변한 틀 안에서 존재한다는 것도 착각 아닌가요? 사랑은 감정인데 네모 통에 담으면 네모가 되고 원형 통에 담으면 또 원형이 되는 거죠. - P35

<사랑>

그러면 저 혼자도 할 수 있어요. 싱글 대디와 사춘기 아들이 좌충우돌 살아가는 얘기도 그림 괜찮을 겁니다. 그쪽이 더 감동적인 사랑일 수도 있어요. 설은 남자의 눈을 보았다. 퀭한 눈, 퀭해서 슬픈 눈이 었다. 누구나 자신의 방식으로, 이 사람은 이 사람의 방식으로 풍화를 견디는 중이었다. - P35

<이별>

정화가 외롭다는 말을 하려 한다는 걸 민영은 알았다. 나도 마을 사람들과 함께 얘기하고 싶다고 말하고 싶어 한다는 걸. 정화는 마음을 솔직하게 표현할줄 몰랐다. 하고 싶은 말이 있을 때면 비웃음을 담아 빈정거렸다. 민기는 정화의 속뜻을 매번 알아채질 못했다. 정화가 말도 안 되는 트집을 잡는다고 여겼다. 그리고 타인 앞에서 정화를 이상한 사람으로 만들어버렸다. - P56

<이별>

마음을 솔직하게 표현하지 못하고 이죽거리는 정화의 말투를 닮았고, 소중한 사람의 마음을 읽지 못하고 여러 사람 앞에서만 체면을 차리는 민기의 성격도 닮았다. 평소에는 애써 감춰왔던 자신의 단점이 정화와 민기를 보고 있자면 너무나 또렷하게 느껴졌다. - P57

<이별>

정화와 민기의 다툼이 어린 시절 민영에게 얼마나 커다란 공포를 주었는지가 떠올라서였다. 공과금을 한 달 연체했다거나 드라마를 보며 의견이 달랐다거나. 아무것도 아닌 일도 정화와 민기의 대화를 거치면 큰 싸움으로 번지곤 했다. 민영은 자기 방에 들어갔고, 문에 귀를 댄 채 목소리를 훔쳐 들었다. 몸이 너무 떨려서 몸이 떨리는 소리가 문 바깥까지 들릴 것만 같았다. 떨림을 멈추려고 숨을 참게 되었고, 너무 오래 숨을 참아서 죽을 것 같았다. 이제 정화와 민기의 다툼은 민영에게 어떤 떨림도 일으키지 않았다. 민영은 노트북을 켜둔 채 자리에 앉아 있었다. 정화와 민기가 다투는 소리를 듣고 있었다. 눈꺼풀이 점점 내려앉았다. 이 시끄러움 속에서도 졸음이 온다는 게 반가웠다. - P59

<이별>

"언니, 해볼래? 자기가 운전하면 멀미가 안 나."
"안 한 지 오래됐는데."
"그냥 해봐. 달걀 꺼내듯이."
그럴까? 라고 말하며 정화는 활짝 웃었다. 민영은 갓길에 차를 세웠다. 정화와 자리를 바꿨다. 차는 천천히 나아갔다. 잔뜩 긴장한 듯 정화는 운전대에 상체를 바짝 붙였다. 차가 크게 휘청였고 정화가 급브레이크를 밟았다. 웅덩이였다. 정화의 손이 떨려왔다. 민영은 비상등을 켰다. 한쪽 손을 정화의 손 위에 포갰다.
"걱정 마. 아무렇지도 않아."
민영은 민기에게 배운 말을 뱉었다. 정화가 고개를 끄덕였다. 더는 손이 떨리지 않았다. - P69

<죽음>

내가 말하고 싶은 건 몸과 마음이 생각보다 단단하게 연결되어 있지 않다는 사실이야. 몸은 의식에 따라 다르게 인지될 수 있는 고깃덩이에 불과해. - P76

<죽음>

나는 최대한 무심한 척, 담담한 척했다. 지금같이 과학이 발달한 세상에서 충분히 일어날 수 있는 일이라고, 나는 이런 일로 호들갑을 떠는 사람이 아니라고, 연인의 죽은 남편이 살아 돌아온다고 해서 걱정하는 사람도 아니고, 그의 귀환은 기쁜 일이다. 그가 요절했을 때 아파했던 그녀의 마음을 헤아려보라. 질투하고 토라질 게 아니라 이해하고 위로해야 한다. 지금 그녀가 사랑하는 사람은 나고 그녀 곁에 있는 사람은 나니까 내가 힘이 되어야 한다. 하지만 정말 그녀 곁에 있는 사람이 나일까. 왜 그는 죽었지만 살아 있는 것처럼 느껴지고 나는 살아 있지만 죽은 것처럼 느껴지는 걸까.

- P89

<죽음>

만약 그의 기억 역시 그대로 이어진다면 그를 다른 사람이라고 할 수 있냐고 졸탄은 물었다. 부활한 그가 목소리도 얼굴도 전과 다르지만, 아무도 모르는 모어와의 기억을 정확히 떠올릴 수 있고, 되살아난 스스로를 인지한다면 다른 사람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그래도 그건 다르죠. 몸이 다르면 존재도 달라지는 거니까.

그럼 심장 이식수술을 한 사람은요? 전신 성형을 한 사람은? 이렇게 생각해봅시다. 사고로 뇌에 손상이 생겨서 성격이 전혀 달라진 사람이 있다면 그는 다른 사람인가요? 나를 나로 만드는 건 무엇일까요? - P95

<죽음>

졸탄을 들은 건 그즈음이다. 시간과 정신의 방에서 엄청난 소동이 있었는데 알고 보니 졸탄과 그의 와이프가 대판 싸웠다는 것이다. 부활까지 해서 부부 싸움이라니. 하지만 전후 사정을 들어보니 이해가 갔다. 졸탄의 와이프는 다시 죽길 원했는데 죽을 방도가 없었단다. 예전에는 면도날로 손목을 긋거나 테라스 밖으로 뛰어내리면 됐는데 홀로그램이 된 지금은 어떻게 자살해야 하나. 자살이야말로 인간에게 가장 중요한 철학적 문제인데 그 문제가 원천 봉쇄되어버린 것이다. 졸탄은 잘된 거 아니냐고 반문했다. 죽느냐 마느냐로 더 이상 고민할 필요가 없다는 게 축복 아니냐고, 이제 셰익스피어나 카뮈는 그만 읽을 때가 됐다고 말이다. - P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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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선 2023-05-15 03:3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사랑 이별 죽음은 바로 사람이 사는 거군요 본래 소설이 사람 사는 이야기군요 두번 보니 더 좋아졌군요 새파랑 님 오늘 좋은 하루 보내세요


희선

새파랑 2023-05-15 09:26   좋아요 1 | URL
이 책 좋더라구요~!! 리뷰 잘 써봐야겠습니다. 희선님도 즐거운 한주 시작하세요~!!

페크pek0501 2023-05-15 15:3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정말 글이 좋네요. 잘 쓰는 작가 세 분이 썼나 봅니다. 이런 글은 필사하는 재미가 있지요.

새파랑 2023-05-15 22:50   좋아요 0 | URL
짧지만 임팩트가 있는 작품들이었습니다. 전 셋다 너무 좋았어요 ㅋ 여기 실린 작가분들 책을 찾아 읽으러고 합니다 ^^

시간의흐름 2023-06-02 11:01   좋아요 1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좋아하는 데 이유가 없는 거다, 눈물 훔치고 갑니다. 새파랑님 :)
 

왜 그렇게 될 수 밖에 없었는지, 이해가 가면서도 안타까웠다.

요즘 밤에 나는 잠을 자거나 쾌락을 누리거나 고독을 즐기는 대신 카페 테라스에 앉아 밤새도록 절망에 빠진 지식인들과 이야기를 나눌 때가 있는데, 그럴 때 내가 행복을 누린 적이 있다고, 액면가 높은 동전 한 움큼이나 전후 마르크 한 다발하고 바꿀 수 있을 금화 같은, 절대 변하지 않기에 아무리 평가절하되어도 원래의 가치를 간직할 수 있 는 금화 같은 참되고 진실된 행복을 누린 적이 있다고 말하면 모두들 놀라워한다. - P133

그리고 어느 날 아침, 미헬이 감자 모종을 옮겨 심던 정원에서 마침내 나는 모두가 아는 비밀을 알게 되었다. 콘라드만은 끝까지 모르도록 동료들이 세심하게 지킨 그 비밀은 바로 소피가 리투아니아인 하사에게 강간당했다는 것이다. 그 하시는 이후 부상을 당해 후방으로 후송되었다. 그는 술에 취한 상태였고, 다음날 거실에서 서른 명이 지켜보는 앞에서 무릎을 꿇고 울먹이며 용서를 구했다고 했다. 소피에게는 끔찍 했던 전날의 십오 분보다 그 순간이 더 역겨웠으리라. 이후 몇 주 동안 그녀는 그 기억에 괴로워했고, 임신했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떨었 다. 나는 소피와 많이 친해진 뒤에도 그 불행한 사건에 대해 흐릿한 암시조차 입에 담을 용기를 갖지 못했다. 우리는 그 주제를 늘 밀쳐냈고, 하지만 그것은 늘 우리 사이에 버티고 있었다. - P143

어느 순간부터 우리의 게임을 이끌어간 것은 그녀였다. 그녀는 자신의 인생을 걸었기 때문에 더욱 치열했다. 게다가 주의를 쏟아야 할 다른 일이 많아 신경이 분산된 나와 달리, 그녀는 오로지 나에게 집중했다. 나에겐 콘라드도 있었고, 전쟁도 있었으며, 그 이후로 버렸지만 그때까지는 어느 정도 야심도 있었다. 그녀에게는 이내, 마치 주변 사람 모두가 비극의 단역이 되어버린 것처럼, 오직 나만 혼자 존재했다. - P145

몇 주 동안 소피는 사랑에 빠진 여자가 상대에게 그 마음을 이해받지 못해서 미친듯이 화가 날 때 겪는 온갖 끔찍한 고통을 치러야 했다. 그런 뒤에는, 내가 바보이기 때문이라 생각하면서 그 때문에 일어나는 일들에 짜증을 냈고, 결국에는 몽상적인 인간들의 상상력에나 맞을 상황에 지쳐버렸다. 그녀는 쇠칼이 몽상과 거리가 먼 것보다 더 심하게, 결코 몽상적이지 않은 인간이었다. - P147

소피의 사랑은 나로 하여금 나 자신의 인생관이 정말로 정당한지 처음으로 의혹을 품게 했고, 그럼에도 그녀가 자신을 완전하게 내어줄수록 내 남자로서의 체면, 허영심은 더욱 견고해 졌다. 이 일의 희극적인 면은 소피가 나를 사랑하게 된 것이 바로 나의 냉정함과 거절 때문이라는 것이다. 만일 처음 이리저리 마주치던 때에 그녀 앞에서 내 눈이 번득였다면, 그때 내 눈에서 찾을 수 없어 죽도록 고통스러워했던 그 눈빛 탓에 그녀는 겁에 질려 날 밀어냈을 것이다. - P149

겁을 먹고 순종하는 프란츠의 모습을 보면서 나는 여자들을 통해 행복을 얻을 수 있다는 생각에서 더 멀어졌다. 소피가 거만하고 짜증스럽게 아주 사소한 친절만 베풀어도 프란츠가 마치 설탕을 받아먹는 강아지처럼 달려들던 모습을 떠올리면 아직도 연민이 느껴진다. - P166

"무서워하지 않는 건 나쁘다는 생각이 들 때가 많아요. 하지만 행복하기만 하다면." 그녀는 첼로의 저음처럼 늘 나를 감동시키는 투박하면서 부드러운 원래의 목소리로 말했다. "그럼 죽어도 괜찮을 것 같아요. 단 오분이라도 행복하다면 그건 신이 내려준 신호일 거예요 당신은 행복한가요? 에릭?" - P174

나는 감방의 죄수가 벽에 머리를 들이박듯이 그녀가 죽음을 피할 수 없다는 사실에 내 머리를 들이박았다. 나에게는 소피의 죽음보다 어떻게든 죽으려는 그녀의 고집이 더 끔찍했다. 나 보다 더 나은 사람이라면 멋진 방도를 찾아냈으리라는 생각도 들었지만, 어차피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내 능력에 대해 나는 아무런 환상 도 품고 있지 않았다. 소피가 죽으면 지나간 나의 젊음도 청산될 것이 고, 이 고장과 나 사이에 놓인 마지막 다리도 끊어질 것이다. 마침내 나는 그동안 내가 지켜보았던 죽음을, 마치 그 죽음이 소피의 처형에 정당성을 부여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차례로 떠올려보았다. 그런 다음 인간이라는 상품이 얼마나 하찮은 값밖에 갖지 못하는지 생각하면서, 바르너 방적공장 복도에서 차갑게 식은 어느 여자의 시체를 보았다 해도 별로 슬퍼하지 않았을 내가 쓸데없이 유난을 떨고 있다고 생각했다. - P223

그녀는 조금 가쁜 숨을 내쉬 었고, 나는 콘라드가 죽어갈 때 차라리 내 손으로 끝내주고 싶었듯이, 지금도 똑같다는 생각에 매달렸다. 나는 크리스마스 밤에 폭죽을 터뜨리며 무서워하는 어린애처럼 고개를 돌린 채로 방아쇠를 당겼다. 첫 발로 얼굴 한쪽이 날아갔고, 결국 그녀가 어떤 표정으로 죽음을 맞았는지 알 수 없었다. 두번째 총알로 모든 게 완수되었다. - P225

처음에는 소피가 이 임무를 나에게 맡긴 것이 사랑의 마지막 증거라고, 그 무엇보다 결정적인 증거라고 생각했다. 나중에 나는 그녀가 원한 것은 복수였음을, 나를 회한에 빠트리려는 것이었음을 깨달았다. 그녀의 계산은 정확했다. 아직까지도 나는 이따금 회한에 젖는다. 여자들을 상대하면 언제나 덫 에 걸려들게 된다. - P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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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나리자 2023-05-14 21:2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문학동네 소설 작품을 자주 만나시는 것 같아요.
전 아픈 뒤로 책이 잘 안 읽혀지네요.ㅎ 휴식모드가 길어지니 집중이 잘 안됩니다.
천천히 리듬을 찾아야겠지요. 벌써 5월 절반이나 흘러갔네요.
이달에도 왕성한 독서 이어가시길 바랄게요. 새파랑님.^^

새파랑 2023-05-15 09:27   좋아요 2 | URL
제가 고전파라서 ㅋ

맞습니다. 아프거나 바쁘거나 고민이 많으면 잘 읽히더라구요 ㅜㅜ

빨리 리듬을 찾으시길 바라겠습니다~!!
 

이제 절반 읽음


당신에게 부탁하고 싶은 것은 아직까지 내가 당신에게 부탁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은 너무도 힘들 게 써나갈 이 글을 한 줄도 빠뜨리지 말고 읽어달라는 거요. 삶을 사는 것도 힘들지만, 자기 삶을 설명하는 것은 더 어려운 일이라오. - P20

원래 예술은 열정으로 하여금 너무도 아름다운 언어를 말할 수 있게 해주지만, 그 말을 이해하기 위해선 그때의 나보다 훨씬 많은 경험이 필요했던 거요. 그 시절에 내가 조금씩 작곡해 놓은 곡들을 다시 본 적이 있소. 나름 봐줄 만하긴 한데, 당시에 내가 품었던 사념들에 비하면 훨씬 유치하다오. 원래 그런 법이오. 우리의 작품은 우리가 그것을 쓸 때면 이미 지나와버린 삶의 한 기간을 재현하기 때문이지. - P29

책 속엔 삶이 들어 있지 않소. 책 속에 있는 것은 삶이 타고 남은 재, 흔히들 인간적 경험이라고 부르는 바로 그거요. - P39

난 늘 죽는 것이 쉬우리라 생각했소. 내가 죽음을 생각하는 방식은 사랑을 상상하는 방식과 크게 다 르지 않았다오. 힘이 다 빠진 상태, 아마도 달콤할 패배이리라 생각했지. 그날 이후 사는 내내 그 두 가지 강박적 생각이 번갈아 나타났소 하나에 시달리면 다른 하나가 나타나서 낫게 해주면서 말이오. 하지만 그 어떤 추론도 두 가지 병에서 다 낫게 해주진 못했다오. - P44

난 조언을 구할 사람이 아무도 없었소, 금지된 성향의 첫번째 결과는 우리가 우리 자신 속에 갇히게 된다는 거요. 침묵하든지 아니면 공모자들에게만 이야기해야 하기 때문이오. 나 자신을 이겨내려고 애쓰 는 동안 고통스러웠던 건, 나에게 용기를 주는 사람도 연민을 품어주는 사람도 기대할 수 없다는 것, 진정한 선의가 누릴 자격이 있는 아주 약간의 존중이라도 베풀어줄 사람을 기대할 수 없다는 것이었소. - P55

제아무리 강렬한 감정이라 해도 얼마나 덧없는지 이미 절감한 터라, 소멸을 피할 수 없는, 어디로 가든 죽음에 걸려 있는 존재들과의 관계에서 영원하다고 할 만한 감정 을 끌어낼 수 없다는 걸 난 알고 있었다. 타인 안에 있는 것 중에서 우리의 감정을 흔드는 것들 역시 삶이 빌려준 것에 지나지 않지. 지금 나는 영혼도 육신과 똑같이 늙는다는 것을, 훌륭한 사람들에게도 영혼은 한 계절 동안만 꽃을 피운다는 것을, 젊음이 그렇듯이 그것은 하루살이 같은 짧은 기적일 뿐임을 절감하오. 그러니, 그대여, 그저 흘러가 버리는 것에 의지해봐야 무슨 소용이 있겠소. - P64

우리는 서로의 어린 시절에 대해 얘기할 정도가 되었소. 당신을 통해 난 어린 시절의 행복한 기억을 알게 되었고, 나를 통해 당신은 어린 시절의 슬픈 추억을 알게 되었지. 우리는 마치 우리의 과거를 둘로 나누어 살아온 듯 했소, 조심스럽게 오누이의 애정을 나누던 우리 관계에 시간이 흘러갈 때 마다 무언가가 더해졌고, 그때쯤 난 사람들이 우리 결혼할 사이로 본다는 것을 깨닫고 경악했소. - P89

그리고 꿈꾼다는 건 그대여, 바라는 것과는 다르다오. 그냥 꿈꾸는 걸로 만족하는거지. 꿈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기에 오히 려 더 감미롭게 언젠가 진짜로 그렇게 살아야 한다는 불안이 없으니 말이오. - P91

게다가 두 사람이 하나될 때 무 엇이 솟아오를지, 육체의 호감과 반감 중에서 어느게 나타날지 누가 알겠소 건전하지 못한 생각이었을 수도 있소. 하지만 그게 바로 내 생각이었다. - P95

우리는 상대를 불쌍히 여겨야만 하는 상황을 피하기 위해 잠든 척했소. 아니, 당신은 울었소. 당신은 내가 알아차리지 못하도록 최대한 소리를 죽여가며 울었고, 난 못 듣는 척했소. 눈물을 달래줄 수 없을 땐 차라리 모르는 척하는 게 나을 테니까. - P98

그대여, 우리는 삶이 우리를 변화시킨다고 믿지만, 그렇지 않다. 삶은 우리를 마멸시키고, 우리 안에서 마멸되는 것은 우리가 배워서 알게 된 것들이 오 난 전혀 변하지 않았소. 단지 나와 나 자신의 타고난 기질 사이에 사건들이 끼어들었을 뿐이오. 나는 이전의 나 그대로였고, 어쩌면, 환상과 믿음이 하나둘 스러져갈 때마다 우리 자신의 진정한 모습을 더 잘 알게 되니, 이전보다 더 깊숙하게 나 그대로였소. 수없이 노력하고 수없이 성의를 쏟았지만 결국 이전과 똑같은 나.. - P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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