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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대왕 ㅣ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9
윌리엄 골딩 지음, 유종호 옮김 / 민음사 / 2002년 3월
평점 :
인간이 극한 상황에 처하게 된다면 이성적인 판단이 우선할까? 현실적인 판단이 우선할까? 그에 앞서서 과연 인간의 본성은 선한 걸까? 악한 걸까?
영국의 노벨문학상 수상자 ˝윌리엄 골딩˝의 첫 장편소설인 <파리 대왕>은 극한 상황에 처한 인간이 얼마나 잔인해 질 수 있는지 보여주는 작품이다. 세계대전이 한창인 시대를 배경으로, 영국 소년들이 탄 비행기가 격추되게 되고 열명 남짓한 소년들이 무인도로 추락하게 된다. 어른도 없다. 소녀도 없다. 오직 소년들만이 무인도로 떨어지게 된다.
소년들은 생존과 화합을 위해 투표를 통해 리더를 뽑게 되고, 열두 살인 ˝랠프˝가 선출된다. 리더십이 뛰어난 ˝랠프˝는 지적 능력이 뛰어난 ˝돼지소년˝과 함께 무인도에서 탈출하기 위해서는 자신들이 조난되었다는 신호를 보내는게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것을 인식하고 ‘봉화‘ 를 최우선 과제로 수행한다. 하지만 이에 대립하여 ˝잭˝이라는 소년이 이끄는 집단이 등장하게 되고, 이들은 자신들의 식욕과 정복욕을 충족하기 위해 맷돼지 사냥을 ‘봉화‘보다 우선하여 수행하려 한다.
[스스로를 돌아봐! 전부 몇 명이야? 그런데도 연기를 올리기 위해 불 하나 제대로 피워대지 못한단 말이야? 아직도 모르겠어? 불을 꺼뜨리게 되면 우리가 죽게 된다는 것을 깨닫지 못한단 말이야?] P.118
즉 소년들은 미래의 탈출이 자신들의 생존의 최우선이라는 이성적 판단을 하는 ˝랠프˝ 측과 현재의 욕구를 위한 근시안적인 판단을 하는 ˝잭˝ 측으로 양분되게 된다. 초반에는 엄연히 리더로 선출된 ˝랠프˝의 영향력이 컸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구성원들의 나태로 ˝랠프˝의 지시는 먹히지 않게 되고, 대부분의 소년들은 당장 자신들의 욕구를 충족시켜 줄 수 있는 ˝잭˝에게 돌아서게 된다.
이러한 상황과 더불어 무인도의 숲 속에서 거대한 괴물, ˝파리대왕˝을 보았다는 소문이 돌게 되고 소년들은 공포에 빠지게 된다. 정확한 실체가 확인되지는 않았지만 괴물이 존재할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 소년들은 큰 혼란에 빠지게 된다. 보이지 않은 공포, 이것은 아직 성숙하지 못한 인간들의 불안이 만들어낸 환상으로 무인도에 갇힌 소년들의 심리적 동요를 상징한다고 할 수 있다. 과연 괴물은 실제하는 걸까?
[그건 털이 많았어. 그 짐승의 머리 뒤로는 무엇인가 움직이는 것이 있었는데, 아마 날개인 모양이야. 게다가 그건 움직이고 있었어.] p.147
이러한 혼란의 틈 속에서 ‘불‘을 둘러싼 패권 다툼 끝에 ˝잭˝의 패거리들은 반대파인 ˝돼지소년˝과 ˝사이먼˝을 살해한다. 결국 실권을 장악한 ˝잭˝은 기존의 리더이자 자신의 사냥을 계속 반대하는 주인공 ˝랠프˝를 죽이려고 한다. 이제 혼자남게 된 ˝랠프˝는 살기 위해 ˝잭˝ 일당으로부터의 도주를 시작한다. ‘봉화‘도 꺼지고, 더이상 자기 편이 없는 ˝랠프˝는 자신을 죽이려는 ˝잭˝을 피해 살아남아 무사히 무인도를 탈출 할 수 있을까?
원래 책을 읽으면 밑줄을 많이 긋는데 이 책은 스토리가 흥미진진해서 밑줄 그을 시간 없이 책을 읽었다. 도대체 ‘파리대왕‘은 언제 나오는 거야? 라는 기대감이 책을 읽어나가는 원동력이었다.
다만 일부에서 말씀하신 번역에 문제가 있다는 말은 인정해야 할 것 같다. 약간 매끄럽지 않은 문장이 일부 있고, 실제로 자주 쓰지 않는 말들이 다수 나온다. 당장 떠오르는 단어는 ‘공지‘가 있는데, 이는 비어있는 땅을 의미하는 것 같았지만 잘 안쓰는 단어여서 어색했다. 그리고 ˝잭˝ 일당의 사냥꾼을 지칭하는 ‘오랑케‘라는 단어도 계속 나오는데 이게 적절한 번역인지 의문이 들었다. 도대체 ‘오랑케‘의 영단어는 무엇이었을까 궁금해졌다. 바바리안? 이 외에도 뭔가 상당히 어색한 느낌을 주는 단어들이 꽤 있었다.
그럼에도 이러한 번역 문제가 작품의 내용을 이해하거나 배경을 그리는 데에는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개인적으로이 책을 읽기 위한 팁을 드리자면 문장을 정독하기 보다는 전체적인 이야기의 흐름에 따라가면서 읽는게 좋을 것 같다.
극한상황에 처한 인간의 욕망, 비이성적인 행동 그리고 미지의 공포에 대한 불안을 섬세하게 그린 <파리대왕>은 냉혹한 현실주의가 판을 치는 현실세계를 축소판처럼 보여주는 작품이다. 해설을 보면 ˝인간 본성의 결함에서 사회의 결함의 근원을 찾아내려는 것˝ 이 작품의 주제라고 하는데, 어느정도 수긍이 간다. 또한 작품 곳곳에 다양한 상징들이 존재한다고 하니 이를 찾아보는 것도 책읽는 재미를 높여줄 것 같다. 소년들이 갖힌 무인도는 에덴동산을 상징한다고 한다.
PS 1. ˝랠프˝의 도주와 ˝잭˝ 일당의 추적, 그리고 해군 장교를 만나는 작품의 마지막 부분을 읽으면서 영화 <아프칼립토>가 떠올랐다. 아마 이 영화의 대본을 쓴 사람이 <파리 대왕>을 참고했나 보다.
PS 2. 이 책은 <변신>, <곤충극장>과 같은 곤충시리즈는 아닌 것으로 확인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