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세키의 전기(연애) 3부작 읽기 끝.
초반의 잔잔함과 다르게 후반의 떨림은 강하다. 그런데도 고요한 분위기는 계속 유지되는 신기한 작품.




"어떡해요" 하며 흐느껴 울었다. 소스케는 두 번째 충격을 남자답게 받아들였다. 차가운 몸뚱이가 재가 되고 그 재가 다시 검은 흙이 될 때까지 푸념 한마디 하지 않았다. 그러는 사이에 언제부터인가 두 사람 사이에 끼어 있던 그림자 같은 것도 점차 멀어졌고 머지않아 거의 사라져버렸다. - P169

"당신은 아이 못 가져"

"그건 왜죠?"

"당신은 남한테 몹쓸 짓을 한 적이 있어. 그 죄 때문에 벌을 받아서 아기는 절대 못 키워" - P176

소스케는 아주 짧았던 그때의 대화를 일일이 떠올릴 때마다 그 하나하나가 거의 무색이라고 해도 좋을 만큼 담백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그렇게 투명한 목소리가 어떻게 그렇게 두 사람의 미래를 새빨갛게 뒤덮었는지를 신기하게 여겼다. 지금은 그 붉은색도 세월이 흘러 옛날의 선명함을 잃어버렸다. 서로를 불태운 불꽃은 자연스럽게 변색되어 까매졌다. 두 사람의 생활은 이렇게 어둠 속에 가라앉았다.

- P186

소스케는 과거를 돌아보며 일의 경과를 거꾸로 되돌아보고는 그 담백한 대화가 자신들의 역사를 얼마나 짙게 채색했는지 가슴속으로 철저하게 음미하면 서 평범한 사건을 중대하게 변화시키는 운명의 힘을 두려워했다. - P187

소스케는 당시를 떠올릴 때마다 자연의 흐름이 거기서 뚝 멈추고 자신도 오요네도 순식간에 화석이 되어버렸다면 차라리 괴롭지 않았을 거라고 생각했다.

(차라리 그 순간에 멈추었더라면...) - P201

그들은 잔혹한 운명이 변덕을 부려 죄도 없는 두 사람을 급습하여 장난 삼아 함정에 빠뜨린 것을 원통해했다. - P202

소스케와 오요네의 일생을 어둡게 채색한 관계는 두 사람의 그림자를 흐릿하게 해 자신들이 어딘가 유령 같다는 생각을 품게 했다. 그들은 마음속 어느 부분에 남에게 보이지 않는 무서운 결핵성 균이 잠복해 있다는 것을 어렴풋이 자각하고 있으면서도 일부러 모른 척하는 얼굴로 서로를 대해왔다. - P223

고로쿠로부터 사카이의 동생, 그리고 만주, 몽골, 귀경, 야스이, 이런 대화의 흔적을 더듬어가면 갈수록 우연의 정도가 너무 심한 것 같았다. 그가 과거의 통한을 새롭게 하려고 보통 사람이 좀처럼 만날 수 없는 이런 우연을 맞닥뜨리게 하기 위해 수백, 수천 명의 사람 중에서 골라내야 할 정도의 인물이었나 하는 생각을 하니 소스케는 괴로웠다. 또한 화가 났다.

(운명의 장난이란...) - P227

오늘까지의 경과로 미루어보아 모든 상처를 아
물게 하는 것은 세월이라는 격언을 그는 자신의 경험으로 이끌어내 가슴 깊이 새기고 있었다. 그것이 그제 밤에 완전히 무너졌던 것이다. - P234

들어가기 쉬워도 나중에 막혀서 꼼짝하지 못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처음에는 오래 걸려도 마지막에는 굉장히 통쾌하게 해내는 사람도 있습니다. - P272

그 자신은 오랫동안 문 밖에 서 있어야 할 운명으로 태어난 사람 같았다. 그것은 어쩔 수 없었다. 하지만 어차피 지날 수 없는 문이라면 일부러 거기까지 가는 것은 모순이었다. 그는 뒤를 돌아보았다. 도저히 원래의 길로 다시 돌아갈 용기가 나지 않았다. 그는 앞을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견고한 문이 언제까지고 앞을 가로막고 있었다. 그는 문을 지나는 사람이 아니었다. 또한 문을 지나지 않아도 되는 사람도 아니었다. 요컨대 그는 문 아래에 옴짝달싹 못하고 서서 해가 지는 것을 기다려야 하는 불행한 사람이었다. - P277

"정말 다행이에요. 드디어 봄이 돼서" 하며 눈썹을 환하게 폈다. 소스케는 툇마루로 나가 길게 자란 손톱을 자르면서, "응, 하지만 또 금방 겨울이 오겠지" 하고 대답하며 고개를 숙인 채 가위를 움직였다.
- P2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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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반쯤 읽었는데 뭔가 감추어져 있는 분위기. 두 부부 사이에는 어떤 사건이 있었던 걸까,,


소스케 부부는 세상의 햇빛을 보지 못하는 사람이 견딜 수 없는 추위에 서로 껴안아 몸을 녹이는 식으로 서로를 의지하며 살았다. 어려울 때에는 언제든지 오요
네가 소스케에게, "하지만 어쩔 수 없어요" 하고 말했다.
소스케는 오요네에게, "참아야지 뭐" 하고 말했다.
두 사람 사이에는 체념이나 인내가 끊임없이 움직이고 있었으나 미래나 희망의 그림자는 거의 비치지 않는 듯이 보였다. - P48

"오늘 밤에는 오랜만에 논어를 읽었어" 하고 말했다.
"논어"에 뭔가 있어요?" 하고 오요네가 되묻자 소스케는, "아니, 아무것도 없어" 하고 대답했다. - P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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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10-10 23:2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1-10-11 09:31   URL
비밀 댓글입니다.
 

˝세상이 용서치 않을 거야.˝

˝세상이 아니겠지. 당신이 용서하지 않겠지?˝

조금 더 예민한 사람들이 있다. 그런 사람들은 다른 사람보다 생각이 깊고, 타인의 말과 행동에 많이 흔들리며, 사소한 일에도 의미를 부여한다. ˝다자이 오사무˝ 그리고 그의 분신이자 <인간실격>의 주인공인 ˝요조˝는 매우 예민한 사람이지 않았을까? 일반사람 보다 조금 더 예민했을 뿐 그들의 인생 이야기는 결코 우리의 이야기와 동떨어져 있지 않다.



이번에 읽은 <열린책들 35주년 세트 읽기> 열두번째 책은 ˝다자이 오사무˝의 <인간실격> 이다. 예전에 이미 읽은 책이지만 읽을때마다 한 사람의 아픔이 문장속에서 처절하게 느껴진다.


자신을 감추기 위해 광대짓을 하고, 사람들과 함께 있을때도 외로움을 느끼며, 인간의 거짓말에 대해 회의를 품고, 사람에 대한 공포로 쉽게 마음을 열지 못하지만 어쩌다 마음을 열었을때의 배신 등 다양한 아픈 경험을 통해 <인간실격>의 주인공 ˝요조˝는 글의 첫부분에 ‘참으로 수치스러운 삶을 살아왔습니다‘ 라고 고백하고 있다.

[나는 과연 행복한 것일까요. 나는 어렸을 때부터 다른 사람들에게 행복한 사람이라는 말을 정말 자주 들었는데, 나 자신은 언제나 지옥 같은 심정이었고, 오히려 나를 행복한 사람이라고 하는 사람들 쪽이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훨씬 더 안락한 듯 보였습니다.]  P.14



이 책을 읽고 크게 공감할 수 있었던 건 나 역시 ˝요조˝가 경험하고 느낀것과 별반 다를 바 없는 삶을 살았기 때문일 것이다. 정도의 차이가 있겠지만 나 역시 어느정도 가면을 쓰고 살고 있고, 사람과의 관계에 있어서 상처를 받으며, 때때로 타인이 두려울 때도 있다.

[나는 인간에 대한 공포감에 늘 버들버들 떨면서, 또 인간으로서의 자기 언행에 조금도 자신감을 갖지 못한 채 온갖 고뇌를 가슴속 작은 상자에 숨기고, 그 우울과 긴장감을 기를 쓰고 감추며, 오로지 천진난만한 낙천성을 가장하면서 점차 광대 짓만 하는 기괴한 사람으로 완성되어 갔습니다.]  P.17




그런데 많은 사람이 이런 경험을 가지고 있지 않을까? 어쩌면 <인간실격>이 인기가 많은 이유는  ˝요조˝의 감정이 결코 특별한게 아닌, 우리 내면에 있는 일반적인 감정이며, ˝다자이 오사무˝가 ˝요조˝를 통해 매우 강력하게 표현했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든다.


일반적인 사람들의 경우 인간관계에서  오는 상처와 아픔을 어느정도 받아들이고 치유하지만, 너무나 예민했던 ˝요조˝는 이를 극복하지 못하고 술과 약에 의존하게 되며 이는 결국 ‘인간실격‘으로 이어지게 된다.

[신에게 묻겠습니다. 저항하지 않는 것은 죄인가요? 호리키의 그 아리송하고 부드러운 미소에 나는 울었고, 판단도 저항도 잊은 채 차에 올라탔으며, 그리고 이곳에 따라와 미치광이 신세가 되었습니다. 지금 이곳에서 나간다고 해도 나는 역시 미치광이, 아니 폐인이라는 각인이 이마에 찍히게 되겠지요. 인간 실격. 이제 나는 완전히 인간이 아닙니다.]  P.137

‐---------------------------------------
지금 내게는 행복도 불행도 없습니다.
그저, 모든 것은 지나갑니다.
내가 지금까지 몸부림치면서 비명을 지르듯 처참하게 살아온 인간 세상에서 진리에 가깝다고 생각하는 딱 한 가지는 그것뿐입니다.
<그저, 모든 것은 지나갑니다.>
----------------------------  P.140




누가 그의 옆에서 진심으로 도와줬다면, 그의 예민한 마음을 보듬어 줬더라면 과연 ˝다자이 오사무˝와 ˝요조˝는 ‘인간실격‘이 되었을까? 혹시나 내가 그들을 만난다면 이렇게 이야기해 주고 싶다.

‘당신들만 그렇게 수치스러운 삶을 사는건 아니라고, 나 역시 당신들과 똑같다고. 당신들은 조금 더 예민할 뿐이라고‘



PS 1. 이렇게 열린책들 35주년 세트 열두번째 읽기를 끝냈다. 이제 남은 건 여덟권인데, 이중 이미 읽은 책은 5권 이고, 처음 읽게 되는 책은 3권이다.(지킬 박사와 하이드, 타임머신, 다섯 개의 오렌지 씨앗)

지금까지 읽은 책들 : 12권

MIDNIGHT(8권) : 도둑맞은 편지, 죽은 사람들, 비겟덩어리, 이방인, 변신, 6호 병동, 이반 일리치의 죽음, 인간실격

NOON(4권) : 노인과 바다, 행복한 왕자, 토니오 크뢰거, 푸른십자가


Ps 2. ˝다자이 오사무˝의 책은 지금까지 총 네권 읽었는데 다른 책들도 읽어봐야겠다. 찾아보니 그렇게 많지 않은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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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스 2021-10-10 08:29   좋아요 6 | 댓글달기 | URL
일본작가가 그리는 예미함은 결이 다른듯요
비수같은 느낌?

새파랑 2021-10-10 08:46   좋아요 4 | URL
그래서 그런 예민함이 궁금해서 계속 읽고 싶어지는 것 같아요. 감정 표현은 일본작가쪽에 공감이 갑니다 😅

독서괭 2021-10-10 08:57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와 열두권 클리어!! 미드나잇은 거의 끝나가네요.
<인간실격>은 예전에 읽을 때 크게 감명을 못 잗았는데, 지금 다시 읽으면 어떨지 궁금해요.
남은 8권도 화이팅입니다^^

새파랑 2021-10-10 09:05   좋아요 4 | URL
전 Noon 보다 Midnight 취향인것 같아요 ^^
<인간실격>은 좀 우울한(?) 사람에게 맞는 취향 같아요 ㅎㅎ 독서괭님과 함께 20권 완독 가겠습니다 😄

페넬로페 2021-10-10 09:20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일상에서 만나는 사람을 이해하기가 쉽지 않은데 소설을 읽어나가며 사람에 대한 이해와 공감능력을 배우는 것 같아요^^
열린책들 시리즈 열심히 읽으시는 새파랑님, 완독을 향해서 묵묵히 가시네요^^


새파랑 2021-10-10 10:06   좋아요 5 | URL
책을 통한 간접경험은 살아가면서 많은 도움이 되는것 같아요. 어제는 밖에서 논다고 열린책들 세트를 읽었어요 😆

청아 2021-10-10 10:23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새파랑님 말씀대로 누구에게나 어느정도씩 정체성의 혼란,가면의 삶에서 오는 괴리감이 있어서 요조가 고통스러울 수록 ‘나는 저정도는 아니어서 다행이야‘이런 만족감을 느끼는 듯 하네요! 오늘은 저도 한 권 끝내야하는데... 😳🤷‍♀️🤦‍♀️

새파랑 2021-10-10 10:52   좋아요 4 | URL
저도 ˝요조˝를 보면서 딱 미미님과 같은 생각이 들었어요. 저정도는 아니어서 다행이라는 😅
미미님 오늘 내일 해서 두권 끝낸다에 한표~!! 기계의 힘을 보여주세요^^

coolcat329 2021-10-10 12:50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아 인간실격을 읽어야 하는데요. 요조 이야기 나올 때마다 낄 수가 없어서요 😅😅😅

새파랑 2021-10-10 13:46   좋아요 4 | URL
아직 이책 안 읽으셨군요 ㅋ 쿨캣님은 좋아하실거 같은데~ 두껍지 않아서 하루면 읽으실 거에요 😆

페크pek0501 2021-10-10 13:35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이 순간도 지나가고 있어요. ^^

새파랑 2021-10-10 13:47   좋아요 3 | URL
그저 지나갈 뿐이라고 생각한다면 세상의 많은 고민중 절반은 줄어들거라 생각해요 ^^

stella.K 2021-10-10 18:37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이건 딴 얘긴데, 가수 요조가 여기서 이름을 땃겠다 싶군요.
저도 이거 한 질 샀는데 도스토옙스키 하나 읽고
딴짓하고 있습니다.
저것들이 나는 언제 읽어 줄 거냐고 째려보고 있는데
어림도 없습니다. 내가 마음이 동해야 읽지 아무 때나 읽니?
그러고 있습니다.ㅎㅎ

새파랑 2021-10-10 20:53   좋아요 5 | URL
제가 알기론 가수 요조가 이 책을 읽고 이름을 딴걸로 알고 있습니다 ^^
일단 샀다는게 중요한거죠~!! 시작이 반이니 절반 읽으신걸로 😆

막시무스 2021-10-10 20:16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저도 아주 오래전에 읽었는데 주인공 이름이 생각도 안나네요!ㅎ 가수 요조가 인간실격에서 유래했다는 중요한 정보를 얻고 갑니다.ㅎ 즐독 하시구요!ㅎ

새파랑 2021-10-10 20:54   좋아요 4 | URL
주인공이 ˝요조˝ 입니다 ~! 막시무스님 주말을 아주 즐겁게 보내신거 같아서 기쁘네요 ^^ 남은 내일 연휴도 잘 보내시길 바랍니다 😄

붕붕툐툐 2021-10-10 21:20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이 책 호불호 많이 갈리더라구요~ 저는 너무 재밌게 읽었는데 왜 주인공 이름이 요조인 줄도 모르는 거죠? 하~ 정말 이름 대충 읽기가 뽀록이 나는군요! 새파랑님 미드나잇 독파가 얼마 안 남았네요! 저도 미드나잇 시리즈가 더 취향이에요~ㅎㅎ

새파랑 2021-10-10 21:50   좋아요 2 | URL
호불호가 좀 갈리는데 저는 극호~!! 툐툐님도 야행성 이네요 ^^

서니데이 2021-10-10 21:43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다자이 오사무는 작품 말고 작가 생애도 소설 같습니다.
잘읽었습니다. 새파랑님, 좋은 하루 되세요.^^

새파랑 2021-10-10 21:51   좋아요 3 | URL
소설처럼 살다가 간 다자이 오사무~ 좀 안타깝긴 합니다 ㅜㅜ

mini74 2021-10-10 23:3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ㅎㅎㅎ 저 요조 좋아서 강아지 이름 지을때 잠시 고민했었어요. 새파랑님 소세키와 오사무를 종횡무진 ! 👍

새파랑 2021-10-11 09:29   좋아요 1 | URL
오늘까지만 일본 투어를 하고 내일부터는 다른 나라로 ^^ 요조라는 이름이 예쁜거 같아요. 중성적인 느낌도 들고~!!

희선 2021-10-12 02:2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제 만날 책 얼마 남지 않았네요 한번 읽은 것도 있다니... 누군가 그 사람을 이해는 못해도 있는대로 받아들여준다면 좀 낫기는 할 텐데... 하지만 요조나 다자이 오사무나 자신을 다 드러내지 않았겠습니다 누구나 가면 쓰고 다른 사람과 사귀고 사는 거 힘들죠


희선

새파랑 2021-10-12 07:14   좋아요 1 | URL
다자이 오사무가 정신병원에 갖힌 적이 있는데, 이 책이 그때 느낀 충격과 배신감이 반영된 작품이라고 하더라구요. 참 힘든 삶을 살아간 사람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ㅜㅜ 다음번에 뭘 읽을지 행복한 고민이 드네요 ^^
 

오늘은 간만에 열린책들 35주년 세트 읽기.
인간실격은 이번에 읽으면 세번째 읽는 건데 다시 읽어도 역시 너무 좋다.



<인간실격>
참으로 수치스러운 삶을 살아왔습니다. - P9

<인간실격>
나는 과연 행복한 것일까요. 나는 어렸을 때부터 다른 사람들에게 행복한 사람이라는 말을 정말 자주 들었는데, 나 자신은 언제나 지옥 같은 심정이었고, 오히려 나를 행복한 사람이라고 하는 사람들 쪽이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훨씬 더 안락한 듯 보였습니다.

(밝아 보이는 사람일수록 내면에 더 큰 어둠이 있는 사람들이 있다.) - P14

<인간실격>
나는 인간에 대한 공포감에 늘 버들버들 떨면서, 또 인간으로서의 자기 언행에 조금도 자신감을 갖지 못한 채 온갖 고뇌를 가슴속 작은 상자에 숨기고, 그 우울과 긴장감을 기를 쓰고 감추며, 오로지 천진난만한 낙천성을 가장하면서 점차 광대 짓만 하는 기괴한 사람으로 완성되어 갔습니다.

(자신을 감추기 위해 가면을 쓰는 사람이 많을까, 솔직히 맨 얼굴을 드러내는 사람이 많을까?) - P17

<인간실격>
하지만 나의 본성은 그런 장난질과는 거의 정반대였습니다. 그 무렵 나는 이미 하녀와 하인들로부터 애처로운 일을 배웠고, 당하기도 했습니다. 지금은 어린아이에게 하는 그런 짓거리는, 인간이 행할 수 있는 범죄 중에서 가장 추악하고 저급하며 잔혹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나는 참았습니다. 이렇게 인간의 본성을 또 하나 보았다는 기분마저 들어서 맥없이 웃고 말았습니다. - P23

<인간실격>
피차 거짓말을 하고, 그런데도 이상하게 아무 상처도 입지 않고, 서로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것조차 인식하지 못하는 것처럼, 실로 번듯하면서도 그야말로 깔끔하고 밝고 뒤끝없는 불신의 예가 인간 생활에 충만해 있는 것처럼 생각됩니다. 그러나 나는 서로를 속인다는 것 자체에는 별 관심이 없습니다. 나 역시 광대 짓을 하면서 아침부터 밤까지 사람을 속이고 있으니까요. - P25

<인간실격>
그리고 아무에게도 호소하지 못하는 나의 그 고독한 냄새를 수많은 여성이 본능적으로 맡은 탓에, 훗날 갖가지로 이용당하는 요인의 하나로 작용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도 듭니다. 다시 말해서 나는 여자들에게 사랑의 비밀을 지킬 수 있는 남자였던 셈이지요.

(입이 무거운 남자) - P26

<인간실격>
나는 아네사뿐만 아니라 여자는 대체 어떤 기분으로 살아가는 지를 생각하는 게 지렁이의 마음을 더듬는 것보다 어렵고, 성가시고, 징글징글하게 느껴졌습니다. 다만 나는 여자가 그렇게 갑자기 울음을 터뜨리는 경우, 뭐든 단것을 입에 넣어 주면 그걸 먹고 기분이 좋아진다는 사실만큼은 어려서부터의 경험으로 잘 알고 있었습니다.

(이성의 마음을 이해하는건 어느 시대나 어려운 난제인 것 같다.) - P36

<인간실격>
신이 나서 일어납니다. 심부름을 시키는 것은 여자를 실망시키는 일이 절대 아닙니다. 오히려 남자가 뭔가를 부탁하면 여자는 기뻐한다는 것을 나는 정확하게 알고 있었지요. - P58

<인간실격>
‘외로워요.‘
여자가 그 한마디를 중얼거려 주면, 나는 천만 마디의 신세타령보다 한결 공감하게 될 것이라고 기대했지만, 이 세상 어느 여자들에게서도 그 한마디를 끝내 듣지 못한 것을 나는 기이하고 이상한 일이라 여기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여자는 외롭다라는 말은 하지 않았지만, 말 못 하는 처절한 외로움을 3센티미터 정도 너비의 기류처럼 온몸에 지니고 있었어요. - P95

<인간실격>

"세상이 용서치 않을 거야."

"세상이 아니겠지. 당신이 용서하지 않겠지?"

하지만 그때 이후로 나는 세상이란 개인이 아닐까 하는 사상 비슷한 생각을 갖게 되었습니다.

(당신이 말하는 세상은 당신 개인일 뿐이다.) - P97

<인간실격>
죄와 벌, 도스토옙스키. 그 생각이 언뜻 뇌리의 한 끝을 스치고 지나가, 퍼뜩 놀랐습니다. 혹시 그 도스토옙스키가 죄와 벌을 시노님이라 생각지 않고 앤터님으로 여겼다.면? 죄와 벌, 절대 서로 통하지 않는 것, 물과 기름처럼 섞이지 않는 것. 죄와 벌을 앤터로 생각한 도스토옙스키의 녹조, 썩은 연못, 엉킨 실타래 속…… 아아, 이제 좀 알겠다. - P120

<인간실격>

신에게 묻겠습니다. 신뢰는 죄인가요? - P122

<인간실격>
신에게 묻겠습니다. 저항하지 않는 것은 죄인가요? 호리키의 그 아리송하고 부드러운 미소에 나는 울었고,
판단도 저항도 잊은 채 차에 올라탔으며, 그리고 이곳에
따라와 미치광이 신세가 되었습니다. 지금 이곳에서 나간
다고 해도 나는 역시 미치광이, 아니 폐인이라는 각인이
이마에 찍히게 되겠지요.인간, 실격. 이제 나는, 완전히, 인간이 아닙니다.

(인간실격...) - P137

<인간실격>

지금내게는 행복도 불행도 없습니다.

그저, 모든 것은 지나갑니다.

내가 지금까지 몸부림치면서 비명을 지르듯 처참하게
살아온 인간) 세상에서 진리에 가깝다고 생각하는 딱 한
가지는 그것뿐입니다.

그저, 모든 것은 지나갑니다.

나는 올해 스물일곱 살이 됩니다. 흰머리가 부쩍 늘어
사람들이 대개 마흔 살 이상으로 봅니다. - P1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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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니데이 2021-10-09 23:16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책 사진을 보다가, 뒤늦게 새파랑님의 손을 보았습니다.
새파랑님, 즐거운 주말 보내세요.^^

새파랑 2021-10-10 00:40   좋아요 2 | URL
ㅋ 한번 밖에서 책사진을 찍어보고 싶었습니다~!!

바람돌이 2021-10-10 02:5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인간실격 한번도 안 읽었는데 세번째라구요? 역시 새파랑님. ^^

새파랑 2021-10-10 08:26   좋아요 0 | URL
인간실격 완전 공감되고 좋아요. 좀 우울한 분위기지만 ^^
 

내가 배짱이 없었던 걸까? 너무 늦었던 걸까? 아니면 그녀가 나빴던 걸까? 혹시 처음부터 이룰 수 없었던 꿈이었던 걸까?


대학생이 되어 고향을 떠난다는건 이제 성인이 되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어른이라 불리기에는 아직은 뭔가가 부족하게 느껴진다. 그건 아마 경험이 없기 때문이 아닐까?

[결국 갈 수 있는 데까지 가보지 않았으니 짐작할 수가 없다. 과감하게 좀 더 가봤다면 좋았을걸, 하지만 두렵다. 헤어질 때 ˝당신은 참 배짱이 없는 분이로군요˝라고 했을 때는 정말 놀랐다. 23년의 약점이 한꺼번에 드러난 듯한 심정이었다. 부모라도 그렇게 정곡을찌르지는 못할 것이다.]  P.25



산시로에게 도쿄는 처음이었고, 대학교도 처음이었고, 수업도 처음이었고, 특히 사랑도 처음이었다. 그래서 첫눈에 호감을 느낀 여성 ˝미네코˝는 한없이 높아보였고, 학식이 높은 교수이자 연적으로 생각한 ˝노노미야˝는 ˝산시로˝보다 한발짝 앞서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산시로는 멍하니 있었다. 곧 조그만 목소리로 ˝모순이다˝라고 말했다. 대학의 분위기와 저 여자가 모순인지, 저 색채와 저 눈빛이 모순인지, 저 여자를 보고 기차에서 만난 여자를 떠올린 게 모순인지, 아니면 미래에 대한 자신의 방침이 두 갈래로 모순되어 있는 건지, 또는 굉장히 기쁜 것에 대해 두려움을 느끼는 것이 모순인지.. 시골 출신의 청년에게는 이 모든 것이 이해되지 않았다. 그저 왠지 모순된 것만 같았다.]  P.46



도쿄에 살게 된 ˝산시로˝에게는 세 가지의 세계가 생겼다. 첫번째 세계는 그가 멀리 떠나온 고향의 세계, 두번째 세계는 그가 현재 다니고 있는 대학의 세계, 마지막 세번째 세계는 아름다운 여성이 있는 세계다. 하지만 하늘처럼 높아서 고개를 들고 바라만 봐야 했던 세번째 세계에 ˝산시로˝는 안착할 수는 없었을까?

[세 번째 세계는 봄처럼 찬연히 흔들리고 있다. 전등이 있다. 은수저가 있다. 환성이 있다. 우스운 이야기가 있다. 거품이 이는 샴페인 잔이 있다. 그리고 그 모든 것 중 으뜸가는 것으로 아름다운 여성이 있다. 산시로에게는 이 세계가 가장 의미심장한 세계다. 이 세계는 바로 코앞에 있다. 다만 다가가기가 힘들다.]  P.107



˝산시로˝는 결코 배짱이 없지 않았다. 어떻게든 기회를 만들어서 ˝미네코˝를 만나려고 했고 그녀와 둘만의 시간을 갖기 위해 노력했으며, 약간의 망설임이 있긴 했지만 상상만으로 그치지 않고 행동으로 옮겼다. 아직 러브의 경험이 없었지만  그녀가 ˝산시로˝에게 보여주는 태도와 말들을 통해 그녀 역시 자신에게 호감이 있다는 걸 느끼고 과감하게 그의 마음을 그녀에게 전한다.

--‐------‐--------
˝오늘은 하라구치 씨한테 무슨 볼일이라도 있었던 건가요?˝

˝아니요, 볼일은 없었습니다. ˝

˝그럼 그냥 놀러 온 건가요?˝

˝아니요, 놀러 온 건 아닙니다.˝

˝그럼 왜 온 건데요?˝

산시로는 그 순간을 포착했다.

˝당신을 만나러 온 겁니다.˝ 
--‐------‐--------  P.284



하지만 그의 고백이 늦었던 걸까? 아니면 처음부터 그의 고백과는 상관없이 ˝미네코˝가 ˝산시로˝에게 느낀 감정은 단순한 연민이었던 걸까? <Pity‘s akin to love>, 연민은 사랑에 가깝지만, 결코 사랑은 아닌 것이다.


결국 ˝산시로˝는 그녀가 이야기 했던 Stray sheep,  미아가 되어 버리고 그렇게 이야기는 끝난다. 그렇게 갑자기 ˝산시로˝에 대한 마음을 접고 한순간 떠나버린 ˝미네코˝는 도대체 어떤 마음이었을까? 그녀의 자조적인 말처럼 자신을 정말 죄인이라 생각했을까?

--‐------‐--------
˝어떤가, <숲 속의 여인>은?˝

˝<숲 속의 여인>이라는 제목이 안 좋네.˝

˝그럼, 뭐라고 하면 좋겠나?˝

산시로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저 입속으로, 스트레이 십, 스트레이 십, 이라고 되풀이할 뿐이었다.
--‐------‐--------  P.335



한편의 멋진 연애소설이자 성장소설인 ˝산시로˝는 문장속에 숨겨져 있는 여백이 많은걸 생각하게 하고, 예측하지 못한 결말과 함께 강한 여운을 남기는 마무리를 보여준다. 그래서 책을 다 읽고 나서 한동안 멍하니 있을 수 밖에 없었다. ˝소세키˝의 내공을 온전히 느낄 수 있었던 작품.


이 책을 포함해서 지금까지 ˝소세키˝의 여섯 작품을 읽었는데, 개인적으로 <산시로>가 가장 좋은 것 같다.

다음 책으로는 전기 3부작의 마지막 작품인 <문>을 읽고, 그의 다른 작품들도 모두 완독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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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ni74 2021-10-08 20:57   좋아요 6 | 댓글달기 | URL
고딩때 야자 끝나고 친구랑 이어폰 하나씩 나눠 끼고 걸으며 듣던 음악이에요. 이 음악이 떠오르는 책이라니 무지 기대가 됩니다 ~~

새파랑 2021-10-08 21:06   좋아요 6 | URL
전 초딩때~!! 정확히 매칭되는건 아니지만 그냥 떠올랐습니다. 바보같은 산시로 안타까워요 ㅜㅜ

scott 2021-10-08 21:01   좋아요 6 | 댓글달기 | URL
마지막 문단 하루키옹의 스푸트닉 연인들이 떠오르네요 ^^

새파랑 2021-10-08 21:08   좋아요 6 | URL
와 스푸트니크 연인들~! 왠지 전반적인 느낌이 비슷한것 같아요~!!

페넬로페 2021-10-08 21:21   좋아요 6 | 댓글달기 | URL
새파랑님의 글로 산시로를 다시 생각해볼 수 있었어요~~그와 미네코에 대해서도요. 이 소설엔 여러가지 생각할 거리가 많아서 좋았던 것 같아요
젊은 시절의 나도 돌아볼 수 있었고요^^
오랜만에 새파랑님 리뷰에 읽은 책에 대해 쓸 수 있어 좋네요 ㅎㅎ

새파랑 2021-10-08 21:32   좋아요 6 | URL
최근에 페넬로페님이 리뷰를 너무 완벽하게 쓰셔서 전 간단히 제가 좋아하는 부분만 썼어요. 사랑 이야기 말고 다른것도 많이 들어있는데 ^^ 이 책 너무 좋네요~!!

청아 2021-10-08 22:05   좋아요 6 | 댓글달기 | URL
새파랑님 가장 좋았다고 언급도 하셨지만 노래까지 곁들여 주신것 보니 무척 좋으셨나봐요ㅎㅎ🤭
게다가 이승환의<너를 향한 마음>이라니! 꼭꼭 읽어봐야겠어요(거의 매일하는 약속 이지만 진심🤦‍♀️)저 페넬로페님께 독서슬럼프 전염되었나봐요.책도 따라 읽고 슬럼프도 따라하기😅ㅎㅎ

새파랑 2021-10-08 22:25   좋아요 6 | URL
미미님에게도 슬럼프가 있으시다니 왠지 인간(?)처럼 느껴져서 더 좋은것 같아요 😄
저는 미미님 보관함 따라 하는중인데 ㅎㅎ 이 책 두꺼워 보이는데 잘 읽혀서 금방 읽어요. 강추합니다~!! 저 이승환 1집, 2집 완전 좋아해요 ^^

행복한책읽기 2021-10-08 23:03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이젠 소세키까지 거의 섭렵. 와. 진짜 범접 불가 독서력. 정녕 닮고 싶어요.^^ 읽으면서 딱 일본풍이라고 느껴졌어요. 신기도 하죠.^^;;

새파랑 2021-10-08 23:51   좋아요 1 | URL
아직 소세키 작품은 많이 못읽었는데😅
신기하게 나라마다 그 분위기가 있는거 같아요. 일본이랑 러시이는 그게 확 느껴지더라구요~

그레이스 2021-10-09 01:1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와 ~
전작읽기 함께 하시겠네요
저 지금 <문>리뷰 올리고 와서 이 글 읽고 있어요.
저도 산시로가 기억에 많이 남는 작품이예요
회화적인 느낌이 너무 좋았어요~^^

새파랑 2021-10-09 08:15   좋아요 3 | URL
그레이스님과 페넬로페님 따라서 소세키 전작 읽기 동참 입니다 ^^
전 특히 산시로라는 캐릭터가 너무 좋았어요~!!

그레이스 2021-10-09 08:17   좋아요 2 | URL
환영합니다~~~

독서괭 2021-10-09 01:5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와우 새파랑님도 소세키 마니아시군요. 여섯권! 이제 여섯 권 더 읽으시면 완독인가요? 화이팅입니다^^

새파랑 2021-10-09 08:18   좋아요 1 | URL
제가 현암사 책 뒤에 보니까 소세키 장편은 총 14편 이더라구요~ 이제 여덟권 더? 읽고싶은 책은 점점 많아지는데 시간은 없고 😅

2021-10-09 01:5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1-10-09 08:13   URL
비밀 댓글입니다.

희선 2021-10-09 03:0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이번에 보신 《산시로》가 가장 좋으셨군요 그런 걸 만나서 좋았겠습니다 친구도 그렇지만 좋아하는 사람 마음을 잡는 건 더 어려울지도 모르겠네요

새파랑 님 오늘 한글날이고 주말이네요 주말 편안하게 보내세요


희선

새파랑 2021-10-09 08:26   좋아요 2 | URL
마음을 아는것도 어렵고 잡는것도 어려운 것 같아요. 책을 보면 주인공의 마음은 이해가 되는데 상대방의 행동은 의문 투성이 입니다 ㅎㅎ 해피앤딩이 아니어서 더 좋았던 작품 😊

bookholic 2021-10-09 09:09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저도 해봐야겠어요.. 읽은 책과 어울리는 노래 한 곡..^^

새파랑 2021-10-09 11:42   좋아요 1 | URL
이제 첫 문장, 끝 문장에 어울리는 노래까지 볼 수 있겠군요 ^^ 기대됩니다~!!