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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멸 ㅣ 알베르토 모라비아 Alberto Moravia 시리즈 1
알베르토 모라비아 지음, 정란기 옮김 / 본북스 / 2019년 2월
평점 :
어떤 문제가 생겼을 때 그 문제의 원인을 나에게서 먼저 찾아야지, 타인에게서 먼저 찾다보면 문제는 해결되지 않는다. 특히 연인 사이의 문제일 경우에는 더욱 더 그렇지 않을까?
‘알베르토 모라비아‘의 <경멸>을 읽고 난 후 느낀 생각이다.
이 책은 주인공인 ˝리카르도˝를 중심으로 쓰여진 1인칭 시점의 소설이다. 그러다 보니 주인공 위주의 행동과 생각, 관찰이 묘사되고 그래서 더욱 그의 관점에서 상황을 보게 되고 이야기에 집중할 수 있었다. 완전 금방금방 읽히는 책. 하지만 내용은 결코 가볍지가 않았다.
˝리카르도˝는 극작가를 꿈꾸지만, 경제적 이유로 시나리오 작가로 일을 하고 있으며, 그의 아내인 ˝에밀리아˝를 위한다는 잘못된 생각으로 무리한 대출을 받아 집을 사게 되고, 더욱 궁핍해져서 시나리오 작가일을 계속할 수 밖에 없게 된다.
그러면서 영화 제작자인 ˝바티스타˝가 등장한 후 둘 사이에는 원인을 알 수 없는 불안감이 생긴다. ˝바티스타는 ˝에밀리아˝를 처음 본 순간부터 그녀에게 추근되지만, 나는 이를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자신을 도와달라는 ˝에밀리아˝의 신호를 무시하게 된다.
이후 나는 ˝에밀리아˝의 사랑이 식었다는 것을 느끼고, 그녀를 의심하며 왜 사랑이 식었는지 그녀를 추긍하게 된다. 하지만 그녀는 긍정하지도, 부정하지도 않으며 그 이유를 말하지 않는다. 하지만 결국 감정이 폭발하게 되고 ˝에밀리아˝는 나에게 이렇게 이야기 한다.
[난 당신을 경멸해. 이게 당신에 대한 내 마음이야. 이게 당신을 사랑하지 않게 된 이유야. 난 당신을 경멸해. 당신 몸이 닿을 때마다 언제나 몸서리쳤어. 진실을 말했어, 난 당신을 경멸해. 난 당신이 싫어!] 146페이지
이런 말을 듣고 나면 그 관계는 더이상 이전과 같은 관계로 절대 돌아갈 수 없다. 설령 어느정도 수준으로 회복한다 해도 앙금은 절대 사라지지 않는다.
이처럼 감정의 골이 깊어진 상태에서 나와 그녀, ˝바티스타˝, ˝레인골드˝는 ‘카프리 별장‘으로 같이 떠나게 되고, 결국 그곳에서 나는 ˝에밀리아˝의 어깨에 키스를 하는 ˝바티스타˝를 목격하게 되며, 이후 크나큰 관계의 전환과 상실을 경험하게 된다.
(이후 이야기는 스포일러가 될 수 있어서 생략)
둘의 사이는 분명 개선의 여지가 있었다. 최초 갈등의 시작이 결혼 2년차 부부의 권태일 수 도 있지만, 그들은 결코 소통하지 않았다. 서로가 서로를 불신하는 이유에 대해 이야기를 했더라면 아마 <경멸>은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야기를 하지 않았고, 둘 사이에는 벽이 생겼으며, 이는 ˝난 당신을 경멸해˝라는 돌이킬 수 없는 말로 표현되는 파국을 맞이하게 된다.
누구의 잘못일까? 확실한건 주인공인 ˝리카르도˝는 너무 보이는 것에만 신경을 쓰고, 보이지 않는 내면의 감정에 대해서는 신경을 쓰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는 ‘율리시스‘ 시나리오에 대한 그의 생각을 통해서도 드러나는데, 제작자인 ˝바티스타˝는 율리시스가 보여줄 수 있는 오락적인 즐거움을 이야기 하고, ˝레인골드˝는 율리시스의 내면에 숨겨진 의미를 해석하려 한다. 반면 ˝리카르도˝는 있는 보여지는 그대로의 ˝율리시스˝만을 고집하려 하며, 그 누구의 의견도 이해하거나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래서 ˝에밀리아˝의 마음은 ˝레인골드˝가 생각하는 ‘페넬로페‘ 에서 ˝바티스타˝가 생각하는 ‘페넬로페‘ 로 점점 바뀌게 된다.
(남편에 대한 경멸에서 바티스타의 쾌락으로 탈출)
또한 ˝리카르도˝는 자신의 꿈을 포기하고, 하기 싫어하는 일을 하는 이유를 아내인 ˝에밀리아˝ 때문이라 생각하고, 그녀가 도와달라는 신호를 보낼 때마다 이를 전혀 식하지 못하며, 자신의 경제권을 쥐고 있는 제작자인 ˝바티스타˝에게는 비굴한 모습을 보여주는 등 자기 위주로만 생각하고 행동하고 그녀의 믿음을 잃게된다. 다만 나만 그런 사실을 모른다. 어차피 설명해줬어도 몰랐을 거지만...
하지만 이러한 점들이 ˝에밀리아˝가 나를 경멸하게 된 주된 이유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녀가 나를 ‘경멸‘하는 이유는 나를 ‘경멸‘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경멸‘의 감정이 드는 그 자체가 ‘경멸‘의 이유였으며, 그래서 ˝리카르도˝가 아무리 그녀에게 ‘경멸‘의 이유를 물어봐도 ˝에밀리아˝에게서 그 이유를 들을 수 없었던 것이다.
만약 내가 ‘경멸‘의 이유를 그녀에게서 찾으려고 하지 않고, 나에게서 원인을 찾으려고 했었다면 어땠을까 라는 생각이 든다. 그러면 적어도 그런 비극은 없었을 텐데란 아쉬움이 남는다. 너무 충격적인 결말.
˝에밀리아˝도 분명 잘못이 있다. 좀 더 터놓고 이야기 했더라면 좋았을거라는 아쉬움이 있지만 이 책이 ˝리카르도˝의 1인칭 시점이기 때문에 그에 대한 관점 위주로 써보았다.
[˝동굴 안은 어둡지만 눈이 어둠에 익숙해지면 곧 보일거야˝] 319페이지
결국 ˝리카르도˝는 그녀를 떠나보내고 난 후에야 세상에 눈을 떴다...
순식간에 읽었지만 여운이 길게 남은 작품이다. 특히 ‘율리시스‘에 대한 새로운 해석과 이와 연계해서 풀어가는 이야기는 정말 놀라웠다. 이 책을 읽고나니 ‘호메로스‘의 <일리아스와 오딧세이>, 그리고 ‘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스>를 읽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또 읽을 책이 늘어만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